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네 주인이 누구냐(2)
아직 전선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다 치우지도 못한 시간, 전선에서는 방어 준비가 한창이었다.
“창고에 남아있는 박격포들도 남김없이 꺼내라. 포병의 지원이 없으니 전선에서 벌충할 수밖에 없어!”
“3대대는 어디로 갔나! 뭐!? 탈영!? 대대장이라는 자가 정신이 나간 것인가!”
“식량창고에 남아있는 것들도 다 배급해! 형벌부대한테도 같이!”
전선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단과 포병대는 이미 후퇴를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로 멀어져가는 자신들의 본대를 본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지들은 쏙 빠지고, 우리끼리 남아서 시간이나 벌라는 거잖아…!”
“야. 저기 봐.”
욕지거리를 내뱉는 병사를 부른 다른 이가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가리켰다.
“하, 이 전선은 끝났어.”
전장에 남아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 그 가지에 사람들의 목이 매달려있었다. 기사단과 포병대의 후퇴를 전해 듣고 탈출을 감행한 탈영병들이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이 전선과 비슷하겠군.”
돌격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나무에 걸린 수백명의 탈영병들. 마치 저 나무들에 열매 대신 시체가 열린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을 제치며 배불뚝이 장교가 참호 속으로 걸어왔다.
형별부대의 인원들을 책임지는 중대장이었다.
“위치로 가! 멍청이들아! 너희들도 오늘 부로 내 지휘를 받는다! 네놈들과 형별부대는 오늘부로 같은 부대 소속이란 말이야!”
그의 외침을 들은 일반병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자신들을 지휘하는 자가 저 자라고? 다른 간부들은? 설마 전부 다 후퇴했단 말이야?
“우, 웃기지 마! 우린 자원입대한 정규군들이야! 네놈들 같은 형벌부대의 지휘를 받을 수는…!”
척!
항변하는 일반병의 말을 가로챈 중대장이 그의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전선 지휘관의 인장.
사령관이 가지고 있어야 할 황제의 인장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걸 네가 어떻게…!”
“내가 이 인장을 훔치기라도 했을 것 같나? 웃기는 소리. 이건 참모본부에서 정식으로 나에게 승계 된 거다! 내가 이 부대의 전선 사령관이란 말이다!”
그렇게 외치는 중대장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을 것이 뻔한 전투에서 이뤄진 초고속 승진.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보고해 줄 후방 부대마저 전부 철수한 상황이었다.
상부는 저 인장을 통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전선에서 싸우다 죽으라고.
그가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형벌부대에게 강요해 온 명령이었다.
“이 전선이 유지되는 동안! 내 말이 곧 황제 폐하의 말이다! 알아들었나!?”
그의 손에 들린 인장과 지휘봉을 본 병사들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확실하게, 상부는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을 저 중대장이 몸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내 부대의 규칙을 알려주마! 호각소리와 함께 튀어나가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라! 도망가는 놈이 있다면 이 녀석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중대장의 뒤에는 이십 여 명의 형벌부대원들이 서 있었다.
처음 이 곳에 배치되어 기도문을 외우던 신병.
그는 이제 검게 죽은 눈으로 말없이 아군들을 사살할 라이플에 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어이구, 꼴에 가오는…. 자기도 결국 도망 못 갔으면서.”
“이 참에 저 새끼도 끌고 가볼까?”
“아가리 닥쳐 이 새끼들아!”
“하하하하!”
저 중대장의 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온 형별부대원들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극한 상황에서 오가는 저주와 비웃음들이 차라리 정겹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
보초병의 호각소리가 온 전선을 울렸다.
패배가 확실한 전투.
희망 없는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는 병사들의 눈에 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봉에 고블린 군단! 후방에 오크 병단을 확인! 콜로서스는 확인되지 않는다!”
“콜로서스가 없다면 승리할 수 있다! 다들 전투준비! 어서!”
몇몇 장교들이 병사들을 북돋기 위해 그렇게 외쳤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미 저번 전투에서 저 오크 군단의 위력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 개새끼들아! 전투준비 명령 못 들었어!? 무기를 들란 말이야!”
그렇게 외치는 중대장이 사정없이 일반병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반항하는 이들에게는 마치 친위대처럼 붙은 형벌부대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뤄지고 있었다.
“전투준비! 준비하라고! 이 개 같은…!”
쿵!
지축을 울리는 콜로서스의 발소리.
그 굉음에 참호 속을 종횡무진하던 중대장의 목소리가 멎었다.
- 그만. 그 이상의 전횡은 용납할 수 없네.
