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중부 평원 전투(1)
쿠르르르!
기차 화물칸에 묶여 이송되는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는 얀은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 바닥에 비벼 껐다.
“무게가 무거우니 옮기는 것도 고역이군.”
“전선기지에 방치하면 곧바로 다른 황자들의 기술자들이 기술 공유랍시고 달려들 테니, 싫어도 가지고 다녀야죠.”
수도 정비창에서 글레이프니르의 팔을 기록하던 연구원들의 모습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부대원들, 그리고 전쟁물자를 싣고 온 철도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적갈색 황무지.
매서운 찬바람에 한 줌 물기마저 말라버린, 바위로 된 사막의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철도는, 제국과 이 중부 전선기지를 이어주는 젖줄과도 같은 시설이었다.
“벨커스 기사단 21번 콜로서스 부대는 64번 정비창으로 이동해주십시오!”
“현재 정비중인 콜로서스는 약 172대! 40대가 추가로 정비 완료되어 복귀합니다!”
-11보병사단 사령관님! 서부 사령관님께서 호출하십니다!
“보급 사령관님 명령이다! 보급물자는 벨커스 기사단에게 우선 배분한다! 서둘러! 움직여 이 새끼들아!”
수만, 수십만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부전선기지는 무기와 철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콜로서스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놀라운 듯 휘파람소리를 냈다.
“이야~ 이게 다 콜로서스야?”
“제국에 있는 콜로서스는 중부 전선에 다 모여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정찰을 마친 페이지 콜로서스가 은폐용 경량장갑을 떼어내는 것과 동시에 정비용 콜로서스 골격이 새 장갑을 씌우기 시작했다.
어깨 갑주 부분에 새겨진 것은 벨커스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허, 우리 입장에선 호랑이굴이군요.”
정비창, 정찰대, 포병대, 돌격포 지원대대…. 수천 대가 넘게 모여 있는 콜로서스의 약 절반가량이 벨커스의 인장을 어깨에 새기고 있었다.
“루브라-바일사르 식민지에 파견할 예정이었던 기사단과, 하이람의 측근들. 그리고 벨커스에게 콜로서스를 지원받은 자유기사들을 전부 끌어 모은 거지.”
“식민지를 통제할 기사단이 없다면, 지금 그곳은….”
“로렌츠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 정말로 결투 뿐이었는 줄 알았나?”
식민지로 향하는 바자르 협곡과 가장 가까운 영지가 로렌츠의 영토인 로렌 지방.
식민지에서 제국으로 넘어오는 불법이민자와 범죄자, 그리고 반동분자들을 막아오던 것은 원래 벨커스였다.
그렇지만 그가 중부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는 순간,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로렌 지방.
케인의 고향이었다.
“아무리 가문의 기사들이지만, 제국군이 아닙니까? 일개 백작이 독단으로 병력을 움직이는데, 황제 폐하께서 그걸 두고 보셨다기엔….”
“두고 보셨을 리 없지. 아바마마께선 알고서 묵인하신 걸세.”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은 군복 상의에 훈장과 약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클라우스 황자였다.
“훈장으로 갑옷이라도 만드십니까?”
“가르드 형님이 주최한 의전행사일세. 벨커스 신입기사들의 사열식에 참석해서 하루 종일 박수만 치고 왔지.”
최전방에서 의전이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수행원에게 외투를 맡기는 클라우스를 보며 얀은 고개를 내저었다.
“로렌츠 가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일부러 묵인하신 걸세. 그 결과가 지금의 벨커스가문이고.”
“폐하의 예상보다 벨커스의 성장이 더 빨랐다는 말이군요.”
“기사의 수가 문제였지.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쓰는 건지, 일 년에 수백 명이 넘는 기사를 배출하고 있어. 마치 기사를 만들어내는 공장처럼.”
“공장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뭔가를 떠올린 클라우스 황자가 얀에게 물었다.
“그래서, 보내준 무기는 어떤가? 얀 중위.”
“중계지점에서 실험은 끝마쳤고, 적응훈련중입니다. 근데 신뢰성이 보증된 게 확실합니까?”
“드워프들이 보증한 거라면 믿어도 되네. 심지어 그들이 죽고 못 사는 ‘손님’의 부탁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클라우스 황자를 보며 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홀스터에 꽂혀 있는 권총, 그리고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배에 둘러맨 소총은 여타 다른 부대원들이 사용하는 총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목제가 아닌 검은 색의 처음 보는 물질로 이루어진 총들. 나무보다도 훨씬 가벼움과 동시에 더 견고했다.
“향상성 몰리브덴 합금이라고 하더군. 잔스카르의 기술이겠지.”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제국군 탄종과도 호환되니 보급에도 문제가 없을 테지요.”
“새로 지급한 다섯 기는?”
“사용은 가능합니다. 이번 작전에서 테스트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케인이 내민 지도를 바라본 얀이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낮선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허이구, 소문이 자자한 형벌부대 출신 기사잖아? 이런데서 얼굴을 다 보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클라우스 황자보가는 색이 더 진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르드 형님.”
클라우스의 한 마디에 얀이 그를 향해 짧게 목례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내가 가르드 황자다.”
그렇게 말하며 얀의 눈앞에 멈춰선 가르드는 잠시 동안 얀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야. 너 허리에 문제 있냐?”
“무슨 말씀이신…!”
얀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뻐억!
가르드 황자의 무릎이 얀의 복부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불의의 공격, 거기에 마력이 가득 담긴 발차기에, 얀의 몸이 앞으로 꺾였다.
“크윽!?”
