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45화 (45/186)

45. 결투(2)

항상 권태로웠던 아침과 다르게, 오늘 잠에서 깬 얀의 온 몸은 충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

그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정복을 차려입고 케인이 마련해 준 숙소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벨커스 가문 인간들이 보낸 사과문과 편지로 우체통이 터질 듯 부풀어있었다.

‘가문의 불찰로 인해 귀하의 명예를 더럽힌 점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미천한 아들은 마지막 남은 저희 가문의 적자로써….’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 된 편지 하나를 들어 보인 얀은 거기에 써진 내용을 읽고 피식 웃음 지었다.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이었나 보네?”

란델 벨커스의 사망 이후 마지막 남은 아들이라.

벨커스의 막내 사위였던 란델 덕분에 벨커스의 지위를 얻게 된 가문은 이번 결투로 완전히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몸져누웠다더니, 편지할 기운은 남아 있나보지?”

그렇게 말하며 우체통에 박혀있는 수십 통의 편지를 뽑아낸 다음 읽던 편지와 함께 그것을 대충 방 안으로 던져놓았다.

“왔다!”

“아직도 화가 난 모양인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와의 결투는 하지 않는 것이 귀족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한 번의 결투로 인해 가문의 대가 끊겨버린다는 것은 그 손실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후계자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람은 그리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없다.

“나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원한에 미쳐 자기 형님의 명예를 더럽힌 꼴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번 결투에서는 오히려 얀의 편을 들어주는 귀족들이 많았다.

막내 사위가문. 즉 저들은 벨커스의 직계도 아닌데다가, 무엇보다도 결투의 당위성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사실상 죽은 란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외부인인 얀이 발 벗고 나선 셈이 되니, 반델의 아버지조차도 함부로 이 결투를 말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뽑으시죠.”

먼저 검을 빼들고 차가운 눈으로 반델을 노려보는 얀.

그와 달리 반델은 검을 잡아본 것조차 처음인 듯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 난 원래 이럴 생각이….”

“제국의 귀족 된 자가, 신성한 결투에서 도망칠 생각입니까?”

할 수 없다. 불가능했다.

결투가 선언된 시점에서, 이 자리는 황제의 이름으로 보증한 장소가 된다.

도망친다는 것은 황제의 칙령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

반역이었다.

“으, 으윽…!”

반델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검을 뽑았다.

이전의 란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한 자세. 검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자였다.

“집사.”

“예.”

그것을 본 벨커스 백작은 나지막이 옆에 서 있는 집사를 불렀다.

“반델이 관리하던 물류사업은 우선 둘째에게 이관하게. 잡음은 내가 처리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집사를 본 하이람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친족은 아니라고 하나, 가문 하나를 통째로 잃었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결투가 선언된 시점에서 벨커스 백작은 반델과 그 가족을 포기했다.

직접 황제의 은혜를 입은 기사를 모욕한 죄. 그 죄인을 감싸는 가문은 곧바로 황제의 눈 밖에 나겠지.

‘이런 일로 본색을 드러낼 수는 없어. 아직…. 아직 때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결투는 이미 끝나있었다.

“끄으윽!?”

얀이 뽑아든 군도가 반델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그 뒤 허리를 한번, 목을 두 번 빠르게 그어버린 얀은 한숨을 내쉬며 군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털썩!

“결투 종료! 승자는 무소속 기사, 얀 베르쿠트!”

입회를 받은 케인의 외침과 함께 곳곳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저 집안은 끝났군.”

“두 달 만에 아들들을 전부 잃다니….”

“자업자득이지. 자업자득이야. 쯧쯧….”

검집에 검을 넣은 얀은 피웅덩이 속에 쓰러진 반델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 그 곳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벨커스 백작이었다.

싱긋!

“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벨커스 백작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얀.

마치 공장에서 틀로 찍어낸 것 같은 가식적인 웃음을 바라본 벨커스 백작은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것만 같은 긴장을 느꼈다.

‘그래, 저 기사는 내가 포섭할 수 없는 자로군.’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결투장에서 자신에게만 보인 그 웃음.

그것을 본 하이람은 서임식에서 느꼈던 그 진득한 살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 얀 베르쿠트!”

