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로렌츠 공작(1)
“아이락은 결투로 사망. 비델을 포함한 벨커스의 다섯 기사는 작전 중 발굴단을 호위하다가 명예롭게 전사. 황자 클라우스의 이름으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서신을 다 읽는 것과 동시에 와락 구겨버린 하이람이 그것을 책상 한 가운데에 내리쳤다.
“도대체 왜! 클라우스 황자가 켈트 교국에 나타난 거야! 그리고 아무도 그걸 도중에 보고하지 않다니!”
책상에 떨어진 구겨진 편지보다도 더욱 일그러진 얼굴을 한 하이람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떨고 있는 전령을 향해 일갈했다.
황위 계승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보고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케, 켈트 교국은 알프라이아 이상으로 단절된 국가입니다. 섣불리 접선을 시도했다간 들킬 위험이…!”
“그 위험이 두려워 벨커스의 기사 다섯을 사지로 내몰았단 말이다! 이 내가!”
쿠오오오-!
벨커스 저택의 지하감옥.
연락을 담당한 직속 전령은 자신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하이람의 마력을 버티지 못한 채 울컥, 피를 쏟아내었다.
“숨이 끊어졌습니다.”
“제길!”
전방배치를 좌천쯤으로 알고 있는 족속들. 저들의 무사안일주의 때문에 기사 다섯을 잃었다는 생각에 하이람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얀 베르쿠트. 설마 이렇게까지 벨커스를 자극할 줄이야. 변방의 이름 없는 기사가 천하의 벨커스를…!”
이로써 벨커스는 다섯 기사를 잃고, 로렌츠는 교국과 접선한 기사를 영입하게 된 셈이다.
황제파와 벨커스 파로 이분되어 있는 제국의 정세에, 로렌츠라는 제 3자가 끼어들게 된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성과가 로렌츠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케인 로렌츠를 변방에 보내는 게 아니었군. 이렇게 된다면, 은기사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튀어나온 격이니….”
가슴은 뜨겁게.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하이람은 서둘러 케르단 전선에 배치할 기사들의 명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 분기에 본가에 입적한 이들만 스물.
벨커스의 이름과 전폭적인지지 아래, 전장에서의 그들의 세력은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유의미한 손실은 아니라는 것이군. 적의 세가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 벨커스의 위명을 넘기에는 한참 부족할 따름이지.”
그렇게 혼잣말하며 자신의 책상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는 벨커스 백작.
푸른색의 기사 조각상들이 온 국토에 퍼져있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사이, 노크소리와 함께 그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음? 서신이라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는 줄 알았다만.”
뜻밖의 소식에 의아한 듯이 되묻는 하이람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집사가 그에게 서신을 건넸다.
“…허, 이것 봐라?”
받아든 서신의 뒷면.
그곳에 찍힌 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벨커스 백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클로드 로렌츠. 늙은 뱀이 용을 만들 속셈이군.”
“그게 무슨…?”
주인의 입에서 현 로렌츠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의아한 듯이 되묻는 집사를 향해 웃어 보인 하이람이 그에게 초대장을 보였다.
“초대장일세. 클로드 로렌츠, 현 로렌츠 공작 자신이 보낸 조의문과 함께 말이지.”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의문이 새겨진 초대장이라면, 장례식이었다. 그러나 발신인으로 새겨져 있는 것은 아들인 케인 로렌츠가 아닌, 사망자 본인.
자신의 장례식을 열고,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심지어 적대 진영, 신흥귀족파의 필두인 벨커스 백작가에게까지?
“가주님. 이건….”
“도발일세. 그리고 동시에 로렌츠 공작의 선언이기도 하지.”
그렇게 말한 하이람이 표정을 굳힌 채 몸을 일으켰다.
“집사장. 상복을 준비해주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서.”
“알겠습니다. 그럼 호위로는….”
“아니. 호위는 필요 없네.”
집사장의 말을 그렇게 끊은 로렌츠가 씨익 웃음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 로렌츠 공작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데, 부하들 뒤에 숨어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게 되뇌인 하이람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로렌츠 가문의 저택이 붉은 빛을 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
“흐아압-!”
교국에서 케르단 전선기지로 귀환하는 데에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교국을 왔다 갔다 한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은 지도 없이도 교국과 전선기지를 드나들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얀과 클라우스가 케르단 전선기지에 도착한 지 3일.
그레이하운드 중대 막사에서는 청아한 기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스텝 더 앞으로 당겨. 네 수준에서 어설프게 거리를 재면, 상대는 곧바로 들어와. 순식간에 무너진다.”
“하앗-!”
“좋아. 두 라운드 더 하고 휴식한다. 체력 관리해. 쓰러지면 죽인다.”
“예!”
교정될 때까지 이뤄지는 훈련과 폭력에 가까운 피드백. 십대 후반의 여자아이에게는 살인적인 일정이었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얀도, 그것을 받아내는 아이린도 한 마디 불만 없이 묵묵히 훈련을 견뎌내고 있었다.
캉-!
청량한 검명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 아이린의 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련장 한가운데에 아이린이 들고있던 검이 푹, 하고 꽂혔다.
“죄, 죄송합니다!”
“음? 뭐가?”
