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바다의 콜로서스(1)
‘좆됐다…. 진짜 좆됐다…!’
얀이 지목한 결투장소는 디아나 가문의 저택 연무장.
얀의 서슬퍼런 선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나온 열 한명의 남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중대장님. 진짜 저 때문에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결투 선언 끝났어.”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들을 기다리는 얀. 이윽고 다가오는 남자들은 얀의 어깨에 새겨진 형벌부대의 낙인을 보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 뭐야. 기사한테 저 낙인이 왜 있어?”
“이번 서임식 때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황제 폐하가 직접 말을 거셨다던….”
“미친, 거물이었잖아! 이제 어쩔 거야…!”
이미 결투의 대상이 된 최악의 상황.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이리저리 재는 남자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시장 양아치들 치고는 소식이 빠른데?”
“중대장님 오늘 신문 1면에 나오셨는데요.”
“내가?”
“모르셨습니까?”
그러는 사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얀의 모습에 남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귀하신 분을 몰라 뵙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상대는 기사. 심지어 형벌부대 출신의 미친 개였다.
머리를 빠르게 굴린 이들은 곧바로 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가 전부냐?”
“예?”
“마약. 내 부하가 연류 된 사실을 아는 거. 너희가 전부냐고.”
이 상황에 머리를 굴릴 틈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쓸개라도 뽑아 내어줘야 할 판이었으니까.
“저, 저희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린 적 없…!”
거기까지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스걱!
그대로 목을 부여잡은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히, 히이익!?”
“제, 제발! 결투는 저희가 졌…!”
그렇게 패배를 시인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다시 휘둘러진 얀의 검이 그들의 목을 차례대로 그어나갔다.
“크흑!?”
“아아악!”
“제발, 제발 용서를…!”
이렇게 되자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오히려 단델이었다.
나지막이 남은 이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얀을 보자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덤벼들기 시작했다.
“으아아!”
남은 수는 약 다섯.
동시에 달려드는 이들을 막는 것은 아무리 숙련된 군인이라 할지라도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이동 동선 분석 완료. 화면에 표시.]
그렇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얀은 그들의 공격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이리저리 피해내면서 그들의 목을 차례대로 베어나가고 있었다.
‘설마 시력 말고 다른 기능도 있었을 줄이야.’
렌이 이식한 왼쪽 눈을 통해 보이는 시야는 마치 그가 글레이프니르에 탔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근육의 수축, 동공의 방향, 운동 방향 등, 수많은 변수를 계산한 뒤 이후의 행동을 예측해 실루엣으로 보여주는 그의 왼쪽 눈.
‘머릿속에서까지 이 녀석 목소리를 들어야한다니.’
뇌 속에서 울리는 닐의 목소리를 들은 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닐의 도움을 탑승 하지 않고서도 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순식간에 네 명을 해치운 얀. 이윽고 마지막 남은 남자에게 다가가는 얀을 불러 세운 단델이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묵은 원한이긴 했지만, 전부 죽일 필요까지는…!”
“네 복수 대신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얀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마지막 한 명의 목에 검을 쑤셔 박았다.
“끄윽!?”
“어차피 한 번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윽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피 묻은 검을 닦아낸 얀이 그것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주, 중대장님….”
“단델 클라우스. 넌 우리 부대에서 유일한 귀족 출신의 장교며, 낙인이 없는 대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얀의 말을 들은 단델이 의아한 듯 말했다.
“저, 저희 부대는 클라우스 황자님 직속으로….”
“계승권 최하위의 황자가 형벌부대를 사적으로 운용한다는데, 아무런 견제도 없을 것 같아?”
클라우스의 계승권은 13위. 즉 그의 위에는 열 두 명의 계승권좌가 차기 황좌를 노리며 경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이들 모두가 각자의 세력을 구축하고 암약하고 있는 것이 제국.
잃을 것 없이 악만 남은 형벌부대라는 집단을 수족으로 부릴 생각은 한 것은 클라우스 황자가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다른 귀족들이 이걸 실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
상관 살해를 밥 먹듯이 하는 형벌부대의 틈바구니에 껴있는 귀족 출신의 장교.
그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얀이 속한 그레이하운드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있는 꼴이었다.
“물론 가장 큰 방편은 로렌츠를 등에 업은 케인 기사단장님이지만, 현재 이 근본 없는 부대의 목줄 노릇을 하고 있는 건 부중대장인 너다.”
“제가, 말입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은 단델의 말에 얀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우리 부대에서 유일한 귀족 출신에, 언제든지 흠집 낼 수 있는 군소귀족. 거기에 서자.”
가차 없이 자신의 처지를 나열하는 얀의 말에 단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다면, 그걸 빌미로 황자님이나 단장님에게 온갖 시비가 걸려오겠지.”
“그럼, 만일 제가 부대에서 빠지게 된다면….”
“형벌부대의 단독 편성은 위험하다 판단되어 일반 부대로 재편성. 최악의 경우에는 이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야 해.”
이 부대가 만들어질 때, 얀은 그들에게 말했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얻어줄 테니, 싸우다 죽으라고.
그의 부대원들. 그레이하운드 독립중대는 얀이 요구한 것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얀 또한 그들에게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언젠가는 내가 네 역할을 하게 될 거야. 황제의 신임이든 귀족의 뒤를 핥든, 뭐든지 해서 얻어낼 거다.”
얀이 그리고 있는 청사진. 단델 자신은 그 그림 속의 부품일 뿐이다.
얀은 자신의 부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진 어떤 문제에도 휘말리지 마. 거슬리는 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없앨 테니.”
“….”
그렇게 말한 얀은 몸을 돌려 저택 한 구석으로 들어갔다.
