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27화 (27/186)

27. 라나(3)

- 델란엘. 내가 먼저 진입할 테니 경계해주게.

- 아아. 그러지.

제보를 받고 도착한 마을은 보고 받았던 대로 한산했다.

거대한 콜로서스에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밖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 이 마을의 촌장은 누구인가!

확성기를 통해 그렇게 외친 카리엘의 말에 노인 한 명이 벌벌 떨면서 마을 광장으로 나왔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님! 이 마을의 촌장인 다케르라고 합니다.”

- 음. 알프라이아 왕국 근위기사 카리엘이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위장도색도 다 되지 않은 회색 콜로서스의 복부가 열리며 한 엘프가 걸어 나왔다.

붉은 머리와 고풍스러운 제복을 갖춰 입은 카리엘이 한쪽 무릎을 꿇은 콜로서스에서 걸어 나오고, 델란엘의 콜로서스가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흠,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마, 마을 젊은이들은 담비 사냥을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담비 사냥? 곧 비가 올 터인데 사냥을 나갔단 말인가?”

“조금이라도 더 잡아야 마을의 생활이 유지되는 탓에….”

그렇게 말하는 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부족민들의 생활상에 연민을 느낀 듯 착잡한 눈으로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랜 전쟁은 성왕께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오. 가증스러운 바일사르 놈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대로, 이곳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엘프들에게도 지원이 올 것이니.”

“성왕 폐하의 은혜에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 말해주니 다행이군.”

촌장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옅어진 것을 확인한 카리엘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곳의 젊은이들에게서 훌륭한 자질을 보았소. 이 마을에 찾아온 것도 그들 덕분인데….”

이윽고 카리엘은 알프라이아 군에 젊은이들을 입대시키라는 말을 꺼냈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받는 촌장의 모습을 보며 델란엘은 착잡한 듯 턱을 감싸 쥐었다.

“마을에까지 전쟁 참여를 독려한다는 건, 그 만큼 본국에 인적 자원이 없다는 뜻이군. 역시 이 전쟁은 부담이 너무 커.”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제국군을 압도하는 알프라이아였지만, 그들은 중앙 전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조국 수호전쟁이기에 정벌에 나서지 않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이랬다.

‘마력을 지닌 오크가 태어날 확률은 인간 이하. 고블린 같은 전력으로 보병 전력을 충당한다 해도, 콜로서스에 탈 기사가 부족해.’

바일사르 제국의 기사들에 비교했을 때, 엘프 기사들의 대우는 한 차원을 달리 한다. 기사단 단위로 영지를 하사하는 제국과는 달리, 알프라이아는 개인에게 영지를 하사할 정도로 대우의 차이가 큰 편이다.

모든 엘프들은 마력을 타고나지만, 콜로서스를 움직일 정도의 마력을 가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마력이 높은 알프라이아 엘프들은 예외 없이 왕국에 의해 징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숲속까지 나와서 기사를 모집해야 한다는 것은….

‘이대로 전쟁이 지속된다면 알프라이아 엘프는 씨가 마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깜빡거리는 빛을 바라본 델란엘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부족민들이 색색의 옷감으로 장식해놓은 언덕 위에서 엘프 종족의 마력광이 비춰지고 있었다.

“라엘? 이 상황에 발광 신호라니….”

신호에 집중하며 그렇게 혼잣말하는 델란엘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위험. 함정이다.’

- 카리엘! 당장 돌아오게!

신호를 알아챈 델란엘이 다급하게 카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타앙-!

총성이 마을 광장을 가득 울렸다.

털썩!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관통한 소총탄이 주인을 잃은 그의 콜로서스 장갑에 날아가 쇳소리를 냈다.

- 이, 이 놈들이 감히 알프라이아의 기사를!

순식간에 기사 하나가 저격당했다.

있을 수 없는 상황에 격분한 델란엘이 팔에 장비된 기관포를 들었다.

안에는 인마 살상용 자탄이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 마을 째 가루로 만들어 줄…!

- 가루는 니미.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낮선 목소리에 델란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아니, 낮선 목소리가 아니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저 가증스러운 목소리!

투콰앙-!

고목으로 우거진 숲 한쪽이 불쑥 튀어나오며 글레이프니르의 진회색 몸체가 나타났다.

곳곳에 걸려있는 나뭇가지와 풀들을 털어내며 튀어 오른 글레이프니르의 주먹이 델란엘의 콜로서스를 강타했다.

