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휴가(2)
“하아….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 남자가 얀의 코앞에 얼굴을 댄 채 목소리를 낮췄다.
“니 여자 앞이라고 가오 부리는 건 알겠는데, 사람을 보면서 덤비셔야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얀에게로 다가오는 두 덩치들.
“장담하는데, 저 아니었으면 많이 후회했을 겁니다.”
“씨발, 뭐라는 거야 정신나간새끼가.”
피식 하고 비웃으며 뒤로 물러난 남자가 얀의 코앞까지 다가온 두 덩치들에게 조용히 말하면서 담뱃불을 켰다.
치익!
“담궈.”
그 말과 동시에 달려드는 덩치들.
훙-!
자신을 향해 짓쳐오는 주먹을 피한 얀이 혀를 한번 찬 뒤에 눈앞의 덩치를 향해 말했다.
“니들이 먼저 선빵 친 거다.”
이윽고 곧바로 내밀어진 그의 손을 붙잡은 얀.
“이 새끼가, 이걸 받아내?”
덩치 중 한명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드드득!
그의 손을 붙잡은 얀이 그대로 중지 손가락을 들어 완전히 위로 젖혀버렸다.
“으아아아악!?”
“이, 이새끼 뭐야!”
눈 깜짝 할 순간에 느껴지는 격통에 손가락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진 덩치.
이미 관절부에서 완전히 비껴나간 손가락은 굽히려 움직일 때마다 뼈가 뒤틀리는 고통을 선사해줬다.
“개새끼가 뒤지려고!”
그렇게 외치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다른 한 명의 덩치.
“이 꽉 물고 있어. 혀 깨물면 감당 안 된다.”
그 말과 함께 자신을 향해 내지르는 주먹 틈새로 파고든 얀이 발을 들어 뒤꿈치로 덩치의 무릎을 내리꽂았다.
으지직!
사슴의 그것처럼 역방향으로 꺾인 무릎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끄아아아아악!?”
“아, 이건 좀 너무 갔네.”
순식간에 두 덩치를 인사불성으로 만든 얀의 모습을 본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자, 잠깐만. 오, 오 분도 안 지났는데….”
“여기가 전쟁터였으면 너도 이미 시체짝이야.”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온 얀. 그의 어깨에 박힌 낙인을 알아본 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얀은 움찔거리는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뒤 식당으로 돌아갔다.
“칼 뽑지 마. 너 생각해서 말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 말과 함께 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남자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돌아왔습니다.”
“앉게. 자네 몫은 단델 소위가 가져왔다네.”
이미 식탁에 모여 앉은 세 사람이 얀을 반겼다.
“저들이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던 것 같습니다만.”
“내가 해결했네. 어찌나 예의바른지, 이 포도주도 선물해줬지 뭔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어 보이는 케인.
밖에서는 아직도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으쓱하고는 얀에게 술잔을 권했다.
“전쟁중이어서 그런지, 저런 작자들이 더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야.”
“방금 만났던 자는 지역 유지의 연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황자님 이름으로 사람을 보내놨네. 황실 세무관 앞에서도 콧대를 세울 수 있을지 두고 봐야지.”
그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네 사람.
주된 화제는 전선에서 있었던 일, 엘프 마을에서 본 유적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케인과 단델이 묻고, 얀이 대답하는 구도. 밤이 깊어갈 때 까지, 식당 한편에 자리 잡은 그들의 대화는 멈출 줄 몰랐다.
***
“수도 바일사르! 수도 바일사르입니다!”
기차에서 내린 군인은 얀과 일행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아이고, 우리 아들!”
“안나! 돌아왔소! 아이들은 어때!”
“잘 지내죠! 당신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기차역은 각기 다른 전선에서 임무를 마치고, 아니면 잠시 동안의 휴가를 받고 돌아온 장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 그럼 먼저 본가로 가보겠습니다.”
“어젠 즐거웠네. 휴가 잘 보내게.”
“저도 즐거웠습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단델을 배웅한 뒤 얀은 잠시 이 기차역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처음으로, 기다리는 이를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이의 유골을 들고 주저앉아 우는 이가 있었다.
그 한편에는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한 피붙이를 찾아 기차역을 하염없이 헤매는 노파가.
