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야망의 대가(2)
숲 속에 있는 온 마을을 돌며 얀과 렌은 라엘의 정보를 찾아 헤맸다.
아니, 정확히는 라엘이 다녀간 유적을 조사하며, 그곳에 원래 있는 기술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중에 라엘이 얼마나 연구를 진행시켰는지를 추론하는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기술들이 뭐가 있지?”
“여섯 개 마을을 돌았고, 무기 기술에 관련된 정보는 없었어.”
오염수 정화 기술, 종자 개량 기술, 동물 간 품종 교배기술, 지력을 회복하기 위한 비료의 성분 배합 기술…. 이 일대에 깔려있는 유적이 가진 것들은 모두 자연과 관련된 기술들이었다.
“이곳이 대삼림이라고 이름 붙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군.”
“실험 샘플 몇몇이 외부로 유출된 결과. 사실상 이 삼림 전체를 옛 인류의 유산으로 분류해도 무방해.”
이런 대삼림 속에서 사는 엘프들은 원래 같았으면 식량난에 시달릴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인해 대삼림을 향하는 유동인구 자체가 사라지고, 양측 군대가 삼림으로 진입하여 자원을 수탈해가는 탓에, 숲 속에 살고 있는 엘프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의문이 생기는데.”
그렇게 운을 뗀 얀이 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일대의 유적이 숲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라엘이 말한 타우르라는 병기가 이곳에 보관되어있는 이유는 뭐지?”
그 질문을 들은 렌이 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시설에 기록된 정보에 따르면, 타우르라는 기체는 군사병기가 아니야.”
“뭐?”
얀의 눈앞에 타우르의 모습이 담긴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기다란 꼬리에 달려있는 거대한 집게와 그 거체를 지탱하는 네 개의 다리. 그리고 전방에 달린 거대한 팔이 합쳐져 마치 전갈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다.
“RR-31. 타우르. 문명복원계획에 따라 건조된 무인지대 개척용 건설장비.”
“등에 대포가 달려있는데.”
“전쟁이 격화되면서 무기화. 그마저도 등에 장비된 하전입자포 1문이 전부.”
기록된 크기를 상상한 얀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콜로서스의 스무 배는 되는 몸집. 도저히 이길 엄두가 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뭔데?”
유적 내부의 콘솔을 조작하는 렌이 표정을 굳혔다.
“혹시나 해서 신호를 보냈는데, 관제 AI의 상태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이거. 타우르에 내장된 인공지능이 보낸 전문.”
그렇게 말하면서 얀에게 화면을 보인 렌.
그것을 본 얀 또한 그녀와 같이 얼굴을 굳혔다.
‘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인류의영광을재현하라….’
“미쳤군.”
짧게 평한 얀이 한숨을 쉬었다.
먼저 타우르에 도달해 자신이 기체를 차지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걸 보는 순간 그럴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조종사 보호에 혈안이 되어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다루는데도 한 쪽 눈이 이 상태인데, 저런 데에 타는 순간….”
“탑승자는 사실상의 생체 CPU로 전락. 기계의 신호에 따라 기체를 조작하는 처리장치로 변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엘의 입지를 하락시킨 뒤 그자를 죽이면 상황은 끝나는군.”
그렇게 말한 뒤 얀이 천천히 몸을 풀었다.
“렌.”
“말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얀이 그녀를 향해 씨익 미소 지었다.
아니, 렌 이외의 다른 이가 그것을 보았다면 절대로 그것을 미소라고 부르지는 않았겠지.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
“언니도 창조주님 보러 여기 온 거야?”
각 마을에서 모인 무당들이 모여 있는 수레.
라엘의 소문을 들은 마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마을에 있는 무당들을 큰 마을로 보내기 시작한 탓에, 이렇게 집결지를 만들어 한 번에 호송하는 방안이 생겨났다.
“응.”
그렇게 대답한 붉은 머리의 엘프는 무당 치고는 나이가 있어 보였다.
대부분이 한 자릿수, 많으면 십대 초반인 무당들에 비해, 눈앞에 있는 엘프는 넉넉히 잡아야 20대로 보일 정도로 연배가 있었다.
“설마 이 나이가 되도록 활동하는 무당이 있었을 줄이야, 깜짝 놀랐어.”
“그 때문에 교국에서 도망쳐 나왔죠. 창조주님을 뵙게 된다니, 여행을 떠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호송 행렬에 합류한 얀이 엘프와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윽고 출발한 호송행렬은 멀리 보이는 엘프마을을 향해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옮기고 있었다.
“핑계 대는 솜씨. 훌륭.”
