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24화 (24/186)

24. 밑바닥 보금자리(3)

“출혈이 심한 듯해서 제가 치료했습니다. 마을의 전통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를 통째로 써서 유적을 탐사한 다음 날 아침. 마을로 돌아온 라나를 기다린 것은 그의 할머니라고 하는 늙은 엘프의 불호령이었다.

‘손님을 잘 모시라고 보내놨더니, 성흔을 감추고 돌아와!? 이년이 정신이 나갔지!’

그렇게 말하면서 라나의 뺨을 올려붙이려는 늙은 엘프를 막아선 얀이 그렇게 말하자 늙은 엘프는 난처한 듯 식은땀을 흘렸다.

“소, 손님께서 하신 일이신데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사리 파악을 제대로 못한 탓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얀을 건드리는 늙은 엘프. 이번에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떠난 뒤 뒷감당을 할 라나를 보면 차마 그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엘프에게 정이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에 난 무수한 상처를 본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해버린지라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일이 수월했습니다. 나중에 따로 마을에도 사례하겠습니다.”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인사치레까지 하면서 라나에게 뒤끝이 남지 않도록 힘썼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이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나.”

“응! 라나 여깄어!”

마을을 떠나기 전, 라나를 부른 얀은 그녀에게 방금 줬던 간식거리를 주며 말했다.

“같이 갔던 유적에 놓고 온 게 있습니다. 나중에 가지러 올 텐데, 그때 도와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라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응! 알았어! 빨리 와야해!?”

그렇게 말하며 떠나는 자신과 렌에게 손을 흔드는 라나.

잠시 그것을 본 얀은 이내 등을 돌려 본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 답지 않았네.”

“나도 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와중에 말을 먼저 건 것은 뜻밖에도 렌이었다.

“넌 좀 더 기계적인 인간이라고 판단했었어.”

“아마 정확한 판단일걸.”

“어제 그 행동은 꽤 인간적인데.”

“그건….”

생각하면 지금도 왜 그랬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왜 그때 그녀를 떠올렸는지를 몰랐었다.

전쟁터에서 보낸 10년이 넘는 세월. 그동안 그녀의 얼굴도, 복수심도 세월에 묻혀 옅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해묵은 세월을 한 층 걷어내면, 그 때 생각했던 복수심과 상처. 그리고 추억은 그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란델의 머리에 총을 겨눌 때가 그랬고, 어제 라나와 어울릴 때가 그랬다.

“그보다도, 그 유적에 있던 무기.”

“E-14. 기갑병기용 대구경 저격 소총.”

“그래 그거. 탄환은 따로 만들 수 없는 건가?”

화제를 돌릴 겸, 유적에서 발견한 무기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만드는 건 가능하지만, 전문 설비와 특수재료가 필요해. 있다고 해도 현재 제국의 기술로는 본래 위력이 40%정도.”

“그 정도로도 적 콜로서스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나?”

“그건 맞는 말이지.”

그나마 무기 본체가 남아있다는 게 천만 다행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얀은 주둔지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제 했던 유적 탐사가 꽤 좋은 재활치료가 되었는지, 몸 상태도 예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좋았다.

“중위님, 오셨습니까!”

“뭐?”

어제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부대에 도착한 지금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주둔지 입구에 들어서자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형벌부대원들을 보며 얀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기사단장님께서 복귀하시면 바로 찾아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바로 가지.”

그렇게 말한 뒤 부대로 들어간 얀.

“중위님 오셨습니까.”

“충성.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곳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얀의 표정이 갈수록 괴상해졌다.

중위라니, 이게 무슨 소리지?

“들어오게.”

클라우스의 숙소를 지키는 위병마저도 자신을 중위라고 부르자 얀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졌다. 그렇지만 천막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얀은 표정을 굳힌 채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서는 케인과 클라우스가 유적지 지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얀 베르쿠트 하사. 야간 순찰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음. 고생 많았네. 중위.”

뭐지? 기사단장 주도로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의아한 표정을 하자 그것을 본 클라우스가 재밌다는 듯이 큭큭 거렸다.

“전에 얘기했던 대로, 클라우스 황자 전하 휘하의 독립중대가 어제 창설되었다네.”

“아.”

그 말을 들은 얀은 클라우스 황자가 처음 왔을 때 한 말을 떠올렸다.

증원부대가 도착한 후에 이뤄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빠를 줄이야.

“그리고 그 독립중대의 주축이 되는 게 자네와 자네의 콜로서스, 글레이프니르일세.”

그렇게 말한 케인이 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얀 베르쿠트 하사. 지난 전투와 10년 간의 형벌부대 복무를 통한 전과를 인정한다. 그러나 상관 살해 등의 혐의가 걸려있는 바, 귀관의 계급을 원래 진급 예정이었던 계급인 중위로, 소속을 제 87 독립중대의 형벌부대로 이전한다. 이의는 있는가?”

