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늙은 용, 뱀, 그리고 나비(2)
“공작 전하를 몰라 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것은 로렌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2대 공작가, 뒤누아 가문의 가주.
그녀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얀이 짧게 목례했다.
기사인 자신이 몸을 숙이는 것은 황제 뿐. 그것을 본 알리에노르 역시 싱긋 웃으며 얀의 인사를 받았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여인이 공작가의 가주라는 것에.”
‘놀라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생각한 얀이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절 찾으셨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충 둘러대는 얀의 말에 두 손바닥을 맞대며 천진하게 웃는 뒤누아 여공작.
나른하게 늘어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를 녹아들게 하는 마성을 품고 있었다.
‘벨커스라는 뱀을 피했더니, 다른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군.’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듯한 목소리에 이를 악문 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렌은 조용히 얀의 등 뒤로 숨었다.
“어머? 뒤에 계신 레이디는 누구신가요?”
그것을 바라본 알리에노르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어보이자 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와 그녀를 향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디아나, 렌입니다.”
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가문. 그렇지만 렌을 바라본 알리에노르는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머! 디아나 영애라니, 정말 행운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알리에노르 여공작이 얀의 등 뒤에 있는 렌의 손을 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눈동자도 투명하고, 머리칼도, 팔다리의 곡선도, 정말 아름다워요 디아나 양!”
‘뭔가 칭찬하는 게 아니라, 탐색하는 느낌인데.’
위화감이 느껴지는 웃음소리가 불안한지, 렌이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의 누 손을 꽉 쥔 알리에노르는 쉽사리 렌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
참다못한 렌이 입을 열려 하는 순간, 그녀의 말을 끊고 알리에노르의 끈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정말, 너무 예뻐서! 새장 속에 넣어서 간직하고 싶어요! 박제해 놓고 계속 바라보고 싶을 정도에요! 영원히!”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의 표정을 본 얀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씨발, 미쳤군.’
누가 들으면 기겁할만한 그녀의 말에 얀이 속으로 혀를 찼다.
계속되는 질문이 거북한 것인지, 점점 더 움츠러드는 렌을 보며 불안감을 느낀 얀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디아나 양은 사람과 대화하는 게 서툴러서….”
“아~ 그런가요?”
얀의 한마디를 들은 알리에노르 여공작은 더 미련이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달려들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반응이었다.
“예. 성격인지라….”
“성격이라기보단,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릴 인간이라고 인정하지도 않고. 그러니 사람과 대화하는 건 서투를 수도 있죠. 그렇죠, 렌?”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평이하게 이어지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얀의 몸이 굳었다.
그 말을 들은 렌의 몸 역시.
‘무…. 슨?’
“천 년을 기다린 주인님을 드디어 찾았네요? 다행이에요. 렌 양.”
얀의 표정이 굳었다. 이미 아군이 아닌 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렇지만 알리에노르는 그것마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유지한 채 얀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렌. 이 여자….”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 얀이었지만, 렌의 표정 역시 균열이 가 있었다.
“몰라. 내 데이터베이스에 저런 인물은 없어. 뒤누아 가문은 귀족명부에 이름만 올릴 뿐, 영지 외부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
베일에 싸인 공작이란 말이지.
천하의 렌을 당황하게 만들고, 동시에 불안하게 만든 알리에노르가 이번에는 얀의 얼굴을 살폈다.
“저기….”
“네에?”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며 빙그레 웃는 알리에노르의 얼굴을 본 얀은 마치 벌레가 온 몸을 훑고 가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와아~!”
이윽고 탄성을 내지르는 알리에노르 공작은 아주 아름다운 것을 봤다는 듯이 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 저랑 똑 같은 눈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닐의 음성이 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해당 개체의 안구에 이식된 임플란트 및 혈액 내부의 나노머신을 확인.]
‘…뭐?’
닐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은 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알리에노르 공작.
한쪽 눈만을 이식한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양쪽 눈 전체가 기묘한 형태를 하고있었다.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 즉, 그녀는….
“만나고 싶었어요. 얀 베르쿠트. 1번이 선택한 사람.”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 공작이 얀의 목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모두 실패했어요. 2번부터 99번까지. 전부 나쁜 인간의 욕망에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부서지고, 빼앗기고, 능욕당하고, 갈라지고…!”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말도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즉, 당신도 그런 인간들 중 하나라는 거잖아.”
점차 이성을 잃은 듯 빨라지는 그녀의 말을 얀의 차가운 목소리가 잘라냈다.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들춰내는 듯한, 신랄한 한마디였다.
“하아~!”
얀은 공작위를 가신 귀족을 향해 가차없이 그렇게 쏘아붙혔다. 다른 귀족이라면 불경하다면서 항의하거나, 기사를 시켜 결투를 신청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얀은 차라리 그런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얀의 그 말을 들은 알리에노르의 얼굴에는 당혹감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히, 히히…! 히히히…!”
