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6화 (16/186)

16. 상관살해

- 얀 하사!

병사들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을 때, 케인의 은기사가 얀이 탄 글레이프니르에게 다가갔다.

글레이프니르와 은기사의 조종석 사이에 손을 놓아 일종의 다리를 만든 케인이 조종석을 열고 나와 얀을 맞이했다.

“얀 하사! 무사해서 다행이야! 적군 콜로서스는 어떻게 되었나! 아는 것이 있나?”

그렇게 물으며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을 향해 다가가는 케인.

이윽고 그에 답하듯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문이 열리고, 검은 제복 차림의 얀이 천천히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적 콜로서스 부대는 소탕했습니다. 열 대 중 일곱을 격파했고, 나머지는 주 방어선으로 퇴각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의 얼굴은 피로에 가득 절어있었다.

선봉대로 출동한 콜로서스는 네 대.

그 인원으로 열 대의 엘프군 콜로서스와 싸워 일곱 대 격파!

거의 자신과도 견줄 수 있는 커다란 전훈이다!

“큰일을 했군. 정말, 큰일을 해냈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케인을 보면서도 얀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단지 10년 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허탈한 듯 뒤를 돌아 본영이 있는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야야! 거 잘 좀 뜯어봐라! 도망간 엘프들 다시 오겠네!”

“좀 기다려 보라니까 그러네! 형벌부대 성깔 하고는…!”

“뭐 임마? 너 우리 부대로 재입대 할래? 이 새끼야?”

“미친 소리!”

같이 격전을 거친 일반병과 형벌부대원들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쑥대밭이 된 엘프군 진지. 그렇지만 이윽고 보급창고와 무기고에서 엄청난 양의 노획물자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부대원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허, 이렇게 많은 물자들을 처분도 안했단 말이야?”

“자기들이 질 거란 생각을 안 한 거지.”

“뭐, 우리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곳에서 나온 무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병사들.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자신들에게 보급되는 물건과는 차원이 다른 상등품들이었다.

“이 새끼들! 손 치워! 손 치우란 말이야!”

한창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코트를 걸친 형벌부대 중대장. 아니, 이젠 전선 사령관이 된 이었다.

“지휘관 권한으로 이 물자들은 전부 내가 관리한다! 손대면 너희 전부 총살이야! 알겠어!?”

“….”

“저 개새끼….”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자 눈썹이 역팔자로 휜 사령관이 노발대발했다.

“이 새끼들이 단체로 약을 먹었나, 운 좋게 살았다고 네놈들 신세가 바뀌는 줄 알아!? 눈깔아 이 새끼들아!!”

방금 전까지 부하들을 시켜 동료들의 목을 매달던 사령관.

탐욕으로 눈을 번뜩이며 병사들을 쫓아내는 그의 모습에 그를 지켜보는 병사들이 한 명 한 명, 표정을 잃어갔다.

“히히히히! 이 물자들 잘만 빼돌리면 난 제대한 뒤 평생은 놀고먹어도…!”

“사령관님.”

“뭐야! 이 새끼들이 아직도 주제를 모르고…!”

뒤를 돌아본 사령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읽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을 부른 병사들의 시선은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질적인 시선.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건 뭔가….

“야, 야.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탕-!

병사들의 대답을 총성이 대신했다.

“응?”

“…하. 드디어 갔군.”

갑작스러운 총성에 의아함을 느낀 케인. 의미를 모를 얀의 푸념을 뒤로 한 채 총성이 울린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가?”

한 곳에 모여 있는 병사들.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한 병사들이 조용히 케인에게 보고했다.

“노획한 물자들 중 장전된 총이 있었습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제 실수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중사 계급장을 단 형벌부대 대원이었다.

그를 바라보다 한 구석으로 시선을 돌린 케인.

살집이 두툼한 두 다리가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 별 일이 없다니 다행이군.”

그렇게 말한 케인이 몸을 돌려 콜로서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 맞다. 말하는 걸 잊었군,”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연 케인.

병사들 사이에 한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쓰레기는 앞쪽 참호로 옮겨두게. 고블린 시체와 같이 태우면 흔적도 안 남을 테니.”

그렇게 말한 뒤 터벅터벅 걸어가는 케인.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말이야.”

