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7화 (17/186)

17. 손님이 오신다. 부르지도 않은(1)

난장판이 된 전선을 깨끗이 정리하는 데에는 일주일은 더 걸릴 듯 했다.

대부분의 콜로서스가 본영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이 전선에 도착한 장병들은 고블린과 오크의 시체를 참호에 밀어 넣어 태우는 것만으로도 한 나절을 모두 소비해야 했다.

그렇지만 고된 작업에도 병사들의 표정은 밝았다.

10년이 넘도록 유지되며 고착화 된 변방의 전선은 끝없이 병사들을 괴롭히며 수많은 시체들을 뱉어냈었다. 밀고 밀리며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진창 같은 전투의 연속이 드디어, 오늘 승리로 끝맺었다.

“오늘은 정말 고생 많았네. 전선에서 음주는 금지되어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묵인하도록 하지.”

“단장님. 지금 하고 계신 건 묵인이 아니라 동조 아니십니까?”

“어허, 그 입 다물게. 단장 명령일세.”

“하하하하!!!”

달콤한 승리.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쟁취한 승리의 결과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엘프들이 남긴 보급품으로 한바탕 잔치를 벌인 병사들은 최소한의 경비만을 남겨둔 채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들어있었다.

당장 습격이 온다면 5분도 안되어서 전멸할 것 같은 느슨한 군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들을 탓할 수 있는 간부들은 지금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이들뿐이기 때문이다.

“자. 한잔 받게.”

“감사합니다!”

“설마 기사단장님과 이렇게 같이 마실 수 있을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백 명이 넘게 투입된 보병장교 중 살아남은 이들은 열 명 남짓.

부상으로 인해 본진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이들을 제외한 뒤 이 모닥불에 앉아 술을 나누고 있는 것은 케인과 얀을 포함한 여섯 명이 전부였다.

“그나저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습니다. 기사단장님을 제외하면 일반장교는 한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니.”

“뭐, 그쪽 입장에서 이곳은 거쳐 가는 장소였으니까. 전투 한 번 참관하고 다음 근무지로 배치. 실전을 치른 장교는 손에 꼽지.”

“정작 실전을 치르는 이들은 우리들이니, 딱히 이상하진 않잖아?”

“사령관 봤냐? 지뢰가 있을 거라면서 지 따까리들 먼저 보내던 거? 킥킥킥.”

“진짜 있어서 둘 죽었잖아. 하여튼 대갈통은 잘 돌아가서.”

죽은 중대장. 아니, 배불뚝이 사령관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는 간부들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짙게 걸려있었다.

형벌부대에서 부사관 이상의 계급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좋은 무기를 보급 받는 것도 아니고, 딱히 생활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굶주리는 것조차 다른 형벌부대원들과 똑같이 그저 책임만 많아지는 자리.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이테였다.

오래 살아남은 자일수록 높은 계급을 가지게 되니, 하나같이 중사 이상의 계급장을 달고 있는 이들은 적어도 2년에서 3년 정도를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자들이야. 진급과 자기 목숨에만 집착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장교들과는 다른, 진짜배기들.’

그렇게 생각하며 케인은 그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기사단장과, 대령급 인사와, 심지어 최고위 귀족가 중 하나인 로렌츠 가문의 후계자와 나란히 술을 나눈다는 것은 명망 있는 가문의 기사들도 좀처럼 누리기 힘든 호사.

기사단장 본인이 이런 자리를 주선했다는 것은 이 자리가 단순한 술자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술과 음식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형벌부대 사관들.

그들 사이로 어쩔 줄 모르며 앉아있는 왜소한 체격의 장교가 눈에 띄었다.

“단델 소위. 왜 그러고 있나? 자네도 한잔 받게.”

“아, 아닙니다! 전, 다른 이들에 비해선 그다지 큰 활약도….”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굉장한 정공일세. 소위. 명령이니 받게.”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단델은 두 손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부사관들이 킥킥거리며 단델을 향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소위님이 이렇게 공손히 받으시면 저희들이 불경죄가 될 것 같습니다.”

“으잉? 뭐야, 나 겨우 살아남았는데 돌아가면 총살당하나?”

“돌아가서는 지랄! 즉결처분이지 새끼야!”

그렇게 내뱉은 뒤 박장대소하는 형벌부대원들.