“없습니다. 얀 베르쿠트 중위.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사관에서 장교로. 일반병에서 형벌부대로의 이동. 병주고 약주고 식의 인사였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다.

일반병 신분이면 그만큼 제약 또한 많아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작에 소속이 형벌부대였으면 그 유적 문을 폭파시키는 것도 고려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얀은 케인이 넘긴 부대원 명단을 살폈다.

5년 만에 다시 하는 장교의 일이었지만 짬순으로 돌아가는 형벌부대에서는 하사 신분으로 해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명단을 확인하는 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단델 클라우스 소위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형벌부대입니까?”

“그렇게 됐네. 대우에 대해서는 걱정 말게. 이미 능력이 입증된 이들이니만큼, 형벌부대라고 해서 차별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

클라우스 황자의 말을 듣는 와중에도 얀의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독립중대의 권한과 임무, 파견지역에 눈을 돌린 얀이 조용히 말했다.

“호위부대는 명목…. 실질적으로는 황자님의 개인적인, 혹은 그에 준하는 임무에 투입되겠군요.”

극소수의 콜로서스와 화력보다는 기동력을 중시하는 화기 편제. 그리고 얼굴과 전투 방식을 알고 있는 이들의 이름은 본 얀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 인원은 호위임무보다는 요인 암살, 시설물 파괴와 같은 은밀기동에 특화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정확하네. 얀 중위.”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 황자가 책상에 앉은 채 턱을 괴었다.

“앞으로 난 중앙 전선에 집중하느라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격전지를 돌아다녀야 해. 그렇게 되면 내가 가진 병력이나 개인 기사단은 오롯이 전선에 투입해야 하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선을 유지할 테니 감시와 방해를 뚫고 후방에서 적장을 쳐라. 미사여구를 붙여 봤자 결론은 이것이었다.

수많은 임무 중 가장 위험하고, 성공 확률이 낮은 임무만을 수행하게 될 테지.

“그대들은 내가 전선을 유지하는 동안, 고가치 표적을 목표로 게릴라전을 벌여 후방을 교란해줘야겠어. 수단과 방법은 묻지 않겠네. 임무는 반드시 성공시키게.”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는다.

클라우스 황자는 그 말의 무게감을 모를 인물이 아니었다. 명목상의 일반 장교를 제외한 전투원을 전부 형벌부대로 채운 것은 이것 때문.

“케인 로렌츠의 감독하에, 얀 베르쿠트 중위. 자네를 제87 독립중대의 중대장으로 임명하는 바이네.”

클라우스 황자의 선언에 얀은 조용히 그에게 경례를 올렸다.

“중위, 얀 베르쿠트. 황자님의 명을 받듭니다.”

흡족한 모습으로 그것을 바라본 황자. 그리고 손을 내린 얀이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니, 몇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충성! 부중대장을 맡은 단델 클라우드 소위입니다!”

순식간에 뒤바뀐 상하관계가 불편할 법도 할 텐데, 눈앞에 있는 단델 소위는 그런 기색 없이 부동자세로 얀에게 경례를 올렸다.

“잘 부탁해. 소위.”

더 이상 존대할 필요가 없어지자 얀은 곧바로 말을 놓았다. 단델이 내민 손을 잡고 흔드는 얀. 웃음이 가득한 단델과는 달리 얀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제 중위님께 반말 안 해도 된다는 게.”

“반대 아닌가?”

“무슨 말씀을, 제가 중위님 하대하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상급자가 되자 오히려 더 격이 없어진 모습. 일반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형벌부대원들을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 새끼들한테 이상한 것만 배웠구만.’

그 어리버리한 장교가 어느새 형벌부대원들을 통솔할 정도의 강단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에 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대장이라고는 해도, 난 병력 운영이나 지휘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어. 나가서 싸우는 법만 알지.”

심지어 이제는 콜로서스에 탄 몸이기에 보병들을 지휘하는 것도 무리였다.

콜로서스전에서 보병을 지휘할 여유 따위는 없을 테니까.

“중대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부중대장의 역할입니다. 걱정 마십시요.”

그렇게 말하며 나란히 걷는 얀과 단델.

이윽고 정비창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50명 정도의 형벌부대원들이었다.

“이 인원으로 중대라니. 기가 차는데.”

“규모는 소대급이지만, 권한은 중대급입니다.”

“정확히는 보급이 중대급입니다!”

“저희 쳐먹는 건 대대급인데, 괜찮은 거 아닙니까!?”

“제군들은 제국군 식량창고를 거덜 낼 생각인가?”