콜로서스 앞에서 담배를 태우던 얀이 묻자 그렇게 대답한 케인.

기뻐해야 할 순간임에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냥, 나도 많이 바뀌었다 싶어서 말이야. 설마, 천하의 은기사가 상관살해를 묵인하는 날이 올 줄은….”

사령관의 최후를 본 케인이 한탄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을 탓하거나 벌할 생각은 없네. 먼저 저들을 버린 것은 제국이야.”

“그 이전에 죽어 마땅한 놈이긴 했습니다.”

착잡한 표정을 한 케인의 눈이 닿은 곳.

라이플을 손에 쥐 채 죽어있는 어린 형벌부대원의 시체였다.

한 손에는 기도문이 적힌 성서를 꼭 쥔 채였다.

처음 형벌부대에 떠밀려와, 아군 살해를 강요당한 순진한 청년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했다.

“이 전선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네. 이 전쟁은 진작에 끝나야 했어. 이 이상 젊은 병사들의 피를 낭비할 수는 없어.”

“쉽게 끝날 전쟁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렵지.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끝내야만 하는 전쟁이야. 설령 목숨을 건다 해도.”

그렇게 말한 케인이 고개를 돌려 얀을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얀 베르쿠트. 자네에게 물어볼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한 치의 지체없이 대답하는 얀의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본 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전에 말했지? 자신은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철회하겠습니다. 불경한 발언이었습니다.”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닐세. 아까 말했다시피, 질문을 하려고 말을 꺼낸 거야.”

그렇게 말한 뒤 한번 숨을 고른 케인이 그에게 다시 말했다.

“자네가 날 위해 싸우도록 하려면, 내가 자네에게 뭘 줘야 할 것 같나?”

“….”

순간 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로서는 흔치않은 당황한 모습.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국이 아니라 단장님을 위해서, 말입니까?”

“정확하네. 제국을 위해서가 아닌, 날 위해서 싸워줄 자가 필요해.”

듣는 이는 없었다.

케인의 지시로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노획물자.

술, 음식, 고기…. 그것들로 인해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 지금, 이 둘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면,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절 기사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얀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깊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케인.

이내 희미한 웃음을 지은 케인이 얀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주지. 케인 로렌츠의 이름을 걸고.”

짧은 선언. 그렇지만 그 말에 담긴 무게는 걸고 작지 않았다.

그 의미를 알아챈 듯, 케인의 손을 맞잡은 얀 역시 그에 화답하듯이 힘주어 말했다.

“받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잠시 마주보는 두 사람.

제국 최고의 기사와 제국 최악의 병사가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우선 해산하고, 나중에 따로 보지. 구체적인 얘기를 나눌 장소가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한 뒤 손을 놓은 두 사람.

“얀 하사!”

이윽고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걸어가는 얀을 불러세운 케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은 어찌되었나? 란델 경은?”

“아, 란델 경은….”

그렇게 말을 흐리는 얀.

그리고 다음에 얀이 지은 표정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케인이 피식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기사님을 해칠 리 없지 않습니까.’

언젠가 그렇게 말했을 때와 같은 표정.

마치 틀로 찍어낸 듯한 양산품 같은 표정을 얼굴에 두른 얀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케인에게 말했다.

“란델 벨커스 기사님께서는, 유감스럽게도 전투 중 전사하셨습니다.”

***

“윽, 으윽! 제길…. 거기! 거기 누구 없나!”

처참하게 구겨진 콜로서스의 조종석.

어둠에 휩싸인 지 두 시간이 경과했을 때, 그 곳에 남아있던 란델은 다른 콜로서스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을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그 엘프놈들. 내가 살아나가기만 하면…!”

그렇게 외치면서 해치 곳곳을 살피는 란델.

틀렸다. 이대로라면 꼼짝 없이 이 콜로서스 안에서 굶어죽을 판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 형벌부대 놈을 건드는 게 아니었는데…!”

질투와 분노에 미쳐있던 머리가 식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어차피 저 놈은 형벌부대에 자시는 기사. 주눅 들거나 질투할 껀덕지 따위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쿵.

쿵.

발소리.

기사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콜로서스의 발소리였다.

