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장벽으로(1)
쾅!
제국 수도. 벨커스 백작의 집무실에서 들려온 큰 소리에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들은 놀라서 흠칫 거리며 서둘러 문 앞을 지나갔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아직 때가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할 줄이야…!”
씹어뱉듯이 뇌까리는 하이람의 손에는 황제가 얀에게 전하라고 명한 철기사 훈장이 케이스에 담겨진 채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아무도 받지 못한 훈장이야! 벨커스 가문의 기사들 중 그 누구도 받지 못한 이 철기사 훈장을, 서임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에게!”
심지어 그것을 자신에게 전하라 한 황제를 떠올린 하이람은 분노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거사 계획이 탄로난걸까요?”
“아니. 단지 노골적인 무시일 뿐이네. 우리 같은 신흥 귀족들에게 늘상 해 왔던 것과 같이 말이야.”
부르르 떨리는 입가를 억지로 진정시킨 하이람이 잠시 숨을 골랐다.
이런 감정상태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백작가의 수치였다. 그렇게 애써 자신을 추스르는 하이람에게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뭔가를 건넸다.
군대에서 보급으로 지급되는, 가장 질 낮은 담배였다.
“…고맙군.”
그렇게 말한 뒤 조용히 그것을 빼문 뒤 집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하이람 백작.
치익-!
이내 집사가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푸우-
다른 귀족들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보급담배. 독한 향 때문에 일반 병사조차도 사제 담배를 구해 피는 마당에, 이것을 피는 이들은 저 변방의 형벌부대원들 뿐일 것이다.
제국 최대의 기사가문의 가주가 피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물건이었지만, 그것을 건넨 집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명의 몰락귀족이었던 시절부터, 자신의 주인은 오로지 이 담배만을 피워왔던 것이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림자로 뒤덮인 어두운 집무실을 밝히는 것은 책상에 놓인 두 개의 촛불과 담뱃불이었다.
파스스, 소리를 내며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잠시 관망한 하이람은 다시 한 번, 담배연기를 푸우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제거한다. 이 이상 간과할 수는 없어.”
“교국에 포로로 잡힌 이상, 섣불리 그를 죽인다면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의심하면? 형벌부대 출신의 기사 나부랭이 하나가 죽었다고 그것이 우리 벨커스를 의심할 껀덕지가 되나?”
최종적으로 확인하듯 주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과 총기로 번뜩이는 그의 눈.
분노를 가라앉히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집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케르단 전진기지를 담당한 건 누구지?”
“비델. 그리고 그의 제자들입니다.”
“좋아. 흔치 않은 순혈들이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하이람이 그에게 눈짓하자 집사가 책상에 놓인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의 문이 열리며 벨커스의 인장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그렇게 말한 뒤 깊숙이 무릎을 꿇는 기사.
본디 황제를 제외한 어떤 이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제국의 기사에게 있어, 이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렇지만 제국의 백작인 하이람도, 그의 옆에 선 집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입을 열 뿐이었다.
“그래. 아이락. 네게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하명하십시오. 주군.”
깊이 고개를 숙인 금발 머리의 남자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 앳된 외모였다.
“벨커스 가문의 기사가 되기로 했을 때, 넌 맹세를 했지.”
“베풀어주신 피와 힘에 보답하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겠다했습니다.”
“좋아. 그럼 네게 임무를 내리마.”
그렇게 말한 하이람은 부복한 기사의 눈앞에 서류뭉치 하나를 떨어트렸다.
“이건….”
“얀 베르쿠트, 벨커스의 가신을 살해한 기사가 부리는 부대원들의 인적사항이다.”
하이람의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확인하던 아이락이라는 기사의 눈이 서류에 적힌 명단의 한 지점에서 굳어선 듯 멈췄다.
‘종자. 87독립중대 소속, 일병. 아이린 페트리시아.’
“대부분 근본 없는 형벌부대 출신이니, 태반이 가명이다. 회유해서 정보통을 만들어라.”
“….”
잠시 말이 없는 아이락을 의아한 듯 바라본 하이람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렇게 말한 기사는 서류를 품에 넣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전하라 명한 철기사 훈장을 건넨 하이람이 입을 열었다.
“전선기지에는 내 따로 기별을 넣을 것이다. 그곳의 기사들과 합류해서 얀 베르쿠트. 그 자를 죽여라.”
***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다 보네.”
교국 최북단으로 이어진 열차는 반나절을 꼬박 달려 얀과 렌을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대륙의 최북단.
