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51화 (51/186)

51. 게릴라(1)

“계십니까?”

오랜 항해로 지친 몸을 풀기위해 얀과 일행들에게는 하루 동안의 휴식이 주어졌다.

배정받은 자신의 방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얀은 문 밖에서 들린 낮선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하루 동안 케인이 가르친 예법이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종자로써 일을 시작한 아이린을 바라보는 네 명의 벨커스 기사들은 표정 변화 없이 그녀에게 용건을 말했다.

“얀 베르쿠트 경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만.”

“이쪽으로.”

낮게 눈을 내리깐 아이린이 그들을 안내하자 셔츠 차림의 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얀 또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연한 표정의 벨커스 기사들은 다짜고자 얀에게 다가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얀 베르쿠트 경. 반델 벨커스의 무례를,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리는 바요!”

대뜸 이어진 벨커스 기사들의 사죄에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신지.”

“하이람 가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벨커스의 명예를 위해 힘써주신 당신의 노고에 반드시 보답하라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이람 벨커스.

그 자의 이름을 여기에서까지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얀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 벨커스의 기사는 제국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군.’

단지 저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것이 벨커스의 저력. 제국 최대의 기사단을 지닌 가문의 힘일까.

‘정당성을 얻었다고는 하나, 난 엄연히 저들 가문의 일원을 죽인 자. 그런 이에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다는 것은….’

대가없는 선의는 없으며, 의도가 없는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제국의 귀족 사이에서는 반드시 이뤄지는 명제를 떠올린 얀은 이윽고 생각을 마쳤다.

‘포섭. 아니면 견제. 어느 쪽이든 좋은 의도는 아니군.’

“전우를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을 일으켜 세운 얀이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대했다.

언제나 그렇듯, 틀로 찍어낸 것만 같은 가식이었다.

“밑바닥 출신의, 심지어 경쟁 관계에 있는 로렌츠의 은혜를 입은 기사에게 이렇게까지 하신다니, 백작님의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막힘없이 술술 튀어나오는 입발린 소리에 순간 얀 자신조차도 놀랄 뻔 했다.

‘하긴, 대부분은 사실이기도 하니.’

입발린 소리라고 해도, 얀이 한 말은 반쯤 진실에 가까웠다.

평민 사회에서 공을 세워 귀족으로 진출한 이들을 신흥 귀족이라 부른다.

기존에 작위를 가지고 있던 귀족들이 황제의 칙령으로 대거 숙청당하고, 그 자리를 메꾼 것이 그들.

그렇기에 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극도의 황제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황제와 독대한 자가 없었다.

보답 받지 못하는 충성만큼 슬픈 것이 또 있을까.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각 분야에서 미친 듯이 성공을 갈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제국의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벨커스는 그들 신흥귀족 전체를 견인하는 가문.

전쟁 중인 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사 재원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벨커스 가문은 어느새 최고위 공작가인 로렌츠, 뒤누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는 벨커스 가문이, 뒤에서는 고대인의 피를 혼합하는 장치를 연구한다라….’

라엘 사건을 통해 확보한 증거물을 떠올린 얀은 그들을 향해 슬쩍 미소 지었다.

‘그 고명하신 가문의 속내를 파헤쳐서 세상 천지에 뿌려주지. 하이람, 네놈의 시체와 함께.’

“저희 가주님 또한 평민 사회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신 분이니, 베르쿠트 경과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영광이군요.”

얀의 반응이 긍정적이자 기사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돋았다.

‘형벌부대 출신이라길래 훨씬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출신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인지 밝은 표정으로 얀에게 인사를 건넨 기사들이 방 밖으로 나갔다.

도중에 얀에게 식사 요청을 한 이들이었지만, 종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얀의 말에 납득한 뒤 몸을 돌렸다.

“얀 중위. 들어가겠네.”

잠시 후 들린 케인의 목소리와 함께 객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전 괜찮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동료 기사가 벨커스 불한당들에게 둘러싸였다는데, 내가 오지 않을 수가 없지.”

“제가 무슨 곤경에 빠진 귀부인입니까?”

케인의 농담을 받아친 얀이 손을 내저으면서 케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그렇게 말하자 얼굴을 굳힌 케인이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예고한 대로야. 두 번째 백상어가 나왔네.”

