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광전사(3)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의 인솔에 따라 발굴 캠프가 완성될 무렵, 콜로서스의 힘으로 만들어진 방어선에 깔린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무슨 붙박이장도 아니고, 너무 밀집된 것 아닌가?”
“발굴작업은 하기도 전에 사람에 깔려죽을 것 같아.”
곳곳에서 발굴단원들의 불평소리가 들려왔지만, 병사들로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뢰 작업 끝났나?”
“예. 오늘 하루 정도는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탄약 상태 제대로 확인해!”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만 활동하던 발굴단 호위부대들은 이번 전투가 사실상의 첫 실전.
간이초소와 모래주머니 뒤에서 어두운 숲 속을 응시하는 병사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발굴단 숙소에서 최대한 가까운 퇴각로에, 경계인원은 유적 입구를 등진 상태의 배수진이라.”
“사람 목숨은 다 똑같다고 하지만, 이 구조를 보면 새삼 깨닫는 거지.”
쓰게 웃으면서 방어진지를 평가한 것은 그레이하운드 중대원이었다.
방어선 가장 바깥 부분에 위치한 그들의 숙영지는 비상시 가장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하, 형벌부대에 야간 순찰에, 뭐 저리들 호들갑인지 모르겠네. 안그러냐 신참아?”
“상병님은 긴장 안 되십니까?”
벌목한 자리에 남겨진 수많은 그루터기들.
그 중 하나에 걸터앉은 병사가 피식거리면서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전에 잔스카르 사절단이 짐꾼으로 쓰는 고블린을 봤거든. 뭐, 그냥 고분고분 하던데?”
“그, 그렇습니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범죄자 새끼들이 아주 살판났네. 저 새끼들 봉급으로 얼마 받는지 알아?”
“얼마입니까?”
“우리 봉급의 세 배.”
“우와!”
이등병의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린 상병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치익-
“정찰 중에는 담배 피지 말라고 지시 내려왔….”
“형벌부대 중대장 그 새끼가 말한 거잖아. 피면 지가 뭐 어쩔 건…”
그렇게 말하며 성냥불을 담배에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푹.
불안한 표정을 한 상병의 얼굴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어?”
그곳에 시선을 돌린 이등병.
“저, 적습이다! 고블린이야아아!”
죽은 상병의 시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린 그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병사의 비명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기사단의 콜로서스들이었다.
- 다들 전투배치!
“위치 확인하고 상태 보고해!”
그렇게 외치며 병사들이 바쁘게 제 자리를 찾아갈 무렵, 초소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1번 초소! 전방에 고블린 군집 확인했습니다!”
“2번 초소! 고블린들입니다!”
“7번 초소에서도 확인했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목격정보와 함께 병사들의 눈에 긴장이 맴돌았다.
그들 중 몇몇은 숲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며 고블린들의 모습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야간이라 시야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광탄 발사해! 아무것도 안 보이…!”
예광탄을 찾는 부사관의 목소리가 중간에 멎었다. 그럴 필요 없이, 숲 속에서 불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횃불…?”
이윽고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횃불들.
도깨비불처럼 나타난 횃불들은 나무로 우거진 숲 속에서 점점 그 수를 불려가더니, 어느새 방어진지를 둘러싼 숲 전체를 붉게 비추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불 속에 포위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수에 병사들 몇몇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불꽃 아래에 있는 고블린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면 더더욱 그랬다.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한 병사가 그렇게 뇌까리는 순간.
“인간들을 모두 죽여라아아!”
“키이이익!”
“키아아아악!”
고블린들의 고함소리가 발굴지역 전체를 뒤덮었다.
살기와 굶주림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함성을 내지르며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는 고블린들.
“사격 개시!”
“쏴라! 막아야 해!”
야생 고블린은 엘프군이 부리는 것들과는 달리 총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고블린들에게 화기를 지급하는 군대는 알프라이아 군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숲 전체를 빼곡하게 가득채운 고블린들의 수는 거의 만 명에 달했으니까.
- 위치를 벗어나지 마라! 내가 막을 테니!
병사들이 채 감싸지 못한 방어선의 빈틈을 메꾸는 것이 콜로서스의 일이었다.
- 이 때를 위해서 가져온 선물이 있지!
발터의 콜로서스가 양 팔을 뻗었다.
그의 콜로서스가 등에 지고 있는 것은 거대한 연료통. 그곳에 연결된 두 팔에서 폭음과 함께 붉은 화염이 쏟아져나갔다.