어떻게 주조해낸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거대한 철제 벽을 바라보는 얀은 망연한 듯이 중얼거렸다.
“못이나 나사로 이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용접도 아니군. 교국의 국토를 가로지르는 장벽 전체가 한 덩어리야.”
“침입을 막기 위해 급조한 벽. 기술적으로는 오히려 열등한 수준.”
창조주의 유산이 분명한 40미터짜리의 벽을 평하는 렌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얀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열등? 이게?
“손님! 이쪽입니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곳을 바라보자, 검은 머리의 엘프가 웃는 낯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성기사단은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나보군요.”
“무슨 섭섭한 말씀을, 일 하러 온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바얀의 뒤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일전에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과 총구를 맞댄 병사들이었다.
“추기경님들의 조사단원들이 돌발행동을 할 수 있어서요. 저희가 경호하겠습니다.”
“감시를 잘못 말한 거겠죠?”
“제국 기사를 성역에 들일 텐데, 감시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죠.”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바얀.
그걸 본 얀은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을 기다리는 바얀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어서 오십시오.”
“모시게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표정관리는 좀 하고 말하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병사들과 함께 장벽을 향해 걸어가는 얀과 렌은 점점 가까워지는 장벽과 그 너머에 펼쳐진 세상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휘오오오-!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켈트 교국.
그 교국의 최북단이 내뿜는 한기는 병사들이 메고 있는 소총의 나무 총신마저도 쩍쩍 갈라지게 할 정도로 매서웠다.
헝겊이나 털가죽을 잘게 찢어 둘둘 감아놓은 병사들의 라이플을 보며 그것을 알아챈 얀은 교황청에서 지급된 털옷 속으로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장벽 내부는 좀 나을 겁니다. 조사단원들도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얘기 나누시죠.”
장벽 곳곳에 뚫린 문으로 들어가며 그렇게 말한 바얀이 얀과 렌을 철벽 안으로 안내했다.
제국에서는 좀처럼 구할 수 없는 발광석이 곳곳에 설치되어서인지, 장벽 내부는 생각보다 밝았다.
“이쪽으로 옮겨!”
“호그들 여물 주는 거 잊지 마라. 얘네들 없으면 조사도 말짱 도루묵이야!”
“총이라니? 약속이 다르지 않은가! 성지에 무기는 들고 오지 않겠다고…!”
“아 난 모르겠고, 미탐사 구역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애들 몸은 건사해야 할 거 아니요?”
붉은 수도복의 추기경들과 털가죽 옷과 코트로 몸을 두른 이들이 뒤섞여 시장과도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준비는 잘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그웬 추기경님.”
인파 속으로 들어간 뒤 너스레를 떨며 그렇게 묻는 바얀의 한 마디에 뒤를 돌아본 추기경 중 한 명이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섰다.
“다, 당신은…!”
“성기사단장 바얀! 어떻게 이 곳을?!”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 진 조사단원들.
돌발 상황에 대비해 등에 맨 라이플을 잡은 병사들을 확인하자, 가죽 옷을 입은 이들 사이에서도 무기를 꺼내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총은 뭐지? 처음 보는 형식인데?’
가죽옷들의 무장을 본 얀의 눈이 이채를 띄는 사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드워프와 추기경들이 각자 입을 열었다.
“젠장, 이래서 종교쟁이 놈들은 믿을 게 못되는 거지…!”
“자, 잠깐! 성역에서 전투는 금지요! 바얀 경도 잘 아시지 않소!”
순식간에 경직된 분위기에 추기경들이 다급한 듯 손짓하자 어깨를 으쓱인 바얀이 손을 내저었다.
“전투 중지. 총 내려.”
그렇게 말하는 바얀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총을 내리자 털가죽 옷을 껴입은 이들도 들고 있던 무기를 치웠다.
“자극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워낙에 극성이라.”
“두 번 극성이었으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났을 거요. 성기사 양반.”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선 털가죽옷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드워프?”
렌의 저택에 있던 드워프 브락을 떠올린 얀이 중얼거리자 그것을 눈치챈 드워프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허? 이건 또 뭐야?”
“교황님의 청으로 조사단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얀 베르쿠트입니….”
“아니, 그거 말고. 그쪽 눈깔. 그거 뭐요?”
얀의 소개를 끊고 대뜸 그렇게 묻는 드워프의 말에 얀이 자신의 왼쪽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드워프가 얀을 유심히 살펴보는 사이, 그의 시야 한 구석에 들어온 순백의 소녀를 보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생체단말이잖아? 그럼 이 멀대같은 놈이 주인이야?”
