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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66화 (66/186)

66화 사냥개 소굴(2)

툭!

“이, 이게 무슨…!”

“이 시신은, 아이락 경이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하이람의 임무를 위해 나간 아이락의 시체를 그들의 면전에 높인 아이린은 자신의 중대장인 얀의 기사 뱃지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이락 경은 베르쿠트 경의 종자인 제 앞에서 제 베르쿠트 경을 모욕하고, 또한 저를 겁박하려 했습니다. 이에 얀 베르쿠트 경께서 아이락 벨커스 경께 결투를 신청. 승리하셨음을 보고 드리는 바입니다.”

종자인 아이린의 보고는 중대장인 얀의 그것처럼 짧고 간결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넋을 잃은 채 그것을 바라보던 벨커스 기사들이 상황을 파악하자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결투라니! 이 타지에서 제국 기사들끼리 결투라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줄 알고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저지르는 게야!”

“그대가 모시는 베르쿠트 경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가?! 어쩌자고 교국 한가운데에서 같은 기사를…!”

“그만!”

격분하는 기사들을 진정시킨 것은 비델이었다.

“종자, 아이린 페트리시아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눈을 사납게 치켜뜬 비델이 아이린의 얼굴을 살폈다. 웬만한 장정이라 해도 오금이 저릴 법 한 서슬퍼런 눈빛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내는 아이린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대가 방금 말한 진술에, 거짓은 없는가?”

“없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본 비델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알겠네. 내 본가에 전하도록 하지.”

“스, 스승님!?”

“이 사태를 그냥 넘길 생각이십니까!?”

노기사의 한 마디에 그의 제자들이 즉각 반발했지만, 비델은 요지부동이었다.

“감사합니다.”

비델의 한 마디에 짧은 감사를 남긴 아이린은 그대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스승님! 이렇게 되면 계획이…!”

“지금은 이빨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현 상황을 똑바로 보거라.”

비델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문 기사들을 향해 비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라우스 황자님의 명으로 콜로서스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 거기에 얀 베르쿠트, 저자의 부대는 야습과 게릴라를 전문으로 하는 살인집단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비델의 일갈에 사태를 알아차린 벨커스 기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자, 잠깐만….”

“그렇다면 지금은….”

제자들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확인한 비델이 침통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기사, 얀 베르쿠트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한 것이다. 교국에 있는 한, 자신들은 언제든지 우릴 죽일 수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에 쳐진 커튼을 살짝 걷었다.

눈보라에 뒤덮인 교국의 거리.

그렇지만 눈에 마력을 집중하는 순간, 자신들의 숙소를 둘러 싼 열 명 가량의 시선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경호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저격수의 총구를.

“마력 통신도 불가능한 지금, 이렇게 되면 본가에 연락을 할 수단조차…!”

의문은 당혹으로, 그리고 공포로 뒤바뀌었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기를 애써 견뎌내는 그들을 향해 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분이 없는 이상, 저들은 우릴 건드릴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기다려라. 콜로서스에 몸을 싣는 그 순간이 기회가 될 것이다.”

아직 투지를 잃지 않은 스승의 모습에, 제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

“오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일주일 만에 대륙 최남단에서 대륙 최북단을 가로질러봤네. 황족을 이렇게 굴리는 기사는 제국 역사상 자네가 처음일 거야.”

“그래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 클라우스의 한탄에 얀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운이 좋았네. 이런 일이 또 가능할거라는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알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일찍 부르도록 하죠.”

“하하하, 내 말을 말지.”

체념한 듯 중얼거린 클라우스는 이내 숙소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총소리 때문에 시끄럽던데, 자네 짓인가?”

“결투로 벨커스 기사 한 명을 죽였습니다. 그쪽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상 저흴 자극하진 않겠죠.”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한숨과 함께 애꿎은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가 먼저 걸었나?”

“설마요. 그쪽에서 먼저 아이린에게 접근했습니다. 정보를 빼 갈 생각이었겠죠.”

“하, 이젠 누가 적인지도 모를 지경이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은 클라우스에게 얀의 질문이 이어졌다.

“협상은 어떻게 됐습니까?”

“원만하게 해결됐네. 몇 가지 세부사항이 남아있지만, 주요 현안들에 대해서는 합의를 봤어.”

제국은 교국의 콜로서스 개발 및 운용을 불문에 붙이며, 교국은 그 대가로 철의 장벽 너머에 있는 미개척지, 수정도시의 조사를 허가한다.

이것이 클라우스가 말한 협상 내용의 주 골자였다.

추가적으로 교국에 가해지던 관세 구제 또한 사라졌다는 소식을 얘기하는 클라우스 황자였지만 얀은 별 관심 없다는 듯 품속에서 담배를 찾을 뿐이었다.

“우선 마력 통신을 통해 본국에 보고한 뒤, 내 발굴단을 투입할 생각이네.”

“수정도시에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얀의 나지막한 되물음에 클라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넨 모르겠지만, 제국은 방금 교국에게서 수정도시 발굴권을 확보한 유일한 국가가 된 걸세. 어쩌면 타우르와 같은 병기를….”

“위험요소를 파낼 가능성이 농후하죠.”

클라우스의 말을 끊은 얀.

타우르 사건을 떠올린 클라우스는 그 사건을 해결한 얀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골랐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걸 잊고 있었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얀에게 보였다.

화려한 고급 양피지에 직인이 들어간 황제의 친서와는 달리,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편지지. 교황의 친서였다.

“제국 황제에 교국 교황까지, 조금 더 있으면 알피와 라이아와도 얘기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군.”

“황자님이 생각하는 전 시체와 대화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유령은 잘 잡을 것 같다고 생각하네만.”