결투가 끝나자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금색 견장과 붉은색 제복. 바로 곁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였다.

“흠!”

바닥에 널브러진 반델의 시체를 본 그는 잠시 침음성을 흘린 뒤 얀에게 다가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황제 폐하의 친서다.”

그 말을 들은 얀은 곧바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 카르디어스 반 바일사르가 그대를 부르니, 기사 얀 베르쿠트는 이 내용을 듣는 즉시 황성으로 오라!”

“기사 얀 베르쿠트.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황제의 명을 복창한 뒤 일어서 걸어가는 얀의 뒤로, 황제의 친서를 전한 친위대가 따라붙었다.

이윽고 결투장을 나서 대로변으로 나서자 네 필의 말이 이끄는 화려한 마차가 얀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대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 직접 부르시다니, 이게 얼마만의…!”

이례를 넘어 파격에 가까운 취급에 그 광경을 보는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가 친서로 직접 부르는 것은 최소 백작위 이상의 고위귀족들 뿐.

그마저도 하이람과 같은 신흥 귀족들을 제외된, 원로원들 만의 특권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얀은, 원로는 커녕 가문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름 없는 기사를 황제가 직접 부르다니?

“벨커스 백작. 이건…!”

“오늘 일어날 결투를 모르실 폐하가 아닙니다. 이 시간에 굳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면서 신흥 귀족들이 하이람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결투 장소는 벨커스의 저택 안.

벨커스의 안뜰에서, 벨커스의 인물이 죽었을 때 나타나, 벨커스의 일원을 죽인 자를 직접 부른다.

“폐하께서 직접 그를 보호함으로써, 벨커스. 나아가서는 신흥 귀족인 우리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신 것이죠.”

하이람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 이러신단 말입니까. 제국을 위해 분골쇄신한 우리들을 어째서…!”

“그만. 섣부른 언행은 황제파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분에 못 이겨 하는 귀족들을 말린 하이람이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기다립시다. 전쟁으로 공을 세우고, 전선에서 저희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폐하께서도 우릴 이렇게 무시하시지 못할 겁니다.”

***

“폐하. 기사 얀 베르쿠트가 도착했습니다.”

고풍스러운 검은 옷으로 온 몸을 두른 시녀장이 문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들어오라.”

문 밖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문 너머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 시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신호를 알아챈 기사 두 명이 왕의 거처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흠….”

황제의 침소.

그곳에서 황제는 책상에 놓인 지도에 온갖 모양의 조각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보는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 압도적인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이, 안경을 쓴 채 병서와 지도를 번갈아 보는 카르디어스 황제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개를 들던 편히 앉던, 마음대로 하거라.”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은 얀에게 그렇게 말한 뒤, 황제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눈만을 들어 황제의 앞에 놓인 지도를 엿본 얀은, 그것이 제국 전체에 퍼진 전선과 병력배치를 나타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벨커스의 사위를 죽였다지?”

무릎을 꿇은 얀은 보이지도 않는 듯, 조각상을 움직이던 황제가 그 모습 그대로 말했다.

마치 마실 나온 노인이 날씨를 물어보듯, 평온한 목소리. 흰 비단옷으로 몸을 두른 황제는 대관식을 할 때의 위엄 넘치는 모습이 아닌, 고명한 학자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전우를 모욕한 자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전우.”

그렇게 말하며 병사의 모양을 한 조각상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황제가 말했다.

“전우로서 적의 깃발을 등에 진 채 적의 아우를 죽였으니, 복수의 시작으로써는 나쁘지 않구나.”

황제의 그 한마디에 뭔가 더 말을 꺼내려던 얀이 굳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퍽 재미있었다.”

짧게 평한 황제의 한 마디.

‘알고 있어? 어떻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과정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황제가, 어떻게 알아챈 거지?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여전히 얀에게는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지도만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가 입을 열었다.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본 네 눈빛과 네 행적으로 지레짐작 했을 뿐.”

유도심문.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전….”

“칼끝은 하이람, 그 영악한 뱀을 향하는 것이겠지. 그 사연은 내 묻지 않으마.”

