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도 그들 중 하나(2)
삐이이이---!
아침에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 소리에 얀은 눈을 떴다.
임무가 끝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한 형벌부대원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얀! 얀 베르쿠트! 어디있나!"
배불뚝이 중대장의 고함소리에 조용히 누워있던 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번엔 또 뭔 일인지.
전투가 없는 날은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하사 얀 베르쿠트. 여기 있습니다."
"너 이 새끼!"
그렇게 말한 중대장이 다짜고짜 얀의 멱살을 잡았다. 부들부들 덜리는 그의 손이 너무나도 불안해보였다.
"야. 너, 기사단장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잘 못 들었습니다?"
"니가 들은 게 맞아 이 새끼야! 뭔 짓을 했길래 황실 직속 기사단장이 널 개인적으로 부르냔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지?
기사단장이라니, 어제 만났던 그 금발 귀공자를 말하는 것인가?
"전장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의 중대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콜로서스에 관한 일은 극비사항. 같은 부대원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뭔 얘기를 나눴길래 기사단장이 형벌부대원을…! 아니, 됐다."
멱살을 잡은 손이 풀렸다.
자신도 열이 올랐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대장.
애써 단추를 잠가놓은 코트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군인이 저렇게 뭘 처먹기도 쉽지 않을 텐데, 생각하던 얀에게 중대장이 조심스레 다시 말을 걸었다.
"너, 뭐 쓸데없는 소리 한 거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마 이…! 아니, 그, 크흠."
계속되는 중대장의 헛기침.
예전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 것이 보였다.
"그, 예전에 내가 보급품 조금 따로 뺀 거라던가…. 장구류 몇 개가 빈다거나…."
“조금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구류도 몇 백 개는 빼돌리셨….”
“아, 아가리 다물어 이 새끼야!”
천 명이 넘는 중대원들 중 방독면을 가진 이가 이백 명이 채 안 된다.
아무리 형벌부대원들이라 해도, 최소한의 전투력을 위한 장비는 보급하기 마련.
그렇다면 남은 수많은 장구류는 누구 주머니로 사라졌을까?
부푼 그의 몸을 보며 얀은 조용히 한숨 쉬었다.
'최전방에 있는 군인이 뭘 처먹었으면 몸이…'
간신히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삼키며 조용히 답한다.
"단지 명령서를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그, 그래? 그럼 나에 대해선 별 말 안했다는… 잠깐, 뭐? 명령서를 받아?"
"예. 직접 전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중대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기사단장이 왜 너한테 명령서를 직접 전달해애애!!!"
"…아, 생각해보니."
콜로서스를 움직이는 기사들은 소위로 임관하며 진급 또한 빨랐다.
그런 기사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기사단장이라면 최소 영관급.
일개 하사인 자신에게 따로 명령서를 주기에는 너무나도 까마득히 높은 계급이었다.
"내 이 전선에서 5년을 지냈더니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새로 온 기사단장이란 작자는 또…!"
그렇게 말하는 중대장도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몇몇 막사가 비어있는 것을 보니 형벌부대 또한 건설용역으로 불려간 듯 했다.
"됐다, 아무 말 안했다면 내 알바 아니지. 이거 받아라."
그렇게 말한 중대장이 얀에게 꾸러미를 건넸다.
조용히 그것을 받아든 얀이 내용물을 확인하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 든 것은 깨끗한 새 전투복과 제국군 부사관용 정복이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정복이지! 기사단장님이랑 독대하는데, 그 후줄근한 전투복으로 갈 셈이야!?"
형벌부대에 정복이라니.
다른 부사관들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말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두 시간 뒤에 본부로 가. 그렇게 얘기해 놨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지. 재수 없는 새끼!"
악담을 퍼부은 중대장이 자리를 떴다.
기사단장의 호출이라면 일과에서는 당연히 열외일 테니, 사실상 두 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 셈.
사령부의 승인도장이 찍혀있는 정복을 꺼낸 얀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갈색의 전투복과는 다른 검은 원단, 곳곳에 박힌 붉은 장식.
옷매무새를 확인한 얀은 어깨에 느껴지는 허전함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낙인이 없는데…?"
