79. 대공세.
“아아, 따분해라.”
뒤누아 영지.
직선으로 곧게 뻗은 고풍스러운 양식의 뒤누아 성은 성이라기보다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 따분이라니. 온 대륙이 전쟁통인 와중에, 명색이 한 나라의 공작이라는 자가….”
“이 전쟁이 왜 50년이 넘게 이어지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요 하이람?”
알리에노르의 푸념에 뭐라 입을 연 하이람이었지만, 고저없이 이어지는 무기질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분하다면, 차라리 기사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지 그랬나? 중부전선에 그대가 나갔다면,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예술품과도 같은 뒤누아 성에 손님으로 와 있는 벨커스 가문의 가주, 하이람 벨커스.
나무라는 듯한 그의 말에 쿡쿡 웃어 보인 알리에노르가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피곤한 일이 생기잖아요? 당신들과 로렌츠 사이의 진흙탕 사움에 나까지 끼어들게 하지 마세요. 하이람.”
“이해가 되지 않는군. 제국의 2대 공작이 이런 중요할 때 제국을 지키지 않는 건가?”
하이람이 그렇게 묻자 밤하늘과도 같은 검푸른 머리칼을 넘긴 알리에노르 공작이 입가를 비틀었다.
“제가 제국을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제국이 날 보호해야죠.”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가 빙긋 웃어보이자 그것을 바라보는 하이람 백작은 쓰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제국이 뒤누아를 보호한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로렌츠가 지배하는 로렌 지방처럼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식민지 개척, 유지를 담당하며 부를 축척한 벨커스와는 달리 제국의 사업에도 손을 댄 것이 없다.
단지 제국의 건국 초기부터 함께였다는 이유만으로, 공작위와 어마어마한 황실 지원금을 확보한 공작가.
‘천하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준다는 것은…. 뭔가가 있어. 황제와 뒤누아의 인간들만 공유하는, 무언가가.’
대가없는 선의는 없으며, 이유 없는 악의도 없다.
그의 평생에 걸친 지론을 떠올린 하이람은 날카로운 눈으로 눈앞에 있는 뒤누아 공작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 제안은 어찌 할 생각인가.”
이윽고 그가 입을 연 것은 눈앞에 있는 차가 다 식었을 때 쯤이었다.
“글쎄요. 저희 입장에서야 달콤한 제안이긴 한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수많은 기사, 귀공자들의 사진과 인적사항. 그곳에 적혀 있는 것은 자신과 벨커스 측 인사와의 정략결혼과 그에 따른 양 가문의 이익.
그리고 앞으로 있을 두 가문간의 공조에 관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클로드 로렌츠는 이미 승부수를 던졌소. 그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제국의 귀족사회에 대격변을 일으킬 사건에 대해 논하는데도 불구하고 알리에노르 공작의 태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왜?’
따분한 얼굴 그대로 서류를 뒤적거리는 알리에노르를 보며 벨커스는 상념에 잠겼다.
‘2대 공작 중 한 축이 급부상한다면, 반대편에 있는 자는 도태되기 마련. 분명 이 상황에서 더 급박한 것은 같은 황제파인 뒤누아 가문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이람은 알리에노르 공작을 회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케인 로렌츠가 제국의 2인자로 급부상한 순간, 세 가문의 힘의 균형은 깨졌소. 이젠 그가 우리 모두를 죽이거나, 우리가 그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그렇게 말하는 하이람은 잠시 바라본 알레이노르는 슬며시 입가를 비틀었다.
진득한 악의를 바탕으로 깔린 비웃음이었다.
“둘 다 아니라면, 황제 폐하께서 우릴 모두 죽일 테니 말이죠?”
그렇게 알리에노르가 황제를 입에 담은 순간, 하이람 백작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농담이라. 이 급박한 상황에 그딴 걸 할 여유가 남아있단 말이지?’
능구렁이 같은 그녀의 말투에 속이 뒤틀리는 듯 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상대는 제국의 2대 공작.
그녀가 지니는 정치적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다.
‘벨커스가 한 세대에 거쳐 얻으려 했던 공작가라는 위명과 황제와의 독대 권한. 그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하이람은 애써 표정을 고친 뒤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안한 사항에 변화는 없소. 혼인이 성사된다면, 벨커스의 기사들이 뒤누아 가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것이오. 또한….”
말을 더 이으려 한 하이람이었지만, 그보다도 알리에노르의 대답이 더 빨랐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단호한 거절.
주먹을 꽉 쥔 하이람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벨커스의 손을 뿌리치시겠다?”
“도구로써 연병할 바에야, 공작으로써 죽을겁니다. 대답이 되었는지요?”
뱀과 같은 웃음. 그것을 본 하이람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복을 챙겼다.
협상은 결렬. 벨커스와 뒤누아 가문 사이에 있던 거래들도 오늘로 끝이었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에 한 행동이겠지만…. 후회할거요. 반드시.”