***

애애애애앵-!

“전투배치! 전투배치!”

“기사단은 양동을 대비해 항구 외각을 경계한다! 벨로스터의 상태는 어떤가!”

“탄약 적재가 아직입니다!”

“그럼 구축함과 기함을 내보내라! 최고 경계태세다!”

지크 백작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항구를 떠나는 온갖 군함들.

이미 지평선 너머에서는 백상어를 잡기 위해 구축함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백작님! 하늘을 보십시오!”

“음!?”

보초를 서전 수병의 일갈에 지크 백작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이런 제길!”

하늘을 수놓은 수십 발의 함대지 미사일.

한 발 한 발이 기존의 포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였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이번에 인양된 첫 번째 백상어의 선체를 떠올린 지크 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땅으로 떨어지는 미사일을 노려보는 순간.

부와아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수천발의 기관포 세례가 미사일들을 하나하나 공중에서 폭파시키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마치 미사일들이 날아오는 궤적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정확한 경로를 그리며 미사일을 요격하는 두 줄기의 기관포탄들.

총성이 울리는 곳을 바라본 지크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건, 베르쿠트 경의…!”

양 손에 기관포를 세 문씩 장비한 글레이프니르가 하늘을 향해 엄청난 양의 기관포탄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이지스 시스템, 정상 가동중. 적 투사체 80% 요격 예상.]

얀의 시야에 보이는 미사일들 하나하나에 붉은 사각형이 씌워지더니, 자동으로 우선순위를 지정한 닐이 날아오는 미사일의 궤적을 계산하고 있었다.

“급조한 시스템이라 결함이 많아. 나머지는 네가 보정해야 해.”

[부정. 파일럿의 도움은 불필요함. 본 기체의 자체 시스템만으로 해결 가능.]

“또 쓸데없는 자존심.”

“그만 하고 총이나 마저 쏴.”

렌과 닐의 말싸움이 불이 붙기 전에 그것을 막아낸 얀이 자신의 신경과 연결된 글레이프니르에 정신을 집중했다.

쾅! 쿠콰쾅-!

항구를 향해 날아오는 마지막 미사일을 쏴 맞추며 요격임무를 끝낸 글레이프니르.

“후우!”

땀으로 흥건한 몸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곧바로 튀어나간 글레이프니르가 양 손에 장비된 여섯 정의 기관포를 해제했다.

쿵! 쿠쿵!

쇳소리와 함께 떨어져나간 기관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철근을 집어든 글레이프니르.

[조준 보정 개시.]

“세 발이면 된댔지?”

그렇게 말한 글레이프니르는 수송선에 있던 철근을 오른손으로 집어 들었다. 투창처럼 잡은 철근의 끝에는 구축함이 쓰는 기뢰가 창날처럼 매달려 있었다.

후웅-!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철근.

이윽고 얀의 시야 한 구석이 붉게 빛나며 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탄 확인. 오차범위에 따라 상하 클리크 조정.]

“좋아. 다시 간다.”

얀의 지시에 따라 손을 등 뒤로 뻗는 글레이프니르.

탄소섬유로 이뤄진 오른팔의 인공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철근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부웅-!

이윽고 두 번째 철근을 던지자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뢰의 폭발음이었다.

[착탄 확인. 타겟에 명중. 오차범위 재수정.]

이윽고 한 발, 두 발의 기뢰를 쏘아올린 글레이프니르를 피하려는 듯, 물속으로 몸을 피한 백상어.

그렇지만 물 속 깊은 곳까지 따라오는 기뢰를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은 포기한 채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백상어의 후퇴 확인!”

“추격 금지! 각 함선은 피해보고 후 항구로 복귀한다!”

백상어의 후퇴로 인해 이번 전투의 승자는 제국군이었다.

“후.”

기체 내부에서 조용히 한숨 쉰 얀은 점차 떨림이 멎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글레이프니르를 격납고로 가져갔다.

[파일럿에게 질문사항.]

“뭔데?”

격납고로 돌아가는 길. 화면에 비치는 전선기지의 모습을 둘러보던 얀에게 닐이 말을 걸어왔다.