쿠오오오!
“뭐야, 저런 것도 있었어?”
[인마 살상용 화염방사기로 추정. 발화용 연료에 불안정성을 감지. 비슷한 체급의 기갑병기가 공격시 유폭할 위험성을 지님.]
얀의 혼잣말에 닐이 상세히 설명했다.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화염을 끼얹는다 해서 콜로서스의 장갑을 녹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거대한 연료통을 들고 가는 의미도 없다.
그렇지만 상대가 냉병기만을 지닌 고블린 집단이라면,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끼이이이익!”
“뜨겁다! 뜨겁다!”
“인간놈들! 거인을 가져왔다! 끼에에에엑!”
순식간에 전선 한 구역을 뒤덮은 화염에 수백마리의 고블린들이 휩쓸려나갔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다른 고블린들이 주춤한 사이, 케크스의 콜로서스 또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 네놈들에게 쓸 총알이 아깝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꺼내든 것은 거대한 몽둥이.
마치 방금 전 나무를 베어내는 것과 같이, 고블린들이 달려오는 곳에 그대로 뛰어든 커크스의 콜로서스가 고블린들을 마구 짓뭉개기 시작했다.
“겁먹지 마라! 기사단이 함께한다!”
“지뢰 폭파시켜!”
투콰앙!
얀의 지시에 따라 미리 파묻어놓은 지뢰들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엘프 전선에서 노획해 온 폭약들을 다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폭발이었다.
“키이익!?”
“예전 인간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화력에 기가 질린 고블린들이었지만, 그들은 돌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한 고블린들의 눈은 마치 걸신이 들린 듯 붉게 빛나며 아랑곳없이 방어선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총을 맞고도 그냥 달려옵니다!”
오크의 방탄 갑주를 뚫기 위해 관통력을 높인 소총이 오히려 독이 된 격이다.
저지력 없이 고블린들의 몸을 뚫고만 지나간 탄환들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몸을 막기에는 오히려 부적합했다.
“키이이익!”
“이런 씨발, 폭탄이다! 폭탄을 들고 달려온다!”
한 병사의 외침이 들리는 순간.
콰아아앙!
방어선 한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수십 개의 수류탄을 동시에 터트린 것처럼 강력한 폭발이었다.
“2번 초소에 화재입니다!”
“인원들 구출하고 뒤로 빠져! 얀 중위님이 가신다!”
“키에에엑! 인간들! 모두 죽여라!”
폭발로 터져나간 팔다리들이 고블린들의 육편과 섞여 지옥도를 만들어냈다.
눈앞의 충격에 넋을 잃은 병사.
그를 잡아끌어 두 쪽 방어선으로 보내는 것은 독립중대 그레이하운드의 몫이었다.
“그쪽에 설치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고집을 부려서는!”
“중위님! 인원 철수 완료했습니다!”
부대원들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곳으로 한 손을 뻗은 글레이프니르.
[발포 개시.]
닐의 한마디와 함께 그의 팔에 장비된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부와아아앙-!
분장 수천 발을 쏟아 붇는 기관포세례에 의기양양하게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는 고블린들의 육신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게 고블린들을 밀어낸 글레이프니르가 앞으로 나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방향을 지키고 있던 발터와 커크스 역시 방어선 밖으로 고블린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 자폭 돌격이라니, 고블린들이 어째서 폭탄을 가지고 있는 거지!?
- 라엘. 그 정신 나간 자의 짓이야! 분명해!
그렇게 말하는 두 대의 콜로서스를 향해서도 폭탄을 짊어진 고블린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 미친, 콜로서스에 뛰어들 생각인가!?
콰아앙-!
빼곡히 들어선 고블린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자폭병을 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고블린들의 자폭공격을 받아낸 발터의 콜로서스였지만, 수류탄 같은 폭탄으로 쓰러질 콜로서스가 아니었다.
푸화악!
이윽고 다시 한 번 뿜어진 불길에 자폭병들의 폭탄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쾅! 콰쾅!
“1번 초소! 돌파당합니다!”
- 커크스!
- 알고있네!
고블린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초소에서 병사들이 빠져나오자, 콜로서스의 둔기가 고블린으로 가득 찬 초소를 완전히 박살냈다.
굉음과 함께 사라진 자신의 아군들을 보면서도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는 고블린들.
그 과경을 보며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 고블린들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호전적이지?
