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28화 (28/186)

28. 라나(4)

- 헤드 나이트 바르자엘이 각 기에 전달한다. 델란엘의 후퇴를 확인. 카리엘의 마력은 감지되지 않는다.

- 바미엘 기. 확인.

- 미르엘 기. 확인.

빗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세 대의 회색빛 콜로서스. 전과는 다르게, 대 요새용 철갑탄으로 한 탄창을 가득 장전한 상태였다.

- 이전에 상대했던 대로 하되, 우천 상황인 만큼 발밑을 조심해라. 늪지대에 빠지는 순간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 카리엘이 이렇게 빨리 당했다니, 믿기 힘든데.

- 현지 엘프들과 대화한답시고 조종석 밖으로 나갔겠지. 그 녀석도 숲속 출신이었으니….

- 그럼 델란엘은? 2인 1조로 경계를 서도록 했을 텐데?

- 그만. 잡담은 거기까지

불안한 듯 중얼거리는 대원들을 조용히 했지만 이들을 이끄는 바르자엘 역시 착잡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정찰 임무에서 기사를, 그것도 6호 콜로서스를 조종할 수 있는 인재를 잃다니. 좋지 않아.’

다른 기체들보다 성능이 월등히 높은 6호 콜로서스였지만, 그 만큼 기체가 잡아먹는 마력량 또한 어마어마했다.

엘프 기사들 중에서도 완전히 다루는 이가 백 명이 채 되지 않는 기체인 만큼, 그것들을 다루는 기사 역시 중요한 인물로 취급된 것이다.

- 마을이 보인다.

- 위쪽 능선에 적 기체 발견! 검은 놈이다!

- 델란엘은 저 녀석에게 당했다는 말이군.

저 멀리 보이는 글레이프니르의 그림자를 본 기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한층 올라간 마력에 반응한 콜로서스가 지축을 울리며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붙잡힌 엘프. 어떤 상태인지 확인 되나?”

[불가능.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신체구조와 일치하지 않음. 또한 정체불명의 에너지에 의해 신체 내부 스캔이 불가능.]

“마력 때문에?”

[해당 에너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함.]

대삼림에 내리는 비는 이윽고 폭우로 바뀌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 의식을 잃은 라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라엘은 천천히 다가오는 글레이프니르를 맞이하고 있었다.

치익-!

빗방울이 전투로 달궈진 글레이프니르의 장갑판에 닿아 끓어오르며 연기를 자아냈다.

이윽고 유적지 앞에 도달한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이 열리며 그 안에서 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얀 중위.”

“얘기할 시간 없으니 입 닥치고 열쇠를 내놔.”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에 의해 숲에는 어둠이 짙게 깔린 상황.

조종석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과 유적을 비추는 글레이프니르의 탐조등만이 어두운 산 속을 밝히고 있었다.

“그전에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유언이 될지도 모를 말을 들어 줄 여유 정도는….”

“없어 이 새끼야.”

탕-!

“이런!?”

곧바로 얀의 손에 들린 권총이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어깨에 바람구멍이 뚫린 라엘이 당황한 듯 라나를 방패로 삼고 몸을 뺐다.

“당신, 제정신입니까?!”

“협상하지 않는다고 했지? 죽고 싶지 않다면 아이를 넘겨.”

“말했잖습니까, 할 얘기가 있다고! 열쇠는 그 이후에…!”

“아가리 닥쳐.”

그렇게 말하며 라엘의 다리를 향해 두 발을 더 쏜 얀.

하지만 라엘의 눈앞에서 멈춘 탄환을 보고는 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염동력?”

“이 이상 공격한다면 열쇠를!”

“열쇠를 내놓고 곱게 죽던가, 온갖 고통을 다 맛보고 죽던가. 네 선택지는 그것뿐이다.”

“끝까지…!”

그렇게 말하며 라나의 머리에 겨눈 총구를 밀착시키는 라엘이었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얀이 아니었다.

구우우웅-

라엘의 행동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한쪽 손이 올라가며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내가 방금 너한테 뭐라고 했지?”

“어차피 당신에게 열쇠가 필요한 건 변함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총구를 내린 라엘. 그렇지만 여전히 라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얀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정말로 관심 없습니까? 제가 이 아이의 피를 모으는 이유!”

“뭐?”

얼굴을 찡그린 얀을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 유적은 거대한 시설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진짜는 제가 알려드린 유적 한가운데에 잠들어있죠.”

“진짜라니.”

“창조주의 유산이 잠들어있어요. 당신의 기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녀석이!”

클라우스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는 소리인가?