“끄으윽! 네놈이!?”

압도적인 출력에 두어 걸음 휘청인 델란엘의 콜로서스.

“지금이다! 연막 살포!”

이내 마을 곳곳에 숨어있던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준비된 연막탄을 뿌리며 연기 속에 마을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 네, 네놈이! 네놈이 또오오-!

또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저 가증스러운 검은 괴물과 그 부하들에게, 또 다시 동료를 잃었다!

허리에 장비된 검을 빼든 델란엘의 콜로서스가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체의 성능이나 승률 같은 하찮은 것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콰앙!

내리쳐지는 델란엘의 검격을 한 팔로 받아낸 글레이프니르가 곧바로 검신을 손으로 잡아냈다.

- 넌 나랑 같이 좀 가지.

끼기기기긱!

거대한 검을 한 손으로 쥔 글레이프니르가 그대로 델란엘의 콜로서스를 밀어냈다. 압도적인 출력으로 가해지는 힘에 기겁한 델란엘이었지만, 눈앞에서 동료를 잃은 그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 으아아아!

쿠르르르르르!

글레이프니르의 힘에 밀려 마을 밖으로 밀려나는 델란엘의 콜로서스. 골격을 두른 장갑대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소름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하나 둘 튕겨나가고 있었다.

- 부르타엘의 원수! 내가 아무 대비책 없이 네놈을 기다린 줄 아느냐!?

그렇게 외친 델란엘이 손에 쥔 검을 놓았다.

그 움직임에 맞춰 검을 손에서 놓은 글레이프니르. 그렇지만 이미 허리춤에 장비된 소형 마력포를 임계상태로 놓은 델란엘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푸콰앙!

눈부신 마력광과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몸이 한 걸음 밀려났다.

“좋아, 이 사이에 거리를 벌린다면!”

그렇게 말하는 델란엘이 기체를 뒤로 빼려 하는 순간.

쿠륵, 쿠르륵!?

갑자기 기체에 뭔가가 걸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 끈적한 것에 발이 빠진 듯한 감각이었다.

“제길, 이건 설마!”

서둘러 아래로 시선을 내린 델란엘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콜로서스의 한쪽 발이 진흙이 된 땅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숲속이라 비가 다 마르지 않은 건가? 하지만 저 괴물녀석은 멀쩡하게 움직이는데…!”

물렁한 진흙바닥을 돌바닥처럼 안정적으로 딛고 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보며 델란엘은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성능뿐만이 아니라, 지형 적응까지 모두 대응하는 병기. 화력과 같은 부분은 마도 공학으로 메꿀 수 있다고 쳐도, 이런 기술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지형 데이터 수집 완료. 적정 수준에 맞춰 접지압을 재조정. 밸런서 비율을 30%로 하향.]

“창조주님 만세군.”

눈앞에서 휘청거리는 회색 콜로서스를 바라본 얀이 조종석에서 그렇게 내뱉었다.

곧바로 돌진해 콜로서스의 한쪽 팔을 잡은 얀.

이윽고 그의 입가에 비틀린 비소가 걸려왔다.

“그래. 그때 놓친 그 새끼였군?”

- 이익!

장전된 탄을 버린 콜로서스의 양 기관포에 철갑탄이 장비되었다.

부와아아앙-!

한 팔을 들어 기관포 세례를 받아내며 앞으로 전진하는 글레이프니르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천천히 델란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젠장, 어서! 어서 빠지란 말이야!”

기관포를 퍼부으면서도 늪에 빠진 발에 마력을 집중하는 델란엘의 기도가 통했는지, 늪에 빠졌던 한쪽 발이 빠져나오며 기동성을 확보했다.

“좋아. 우선 거리를 벌리고 구조요청을…!”

- 어딜 도망가?

투콰앙!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글레이프니르가 콜로서스의 팔을 붙잡았다.

이전의 악몽이 떠올라 흠칫한 델란엘. 그렇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바꾸고 온 힘을 다해 붙잡힌 팔에 마력을 집중했다.

- 도망? 웃기지 마라! 두 번 다시는 네놈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리라!

- 아, 그러셔?

그렇지만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을 잡은 글레이프니르는 요지부동이었다.

‘마력포 이외에는 유효한 무장이 없어! 그렇다면!’