- 소리만 질러도 겁에 질려 도망가는 놈들일 텐데, 하물며 야생 고블린이!
고블린들은 본래 겁이 많은 종족. 지난 전투에서 봤듯이, 자신들이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면 알프라이아에서 사육된 개체들조차 금방 도망가 버리는 종족이었다.
그렇지만 흰자위를 붉게 물들인 이녀석들은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오크들처럼 막무가내로 돌격해오는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변화에 병사들도, 기사들도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후퇴를 안 해! 이것들이 정신이 나간건가!?”
“전부 죽여야 끝난다! 발포 멈추지 마!”
“총알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시체로 변한 고블린들이었지만, 그들의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고블린. 이에 반해 잔탄이 다 되어 빈 공이를 치는 소총을 바라보며 병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키이이익!”
“아, 안 돼!”
그 사이 방어선을 넘고 달려든 고블린이 겁에 질린 병사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때.
으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몸이 저 멀리로 튕겨져 날아갔다.
“어, 어떻게…!”
“뒤로 빠져. 지금부턴 우리가 상대한다.”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일반병 병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혀, 형벌부대?”
어깨에 새겨진 붉은 낙인과 사람의 팔뼈를 물고있는 사냥개의 문양.
얀의 부대인 그레이하운트 독립중대원이었다.
“이쪽도 탄환이 없습니다!”
“적이 밀고 들어옵니다!”
“젠장, 맨몸으로 저것들이랑 싸우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난색을 표하는 일반병들 너머로, 하나 둘 방어선을 넘어 앞으로 나서는 이들.
앞으로 나서는 몇몇 대원들의 얼굴에는 비틀린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레이하운드!”
단델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앞으로 나선 대원들이 일제히 총을 고쳐 잡았다.
길이가 짧은 소총에 꽂힌 총검에는 고블린들의 피가 찐득하게 묻어있었다.
“얀 중대장님의 명령에 따라, 죽을 때까지 싸운다! 전원 백병전 준비!”
“키익!?”
“인간, 도망가지 않는다!”
이전 습격 때의 병사들과는 정 반대의 모습에 고블린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전군 돌격!”
달려드는 고블린 두어 마리를 권총으로 쏜 단델이 총을 쥔 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와아아아아!”
“다 죽여 버려!”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고블린에게 역으로 돌격을 감행한 그레이하운드.
이윽고 뒤로 물러난 일반병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푹!
“키이이익!”
“인간이! 인간이 우릴 공격한다!”
“배가! 배가아아악!”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5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인원보고.”
“다섯 명 경상. 한 명은 좀 깊게 찔렸습니다.”
“아이 씨발거, 빨래 다시 해야겠네.”
피칠갑을 한 채 터덜터덜 걸어오는 중대원들을 바라보는 일반병들은 이제 누가 짐승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체구가 작은 고블린이라 해도 전선을 향해 돌진을 감행했던 고블린들의 수는 약 삼백.
그렇지만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들을 도륙 낸 그레이하운드 중대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 본부에 지원 요청하고, 부상병들은 숙소로 옮겨라!
- 스무 명 정도는 날 따라와라. 방어선을 보강한다!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돌아오는 세 대의 콜로서스.
세 거인의 뒤에는 수천 마리의 고블린들이 육편, 잿더미, 혹은 먼지가 된 채 숲속 한편에 널브러져 있었다.
- 벌목하길 잘했군, 중위.
- 그게 아니었으면 대삼림 전체를 태울 뻔 했어. 그렇지?
이번 방어전의 일등공신은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발터의 콜로서스였다.
불꽃의 여파로 검게 물들어버린 유적 근처의 평지. 두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녹색이 풍부한 숲은 황량한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고블린들이 어떻게….”
“기사님! 이것 좀 확인해주십시오!”
콜로서스에서 내리면서도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발터를 병사 중 한명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고블린의 시체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문신?”
그렇게 되물으며 고블린의 시체를 확인한 발터가 눈을 찌푸렸다.
“이건….”
“주삿바늘 자국이군요. 굉장히 두꺼운.”
뒤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얀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고블린들이 호전적으로 변한 것이 약물 때문이라는 건가?”
“예. 그리고 이 자국은….”
“뭔가 아는 것이 있는건가?”
얀은 발터의 질문에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팔에 난 것과 같은 주삿바늘 자국을 보며, 고블린들의 몸에 들어간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