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65화 (65/66)

65화. 유적 포식자

2024년 6월 25일, 북한의 본격적인 남침이 시작되는 순간, 한반도는 곧바로 전시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한반도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이 전쟁을 주도했다. 미국은 곧바로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전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세븐 데이즈 작전을 시행했다.

세븐 데이즈.

일주일 안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 내에 위치한 16개의 주요 거점 지역을 무차별적인 폭격을 통해,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그 작전의 목적이자, 전부였다.

그렇게 북한이 세븐 데이즈 작전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상황 속에서, 북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본토 공격을 막을 생각 자체가 없었던 듯, 북한은 대부분의 전력을 본토 방어가 아니라 한국 공격에 집중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앞세운 북한군은 곧바로 강원도에 진입했고, 순식간에 춘천과 원주를 점령했다. 놀라운 이동 속도였고, 그걸 가능케 한 건 몬스터의 존재였다. 군대를 막기 위해 대기 중인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작전은 몬스터를 상대로는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없었다.

동시에 북한의 모든 해군 전력은 인천항을 향하고 있었다. 서해상에서는 마치 게임처럼, 무수히 많은 군함이 서로를 향해 목숨을 건 포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북한군의 움직임은 저돌적이었고, 직선적이었으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수도 점령!

인천항 그리고 강원권을 포위한 뒤 수도 서울을 완벽하게 함락시키고자 하는 게 북한의 목적이었다.

한국군의 목적도 단순해졌다. 미국의 세븐 데이즈 작전을 마친 후 그 병력이 원군으로 오기 전까지 수도를 수성하는 것이 한국군의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결국 7일이었다.

7일 동안 수도가 지켜진다면, 그 이후에는 뒤처리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7일을 짧게 보지 않았다.

병기의 질은 한국이 우세했지만, 몬스터를 병력으로 부리는 북한군에게 무기의 질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환수 타입의 몬스터들은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유유히 지나, 습격을 벌였고 땅굴을 파내는 몬스터들이 만들어낸 땅굴은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을 무색하게 만들고는 했으니까.

당연히 마법사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마법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주시에 환수 타입의 몬스터 다수 등장! 여주가 뚫리면 전선이 이천까지 밀려! 무조건 막아야 해!”

“문경 쪽에도 몬스터 출몰!”

“애초에 보급 따윈 없다, 이거군. 그냥 무조건 지르고 보네. 이건 누가 봐도 자폭이야.”

그야말로 악몽의 나날들.

하지만 그 전쟁이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악몽, 그 이상을 낳고는 했다.

그 상상 이상의 악몽이 이 전쟁에도 등장했다.

“맙소사, 평택에 4등급 몬스터가 등장했어.”

“뭐?”

“블리자드 리자드…….”

“젠장, 하필이면 왜 그런 괴물이 평택에 등장한 거야? 평택이 점령당하면, 수도권 남부가 위험하다고!”

4등급 몬스터, 블리자드 리자드의 등장.

그 긴박한 상황에서 결국 그들이 움직였다.

“포식자 팀 소속 하선우입니다. 우리가 평택으로 이동해서 블리자드 리자드를 잡겠습니다. 지원 부탁합니다.”

포식자 팀.

그들이 평택으로 향했다.

* * *

한국이 수도를 사수하기 위해 치르는 전쟁의 폐해는 섬뜩한 수준이었다. 계산을 가늠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의 피해가 나날이 축적됐다.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처참한 피해를 입은 건 북한이었다.

북한의 주요 시설들, 주요 도시들을 상대로 시작된 폭격은 섬뜩한 수준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개중에서도 평양에 6월 29일, 하루 동안…… 정확히 19시간 22분 동안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퍼부어진 폭격의 결과물은 참혹했다.

과연 누가 악의 제국인지, 그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미국의 평양을 향한 폭격은 단순히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폭격, 그 이상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 북한을 상대하면서 쌓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폭력처럼 보였다. 정의를 집행하고, 평화를 위한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이고, 야만적인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참담하게 변해버린 평양,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폭격 속에서도 거뜬하게 버텨낸 공간이 있었다.

평양 비밀 지하 기지.

단순한 벙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 비밀 기지는 무사했다. 북한의 권력자들이 핵폭발에서도 제 안위를 꾀하기 위해 만든 장소다웠다.

하지만 지금 그 비밀 지하 기지마저 소탕하기 위해, 로드리게스 회장이 만든 암살팀인 피스메이커 팀이 도착했다.

긴 출입구 그리고 삼엄함 경계는 어둠 속에 몸을 담근 채 이동하는 마법, 다크 풀(Dark Pool) 마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어디에도 그림자가 있었고, 그 어디에나 있는 그림자가 다크 풀 마법을 쓴 마법사들에게 길이 되어줬다.

이미 앞서서 한 번 이곳 지하 비밀 기지를 방문했던 피스메이커 팀은 이번에도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더불어 이번 방문 목적은 단순한 탐색이 아니라, 이 비밀 지하 기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거 대상은 전부였다. 이 비밀 지하 기지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혹여 그게 운 좋게 이곳까지 온 쥐새끼라고 해도 제거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무차별적인 제거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이번 작전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권자들에게 보고됐다.

미대통령, 그는 특별하게 마련된 브리핑룸에서 직접 이 과정을 참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로드리게스 회장이 있었다.

-B09 구역 클리어.

-B11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피스메이커 팀은 이미 확보한 비밀 기지 지도, 그 속에 있는 공간들과 통로들을 채우고 있는 생명체들을 빠르게, 깔끔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그 과정을 보던 로드리게스 회장은 옅게 웃었다.

‘정말 순조롭군.’

이번 작전은 시작점이었다.

미국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그렇듯,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최대한 은밀하게, 확실하게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긁어 줄 수 있는 게 바로 피스메이커 팀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워.’

그 피스메이커의 가치를 미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상황!

그게 로드리게스 회장이 무수히 많은 자들이 고통과 비명을 내지르는 이 전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이유였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미소였다. 뱀조차도 지을 수 없는 비릿한 미소를 로드리게스 회장이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C01구역으로 이동…….

어느 순간 로드리게스 회장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갑자기 통신이 끊겼다.

지하 비밀 기지가 지하 깊숙한 곳에 있으니, 통신이 도중에 끊기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기다렸다. 10초를 기다렸고, 그 후에 1분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통신은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로드리게스, 통신이 불량인 겁니까, 아니면 문제가 생긴 겁니까?”

4개의 별을 어깨에 달고 있는 자의 물음.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그 질문에 로드리게스 회장의 머릿속에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예, 불량입니다…… 그리 말하고 알아서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당장 문제라고 말하며, 후속 조치를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인가?

변명을 통해 반전을 꾀하거나 아니면 고백을 통해 대처를 꾀하거나. 문제를 앞둔 많은 이들이 흔히 하는 고민이다.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게 정답이지만, 사람이란 많은 이들이 실수를 숨기고는 하니까.

