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국과 교국.
드르륵! 드르륵!
켈트 교국 대성당 앞. 제국의 기사들을 기다리는 추기경들의 앞에 내밀어진 것은 20구의 시신이었다.
“이것은…!”
“관에 새겨진 문양을 보게! 순교자들의 시신이 아닌가!”
“어서, 어서 확인하라!”
추기경들의 지시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수도사들이 나와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의 시신이 확실합니다. 전부…. 두 개골이 짓이겨진 상태입니다.”
“허!”
“이것이 제국의 대답인가!”
그렇게 말하는 추기경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슬퍼하는 것도 잠시, 손짓으로 수도사들 몇몇을 더 부른 추기경들은 그들 스스로가 직접 나서 관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호오, 추기경 정도 되는 인물이 직접 옮기는 건가?”
“현 교황성하의 방침이네. 창조주 앞에선 자신 또한 한낮 신부에 불과하다 말했지.”
시신을 전달한 벨커스 가문의 기사들의 질문에 회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노기사가 그렇게 답했다.
“이런 형태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기사단에서 직접 시신을 운송해주신 데에는 감사인사를 드린다는 교황 성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교황청 너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여섯 대의 콜로서스를 힐끔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선 추기경은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음. 성하의 말씀을 폐하께 전하겠소. 헌데, 귀국에서 보호하고 있는 기사 얀 베르쿠트 경은….”
“아 그것이….”
자신들이 이곳에 온 주 목적인 얀의 행방을 묻자 앞에 나선 추기경이 말을 흐렸다. 그 표정변화에 그것을 바라보던 노기사, 비델의 눈썹이 휘었다.
“성하의 명이 있어 잠시 장벽으로 가셨습니다. 기별을 넣었으니, 곧 이리로 올 것입니다.”
“장벽? 설마 지금 제국의 기사를 이단심문소로 압송했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켈트 교국. 그리고 그 교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철의 장벽의 용도를 떠올린 비델이 그렇게 일갈했다.
“진정 하십시오 비델 경. 교황 성하의…. 개인적인 청을 들어드리러 향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비델을 진정시키는 추기경이었지만 그것을 본 비델은 내심 미소 지었다.
‘교국이 예상외로 쉽게 허물을 내보였군. 여기선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도 되겠어.’
“듣자 듣자하니 용납이 되지 않는군! 아무리 교황 성하라고 하나, 황제폐하께서 직접 보우하시는 기사를 사적으로 움직이려 하다니!”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인 베르쿠트 경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비델과 동행한 두 명의 기사 중 한 명이 그렇게 첨언하자 비델 또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여시오! 내 성하를 직접 뵙고, 이 일에 관해 여쭐 것이니!”
그렇게 말하며 비델이 앞으로 나서자 그동안 꾹 참고 있던 추기경들이 격분하기 시작했다.
“무엄하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성하를 직접 뵈려 하다니!”
“아무리 제국 기사가 관련된 안건이라 해도, 성하를 직접 뵙는 것은 도를 넘었소 비델 경!”
그렇게 말하며 추기경들이 앞길을 막는 순간.
- 그 이상 비델 경의 앞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살벌한 목소리가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기사 아이락의 콜로서스가 그 자리에서 콜로서스의 검을 빼들었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르…!
“저, 저런!”
“교국 영내에 콜로서스를 들인 것도 모자라, 이런 저열한 협박이라니! 제국은 교국과의 오랜 약속마저 잊어버린 것인가!”
교황의 거처인 교황청 대성당 앞.
창조주 교단 신도들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에 흙발로 들어온 여섯 대의 콜로서스를 보며 추기경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 약속? 상호 불가침이라는 약속을 깬 것은 교국이 먼저 아니었소?
확성기를 통해 들려온 아이락의 목소리에 비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비키시오. 난 성하를 반드시 직접 뵈어야 하겠소.”
“아니, 안됩니다. 성지에서 칼을 뽑아드는 무뢰배들의 앞에, 교황 성하를 내보일 수는 없소!”
“발언을 철회하시오!! 제국의 기사인 우리에게 무뢰배라니!”
정중하게 시작했던 두 세력 간의 대화는 이제 완전히 말싸움으로 변해버렸다.
“이곳은 단순히 교국 하나만의 성소가 아니요! 창조주를 신봉하는 모든 신도들의 성지! 그것을 군홧발로 더럽힌 죄를 어찌 책임질 생각이요!”
