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바다의 콜로서스(2)
“바다는 처음인가?”
갑판 위에 나온 얀을 불러 세운 것은 셔츠 차림의 케인이었다.
“제독님과 함께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망쳐 나왔네. 아니면 술독에 빠져 죽을 것 같아서 말이지.”
여기도 임무 중 음주인가.
전방의 참상과 다르게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후방의 상태를 보며 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을 낙엽은 이미 모두 떨어지고,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이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수송선의 갑판을 스쳐지나가는 중이었지만, 케인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단장님께서는 익숙하신 모양이군요?”
“어릴 적에 여행으로나 와봤지. 전선으로 가는 것은 처음일세.”
그렇게 말한 뒤 난간에 기대선 얀에게 양철 술병을 건네는 케인.
“한 잔 들게. 어차피 바다에서 기사들은 짐짝이거든.”
“전 술 못 마십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주스로 바꿔왔네.”
케인이 그렇게 말하자 얀은 별말 없이 그가 준 술병 아니, 주스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산뜻한 과일 향과 그것만으로는 다 지울 수 없는 보존약품의 맛이 섞여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다.
“디아나 양에게 들었네. 출항 하루 전에 열 한명을 죽였다지?”
“제 머리에 맥주를 들이부어서요. 직권남용 좀 했습니다.”
“단델. 그 친구 때문이겠지.”
정곡을 찌르는 케인의 한마디에 얀의 눈이 깊어졌다.
“전 단장님과 한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날 위해 싸워라. 그렇게 말했었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레이하운드의 명성에 흠집이 나서는 안 됩니다.”
얀의 말을 들은 케인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술병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긴 싸움이 될 걸세. 벌써부터 그렇게 힘주고 있을 필요는 없어. 천천히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걸세.”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그리고 최소한의 손실로 해내야죠.”
한번 시작한 이상, 멈추거나 뒤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하이람 벨커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얀은 그렇게 다짐했다.
“수평선상에 함영 확인! 순양함 벨로스타 및 구축한 세 척을 확인! 2 함대의 정찰선단입니다!”
망루에 올라가있던 수병 한 명이 그렇게 외치자 갑판병들이 전송관을 통해 함교로 그 소식을 전했다.
“수기 신호 확인! 전선에 도착한 전사들을 환영한다! 이대로 직진하여 본 함과 합류할 것! 이상!”
그렇게 말한 수병이 함교에서 흘러나온 지시에 맞춰 점점 가까워지는 2함대를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환영에 감사한다. 제국에게 영광을.’
“수기 신호에 뭐 저리 미사여구를 많이 붙이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해군 나름대로의 문화겠죠. 저희가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수송선단과 정찰선단을 번갈아 보는 얀과 케인은 그렇게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수병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응?”
그러던 중,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 듯,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 있나?”
“정찰선단 쪽으로, 뭔가가 이동하는데요.”
그렇게 말한 케인은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오는 방향을 바라본 뒤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순양함도 거의 손가락 크기로 보이는데, 그게 다 보이는 건가?”
“예.”
그렇게 말하는 얀의 왼쪽 눈이 이전에 렌의 눈이 그러했듯 동공과 수정체의 크기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얀의 시야를 보정했다.
마치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에서 시야를 확대하듯이, 최대 망원으로 그것을 살핀 얀이 나지막이 욕지꺼리를 내뱉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해수면에 갑자기 뛰어올라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것.
“이런 씨발, 저거 어뢰잖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쿠콰앙-!
굉음과 함께 어뢰에 제대로 직격당한 구축함 한 척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불을 내뿜었다.
“적습! 적습이다!”
“폭발 방향 확인! 방위 북서 32도!”
“좌현 전타! 후속함은 본 함을 따라와라!”
확성기를 향해 울려 퍼지는 함장의 일갈과 함께 싸이렌 소리, 그리고 병사들을 부르는 종소리가 갑판을 가득 메웠다.
애애애애앵-!
“전투배치! 총원 전투배치!”
“전투라니? 이 배는 수송선이란 말이야!”
