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26화 (26/186)

26. 라나(2)

“뒤 돌아서 서! 어서!”

“젠장, 인간놈들!”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들어찬 마을은 감옥으로 변했다.

고지대를 점거한 네 정의 기관총이 광장에 모인 마을 젊은이들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었고, 마을 곳곳에 형벌부대원들이 흩어져 다른 이들이 집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손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이해합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 그렇다면 저희 아들들은 어떻게…”

“그건 상부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벽을 바라보고 선 젊은이들 사이에 껴 있는 자신의 아들. 총에 맞은 한쪽 손을 감싸 쥔 그를 본 촌장의 표정이 급해졌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피붙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글레이프니르의 손에 앉아있는 라나가 얀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닐. 내려.”

그의 말에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글레이프니르의 팔. 천천히 내려온 라나가 폴짝 뛰어 얀에게 매달렸다.

“덕분에 살았네요.”

“나 잘했지! 콜록! 히히!”

그렇게 말하며 얀에게 매달리는 라나. 그것을 보는 얀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침?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게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얀에게 안긴 라나를 보는 젊은이들의 말소리가 하나 둘 들려왔다.

하나같이 소름끼치는 저주들이었다.

“저 귀신들린 년이….”

“자기 어미 아비도 유적에 집어삼키고는, 이젠 우리 마을을 통째로 인간에게 넘기려는 거냐!”

“진작에 제 할미와 함께 목을 비틀었어야 했는데!”

미신에 부정적인 젊은이들에게 있어 고대인의 유적을 직접 움직이는 라나는 적대와 괄시의 대상이었겠지.

“네년 때문에 일이 다 틀어졌어. 이 개같은 년아!”

젊은 엘프 중 한명이 그렇게 외치면서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 적대행위 확인. 이 이상 접근 시 제재하겠음.

얀의 명령에 따라 글레이프니르가 그들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으윽!?”

그것을 본 젊은이들은 처음 보는 거대한 콜로서스의 위용에 몸을 떨었다.

“따로 몸을 피하십시오. 부탁할 일이 있으니.”

“콜록! 그럼 나 유적에 가있을게! 오빠가 놓고 간 거 그 안에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라나의 말을 들은 얀이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곳이기도 하고, 같은 엘프인 이상 그렇게 위험할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응! 알았어!”

그렇게 말한 라나가 마을 밖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라나가 매달려있던 군복에서 느껴지는 물기에 의아한 얀이 그곳을 한번 훑었다.

“이건, 피?”

그렇게 의아해하는 얀의 곁으로 형벌부대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중대장님. 방금 그 아이는….”

“잘 지켜. 중요인물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형벌부대원 한 명을 호위로 붙힌 얀은 몸을 돌려 촌장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추가적인 정보는 없습니까? 진술 여부에 따라 일부 참작될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렇게 운을 띄우자 다급해진 촌장이 자신이 들었던 것들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알프라이아 군이 내일 중으로 마을에 들어온다는 말이군요.”

“예. 그렇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 노인네도 잘….”

“자제분께선 아실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한 뒤 얀의 시선이 팔을 감싸쥔 엘프를 향했다.

두 명의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복마법으로 상처 부위의 출혈을 막는 중, 얀의 시선을 느낀 그가 얼굴을 구겼다.

“심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창고 좀 쓰겠습니다.”

“제, 제발 부탁입니다! 실수를 저지른 녀석이지만, 그래도 장차 저희 마을을 이끌 녀석이라….”

“걱정 마십시오. 안 죽입니다.”

일렬로 세워놓고 질문 한 번에 한 명씩 사살하거나, 기름을 부어놓은 구덩이에 불을 붙인 뒤 한 걸음씩 전진시키거나 하는 형벌부대 전통의 심문법을 떠올린 얀이었지만, 13황자의 명령이 있었기에 이 방법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섣불리 고문 해 봤자 득 될 것도 없고….’

손님이라고 떠받드는 것도 자신이 해를 끼치지 않았을 때다.

이미 인간을 마을에 들이기로 한 이 마을에서 주민들의 가족이기도 한 이들을 고문한다면, 더 이상의 협조를 얻는 것은 어려울 터.

최악의 상황에는 이 마을 전체가 새로운 알프라이아 군의 거점이 될 수도 있었다.

끼이익-

그렇게 생각하며 얀은 촌장의 아들을 데리고 창고 건물에 들어섰다.

그레이하운드 중대원이 문 앞에 한 명, 건물 안에 한 명이 들어와 돌발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창고 치고는 건물이….”

“왜, 너희 인간들에 비해 너무 누추하신가?”

“아니, 우리 본부 건물보다 좋아보여서.”