하지만 지금 로드리게스 회장이 상대하는 자는 단순한 기업인이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변명을 해서, 그게 통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변명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경우 그걸 봐 줄 수 있는 위치의 인간도 아니었다.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표정을 바꾸며 자신의 실수를 곧장 받아들였다. 이걸로 얼마만큼의 손해를 입었을까? 10억? 100억? 1천억?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팀을 투입하겠습니다.”

그래서 곧장 대안을 뱉었다.

곧바로 반문이 나왔다.

“이미 1차 팀이 실패했는데 2차 팀을 넣는 건 너무 위험한 판단 아니오? 무슨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당연한 반론이었다. 그저 끈기와 근성, 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번 팀은 리볼버가 이끄는 팀입니다.”

그 반론에 로드리게스 회장이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리볼버!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좌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리볼버는 이제까지 미국을 위해 무수히 많은 일을 해냈다. 입으로는 언제나 귀찮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실상 그는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해냈고, 업적을 이룩한 자였다.

그런 그가 위험에 몸을 던지는 건 말 그대로 위험한 일이다. 그는 잃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인재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자이기도 하다.

모두가 미대통령의 입을 바라봤다.

미대통령이 좌중의 시선에 대답했다.

“우리는 이번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빨리 끝내야 합니다. 우리의 1초가 지금 한반도의 누군가에게는 평생일 수 있습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숨을 돌렸다.

* * *

‘젠장, 내가 왜 이 귀찮은 짓을.’

푸념을 뱉으며, 다크 풀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낸 크로포드의 모습이 이내 본래 형체를 갖추었다. 검은 액체였던 그가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검은 타이츠 옷을 입고 있던 크로포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위치한 곳은 통로였다. 마치 지하철의 통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고급스러운 느낌보다는 투박한 느낌이 더 강했다. 동시에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벽이 무너져 내리고, 시체도 몇 구 보였다. 옅은 피비린내도 코끝을 간질였다.

그게 의문의 시작점이었다.

‘환기 시스템이 있을 테니, 비린내가 적은 게 맞겠지만 이거 냄새가 너무 옅은데?’

피 냄새는 질리도록 맡아봤다. 그만큼 많은 것을 죽여 봤다.

그렇기에 크로포드는 지금 이곳의 피 냄새가 죽은 이들의 머릿수에 비해 너무 옅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죽은 인원이 열은 가뿐하게 넘어갈 텐데, 그들의 죽음이 내뿜는 악취가 고작 이 정도일 수는 없다.

‘후끈하네.’

더 나아가 곳곳에 보이는 흔적들 그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주변의 공기를 느끼며 크로포드는 확신했다.

‘불을 다루는 놈이야.’

이곳을 지키는 마법사가 있다.

‘제법 강한 놈. 나보다도 강할지 모르겠군.’

그것도 그냥 마법사가 아니다. 크로포드, 어쩌면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마법사였다. 크로포드보다 강하다는 건 8서클이라는 의미다.

크로포드가 입꼬리 한쪽을 일그러뜨렸다.

‘언제나 그렇지. 막판에 돌입하면, 꼭 싸우기 힘든 족속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하지.’

크로포드의 감이 맞는다면, 이제까지 단서도, 꼬리도 보이지 않았던 8서클 마법사가 대뜸 등장하는 셈이다. 그동안 누구보다 먼저 8서클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던 크로포드 입장에서는 참으로 맥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크로포드가 개인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그를 따라온 피스메이커 팀의 일원들이 하나둘씩 다크 풀을 빠져나와 제 모습을 갖추었다. 모두가 검은 타이츠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제 모습을 갖춘 그들은 크로포드의 명령을 기다렸다.

크로포드가 수신호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두 명이 앞장서서 움직였다. 경계를 한 채, 통로를 거의 90도로 꺾이는 코너 부분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화르르!

갑자기 달려온 푸른 불덩이가 조심스럽게 내민 그 둘의 머리통을 단숨에 잡은 후에 그 옆의 벽을 향해 그대로 꽂혔다.

콰앙!

두 명의 몸뚱이가 벽에 못처럼 박혔다.

그와 동시에 벽에 꽂힌 푸른 불덩이가 벽에서 나온 뒤 고개를 돌려 피스메이커팀을 바라봤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반응하고 대처에 나선 건 바로 크로포드였다.

‘감히!’

크로포드의 눈에는 푸른 불꽃으로 만들어진 인형(人形)이 보였고, 그것을 보는 순간 곧장 마법을 사용했다.

가장 먼저 적이 등장한 장소와 자신 사이에 얼음벽 하나를 만들어냈다. 4서클 마법, 아이스 월이 발동했다. 그 벽 뒤로 파이어 월을 만들어냈다. 얼음과 불, 두 개의 벽을 세웠다. 두 벽 사이의 거리는 약 4미터 정도.

갑자기 등장한 상대는 그 얼음벽을 가차 없이 제 주먹으로 부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얼음벽이 얼음 조각이 되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후 얼음벽을 부순 상대는 곧장 불의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불의 벽을 상대는 부술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그냥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푸른 불꽃 육체로 불의 벽을 뚫을 속셈이었다.

파앗!

날렵한 소리와 함께 그가 불의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치지지직!

불의 벽 너머에 기다리고 있던 라이트닝 웹이 불의 벽을 뚫고 나온 이의 몸을 잡았다.

스파크가 거세게 튀었다.

‘세 개째.’

전격계 마법은 실체가 없는 괴물들을 잡는 데 가장 유용한 마법이란 걸 크로포드가 모를 리 없다. 무엇보다 상대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그 어느 마법보다 유용했다.

크로포드는 상대의 실체를 파악했다.

‘불로 된 사람인가?’

상대는 마치 푸른 불꽃이란 찰흙을 사람의 형태로 만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라이트닝 웹에 걸린 그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라이트닝 웹을 뜯어내고 있었다. 뜯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라이트닝 웹에 걸린 불꽃 인간이 자유를 되찾기까지는 3초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3초의 시간은 크로포드가 마법을 사용하기에 넘칠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네 개째.’

크로포드, 그가 5서클 마법 빅플레임을 시전했다.

정해진 위치에 어마어마한 위력의 불길을 동반한 폭발을 일으키는 빅플레임 마법은 5서클 폭발 마법 중에서도 최고의 위력을 자랑한다. 하물며 이곳은 통로다. 반쯤은 폐쇄된 공간이다.

콰아앙!

그곳에서 이루어진 폭발은 순식간에 상황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쿠쿠쿠!

폭발과 함께 통로가 크게 흔들렸다. 이 정도 위력이면 이 통로가 붕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심지어 폭발의 위력에 피아의 구분은 없었다. 폭발 근처에 있던 피스메이커 팀의 마법사들은 당연히 폭발에 휘말렸다. 신기한 점은 그 폭발과 함께 불길이 단숨에 사그라졌다.