오히려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것은 희열. 검고 탁한 욕망이 채워지는 쾌감에 그녀의 표정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지.’
“맞아요! 가뒀어요! 유리 속에 넣어 장식했어요! 놔두는 것도 죽이는 것도 버, 범하는 것도 아까워서…! 너, 너무 아까워서! 그래서…! 다음엔 뭘 장식해볼까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철컥.
얀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온 몸을 배배 꼬는 알리에노르 공작의 눈은 렌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런 그녀의 턱에 순식간에 얀의 홀스터에서 뽑힌 권총의 총구가 닿았다.
“손 치워. 그리고 렌한테서 떨어져.”
짧고 굵은 위협. 그렇지만 얀의 총구를 바라보는 알리에노르는 얼굴을 붉힌 채 그 총구를 붙잡았다.
“그거 아세요? 턱을 쏘면, 뇌가 안 뚫릴 수도 있대요. 저희 집사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붙잡은 얀의 총구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받쳐 드는 알리에노르.
이윽고 천천히 올라간 얀의 총구는 어느 새 그녀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자, 이제 쏘시면 되요.”
“이 미친새끼….”
자신의 이마에 겨누어진 총구를 붇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알리에노르 공작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지금 안 쏘시면 전 언제 렌 양을 노릴지 몰라요? 당신의 천사를 잡아갈 거에요! 그러니 어서요! 지금 쏘시면…!”
‘마음 같아선 진짜 당기고 싶네.’
재촉하듯 그렇게 외치며 얀의 총구를 이마에 댄 채 희열에 몸을 떠는 알리에노르 공작을 본 얀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친 뒤,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저 징그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아…!”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자신의 권총을 바라보는 알리에노르 공작에게 얀이 짜증난다는 듯이 내뱉었다.
“일어나십시오.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돌발행동이 시작된 순간부터 끝없이 주변을 살피던 얀이 한숨을 내쉬며 꿇어앉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안 죽이세요? 저 진짜 위험한 사람인데?”
“당신을 죽이는 게 훨씬 더 위험합니다. 자살하실 거면 혼자 하십쇼.”
그렇게 말한 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으려는 알리에노르 공작을 다시 일으켰다.
“얀 중위, 숙소에 안가고 뭐하고 있었나?”
얀과 그의 옆에 선 알리에노르 공작 그리고 렌을 향해 다가온 것은 연회를 마치고 나온 케인이었다.
“아, 단장님. 이 분은….”
그렇게 말하며 알리에노르를 설명하려는 얀이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 광기에 싸여있던 알리에노르 여공작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베일에 싸인 그녀가 하이람과 같은 마차에 탔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케인은 얀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 중요인물.’
얀의 신호를 알아들은 케인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쉰 후 알리에노르를 향해 예를 갖추며 말을 걸었다.
“로렌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을 여쭐 수 있을지요.”
그런 케인을 향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알리에노르 공작의 모습은 연극 속 귀부인과 같이 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뒤누아 공작가의 가주, 알리에노르 라 뒤누아라고 합니다. 명망 있는 로렌츠 공자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 뒤누아, 가주님이라고 하셧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말조차 나오지 않는 것인지, 케인은 체면도 잊은 채 되물었다.
그것이 재밌는지 쿡쿡 웃어 보인 알리에노르 공작은 케인을 향해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이 분을 만나 뵙고 싶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몰래 찾아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아닙니다. 미리 준비를 갖추지 못한 본가의 책임이 더 크니까요.”
알리에노르가 내민 로렌츠 가문의 초대장을 받아든 케인은 한숨 섞인 대답과 함께 그녀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얀 중위. 몸은 좀 괜찮나?”
“원래부터 괜찮았습니다.”
‘저 여자 때문에 없던 피로가 생겨난 느낌이지만 말이지.’
자신을 향해 싱긋 미소지은 뒤 연회장으로 걸어가는 알리에노르 공작을 바라보며, 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벨커스 백작가와 뒤누아 가문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두 가문의 가주가 같은 마차에….”
“그리고 저 여자, 정상이 아닙니다. 미쳤어요.”
그녀의 엉망진창으로 녹아내린 얼굴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래 염두에 두지. 힘들겠지만 조금만 힘내주게. 자네도 호출됐어.”
“고위 귀족들의 회의에, 제가 말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얀을 향해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 교국에서 훈장을 전달받았지?”
“예.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얀은 아이린의 오빠, 아이락의 시체에서 갈무리한 훈장을 보였다.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건 괜찮네. 훈장 수여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에 관해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케인이 할 말을 짐작한 얀의 표정이 깊어졌다.
“영지는 둘째고. 임무가 내려왔군요.”
그 말을 들은 케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부전선에 대규모 공세가 예정되었어. 자네와 87독립중대가 선봉에 서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