“형벌부대에 있던 선임한테 배웠지. 이거 알려주고 이틀 뒤에 죽었지만.”
“전쟁터에서 연기를 할 때가 있어?”
“후퇴한 뒤 목숨 구걸할 때 정도.”
10년을 전장에서, 그것도 실전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싸워온다면 이런 처세술도 생기는 법이었다.
삐끗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총살이었으니. 혼신의 연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것이다.
“얀.”
“왜.”
소 두 마리가 끌고 가는 수레. 그 흔들리는 수레에 탄 무당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 쯤, 자신의 뒤편에서 걷고 있는 얀을 향해 렌이 물었다.
“붉은 머리. 감상을 요구.”
“…안 어울려.”
얀의 말에 따라 그 자리에서 머리색을 바꾸는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붉은 머리와 갈색 눈으로 색을 바꾸고, 허리까지 머리칼의 길이를 늘린 렌은 누가 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취향을 고려해서 바꿨는데, 실망.”
“임무나 해.”
일부러 라나와 비슷한 색으로 맞췄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나는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얀은 별 다른 반응 없이 점점 가까워지는 큰 마을 입구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지, 정지! 손님은 오늘 나가셨는데, 어떻게 하지?”
“얼마나 걸린다고 하시던가?”
“한나절은 걸릴 거야. 큰 유적 입구를 찾았거든.”
큰 유적 입구.
그 말을 들은 얀이 눈을 빛냈다.
“입구는 우리가 지키는 곳뿐만이 아닌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정찰 드론 사출용 통로. 몇몇 유적에는 존재해.”
잠입하기는 좋은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라엘의 머리색과 같은 녹색 인장을 찬 병사들이 급하게 마련된 무당의 숙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쪽도 어서 들어가슈.”
“아, 죄송하지만, 이 친구와 마을을 좀 돌아볼까 합니다.”
“마을을?”
그렇게 되묻는 병사를 향해 멋쩍게 웃은 얀이 입을 열었다.
“사실, 교국에서 빠져나온 뒤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요. 손님에게 가기 전에, 이 친구와 함께 둘러볼 생각입니다.”
“뭐야, 두 사람 연인이었수?”
“예. 이 사람을 위해서 목숨 걸고 교국을 빠져나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수레에서 내린 렌의 몸을 끌어안는 얀.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병사가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손님께서도 축복해주실 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뒤 렌의 손을 잡고 마을 외진 곳으로 사라지는 얀.
이윽고 다시 그의 얼굴을 봤을 때, 그의 표정은 원래의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연인 연기. 좋았어.”
“그러냐.”
그렇게 말한 뒤 마을을 살피는 얀.
이윽고 마을 높은 곳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발견한 얀은 외진 산길을 따라 저택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라엘이 거주하는 집이군,”
저택을 경계하는 병사들을 확인한 얀이 저택 아래에 몸을 숨겼다.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렌과 함께 위장용 수도복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검은 전투복에 장착된 단검을 꺼내들었다.
어둠 속에 숨어 교대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두 사람.
이윽고 두 시간 정도를 기다린 끝에,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것을 확인한 얀이 다른 경비병의 뒤에서 대기하던 렌에게 수신호 했다.
“셋 하면 달려든다.”
“확인.”
이윽고 얀의 손가락이 정확히 셋을 센 뒤, 하품을 하던 경비병들의 등 뒤에 얀과 렌이 동시에 나타났다.
“잠깐, 너희들 무슨…!”
푹!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정확히 폐부를 꿰뚫는 얀의 단검.
이윽고 피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검을 꽂아 넣은 그대로 목뼈를 부러트려 확인사살을 마쳤다.
“그쪽은?”
“클리어.”
죽은 경비병의 시체를 저택 아래에 숨기는 두 사람.
이윽고 네 번 정도 그 과정을 반복하자 저택 내부를 지키는 경비병들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좋아. 내부로 진입한다. 우선 무당들의 소재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얀의 말을 끊은 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이야.”
“집 안에는 더 이상 생명반응이 없어.”
“그럼 라엘이 데려간 무당들은, 어디로 갔지?”
그렇게 되묻는 얀을 향해 렌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건물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실.”
***
- 이걸로 세 번째 습격이군.
고블린의 침공을 막아낸 발굴기지.
그렇게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감이 담겨있었다.
마력을 통해 움직이는 콜로서스는 연료 없이 무한에 가까운 동력을 부여하지만, 그 대가로 탑승자의 체력을 앗아간다.
- 얀 중위의 기체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
- 기관포 소리에 잠 깨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지.