강력한 폭발 마법이 일어난 제한된 장소에서는 일시적으로 폭발 혹은 화염계 마법이 화력을 잃는다. 화염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불꽃으로 이루어진 존재도, 이 폭발에 휘말리면 자신의 화력을 잃게 된다.

아예 죽거나 혹은 실체를 드러내거나.

지금은 후자였다.

푸른 불꽃 인간이 실체를 드러냈다. 맨몸뚱이의 사내였다. 사내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크로포드는 사내의 정체를 파악했다.

‘라미 하마드?’

의문은 찰나, 크로포드는 상대의 실체를 파악하는 순간 세븐 피어싱 마법을 사용했다.

제한된 공간, 엉망이 된 공간에 일곱 개의 하얀 창이 등장했다.

다섯 번째 마법이 발동했고, 이 다섯 번째 마법이 라미 하마드의 몸을 단숨에 관통했다.

일곱 개의 창이 가차 없이 라미 하마드의 몸을 관통했다.

푸홧!

그와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내밀었던 크로포드의 오른손이, 꽉 움켜쥔 그의 오른팔이 잘린 채 허공에 떴다.

크로포드, 그의 뒤에서 등장한 무언가가 그의 오른팔을 단숨에 잘라낸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크로포드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 광경에 대한 감상조차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할 시간도 없었다.

크로포드의 팔을 잘라낸 자가 곧바로 크로포드의 주둥이를 제 손으로 막은 후에 그 상태로 크로포드를 벽을 향해 밀어붙였다.

콰앙!

크로포드의 몸뚱이가 벽에 파묻혔다.

‘크헉!’

어마어마한 충격이 크로포드의 몸을 뒤흔들었다. 비명은 물론 당장 피를 토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입이 막힌 크로포드는 토해내려는 걸 억지로 삼켜야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크로포드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

크로포드 입장에서는 나름 다행이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덕분에, 자신의 입을 잡고 있는 사내의 손이 활활, 불꽃이 되어 그의 주둥이를, 입술과 입 주변을 태우는 끔찍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

아니, 조금 더 지나면 아마 크로포드는 평생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시체가 될 터.

그때 검은 타이츠를 입은 피스메이커 팀의 일원이 크로포드를 구하려는 듯, 크로포드의 입을 막고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며 주먹으로 사내의 머리통을 노리고 휘둘렀다.

크로포드를 잡고 있던 사내, 리란칭은 그 주먹에 조금의 관심도 주지 못했다.

불꽃이 된 그의 육체는 물리적인 타격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오히려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저 주먹이 타버릴 것이다.

‘흥.’

그렇게 리란칭이 콧방귀를 뀌는 순간.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리란칭의 시야가 지진이 난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리란칭의 몸뚱이가 멀찌감치 떨어진 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푸홧!

부딪친 그의 몸뚱이는 불꽃처럼 산산조각이 난 후에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불꽃들이 뭉치기 위해 움직였다.

‘무슨 일이…….’

이 상황에서 리란칭은 제대로 된 사고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의 뇌는 제대로 된 판단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런 그의 머리통을 누군가가 농구공 잡듯 들어 올렸다. 리란칭의 몸은 아직 복구가 절반도 채 되지 않은 탓에 상체만 있었다. 팔도 팔꿈치까지만 있었다.

“으아악!”

그렇기에 리란칭은 자신을 엄습한 고통 앞에서 몸부림조차 치지 못한 채 비명만 내질렀다.

온갖 고문에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그였지만, 마법이 된 자신의 육체가 강제로 흡수되는 경험 앞에서는 그 정신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도 그리고 경험한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으니까.

동시에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마법을 흡수하는 건, 바츠무, 마법의 종주인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 중에 그 능력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밖에 없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지?”

이강우, 그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 * *

블리자드 리자드.

숨결만으로도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녀석이 평택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질주하는 녀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녀석이 지나간 길에는 단단한 얼음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 녀석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전차들과 박격포의 포신들이 쉴 새 없이.

퍼엉!

쉴 새 없이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 번에 터지는 포성은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콰앙!

그러나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그 소리도, 포격에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쿠쿠쿠!

번듯한 건물들이 애꿎은 피격에 흉측한 꼴을 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 도로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도로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됐다. 만약 이것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어마어마할 터.

퍼엉, 퍼엉!

하지만 전차 그리고 포병들에게 그런 재산 피해 같은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더 많은 포격을 위해, 더욱더 분주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저 괴물이 수도권으로 들어가면 끝장이다.’

‘여기서 무조건 막아야 해. 건물을 전부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을 막아야 해!’

재산 피해를 염두에 두는 순간, 더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오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포격이 잦아든 건, 놈을 막는 것이 아니라 놈을 잡기 위해 움직인 마법사들이 도착한 다음이었다.

헬기를 타고 등장한 포식자 팀, 그중 한 명인 하선우는 헬기 아래로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미치겠군.’

이 무차별적인 광경을 최근 자주 봤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김재범이 그런 하선우에게 칵테일 쉐이커, 비슷한 것을 건네줬다. 딱히 대화는 필요 없었다. 김재범이 그것을 건네주자, 하선우가 그것을 잘 챙겼다. 그 후 하선우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헬기 레펠을 이용해 지상으로 내려갔다.

하선우, 그가 일단 무대를 만들 것이다. 무대에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깔 듯이, 독을 깔 것이다.

‘조심해서 써라, 그거 무지 독한 거니까.’

더불어 이번에 쓸 독은 김재범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독이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독이 아니라면, 독액조차 얼려 버리는 블리자드 리자드에 영향 자체를 주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한 모금만 마시더라도 영향을 줄 극독이 필요했다.

반대로 만약 하선우가 실수로 이 독의 컨트롤에 실패하고, 독이 멋대로 퍼진다면 그 독은 필시 아군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양날의 검이다.

‘잘하겠지.’

그래도 김재범은 이 순간 걱정과 우려보다는 하선우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다.

오히려 김재범이 우려하는 건 따로 있었다.

김재범이 채유리를 바라봤다. 헤드폰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채유리는 정말 인형 같았다. 좋은 느낌의 인형이 아니라,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저주 받은 인형, 예쁘지만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 깃든 인형.

김재범은 그런 채유리를 향해, 마이크를 이용해 말했다.

“채유리 씨, 무리하지 마십시오. 일단 녀석을 막는 게 우선입니다. 막으면, 비수와 명궁이 곧 도착합니다. 처리는 그들이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우리 역할은 막는 겁니다.”

대답은 채유리가 아닌 김수애의 입에서 나왔다.

“무리하더라도 죽진 마세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 정도는 얼마든지 복구해드릴 테니, 그 정도 부상은 염려치는 마시고요.”

섬뜩한 말이었지만, 비아냥거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말.

