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29화 (29/186)

29. 라나(5)

사격 개시!

투콰콰쾅!

바르자엘의 명령에 따라 대구경 돌격포의 일제사격이 글레이프니르가 있는 유적을 휩쓸었다.

빗줄기 속이었기 때문에 먼지는 일지 않았지만,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진흙과 나무 조각이 연신 글레이프니르를 더럽히고 있었다.

- 지금까지 몇 발이나 쐈지?

- 이것까지 해서 60발.

- 지독한 놈이군.

그렇게 내뱉은 미르엘이 분에 차지 않는 듯 두어 발을 더 쐈지만, 몸을 웅크린 글레이프니르는 요지부동이었다.

- 적 기체 반응 없음.

- 무슨 일이지? 마치 유적을 지키려는 듯이 움직이지 않는데.

- 방심하지 마라. 제압사격 개시. 안에 탄 인간의 체력을 뺀 뒤 제압한다.

바르자엘의 명령에 따라 차례대로 철갑탄을 발사하는 세 대의 콜로서스.

이리저리 이동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한 곳에 멈춰서있는 글레이프니르는 좋은 표적이었다.

그렇지만 포격을 계속하는 기사들은 사격이 계속될수록 뭔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 벌써 5분째 계속해서 사격하고 있는데, 꿈쩍을 안하는군.

- 우리 포탄이 소진되는 걸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바미엘의 의문에 남은 탄환을 점검하는 미르엘이 답했다. 이윽고 이런 소강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르자엘을 바라본 두 사람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 헤드 나이트.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지시 부탁한다.

“흠….”

포격하는 텀을 계속해서 늦추는 와중에도 반응이 없으니 싱겁다 못해 불안했다.

유적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기체를 버리고 유적 안으로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격 중지. 미르엘은 엄호. 나와 바리엘은 양 옆으로 진입하여 녀석을 포위한다.”

확성기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콜로서스가 보였다.

- 바리엘은 접근해서 적 기체를 제압하고, 안에 인간이 타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난 문이 열린 유적으로 가서 내부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겠다.

- 바리엘 기. 지시 확인.

작전이 정해졌다면 남은 것은 실행하는 것 뿐.

준비를 마친 두 기체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며, 바르자엘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향해 울려 퍼졌다.

- 전진!

***

쿵! 쿵!

계속되는 콜로서스의 포격.

유적 입구를 몸으로 감싸듯 웅크린 글레이프니르는 묵묵히 쏟아지는 포탄 세례를 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조종석에서 나온 얀은 입구에 걸터앉아있는 피투성이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라나.”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적갈색 머리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출혈 때문에 이미 눈 밑이 거멓게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오빠…. 많이 늦었네…?”

쿨럭! 쿨럭!

기침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핏덩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몸 곳곳에 박힌 것은 포격을 막아내는 와중에 튄 자갈과 철 파편들.

색동옷에 가려진 대부분의 부위에 파편이 박혀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도 오니까 좋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헤실헤실 웃고 있는 라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얀은 이윽고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전에 자신이 묶어준 붕대가 작고 여린 손에 소중한 것인 양 꼬옥 쥐어져 있었다.

“오빠들이 그러는데…. 라나는 나쁜 애래. 엄마아빠 팔아서 나온 자식이래…. 그래서 나랑 안 놀아줬어.”

“말 하지 마십시오. 출혈이….”

그렇게 말하던 얀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 작은 체구에서 이 만큼의 출혈.

늦었다. 살 수 없다.

“근데, 오빠는 나랑 놀아줘서, 그래서 진짜 좋았다?”

“그렇습니까.”

“응. 좋았어. 그리고….”

온 몸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통은 아무리 단련된 병사라 할지라도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데, 이 아이는 뭐가 그리 좋아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걸까.

“두고 간 거, 있다고 해서…. 라나가 문 열어달라고 했어.”

“보입니다. 잘 하셨어요.”

“근데, 이상하다? 오빠 얼굴이 안보여….”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 라나.

이윽고 얀의 얼굴이 손에 닿자 소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 환해졌다.

“히히, 수염 까칠까칠해.”

“…다음에 올 땐 면도를 좀 해야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멀리가지 말고 나중에 또 놀자.”