한편에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팔다리를 잃은 채 가족에게마저 버려진 패잔병과, 징집을 피하기 위해 수도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런 희노애락이 모두 뒤섞인 용광로와 같은 공간 속,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있었다.
“얀.”
자신을 부르는 렌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얀이 옆에 달라붙은 그녀를 바라봤다.
“신분 위장. 도와줘. 에스코트.”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자 렌이 얀의 팔에 손을 엮어 팔짱을 꼈다. 기차 내부에서 새하얀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순백의 소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얀을 인도하고 있었다.
“케인 단장님은?”
“기사단에 용무. 숙소 주소는 받아놨어.”
“왜 네가…. 아니다.”
기차역에 몰려든 사람들에 넋을 잃은 것은 사실이니, 뭐라 더 변명할 수도 없었다.
이윽고 손을 흔들어 마차를 잡은 렌은 얀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 목적지를 말했다.
“디아나 가문 저택으로.”
“옙, 알겠습니다.”
마부의 말소리와 함께 마차가 돌바닥이 깔린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호송차량보다도 요동치는 차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얀이었지만, 놀랍게도 글레이프니르보다는 승차감이 훨씬 좋았기에, 별 탈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신분 위장용 가문이라고 했는데, 무슨 수로 자작가에 들어가게 된 거지?”
제국 귀족의 출생과 사망은 황실에서 엄격히 관리된다. 외딴섬에 처박아 놓은 사생아조차 찾아낸다는 소문이 자자한 황실 정보국의 힘으로 인해 모든 귀족들의 소재가 거의 실시간으로 황제에게 전송되고 있는 것이다.
“들어간 게 아니야. 내가 만들었어.”
“…그건 또 언제인데.”
“제국 건국 후 30년 뒤.”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 여자가 제국에서 계속해서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날 여기로 데리고 오는 진짜 이유가 뭔데?”
신분 위장을 위한 에스코트가 필요하다는 말은 이 이야기를 한 시점에서 거짓말이지.
렌은 잠시 얀의 얼굴을 바라본 뒤 손가락으로 얀의 얼굴, 정확히는 얼굴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눈.”
“눈?”
안대로 가려놓은 왼쪽 눈, 아니, 왼쪽 눈이 있던 자리를 매만지는 얀.
“치료한다는 건가?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아니, 치료가 아니야. 이식하는 거지.”
“이식? 내 목덜미에 박혀있는 이것처럼 말인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덜미에 설치된 장치를 매만지는 얀.
렌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글레이프니르와 널 연결하기 위한 매개체. 내가 준비한 건 눈, 그 자체만으로 완성된 것.”
“도대체 뭐라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렌과 얀은 마차에서 내려 눈앞에 있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디아나 자작가의 저택.
백작가 저택에 버금가는 넓은 부지와는 대조적으로, 건물의 규모는 지극히 평범했다. 계속된 증축과 재건축으로 인해 저택은 본래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 왔나?”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반긴 것은 하인들의 인사가 아닌 퉁명스러운 중저음이었다.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걸어 나온 자의 모습을 확인하자 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드워프?”
“그래. 드워프. 브락이다. 꼬마야.”
털이 덥수룩한 짧은 팔다리와 가슴팍까지 오는 충성한 수염. 그리고 특유의 괄괄한 눈빛까지,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드워프를 제국 수도에서 보게 된 얀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땅딸보 처음 보냐 꼬마야?”
“땅딸보?”
“드워프가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 다른 종족이 쓰는 건 실례야.”
도대체 기준이 뭔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떠올린 얀은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드워프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뭐야.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야?”
“마지막 미련. 내 마지막 주인이야.”
“하, 까보기 전 까진 모를 일이지.”
의미심장한 렌의 말을 일축한 드워프가 얀의 얼굴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진 듯 했다.
“꼬마야. 안대 벗어봐라.”
“예….”
그의 말에 따라 안대를 벗어 보인 얀.
안구를 통째로 잃어버려 비어버린 눈구멍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허, 한쪽 눈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었단 말이야?”
“버티는 건 물론이고, 싸우기까지 했어.”
“미친놈이군.”
곧바로 퍼부어지는 악담이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기체는 입고됐다. 부서진 건 왼팔뿐이니 보름 정도 걸릴 거야.”
“생각보다 빠르군요.”
