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야망의 대가(1)
습격을 막아낸 다음날 아침. 첫 전투를 마친 발굴기지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기관포탄은 기사님들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알아서 장비하실 테니까.”
“사망자 시신은 안쪽으로 옮겨라! 신원 확인할만한 물건들도 넣어두고!”
본부로 향하는 호송차량에 열 구의 시신이 실려 나갔다. 상처의 모양으로 보아 고블린과의 교전이 아닌, 오폭에 의한 사고사였다.
“정비인원이 필요하긴 했는데…. 네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정비사들은 이미 배치했어. 난 다른 일.”
민소매와 군복 바지 차림의 렌이 호송차량에서 내리는 것을 얀이 받아냈다.
한 구석에 모아놓은 고블린들의 시체를 바라본 렌이 그곳으로 다가가 그 피를 손가락에 묻혔다.
“뭐하는 거야?”
“성분 분석.”
짧게 답한 렌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카메라 렌즈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얀은 새삼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역시. 인류의 기술이야.”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렌이 입을 열었다.
“혈액 속에 각성제 성분이 들어있어. 알프라이아와 제국 둘 다 만들 수 없는 성분.”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는 보고도 있는데, 그것도 약 때문인가?”
“정확히는, 약이 아니야.”
“약이 아니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렌이 얀에게 다가갔다.
“혈액에 담긴 유전정보가 고블린의 것이 아니야. 약물을 주사한 게 아니라, 수혈했어.”
“약물이 섞인 혈액을?”
“응. 약물과 나노머신이 섞인 엘프의 피를.”
고블린의 몸 곳곳에 나있는 주삿바늘 자국.
그리고 그 자국을 감싸는 듯이 새겨진 그림은 이들의 수혈이 마치 종교의식처럼 경건한 뜻으로 행해졌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노머신이라면 열쇠의 피를 주입받았다는 말이야?”
“주입하기 전에 전처리를 거쳤어. 피가 마약처럼 변질된 건 그 영향.”
“그 말인즉, 원래 목적은 마약이 아니다?”
그렇게 되묻는 얀의 말에 렌이 그를 돌아보았다.
“각성제 성분은 고블린의 혈액과 주사된 나노머신의 거부반응이 변질된 것. 주입한 자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어.”
“그게 뭔데?”
“옛 인류의 혈액을 재현하는 것.”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당신처럼! 창조주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는 뜻이죠!’
라엘의 광소를 떠올린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이 고블린들은 일종의 실험체라는 말이군.”
“그래.”
전말을 알게 된 얀이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엘이 아직까지는 그 타우르라는 병기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
“이렇게 대규모로 실험을 해도 제제를 받지 않는다면, 숲 속 엘프들은 라엘에게 협조하고 있다고 봐야겠군.”
그렇게 혼잣말한 얀은 눈앞에 쌓여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쳐들어온 고블린의 수는 약 만 명.
이들 전부가 수혈을 받았다면 그 피의 양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 피를 조달했을까? 다른 것도 아닌 열쇠의 피를?
“중대장님!”
자신을 부르는 단델의 목소리에 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고블린 중 하나를 포로로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중대장님을 만나고 싶다는데요.”
“고블린이 심문을 받는다고?”
그 난리통에 용케 살아남은 고블린이 있었나?
그 와중에 지식이 높지 않은 고블린이 자신을 지목했다니?
어처구니없는 보고였지만 오히려 그 덕에 흥미가 생겼다. 어쩌면 라엘의 소재를 파악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날 찾았다고?”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의 감시 속에 벌벌 떨고있는 고블린은 얀이 도착하자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질렀다.
“키익! 키이익! 인간! 냄새가 다르다! 손님이다!”
“뭐야. 고블린들도 손님이라는 개념이 있어?”
자신이 10년 동안 하루 일과마냥 죽여대던 고블린들은 그런 게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얀을 향해 고블린이 입을 열었다.
“숲 속 고블린들만 안다! 손님이 오면, 우리는 모신다! 손님을 지켜야 한다!”
“그런 놈들이 왜 날 공격한 건데.”
“숲에 찾아온 손님이 말했다! 손님인 척 하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손님?
그렇게 의문을 표한 얀이었지만, 그가 가져간 자신의 혈액에 생각이 닿은 그가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 어떻게 숨어들어갔나 했더니.”
라엘이 숲 속에서 세력을 모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자.”
“가다니, 어딜.”
얀의 옷깃을 잡아당긴 렌의 말에 얀이 되물었다.
