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9화 (19/186)

19. 손님이 오신다. 부르지도 않은(3)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라엘.”

“황자님의 부름입니다. 어디에 있건 달려와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라엘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연극을 하는 과장스러운 몸짓에 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친구 이름은 라엘. 내가 개인적으로 두고 있는 정보원일세. 이 지역 엘프들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 하고 있지.”

클라우스 황자의 말을 들으며 얀은 눈앞의 하프엘프의 모습을 살폈다.

후드와 판초 속으로 보이는 옷은 무광 처리된 검은색 가죽옷. 길이 나지 않은 숲, 혹은 험한 지형을 넘나들기에 적합한 탐험 복장이었다.

“이 전선 북쪽의 케르단 대삼림에 흩어져있는 엘프 부족들 사이를 오가며 엘프군의 동향, 혹은 유적의 위치 등을 주로 보고받고 있지.”

“그 외에는 기사님들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드리며 먹고 살고 있습니다. 황자 전하의 은덕이죠.”

장신구, 미술품, 시계 등 수입이 중지된 엘프 왕국의 특산품을 밀수한다는 뜻.

군 조직의 묵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장사였다.

‘장사를 허락해줄 테니 정보를 팔아라. 나쁘지 않은 거래군.’

라엘의 입장에서도, 클라우스 황자 입장에서도 이득이 되는 공생관계. 콧대 높은 황족이 하는 것 치고는 꽤 합리적인 거래였다.

“이 친구 덕분에 전선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었네. 덕분에 이렇게 시간에 딱 맞춰 찾아올 수 있었지.”

그 말인즉, 이전부터 이 전선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뜻. 최하위이긴 하나 계승권을 부여받은 황자가 이런 변방에 주목할 정도라니, 무슨 정보를 들었길래?

“전선의 정보 외에도 새로 발견한 것이 있어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호오, 자네가 직접 찾아올 정도의 발견이라니.”

“예, 여기.”

그렇게 말한 라엘이 황자에게 서류뭉치를 내밀고, 그것을 받아든 클라우스 황태자의 눈이 빛났다.

첫 장에 쓰여 있는 것은 엘프어.

그리고 서류 안에는 고대 유적의 위치와 규모, 진입통로 등이 표시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저들은 이미 유적의 위치를 알고 있었군.”

“이 근방의 엘프 부락들은 인간들, 특히 형벌부대라는 자들에게 약탈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많은 부족들이 알프라이아군에 협조하고 있죠.”

얼마 전 사령관의 명령으로 이뤄진 엘프 마을 학살. 얀은 자신의 명령으로 구덩이에 밀어 넣어진 엘프들을 떠올렸다.

형벌부대의 얘기가 나오자 그를 변호하려는 듯 케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시 사령관의 독단이었네. 전술 회의 때 내가 있었다면 그런 명령은….”

“그래서 소위님의 퇴거 명령에 엘프들이 그렇게 과민반응 했었군요.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얀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명령으로 죽은 엘프들에 대해 말하는 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얀 하사, 자네….”

그 반응을 본 케인이 슬쩍 라엘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 또한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케인.”

“예 황자님.”

케인을 부른 클라우스 황자가 입을 열었다.

“엘프 마을에 발포명령의 최종승인을 내린 자가 누구인가?”

“구베르 준장입니다.”

“좋아. 그 자는 내가 폐하께친서를 보내도록 하지. 전투 직전 탈영에 전쟁범죄까지, 좌시할 수 없어.”

황태자의 말에 굳어있던 케인의 표정이 조금 펴진 것 같았다.

13황자의 친서. 이것이 황제에게 들어가는 순간, 그 불똥은 구베르 본인은 물론, 그가 속한 가문에까지도 미친다.

‘최소 불명예제대 혹은 작위 박탈, 최대 멸문.’

군법에 명시된 처벌목록을 떠올린 얀.

전투 중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결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이 시간부로, 엘프 마을에 진입시에 무분별한 발포를 금하며, 이를 어길시 13황자의 권한으로 즉결처분한다. 직위 고하에 관계없이.”

“알겠습니다.”

이제 그때와 같은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잠시 이야기가 샜군. 본론으로 돌아가지.”

그렇게 말한 뒤 의자에 앉은 클라우스 황태자가 서류에 담긴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쳐보였다.

“우리가 확보할 부분은 유적 입구다.”

삼림 중앙 구역 전체에 걸쳐있는 경계선이 유적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적이 우리보다 먼저 정보를 잡았지만, 이 지역을 선점하고 있는 것은 우리야. 알프라이아 군이 주춤한 사이에 이 입구를 요새화한다.”