“천사님?!”
“무, 무엄하다! 천사님께 그런 경박한 발언을…!”
“아, 그쪽은 입 좀 다무시고.”
반발하는 추기경들의 말을 일축한 드워프가 렌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앞으로 나선 렌이 입을 열었다.
“첫 주인이야. 마지막 주인이고.”
“하,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이런 멀대같은 놈을 데려올 줄이야.”
그렇게 말한 드워프가 자신의 뒤에 몰려든 다른 털가죽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 뭐해!? 손님 앞에서 계속 그거 뒤집어쓰고 있을 생각이야!?”
그의 고함소리에 다른 드워프들도 하나하나 후드에 감춰진 얼굴을 드러냈다.
남녀 할 것 없이 수염이 덥수룩한 이들의 눈이 신기한 듯이 얀을 훑고 있었다.
“하아….”
손님.
이젠 익숙해진 그 칭호를 들은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전에 엘프 마을에서 그랬듯, 또 세례라는 명목으로 웃기지도 않은 손길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른한 표정을 한 얀은 이어지는 드워프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르신. 이제 다시 덮어도 되는 거요?”
“어. 됐어. 덮어 덮어.”
“어으, 춥다. 이놈의 교국은 백날 와도 적응이 안 돼요 적응이.”
얀을 잠시 바라보던 드워프들은, 이내 귀찮다는 듯이 후드를 다시 뒤집어쓴 뒤 얀의 이곳저곳을 평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봐줄 만 하지 않나?”
“인간 치곤 반반하긴 한데, 내가 보기엔 영~ 아니여. 눈깔도 퀭 해가지고.”
“키는 멀대 같이 크긴 한데, 얼굴색이 왜저런겨? 시체인 줄 알았잖여?”
“저 산송장이 주인이랍시고 데려왔는데, 똑같이 송장이겠지 뭐!”
“하하하하하하!”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이내 자신을 주제로 수다를 덜기 시작한 드워프들을 보며 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손님이라면 죽고 못 사는 엘프나 교국 인간들에 비하면 차라리 이러는 것이 편했다.
물론 그것을 듣고 있는 추기경들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개졌지만 말이지.
“신성모독이요! 천사님을 사, 산송장이라니!? 그리고 교국에 오신 귀중한 손님을!”
“손님은 지랄, 어르신이 말하기 전까진 알아보지도 못했잖여?”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음바다에 빠진 드워프들.
황망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얀의 옆에 다가온 렌이 말했다.
“적응해. 앞으로 자주 만날 테니까.”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이 얼굴이 벌게진 추기경들은 조사단에 합류하기로 한 수도사들을 남겨둔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신들도 교국에 찾아온 손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했다.
“준비 됐수! 그래도, 손님이 합류한다니 이번 탐사는 좀 편해지겠구만.”
“잘 하면 하루 까지도 가겠어?”
“바로 출발하려는데, 손님은 괜찮으신가?”
그렇게 말하는 드워프들의 뒤편에는 처음 보는 짐승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따로 준비할 건 없습니까?”
“손님 몸뚱아리만 있으면 다~ 됩니다. 걱정 말고 오슈.”
어르신이라고 불린 드워프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자 어깨를 으쓱인 얀이 앞장섰다.
“예정대로 여기부터는 나 혼자 경호한다. 나머지는 복귀해.”
“괜찮으시겠습니까?”
“곧 제국에서 뭔가가 올 거다. 준비해야지. 저 분의 기체도 가져오고.”
그렇게 말한 뒤 바얀은 드워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그 순간, 얀 또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바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혹시 복귀하시는 길에 제국 측으로 기별을 하나 넣을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바얀이 수도사 중 한 명을 불러 얀에게로 데려갔다.
이윽고 얀은 그 수도사의 귓가로 뭔가를 속삭이더니,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병사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몸을 돌리는 것을 확인한 뒤, 얀의 뒤를 따라가는 렌과 성기사 바얀.
“지인 분께 기별하신 겁니까?”
“아뇨. 상관입니다. 필요해 질 것 같아서요.”
이윽고 얀이 장벽 너머로 나오는 순간,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망연한 듯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처음 온 사람들은 다들 그런 반응이죠.”
그렇게 말한 바얀이 얀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곳이 교국이 숨겨 온 성역. 수정도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얀과 조사단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유리로 뒤덮인 대지.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