“다른 보존시설. 라엘이라는 엘프는 그곳을 돌며 기술을 얻었어. 그 흔적을 쫒아야 해.”
“시설은 대부분 엘프 마을 주민들이 관리해. 이 상황에서 우리 중대가 빠지면 다음 침공은 못 막고.”
다른 마을로 돌입할 생각을 한 것은 런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얀의 말을 들은 렌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가는 건 너와 나. 둘뿐.”
“내가 빠지면, 글레이프니르는 어떻게 하고.”
“네 권한이면 고정포탑으로 사용할 수 있어. 지금은 그게 더 효율적.”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얀.
위험한 작전이긴 했으나, 발굴기지를 수비하는 시간동안 라엘이 실험에 성공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했다.
‘애초에 이 구도 자체가 라엘이 짠 덫인 격이니, 아예 이곳을 벗어나 판을 흔들 필요가 있어.’
그렇게 생각을 마친 얀은 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지.”
그 말을 들은 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지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얀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엘프의 귀였다.
“변장.”
***
“흐아암~ 졸려 죽겠네.”
북동쪽 엘프 마을의 경계초소.
이른 아침의 찬 공기를 맞으며 초소에 나온 엘프는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자신이 맡은 구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얘기 들었어? 서쪽 마을에서도 열 명 정도가 더 찾아온 모양인데.”
“이걸로 몇 명인지, 다른 마을에서 찾아온 애들, 계속 그 저택에서 사는 거지?”
“어. 창조주님께 기도드린다던데.”
“부러워 죽겠다. 나도 그런 피 타고나면 저 저택에서 호의호식 하는 거잖아.”
그렇게 킥킥대면서 농담을 따먹는 두 엘프.
부스럭-
그렇지만 이내 숲 한편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엘프들이 그곳을 향해 총을 겨눴다.
“누구냐!”
이윽고 숲을 헤치며 나타난 엘프의 그림자. 나무 그늘 아래에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손을 머리위로 든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구호 대! 소총!”
확인을 위해 그렇게 외친 엘프.
그렇지만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림자는 곧바로 몸을 날려 숲 속으로 도망쳤다.
“어어!? 야!”
“됐어. 쏘지 마. 행여나 맞기라도 하면 무슨 시비를 걸어올지 몰라.”
소리치는 동료를 말린 엘프가 입가를 비틀며 그렇게 말했다.
“믿지 못한다니 뭐니 하면서 손님을 내친 마을들 있잖아. 그쪽에서 온 놈들일 거야.”
“하, 이제 와서 어디 자리 없나 기웃거리는 건가?”
“발포하면 그걸로 건 수 잡아서 뭐라도 얻어내려는 거지. 듣자하니 몇몇 마을은 제국에게 협력한다던데.”
“윽, 그건 좀 아니지. 자존심도 없는 건가?”
이윽고 다른 마을의 소식으로 무르익어가는 두 엘프의 잡담. 어느새 숲 한편에서 나온 그림자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야간에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엘프 젊은이들을 발견한 그림자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음? 누구지?”
사냥으로 잡은 담비들을 줄줄이 매달고 가는 엘프들은 숲속 한 구석에서 나타난 그림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총.”
그림자가 나지막이 그렇게 말했다.
“뭐야, 순찰대인가?”
“우릴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다른 마을에서 증원 온 놈인가봐.”
그렇게 자기들끼리 떠드는 와중에, 그림자는 그들을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소총.”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엘프는 마지못하다는 듯이 답어를 말했다.
“포탄! 이제 됐냐!”
대답을 듣자 고개를 끄덕인 그림자는 그들에게 통과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검은 숲 출신인가? 왜 얼굴을 안 비춰?”
그렇게 말하면서 마을로 가는 길을 서두르는 엘프들.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그림자는 작게 한숨 쉬며 햇살 아래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귀쟁이 새끼들, 발전이 없네. 이러니 다른 마을에서도 구멍이 숭숭 뚫리지.”
“기초 훈련만 받고 투입된 비정규군. 이게 오히려 일반적.”
암구호의 문어와 답어를 모두 알아낸 얀은 고개를 내저으며 옆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지, 정지! 소총!”
“포탄.”
텔레파시로 큰 마을에서 전해진 암구호를 확인한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마을로 들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손님 마을에서 왔나보지?”
“아니, 그 뒤쪽. 교국 출신이야.”
그렇게 말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간 얀과 렌.
밤중에 담비 사냥을 끝낸 마을은 사냥한 담비들을 한데 모아 손질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늙은 엘프 한 명이 그렇게 묻자 얀이 답했다.
