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44화 (44/186)

44. 결투(1)

“얀 중위, 안에 있나?”

노크소리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불렀지. 자네를 찾는 귀족들이 바일사르 전체에 깔렸거든.”

그렇게 말한 케인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길거리에서 사온 음식을 우물거리는 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디아나 양. 실례하겠습니다.”

끄덕.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렌이 침대에 걸터앉은 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 그저 오늘 서임 받은 기사에 불과한데요.”

“서임받자마자 황제 폐하와 독대한 기사지. 귀족사회에서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케인이 이마를 짚었다.

태연히 옷 단추를 풀어 옷걸이에 걸어놓는 얀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려는 케인.

“얀.”

“….”

“단추, 잘못 풀고 있어.”

조용한 목소리로 얀을 지적하는 렌의 목소리를 듣자 케인의 시선이 변했다.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얀 베르쿠트의 손이, 옷 단추 하나를 제대로 풀지 못 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자네….”

“예. 떨고 있습니다. 형벌부대에 처음 입대했을 때와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이군요.”

단추를 풀던 손을 놓고 한숨 쉬는 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양 손에는 아직까지도 미미한 떨림이 남아있었다.

“벨커스 백작의 얼굴을 봤습니다. 제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면 당장에 숨통을 끊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조급해 하지 말게. 서서히 놈에게 가까워 질 테니.”

“전 글레이프니르가 수리되는 즉시 벨커스 백작을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예상 밖의 폭탄선언에 케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도 한복판에서, 콜로서스로 난동을 부리겠다고?

미친 짓이다!

“자네, 그런 짓을 하면 시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가…!”

“하이람 벨커스. 그자를 죽일 수 있다면, 전 이 도시의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 해도 그리 할 겁니다.”

“…!”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만 그 계획을 말한 얀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지만 이제 전부 수포가 되었죠. 황제의 관심을 끈 탓에 모든 이목이 제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얀의 책상 앞에 놓여있는 초대장. 하이람 벨커스가 보낸 친필 초대장이었다.

“그 집중된 이목이 오히려 기회를 주는 것 같군.”

케인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얀 베르쿠트 경. 계십니까?”

정중한 목소리. 이윽고 잠시 후 한 번 더 들려오는 노크소리와 함께 안내원이 자신이 소속을 밝혔다.

“벨커스 가문의 안내원입니다. 초대장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어쩔 텐가?”

여전히 떨리는 팔.

그렇지만 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완전히 떨림을 멈춘 얀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뒤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차를 준비해주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

다그닥! 다그닥!

두 필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한밤중의 마일사르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새로 취임한 열 다섯 명의 벨커스 기사들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무도회. 그곳에 얀이 초대된 것이다.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었는데.”

“같이 참석할 레이디를 데려오는 것이 편해. 그게 아니면 귀찮아져.”

“귀찮다니?”

얀의 의문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 케인이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날 보면 알게 될 걸세.”

그렇게 도착한 벨커스 저택은 렌이 사용하는 디아나 자작가의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군요.”

그렇게 말하는 얀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케인은 쓰게 웃으면서 벨커스의 저택을 평했다.

“가문의 모든 역량을 자신의 영지가 아닌 수도에 집중한 걸세. 외부에서 볼 때는 화려해보이지만, 가문의 근간이 되는 영지를 관리하지 않는다면, 이건 전부 껍데기에 불과해.”

“단장님 지금, 벨커스 대문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렇게 되묻는 얀.

뒤에 서있는 벨커스 가문의 문지기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케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렌츠와 벨커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결투가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알고 있나?”

“일 년에 열 번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한 달에 열 번일세.”

말문이 막힌 얀을 재촉하며 케인은 벨커스 저택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에 그랬던 대로, 얀의 팔짱에 꼭 붙어있는 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벨커스 저택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얀 베르쿠트 경. 케인 로렌츠 경.”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끼어들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벨커스 백작.”

“하하하, 아닙니다. 제국 최고의 기사를 대접한다니, 가문의 영광이지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볍게 목례만 하는 얀을 보며 하이람은 쓰게 웃었다.