조각상 하나를 잡은 뒤 그것을 바라본 채 말하는 황제.

손에 든 콜로서스 모양의 조각상은 다른 조각상들과는 달리, 검은 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시작은 좋았으나, 너무 일을 서두르게 된다면 자연히 이를 그르치는 법. 이번 복수는 여기서 멈추 거라. 영악한 뱀은 이미 이빨에 독을 채우고 있더구나.”

황제의 말을 들은 얀이 결투장에 모여 있던 하이람과 그의 주변에 모였던 귀족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이 이상 자극한다면 오히려 내가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

얀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카르디어스 황제가 얀에게 말했다.

“난 어느 날, 마당에 뱀을 한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집 밖에 풀어놓아 벌레나 잡을 심산으로 먹이도 주고, 가끔 들여봐주곤 했지.”

맥락 없이 이어진 황제의 이야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얼굴을 찡그린 얀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황제가 말한 뱀이 누구를 가르키고 있는지 말이다.

“헌데 그 뱀이 집안 곳곳에 알을 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자꾸 집안으로 머리를 들이대는 게 아니냐? 허니 내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그 뱀이 어찌나 많은지, 마당으로 나가려 하면 제 주인을 물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얀이 조용히 눈을 빛냈다.

“하여, 내 그 뱀을 잡아낼 땅꾼을 찾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네가 내 앞에 나타나더구나.”

탁!

지도의 한 지점에 검은 콜로서스 조각상을 놓은 황제가 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대인의 유산에만 시선이 가 있던 그 아이가 드디어 그 결실을 보았구나. 타우르를 쓰러트린 것은 네 공이 컸다.”

“감사합니다.”

짧은 치하에 예를 표한 얀을 조용히 바라보는 황제.

“클라우스에게 전해 들었다. 고대인의 콜로서스를 다룬다지?”

“운 좋게 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허허,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얀의 대답에 그렇게 답한 황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보고 있던 지도 한 편에 놓았다.

“그렇기에 내 클라우스 녀석을 통해 너에게 일을 하나 맡기려고 한다.”

“하명하십시오.”

얀이 그렇게 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밖을 향해 손짓하자, 어둠 속에서 나타난 두 기사가 얀의 눈앞에 황제가 바라보던 지도를 보였다.

맨 처음에는 북쪽, 케르단 대삼림에 있던 검은 콜로서스 조각상이, 이제는 제국의 남부, 바일사르 해 연안에 가 있는 것이 보였다.

“남극 항로를 관리하는 지크 백작의 2함대가 요즘 해적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들은 얀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알프라이아 군과 정면대결을 할 수 있는 함대가 해적에게 피해?’

말도 안 된다. 한 척의 군함도 아니고, 군함으로 이루어진 함대.

그것을 위협할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해적이 아닌 하나의 군벌이었다.

그것도 제국과 거의 동등한 힘을 가진.

‘알프라이아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군.’

그렇게 생각한 얀이었지만, 아직 두 번째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폐하. 콜로서스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지. 그렇지만 네 콜로서스는 다르지 않더냐?”

그 말을 들은 얀은 되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글레이프니르가 수중 운용이 가능하다고? 금시초문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얀이었지만, 황제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글레이프니르와 같은 고대의 콜로서스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걱정 말거라. 넌 잘 해낼 수 있을 테니. 부탁해도 되겠느냐?”

그렇게 말한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는 얀.

“명에 따르겠습니다. 폐하.”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카르디어스 황제가 손짓하자, 얀은 황제의 침소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 이윽고 어둠 속에서 소년 한 명이 나타나더니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폐하. 어째서 일개 기사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한 것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향해 푸근한 웃음을 지어보인 황제.

‘부탁해도 되겠느냐?’ 황제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가문도 없는 기사에게,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그것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이치라니요…?”

“너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단지 그렇게만 알아두거라.”

그렇게 말한 황제는 이윽고 다시 안경을 쓰더니, 소년을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자. 오늘은 무엇을 배워보고 싶으냐?”

“그럼 소자, 오늘은 알피와 라이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그럼 이 할애비가 아는 것을 말해주마….”

껄걸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황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은 어느덧 저물어, 형형색색의 노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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