“창조주님의 유물을 찾아왔습니다.”
“아아! 차림을 보아하니, 순례하시는 모양이구만! 잘 왔수!”
얀과 렌이 입은 것은 창조주 교단의 인장이 새겨진 갈색 수도복.
그것을 본 노인이 손을 들어 마을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라나의 마을보다는 작은 시설의 문.
이전에 본 유적과는 달리 문이 열린 채였다.
“문이 열려있군요?”
“손님 덕이지! 우리 마을 무당의 피로는 열렸다가 곧바로 닫혀버리는데, 손님이 성혈을 촤악! 뿌리니까, 닫히지 않는 것 아니겠수!”
“호오.”
그 말에 눈을 빛낸 얀.
그의 옆에 있는 렌이 노파에게 물었다.
“그럼 그 무당은 지금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하자 푸근한 미소를 지은 노파가 입을 열었다.
“손님에게 갔지. 창조주님을 뵌다면서 거둬갔다네. 정말이지 하늘이 도우심이야.”
“그럼 손님과 무당들은 어디에?”
“다들 큰 마을로 갔지.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옆 마을도, 옆옆 마을 무당들도 전부 손님에게로 갔수.”
노파의 말을 들은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식으로 열쇠의 피를 확보했던 거군.’
멀찍이서 손을 흔드는 노파에게 대충 답해준 뒤 유적으로 들어선 얀과 렌.
렌이 유적의 벽면에 손을 대자 그녀의 눈 앞에 화면이 나타났다.
“QE-33번 시설. 보존 물건 목록은 기초 종자 개량법 및 샘플.”
“농산물이란 말이야?”
“응. 수백 년 전 처음 유적을 개방하면서 말라죽었어. 개량법을 기록한 언어는 엘프어와 다르고, 샘플은 복원 불가능.”
“마을 식량난을 해결할 단서를 눈앞에서 없애버렸군,”
반대로 생각하면 이 지식을 습득한 라엘은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다는 말도 된다.
영상에 나온 것은 단 두 시간 만에 싹을 틔우고, 일주일 만에 수확물을 얻는 종자.
식량난에 허덕이던 엘프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겠지.
“다른 마을들도 이런 식으로 유적을 보였고, 그 대가로 고대인의 기술을 받았다는 말이군.”
눈앞에 있는 데이터는 제국 농업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지식이었다.
만약 이것이 무기 설계도나 제작법이었다면, 몇 세대만 지나면 잔스카르와 같은 무기 수출국이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어.”
왜 그 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을까.
라나와 함께 그를 쐈다면, 일이 훨씬 쉬워졌을 텐데.
‘얀! 이거 숨겨뒀다가 나중에 먹어!’
‘요리사 아저씨가 나 먹으라고 줬어! 맛있지!’
라나를 떠올릴 때마다 같이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
야니카를 떠오르게 하는 그 모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상념에서 깨어난 얀이 목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
“이미 끝난 일에 후회하지 마.”
단호하게 말하는 렌의 얼굴을 본 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낸 것 있어?”
“검색기록을 확인했어. 라엘이 찾는 건 인류의 혈액 샘플, 혹은 성분에 대한 정보야.”
“그 말인즉, 놈은 아직 고대인의 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말이군.”
그렇게 생각을 마친 얀이 품속에 든 권총과 신호탄을 점검했다.
“상황은 알았고, 라엘의 소재도 파악했으니 작전은 성공이군.”
“어떻게 할 거야? 복귀한 뒤 곧바로 마을로 쳐들어갈 셈?”
“그러는 게 속 시원하겠지. 그렇지만….”
손님이라고 부르며 라엘을 숭배하는 마을 엘프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얀이 렌에게 말했다.
“이대로 놈을 죽이면 라엘은 순교자가 돼. 종교지도자를 이유 없이 사살한다면, 이 숲속의 엘프들은 정말로 제국을 적으로 돌리겠지.”
교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차지한 케르단 대삼림을 적으로 돌린다면, 중부전선 전체가 전선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
그렇게 된다면, 제국 중심으로 향하는 날이 더더욱 늦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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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적은 벨커스의 몰락.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수도로 올라가 기사 서임을 받는 것.
서임에 필요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활약과 전공이었다. 섣불리 라엘을 죽여 제국이 해를 입게 된다면, 자신의 전공에도 흠집이 나게 된다.
“라엘을 죽이기 전에, 그 녀석이 가진 손님이라는 지위를 부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