***
"얀 베르쿠트 하사입니다. 기사단장님께 호출 받아 왔습니다."
"아, 말씀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천막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말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충성. 하사 얀 베르쿠트. 부르셨습니까."
"음. 전투 수고 많았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게 됐군."
"아닙니다."
알면 부르지를 말던가.
그렇게 조용히 생각하며 내밀어진 기사단장의 손을 잡았다.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었군. 기사단장 케인 로렌츠 중령일세. 앉지."
'중령이라, 내 또래로 보이는데 말이지.'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고급장교.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이였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자마자 임무에, 호출까지 하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군."
"익숙합니다.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처음 그의 얼굴을 봤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아직도 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번 전투를 치룬 병사는 적어도 삼 일은 쉬어줘야 할 터였지만, 이 전선에서는 예외였다.
특히나 그것이 형벌부대라면.
"지시할 일도,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말씀하십시요."
부동자세로 대꾸하는 얀의 모습에 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내 나름대로의 포상이네만."
새로 지급된 정복과 전투복,
거기에는 당연히 찍혀있어야 할 형벌부대의 낙인이 지워져 있었다.
상부의 승인이 찍힌 새 정복에는 새겨진 자신의 이름.
얀의 눈이 깊어졌다.
"형벌부대에서 10년을 복무하며 전훈을 세웠고, 이번 전투에서는 발굴단을 지켜주었지. 강등된 계급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정도는 내 재량으로 가능하다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감사를 받을 때가 아니야. 이유 없이 자네를 일반 부사관으로 영전시킨 게 아니니까."
곧바로 자세를 낮추는 케인.
부동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얀을 바라본 케인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 콜로서스. 자네가 움직인 것이 맞나?"
"예."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다.
"두 명의 기사를 죽인 기체에 어떻게 자네가 들어갔는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는지는…. 알 턱이 없겠군."
"발굴단 중 한 명이 저에게 안에 들어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넨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얀의 즉답에 생각에 잠긴 듯한 케인.
그렇지만 다시 그의 입이 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일반 부사관으로 영전한 이유가 있다고 했지. 그건 자네에게 제안을 하기 위해서라네. 뭔지 알겠나?"
넌지시 묻는 케인의 질문에 곧바로 얀의 입이 열렸다.
"그 기체에 제가 타게 되는 겁니까?"
***
본부 뒤쪽에 마련된 정비창에는 콜로서스들이 정비를 받고 있었다. 기존에 있던 7대의 콜로서스들 외에도, 새로 가져온 골격에 급히 장갑을 붙이는 일 또한 진행되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어떤가?"
얀을 이곳에 데려온 케인이 그렇게 묻자 현장 책임자가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
"조종을 맡을 기사분들께서는 도착했습니다만, 장갑재는 아직 삼 할도 다 붙이지 못한 상태입니다."
"기본적인 화기 운용만 가능하면 되네. 서둘러주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답한 책임자가 허겁지겁 달려 나가고, 케인은 얀을 이끈 채 정비창 구석의 공터로 걸어갔다.
그곳에 놓여 있는 것은 진회색 짐승.
이질적인 모습의 콜로서스는 유적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장갑재를 떼어내는 것도, 내부 구조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해서 말이지. 그냥 이렇게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네."
그렇게 말하는 케인에게 기사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케인 경! 오셨습니까!"
"아, 란델 경. 좋은 아침이오."
란델이라 불린 그 기사는 갈색 머리를 한 청년이었다.
말끔한 차림새와 깨끗한 얼굴. 그렇지만 어딘가 비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남자.
얀을 콜로서스에서 끌어내 그의 목을 짓누른 기사였다.
"뒤에 동행한 자는…."
"아, 얀 베르쿠트 하사입니다. 전훈이 많은 사관이기에, 같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예? 얀이라면, 그 형벌부대의…!"
그렇게 말하며 얀을 보는 란델.
"충성. 얀 베르쿠트 하사입니다."
조용히 그에게 경례를 한 얀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탐탁지 않았다.
"허, 형벌부대원을 여기까지 동행하다니요, 아무리 기사단장님이시지만…."
"이자는 더 이상 형벌부대가 아닙니다. 란델 경."