그렇게 말한 뒤 저택을 떠난 하이람 백작을 바라보는 알리에노르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늙은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가문이었으면 이미 은퇴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상대가 벨커스 백작이긴 하나, 내용 자체에는 흠이 없었습니다.”
명예는 있으나 실권은 없는 뒤누아. 그리고 신흥귀족의 압도적인 지지를 가지고 있으나, 태생적 한계에 부딪혀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벨커스.
서로간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로렌츠의 정치적 위상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을 터였다.
“벨커스와 공동으로 진행하던 사업들마저 백지화하면서까지, 이 결혼을 거절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의 질문에 알리에노르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략결혼이잖아요? 난 그런 거 싫어요.”
자신의 주인이 웃는 얼굴로 대답할 때는, 거짓말을 할 때였다.
“아가씨….”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은 황홀한 표정. 그것을 본 늙은 집사는 나지막이 한숨 쉴 뿐이었다.
“집사님?”
“예. 말씀하시시오.”
저 얼굴을 한 자신의 주인은 막을 수 없다.
오랫동안 그녀를 모시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미천한 기사와 저 같은 공작이 결혼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집사의 되물음에 알리에노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분이 제 낭군님이 되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소, 광소. 이윽고 점차 녹아내리는 얼굴을 한 알리에노르 공작이 황홀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감싸 쥐며 말했다.
“평생 유리 속에 가둬서, 몸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영원히 사랑해줄 텐데!”
집사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해봤자 지금의 주인에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파비앙 집사님.”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내리깐 집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 공세가 끝나면, 무도회를 한번 열까 하는데, 추진해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를 보며 집사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전투의 결과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무도회를 준비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런지….”
“아뇨. 괜찮아요.”
집사의 우려를 일축한 알리에노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공세. 어차피 제국이 이길 테니까요.”
***
빰빠바밤-!
중부 전선기지의 아침.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지난밤부터 분주하게 준비하던 선봉대의 출정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불사르는 충성스러운 기사단이여!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자신의 연설에 도취되기라도 한 듯 열성적으로 외치는 가르드 황자의 모습과 그것을 열심히 사진기에 담고 있는 제국신문사의 기자들.
‘가르드 황자, 전쟁에 승부수를 던지다!’
‘붉은 사자! 고공행진!’
…등등의 찬양과 프로파간다고 가득한 신문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에 자신과 자신의 기체가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특히 저런 양아치 새끼라면 더더욱.’
지난 날 가르드 황자의 행동을 떠올린 얀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어나라! 제국을 위하여! 나 가르드 반 바일사르가 그대들의 앞길을 축복하노라! 싸워라! 그리고 이겨서 돌아오라!”
“하, 축복은 니미.”
그 꼴을 보며 짧게 내뱉은 얀은 모니터의 양 옆에 보이는 선봉대의 구성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자유기사, 군소귀족, 그리고 로렌츠 출신의 기사들 위주의 편성.
“벨커스와 그 심복이 아닌 이들은, 선봉으로 나가 죽으라는 인사로군.”
불편한 표정으로 출정식을 바라보고 있는 벨커스 측 고위인사들을 바라보며 얀은 피식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중도파 인사들 또한 이 행사에 참여했을 터,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신호를 보내는 건 가르드 황자에게 있어서도 좋은 게 아닐 텐데 말이야.’
정치는 수 싸움. 자기편을 많이 만들수록 유리해지는 게임이라고 한다.
‘하이람. 그 자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그걸 해내고 있었어.’
신흥귀족 답지 않은 진중한 모습과 칼 같은 법도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는 하이람에 비해, 가르드의 방식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완전한 승리가 확정된 것이 아닌 이상, 가르드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분노한 반대파를 결집시키고, 중도파를 등 돌리게 만들 위험성이 있었다.
‘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으니.’
내빈석에서 표정을 굳힌 중도파 인사들과 분노에 가득 찬 로렌츠 기사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얀은 자신의 정치 스승인 렌이 말해준 사실을 복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봉대가 만일 진짜 공적을 세우고 돌아오기라도 하면, 벨커스 일파는 그 공적에 수저 하나 얹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군.”
중부 전선에 로렌츠 기사들이 대거 몰려든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새로운 로렌츠 공작을 뒷받침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로렌츠의 기사들.
그들을 위한 최적의 무대가 준비된 셈이었다.
“자! 제국의 기사들이여! 출정이다!”
가르드의 한 마디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요새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약 120대의 콜로서스.
“살아서 돌아와라!”
“알프라이아에게 죽음을!”
“엘프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수많은 콜로서스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형형색색 가문의 인장을 새긴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부대 마크를 제외한 어떠한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이질적인 콜로서스.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기동. 순항모드로 이동 개시.]
글레이프니르 또한 그들의 행렬에 동참한 채, 저 멀리 보이는 알프라이아의 요새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