“자주 찾아 봬야겠군요.”

“진짜지? 약속했다?”

그렇게 말하는 라나였지만 이윽고 뿜어져 나오는 피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 맞다…. 오빠, 이름이 뭐야…?”

그렇게 묻는 라나의 말에 얀이 조용히 답했다.

“얀, 베르쿠트입니다.”

“그렇구나…. 다음에, 만나면…. 이름으로….”

툭.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팔이 맥없이 축 늘어졌다. 초점을 잃은 채 반쯤 감겨 있는 라나의 눈.

한 동안 그것을 가만히 보던 얀은 이내 라나의 시신을 들어 한 구석으로 옮겼다.

[유전정보 인식. 실험체 번호 40923. 시설 출입문 개방.]

쿠구구구구….

기계는 죽음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태껏 자신을 지켜온 소녀가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 없는 기계는 소녀의 피에 반응해 문을 열 뿐이었다.

“닐.”

[명령 대기중.]

원래 같았으면 빨리 기체에 타라고 독촉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잠자코 기체를 제어해 얀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시설 안에 무기가 있어. 꺼내서 연결시켜.”

[명령 확인. 시설로 접근.]

쿵. 쿵.

포탄의 기세가 줄어든 것을 확인한 글레이프니르가 시설 가까이 다가와 입구로 손을 뻗었다.

[I-92 보존시설 개방 확인. 기체 인증절차 완료. E-14 반출허가요청.]

[EUA-014 기동병기 인식. 전용 무장 인계. E-14 레일 캐논. 사용자 얀 베르쿠트에게 인계.]

[기체명 글레이프니르. 인계 완료. 시설 관리수칙 32에 의거, 해당 시설의 임무 종료를 선언.]

[신호 수신. I-92 시설 임무 종료. 관리수칙에 따라 영구 폐쇄절차 개시.]

[인류에게 영광을.]

[인류에게 영광을.]

차례로 신호와 구호를 주고받는 고대인의 두 기계.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교차하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손에 거대한 포신이 들려나오고 있었다.

“또 볼 수 있을 겁니다.”

덜 감겨진 라나의 눈을 감겨준 얀이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준비를 마친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걸어가는 얀.

그의 눈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글레이프니르가 포신을 하늘 높이 세운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일럿 탑승 확인. 동조 개시.]

쿠구구구….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글레이프니르.

한 손에 든 거포에서 나온 동력선이 기체의 등 부분과 연결되며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사격통제 OS 업데이트 완료. 적 기체 위치 확인. 자동 조준보정 완료.]

쏴아아아아-

빗물이 끓어오르며 생긴 연기를 헤치고 글레이프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 속에서 그 괴물이 들고 있는 거대한 포신을 확인한 순간, 엄호사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미르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 저건 설마…. 돌격포?”

그렇게 말하며 위치를 옮기는 미르엘의 콜로서스.

“뒤에서 쏘던 놈부터 처리한다.”

[명령 확인. 우선순위에 따라 조준 개시.]

이윽고 몸을 돌려 칠흑 같이 어두운 숲을 가만히 응시하는 글레이프니르.

양 손으로 들고 있는 거대한 레일 캐논이 임계상태에 다다른 듯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삐-!

조준 완료를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가 방아쇠를 당겼고.

그 순간, 땅 한가운데에 번개가 쳤다.

투콰아아아앙-!

글레이프니르가 있는 곳을 대낮처럼 밝힌 엄청난 섬광. 이어지는 폭팔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화염.

전자기로 가속된 탄환은 그 엄청난 열과 압력을 견뎌낸 뒤, 곧바로 미르엘이 탄 콜로서스를 향해 쇄도했다.

콜로서스 조종석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폭음에 양 옆으로 우회하던 바르자엘과 바미엘이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뭐가 일어난 거지!?

- 미르엘! 응답하라! 미르엘!

괴물이 뭔가를 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바르자엘이 착탄지점을 바라본 뒤, 그는 한 순간 전의를 상실할 뻔 했다.

“저게…. 뭐야?”

장갑을 뚫고, 조종석이 짓이겨지고, 수천도가 넘어가는 용광로에 담겨도 골격만큼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는 고대인의 유산, 콜로서스.