채유리는 그런 김수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맞장구를 친 건 김재범이었다.

“뭐, 우리 팀 의법사 실력이 최고이긴 하죠.”

맞장구를 친 김재범이 김수애를 보며 방긋, 웃었다.

* * *

리란칭과 라미 하마드가 이바노프로부터 힘을 얻는 대가로 바친 건 전부였다.

존재 전부.

그들은 때가 되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이바노프의 무기가 되기로 맹세를 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그들은 이바노프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들의 몸을 이바노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불꽃의 장작마냥 불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그들은 그 순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괴물!

불길처럼 빠르고, 불꽃처럼 뜨거우며, 불처럼 뜨거운 그들은 인간은 절대 막을 수 없는 괴물이 됐다. 피스메이커 팀을 순식간에 전멸시킨 것도 그들이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우만 아니었다면.

괴물을 잡아먹는 괴물만 아니었다면.

그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리볼버가 이끄는 2차 부대마저 전멸시킨 후에 유유히,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이바노프와 함께 유유히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히려 불꽃이 되어버린 건 이강우를 상대로 최악의 패착이 되었다. 그냥 차라리 인간인 채로, 마법사인 채로, 몸을 불사르지 않았다면, 바츠무의 손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강우는 그렇게 둘을 처리하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토록 깊은 지하 속에 과연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큼지막한 공간. 2등급 모래시계문은 그 공간 안에 오롯하게 서 있었다.

그 문 앞에서 이강우와 이바노프가 마주 봤다.

언제나 그렇듯, 해골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 있는 이바노프, 그가 이강우를 바라보는 순간 내뱉은 첫 마디는.

“대단해.”

감탄이었다.

그는 이강우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강우가 그의 부하들을 가뿐하게 해치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감탄의 이유는 오직 하나.

“기어코 네 힘으로 문을 나왔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자가 이강우 본인이라는 것.

정말 감탄이 나올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문을 넘는 건 야크센이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비웃듯 야크센이 아닌 이강우가 눈앞에 있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아는 이라면 감히 상상치도 못했을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게 전부였다. 결국 이강우는 이강우일 뿐. 야크센이 아니다.

“내가 나온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강우의 반문에 이바노프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차라리 잘 됐군.’

둘 사이에 긴 이야기는 필요 없다.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달변가도 아니다.

동시에 둘에게는 각자의 목적이 분명했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상대를 제압해야 했다.

결국 싸움만이 지금 여기서 그들이 해야 할 절대적 임무다.

‘어차피 야크센이 아닌 이상, 내 상대는 못 된다.’

푸후후!

이바노프가 잽싸게 불꽃을 토해냈다. 그가 토해낸 푸른 불꽃이 삽시간에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강우는 곧장 절망의 태양을 만들어냈다. 떠오른 절망의 태양이 어둡게 빛나기 시작했다. 절망의 태양은 예전과 다르게 스멀스멀, 이바노프가 토해낸 불꽃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각성!

이강우는 자신이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한 대가를 분명하게 챙겨 왔다.

신록의 핵을 먹어 치웠고, 그 덕분에 불꽃 심장, 불과 얼음의 군단의 뒤를 이어 절망의 태양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절망의 태양 아래로 불과 얼음의 전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불멸의 전사들은 이바노프를 바라보는 순간 입을 크게 벌리고, 함성을 내질렀다.

소리 없는 외침!

그러나 그 외침을 내지르는 전사들은 그 무엇보다 간절하게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먹어 치운 원수를 향해 가진 모든 분노를 토해낼 생각이었다.

‘흥.’

그 소리 없는 분노 앞에서 이바노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분노에 휩싸여 자신마저 분노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런 실수는 앞서서 몇 번 저질렀다.

무엇보다 지금 이바노프는 굉장히 중요한 임무를, 10년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투자를 한 계획에 방점을 찍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티끌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강우, 놈을 당장 죽이진 않는다.’

때문에 이바노프는 냉철한 판단을 했다.

이강우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이바노프는 이강우를 얼마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이미 한 번 죽여도 봤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문제는 이강우가 죽으면, 그를 대신에 야크센이 이강우의 몸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야크센과의 일전 역시 피할 생각은 없다. 강희를 비롯한 다른 동족들은 야크센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했지만 이바노프는 반대였다. 어차피 이강우의 몸을 빌려 등장한 야크센은 반쪽짜리다. 그런 반쪽짜리조차 두려워 피한다는 건, 이바노프에게 굴욕이었다.

단지 지금 이 무대에서는 그 굴욕조차도 감수해야 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도록, 시간을 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전투는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린 다음에도 괜찮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이강우를 이강우인 채로 살려둬야 한다.

‘틈이 보이면 자해도 막는다.’

혹여 이강우가 최악의 순간 고를 선택, 자살이라는 선택도 막을 생각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바노프는 수성을 택했다.

이바노프, 그가 토해낸 불꽃이 넓은 공간을 반으로 갈랐다. 천장까지 치솟은 푸른 불꽃이 벽이 되었다.

그 벽을 마주 본 이강우는 이를 꽉 물었다.

‘버닝 마나.’

상대가 시간 벌이가 목적이란 걸 모를 리 없다. 시간이 끌리면 이강우의 패배다. 나중을 기약할 상황도 아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결국 모든 게 끝나는 상황 아닌가?

그럼 모든 걸 불사를 때다.

이강우는 버닝 마나를 사용했고, 그의 마력이 활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른 마력이 이강우의 온몸에 넘쳐흘렀다. 그 마력으로 불과 얼음의 전사, 삼백 전부를 소환했다!

삼백의 전사가 완성되는 순간, 그 전사들이 벽을,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밧!

날렵한 몸놀림으로 벽을 향해 무기를 앞세운 채 달려드는 삼백의 전사들이 벽과 부딪쳤다. 그들은 각자 가진 무기를 벽을 향해 내찔렀다.

하지만…….

화르르!

불의 전사들이 만들어낸 불꽃 무기는 불꽃벽에 흡수됐고.

치이익!

얼음 전사들이 만들어낸 얼음 무기는 불꽃벽을 뚫지 못한 채 그대로 녹아버렸다.

그러자 움직인 건 검은 파리 떼였다. 이강우의 등 뒤에서 등장한 검은 파리 떼들이 불꽃벽에 달라붙어, 야금야금! 불꽃벽을 파먹기 시작했다. 거대한 푸른 불꽃벽에 검은 곰팡이가 피어났다. 그 검은 곰팡이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을 때!

콰앙!

그 검은 곰팡이를 향해 몸을 내던진 불멸의 전사들이 자폭을 했다.

