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50화 (50/186)

50. 종자 아이린

“기, 기사님 방금…?”

“어. 니가 들은 게 맞아.”

갑작스럽게 이뤄진 얀의 폭탄선언에 맨 먼저 반응한 것은 형벌부대원들이었다.

“풉!”

“이야, 백마탄 왕자님이네?”

“애새끼 하나 구하려고 별 지랄을 다하십니다. 기사님! 하하하!”

조롱이 가득 담긴 그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린을 일으킨 얀은 모래가 묻은 그녀의 군복을 툭툭 털어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제안이야. 받아도 상관없고, 이 상황을 모면한 뒤에 떠나도 상관없어.”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그런 얀을 바라보는 아이린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받겠습니다.”

“좋아.”

미련할 정도로 빠른 결정. 그렇지만 한번 결정한 이상, 이 순간부터 그녀 또한 87중대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얀 베르쿠트는, 충성에 대한 보상을 소홀히 하는 자는 아니었다.

“제국 기사의 권한 중 이런 게 있지. 기사 본인, 혹은 주변인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판단할 시, 군법에 의거하여 그 즉시 처분한다.”

불합리할 정도로 편중된 기사의 특권. 그것을 듣자 낄낄거리며 얀을 비웃던 형벌부대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기사님, 지금 뭐라고…?”

“그리고 귀족을 핍박한 형벌부대원의 처분은, 즉결처형이다.”

기사의 특권과 형벌부대의 처분법을 모두 알고 있는 얀만이 가능한 결정.

홀스터에서 뽑혀 나온 권총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불을 뿜었다.

타앙-!

휴식으로 느슨해진 무인도에 불현 듯 울려 퍼진 총성. 순식간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얀을 향했다.

털썩!

순식간에 미간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채 널브러진 형벌부대원. 그것을 본 다른 부대원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얀의 권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탕! 타앙-!

그 자리에서 고혼으로 변한 세 명의 형벌부대원. 아이린을 구타하는 데 동참한 마지막 부대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노골적인 조롱이 이어졌다 해도, 본래 기사들은 형벌부대원들을 직접 처벌하지 않는다.

제국의 고명한 기사가 형벌부대와 같은 미천한 이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지휘 장교에게 한 마디만 해도 충분한 보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이 기사는 달랐다.

“기, 기사가 한낮 형벌부대원에게 손속을…!”

“니들 말대로 내가 시궁쥐 출신이라서, 세울 체면 같은 게 없다.”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권총을 겨눈 채 병사에게로 걸어가는 얀.

“아, 아아악!”

사격으로 한 것 달아오른 총구를 병사의 이마에 들이밀자 겁에 질린 형벌부대원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심한데 게임이나 하나 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두 발의 총알이 남은 리볼버릐 실린더를 회전시키는 얀,

촤르르륵!

쇳소리를 내며 돌아간 실린더를 따라 그것을 보는 병사의 눈도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나 신참 때 많이 했었거든.”

얀의 한마디와 함께 멈춰선 실린더. 그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얀이 병사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찰칵.

들려온 것은 리볼버의 해머가 빈 약실을 때리는 소리. 자신이 살았음을 알아챈 형벌부대원이 황급히 총구에게서 떨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살았네. 축하한다.”

이윽고 다시 실린더를 돌리며 총구를 그의 허벅지에 댄 얀. 그것을 본 병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다,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끝났지. 이건 그냥 내가 해보고 싶어서.”

그 한마디와 함께 얀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아아아아악-!”

권총탄이 허벅지를 뚫고 지나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형벌부대원이 몸부림쳤다.

그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의무병을 부른 얀은 그에게 지혈하라고 손짓하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주요 혈관은 피해갔다. 한 세 달 정도는 독방에 처박혀 있어.”

그렇게 말한 뒤 권총을 집어넣은 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케인과 카일이 있던 모닥불로 걸어갔다.

“아이락.”

“예!”

나지막이 종자의 가짜 이름을 부른 얀은 턱 끝으로 죽은 세 형벌부대원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니가 대충 버리고, 와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사라진 얀.

그렇게 아이린이 온 몸이 녹초가 되도록 죽은 세 사람의 시체를 옮기고 모두 묻을 때 까지,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

“미약한 수준이지만, 마력 적성이 있군.”

휴식과 중간 적재가 끝나고, 출항을 시작한 벨로스터와 수송선단.

벨로스터의 객실 중 하나에 모여 앉은 얀과 케인, 단델과 렌 네 사람은, 이제 막 일행에 합류한 아이린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즈, 증조부님께서 기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검의 시대에 기사를 하셨다니, 대단한 가문이었군.”

콜로서스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 시대. 마력을 정제해 그것을 검에 씌워 만들어내는 ‘오러 블레이드’가 전장을 지배했던 시기를 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의 마력을 다루는 이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콜로서스의 등장과 함께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는 기사들은 전쟁의 주역에서 밀려나, 이제는 소설 속의 로망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콜로서스가 막 등장했던 시대에는 콜로서스의 검에 오러를 씌우는 기사가 나왔다고도 전해지지.”

“초대 로렌츠 가주님 말씀이시군요!”

“우리 시조뿐만은 아닐세.”

그렇게 덧붙인 케인은 아이린의 손을 놓은 뒤 식탁 한 구석에 놓인 나이프를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우우웅-!

“오오!”

이윽고 나이프를 통해 흘러나오는 푸른색의 빛이 점차 나이프의 검날 전체를 파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후우!”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식은땀을 흘린 케인의 눈빛이 한 순간 흔들리자, 나이프를 감싼 오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나름 제국 최고의 기사라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이게 최선일세. 뭐, 이제 와서는 써먹을 수도 없는 능력이지만.”