“저기 봐! 정찰선단이!”
투콰앙-!
이윽고 또 한 척의 구축함이 폭음을 내며 크게 휘청거렸다.
중앙을 맞지 않아 완전히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배의 상부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구축함에서 수병들이 하나하나 배 밖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투콰콰쾅-!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순양함의 주포가 어뢰가 진행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포탄을 낭비할 뿐이었다.
“제길,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곧바로 콜로서스에 타 전투에 참가했겠지만, 이 곳은 바다 한가운데.
육중한 철로 이루어진 콜로서스는 이 망망대해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방위 북동 32도에서 잠망경 확인! 백상어들입니다!”
“벨로스터에게 전달해라! 어서!”
멀리 떨어진 순양함을 향해 신호기를 흔드는 수병.
그것을 확인한 벨로스터의 주포가 조준점을 찾는 동안, 마지막 남은 구축함이 수송선이 표시한 지역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푸쉬익-!
이윽고 구축함의 뒷갑판에서 튀어 오르는 기뢰들이 궤적을 그리며 수중에서 폭발했지만, 원하던 잠수함을 찾아내지 못한 것인지, 순양함을 향해 발광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도망친 건가?”
“아뇨. 그대로입니다. 구축함 바로 밑에 있어요.”
렌이 이식해준 눈을 통해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낸 얀이지만, 수병을 붙잡고 말해봐야 소용없었다.
“기사님들은 안으로 피하십시오!”
“잠수함의 위치를….”
“지상전이라면 몰라도, 해전은 저희 영역입니다! 책임지고 거점까지 모실 테니,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자신이 저 수병이라도 지상전만 하던 기사가 잠수함의 위치를 알았다고 하면 헛소리라고 생각하겠지.
으지직!
그렇게 생각한 순간, 수병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게 무슨…!”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마치 손으로 잡아 부러트린 듯, 기뢰를 뿌리던 구축함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그 구축함의 잔해를 뚫고, 수면 위에서 불쑥 솟아오른 잠수함의 선두.
은폐를 위해 검게 칠해진 다른 잠수함과는 달리, 새하얗게 빛나는 이질적인 모습은, 저 잠수함의 별명이 왜 백상어인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이대로라면 전입신고를 하기도 전에 부대가 사라질 판이군.”
그렇게 말한 얀은 혀를 한번 찬 뒤 화물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얀! 자네 어디로 가나!”
“갑판 엘리베이터를 열라고 말해주십시오!”
“어쩔 생각인가! 콜로서스는…!”
“로렌츠의 이름이든 단장님 직권이든 좋으니 어떻게든 열어주십시오!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알겠네!”
케인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글레이프니르. 그것을 이 곳으로 보낸 이가 황제임을 떠올린 케인은 그 길로 곧장 함교로 향했다.
[파일럿 탑승 확인.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기동.]
우우웅-
닐의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의 기계장치에 전선을 연결한 얀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지하로 내려온 수병들이 황급히 레버를 당겨 수송선의 갑판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쿵-! 쿵-!
거점 방어용 콜로서스와 차량들을 잔뜩 실은 거대한 수송선이기에 글레이프니르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낼 수 있었다.
이윽고 아래의 엘리베이터에 모습을 드러낸 검은 콜로서스의 모습에 불안한 눈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그 곳을 돌아보았다.
“콜로서스?”
“갑판에서 뭘 할 속셈이지?”
“돌격포라도 쏠 생각인가? 미쳤군!”
부정적인 평가가 줄을 이었지만 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시야에 표시된 흰 색의 잠수함, 백상어를 바라보았다.
[기체 대조. 이집트 연합국 제식 잠수함. 투르모세 급. 제원 정보 출력.]
“저것도 고대인의 유산이었나.”
저것이 황제가 말한 해적의 정체이며, 자신을 이 전선에 보낸 이유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얀은 글레이프니르의 무장을 점검하며 물었다.
“그렇다는 건, 저 배에 탄 녀석도 나나 라엘처럼 고대인의 피를 타고난 녀석인가?”