"예? 그것이 무슨…."
그렇게 의문을 표하던 란델의 눈에 얀의 어깨가 들어왔다.
"낙인이…?"
"제 권한으로 그를 일반 사관으로 영전했습니다. 그라면 이 콜로서스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란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기사가 아닌 자에게 콜로서스라니! 심지어 그는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당장 엘프 근위기사단이 지척에 온 상황입니다.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을 흐리며 란델은 조용히 얀을 노려보았다.
'뭔데.'
마치 연인을 뺏긴 남자의 눈빛을 보는 듯 했다.
'네까짓 게 뭔데 단장님 옆자리를!'
이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
'아침 일찍 기사단장을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군.'
마력을 지니고 콜로서스를 다루는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이 모인 조직.
지체가 높은 기사단장에게 접근하고 아첨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란델이라는 기사가 그렇겠지.
"누구 이자와 동승할 사람이 있나? 정말로 이 기체가 움직인다면, 그걸 조사할 사람이 필요하네만."
그런 란델을 눈치 못 챈 듯 정비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케인.
그렇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기사 둘이 저 안에서 시체로 변했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몇 번 더 불러봤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들려온 작은 목소리.
전장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미성에 케인의 시선이 돌아갔다.
목소리를 낸 이는 작은 체구의 여인.
탈색된 듯 흰 머리와 눈을 지닌 인형 같은 외모였다.
"그대는…?"
의문을 표하는 케인.
이런 최전방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여인.
"오!"
케인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란델이 짐짓 큰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만면에 미소를 띤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오! 이 흙먼지 가득한 전장에 그대처럼 가녀린 여인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이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제가 사람을 부를 터이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란델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런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발굴단원 렌입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란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하는 렌.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썹을 꿈틀거린 란델이 입을 열었다.
"하하, 발굴단원이신 줄은 몰랐군요. 그렇지만 숙녀분. 저 콜로서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가까이 가는 란델.
자신을 저 콜로서스에 태운 장본인을 만난 얀이 조용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뭐냐."
목소리를 낮추며 위협하는 란델.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얀의 표정 또한 눈앞의 렌 처럼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제게 콜로서스에 탑승하라 말한 자입니다."
"흠, 그녀가?"
"예. 확실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앓는 소리를 낸 란델이 뒤로 물러났다. 관계자임을 밝힌 이상, 기사단장 앞에서 더 수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부탁하지. 같이 콜로서스에 들어가 상태를 점검해주게. 가능하다면 기동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 케인이 부른 정비병들이 몰려와 사다리를 설치했다.
준비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콜로서스에게 걸어가는 얀과 렌.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용히 얀의 입이 열렸다.
"정체가 뭐야."
처음 만났을 때의 존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려줘도 못 믿어."
"그래? 그럼 다음 질문. 내가 이 녀석을 다시 움직일 수 있나?"
"있어. 정확히 말하면, 이제 네 말밖에 안 듣게 됐어."
"무슨 소리야?"
"들어가면 설명할거야. 일단 조용히."
그렇게 말하는 사이 조종석 앞에 다다른 두 사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절로 열린 조종석 해치에 정비병들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호오. 자기 주인을 몸소 맞이하는 건가?"
흥미롭다는 듯이 둘을 지켜보는 케인.
란델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불이! 불이 들어왔습니다!"
"전원 철수! 아직 움직이지 마십시오!"
마력로의 기동음과는 확연히 다른 구동음과 함께, 콜로서스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황급히 철수한 정비병들이 자리를 피하는 사이, 진회색빛의 콜로서스가 몸을 일으켰다.
"설마 정말로 움직인다니! 케인 경…!"
"됐습니다."
"예?"
천천히 두 다리를 펴며 일어나는 진회색 거인을 보며 케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희망 없는 전황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듯, 득의한 미소였다.
"란델 경."
"예, …예!"
직접 자신을 부른 기사단장의 말에 황급히 대답하는 란델.
그런 란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케인은 확신에 찬 듯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는 고대의 콜로서스가 아침 해를 등지고 우뚝 서 있었다.
"콜로서스 정비를 서두르라고 전해주세요. 이 전선.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