“으헉!? 기, 기사단장 케인!?”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케인의 콜로서스 은기사.
자신의 콜로서스에 몸을 실은 케인은 참호에서 마지막 돌격을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기사님은 후퇴하지 않으신 건가?”
“흥.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대포 몇 방 쏘다가 내빼겠지.”
“그럴 거면 진작에 내뺐겠지, 뭐 하러?”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본 케인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제군들. 모두 들어주게.
케인의 콜로서스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사단장이 직접 확성기로 자신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깨닫자 병사들이 일제히 케인의 콜로서스를 바라보았다.
등에는 거대한 대검을, 양 손에는 기관포를 장비한 거대한 콜로서스.
은색으로 빛나는 장갑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선봉으로 나선 란델 경과 그 휘하의 기사들이 적의 콜로서스를 막아내고 있네.
허풍이었다.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자기 멋대로 부대를 끌고 나간 란델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얀과 글레이프니르가 살아는 있는지, 케인으로서는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절망이 가득한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이들의 사기를 북돋을 수만 있다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
- 상부는 이 전선을 포기했어. 그대들의 목숨을 대가로, 중앙 전선을 압박할 속셈이지.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이 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병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역시, 우리는 그냥 소모품이었군.”
그렇게 뇌까리는 병사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 그렇지만 앞에 나간 그들처럼, 자네들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도 있네. 앞서간 기사단의 란델 경, 형벌부대의 얀 하사,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나!
그렇게 외친 케인의 은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거대한 콜로서스의 한 팔에 들린 것은 거대한 깃발.
본부 건물에 꽂혀 있던 것을 뽑아온 것이다.
- 평소 같았으면, 난 이 깃발을 땅에 꽂고, 제국을 위해 싸우라며 그대들을 독려했을 것이네.
그렇게 말한 케인이 한 손에 들린 제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아침 해를 등지고 선 제국의 문양.
왕관을 쓴 사자.
그것을 보는 병사들의 눈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케인의 행동에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콰직! 빠지직!
두 손으로 깃대를 부러뜨린 케인의 콜로서스 은기사가, 제국군의 군기를 바닥에 내팽개친 것이었다.
“저, 저거…!”
“어쩌자고 저런 짓을…!”
간부 몇몇이 그렇게 외치며 놀라워하는 것이 보였다.
군인 된 자가 조국의 군기를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불경한 일인지, 이곳에 있는 누구나가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 이 곳에서 전부 포기한 채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국이 그대들에게 원하는 것이다! 싸워라! 그대들을 버린 제국을 위해서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전 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그가 만난 형벌부대원이 한 말을 되뇌는 케인. 그의 외침에 병사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뿌우우우-!
케인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오크 진영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하는 명령은 돌격.
이윽고 오크와 고블린들의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키이이이익!”
“우워어어어!”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오는 엘프군 무리.
그렇지만 그에 맞서듯, 케인의 은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하늘높이 팔을 들었다.
- 여기 있는 나! 은기사 케인 로렌츠가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무기를 들어라!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엘프군의 함성을 뒤덮는 고함소리.
그것은 함성 같기도, 어떻게 들으면 비명 같기도 했다.
이윽고 대기 중이었던 제 1진에 마법사들의 마력포 세례가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이 외진 변방에서의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젠장, 뭔 놈의 무게가…!
- 한 기가 더 와야 할 것 같소. 부르타엘! 들어 옮기는 건 도저히…!
기동을 멈춘 글레이프를 옮기는 엘프 기사들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대의 콜로서스가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도 꿈쩍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까지 무거운 기체였나? 인간의 콜로서스 두 대로도 능히 옮겼다고 했는데….
그렇게 의문을 표하는 델란엘이 글레이프니르에 다가가 기체의 어깨를 잡았다.
끼기기긱-!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뿐, 땅에 무릎을 대고 앉아있는 글레이프니르는 그 상태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애를 먹이다니…!
쾅!
분을 이기지 못한 델란엘의 콜로서스가 글레이프니르를 발로 찼지만, 그럼에도 기체는 요지부동이었다.
- 낭패로군. 이미 2차 공격이 시작된 상황에 이렇게까지 합류가 지체될 줄이야….
그렇게 말하는 부르타엘이 멀리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금세 뚫릴 줄 알았던 인간의 전선이 계속해서 엘프군의 공세를 버티는 것이 보였다.
콜로서스가 없는 전투에서는 마력포의 효율이 떨어지는 탓이기도 했지만, 저렇게까지 오래 버티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한 부르타엘의 시선이 멀리 있는 은기사에게 닿았다.