그들의 자폭과 함께 터진 굉음, 그 굉음 사이로 불꽃벽 너머의 광경이 작게 보였다. 그 작은 광경은 곧바로 벽이 메워지면서 사라졌지만, 곧바로 전사들이 앞 다투어 자폭으로 벽을 뭉개기 시작했다. 벽의 구멍이 점차 커졌다. 이윽고 전사들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 생겼을 때, 열둘의 전사들이 달려 벽을 뚫고 넘어갔다.

화르륵!

그들이 넘어가는 순간 다시 벽이 닫혔다.

벽을 뚫고 지나간 전사들이 돌아올 길도 막혔다.

하지만 전사들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전사들은 어차피 돌아갈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바노프를 처치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불꽃을 토해내며, 불꽃벽을 더 두껍게 만드는 이바노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바노프는 불꽃을 토해내던 작업을 멈춘 채 열둘의 전사들을 상대했다.

일방적인 승부였다.

이바노프가 가진 바츠무의 손은 용맹한 전사를 너무나도 쉽게 뭉개버렸다. 강인한 몬스터의 일격에도 버티는 불멸의 전사들이 이바노프의 손 앞에서는 고운 찰흙이 되어 버렸다.

퍼엉, 퍼엉!

결국 전사들이 자폭을 시도했지만, 그 자폭 역시 이바노프가 토해낸 불꽃이 만들어낸 불꽃막을 뚫지 못했다.

실패!

그 사실을 파악한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그래,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겠지.’

이강우도 알고 있다. 고작 이 정도 재주로 이바노프를 처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 힘 대 힘.’

무엇보다 수성을 택한 이바노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잔재주가 아니라, 그 힘을 뛰어넘을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흐읍!”

이강우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과 얼음의 전사들이 절망의 태양을 향해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꿀렁꿀렁!

마치 묵직한 무언가를 억지로 삼킬 때 목젖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불과 얼음의 전사들을 먹어 치우는 절망의 태양이 거듭 꿀렁꿀렁, 요동을 쳤다.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절망의 태양은 포식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전사들을 먹어 치웠다.

그러자 곧바로 검은 파리 떼가 절망의 태양에 달라붙었다. 검은 태양에 달라붙은 검은 파리 떼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다.

이강우는 그런 절망의 태양에 붉은 뿌리 하나를 심었다.

‘한 번으로 끝낸다.’

이강우가 만들어낸 거의 대부분의 마력을 머금은 절망의 태양, 그 태양을 양분 삼아 자라난 붉은 뿌리는 시커멓기 그지없었다.

검은 뿌리!

이강우가 그 검은 뿌리를 뽑아냈고, 이강우의 의지에 따라 검은 뿌리는 창이 되었다.

“후우!”

그제야 앞서 들이마신 숨을 토해낸 이강우. 숨을 쥐어짜내듯 토해내면서, 마력도 쥐어짜냈다. 버닝 마나로 증폭된 마나 대부분을 사용했다. 이번에 쓰는 마법이 오늘 마지막 쓰는 마법이 될 것이다.

파지지직!

그 마지막 마법은 7서클 마법, 섬광이었다.

섬광을 머금은 검은 뿌리가 검은 뇌전(雷電)이 되었다. 여기서 이강우는 숨을 멈췄고, 불꽃의 벽 너머를 향해 창을 던졌다.

꽈릉!

뇌성(雷聲)이 울려 퍼졌다.

* * *

꽈릉!

뇌성과 함께 벽을 뚫고 나온 섬광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바노프의 가슴을 관통했다.

이바노프, 그의 가슴팍에 시커먼 구멍이 생겼다.

충격은 컸다.

‘큭!’

더 이상 이바노프는 불꽃을 토해내지 못했다. 그가 만든 불꽃벽도 더 이상 복구되지 않았다. 구멍이 뚫린 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바노프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전부 뽑아냈구나!’

이강우가 엄청난 걸 준비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리 만무했다. 이강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일격을 준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다려 줬다. 모든 것을 써버리고,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이강우를 손쉽게 제압하기 위해서.

물론 이렇게 쉽게 자신의 가슴팍에 구멍이 생길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위력적일 줄은 몰랐다.

‘야크센의 그릇이 될 만하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츠무는 가슴이 뚫린다고 죽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이바노프는 만족했다.

이제 남은 건, 이강우가 자결을 하기 전에 잽싸게 그를 제압하는 일만이 남았다.

때문에 이바노프는 기대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음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이강우의 얼굴을. 이바노프는 그 표정을 뇌리에 각인시킬 생각으로, 뻥! 뚫린 불꽃벽 너머의 이강우를 바라봤다.

그런 이바노프의 눈에 비친 이강우는…….

‘놈!’

담담했다.

이강우가 짓고 있는 표정, 그 어디에도 절망 가득한 표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게 보였다.

끼이, 끼이!

앞서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재해 현장에서 사용되는 이동용 로봇이 마치 애완견처럼 이강우의 발치 근처로 다가온 게 보였다. 전투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놈이다.

그 로봇이 공을 물고 온 개처럼, 이강우 앞에 큼지막한 구슬을 내려놓았다.

이강우가 그 구슬을 손에 쥐었고, 그대로 이바노프를 향해 걸어왔다.

‘자포자기한 건가?’

이바노프는 그런 이강우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푸른 불꽃이 이강우를 덮쳤다.

푸슈슈!

푸른 불꽃은 곧바로 사라졌다.

이강우의 몸에 닿기도 전에,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바노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무슨!’

자신의 마법이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흡수나 파괴된 게 아니라 그냥 사라졌다.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그냥 풀려버렸다.

놀란 이바노프가 팔을 휘둘러 불꽃을 조종해 이강우를 휘감았지만, 소용없었다. 이강우는 넘실거리는 푸른 불꽃을 가뿐하게 지워내며, 이바노프를 향해 달려왔다. 이바노프는 그런 이강우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관통돼서 살아남을 순 있다. 그러나 멀쩡할 순 없다.

‘큭!’

도망치지 못하는 이바노프, 달려오는 이강우, 그 둘 사이의 거리는 금방 지척이 됐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됐다.

그런 거리가 됐을 때.

퍽!

이강우의 주먹이 이바노프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바노프가 통나무처럼 굳은 채로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넘어진 이바노프, 그런 이바노프의 몸에 올라탄 이강우가 그의 뻥 뚫린 가슴 구멍에 구슬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꽉 물지 마. 이빨을 다 털어 버려야 하니까.”

* * *

신록.

초월적,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던 그 괴물과 싸웠을 때 이강우가 깨달은 사실은 하나였다.

‘마법으로는 안 된다.’

마법.

정말 놀라운 힘이었다. 기껏해야 맨몸으로는 늑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인간도 마법의 도움을 받으면, 초월적인 괴물을 단신으로 상대하는 게 가능했다.

그래서 인류는 마법에 집착했다. 마법이 인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화시키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법으로 바츠무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강우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신록, 2등급 몬스터에게조차 통하지 않는 마법이란 무기로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바츠무를 무찌르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바츠무는 거리낌 없이 마법을 자신들이 종말로 몰아갈 문명에 줄 수 있었다. 마법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츠무로부터 멸망당한 문명의 주인들도 알고 있었다.

