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부의 적(2)
다음 날 아침.
피로감과 권태로 가득 차 있던 전선에 구경거리가 생겼다. 황도에서 파견된 기사와 전선에서 10년을 살아남은 형벌부대원의 결투.
지금은 의장용으로나 쓰이는 검으로 치르게 되는 결투는 일반병, 장교, 심지어 형벌부대원들에게도 구경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사령관님.”
“아아, 케인 경! 오랜만에 즐거운 구경거리 아닙니까! 하하하!”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사령관.
고위 간부를 위해 마련된 천막에 앉은 그가 잔을 들자, 그의 정부들이 웃으며 술을 따랐다.
‘전장 한복판에서 술을?’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지만 상대는 이 전선 전체를 지휘하는 자.
기사단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중요한 인재인 발굴단원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형벌부대를 전체적으로 재감독해야겠군.”
“아직 의혹에 불과합니다. 오해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니요, 저놈은 이전에 자기 상관을 죽인 적도 있습니다.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게 말한 사령관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검은 제복 차림으로 란델에게 받은 결투용 검을 살피는 자.
얀이었다.
“저 질긴 바퀴벌레 놈이 죽는 것을 드디어 보는군.”
이를 뿌득 갈아붙이는 사령관.
뜻밖의 사실이 흥미로웠는지, 케인이 다가와 다시 물었다.
“상관을 살해했단 말입니까?”
“그렇소. 덕분에 내가 저 녀석을 소위에서 이등병으로 강등시켰지.”
“그렇다면 지금 그의 계급은….”
“특진이지. 일 년 만에 말이야. 아주 지독한 놈일세.”
소름이 돋았다.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그리고 말석이긴 하나 부사관에서 장교까지 영전하다니. 형벌부대임을 감안한다면 입이 떡 벌어지는 초고속 진급이었다.
“전공이 대단한 친구였군요.”
“황제 폐하의 법이 지엄하시니 내 진급은 허가했다만…. 쯧쯧”
케인과 사령관이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얀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결투용으로 마련된 날이 뭉툭한 블런트.
손가락으로 칼끝을 잡고 눌러보니 용수철처럼 구부러지는 유연한 칼이었다.
“얀 하사!”
그런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글레이프니르를 탄 날, 그리고 엘프 부락 소탕에 함께했던 소위. 단델 클라우스가 서있었다.
“소위님.”
이전 전투에 참여했을 텐데, 용케 살아남았군.
그렇게 생각한 얀은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납득할 수 있었다.
“포병장교셨군요.”
포병장교를 발굴단 호위에 차출한다니, 지휘부의 무능함에 신물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그, 그때는 고마웠네. 그때 날 데려다 준 형벌부대원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네.”
그렇게 말하는 소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첫 임무에서 기절하고, 그 와중에 형벌부대원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다니. 제국군 장교로서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말한 자가 누구입니까? 입단속은 철저히 시켰습니다만….”
“아니! 내, 내가 물어봤네!”
황급히 얀의 질문에 대답하는 단델. 잘못하면 애꿎은 형벌부대원을 또 죽일 것 같았다.
“선임분들 사이에서도 자네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 그렇지만, 난 다르네. 숙녀분을 희롱했다니! 터무니없는 누명이야!”
“희롱하지는 않았죠. 그자들이 모아놨던 엘프도 전부 다 쏴 죽였으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다시 한 번 그 때의 일을 떠올린 소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는 사이, 얀은 맞은편에서 결투를 준비하는 란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검을.
“저쪽은 검이 다르군요.”
“뭐?”
나지막이 말하는 얀의 목소리를 듣자 단델 또한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투를 위해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는 그의 손에는 기병들이 마상에서 사용하는 세이버가 들려져 있었다.
“저건 진검이 아닌가? 기사님께선 왜 진검을….”
“아무래도 전 여기서 죽을 운명인가 봅니다.”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모습을 보자 구경하던 단델이 오히려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가서 이의를 제기하게! 저건 명백한 착오가 아닌가! 하다못해 저쪽도 그대와 같은…!”
그렇게 항변하려던 단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이 받은 블런트를 땅에 꽃아 넣은 얀이 그것을 힘껏 구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네 지금 뭐 하는…?”
“날이 튑니다. 조심하십시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쨍-!
쇳소리와 함께 블런트의 검 중간 부분이 부려졌다.