이죽거리는 엘프의 말에 그렇게 내뱉은 얀이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축제(위장)을 위해 자재를 전부 빼간 탓인지, 창고 안은 한편에 쌓여있는 포대자루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도 없고, 그냥 서서 해야겠네.”

그렇게 말한 뒤 얀은 그의 손을 보았다.

출혈이 멈춘 손이었지만, 재생을 위해 붕대를 감아놓은 모습이었다.

“저 정도면 괜찮네. 질문 시작하지.”

얀의 목소리에 엘프 청년이 이를 악물었다.

“이름.”

“인간 놈들에게 알려줄 이름 같은 게…!”

뻑!

얀을 향해 이죽거리는 엘프 청년의 복부를 얀의 군홧발이 강타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엘프는 쿠당탕 소리를 내며 벽 한 구석으로 처박혔다.

“이름.”

“이, 개새끼가 다짜고짜 뭐하는 짓이…!”

뻑!

누워있는 그의 배를 한 번 더 차올린 얀이 계속해서 물었다.

“이름.”

컥컥거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 엘프는 얀의 심문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았다.

기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는 얀을 보는 그의 눈이 창백해졌다.

“케…. 케르엘.”

“케르엘? 알프라이아 식 이름인데, 부모가 알프라이아 출신인가?”

“내가 직접 붙였다. 언젠가 기사가 되어 너희 인간 놈들을 쓸어버리려고!”

그렇게 말한 뒤 이어질 발길질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케르엘이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얀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 이름은 케르엘. 기사가 되기 위해서 알프라이아에 정보를 제공했다라….”

“아, 안 때리는 건…. 가?”

그렇게 물은 케르엘을 보는 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케르엘이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다음 질문. 이곳에 올 예정인 엘프군의 규모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말할…!”

뻑!

다시 이어진 발길질.

벽 한쪽으로 날아간 케르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먼지가 뭍은 군복 바지를 털고 있었다.

“시간 없는데 좀 쉽게, 쉽게 가지?”

“차라리 죽여! 인간 놈들에게 협조하느니 차라리…!”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윗분들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니? 그렇게 생각한 케르엘의 눈이 얀의 어깨에 달린 견장으로 향했다.

사람의 팔을 물고 있는 사냥개 문양. 그리고 그 밑에 새겨진 낙인을 보는 순간, 케르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혀, 형벌부대?”

“응? 아, 이거?”

슬쩍 어깨의 견장을 내보이는 얀을 보는 케르엘은 인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촌장과 원로들을 씹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옆 마을을 통째로 쓸어버린 녀석들이잖아! 어쩌자고 저런 놈들을 마을에 들인 거야!?’

심문을 최대한 질질 끌며 시간을 벌 생각이 완전히 달아났다.

한 마디만 삐끗하는 순간, 곧바로 마을 인원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그를 엄습해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대로 기사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너희들도 무사하진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한 얀이 이 창고 벽면에 쌓여있는 포대 중 하나를 풀었다.

후두두둑!

“이, 이게 뭐야?”

“통조림, 건빵, 전투식량. 지난 일주일 동안 통행료 명목으로 제국군이 이 마을에 지불한 물건들이지. 군납이라 맛은 보장 못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얀의 발밑에 널려있는 수많은 군용 식량들의 포장지에는 바일사르 제국의 국영기업인 바일사르 유통의 상표가 찍혀있었다.

“알프라이아는 제국의 금화만 가지고 있어도 적으로 간주해. 이 물건들을 들킨다면 네 말을 듣고 찾아온 알프라이아 기사들이 누굴 먼저 죽이려고 할까?”

“이, 이 식량들로 우리 마을을 너희 편에 묶어놓을 수작이었군!”

“당연하지. 제국군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 보장 없이 너희한테 접근했을 줄 알았어?”

그 말을 들은 케르엘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자기가 부른 엘프 기사들의 손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몰살당할 판이었다.

“다시 질문하지. 네가 부른 엘프 기사.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미 모든 작업이 끝나있었다는 것을 안 케르엘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식량을 본 알프라이아 기사들에게 살해당하느냐, 인간과 내통하여 그들을 함정에 빠트리느냐.

어느 쪽이든 마을로써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이제 선택지가 없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자신이 부른 엘프군은 마을을 향해 오고 있을 테니까.

“좋아. 말하지. 기사단의 규모는….”

“중대장님!”

그렇게 케르엘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창고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급한 표정의 단델이었다.

“무슨 일이야.”

“경계조에서 발광신호가 왔습니다. 알프라이아 군 콜로서스 두 대 확인, 앞으로 15분 뒤에는 마을에 도착할겁니다.”

“뭐!?”