바츠무의 영생을 위해 종말을 맞이한 이름 모를 문명은 이강우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마법이란 무기를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그것으로는 종말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때문에 그들은 반대로 접근했다. 마법이란 무기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그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물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산은 이강우의 차지가 됐다.

어찌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연이며, 행운이다. 혹은 마땅히 심판이라 할 수 있을 터.

바츠무, 그들의 탐욕에 대한 마땅한 심판이었고, 이강우는 그들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때문에 이강우는 2등급 모래시계문의 클로즈를 마치는 순간, 머릿속으로 오직 하나만을 그렸다.

‘놈들에게서 마법을 빼앗는다.’

그 시나리오가 지금 완성됐다.

* * *

타앙!

강렬한 총성이 크로포드의 고막을 두드렸다. 그 총성을 듣는 순간 크로포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크로포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끝났구나.’

저 총성은 단말마다.

인류 그리고 지구를 먹어 치우고자 했던 외계 혹은 이계의 존재가 죽음을 맞이하며 내뱉는 단말마.

‘성공했군.’

동시에 이강우, 그가 반격 그리고 복수의 성공을 축하하는 폭죽 소리이기도 했다.

‘대단한 놈이야.’

옅은 미소를 지은 크로포드는 곁눈질로 자신의 잘려나갔던 팔을 바라봤다.

그의 팔은 지금 놀랍게도 그의 어깨에 붙어 있었다. 팔을 붙여준 건 이강우였다. 과거, 제대로 된 치료 마법을 쓰지 못해 지인의 부상을 지켜봐야만 했던 이강우는 그 이후 본격적으로 치료 마법을 배웠다.

물론 그래도 이강우가 할 수 있는 건, 간신히 붙이는 정도였다. 김수애처럼, 당장 손가락을 움직일 정도로 완벽한 치료 마법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팔이 썩는 것만을 막았을 뿐이다. 그마저도 이후 추가 조치가 없다면 공염불이 될 터.

하지만 크로포드는 치료를 위해 발걸음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이강우가 향했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이제 남은 건 문을…….’

2등급 모래시계문을 확보했다. 그럼 곧바로 문을 닫기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한다.

물론 그 문에는 결국 이강우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강우가 이번 계획에 포함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강우로 시작해서 이강우로 끝날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는 로드리게스 회장일 것이다.

‘재주는 이강우가 부리고 돈은 로드리게스 회장이 벌고, 참으로 빌어먹을 세상이지.’

여러모로 이강우가 대단해 보인다.

만약 노벨 평화상을 주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이강우가 받아야 할 것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크로포드의 머릿속에 그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무렵.

타앙, 타앙!

갑자기 총성이 거듭 울렸다.

‘응?’

타앙, 타앙!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이강우는 탄창이 빌 때까지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그 거듭된 총성에 크로포드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크로포드는 당황했다. 이강우가 굳이 저렇게 총성을 터뜨린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상대를, 표적을 아직 제대로 죽이지 못했거나 혹은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시체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는 중이거나.

무엇이든 좋은 건 없다.

크로포드가 고통이 가득한 몸뚱이를 이끌고 전진했다. 귀찮은 건 질색이고, 아픈 것도 질색이지만, 그런 건 지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크로포드가 모래시계문이 있는 방에 닿기도 전에 이강우가 먼저 등장했다. 이강우는 굳은 표정으로 크로포드를 향해 말했다.

“가짜입니다.”

바츠무.

그들은 뱀보다 더 비열한 자들이었다.

* * *

강희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이 보였다. 총탄으로도 뚫리지 않는 특수 유리, 그 너머에 그도 잘 아는 얼굴이 보였다.

뱀의 머리를 가진 자.

그런 그의 머리에는 검은 문양이 가득했다. 그런 얼굴을 가진 자는 모든 세계를 통틀어 하나였다.

“뮤.”

뮤.

지구로 넘어온 네 번째 바츠무.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자였다.

때문에 그는 계획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오직 하나, 동족이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 것이었으니까.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바츠무를 데려가야 할 때, 이제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할 때, 그때가 그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 그가 지금 강희 앞에 등장했다는 건, 둘 중 하나다.

계획대로 문이 열리고, 이제는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

혹은.

“이바노프가 죽었군.”

아주 큰 문제가 생겼거나.

동족의 죽음은 그 어느 것보다 중대한 사건이다. 영생을 추구하는 바츠무족은 영생만이 종족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탄생은 없었다.

영생을 추구한 대가였다. 종말의 뱀 시이, 그 괴물의 피와 살점을 먹은 대가로 그들은 뱀이 되었고, 영생을 얻었으며, 자신들의 후손을 만들 능력을 잃었다.

그래서 대적자 야크센을 두려워했다. 대적자는 바츠무족의 권능인 마법을 이용해 바츠무를 먹어 치우는 자였으며, 불멸의 영혼을 가진 자였으니까. 그에게 먹힌다는 것은 바츠무족이 멸종과 가까워진다는 의미다.

어쨌거나 강희는 뮤의 등장을 이바노프의 죽음과 연결시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한에 있는 모래시계문은 가짜이니까.

물론 단순한 가짜는 아니다. 그것은 문이 맞다. 굳이 말하면 투입구였다.

그곳에 마력을 투입하면 다른 곳에 숨겨진 진짜 2등급 모래시계문에 전달되도록 설정을 했다.

이제 좀 더 지나면 마력이 차오른 문이 열릴 터.

반대로 말하면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뮤는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린 후에 등장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등장했다는 건 특별한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

“기어코 이바노프가 대적자와 대적했군.”

그리고 강희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미련하면서도 용감해.”

이바노프는 야크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적개심이 더 강한 자였으니까.

그는 야크센이 동족을 먹어 치우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그저 들었을 뿐. 바츠무는 영생을 사는 만큼, 오만하다. 그들은 직접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이 그리 강하지 않다.

하물며 호전적인 성정이며, 바츠무족 내에서도 오롯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의 입장에서 야크센은 처치하는 것은 곧 자기 존재의 과시와 다름없었을 터.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신은 조금도 탈이 나지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자랑을 할 속셈이었겠지.

그때 뮤가 유리방에 손바닥을 댔다. 뱀 비늘로 뒤덮인 그의 손이 단숨에 유리창을 부쉈다. 그 무엇으로도, 포탄조차도 나름 버틸 수 있는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바노프가 당했으니, 일단 강희부터 탈출시켜야 한다. 마르쿠스 역시 이미 피신을 했을 것이다.

그런 강희에게 뮤가 말했다.

“대적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 말에 강희가 석상처럼 굳었다. 석상처럼 굳은 강희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정말인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악몽을 떨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군.’