길이가 절반으로 줄어든 블런트. 그렇지만 얀은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듯 그것을 검집에 넣었다.
“자네 방금 무슨 짓을 한 건가?”
사용하는 검의 종류가 다른 결투에 있어서 검의 길이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기의 길이가 길수록 상대방은 행동의 폭이 좁아지는 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방금 얀은 스스로 검날을 부러트렸다.
도대체 왜?
“이걸로 동등해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인지 물으려 한 단델이었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투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는다면 네 형을 감해줄 의향이 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이런 건방진…!”
사태가 이지경까지 왔는데도 태연한 얀의 얼굴에 란델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챙-!
그의 검집에서 기병용 세이버가 뽑혀 나왔다. 꽃무늬가 장식으로 새겨진 고풍스러운 물건이었다.
“뽑아라.”
자세를 잡는 란델,
그를 잠시 바라본 얀 또한 검을 뽑았다.
“검이 다르다고 투정부릴 생각은 마라. 네놈은…. 음?”
준비된 말을 읊던 란델은 이내 얀이 들고 있는 검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준 검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중간이 부러져 있는 검.
한번 머리를 긁적인 얀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검을 잡아본 것이 처음이라, 휘두르는 와중에 부러졌습니다.”
이를 악물었다. 연습용이라는 하나 초심자가 몇 번 휘두른 것으로 부러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란델이었지만 그냥 눌러 담기로 했다. 어차피 결투가 끝났을 때, 저 건방진 녀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삐이이이-!
“흐아압!”
호각소리와 함께 얀을 향해 달려가는 란델.
콜로서스를 움직일 때 쓰는 마력을 그대로 신체에 투여하면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온다.
단숨에 얀의 코앞까지 접근한 단델이 곧바로 얀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공격.
마력이 없는 이들은 움직임의 편린조차 볼 수 없을 터!
그렇지만 이후 들리는 것은 얀의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뭣!?”
검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옆으로 피한 얀.
검격이 빗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란델이었기에 몸통 쪽 가드가 완전히 풀려있었다.
빠악!
“크헉!?”
훤히 드러난 명치에 얀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한순간 몸이 붕 뜰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
마력으로 몸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충격이 전해졌다.
“이 자식이…!”
그렇지만 그 또한 정규훈련을 받은 기사.
방심의 눈을 걷어내고 얀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뭐지? 얼핏 보기에는 빈틈투성이일 텐데….’
서 있는 자리에서 한 치 미동도 없는 얀.
서 있는 자세, 시선…. 검을 배웠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폼이었다.
그렇지만 얀이 뿜어내는 음울한 분위기와 눈.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부러진 검이 자꾸만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란델 경은 토끼를 잡는데도 신중하시구려.”
그렇게 말하며 흥미롭다는 듯 술잔을 들이키는 사령관.
그렇지만 그의 옆에 있는 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얀의 손에 들린 부러진 칼을 보고 있었다.
부러진 검 끝은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웠다.
연습용 검이라기보단 단검을 연상케 하는 모양.
‘연습용 블런트를 부러뜨려서 날을 세웠어, 길이를 줄여가면서까지. 설마…. 얀 하사는 란델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계속된 대치를 참지 못한 란델이 다시 한 번 돌격했다.
상황의 유불리를 따지기 전에, 마력을 지닌 자신이 그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 자체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
챙!
이번에는 검과 검이 부딪혔다.
제대로 검격이 마주쳤다는 사실에 란델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큭!?”
한 번 검을 맞댔을 뿐인데도 몸이 휘청거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제국의 콜로서스가 엘프군 콜로서스를 상대한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캉! 카강!
파도처럼 이어지는 란델의 검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얀.
패색이 짙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죽지 않는 얀의 얼굴을 보며 란델이 고함을 쳤다.
“이 쥐새끼 같은!”
곧바로 달려들어 검을 얽는 란델.
그가 마력을 집중하자 순식간에 맞대고 있던 검이 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섣불리 몸을 빼려고 하는 순간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갈 판이었다.
“이대로 네 몸을 통째로 조각내주지…!”
이미 살심을 품은 란델이 검을 쥔 손에 마력을 더욱 집중했다.
어느 새 얀의 가슴팍에 닿기 시작한 검.
날이 없는 블런트가 아니었으면, 벌써 가슴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절 죽이실 생각입니까?”
“물론이지. 처음 볼 때부터 네놈이 마음에 안 들었어!”