“기사님께 이런 아름다운 레이디가 함께할 줄은 몰랐군요. 성함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디아나 렌입니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예를 표하는 렌. 교본에 나와도 손색이 없는 모습에 벨커스 백작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사교계의 정보는 나름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영애가 있었나?’

본 적이 없는 새하얀 소녀의 등장에 혼란을 느낀 벨커스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로렌츠의 끄나풀, 혹은 사냥개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완전히 판이 뒤바뀌었어.’

눈앞에 서있는 것은 첫 서임 때 황제와 독대를 마친 기사.

그런 자가 케인 로렌츠와 함께한다는 것은 벨커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첫 회유에 실패한다면 눈엣가시가 될 게 뻔한데…. 회유할 재료조차도 없어.’

형벌부대 출신이었기에 인적사항도, 가족사항도 알 수가 없다.

기밀자료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아예 쓸모없는 정보로 분류되어 완전히 파기된 것이다.

눈앞의 기사의 고향은 어디인지, 부모는 누구인지, 어떤 정보망을 동원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동료를 찾아 캐물으려고 해도 그의 출신을 알 법한 이들은 진작에 사망했지.’

말 그대로 허공에서 솟아난 인물인 셈이다.

‘우선은 주변인을 감시하며 정보를 모아야 해. 우선 저 여인을 먼저 조사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벨커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얀에게 격식 있는 태도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변방 전선은 고된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

그렇지만 그 순간.

“찾았다 이놈! 란델 형님의 원수!”

“음?”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온 이름에 얀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갈색 머리를 멋들어지게 기른 청년. 분노로 시뻘게진 모습은 참으로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치미 뗄 생각 마라! 네놈이 저 여인과 결탁하여 형님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반델!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이람의 고함소리에 술렁거리던 좌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마력을 섞은 외침. 보통 실력이 아니야.’

마력을 지닌 엘프와 오크를 숱하게 상대해 온 얀은 단번에 그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수, 숙부님! 저자는 란델 형님을!”

“시끄럽다! 아무런 물증도 없이 손님으로 온 기사를 겁박하는 것이 귀족으로써의 도리라고 생각하느냐!”

하이람의 고함소리에 반델이라 불린 젊은이는 거의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수, 숙부님은 모르십니다! 집안의 자랑이었던 란델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쓰러….”

“네가 지금 벌이고 있는 행동이 죽은 네 형을 더 욕보이게 한다는 것을 왜 몰라!”

‘아들이 죽은 충격으로 아비까지 몸져누웠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얀은 속으로 피식 웃음 지었다. 이런 식으로 나비효과가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즈, 증거라면 있습니다! 란델 형님께서 보내신 편지가 있다구요! 여기!”

그렇게 말하는 반델이 꺼내든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편지지. 그것을 본 얀은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날조군.’

글레이프니르의 주먹으로 란델의 시체를 으깨기 전, 혹시 몰라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했던 얀이었다.

지금 저 자의 손에 들린 것은 거짓 편지. 하지만 저것을 가짜라고 말하는 순간 란델의 살해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형제가 쌍으로 날조에 미쳐있군.’

그렇게 생각을 마친 얀이 아무 말 없이 반델을 보고 있는 사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벨커스 백작은 심호흡을 한 뒤 반델에게 소리쳤다.

“당장 물러가라! 이따위 증거로 손님을 겁박하는 짓은 가주로써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을 본 귀족들 모두가 자신의 가족을 호되게 꾸짖는 벨커스 백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 면전에서 사위를 혼내는 것이 쉽지가 않을 텐데.”

“그만큼 가문의 명예가 중요한 것이죠.”

주변 상황까지 이렇게 되자 울상이 된 반델이 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본 얀.

“듣기가 굉장히 거북하군요. 반델 공.”

그렇게 운을 뗀 얀이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란델 경은 형벌부대 출신인 제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함께 선봉에 서서 싸웠던 기사의 귀감입니다. 그 고귀한 희생을 동생인 당신이 욕보이다니요!”

“무, 뭐라고!?”

그 말을 들은 케인은 급히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그것을 바라본 몇몇 이들이 걱정이 되는 듯 케인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케인 경.”