그리고 강희는 지금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 * *

가짜.

이강우는 북한이 숨기고 있던 모래시계문이 가짜라는 걸 파악하는 순간 오직 한 명을 떠올렸다.

‘강희.’

시간이 없다.

또한 단서도 없다.

모두가 당연히, 마땅히, 북한이 가진 모래시계문이 진짜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다른 경우의 수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모두가 오직 북한만을 잡을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함정이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북한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북한을 처리하고 싶으니까. 권력자들이 전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오히려 허를 찔렀다.

모두가 당연히 북한이 그런 짓을 하리라 생각하고, 모두가 북한만을 당연히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권력자들이라면 없는 이유를 붙여서라도 북한을 처리하고 싶어 할 테니까. 아마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북한에 있는 것이 가짜다, 북한도 속았다, 북한이 이용당했다, 그런 근거가 있어도 무시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다음은 없다.

그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한 단서이자, 접점이자, 가망성은 강희, 그의 존재가 전부였다.

그를 통해 어떻게든 닿아야 한다.

그 신념 하나로, 이강우는 전속력으로 평양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장 강희가 갇힌 비밀 수감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이강우를 반긴 건 강희가 아니었다.

“탈출했습니다.”

이제까지 수감 자체가 장난이었다는 듯, 강희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곳에 영상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강우, 당신을 위한 영상인 듯합니다.”

그 대신 영상 하나가 그를 대신해 남아 있었다.

* * *

영상 속의 강희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오랜 수감 생활 그리고 고문까지 받았으니, 흐트러진 모습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달랐다. 뱀처럼 갈라진 그의 눈빛은 번쩍였다. 마치 왕이 거지의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연기.

그에게 흐트러진 모습은 그저 연기를 위해 입은 가죽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영상 속 강희가 이강우를 향해 말했다.

-이강우, 설마 당신이 정말로 야크센의 힘없이, 자신의 힘으로 문을 넘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칭찬이었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거 하나 없는 칭찬.

-더 놀라운 건, 여전히 당신이 야크센에게 자신을 넘겨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야크센에게 자신을 넘기지 않은 채로 이바노프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에 대해서는 슬픔보다는 오히려 기쁨마저 느껴질 지경입니다.

그런 강희를 보는 순간 이강우는 직감했다.

‘바츠무였구나.’

강희.

그가 바츠무, 본인이었다. 바츠무에게 세뇌를 당하거나, 넘어가거나, 그들에게 설득당한 채,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본인이 바츠무의 일원 중 하나였다.

빠드득!

이강우가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영상을 본다면, 이 부근쯤에서 내 정체를 알았을 것 같군요.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자면, 저는 이강우 씨 정체를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불사황제 야크센의 그릇이 당신이란 걸, 의외로 일찍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강우는 여기서 섬뜩함을 느꼈다.

‘나를 알고 있었어?’

이강우가 야크센의 그릇인 걸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그냥 이대로 놔뒀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대적자인 자신의 성장을 그저 두고 봤다는 건가?

‘왜?’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대적자를 죽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속에 있는 그것이 영원토록 사라지는 게 내 꿈입니다.

강희가 그 이유를 말해줬고, 이강우는 강희의 말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릇째로.’

야크센.

그의 영혼은 불멸이다. 그는 바츠무가 여러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듯, 본인도 영혼인 채로 여러 세계를 넘나든다. 물론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세상을 넘나들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런 야크센의 영혼이 지금 이강우의 몸속에 있다. 그러니까 이강우는 그릇인 것이다.

이런 야크센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릇째로 종말의 뱀이 있는 세상에 던져 놓을 속셈이군.’

종말의 뱀 시이.

그 괴물만큼은 바츠무족도, 야크센도 어찌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은 어찌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까.

‘내가 이대로 종말의 뱀이 있는 세계로 넘어가기를 원하고 있어…….’

그렇기에 야크센의 목적 역시 종말의 뱀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종말의 뱀이 등장하기 전에 바츠무를 먹어 치우는 것이지.

당연히 야크센은 이 세상에 2등급 몬스터가 등장하는 순간 이 세계를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할 것이다.

2등급 몬스터가 지구에 등장하는 순간 그것이 시체가 되더라도 그 시체를 먹어 치우기 위해 종말의 뱀이 지구에 올 테니까.

반대로 2등급 몬스터가 지구에 등장하는 순간 바츠무의 역할은 끝이다. 그들은 종말의 뱀이 모든 식사를 마칠 때를 다른 세계에서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이강우는 다르다.

그는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다. 이 세계에는 그에게 전부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리고 이강우는 준비가 됐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칠 준비가.

강희가 이강우가 이강우로 남아 있음을 기뻐하는 이유였다.

-제가 무슨 제안을 할지, 이미 짐작하셨겠지요. 그래도 말은 하겠습니다. 1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곳에 스스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을 처리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2등급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종말의 뱀이 이곳에 올 이유는 없습니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죠. 문만 닫으면 됩니다.

야크센과는 거래할 수 없지만 이강우와는 거래할 수 있으니까.

-이건 나름 파격입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들이 2등급 모래시계문을 찾는 건 불가능할 터. 찾았다면 이 영상을 보는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우리들 입장에서는 조금만 더 참으면 됩니다. 참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이 세계의 존폐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이 세계의 종말보다 불사황제의 죽음이 더 간절할 뿐. 그렇기에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바츠무 입장에서도 나름 엄청난 각오 끝에 나온 제안이었다.

그들은 이미 손에 넣은 것을 오로지 한 명의 죽음을 대가로 포기하고자 하는 거다.

-이 세계의 존립을 위해 오직 한 명만 죽으면 됩니다.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이루어진 작업이 눈속임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결국 그곳에서 주입한 마력은 진짜 모래시계문에 닿았습니다. 약간의 시간차가 있겠지만, 그 시간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고민을 내리고,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강희의 말 그대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파격이다.

바츠무, 그들이 이제껏 투자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야크센의 죽음만을 원하고 있다.

이강우만 희생하면, 세계는 무사하다.

‘죽음은 각오했다.’

물론 이것이 함정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강우가 문을 넘는다고 그들이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알려줄 확신은 없다.

또한 문의 위치를 안다고 해서, 그 문을 클로즈 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이 모든 게 마지막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의 말과 다르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강우의 선택에 따라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수도, 피할 수도 있다는 것.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이강우는 고뇌했다.

‘나 혼자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그렇게 고뇌하는 이강우에게.

-아마 결정이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믿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렴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우리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에게 좀 더 확실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상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강희가 비수를 꽂았다.

-당신의 동료들을 구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을 보기 싫다면, 우리의 제안을 받으십시오.

그 순간 이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리야!”

* * *

블리자드 리자드가 쓰러진 건, 7월 1일, 새벽이 된 이후였다.