“하, 제국의 사절단을 핍박한 죄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더하여 제국의 기사를 볼모로 잡다니! 이것은 우리 바일사르 제국을 모함하는 처사요!”
비델이 대동한 기사들의 목소리와 함께 아이락이 조종하는 거대한 콜로서스가 광장을 가로질러 대성당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 쿵!
“무, 무슨!?”
“신성 모독이다! 성소에 콜로서스를 들이다니!”
그렇게 외치며 길길이 날뛰는 추기경들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홀로 성벽을 부수는 콜로서스. 압도적인 무력에 추기경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시는 바일사르 제국의 요구는 두 가지요. 첫째는 그대들이 붙잡은 얀 베르쿠트의 신병을 인계할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교황 성하께서 직접 몸을 낮춰 사죄할 것!”
“잠깐, 뭐라!?”
그 말을 들은 추기경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사 한 명 때문에 일국의 수장이, 심지어 대륙 전체에 퍼진 창조주 교단의 교주가 직접 무릎을 꿇어야 한다?
황제 자신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 직접 온다면 모를까, 눈앞에 있는 것은 일개 기사. 이것은 완전한 제국의 폭거였다.
“위 조항이 지켜지지 않을 시,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전투를 불사할 용의가 있소.”
“큭…!”
비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두 대의 콜로서스가 추가로 더 들어왔다.
침음성을 흘린 추기경들이 제국의 기사들을 노려보는 그 순간.
- 거기까지. 당신들은 지금 제르나 협정을 무시하고 교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했습니다.
뒤편에서 들려온 확성기 소리에 제국의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 저, 저것은?!
- 콜로서스? 저 장갑구조는 대체!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열 대의 콜로서스를 본 기사들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교국이 자체적으로 콜로서스를 개발한 것인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다섯 기의 콜로서스. 그것을 본 제국의 페이지 콜로서스들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알프라이아 왕국군의 4호와도, 제국군의 그것과도 다른 흰색의 콜로서스.
하얀 장막을 망토처럼 덮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제국 기사들이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협정을 어겼다며 큰소리치더니, 콜로서스를 자체 보유하고 있었을 줄이야!”
“교국은 지금 선을 넘었소! 콜로서스를 직접 운용하는 것은 제르나 협정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 그걸 알고 있음에도 콜로서스를 가져오다니!”
그렇게 외치는 기사들이었지만, 성기사단의 콜로서스를 확인한 뒤 자신감을 되찾은 교국의 추기경들 역시 이에 질세라 맞서 소리쳤다.
“그렇다면 우리보고 그대들의 폭거에 저항조차 하지 않고, 교황 성하를 내놓으란 말이오!?”
“성지에 콜로서스를 끌고 온 책임은 어떻게 지실 생각이오! 이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란 말입니다!”
두 진영의 갈등은 이렇게 극에 달해 언제든지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추기경님!”
그런 상황에, 수도사 중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이에 고개를 끄덕인 추기경은 자신의 앞에 있는 비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 찾고 계신 얀 베르쿠트 경이 도착했소.”
그렇게 말하는 순간.
- 저 하나 때문에 국제분쟁이라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확성기에서 들린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진회색 콜로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저것이!”
“창조주의 콜로서스! 직접 움직이는 것을 볼 줄이야…!”
대치중인 두 무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글레이프니르. 그것을 본 추기경들은 방금까지 싸우던 것 마저 잊어버린 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글레이프니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 베르쿠트 경. 본인이 맞습니까?
비델이 수신호하자 확성기를 통해 말을 건 것은 아이락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이 열리며 안에 앉아있는 얀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하운드 중대의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 본인입니다. 육안으로 확인 했습니다.
“좋아. 요구사항 중 하나는 이걸로 충족되었군.”
아이락의 보고에 짧게 답한 뒤 수신호하자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해치가 닫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비델이었지만 추기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두 번째 요구가 남아 있소.”
“저들이 아직도…!”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에 안도한 추기경들은 비델의 한 마디에 어처구니가 없는 듯이 외쳤다.
“애초에 이것은 교국의 병사들이 제국의 사절을 위협하면서 벌어진 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교황 성하의 확답을, 내 두 귀로 들어야겠소.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써!”
그렇게 말하는 비델의 한 마디에 풀어지려 하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해졌다.