그렇게 시시한 만담과 함께 편지를 연 얀의 눈에 교황의 오밀조밀한 필체의 글이 들어왔다.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교황청에 있는 제 방을 찾아와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지를 다 읽었을 때쯤, 두 사람은 숙소 앞에 도착해있었다.

황족의 격에 알맞은 숙소를 준비하겠다는 추기경들의 제안이 있었지만, 한사코 거부한 클라우스 황자의 의향이었다.

“…잠시 교황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끊이지가 않는군. 그 친구도 자네도.”

그렇게 말한 케인은 얀을 향해 손짓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

“…황자님도 그런 거 압니다.”

그렇게 말한 얀은 이내 몸을 돌려 교황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얀 씨? 일…. 찍 오셨네요?”

“예. 편한 시간에 오라고 하셔서.”

편지를 보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찾아온 얀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린 교황이었지만 다행이도 그것이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차를 타고, 다과를 준비한 뒤 자신의 앞에 내놓는 교황을 잡시 바라본 얀은 찻잔을 들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허브의 향. 그리고 오래된 가구에서 느껴지는 나무향이 한데 모여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써있었습니다.”

“아, 네. 정확히는,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교황을 살핀 얀은 처음 그를 만났을 대와 같은 데자뷰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제국에서 보낼 조사단을 통해, 뭔가를 부탁하실 생각이시군요.”

“하하, 정확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얀의 맞은편에 앉은 교황은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정도시에 가서, 무엇을 보셨나요?”

“유골을 봤습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라고 들었고요.”

“맞습니다. 순교하신 분들이죠.”

그렇게 말한 교황이 얀에게 지도를 건넸다.

수정도시의 지형, 정확히는 유리에 뒤덮인 옛 도시의 지형이 자세히 기록된 지도를 바라보는 얀은 이윽고 그곳에 표시된 한 지점을 가리켰다.

“표시된 부분이 부탁하실 지점이시군요.”

“예. 그리고 아마…. 여러분이 찾는 것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

지도를 바라보던 얀은 그렇게 말하는 교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의 전 예전과 같은 포로 신분이 아닙니다. 제국의 기사로써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께서는 부탁의 대가로, 제게 무엇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신성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교황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도 커다란 불경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교황은 그런 얀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비난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대륙에 퍼져있는 모든 창조주 교단의 협조. 그리고 진실을 드리겠습니다.”

“…진실?”

그렇게 되물으며 교황을 바라본 얀은 어린 소년 교황의 얼굴이 마치 검게 물드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예. 진실이요. 교국을 지탱해온…. 창조주 교단의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설마 드워프 유랑단과 함께 일하게 될 줄이야. 자네 덕에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해보는군.”

켈트 교국 최북단, 철의 장벽.

교국과 제국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이곳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온 장벽에서는 다음 탐사를 위해 대기중인 드워프들이 클라우스 황자의 발굴단과 업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아, 그럼 발굴장비는 여기선 사용이 불가능한 겁니까?”

“고정을 하려면 지지대를 박아야 되잖여? 근데 여긴 사방 천지가 유리라서, 웬만한 지지대는 들어가지도 않어.”

“들어간다 해도 지반 자체가 망가지겠군요.”

“잘못하면 방어 시스템이 작동되서 떼죽음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드워프들은 신앙이나 순교를 입에 담는 교국의 인간들보다는 제국의 인간들이 더 편한지 퍽 친근한 자세로 발굴단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안전지대 끝자락에 야영지를 차린 다음, 콜로서스로 탐사를 진행하면 될 거요. 방어 시스템과도 일부 맞서 싸울 수 있을 테니, 확보할 유물들도 많아지겠지유.”

“흥미롭군. 지역 전체가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방어 시스템이라는 건 어떻게 가동되는 거지?”

드워프의 정보를 경청하며 발굴단을 지휘하는 클라우스 황자가 의아한 눈으로 그렇게 묻자 질문을 받은 드워프가 표정을 굳혔다.

“…땅이 열립니다.”

“뭐?”

“보면 압니다. 이것만큼은 설명이 불가능해요. 어쨌든, 위험하다고 외치는 순간 바로 철수하라고 전하십쇼.”

“그래. 그렇게 하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최대한 경험자의 의견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발굴단원들은 모두 들어주게.”

이윽고 발굴단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클라우스는 그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생명이네. 성과를 위해 목숨을 등한시 하는 행위는 제국 황자로써 엄중히 벌할 것이니, 꼭 살아서 돌아오게.”

“알겠습니다.”

“황자님 명대로 해야죠.”

웃음기 띈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발굴단원을 둘러본 클라우스 황자는 이윽고 콜로서스 앞에서 대기중인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벨커스 기사단에도, 내 부탁하지. 저들을 지켜주게.”

먼저 자세를 낮추며 들어온 이상, 제아무리 로렌츠와 대립각을 세우는 벨커스라 할지라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음. 고맙네.”

얀과의 해후는 없었다. 단지 서로 잠시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자! 출발한다!”

“이번엔 뭐라도 건져오자고!”

그렇게 외치며 호그들을 재촉하는 드워프들의 목소리와 함께, 제국의 깃발을 세운 거대한 행렬이 유리로 이루어진 대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쿵-! 쿵-!

드워프 백 명에 발굴단 오십 명. 콜로서스 다섯 대로 이루어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행렬이었다.

***

[2차 감식 완료.]

[홍채 이식 결과 확인. 재검토로 인한 2번 인공지능의 이의제기를 확인.]

[거부. 인류연방군 제식 인형병기의 접근을 감지.]

[부팅 절차, 21번부터 772번까지 스킵. 비상동력으로 전원 가동.]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라.]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라.]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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