총살이니 처분이니, 전투가 끝난 이 상황에서 태연하게 이런 농담을 꺼내는 이들의 분위기는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단델에게 나지막이 얀이 말했다.

“이 부대는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 그, 그래… 참고하지.”

짧게 평한 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얀을 보며 다른 부사관들이 키득거렸다.

“아~ 그래도 우리 얀 하사님. 기어코 살아남으셨네요.”

“살아남았다 뿐이야? 콜로서스에 오매불망 기다리는 연인에, 인생역전이 따로 없지!”

“부럽습니다. 하사님.”

그렇게 한마디씩 거드는 부사관들을 보며 의아한 듯이 얀이 되물었다.

“뭐, 연인?”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발굴단 눈꽃 요정이 매일같이 하사님 숙소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부대 전체에 쫙 퍼졌어요.”

“장교 놈들이랑 다른 기사님들이 말 한번 붙여 보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아십니까? 눈 하나 꿈쩍 않는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얀을 바라보는 대원들이었지만 얀의 생각은 달랐다.

‘앞날 창창한 엘리트들이 그 여자랑 엮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지 멋대로 조종자를 죽이고 살리는 콜로서스.

목덜미에 박힌 기계장치.

탈 때마다 반신불수가 되는 몸.

거기에 세 마디 이상 나누면 듣는 사람 복장이 뒤집히는 스무고개식 화법.

얼굴 하나 보고 달려들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들 마음대로 생각해라.”

“어, 진짜 저희 마음대로 생각해도 됩니까?”

“생각한 다음에 책으로 써서 내도됩니까?”

“글도 못 쓰는 새끼가 책은 무슨!”

이윽고 다시 터지는 박장대소.

오고가는 농담과 욕설 속에 담긴 정겨운 기운을 느낀 단델이 부럽다는 듯이 얀에게 말했다.

“그, 그래도 얀 하사는 다행이군. 아는 동료들이 많이 살아남아서….”

“아는 동료들이라니요?”

그렇게 되묻는 얀에게 단델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얘기 나누는 것만 봐도 하루 이틀 알고지낸 사이가 아니지 않나. 그래도 마음 맞는 이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소위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오늘 처음 봅니다.”

푸흡!

방금 전까지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간부들의 대답에 단델이 마시고 있던 술을 뿜었다.

고향 친구인 양 어울려놓고는, 오늘 처음 본다니?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단델.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얀 또한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여도 오래 살아남은 이들끼리는 서로 이렇게 대합니다. 피차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아. 그, 그런가…?”

이해가 갈 듯, 말 듯.

어색한 웃음을 짓는 달델을 보며 킥킥거리는 부사관들.

“그래도 이 전선에서 오래 굴러먹은 놈이면, 얀 하사님 이름은 안 들어볼 수가 없죠.”

“맞습니다. 무려 10년 아닙니까? 하루 살아남기도 하늘의 별따기인 이 바닥에서.”

“부대원들 중에 하사님 뵙고 싶다는 애들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다른 부사관들의 얘기를 듣던 단델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근데, 얀 하사는 자네들보다 계급이 낮지 않나? 왜 존칭을….”

“아, 원래는 소위님이었습니다. 장교들 뒤 닦아주는 와중에 강등당하셨죠.”

“강등? 뒤를 닦는다니?”

그렇게 되묻는 단델.

술김에 입을 열려는 사관의 말을 끊고 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벌부대는 계급순이 아니라 짬순입니다. 그냥 그렇게 알아두시면 됩니다.”

그렇게 짧게 답한 얀.

부사관들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럼 난 이만 일어나보지. 얀 하사. 동행해주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는 케인.

그를 따라 일어나려는 단델이었지만, 벌써 부쩍 친해진 듯, 다른 부사관들이 붙잡자 섣불리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소위는 여기 있게. 자네도 저들과 할 얘기가 많지 않은가.”

“아, 예. 감사합니다.”

함께 최전선을 헤쳐나간 이들에게 각별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단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관이 사라진 뒤 긴장이 풀린 부사관들이 단델을 골탕 먹이며 술자리가 무르익는 사이, 얀과 케인은 본래 엘프들의 사령부가 있던 공터로 올라갔다.

건너편에서는 제국의 본영이 미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예.”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그렇게 묻는 케인이었지만 얀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을 좀 해 봤다네. 자네가 기사가 되려는 이유에 대해서.”