“그래도 완전히 고치지는 못해. 처음 쓸 때 보단 삐걱 거릴 거다.”
“적응해야죠.”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눈구멍을 뒤적거리는 드워프의 질문을 받아넘기는 얀.
“하, 목석이 따로 없구만. 이 녀석이 확실해?”
“내 기준으론.”
“그래. 그럼 한번 해 봐야지.”
그렇게 말한 드워프는 얀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저택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누운 얀. 이윽고 그의 눈앞에 나타난 드워프가 그의 비어버린 왼쪽 눈구멍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이게 뭐하시는….”
“호오? 느껴지나? 내가 네 눈구멍을 뒤적거리는 게.”
“그렇게 건드리시면 싫어도 느껴지는 법이죠.”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드워프는 아랑곳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 이정도로 감각이 살아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식할 수 있어. 물건은?”
“여기.”
소파에 누워있는 얀 또한 몸을 일으켜 렌이 드워프에게 건넨 물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 색과 같은 눈동자가 드워프 브락의 손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타우르의 연산모듈을 닐과 함께 개량. 이식 가능한 형태로 가공했어.”
“고대인의 유물이 점점 몸을 좀먹는 느낌인데.”
그렇게 평하는 얀이었지만, 사라진 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하여튼, 이식시술에 수리에, 천하의 드워프를 이렇게 부려먹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렌.”
“불평은 네 시조한테 해.”
“이미 하고 있어! 무덤에 대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렇게 말하면서 집안 한구석으로 걸어간 드워프 브락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도구로 가득 찬 가방을 들고 왔다.
“시신경을 하나하나 연결할 텐데, 좀 아플 거다 꼬마야.”
그렇게 말하면서 얀을 바로 앉힌 브락이 그의 손발을 소파의 팔걸이와 바닥에 고정하기 시작했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인데.”
“흐흐흐, 처음 연결시술 생각나지? 그거보단 그나마 나을 거다.”
“위로가 되진 않는군요.”
얀의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브락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괴사한 신체조직을 헤집어 신경줄기를 찾아내 하나하나 의안에 연결하는 시술은 매 순간마다 끔찍한 고통을 안겨다주었다.
“으윽…!”
“하, 이걸 견뎌내다니, 미친놈이 맞군그래?”
“많이, 듣습니다.”
마취제를 두 통을 들이부어도 느껴지는 고통을 제정신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경이 하나 살아날 때 마다 점점 돌아오는 왼쪽 눈의 시력을 느끼는 얀은 주먹을 꽉 쥐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
수도의 아침은 전선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따릉-! 따릉-!
자전거를 탄 신문 배달원이 골목 사이를 오가며 오늘의 소식이 담신 신문을 집집마다 던져 넣었다.
‘중부전선 이상 없다! 가르드 2황자 승전보!’
‘마력 보유자는 지체 없이 수도원이나 관공서에 문의하세요.’
‘엘프에게 죽음을! 제국은 영원하리라!’
‘작곡가 추콥스키, 제국군에게 헌정하는 교행곡 발표, 현재 48번 교향악단이….’
“수도 신문의 대부분은 날조로군.”
“언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소비자에 맞춰 취사선택한 정보를 제공. 정보의 상품화.”
“고대인들도 신문을 본건가?”
“매체는 다르지만, 역할은 흡사. 정보의 질은 현 인류보다 낮아.”
“글레이프니르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뒤떨어져? 웃기는 소리.”
“직접 보고 들은 나도 웃기는 소리라고 믿고 싶어.”
아침햇살을 받으며 군복을 차려입는 얀.
소파에는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의 렌이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똑. 똑. 똑.
“중위 얀 베르쿠트. 황성에서 나왔습니다.”
“예. 곧 나가죠.”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얀.
이윽고 어깨에 형벌부대의 낙인과 중대 마크를 붙임으로써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케인이 준비해준 숙소 문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얀 베르쿠트 중위님. 오늘 하루 안내를 맡게 된, 황실 근위사단의…!”
그렇게 유려한 말솜씨로 자신을 소개하던 위병이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멈췄다.
“혀, 형벌부대…?”
얀의 한쪽 어깨에 새겨진 형벌부대의 낙인.
보란 듯이 그것을 어깨에 찬 얀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위병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이, 이쪽으로.”
얀을 마차로 안내하는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