[대공 사격 도중, 파일럿은 일정 탄도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을 거부함. 이로 인해 아군 기체 세 기가 파괴된 것을 확인.]

그렇게 말하며 닐은 화면 한 구석에 부서진 콜로서스들의 모습을 비췄다.

대파된 콜로서스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오는 벨커스의 기사들이었지만, 이미 하반신이 으스러진 상태였다.

“한 명도 못 죽인 건 아쉽지만…. 두 명을 제외하면 기사로써의 인생은 끝이군.”

그렇게 말하며 얀은 찌그러진 조종석에서 실려나오는 벨커스 기사들을 차갑게 비웃으며 격납고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 저럴 수가….”

“전선기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백상어를 후퇴시키다니?”

한편, 이런 사정을 모르는 기사들은 항구 외곽에서 글레이프니르의 전투를 보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아오는 포탄을 쏴서 맞추고, 기뢰를 집어던져 그 먼 거리에 있는 백상어를 격퇴하다니.

일반적인 콜로서스였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위업이었다.

“베, 베릭 경!”

“알고 있소. 방금 전 전투를 두 눈으로 본 이상, 슬퍼할 시간이 없어…!”

글레이프니르에서 내려 아이린의 배웅을 받는 얀과 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벨커스 기사들이 조용히 눈을 빛냈다.

“지위가 됐든 재물이 됐든, 벨커스에서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로 준비하시오. 그리고 만일 그럼에도 포섭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말하며 말을 흐린 기사들을 다잡기라도 하듯, 단호한 말투로 베릭이라 불린 기사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면. 제거하는 수밖에.”

***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전략회의실. 벨커스의 기사 넷과 얀. 그리고 케인과 각 함의 함장들이 한데 모인 이곳에서는 두 번째 백상어에 대한 대책회의가 한창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 여력을 낭비하는 동안, 알프라이아 본 함대는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해역으로 진출할 것입니다.”

“더 이상 치제할 수 없소. 제해권을 상실한다면, 루브라-바일사르에서 생산되는 물자 수송에도 타격이 오게 돼.”

지크 백작의 말을 들은 케인이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중부 전선, 가르드 황자님의 기갑사단은 그대로 말라죽을 겁니다.”

제국군의 등뼈라고도 할 수 있는 중부 전선이 위험해진다.

그 의미를 알아챈 함장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우리에게도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은 벨로스터의 함장, 카일이었다.

“카일 제독. 수가 있는가?”

지크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다른 함장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백상어에서 부함장을 하던 해적이 입을 열었습니다. 놈들의 잠수함 운용 교리와 전투방식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죠.”

그렇게 말한 뒤 카일은 미리 준비해온 지도를 책상에 펼쳤다.

“놈들의 근거지는 잔스카르 해역에 있는 무인도입니다. 국제법상으로는 잔스카르의 영해지만, 빛의 장벽의 범위에는 들어오지 않죠.”

빛의 장벽. 오늘날의 기술 대국 잔스카르를 있게 해준 창조주의 유산의 이름이었다.

“놈들은 이 섬에서 제 2, 제 3의 백상어를 만들어 제국군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는가?”

“아뇨. 그 전에 자결했습니다.”

그 말에 제독들 몇몇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얀은 카일의 표정을 살핀 뒤 쓴웃음을 삼켰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주위를 둘러보자 얀 의외에도 지크 백작을 포함한 몇몇 함장들 또한 카일의 거짓말을 눈치챈 듯 보였다.

‘알프라이아가 배후라면 그것을 숨길 이유가 없지. 배후는 잔스카르. 그렇지만 알프라이아와 전쟁 중인 이상, 이 이상 전선을 늘릴 수는 없어.’

제국과 알프라이아의 중간지점.

대륙 중남부 지역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삼은 중립국 잔스카르는 그곳에서 제국과 알프라이아 간의 중계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제국이 제해권을 장악한다면, 알프라이아와 제국간의 세력균형은 붕괴된다. 제국의 승리로.’

두 나라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잔스카르로써는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래. 그럼 잔스카르 영해에 숨어있는 저들을 어떻게 소탕할 속셈인가?”

지크 백작의 질문에 카일이 얀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여기 있는 얀 베르쿠트 경을 중심으로 한, 침투조를 투입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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