그렇지만 굳이 이 상황에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이 아이는 그 유적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 알프라이아와 바일사르 사이에서 이중간첩을 하고 있는 네놈은,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

자신의 정보를 엘프들에게 넘기고, 자신들을 마을로 유도하고, 그 모든 일들을 뒤에서 조작하던 게 이 녀석이라.

권총을 겨눈 얀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축 늘어진 채 몸을 떨고 있는 라나를 바라보며 얀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그곳에 잠든 창조주의 유물을 깨우는 데에는 다른 게 필요합니다. 이런 찌꺼기 같은 게 아닌, 순수한 창조주의 피가.”

자신을 부르는 말임을 알아챈 얀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제 계획은 완전해집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당신처럼! 창조주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는 뜻이죠!”

“이 녀석을 다룬다는 게 그런 거창한 증명이었나?”

창조주의 후계자? 관심 없었다.

그렇지만 마을 엘프들이 자신을 손님이라고 부르던 이유는 이해가 되었다.

글레이프니르와 같은 고대의 유물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엘프 사회에선 그 정도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러니 당신께 제안하죠! 저와 함께 갑시다! 얀 베르쿠트 중위!”

…뭐?

얀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지었던 표정 중 가장 멍청하고 이상한 표정일 것이다.

“당신이 저와 함께 가서 그 유적에 잠들어있는 유산을 깨우는 겁니다!”

뜬금없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라엘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찡그린 얀이었지만, 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향해 열변을 이어갔다.

“창조주의 유적에 잠들어있는 고대의 유물, 타우르의 힘만 있다면! 저와 당신은 나라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알프라이아를 건국했던 알피와 라이아처럼!”

“그게 누군데 귀쟁이 새끼야.”

엘프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얀이었기에 그렇게 일축했지만, 라엘은 권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계속해서 자신이 품고 있던 계획을 줄줄 늘어놓았다.

“어차피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크고 작은 전쟁 때문에 양 국가의 민심은 바닥났습니다.”

“그래서?”

“이 숲속에 살고 있는 엘프들 또한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당신과 저! 창조주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두 사람이 나타나는 겁니다!”

여기까지 듣고 난 얀의 머릿속에는 그저 담배 생각만이 가득했다.

“얀 베르쿠트. 당신도 봤죠? 이 마을 엘프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숲속에 있는 대부분의 엘프들이 그럽니다! 당신과 전 왕이 될 수 있는 재목이라구요!”

그렇게 말하며 희열에 몸을 떠는 라엘.

얀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야.”

“이, 이제야 제 제안을 받을 생각이 드신 겁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라엘의 얼굴을 본 뒤 얀은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너 병신이냐?”

“…예?”

갑작스레 들려온 얀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라엘이 되물었다.

“만난 지 2주 조금 넘은 사람한테. 심지어 너한테 뒤통수를 두 번이나 맞은 놈한테 그렇게 제안하면, 내가 넘어 갈 거라 생각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란델. 그리고 이 마을.”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목소리에 라엘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 보았듯,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건 일종의…. 시험이라고 해 두죠. 당신은 훌륭하게 그것을 극복해냈지 않습니까?”

“하, 극복?”

피식 하고 라엘을 비웃은 얀은 그를 향해 단호하게 내뱉었다.

“안 해. 꺼져.”

그렇게 말하자 헛웃음을 흘린 것은 라엘이었다.

“하, 하하! 말도 안 되는군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는 겁니까?”

“어. 모르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얀의 어투에 순간 라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당신이 가진 건 고대인의 피입니다! 유적에 들어가 그 피를 뿌리기만 해도 세상 천지에 있는 모든 창조주의 유산이 당신의 것이라구요!”

“그래서?”

“그 성스러운 피를 타고 났다면! 당연히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 축복을 사용해야죠! 세상을 손에 넣어야지요!”

라엘의 열변은 얼핏 보면 숭고하게까지 들렸다.

한 손에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지만 않다면 말이지.

“당신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알프라이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을 집어삼킨 인간! 그 정도의 야망은 있을 것 아닙니까!”

“없어. 있어도 너와는 절대 함께할 생각 없고.”

“허, 이것 참!”

답답하다는 듯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줘는 라엘. 그런 그와는 달리, 얀의 표정은 변함없이 평온했다.

“이건 낭비입니다! 성혈을 낭비하고 있는 거라구요! 힘과 권력을 타고난 자는 그에 걸 맞는…!”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내 기준으로썬 실격이야.”

라엘의 말을 끊은 얀의 목소리에 라엘이 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실격이라고 새끼야. 귀쟁이 새끼가 귀에 좆박았냐?”