검을 놓치자마자 고개를 숙이는 아이린의 행동에 얀이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전투 중 검을 놓는 것은 기사의 수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가운데에 박힌 자신의 검을 보며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아이린을 보며 얀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검을 놓치면 뭐, 결투에서 지나?”
“…예?”
황망하게 되묻는 아이린을 보며 얀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검 다시 잡고 덤벼봐. 마지막 라운드니까 체력 아끼지 말고, 전력으로.”
그렇게 말한 뒤 검을 고쳐 쥐는 얀을 향해 눈을 빛낸 아이린이 달려들었다.
“하압!”
캉!
정면을 향한 아이린의 검격을 받아낸 얀은 잠시 힘을 재는 듯 몇 번 눈을 굴린 뒤….
끼리릭!
“어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검을 놓아버린 뒤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 들어갔다.
온 신경을 힘겨루기에 집중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이린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뻐억!
“크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뤄진 정권에 아이린이 침음성을 냈다.
마력으로 강화한 그녀의 몸이 크게 요동치며 마른 숨을 토해냈다.
‘이 정도로…!’
그러나 이번에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얀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아이린. 그렇지만….
“자. 이걸로 너 죽었다.”
그렇게 말하는 얀의 다른 손에는 이미 단검이 쥐어져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어, 어느새…!”
“니가 검 안 놓겠답시고 나한테서 눈 돌린 사이에.”
“…!”
얀의 한마디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감각이 아이린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뭐, 단장님 말로는 제대로 검을 배운 기사들한테는 안 먹히는 전술이라던데, 요즘 거기까지 하는 기사는 거의 없어서.”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푼 얀이 아이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긴장이 풀린 그녀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검을 놔서 이길 것 같다 싶으면 놔야지. 미련하게 잡고 있어봐야 개죽음이야.”
형식을 따르되, 매몰되지 마라.
투박한 방식이긴 했으나, 대련이나 결투상황이 아닌, 실제 전장을 오가며 살아남은 이의 조언은 짧은 한 마디 이상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오, 끝나셨습니까?”
“대련이 점점 길어지는데, 이러다가 우리도 따라잡히는 거 아닙니까?”
훈련 일과를 마치고 온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얀을 향해 몇 마디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넸다.
“너희 중 1할 정도는 따라잡았을 거다. 니들도 다음 임무까지 몸 만들어놔. 아니면 죽어.”
“하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휘적휘적 걸어가는 대원들을 바라보는 아이린에게 얀이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아이린. 넌 오늘부로 정식 종자다. 제복 주문 해 놨으니까 갈아입고 와.”
“네? 아, 알겠습니다!”
얀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린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정식 종자! 드디어!’
아이린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얀은 이윽고 그녀의 복부를 때린 오른팔을 어루만졌다.
“허, 그 짧은 시간에 카운터라니, 진짜 기사는 역시 다른데.”
모두가 말한다.
형벌부대의 동변상련으로, 동정심으로 임명된 종자라고.
얀은 그걸 부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것은 오히려 아이린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얀은 절대로 동정심만으로 사람을 들이는 이가 아니다.
그는 아이린에게서 재능을 봤고, 그렇기에 자신의 옆으로 들인 것이다.
“중대장님. 황자님 호출입니다.”
“어. 금방 가지.”
멀리서 들린 단델의 목소리에 답한 얀은 클라우스 황자가 기다리고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기, 기사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비델과 그 휘하 기사들이 사라진 지금, 얀과 글레이프니르는 케르단 전선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사였다.
기지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얀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어, 왔나?”
“예. 왔습니다.”
짧은 환대에 짧은 인사로 답한 얀을 바라보며 클라우스 황자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정말, 볼 때마다 참신하게 불경한 친구로군.”
“직속상관께 배운 게 이것뿐입니다.”
“하, 케인 그 친구가 격이 없긴 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큭큭, 웃음 짓던 클라우스 황자가 얀을 향해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초대장. 정확히는 조의문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데 저 같은 사람한테 그런 걸 보냅니까?”
얀은 그렇게 말하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장례식을 하는 건 알 바가 아닌데, 자신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무슨 저의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청첩장의 뒷면을 바라보는 순간, 얀의 표정은 방금 전 이상으로 이상하게 구겨졌다.
“누구긴. 자네 직속상관, 케인 로렌츠 경이지.”
“….”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인 로렌츠 공작인가? 자기 장례식을 직접 연다니, 희극이 따로 없군. 그렇지 않나 얀 중위?”
그렇게 말하면서도 클라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편을….”
“이 친구가 날 뭘로 보고, 이미 다 수배해 놨네. 여기 ,명단에 적힌 이들과 후딱 다녀오게.”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의 손에는 단델과 렌, 아이린의 이름이 적힌 서류가 놓여있었다.
“황자님은 참석 안하십니까?”
그렇게 묻는 얀을 향해 웃어 보인 황자가 창 밖에 있는 87독립중대의 막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드워프 유랑단에게 특별히 주문한 게 있어서 말이지. 자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이쪽도 준비가 끝날 걸세.”
클라우스 황자는 그렇게 말한 뒤, 얀을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녀오게. 새 로렌츠 공작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