그 말에 놀란 것은 얀이 아닌 케르엘이었다.

“말도 안돼. 부대와 함께 온다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오후 중에 도착할 거라고….”

“보병의 호위 없이 콜로서스만 보낸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미리 지역을 선점하고 있던 덕분에 짧게나마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었다.

곧바로 창고에서 나온 얀이 마을을 한 번 살펴보았다.

‘지금은 통제되어있지만, 엘프군 콜로서스가 나타나면 곧바로 적으로 돌변하겠군.’

다른 건물에 은닉된 무기들을 처리하려고 해도 시간이 문제였다.

서로 대립한다 해도, 전투 상황이 된다면 마을 주민들 또한 젊은이들의 편을 들 터.

섣불리 글레이프니르를 내보내면 이상함을 느낀 다른 엘프들이 저항할 가능성이 있었다.

‘제압이 가능하다 해도 그 와중에 마을이나 부대원들 중에 사상자가 나오는 순간, 이 마을과의 공조는 끝.’

주변 엘프 마을을 중재해주는 이 마을과 대립하게 된다면, 유적으로 향하는 경로를 만드는 내내 게릴라전을 치루며 병력을 소모시켜야 한다.

“단델 소위.”

“예.”

생각을 마친 얀이 단델을 부르자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아놓은 엘프들은 이 창고로 구금시키고, 나머지 병력들은 매복시켜.”

“알겠습니다.”

얀의 지시를 받은 단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얀 또한 글레이프니르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마을을…. 전쟁터로 만들 생각인가!?”

전쟁.

멀게만 느껴지던 그 단어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다가오자 젊은 엘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아마 너희 아버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겠지.”

자신을 말리던 촌장,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린 케르엘이 이를 악물었다.

전쟁통에 자원은 씨가 마르고 마을 간의 전투도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제국군의 콩고물을 받아먹겠다는 판단은 그 나름대로의 최선이었겠지.

자신들이 도시에서 조달해오는 식량으로는 이 마을을 다 부양할 수 없었으니까.

“제국군은 마을이 알프라이아 눈에 띄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들은 전부 취했었다.”

“너희들이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그건 우리에게 이 마을을 소개한 라엘이라는 하프엘프에게 말해. 우린 그 작자의 소개로 여기 온 거니까.”

얀이 그렇게 말하자 케르엘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뭐? 라엘?”

뒤늦게 대답한 케르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을 본 자신이 뭔가 이상한 것을 말한 것인가 생각하려 할 때 새파랗게 질린 케르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프라이아 정보부대가 제국군을 우리 마을에 들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정보부대?”

순간, 얀의 머릿속에 능글거리는 녹색머리 엘프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알프라이아 엘프들은 절 고블린 아래의 무언가로 생각하거든요.’

‘전 한 번도 그들을 동족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래.

어딘가 이상했었다.

전선으로 파견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란델이 어떻게 엘프군과 내통하여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 했는지.

전쟁이 끝난 그 시점에 마치 끼워 맞춘 듯 이 마을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왔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자신과 부대원들을 마을 무방비로 마을 안에 들이려고 했는지!

“이봐.”

“예 중대장님.”

창고 건물 밖에서 경계를 서던 대원을 부른 얀이 그에게 물었다.

“같이 온 라엘이라는 엘프. 지금 어디 있어.”

잠시 생각하던 그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마을을 제압하는 와중에, 유적으로 향한 인원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면서 사라졌습니다.”

유적.

방금 전 라나가 가 있겠다고 한 그곳.

그의 행선지를 들은 얀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귀쟁이 새끼야…!”

“역시 엘프보단 인간이 더 좋네요. 꼬박꼬박 귀쟁이니 엘프니. 그래도 엘프 취급은 해주니 말이죠.”

유적 입구 앞.

가슴팍을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형벌부대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렇게 답한 라엘은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많이 봤어. 꿈속에서.”

“호오, 피가 옅어지긴 했어도 무당 나름의 능력은 갖춘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라나에게 다가가는 라엘의 손에는 방아쇠와 손잡이가 달린 굵은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온 것 보다는 덜 아플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계시죠.”

“콜록, 콜록! 제실로 들어갈 생각이야?”

제실. 그 말을 들은 라엘의 입이 빙긋 하고 미소 지었다.

“예. 거기에 제가 한평생 찾아 헤매던 게 있거든요.”

“라나껄로는 못 깨워. 문을 여는 것 밖에 못해.”

“압니다. 하지만 손님의 피라면 가능하겠죠?”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라엘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오빠한테 뭘 할 셈이야?”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라나. 이윽고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점점 짙어져, 양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도저히 엘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형상이었다.

“제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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