“….”

말문을 연 케인은 조용히 빛나는 제국군 본영을 바라본 채였다.

“단순히 이 전선에서 떠나거나 제대하고 싶다면 기사는 오히려 피해야 할 직책이지. 자네는 군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케인은 멈추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부와 명성? 자네가 지닌 콜로서스를 타고 중립국인 잔스카르로 가면 되네. 아무도 자네를 막을 수 없을 거야.”

아군의 군영이 아닌, 적진을 보는 것 같은 눈.

흙먼지에 더러워진 망토를 휘날리는 케인을 바라보는 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넨, 이 제국에서 기사가 되겠다고 했어.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뭘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네의 한 마디 때문에 조각이 맞춰졌다네.”

‘란델은 어떻게 되었나.’

그렇게 물었을 때 그가 보인 표정.

그 무기질적인 웃음을 떠올린 케인은 쓰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란델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란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케인에게 얀은 내색하지 않은 채 시치미를 뗐다.

“병사들이 란델 경의 시신을 수습했다네. 엘프의 권총에 맞았더군. 이마 한 가운데에.”

“….”

여전히 말이 없는 얀.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케인은 조용히 그를 압박해왔다.

“콜로서스간의 전투에서 조종석 해치를 열고 안에 탄 기사를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조종석 째 짓이기거나, 아니면 붙잡아서 정보를 캐내려 하지.”

산 채로 붙잡히거나, 기체와 함께 산산조각 나던가.

전투에서 진 기사의 최후는 이 두 가지의 선택지만을 강요받는다. 이제 막 콜로서스에 타기 시작한 얀으로서는 알 턱이 없는 얘기였다.

“10년을 이 전선에서 지낸다면 노획한 무기 하나 정도, 없는 게 이상하지. 내 말이 틀린가?”

“전….”

뭔가 반박하고자 입을 연 얀이었지만, 이내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케인은 급조한 거짓말로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을 거야. 이런 행운이 두 번 찾아올 리 없다고.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 합법적으로 그들을 살해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지. 예를 들면….”

“….”

“제국 기사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결투.”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서 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케인은 씨익 웃었다.

정답이다.

“얀 베르쿠트. 그대는 벨커스 가문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의 질문에 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겁니다.”

벨커스.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기사를 배출하는 가문으로 로렌츠 공작가를 꼽는다면, 가장 많은 기사를 배출한 가문으로는 벨커스 백작가를 꼽는다.

제국 기사단의 핵심을 이루게 된 벨커스 가문의 규모는 제국의 두 공작인 로렌츠와 바델펠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 세대 만에 변방의 이름 없는 몰락 귀족에서 제국 최고의 명문가 위치까지 올라온 신흥 귀족의 상징.

그 가문을 지워버리겠다?

고작 일개 하사가?

“제국군에 몸담은 자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목표로군.”

“알고 있습니다.”

케인의 추궁에 답한 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방금 그 발언만으로도 자네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 있고, 내 권한에 의해 즉결처분될 수도 있네.”

“원하신다면 그리 하십시오.”

짧게 답한 얀이었지만 그의 속내는 그의 얼굴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카드는 골동품 콜로서스 하나인 것에 비해, 상대는 제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로렌츠 가의 후계자.

도박이었다.

더 떨어질 곳 없는 구렁텅이에서 10년.

이 이상 가는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던진 도박이었다.

이 자가 아니면 어차피 죽는다는 자포자기.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제대로 골랐군.”

나지막이 그렇게 말한 케인이 씨익 웃음 지었다.

“그 가문에 원한을 품은 인간은 자네뿐만이 아니란 말이지.”

케인은 그렇게 말한 뒤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제국의 인장이 새겨진 망토가 바람에 날려 고블린의 시체가 타고 있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케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총에 맞은 기사의 시체는 의심받기 쉬워. 시체를 기체에 태운 뒤 짓이기게.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지.”

기사의 시체를 으깨버리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케인의 모습은 확실히, 처음 이 곳에 왔던 그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 얀이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좋아. 이틀 뒤면 본부에서 사람이 올 걸세. 그때까지 처리하게.”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먼저 몸을 돌려 간부들의 술자리에 어울리는 케인을 바라본 얀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복수를 위해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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