그렇게 물었지만 닐의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해당 장비는 인류연방 창설 이전의 무기체계임. 따라서 본 기체와 같은 나노머신에 의한 제어 시스템은 탑재되어 있지 않음.]
“고대인의 유물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란 말이군,”
그렇게 말하며 얀은 레일 캐논의 장탄수를 확인했다.
역시, 수리에 전념한 탓에 비축된 탄환은 한 발 뿐이었다.
“야, 닐. 너 이거 한방에 맞출 수 있냐.”
[부정. 해당 장비에는 본 기체의 조준을 무력화하는 특수 도료가 사용됨. 효력사를 위해선 최소 세 발 이상의 관측 사격이 필요함.]
“그럼 당장 이걸 쓸 수는 없겠군.”
케르단 전선에서 출발한 정비팀이 언제 도착할지도 불투명한 상황에, 유일한 탄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얀은 주변을 둘러보던 중, 수송선의 한 구석에 쌓여있는 철근을 보며 눈을 빛냈다.
“너, 물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고 했지?”
[긍정.]
“그럼 같이 수영이나 좀 하자고.”
그렇게 말한 뒤 글레이프니르는 수송선에 비치된 철근 하나를 손에 쥔 채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콜로서스가 올라온다!”
“다들 갑판을 비워! 미친 기사가 콜로서스에 탔다!”
무기가 탑재되지 않은 탓에 잠수함의 위치를 살피며 그것을 보고하는 데에 열중하던 수병들이 갑판 위로 솟아오르는 검은 콜로서스의 모습을 보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완전히 올라온 글레이프니르.
거대한 진회색 콜로서스의 한 팔에는, 마치 나사처럼 끝을 뾰족하게 깎아낸 철근이 작살처럼 쥐어져있었다.
“저게 지금, 뭘 하려는 거야?”
- 다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인 글레이프니르가 몇 걸음을 걸어간 뒤 자세를 낮췄다.
“자, 잠깐만….”
“설마 저거…!”
그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수병들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각자 미친 듯이 난간에 매달렸을 때.
투웅-!
수송선의 중앙이 크게 요동치며 글레이프니르의 거체가 위로 솟아올랐다.
“저게 무슨!?”
“콜로서스가 도약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높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수병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이, 하늘 높이 뛰어오른 얀은 자신의 발아래에 보이는 백상어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미꾸라지 새끼가, 어딜 도망가?”
사냥감을 찾은 짐승과 같은 소름끼치는 한 마디.
그러나 그것을 감지한 백상어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촤르르륵!
[적 기체, 미사일 해치 개방 확인.]
“미사일? 그게 뭔데?”
처음 듣는 용어에 얀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투화악-!
잠수함의 등판에서 순식간에 열 개의 문이 열리더니, 그곳에서 화염과 함께 솟아오른 무언가가 하늘 위에 떠있는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대전 시대 함대공 미사일 RIM-27 확인. 표적신호 해석 완료. 플레어 사출.]
푸화악-!
닐의 목소리와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등 쪽 장갑판이 열리며 연기를 내뿜는 수많은 빛줄기를 내뿜었다.
“야, 저것 좀 봐….”
“하늘에, 콜로서스가….”
수송선에 타 있던 수병들, 그리고 갑자기 하늘 위에 나타난 콜로서스를 바라본 순양함 벨로스터의 수병들이 넋이 나간 듯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 체공해있는 글레이프니르의 양 옆으로 뿜어져나가는 빛과 연기. 연기로 된 두 날개를 펼친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천사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어….”
그래. 그 모습은 마치, 성화 속에 기록된 천사. 묵시록의 성전에 나온다고 전해져오는 창을 든 천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쐐애애액!
신호가 교란된 탓에 글레이프니르의 양 옆으로 비껴나간 열 발의 탄두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이윽고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을 알아챈 백상어가 황급히 물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그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쇄도한 글레이프니르와 그것의 손에 들린 철근이 굉음과 함께 백상어의 상판을 향해 처박혔다.
투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