“그래도 놀랍습니다! 진짜 오러 블레이드를 볼 줄이야!”

“말만이라도 고맙네.”

단델의 감탄에 멋쩍게 웃음지은 케인은 맞은편에 앉은 얀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정말이지, 종자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덜컥 정하는 기사가 어디에 있나?”

“따지고 보면 얀의 존재 자체가 이례 중의 이례.”

상황을 조용히 평가하는 렌의 한마디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기….”

신문에 나온 기사에, 은기사 케인에, 귀족 출신 장교에, 그림에나 나올 것 같은 순백의 소녀. 아무리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일행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아이린은 꿋꿋이 입을 열었다.

“조, 종자가 되면 전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아, 그래 그걸 말 안했군.”

그렇게 운을 띄운 케인이 웃음 띤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 그러니까 검의 시대에서는 종자의 일이 명확했지. 기사의 갑옷과 무기를 관리하고, 같이 전쟁에 나가는 이들이 종자였다네.”

그렇게 말하면서 케인은 테이블에 놓인 찻잎에 물을 부어 아이린에게 차 한 잔을 만들어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은기사가 직접 타주는 차.

상상도 못할 호사에 눈이 빙빙 돌았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은 케인의 설명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기사는 다르네. 무기와 갑옷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서스는 이미 전문 정비사가 붙어있으니까 말이지.”

“그럼 지금의 종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개인 집사처럼 기사의 시종을 맡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그저 후견을 위한 명목으로써 이용할 수도 있는 제도일세.”

그렇게 케인이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린. 이윽고 얀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종자라고는 하지만, 딱히 네 신분이 변한 것은 아니야.”

그 말에 차를 홀짝이던 아이린의 눈이 깊어졌다.

“다른 종자들처럼 편하게 해줄 생각 없어. 주둔지에 도착하는 대로 훈련 시작할 테니, 익숙해질 때까지 버텨.”

“알겠습니다!”

굳은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는 아이린을 슬쩍 본 얀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위, 어디 가나?”

“곧 도착입니다. 기체를 옮겨놔야죠.”

그렇게 말한 얀이 객실 밖으로 나가자 렌이 조용히 그를 따라나섰다.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아이린. 이내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델의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위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힘내!”

“예?”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의 손을 잡고 흔드는 단델.

그의 표정은 마치 옛날의 트라우마를 떠올린 자의 그것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죽으려고 해도 그놈들이 기어코 살려낼 테지만! 이 악물고 버텨줘! 우리 막내!”

“에, 예?”

기초부터 다시 훈련시켜주겠다면서 형벌부대원들과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른 지난날을 떠올린 단델은 눈앞에 있는 연약한 신병이 죽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

“또 답지 않은 짓을 했어.”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얀과 등을 맞대고 앉은 렌은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문 채 기체를 점검하는 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필요해서 들인 거야.”

“동정 때문이 아니고?”

“전혀.”

그렇게 일축한 얀이었지만, 이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단장이 추천하는 인재는 사실상 로렌츠 가문의 사람이야. 지금은 그를 위해 일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인데 그의 사람을 내 종자로 삼을 순 없지.”

“그럼 저 아이는?”

“정보원을 형벌부대에 입대시키는 정신 나간 귀족이 있을 것 같아?”

사망률 90%. 사실상 죽으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는 배치다.

“종자가 필요하다면 단델도 가능. 다른 부대원들도 있어.”

“어중간하게 작위를 지닌 귀족은 매수당할 가능성이 있어. 다른 부대원들은…. 나와 개인적으로 엮이는 순간 쓸데없는 알력이 생기겠지.”

동병상련으로 만난 이들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의 집합체. 총대를 멘 자신을 제외한 이들은 철저히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집단이든 내부 분제로 공중분해 될 테니까.

“신원을 의심할 필요 없는 형벌부대. 연고가 없으며, 성격에 결격사유가 없으니 종자로 적절하다?”

“그래.”

“핑계거리. 훌륭.”

짧게 평한 렌의 한마디에 얀이 짜증난다는 듯이 혀를 찼다.

“본심. 따로 있어.”

“…내가 처음 형벌부대에 왔을 때와 닮았어. 그게 이유다.”

그렇게 말하자 렌은 비로소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돼.”

“뭐?”

그렇게 얀이 되묻는 순간.

뿌우우우우우-!

도착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벨로스터의 화물칸이 열리며 그들의 새로운 주군지를 비췄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케인 경,”

가식이 가득 담긴 작위적인 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지크 백작의 등 뒤로 글레이프니르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지크 백작.”

“황제 폐하의 은덕이지요. 오시는 길에 있었던 전투는 들었습니다. 대단한 활약을 했다지요?”

“제가 아니라, 뒤에 있는 얀 중위입니다.”

“호오, 형벌부대 출신이라던 그…?”

그렇게 말하는 지크 백작의 등 뒤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음? 저 분들은….”

그들을 알아본 케인은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기를 지우지 않는 지크 백작은 태연한 얼굴로 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저 기사분들 말이시군요. 벨커스 가문에서 특별히 보내주신 분들입니다. 항구 방어의 한 축을 담당해주고 계시죠.”

그렇게 말하는 사이, 지크 백작의 등 뒤에 세워진 글레이프니르에서 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지크 백작님. 황제 폐하의 명으로 파견된 얀 베르쿠트입니다.”

얀의 인사에 이채를 띤 지크 백작이 웃음기 띈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얀에게 다가갔다.

“얀 중위. 자네….”

이윽고 지크 백작과 인사를 나누는 얀의 얼굴을 본 케인은 체념한 듯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을 알아본 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싱그러운 미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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