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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70화 (70/186)

70화 교국의 진실.

‘얀이 알려주면, 애들은 다 따분하다고 자는 거 아니야? 꺄하하하!’

몽롱한 의식 속,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얀은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났어?”

그런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새하얀 소녀.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건만, 자신을 바라보는 렌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닐이 자율기동으로 장벽 앞까지 이동했어. 구조대와 함께.”

“벨커스 놈들의 시신은?”

“중대원들이 처리. 증거는 없어.”

그렇게 말하자 안심한 듯, 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목덜미에 끼워져 있는 연결장치를 뽑아내고 엉망으로 산발한 머리를 뒤로 넘긴 얀이 조종석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맞는 교국의 찬바람이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주며, 꿈속의 몽롱함에 파묻혀있던 얀을 현실로 끌어들였다.

“몸 상태. 전보다는 호전됐어. 그렇지만….”

“알아. 하이람을 죽이기 전까진, 무리할 생각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얀은 자신을 바라보는 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감정에 먹히지 마.’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의 감각.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감각이 떠올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렌.”

그렇지만 얀은 애써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얀이 자신을 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의아한 듯이 얀을 쳐다보는 렌. 그녀를 잠시 돌아본 얀은 입을 앙다문 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그녀에게 말했다.

“그…. 고마웠어. 여러 가지로.”

“….”

그렇게 말한 뒤 얀은 곧바로 기체 밖으로 몸을 옮겼다.

“…어?”

잠시 동안 움직임이 없던 렌이 뒤늦게 얀의 한 마디에 반응했다.

[생체단말의 반응지연을 확인. 시스템 검사를 권장.]

그러나 그 순간, 이미 얀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렌이 망연하게 그 자리에 앉아있자, 나지막한 닐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시끄러워.”

자신을 놀리는 듯한 닐의 말에 그렇게 답한 렌은 곧바로 몸을 날려 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파일럿을 떠나보낸 글레이프니르의 시선에 비친 것은 깨어난 중대장을 환영하는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웃음 짓는 얀의 얼굴이었다.

***

“돌아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국의 조사단이 수정도시에서 건진 수확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정도시의 실체를 확인한 것 만으로도 엄청난 쾌거일진데, 그 수정도시를 뒤덮은 물질의 표본, 지도, 심지어 그곳에서 나온 방어 프로그램, 핏불 테리어의 잔해까지 입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부탁하셨던 유해입니다.”

그렇게 말을 흐린 얀의 옆으로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상자를 가져왔다.

마치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져 있는 유골들.

곳곳에 튀어나온 낡은 법복은 그들 중 몇몇이 고위 추기경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투 상황이었기에 관리에 신경 쓰지는 못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그건 저희 수도사분들께서 처리해주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어린 교황, 켈트 2세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유골들 중 하나를 들어보였다.

“성역으로 향하는 길은 누군가에겐 고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었겠죠.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렇게 말하며 짧은 기도를 마친 교황은 사람을 불러 유골들을 정중히 별실로 옮기라 지시했다.

이제 저것들은 골격과 골밀도 등을 측정한 뒤, 원래의 형태를 되찾아 매장되겠지.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얀이 교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찾는 것 또한 그곳에 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랬습니다.”

“전 관련된 정보를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되묻는 얀을 잠시 바라본 교황은 흐릿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뇨. 찾았습니다. 황자께서 알아서 처리하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교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얀이었지만, 교황은 이내 생각났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교황이 아닌 개인으로써, 부탁을 들어준 친구에게 답례를 해야겠군요.”

“…친구? 제가, 말씀이십니까?”

싱긋 웃으면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교황을 보며 얀이 입가를 비틀었다.

제국의 기사와 교황이 친구? 이게 제국 귀족들 사이에 알려진다면, 또 얼마나 많은 가십거리에 시달려야 할까.

온갖 편지로 디아나 저택의 우체통을 폭발 직전으로 몰아넣은 제국의 귀족들을 떠올린 얀은 고개를 내저었다.

“약속대로, 교국의 진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그러는 사이, 몸을 일으킨 교황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얀을 이끌고 교회의 한 구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곳은?”

교황이 얀을 데리고 간 곳은 교회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문.

그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어디까지 이어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깊은 계단이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얀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한 시간? 계단을 내려가는 데?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어두운 계단 속으로 들어가는 교황을 보며 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더 계단을 따라 내려갔을까.

더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깊은 지하에 다다른 얀과 켈트 2세의 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우뚝 서 있었다.

“이 문의 재질은…?”

“잘 보셨네요. 북부 장벽과 같은 재질. 창조주님의 유산이죠.”

그렇게 말한 켈트 2세는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건….”

익숙한 모양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칼.

이전에 라나가 쓰던 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스걱!

자신의 팔을 그어 문 앞에 떨어트리는 교황.

그의 팔에 나 있는 흉터를 보자 얀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런 얀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물어오는 교황이었지만, 얀은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교황의 피를 머금은 철문이 쇳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전에 라나가 자신의 손목을 그었을 때와는 달리, 기계음도,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 추기경이 아닌 자가 들어오는 것은 교국 역사상 당신이 처음입니다. 얀 베르쿠트.”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앞서가는 교황을 따라 열린 철문 안으로 글러간 얀은 이윽고 이곳이 거대한 공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넓은 장소군요.”