“히익! 에, 엘프군?”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란델. 점점 가까워지는 콜로서스의 발소리에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쿵!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춰선 발소리.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한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젠장…. 젠장!”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허리춤을 뒤지는 란델.

없다. 항상 꽂혀있어야 할 권총이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그렇게 절망에 빠져있는 순간에 그의 콜로서스가 크게 진동했다.

쿠궁!

확실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콜로서스를 붙잡은 것이다.

이윽고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소리.

끼긱! 끼기기긱!

철이 우그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란델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극한의 공포심에 이미 조종석은 그가 흘린 오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아, 아악! 오지 마! 잡아먹지 마! 아아아악!”

그렇게 외치면서 미친 듯 발버둥 치는 순간, 산란하는 빛 무리가 그의 얼굴로 쏟아졌다.

“기사님? 살아계십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란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탈출구를 뚫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얀.

형별부대의 얀 베르쿠트 하사였다.

“네, 네놈…! 아니, 자네가 어떻게…!”

“운이 좋아 살아남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살아계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얀의 얼굴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이를 보는 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원한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표정에 순간 란델은 그가 얀에게 무엇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봤을 때, 란델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하네! 내가 욕심에 눈이 멀어서, 자네를 함정에 빠트리고 말았어. 게다가 콜로서스를 네 대나 데려가서…. 이런…!”

그렇게 말하는 란델은 정말로 괴로운 표정이었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행동을 되뇌며, 후회감에 몸을 떨고 있던 탓이었다.

“괜찮습니다. 결과적으로 전 살았고, 얻은 것도 있으니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기로 하죠.”

무심한 듯 내뱉는 얀의 한 마디.

그렇지만 란델은 그 한마디에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죄가 씻겨나가는 듯한 상쾌한 느낌이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이런 자를 함정에 빠트리려 하다니!’

그렇게 생각한 란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내 이 일은 반드시 사례함세! 기사단장님이 자네를 총애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내가, 아니지! 벨커스 가문이 자네를 지원할 걸세! 자네 출셋길은 내가 보장하지!”

그렇게 말하는 란델의 눈에는 환희의 감정이 가득했다.

은은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는 얀. 이윽고 그의 손이 란델에게로 내밀어졌다.

“내 약조하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자네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그렇게 말하며 얀이 내미는 손을 잡으려던 란델의 몸이 멈췄다.

“야, 얀 하사…?”

내밀고 있는 얀의 손에는 한 정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사이즈의 권총.

인간의 물건이 아닌, 엘프군 장교에게 보급되는 물건이었다.

“지원은 됐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바쁜 와중에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으면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란델 벨커스.”

존댓말에서 순식간에 반말로.

그 기괴한 변화에 공포를 느낀 란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추궁으로, 추궁은 심문으로 바뀌었다.

“야니카. 20년 전 벨커스 가문에 입적한 천민 하녀의 이름이다. 기억나는 게 있나?”

“야, 야니카…?”

눈앞에 놓인 권총을 보면 없던 기억이라도 끄집어내야 했다.

서슬 퍼런 얀의 눈빛에 미친 듯이 머릿속을 뒤지던 란델.

이윽고 뭔가 기억난 듯, 다급하게 그의 입이 열렸다.

“기, 기억났네! 가주님의 눈에 띄어 하녀로 들어온 자폐아가 아닌가! 그, 그렇지만 10년 전 쯤에 가주님께서….”

거기까지 말한 란델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자신이 방금 무엇을 말을 한 것인지 뒤늦게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아, 아아…!”

“계속 말해봐. 네놈들의 가주가 야니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얼굴이 시퍼레진 채 턱을 덜덜 떨고 있는 란델.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사건을 뒤늦게 알아챈 그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며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네, 네놈이…?”

“넌 네 악행 때문에 죽는 게 아니야. 네가 들어가기로 선택한 그 가문 때문에 죽는 거지.”

그렇게 내뱉은 얀은 방아쇠에 끼운 검지를 서서히 당겼다. 권총의 총구는 정확히 란델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아, 안돼! 나, 난 여기서…!”

탕-!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조종석에 힘없이 축 늘어진 란델의 시체를 잠시 바라본 얀이 조용히 뒤를 돌았다.

“이제 한 명.”

조용히 그렇게 되뇐 얀은 글레이프니르에 몸을 싣고 엘프군 전선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