힘겨워하는 얀의 표정을 보니 지난날의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는 듯했다.
“인간말종 형벌부대 새끼가 운 좋게 콜로서스에 탔다고 진급에, 기사단장님 독대에, 여자에!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들이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 제국의 기생충들이!”
고양감에 그동안 쌓인 울분을 전부 토해내는 란델.
일반병과 장교들은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또한 일반 사관으로 영전된 얀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옳소!”
“제국의 기생충들!”
“살려주신 황제폐하의 은혜도 모르고 어딜 기어들어와!”
“미천한 버러지들과 같이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그것을 구경하는 형벌부대원들에게서도 욕설이 튀어나왔다.
“좆같은 새끼들, 뚫린 입이라고!”
“너희들도 똑같이 만들어줄까!?”
“지난 전투에선 맨 먼저 꽁무니를 뺀 새끼들이! 난 우리 소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난 그저 빵을 훔쳐서 온 것뿐인데…!”
“재판도 받지 못하고 끌려왔어! 난 농사를 짓고 있었을 뿐이라고!”
란델의 일갈에서 시작된 파장이 점점 병사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평소에는 계속된 접전으로 외면하던 서로간의 앙금, 불만, 혹은 증오.
어느새 이 결투는 단순히 얀과 란델의 결투가 아닌, 형벌부대와 일반병들 사이의 대리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네놈을 죽여 저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마!”
그렇게 외친 란델이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는 순간이었다.
“하, 씨발.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나지막이 내뱉는 얀의 욕설.
병사들의 욕설과 고함에 묻혀 란델을 제외한 다른 이는 듣지 못한 듯 했다.
키리릭!
검날을 옆으로 뉘인 채 곧바로 몸을 틀어버리는 얀.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힘을 다 빼지 못한 란델의 검이 밑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얀의 팔을 스친 검이 그의 팔에 긴 검상을 남겼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촤악!
“크악!? 이 개자식이 피를!”
긴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를 곧바로 란델의 얼굴에 뿌려버린 얀.
갑작스럽게 시야가 가려진 란델이 당황했을 때, 얀이 곧바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빠악!
날이 없는 검을 역으로 잡은 얀이 폼멜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정확히 관자놀이를 후려친 폼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아악!”
두어 걸음 물러나 피를 닦고 앞을 본 란델.
틀렸다. 방금 전 관자놀이에 가해진 충격으로 골이 울렸다.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마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뻐억!
이번엔 검의 가드가 그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고 쓰러진 란델.
곧바로 그의 몸에 올라탄 얀이 왼 손으로 그의 목을 쥐었다.
“그 쪽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오른손에 들린 것은 역수로 쥔 검 손잡이.
그 뒤에 란델에게 가해진 것은 결투가 아닌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퍽. 퍽. 퍽.
검의 가드를 이용해서 얼굴을 때리고, 또 때린다.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란델이 손을 들어 막으려고 하자 아예 손바닥을 뚫어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검 손잡이를 휘두르는 얀.
어느 새 의식을 잃은 란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코는 부러지고, 얼굴 곳곳에는 피멍이 들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호성과 욕설로 소란스러웠던 공터가 완전히 정적에 휩싸였다.
“이런…!”
그것을 바라보던 사령관도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잡고 있던 술잔은 이미 땅에 떨어져 술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우선 한 명.”
조용히 그렇게 말한 얀이 역수로 쥔 검을 바로 쥐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란델.
부러진 검 끝을 그의 목에 겨눈 얀이 마지막 일격을 내지르던 순간이었다.
캉!
“그만 하지.”
내려찍던 얀의 검이 은빛 세이버에 막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내려갔어도 란델의 목에 검이 박힐 뻔 했다.
“….”
“여기서 멈추게. 기사를 죽이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케인의 세이버.
란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쯧.”
한번 혀를 찬 얀이 검을 놓았다.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검과 란델을 뒤로 하고 얀이 몸을 일으켰다.
“보이는 대로, 이 결투의 승자는 얀 베르쿠트 하사요!”
그렇게 외치며 얀의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케인. 얀의 얼굴을 본 이들은 란델의 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이로써! 그에게 제기된 혐의들은 모두 무죄가 되었소! 이는 황제폐하께서 보우하시는 기사의 법도! 나 케인 로렌츠가 보증하오!”
황제가 공인한 결투의 결과. 그리고 은기사의 보증.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