“맞아요. 그대 잘못이 아닙니다.”

“제국 최고의 기사가 이런 데에서 눈물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운을 떼며 몰려드는 귀족 가문의 영애들.

“아니… 그, 크흡, 아닙니다….”

‘아, 귀찮을 거라는 게 저런 뜻이었구나.’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케인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본 얀.

이윽고 반델을 바라본 얀은 다시 목소리를 높여 그를 훈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사 다른 모든 이가 그분의 명예를 더럽힌다 하더라도, 피붙이인 당신이 그분의 죽음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걸 모르신단 말입니까!”

“다, 닥쳐라! 네놈은 형님과의 결투에서 형님의 얼굴을!”

‘아, 슬슬 바닥이 보이네.’

그렇게 생각한 얀이 분을 삭이듯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안쓰러운 눈빛을 한 얀은 반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해로 빚어진 결투 후에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어주신 것이 란델 경입니다. 당신은 란델 경의 그 마음까지도 부정할 셈입니까!”

“크흡!?”

또 다시 참을 수 없다는 듯 침음성을 내자 안타까운 표정의 영애들이 길을 터주었다.

기사가 눈물을 보이는 것은 엄청난 불명예.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영애들이 내어준 길로 황급히 달려간 케인을 잠시 바라본 얀에게 반델의 발악이 쏟아졌다.

“시, 시끄럽다! 미천한 형벌부대 버러지가, 어딜 감히 기사를 가르치려 들어! 변방에서 조용히 썩어갈 것이지, 어딜 신성한 수도에까지 더러운 흙발을 내미느냔 말이다!”

반델의 일갈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버린 분위기.

그 참상을 지켜본 벨커스 백작은 지금 당장 반델을 죽여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끝났군.’

끝났다. 직접 황제의 용안을 본 기사를 모욕한다는 것은 곧, 그에게 작위를 내린 황제를 모욕하는 것.

“아, 아니 잠깐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반델 경.”

오늘은 참으로 기분 좋은 날이다.

벨커스 백작의 면전에서 벨커스 가문의 일원을 죽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속으로는 상쾌한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선 얀.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아니, 이렇게 얼굴을 일그러트리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처음 알았다. 웃음을 참는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은…!’

촤륵!

얀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기사가 검을 뽑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설마 란델이 자신에게 했던 방법을 그대로 쓰는 날이 올 줄이야.

“나의 전우였던 란델 벨커스의 명예를 위해,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차갑게 굳은 얀의 입에서 결의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굳은 목소리에 좌중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시간은 내일 정오. 당신이 명예를 아는 자라면, 대전사 없이, 본인이 직접 나오십시오.”

그렇게 말한 얀이 몸을 돌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무도회장을 떠나는 얀의 한쪽 팔을 잡은 렌이 그를 달래듯 말을 걸며 케인이 기다리는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설프게 반델의 편을 들었다간 가문 전체를 욕보일 뻔 했군.’

그렇게 생각한 벨커스 백작은 넋을 잃은 채 쓰러져있는 반델의 얼굴을 보았다.

“한심한 놈.”

그렇게 말한 뒤 그가 손짓하자 벨커스 가문의 경호원들이 우악스런 손으로 반델의 몸을 무도회장 밖으로 끌어냈다.

“수, 숙부님! 잘못했습니다! 저, 절 좀 살려주십시오! 숙부님! 숙부니이이임-!”

쿵.

굳게 닫힌 문과 함께 반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시작된 무도회.

그런 와중에도 벨커스 백작은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과를 모든 내빈에게 일일이 직접 찾아가 전함으로써 꿋꿋이 귀족의 모범을 보였다.

푸르륵-!

멈춰선 마차에서 내린 케인과 얀. 그리고 렌.

굳은 표정으로 로렌츠 가문의 숙소로 들어간 그들은 숙소 문을 닫고, 창문을 걸어 잠근 뒤, 커튼을 쳤다.

미행이 있는지 없는지를 이중 삼중으로, 렌의 스캐너까지 써가며 확인한 두 남자는 이윽고.

풉-!

“푸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꾹 눌러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그날 해가 뜨는 날까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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