‘자신의 기체를 요란하게 꾸며 마력포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있군. 한 발이라도 맞으면 끝일 터인데.’
보병전력을 호위하기 위해 콜로서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라니, 상하관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 아닌가?
- 적군의 사기가 보통이 아니군. 화력은 이전보다 감소한 것 같은데….
- 흥, 그것도 잠시 뿐이지. 소모전이 되는 순간 무너질 거야.
그렇게 일축한 델란엘.
그의 콜로서스가 움직이지 않는 글레이프니르를 툭툭 건드렸다.
- 안에 탄 기사놈은 아직 숨이 붙어있겠지? 그렇다면 잘 봐라. 네놈이 목숨 걸고 지켜오던 전선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그렇게 말하며 얀을 비웃는 델란엘.
이대로 본영으로 그를 끌고 간 뒤 어떤 고문을 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절대로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네놈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그렇게 델란엘이 이를 갈며 글레이프니를 향해 발을 내미는 그 순간이었다.
쿵!
글레이프니르를 묶을 쇠사슬이 크게 요동치자, 델란엘의 눈이 크게 띄었다.
우우우웅-!
처음 듣는 날카로운 기동음과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 깨, 깨어났다! 저 괴물이!
- 당황하지 말고 거리를 벌려라! 마지막 힘을 짜내서 일어난 것일 터! 오래 버티진 못한다!
그렇게 말한 부르타엘의 콜로서스가 곧바로 무기를 쥐었다.
쇠사슬과 함께 가져온 것은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크기의 검.
힘으로는 녀석을 잡아낼 수 없으니, 기동성으로 승부를 걸기 위해 선택한 무기였다.
그렇게 콜로서스들이 거리를 벌린 사이, 쇠사슬에 얽힌 글레이프니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으직! 으지직!
- 사, 사슬이 끊어진다!
- 말도 안 돼! 전함의 닻으로 사용되는 사슬이란 말이다! 아무리 콜로서스라고 해도 저걸 끊는 것은…!
쾅!
굉음. 철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글레이프니르를 붙잡아두던 사슬이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쿠구구구구….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글레이프니르.
붉게 빛나는 눈이 천천히 올라가 그들의 면면을 살피는 듯 했다.
- 으, 으윽!
그 모습에 예전의 공포가 떠오른 듯 몸을 움츠린 델란엘.
그렇지만 그 또한 자신이 기사임을 증명하듯, 도망치는 대신 무기를 쥔 손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즉시 달려들어, 파일럿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심산이었다.
우우웅-!
잠시 동안의 정적.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커지는 글레이프니르의 구동음만이 그들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참을 수 없다는 듯 글레이프니르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아우우우우우-!
울음소리.
철과 마력로, 인공근육으로 이루어진 콜로서스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겹겹이 두른 장갑을 세우고,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진회색 콜로서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 기괴한 모습에 엘프 기사들이 하나 둘 공포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 괴…. 괴물!
기사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투콰앙!
땅을 차는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엘프군에 존재하는 그 어떤 콜로서스라고 이 만큼 커다란 발소리를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크윽!?
그리고 그 발소리에 놀란 엘프 기사가 무기를 치켜든 그 순간.
그의 눈앞에 글레이프니르의 머리가 나타났다.
“어…?”
그 한 마디, 한 글자가 그대로 기사의 유언이 되었다.
콰드득!
글레이프니르가 뻗은 손이 그대로 콜로서스의 복부 정중앙을 꿰뚫었다.
랜스 같은 것으로 속도를 올린 것도, 파일벙커 같은 보조 장비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닌, 순수한 기체의 완력으로 저 장갑을 꿰뚫은 것이다.
- 자, 잠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언제 저 곳까지 당도했는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정확히 조종석을 노릴 수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크르르…!
붉게 빛나는 눈으로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는 글레이프니르.
쿵-!
짐승 같은 그것의 발 앞에는 조종석을 시작으로 반으로 갈라진 콜로서스의 유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의 손에는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채 조종사의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조종석이 쥐여져 있었다.
[시스템 시험 가동 완료. 동작 데이터를 파일럿에게 수신.]
붉게 빛나는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안.
닐의 건조한 안내음만이 거기에 탄 얀이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 괜찮네. 해 보자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얀.
흰자위가 붉게 물든 그의 오른쪽 눈에서는 찐득한 피가 눈물처럼 뚝뚝 흐르고 있었다.
[수신 확인. 글레이프니르, 전투 출력으로 전환. 전투 개시.]
퉁-!
그 한 마디를 신호로, 글레이프니르가 콜로서스들을 향해 돌진했다. 방금 전 전투와 같은 기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기동 속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