하하하하!!

형벌부대원이 이죽거리는 사이에 농담까지 끼워 넣을 정도로 동화된 단델을 보며 기뻐해야할지, 안타까워해야할지 모르는 얀.

그러던 중 그는 한 구석에서 정비병들을 이끌고 있는 렌의 모습을 보았다.

“야. 렌.”

짧게 그녀를 부르자 정비복 차림의 렌이 그에게 다가왔다.

“왔어.”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발굴단원이 입는 복장이 아닌 정비병들이 입는 정비복. 곳곳에 꽂혀있는 공구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사용된 것들이었다.

“정비반장. 13황자 직속 발굴단 기술주임.”

“…네가?”

정비반장이라니, 이 여자가?

망치하나 들 힘도 없어 보이는 외형에 정비반장이라고 하면 그 드센 정비병들이 뭐라고 반응할지.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얀은 이내 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욱 오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알프라이아 군 정비창에서 일했어.”

“얼마나?”

“70년.”

이 여자 진짜 몇 살인데?

그렇게 말하는 사이 정비병 몇몇이 렌에게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정비반장님! 관절부 부속은 어디로 모을 까요!”

“2번 창고 3구역.”

“알겠습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정비병들을 보며 얀은 더더욱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용케 휘어잡았네.”

“덤비면 때려눕혔어. 그러니 말 잘 듣던데.”

“아.”

힘으로 자신을 압도하던 장면을 떠올린 얀은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부품은 글레이프니르한텐 못쓰잖아. 정비병이 의미가 있는 건가?”

“이곳으로 파견될 콜로서스용. 두 대 정도.”

“중대급 보급이라더니, 정말이었군.”

두 대의 콜로서스면 사실 중대급을 넘어선 지원. 새삼 이 부대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중대장님.”

“어.”

자신을 부르는 단델의 말에 답한 얀이 부대원들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이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죽으면 채워지고, 또 죽으면 보충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수만 명이 넘는 인간이 이 형벌부대에 투입되었고, 또 수만 명이 형벌부대의 낙인을 달고 죽어갔지.

“저희 부대 마크입니다.”

포탄 탄피를 잘라 만든 투박한 인장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사람의 팔뼈를 물고 있는 사냥개. 그 사냥개의 목줄에는 제국 공용어로 부대명 그레이하운드가 적혀있었다.

군복 어깨에 다시 새겨진 형벌부대의 낙인.

그 아래에 인장을 달자 느슨한 자세의 부대원들이 하나 둘 부동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부대 차렷!”

단델이 그렇게 외치자 형벌부대원들과 정비창에 있는 정비병들이 일제히 얀을 바라보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중대장님께, 경례!”

구호는 없었다.

다 합쳐서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소규모 중대.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얀을 보는 단델이 그에게 말했다.

“격려사라도 한 마디 해 주십시요.”

그 말을 들은 얀은 부대원들에게 대충 손짓했다. 쉬어, 편히. 뭐 대충 그런 의미였다.

치익-

중대원들을 앞에 두고 얀이 꺼낸 것은 말이 아닌 담배였다.

“이렇게명예로운자리에참석하게해주셔서감사합니다제국만세황제폐하만세만세만만세.”

“풉!”

전쟁통에 꼭 사열 한 번은 하겠다며 부대원들을 갈궈대던 전 사령관의 미사여구를 숨도 쉬지 않고 줄줄 내뱉는 얀의 모습에 부대원들 중 몇몇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벌부대에 보급되는 싸구려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는 얀.

푸우-

“죄다 좆지랄이지.”

한 번 연기를 내뿜으며 그렇게 말한 얀이 조용히 자신의 중대원들을 바라봤다.

“우리 윗분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운을 뗀 얀이 자신의 앞에 도열한 중대원들에게 말했다.

“어디에 붙든 어딜 가든, 위에 계시는 분들한테 있어서 우린 기본적으로 소모품이고 도구야.”

말이 좋아 선봉이지.

가치 있는 인간 대신 죽어갈 고기방패. 참호 속 파리목숨.

이 인원들은 언제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얀은 다시 한 번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금화. 음식. 술. 황자님한테 말해서 다 얻어냈다. 부족하면 옆 중대든 옆옆 중대든 뒤집어서 갖다 줄 테니까, 원하는 만큼 처먹고 싸우다 죽어. 알았냐?”

대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듣는 형벌부대원들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것을 보던 얀은 다 핀 담배를 대충 바닥에 던져 비벼 끈 뒤, 뒤돌아 나가면서 말했다.

“…될 수 있으면 살아서 오고. 아까우니까.”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중대원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정비병 포함 1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독립중대. 그렇지만 정비창에서 그들이 내뱉는 함성은 전선기지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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