“저희가 이 지역을 선점한다면 적의 기갑전력도 이곳을 향할 겁니다. 숲속에서의 전투가 벌어지면 보병과 포병은 피해가 클 겁니다.”

탁 트인 개활지에서 싸우는 참호전과 달리, 시야가 나무와 수풀로 막혀있는 대삼림은 오히려 인간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낮은 키와 어둠을 꿰뚫는 눈을 가진 고블린들의 주 전장이 바로 이런 숲이었기 때문이다.

“입구 주변의 나무를 제거하고, 방어진지를 건설하려면 적어도 2주일 이상은 걸립니다.”

“그전까지는 진지 공사병력을 콜로서스로 방어해야 하는군.”

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난 전투에서 퇴각한 기사단이 있었더라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것은 수리도 제대로 안 된 자신의 은기사와 얀의 글레이프니르 뿐.

늦든 빠르든 엘프들은 유적을 탈환하기 위해서 밀고 들어올 테지만, 단 두 기로 저 구역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좋아. 2주일이면 해볼만 하군.”

망설임 없이 내뱉는 클라우스 황자의 말에 케인이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케인을 마주본 클라우스 황자가 씨익 웃은 뒤 그에게 말했다.

“로렌츠 대공께선 의외로 아들을 과보호하신단 말이지.”

그 말뜻을 알아들은 케인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을 보겠군요.”

그렇게 서로 큭큭대며 웃던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보는 얀과 라엘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정보 고맙네, 라엘. 이 일에 대해서는 내 심심치 않게 사례하지.”

“항상 감사드립니다. 황자 전하.”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 황자는 이어서 얀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대의 전투에 대한 보고도 받았네. 놀라운 활약을 했더군.”

“케인 경의 도움이 컸습니다.”

“하하, 겸손하긴.”

그렇게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 황자가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안그래도 케인에게 자네 얘기를 들었네. 나중에 따로 부르도록 하지.”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 황자가 다시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 다음 입을 열었다.

“발굴단이 도착하는 것은 일주일 뒤일세. 그때까지 경계는 소홀히 하지 말고, 최대한 휴식을 취하도록. 곧 바빠질 걸세.”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부동자세로 경례를 올리는 얀.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 케인이 흡족한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치익-

황태자와의 면담을 마친 얀이 천막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을 때였다.

“저도 한 대 주시겠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미성.

천막을 걷으며 나온 라엘이라는 엘프였다.

“…엘프가 담배도 핍니까?”

“반은 인간이라서요.”

웃는 낮으로 그렇게 말하는 라엘을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얀이었지만 능글거리는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보급담배는 필 게 못 될 텐데요.”

“괜찮습니다.”

마치 담배를 맡겨놓은 듯이 내놓으라고 하는 라엘.

그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얀이었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족이 직접 부른 이라면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읍!? 콜록, 콜록!”

아니나 다를까, 라엘은 독한 보급담배의 연기를 견디지 못하고 기침을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공을 바라보던 얀은 폐부 깊숙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어우, 이거 너무 독한데요. 인간들은 이런 걸 피는 겁니까?”

“시체 타는 냄새보다는 나으니까요.”

푸우-

한 번 더 연기를 내뱉은 얀이 옆에 있는 라엘을 보았다.

이미 불이 붙어버린 담배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라엘이 보였다.

‘피지도 못하면서 뭐 하러 달라고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러게요. 괜히 달라고 했습니다. 엘프는 담배 같은 걸 안피니까요.”

뭐?

“그렇지만, 인간들은 학연, 지연, 혈연, 흡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자주 볼 텐데, 말이라도 터 보려고 했습니다.”

뭐지, 마음이라도 읽는 건가?

자신의 독백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것을 본 얀의 표정이 굳었다.

‘착각이겠지.’

머릿속을 스치고 간 불안을 떨쳐낸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과 엘프가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 적어도 전 당신과는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웃음 짓는 라엘을 보며 얀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적어도 당신은 저한테 말이라도 붙여주지 않습니까? 고~귀하신 엘프님들은 아니거든요. 알프라이아 왕국에 사는 엘프들은 저 같은 이들은 고블린보다 아래에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니까요.”

인간의 피를 가진 엘프라.

농담조로 말하는 것에 비해 썩 유쾌한 얘기는 아니었다.

“제가 당신과 대화하는 건 단순히 전하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양반들보단 그쪽이 훨씬 낫습니다. 적어도 엘프로는 봐주니.”

그렇게 말하는 라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얀.

짙은 웃음 뒤로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방금 느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위험하다.’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믿을 수 없다고.