“넓죠. 그렇지만 언젠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좁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교황이 하늘을 향해 손짓하자, 철컹! 소리와 함께 빛이 거대한 공동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밝아진 공동을 두르고 있는 것은…. 수천 개가 넘는 수의 관이었다.

“이건?”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십자가가 새겨진 관들을 바라본 얀이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그것을 바라본 교황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교국 최심부에 위치한 영묘. 역대 교황들, 그리고 교황이 되려다…. 실패한 자들이 묻히는 곳이죠.”

‘실패한 자들?’

그렇게 의문을 표하고 있는 얀을 바라본 교황은, 이윽고 한 손을 들어 공동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보시죠. 저것이 교국이 숨겨온 진실. 교황을 만드는 옥좌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교황 켈트 2세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치,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과도 같은.

“이건, 고대인의 기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얀의 왼쪽 눈이 그 의자를 탐색하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얀의 시야가 아닌 글레이프니르의 시야,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렌의 시야가 의자를 비추며, 그것에 대한 정보를 눈앞에 출력해내기 시작했다.

‘정보보존용 하드디스크 입력장치. 3번 프로토타입.’

그렇게 쓰인 정보문을 천천히 내려가며 얀에게 그 의자의 용도, 사용법 들을 상세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은 얀은, 지금 당장이라도 위를 게워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인간의 지식을 뽑아내 저장, 축적한 뒤…. 그것을 어린 개체에게 주입?”

“하하, 신랄하시네요. 꼭 천사님 같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로 다가온 어린 교황의 모습에, 얀은 뿌득, 이를 갈았다.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천재이거나, 단순히 능력이 좋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조직을 이끄는 능력.

갈등하는 이들을 중재하고, 어떤 때는 견제하면서, 수십, 수백, 수만….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왕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생, 삶을 직접 겪으며 쌓아온 경험 없이는 얻을 수 없는 덕목이기도 했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열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 교황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고, 몰래 콜로서스 전력을 육성하며, 제국 황제에게 정치적 거래를 제안할 정도의 강단을 얻었는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히 교황의 직함을 이어받았을 뿐인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교국의 역사와 함께 축척된 교황의 지식, 경험. 그 모든 것을 빨아들여 머릿속에 간직한 존재.

고대인의 기술이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고대인의 기계와 뇌를 연결하는 건, 몸에 엄청난 부담을 끼칩니다.”

글레이프니르와 자신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얀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자신이 이럴진대, 인격이 채 형성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뇌에 직접 정보를 쑤셔 박는 감각은, 참기 어려운 것이겠지.

“여기 묻혀있는 건, 제 이전 후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린 교황, 켈트 2세는 수많은 관 중 하나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는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서 다른 아이들을 물어뜯었어요.”

“…!”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듯, 생생한 그의 말에 얀은 이를 악물었다.

“이 아이는 땅에 머리를 찧어 목숨을 끓었어요.”

“이 아이는 시술 중 뇌가 불탔죠.”

“이 아이는 시술 후유증으로…”

“이 아이는….”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다른 이들의 사인을 모두 기억하는 켈트 2세는 공허한 눈으로, 담담하게 그 모든 이들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을 주입하는 것과 동시에, 실험체의 기억을 보존한다. 그 말인즉….’

자신을 위해 희생된 모든 이들의 죽음을, 그는 기억으로써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수준이었다.

“자. 이게 제가 약속한 진실입니다.”

그렇게 말한 교황이 얀을 돌아보며 두 팔을 벌렸다.

“이것이 창조주를 숭배하기 위해 교국이 만들어낸, 교황이라는 존재의 진실. 수백 명의 아이들을 수집하여, 단 한명의 교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목장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교황의 희미한 웃음, 그 이면에 담겨있는 것은 분노였다.

“당신이 추기경들과 대립하는 이유가….”

“지식은 전해졌지만, 인격은 전해지지 않았어요. 역대 교황은 순종적이었던 반면, 전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죠.”

순교자 등록을 중지하고, 수정도시 순례를 금지했으며, 콜로서스를 개발하고, 성기사단을 부활시켰다.

종교국가가 아닌, 보통국가를 만드는 듯한 행보.

그리고 그에 대항해 일어난 대규모 조사단.

“믿음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소모품으로 쓰는 일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한마디에 어린 교황이 품은 분노의 근원이 전해져왔다. 신앙으로 가득한 국가를 신성에서 떨어트려, 사람을 위한 국가로 만든다.

그것이 신앙으로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을 유린한 이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인 셈이겠지.

“순교자들의 유골을 회수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명예를 떨어트리기 위함입니까?”

“정확하시네요. 얀 중위. 정답이에요.”

성직자로써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면, 정치가로써 이기면 된다.

수 세대에 걸쳐 국가를 운영해 온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지.

한숨을 내쉰 얀을 향해 표정을 굳힌 교황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모두 털어놨습니다. 교국의 비밀, 제 계획. 그리고 과거까지.”

“….”

“그리고 켈트 교국의 교황으로써, 창조주의 후계자인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나른한 한숨을 내쉰 얀이 어린 교황과 눈을 맞췄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교황에게는, 수십 년을 산 이와 같은 깊은 전의가 담겨있었다.

“이 교국에게 제가 행하는 복수는, 합당한 것입니까?”

교국에서 태어난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에 대한 경의.

그것을 느낀 얀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담뱃불을 붙이기 직전. 눈앞에 있는 교황을 향해 짧게 내뱉은 뒤,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니 맘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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