오랜 기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기사들은 점점 마력이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탑승자 없이 자동으로 고블린을 청소하는 글레이프니르는 수비군을 지켜내며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 다들 괜찮나?
- 단장님 아니었으면 뚫렸을 겁니다. 덕분에 살았죠.
지친 듯 멈춰선 다른 콜로서스와는 달리, 케인의 회색 콜로서스는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제국 최강의 기사라 불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
전투 능력이나 기량을 따지기 이전에, 타고난 마력의 양이 다른 이들, 심지어 엘프들과 비교해도 차원이 다른 탓이었다.
- 다음 전투부터는 나도 페이지에 탑승하도록 하지. 고블린을 상대로 이 기체는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해.
그렇게 평한 케인이 조종석 문을 열고 땅에 내려왔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땅의 무게감을 만끽하는 사이, 그의 앞에 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 마을로 향하는 이들을 추적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방어하기가 한층 쉬웠네. 부탁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말을 마친 단델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한 곳에 모여 있는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단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린 도망친 고블린을 추적한다!”
“예!”
병사들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단델이 숲 속을 바라보았다.
“그레이하운드! 전진!”
단델의 외침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87 독립중대원들.
“그 고블린들을 다 막아내고도 힘이 남아도는 거야?”
“이름 그대로야. 진짜 사냥개가 따로 없어….”
고블린의 시체로 뒤덮이다시피 한 발굴지역 한가운데에 서있던 그레이하운드.
지친 기색도 하나 없이 순식간에 숲 속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을 본 병사들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끼이익!
낡은 나무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상상 이상으로 깊숙하게 이어진 지하실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지 매캐한 냄새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
“이 냄새는….”
지하실을 가득 채운 공기를 들이마신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기저에 옅게 깔려있는 인간의 대소변 냄새.
그리고 그 냄새를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혈향이 지하실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렌.”
“스캔 시작.”
본래의 머리와 눈 색으로 돌아온 렌이 마력광으로 희미하게 밝혀진 지하실을 훑었다.
“이 앞이야.”
그렇게 말하자 앞장서는 얀.
이윽고 피냄새의 진원지에 다가간 얀이 권총을 앞에 겨눈 채 천천히 내부로 들어섰다.
“잘 안 보이는군.”
그렇게 말한 얀이 품속에서 조명탄을 꺼냈다.
흙바닥에 그것을 박아 넣은 뒤 신관을 까 억지로 작동시키자, 새하얀 조명이 어두운 지하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빛에 의해 지하실 전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광경을 본 얀이 피식 하고 얼굴에 비소를 머금었다.
“빙고. 예상대로군.”
환하게 밝혀진 지하실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벽에 묶여 축 늘어져있었다.
“각 샘플별로 피를 수집하고 있어. 인원은 약 백 명 정도.”
렌의 설명을 들으며 아이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얀.
“아, 아아아….”
“엄마다, 엄마…. 왜 나 버리고 갔어요….”
“히히, 히히히히….”
동공이 풀린 채 횡설수설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얀이 짧게 혀를 찼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환각제. 통제를 위해 투여했어.”
“겸사겸사 실험도 하고 말이지?”
그렇게 말한 얀이 묶여있는 한 아이의 팔을 들어보았다.
혈관에 연결된 투명한 관이 아이의 피를 뽑아낸 뒤, 옆에 있는 기계장치를 거쳐 투명한 액체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 기계장치로 성분을 변환하는 모양이군.”
“혈액 안에 있는 나노머신이나, 특정 성분을 추출하는 장치.”
“이걸로 원하는 재료를 뽑아낸 뒤, 자신의 피에 넣어 비율을 맞춘다는 뜻이군.”
그렇게 말하는 얀이 기계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세 개의 실린더가 상하운동을 반복하며 피를 짜내고, 펌프와 거름망, 특수한 성분이 담긴 시약을 이용해 이를 여과하는 장치.
“렌. 기계 하나는 챙겨. 가져가야 해.”
“왜.”
“씨발. 이걸 봐.”
그것을 살피던 얀의 시선이 기계 구석에 닿는 순간, 그의 입가가 비틀리며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보시다시피 인류의 여과장치야. 원래는….”
“그게 아니라.”
렌의 말을 끊은 얀이 기계를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렌을 향해 그 기계를, 아니, 정확히는 그 기구의 구석에 상표처럼 박힌 이름과 문양을 보였다.
“이건…?”
“그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낸 것은 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푸우, 한숨을 쉰 얀이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왜 벨커스 가문의 문양과 인장이, 이 기계에 새겨져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