그러나 눈을 크게 뜬 바르자엘은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없다.

없었다.

콜로서스의 상반신이.

마치 뭔가에 뜯어 먹히기라도 한 듯,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원형을 유지하던 골격과 마력로까지, 깡그리 다!

- 바, 바르자엘! 저건!

- 모르겠다! 모르겠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상식이 무너지는 감각에 두려움이 일기 이전에 경외감이 앞섰다.

경탄스러운 눈으로 그렇게 외치는 와중에 목표 지점에 도착한 두 사람.

모니터에 나타난 두 사람의 기체를 응시하는 얀은 퀭한 눈으로 모니터에서 빛나는 그들의 형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남은 잔탄 한 발.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는 접근전이 불가피하나, 파일럿의 상태를 고려….]

“내 상태가 뭐 어쨌다고?”

[발언 철회. 접근전 준비. 동조율 고정.]

얀의 눈치를 보는 닐의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가 튀어 올랐다. 두 개의 포신으로 이뤄진 레일건을 마치 창처럼 거머쥔 모양새였다.

- 이쪽으로 접근한다! 바미엘! 엄호를…!

- 젠장, 늪지대에 발이!

쿵-!

바르자엘의 눈앞에 글레이프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에 분노한 듯 흉흉한 기세에 순간 그의 기체가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이거, 좀 험하게 써도 문제없는 거지?”

[긍정. 포신 폐쇄. 백병전 형태로 전환.]

- 이, 이런 곳에서…!

으지직!

이전에 부르타엘의 랜스가 얀의 글레이프니르를 꿰뚫으려 했듯이, 창처럼 치켜든 레일 캐논의 포신이 그대로 바르자엘이 탄 콜로서스의 조종석을 짓이기며 꿰었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바미엘이 얀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포를 퍼부었다.

캉-!

카앙-!

포신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거의 연사에 가까운 속도로 돌격포를 쏴댄 바미엘이었지만, 그 포격을 전부 몸으로 받아낸 글레이프니르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 오, 오지마!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기는 바미엘의 콜로서스.

틱, 틱.

“이런 제길, 이 상황에 탄환이!?”

이윽고, 탄환이 없음을 알리는 빈 공이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가 두 손을 들어 레일 캐논으로 바미엘의 콜로서스를 겨눴다.

“바, 바르자엘의 콜로서스를…. 통째로!”

글레이프니르가 들어 올린 레일 캐논에 매달린 바르자엘의 콜로서스.

그 육중한 콜로서스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글레이프니르의 출력과 그 무게를 견뎌내는 포신의 강도는 이 기체가 왜 창조주의 유산이라 불리는지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악마다! 저건 악마야! 바일사르 제국의 악마!”

미친 듯이 그렇게 외치면서 빈총의 방아쇠를 계속해서 당기는 바미엘.

[조준 완료. 포신 개방.]

삐-!

얀은 공포에 질린 그의 절규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쿠콰아아앙-!

섬광. 폭음. 그리고 화염.

포신에 매달려있던 바르자엘의 기체는 아예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버렸다.

레일건의 탄환을 정통으로 맞은 바미엘의 기체는 이전의 미르엘이 그러했듯, 상반신 전체가 사라진 채 두 다리만이 덩그러니 남아 숲 한편에 쓰러졌다.

쿵-!

단 두 발의 포격으로 세 대의 콜로서스를 완전히 박살낸 글레이프니르.

“저, 저건 대체….”

“콜로서스가…. 아예 사라져버렸어….”

멀리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단델과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파직! 파지직!

레일 캐논을 발사한 자리는 마치 폭탄이 터진 듯 처참한 모양이었다.

나무들이 전부 뽑혀나가 흙을 내보이는 바닥에서는 아직 채 방출되지 못한 전기가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공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치이이익-!

일부 장갑을 열어 내부의 열을 방출하는 글레이프니르.

해질녘부터 내리던 비는 하루 종일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쿠르르르….

힘을 다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은 글레이프니르는 달아오른 장갑을 식혀주는 빗물을 만끽하며 연기 속으로 점점 가라앉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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