이어지는 욕설에 순간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왕이 될 수 있다느니 뭐니 늘어놓는데.”

그렇게 운을 띄운 얀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그냥 니가 반쪽짜리인 게 싫은 것뿐이잖아.”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창조주의 후예라는 번지르르한 감투로 그걸 가리려는 것뿐이고.”

꿈틀.

시종일관 웃음 짓던 라엘의 입가가 경련했다.

그런 그의 변화를 알아챈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얀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들키기 싫어서 거창한 이유로 포장하고, 들키지 않기 위해 일을 키우면서.”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 둘 네 주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제 잇속만 챙기고 있지.

“아니라고!”

더 참지 못했는지 큰 소리를 낸 라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래. 이제야 가면을 벗는군,

피식 웃으면서 얀이 입을 열었다.

“인정해라. 넌 그냥 네 안에 있는 반쪽짜리 피를 지우고 싶을 뿐이야. 하프엘프 라엘.”

뿌드득!

하프엘프.

그 말을 들은 라엘의 입에서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곡을 찔린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대의를 욕보인 것에 분노한 것인지.

표정을 일그러트린 라엘이 얀을 향해 씹어뱉듯이 말했다.

“열쇠가 누구 손에 있는지 잊으셨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라엘이 라나를 잡은 팔에 힘을 주는 순간.

탕! 탕!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요! 총으로는 절 잡을 수 없습니다!”

“니 시선을 돌리는 거면 충분해 이 새끼야.”

그렇게 말한 얀은 탄창을 갈아낀 뒤 라엘을 향해 권총을 마구 쏘면서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라엘이 침음성을 내며 뒤로 물러났다.

“조준도 제대로 안하고 쏘는 겁니까!?”

“내가 조준을 왜해? 역장 깔고 있으면 인질도 같이 보호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얀.

그의 말대로, 한 손에 라나를 든 채로는 근접전을 할 수 없었다.

‘제길!’

견디지 못한 라엘이 짜증난다는 듯이 유적 입구로 라나를 내동댕이치는 순간, 곧바로 라엘의 품으로 파고든 얀이 그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빠악!

“아악! 무슨 힘이…!”

“넌 방금 실수한 거야. 귀쟁이 새끼야.”

이윽고 이어지는 것은 무자비한 구타.

염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할 새도 없이, 얀은 권총을 옆으로 쥔 채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빡! 빠악!

“하! 하하하! 이까짓 폭력으로 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해. 그냥 분풀이지.”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라엘이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더 빛나고 있었다.

“이익!”

이내 가공할 힘으로 얀을 밀어낸 라엘은 그대로 얀의 어깨에 무언가를 찔러 넣었다.

푹!

라엘이 어깨에 박아넣은 주사기의 방아쇠를 당기자 푸쉭! 소리를 낸 주사기가 순식간에 얀의 피로 가득 찼다.

“이 새끼가…!”

“당신이 제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저도 따로 방법을 강구 할 수밖에…!”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라엘의 몸을 밀어냈지만, 라엘은 얀의 피가 든 주사기를 들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이것이 창조주의 성혈!”

“성혈은 니미.”

라엘의 광소에 짧게 답한 얀이 곧바로 권총을 들었지만, 라엘 역시 손을 앞으로 들어 마력으로 이루어진 역장을 만들어냈다.

“닐, 인질은 확보했다. 그대로 짓뭉개버려.”

그렇지만 그에 답하는 닐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경고. 적 집단의 포격을 확인. 파일럿 보호조치 시행.]

“뭐?”

카아앙-!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글레이프니르의 한쪽 어깨에 불꽃이 튀었다.

“미친, 이 거리에서 포격을 맞췄다고!?”

“하, 하하! 역시 바르자엘! 알프라이아 최고의 포수라 불릴 만 하군요!”

몸으로 포탄을 막아내며 얀을 감싸는 글레이프니르. 그러는 사이, 라엘은 구멍 난 어깨를 감싸 쥔 채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이 새끼가!”

탕! 탕!

그가 사라진 곳을 향해 두어 발 권총을 쏜 얀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쯧.”

얀은 총알이 다 떨어져 노리쇠가 뒤로 밀려 약실이 들어난 권총을 신경질적으로 땅에 던져버렸다.

“오…. 빠아…”

“라나 무사합니….”

그렇게 물으며 라나를 부른 얀이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개새끼, 피를 뽑아놓고 지혈을….”

유적의 문 앞에 기대어 앉은 라나의 주변에는, 이미 빗물이 섞인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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