“발굴단이 도착하고, 방어선이 안정될 때까지 약 한 달…. 그때까지는 싫어도 함께입니다. 얀 베르쿠트 하사.”

그렇게 말하며 라엘이 손을 내밀었다.

쯧, 하고 혀를 찬 얀이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엘프와 악수라니,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네.’

“인간과 악수라니,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네요. 그렇죠?”

얀의 손이 굳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기분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이 새끼…?’

천천히 라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기 띈 얼굴로 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얀.”

정적을 쌘 것은 맑게 울리는 청아한 목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얀과 라엘이 뒤를 돌아봤다.

흰 머리를 찰랑이는 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저 분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리는 라엘에게 렌의 시선이 닿았다.

“….”

그리고 잠시 후.

공손하게 꾸벅 고개를 숙인 라엘이 후드를 덮어쓰고 자리를 떠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얀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렌이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얀을 끌고 숙소로 향했다.

“눈, 다시 보여줘.”

“그건 나중에 하고, 방금 뭐야. 아는 엘프야?”

“네 눈이 제일 급해. 따라와.”

그렇게 말한 뒤 다짜고짜 얀의 손을 이끄는 렌. 그렇지만 이내 그 손을 뿌리친 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똑바로 말해. 뒤통수 맞을 걱정 하는 거 슬슬 지겨우니까.”

“질투?”

“미쳤냐?”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 얀의 말에 렌이 작게 한숨 쉬었다.

뭐야, 실망한 거야 방금?

“…난 몰라. 저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쪽은 뭐?”

“전에 말했잖아. 엘프들과도 살았었다고.”

그 때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뭔가 더 물어보려던 얀은 렌의 표정을 본 뒤, 포기한 듯 숙소로 앞장섰다.

어지간히도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여자다.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거리감은 어때.”

“뿌연거 말고는 다 똑같아. 그마저도 다른 한쪽이 보이니까 체감되지도 않고.”

“통증은?”

“없어.”

숙소 안.

마치 의사가 진찰하듯 얀의 눈을 이리저리 살피는 렌이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수술을 받은 뒤부터 묘하게 거리가 가까워지는 상황이 새삼 어색했다.

“전에 말했지. 넌 열쇠라고.”

“말했어. 저 아이에 대해서도.”

“뭘 위한 열쇠인데?”

말을 멈춘 뒤 얀을 바라보는 렌.

투명하게 빛나는 옥색 눈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뭘 들었어.”

“유적에 대해 들었지. 저 글레이프니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기밀이라는 말은 없었으니 상관없겠지.

“이제 정말로 들어야겠어.”

“….”

“넌 누군지, 그리고 난 왜 이 녀석을 조종할 수 있는지.”

당면한 과제가 정리된 뒤의 여유인지, 아니면 이조차도 그녀의 의도인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묻기로 했던 질문이 이제야 제대로 나왔다.

“미리 말하지만, 저 유적의 열쇠는 내가 아니야. 저 시설의 열쇠는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거 말고.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못 들었는데.”

‘뒤통수 맞을 걱정 하는 거, 슬슬 지겨우니까.’

이전처럼 얼버무릴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렌은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에도 넌 대답했지. 믿겠다고.”

“그래. 그랬었지.”

렌의 한마디에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에도 어영부영 넘어가려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 알려줄게.”

의외로 순순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얀에게 다가온 렌이 그를 마주보고 섰다.

스륵, 스르륵.

갑작스럽게 그의 앞에서 두르고 있던 발굴단 작업복을 풀어헤치는 렌.

“야, 너 지금 뭐 하는…!”

두꺼운 야상,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와 블라우스가 차례차례 흘러내려가며 옷 속에 가려진 새하얀 나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돌발행동에 당황한 얀이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렌의 몸을 본 그의 얼굴이 멈춰선 듯 굳었다.

“너, 몸이…?”

자신의 목덜미에 장착된 기계장치와 비슷한, 그렇지만 더욱 정밀한 연결부가 그녀의 양 허리에 세 개씩. 마치 비늘처럼 달려있었다.

이어서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01이라는 숫자.

사람의 몸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에 새겨질 법한 숫자와 기호들이 그녀의 왼쪽 어깨에 새겨져 있었다.

“인류연방 멸망대책본부 소속 01번 탐사형 생체단말.”

국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얀 앞에 내보인 렌이 무감정한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생체 단말로서의 역할은 대전쟁 이후의 환경 및 잔류 시설의 조사. 그리고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인류 개체를 확보하는 것.”

인류? 적응?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렌의 선언을 이해하기 위해 얀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요동쳤다. 그런 얀을 바라보는 새하얀 소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대상자, 얀 베르쿠트. 당신은 현재 이 세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인간 후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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