침음성을 내뱉은 델란엘이 한 쪽 허리에 장비된 마력포를 근거리에서 발사했다.

모아둔 마력이 쭉 빠지는 감각에 한 순간 실신할 뻔 했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글레이프니르가 다시 한 걸음 물러나는 게 보였다.

“젠장. 이 지독한 놈, 그 와중에 팔을…!”

뿌드득!

글레이프니르의 손에 들린 콜로서스의 팔이 그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우그러졌다.

“그렇지만 이 거리라면!”

그렇게 말한 뒤 남은 한 손을 들어 올린 델란엘의 콜로서스. 이내 콜로서스의 손등에서 신호탄이 쏘아져나갔다.

피유우우우우-!

급하게 설정된 신호탄이 뜻하는 것은 함정. 지원 바람. 그것을 본 얀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지원군이 오기 전에 이 녀석을 없애야…!”

- 멈추십시오. 얀 베르쿠트 중위.

하늘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얀이 고개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유적에 도달한 라엘이 유적 입구에서 뭔가를 들고 있었다.

-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상 허튼 움직임을 보일 시, 사살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 팔을 들어 보이는 라엘.

그의 손에는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라나가 매달려있었다.

- 유적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잃는 것은 황자 전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엘이 그렇게 이죽거리며 정신을 잃은 라나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자, 이를 악문 얀의 조작에 따라 글레이프니르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 델란엘 경. 이 틈에 후퇴하십시오. 저자는 쫒지 않을 겁니다.

- 웃기지 마라 반쪽짜리! 알프라이아의 기사가 팔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 차후 전투에 방해되니 꺼지란 말이 안 들립니까? 그 귓구멍에 총알이라도 박아드려야 말을 좀 들어주실는지요?

- 이, 이 더러운 인간의 자식이…!

하프엘프의 폭언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델란엘은 라엘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는 중에 글레이프니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델란엘은 곧바로 기체를 뒤로 돌려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적 콜로서스가 후퇴한다! 마을 주민들 대피시켜!”

“어제 만들어뒀던 숙영용 구덩이로 안내한다! 다들 서둘러!”

델란엘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자 마을 사람들을 집에서 꺼낸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마을 사람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서두르게! 손님께서 마을을 지켜주시는 사이에…!”

“지키기는 무슨, 덕분에 마을이 난장판이 됐잖아!”

“싸움은 나중에 하고 통제에 따르십시오! 산 속으로!”

“마을을 잃으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이냐….”

각각의 사연을 중얼거리며 마을을 떠나는 엘프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이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순식간에 장대비로 변해 마을이 있는 일대를 뒤덮었다.

쏴아아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얀은 시선을 돌려 라나를 붙잡고 있는 라엘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원만하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 아가리 닥쳐. 열쇠가 아니었으면 유적 째 박살냈을 테니까.

- 그렇게 안하신 걸 보니 어지간히도 이 아이에게 정이 든 모양이지요?

- 정? 웃기는 소리.

그렇게 말하면서도 얀의 글레이프니르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이곳으로 오시죠. 포로를 거래하겠습니다.

- 네가 잡은 건 민간인이야.

- 뭐든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전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은 이 아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지요.

그렇게 이죽거리는 라엘의 얼굴을 보며 얀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 뭘 원하는지 말해.

그렇게 말하자 모니터에 나타난 라엘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양쪽 입꼬리가 귀 중앙에 걸칠 정도로 올라간 소름끼치는 웃음.

그것을 본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 당신의 피. 그게 제가 제안하는 거래 재료입니다.

피?

의아한 얼굴을 한 얀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본 라엘이 킥킥거리면서 다시 목소리를 냈다.

저런 고고한 인간의 약점을 쥐고 뒤흔들 때의 쾌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라엘은 얀에게 계속 이죽거렸다.

- 콜로서스에서 내리시지요. 중위. 너무 무서워서 이 아이를 죽여버릴지도….

- 아, 씨발. 할 거면 하든가.

뭐?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욕설에 순간 라엘의 웃음이 그쳤다.

- 당신, 방금 뭐라고…?

- 해 보라고. 그럼 네가 어떻게 되나.

쿵.

땅을 울리는 글레이프니르의 발소리에 의기양양하던 라엘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지금 네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나야. 그러니 똑똑히 들어.

쿵!

- 적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저 엘프에게 손대는 순간, 난 널 뭉개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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