“클라우스 녀석이 좋게 봐준다고 황족이 쥐 좆으로 보여? 어딜 천박한 형벌부대 구더기 새끼가, 제국 2황자와 얼굴을 맞추려 들어? 어!?”
그래. 이런 녀석이었군.
황위 계승권 2위, 붉은 사자 가르드.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챈 얀은 마른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인 방금과는 달리,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야. 너….”
“몰라 봬서 송구합니다. 2황자님. 기사 얀 베르쿠트입니다.”
다시 한 번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그와 얼굴을 맞대는 얀.
그것을 본 가르드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이 새끼가!”
그렇게 외치며 주먹을 휘두르는 가르드.
그렇지만 이미 얀의 왼쪽 눈에 설치된 닐의 전투 보조 프로그램이 그 궤적을 읽어낸 뒤였다.
[운동패턴 분석 완료.]
‘없어도 다 보인다.’
부웅-!
목표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때린 가르드의 주먹. 이를 뿌득 갈아붙인 가르드가 으르렁거리듯, 얀을 향해 말했다.
“이 새끼가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뭐야!”
그렇게 말하자 얀은 태연한 표정으로 응할 뿐이었다.
“2황자님은 재밌으십니까? 전 재미없는데.”
“이 새끼가 근데…!”
“형님. 거기까지 하시지요.”
가르드 황자가 분에 못 이겨 그렇게 소리치며 달려들려는 순간,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클라우스 황자였다.
“제국 기사는 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중위는 그걸 지켰을 뿐이고요.”
“하! 기생집 부랑아 새끼가 겁도 없이…!”
그렇게 이를 갈아붙이며 주먹을 들어 올리려던 가르드의 손이 우뚝 멈췄다.
“거기까집니다. 가르드 황자. 제국 황족의 이름에 먹칠을 할 속셈입니까?”
클라우스의 앞을 막아선 케인의 한 마디. 그리고 그의 어깨에 공작위의 인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케인 로렌츠…! 이제 네가 로렌츠 공작이라 이거냐?”
“부당한 폭력은 황족으로써의 도리가 아닙니다. 체통을 지키세요. 가르드 황자.”
이전과 같은 느긋한 모습이 아닌, 공작으로써의 근엄한 한 마디.
가르드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기사 신분의 부하가 아닌,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자.
실질적인 제국의 2인자였다.
“씨발!”
씹어뱉듯이 그렇게 말한 가르드가 혀를 찼지만, 그 이상의 폭거는 없었다.
“내가 명령한 작전, 실패하면 너와 네 버러지들은 다 죽여 버릴 테다. 알겠어?!”
“실패하면 어차피 죽습니다. 그러라고 주신 임무 아니었습니까?”
“건방진 새끼가 끝까지!”
가르드 황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공작님.”
“진짜 하지 말게. 중압감 때문에 속이 더부룩할 정도야.”
멀어지는 가르드 황자를 바라본 케인은 그렇게 말하며 멋쩍은 듯이 웃었다.
한숨을 쉰 클라우스 황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얀에게 말했다.
“형님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지. 보다시피 형님이 좀….”
“좀이 아닌데요. 보통 양아치 새끼가 아닙니다.”
“풉!”
신랄한 얀의 한마디에 뭔가 말을 하려던 클라우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양아치라!”
다행히 이 말은 전해지지 않았는지, 가르드 황자나 그를 보좌하는 벨커스 기사들에게서 불호령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얕잡아보는 것 아닌가? 그래도 명색이 제 2황자일 텐데 말이야.”
“대단하긴 합니다. 저런 애새끼 비위를 맞춰가면서 계승권과 세력을 저렇게 불려놓은 하이람이 말이죠.”
그렇게 말하자 킥킥거리던 클라우스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역시, 제대로 봤군 그래.”
허영심과 폭력성으로 똘똘 뭉친 황실의 문제아인 가르드.
그를 어릴 때부터 보필하며 2황자의 자리까지 올려놓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이람 벨커스의 수완이었다.
일반 제국민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전장에서의 용맹만을 부각하며, 철저하게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모습.
‘아이린이 입술만 비틀어도 나가떨어지겠군.’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못한 무릎과 엉성하기 짝이 없는 주먹. 자기감정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날뛰는 것을 바라본 얀이 내린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요.”
“뭐가 말인가?”
얀의 중얼거림에 클라우스가 되묻자 얀의 입이 열렸다.
“하이람 정도 되는 자가 자기 입지를 올리고 싶었다면, 다른 대안은 얼마 들지 많지 않습니까?”
그걸 들은 클라우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연합한다고 하면 다른 우수한 계승권자들이 있을 테니 말일세.”
“그럼에도 굳이 저 양아치를 지원한다는 것은….”
“자신보다 우수한 상관은 필요 없다는 뜻이지.”
클라우스의 한 마디에 얀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르드가 지금 그대로 황위에 앉는다면, 그는 사실상 벨커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뿐.
사실상 제국을 손에 넣는 것은 하이람이 될 것이 자명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가르드 황자 본인 뿐, 이미 그것을 알아챈 제국의 귀족사회는 그런 하이람의 행보에 찬동하는 신흥귀족과, 거기에 반대하는 원로귀족파로 분열된 상태였다.
“하이람은, 굉장히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군요.”
“그래. 제국 전체를 휘어잡기 위한 그림이지.”
얀의 한 마디에 답변한 것은 클라우스 황자가 아닌 케인이었다.
“자. 준비하지. 작전은 다음 주. 그때까지 부대원들을 철저히 준비시키게.”
당부와 염려가 섞인 케인의 한 마디에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