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의 시체 사이에서 말없이 서있던 단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
“바인스버그! 바인스버그입니다!”
항구도시 바인스버그는 수도만큼의 인파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목적지로 삼은 이들은 잔스카르와의 무역을 위해 찾아오는 사업가와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차 안에서 다음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행히도 지연이 없군.”
“동감입니다.”
수도로 향하는 여정을 함께 한 얀과 렌, 케인과 단델은 두 번째로 만나는 항구도시의 역에서 나와 화물칸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차출된 건, 저와 중대원들뿐인데 단장님도 동행하십니까?”
“케르단 지역에 갔을 때랑 같은 이유일세. 사기 증진을 위한 방문이지.”
“황자님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탄 기차에 명령서가 들어있을 테니, 아마 다음주는 돼야 할 걸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화물칸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병사들이 전선으로 갈 보급품들을 차량에 싣고 있었다.
“항구까지는 운송했지만, 배에 적재하는 건 기사의 몫일세. 배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단델과 함께 배 쪽으로 걸어가는 케인. 그것을 바라본 얀은 열차 두 칸을 통째로 차지한 글레이프니르 안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구동음과 함께 가동된 글레이프니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얀은 항구 한편에 정박된 수송선 중 하나로 그 거체를 옮겨갔다.
“적재 완료했습니다! 객실로 이동해주십시오!”
갑판병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얀과 렌은 계단을 타고 수송선 한편에 있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오, 왔군.”
“중대장님 보세요! 바다입니다!”
갑판에는 출항에 앞서 나와 있는 수병들로 가득했다.
항구에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은 이 병사들의 가족인 듯, 떠나는 이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제국에게 승리를!”
“살아 돌아와라! 아들!”
“나도 곧 뒤따라간다! 자리 잘 닦아놔!”
몰려오는 걱정을 함성과 환호로 덮으려는 듯, 손을 흔드는 사람들과 거기에 답하듯 마주 손을 흔드는 병사들.
얀은 망연한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호, 혹시 기사님이십니까?”
“응?”
한편에서 들려온 앳된 미성. 처음에는 케인에게 한 말인 줄 알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영광입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게.”
“기사단장님 저도!”
“이쪽도 부탁드립니다!”
그렇지만 이미 신병들과 사관들에게 둘러싸인 케인의 모습을 확인한 얀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나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빠릿한 신병으로 보이는 병사. 군모 사이로 삐져나온 금발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너무 작은데, 이 몸으로 징병검사를 통과했다고?’
16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키에 가녀린 몸. 그리고 험한 일을 해본 적 없을 것만 같은 새하얀 얼굴.
“아까 화물칸에 콜로서스 적재하시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아, 그래. 나 맞지.”
계급장을 보아하니 이등병. 그리고 어깨에 달려있는 낙인을 본 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형벌부대?”
“아, 예! 2함대 순양함 벨로스터의 하부 갑판에 배정받았습니다!”
자신에게 달린 낙인과 기사 문양을 본 것일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얀을 바라보는 병사를 잠시 바라본 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벌부대에 사연 없이 들어온 병사는 없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그,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병사가 등 뒤에 매고 있던 자신의 철모를 내밀었다.
“…서명?”
자기 서명을 뭐 하러?
그렇게 생각한 얀이었지만 이내 옆에 있는 케인이 하는 것을 본 그는 알겠다는 듯이 그 철모를 받아들었다.
‘사격 금지구역’
‘콜로서스가 이 뒤에 있다’
‘은기사 공인 베테랑’
군복, 철모, 손수건…. 온갖 잡다한 것들에 병사들이 요청하는 수많은 문구들을 고풍스러운 필체로 적어주는 케인의 모습.
“옆에 더 명망 있는 기사가 있을 텐데.”
“저기는…. 저 같은 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서요.”
그렇게 말하는 병사는 조금 위축된 듯이 보였다.
케르단 전선에 너무 오래 있어서인지, 평소 형벌부대의 취급을 잊었던 걸까. 그것을 기억해낸 얀은 어깨를 으쓱한 뒤 병사가 건넨 철모를 받아들었다.
“뭐라고 쓰면 되는데.”
“그…. 아이린, 이라고 적어주십시오.”
아이린?
의아한 표정을 한 얀이 병사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봤다.
‘아이락 펜튼…. 가명이군.’
어느 정도 그의, 아니, 그녀의 사연이 조금은 짐작이 가는 듯 했다.
“누구 이름이지?”
“여, 여동생의 이름입니다.”
“널 대신해서 형벌부대에 들어온 여동생?”
그렇게 말하는 얀의 질문은 눈앞에 있는 병사가 아닌 자신을 대신해 그녀를 전장으로 보낸 오라비를 향하고 있었다.
“…!”
“걱정 마라. 말할 생각 없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눈 앞의 여인에게 그렇게 말한 얀은 철모에 그녀의 진짜 이름, ‘아이린’을 적어준 뒤 그녀에게 건넸다.
“벨로스터 배속이면 그쪽에서도 다시 보겠네.”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린 얀은 뒤를 돌아 아직까지도 병사들에게 잡혀있는 케인을 끄집어냈다.
“어어? 얀 중위, 무슨 일인가?”
“여기 갑판병만 수천 명인데, 그걸 다 받아주실 생각입니까?”
그렇게 말한 뒤 일행들을 이끌고 객실로 들어간 얀. 망연하게 그 모습을 본 아이락 아니, 아이린은 얀이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땡-! 땡-! 땡-!
“출항합니다!”
커다란 수송선이 울음소리를 내듯이 뱃고동을 울린다. 서서히 항구에서 멀어져가는 거대한 강철 배는, 그 안에 몸을 맡긴 이들을 데리고 전선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