열 기의 콜로서스가 단단히 포위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벨커스 가문의 기사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 제 아무리 머릿수를 채웠다 한들, 결국은 실전을 겪지 못한 기사들!
-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우리들에게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 마라!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하는 벨커스 기사들의 일갈에 교국의 성기사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글쎄, 그런 것 치곤 4호 콜로서스 하나한테 세 명이 쩔쩔 매던데 말이죠.”
“풋!”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안.
벨커스 기사들의 자신감 넘치는 한 마디를 들은 얀이 그렇게 말하자 조종석 한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왠지 들떠 보이는 소년의 웃음소리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들은 진심으로 절 보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전면에 나서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죠.”
흐린 웃음으로 글레이프니르의 모니터를 바라보는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경고. 비인가 생물체의 기체 진입은 엄격히 금지되어있음. 이는….]
“꼬우면 나까지 죽이던가. 그게 싫으면 그냥 조용히 있어.”
오랜만에 연결된 글레이프니르의 감각을 만끽할 새도 없이 들이닥친 임무에 얀은 피로를 느낄 새도 없이 기체를 움직여 대치중인 두 신영 사이에 멈춰 섰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성하께서는 교국의 수장이십니다. 일개 기사인 저에게 신병을 맡기신 것은….”
그렇게 말하던 얀이 말을 멈췄다.
애초에 자신은 제국의 기사이니, 교황이 어떤 선택을 하든 알 바가 아닐 터인데.
얀이 자신의 발언에 의문을 느끼는 사이, 씨익 웃으며 얀을 돌아본 어린 교황이 그를 향해 말했다.
“일개 기사라니요. 교국에게 있어서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얀 베르쿠트.”
“추기경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던데요.”
자신을 회유하여 도구로 쓰려 한 추기경의 얼굴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말하자 교황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역사 속 교황은 항상 베일에 싸인 존재였죠. 하지만 전 아닙니다. 시대의 첨단에서 직접 교국을, 그리고 제 사람들을 이끌고 또 지켜낼 거니까요.”
그 말을 들은 얀은 조용히 글레이프니르의 확성기에 입을 댔다.
- 양 측 모두 전투 행위를 중지해주십시오. 이 이상의 군사행동은 양 국가에게 있어 득이 되지 않습니다.
얀의 발언에 교국과 제국, 양 진영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말을 삼가시오 베르쿠트 경! 포로로 잡힌 몸이라 한들, 그대는 이미 기사로써의 원칙을 크게 벗어나는 행동을 저질렀소! 이에 대해선 엄중히 처벌을 물을 것이오!”
- 누가 제게 책임을 묻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 외에 기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뭣!?”
얀의 반문에 순간 말문이 막힌 비델을 향해 얀이 비웃음 지었다. 콜로서스에 타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얀은 이어지는 다음 주자의 말을 기다렸다.
“나 또한 묻고 싶군. 비델 벨커스 경. 황족이 아닌 자가 황제 폐하의 대리인을 청하다니, 언제 제국에 그런 법도가 새로 생긴 것인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뒤를 돌아본 비델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망연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스…. 황자님?”
붉은 머리를 찰랑이며 씨익 웃어 보이는 클라우스 황자. 그의 뒤에서 나타난 50 명의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교황청 곳곳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 클라우스 황자께서 교국으로?”
완전히 말문이 막힌 비델에게서 눈을 뗀 얀의 글레이프니르가 그 자리에서 자세를 낮췄다.
“나가실 차례입니다. 교황 성하.”
“고맙습니다. 얀 베르쿠트. 무리한 청이었을 텐데….”
“벨커스 기사들을 엿 먹이는 건데, 이 정도 수고는 해 줘야죠.”
그렇게 말한 얀이 글레이프니르의 콘솔을 조작했다. 이어서 기체의 조종석 문이 열리고, 수도복을 차려입은 어린 교황, 켈트 2세가 천천히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교, 교황 성하!”
“어째서 저 콜로서스 안에…?”
경악에 눈을 크게 뜬 것은 벨커스의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추기경들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교황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황 성하. 바일사르 제국 제 13황자, 클라우스 반 바일사르입니다.”
“창조주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클라우스 황자님. 켈트 교국 교황, 호르헤 라피스라고 합니다.”
웃음기 띈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교황과 황자. 기사들과 추기경들은 망연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