블리자드 리자드가 죽은 땅은 한여름에도 지독한 한기가 남을 정도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블리자드 리자드에 의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이가 죽었고, 재산 피해는 가늠하는 것 자체가 끔찍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서글픈 건 그 피해를 추스를 시간과 여유조차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한군과 몬스터가 무너진 평택 전선을 뚫기 위해 다시금 전력을 다해 달려들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이란 국가가 가진 대부분의 전력은 그들을 막는데 투입됐다.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제한적이었다.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지만, 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살 수 있는데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 무리에 채유리가 있었다.

심각한 동상을 입은 그녀의 오른팔, 그냥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의 팔을 치료하기 위해 김수애가 달라붙었다. 김수애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를 치료하고 있었다.

김재범이 그 상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젠장, 그냥 거기서 왜 나서서…….”

채유리는 나름 열심히 시간을 끌었다. 블리자드 리자드를 상대로 아이스 큐브 마법을 이용해, 놈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놈을 끝장내기 위해 비수와 명궁이 나섰다. 명궁이 빛화살로 블리자드 리자드의 몸에 구멍을 내는 사이, 비수가 요리조리 움직이며, 블리자드 리자드의 몸뚱이에 상흔을 하나둘씩 쌓았다.

차근차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6서클 마법사들은 서두르지 않은 채 블리자드 리자드를 잡고자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수가 위기에 빠졌다. 블리자드 리자드 때문에 미끄러워진 빙판에 넘어졌다.

결국 그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달려드는 블리자드 리자드를 막기 위해 채유리가 나섰고, 그 결과물이 지금 이 결과물이었다.

비수는 목숨을 구했다. 채유리도 죽진 않았다.

대신 그 둘이 사는 대가로 채유리의 팔이 블리자드 리자드의 숨결에 노출됐다.

차라리 깔끔하게 팔이 잘려나갔다면 오히려 치료가 쉬웠을 것이다. 그냥 붙이면 된다.

하지만 동사한 팔은…….

“제 치료는 임시방편이에요.”

김수애도 어찌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설비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결국 그녀의 입에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나왔다.

‘여기에 본격적인 설비가 있을 리 없잖아?’

마법 치료를 위한 본격적인 설비를 갖춘 병원은 오직 서울에만 있다.

즉, 평택에서 서울까지 이동해야 한다는 거다. 당연히 그 누구도 이런 상황까지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일은 터졌다. 여기서 채유리의 팔을 잃을 순 없다. 그녀에게도 안된 이야기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을 잃은 그녀는 영영 전투에 투입되지 못 한다.

김재범이 곧장 안중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유리가 다쳤습니다. 동상입니다.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할 텐데, 준비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따로 준비할 건 없습니까?”

-초콜릿이 필요할 것 같군.

그 순간.

“아.”

김재범이 잠깐 뜸을 들인 후.

“곧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십시오.”

대답을 마쳤다.

대답을 마친 김재범이 소리쳤다.

“서울로 갑시다!”

* * *

헬기 한 대가 병원 옥상에 착륙했다. 헬기에서는 채유리가 가장 먼저 내렸다. 그녀는 곧장 치료를 위한 수술실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하나둘 포식자 멤버들이 내렸다.

그런 그들이 반긴 건 안중현이었다. 안중현은 채유리의 뒤를 이어 내린 김재범과 악수를 했다.

“잘 있으셨습니까?”

김재범과 악수한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하선우가 악수를 했다.

세 번째는 김수애였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미소를 방긋, 지으며 안중현에게 손을 내밀었고, 안중현이 그 손을 잡았다.

잡았고.

동시에 당겼다.

안중현은 자신을 향해 넘어지듯 쓰러지는 김수애의 발목을 발로 찼다. 김수애가 휙! 각목처럼 바닥에 넘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바닥과 부딪치며 찢어졌다.

안중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그녀의 팔을 꺾었다.

“아악!”

뼈가 부러질 정도로 꺾었다. 어쩌면 인대나 근육이 손상됐을지도 모른다. 김수애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안중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수갑을 이용해 그녀의 두 팔을 묶었다. 형사 출신답게 그 솜씨가 대단했다. 그렇게 두 팔을 묶은 후에 무릎으로 그녀의 척추를 눌렀다.

“아아…….”

김수애가 탄식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안중현이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넘버스 멤버 소속 넘버원. 강희와 무슨 거래를 했고, 무슨 음모를 꾸몄는지 말해라.”

“무, 무슨 말이죠?”

“몬스터 고기가 아니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게 놈과 손을 잡은 이유의 전부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그게 무슨…….”

“치료를 하면서 독을 쓰고, 너 스스로 요리를 자처한 것도 독을 먹이기 위한 수작이었겠지?”

“당신은…….”

“더 이상 강희, 네놈에게 선택을 강요받지 않겠다.”

김수애는 입을 다물었다.

안중현은 그런 그와 대화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걸 그녀는 알았으니까.

그때 안중현이 김재범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의 연기를 해준 김재범이 한마디 했다.

“전 처음부터 저 여자를 의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런 여자가 대장이 좋다고 달라붙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강우가 들었으면 퍽 가슴 아팠을 이야기.

“해독제는 구비했습니다. 독이 빠지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죽는 건 피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섬뜩한 독이었습니다. 미리 안 선배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해독제는 못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김재범이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아니 이강우를 구했다.

“그보다 대장은 어디 있습니까? 대장도 해독제가 분명 필요할 겁니다.”

그런 김재범의 반문에 안중현은 이를 꽉 물었다.

‘가족은 걱정하지 마라. 오로지 너 자신만 걱정해라.’

이것으로 안중현의 역할은 끝이 났다.

남은 건 이강우, 그의 선택뿐이다.

* * *

전쟁이 시작된 이후, 서울 삼성동은 고요했다. 거대한 빌딩의 숲은 진짜 숲처럼 적막하고, 고요했다. 자동차가 한 대도 움직이지 않는 도로는 음산하기까지 했다.

그 도로 위에 한 사내가 멀뚱히 서 있었다. 사내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땀이 너무 흘러, 마치 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사내 앞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새는 아니었다. 날아온 것은 헤이스트 마법을 쓴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등장하자, 사내는 제 옷으로 얼굴을 닦았다.

“오래 기다렸나?”

“아뇨, 조금 전 왔습니다.”

“유리는 괜찮다.”

“다행이군요.”

이강우와 안중현.

그 둘이 즈믄나래 본부 빌딩 앞에 섰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이 만남의 장소가 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자리 자체가 만남을 위한 만남이 아니었다. 그들은 헤어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강우, 그는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을 고르든,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그렇다면 세상을 위해 죽는 게 나았다.

강희,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 야크센을 품은 채로 1등급 모래시계문에 홀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안중현에게만 말해줬다. 안중현과 의논을 했다.

“설마 그녀가…….”

그제야 안중현은 김수애의 가면을 벗겼다.

이강우도 처음 알았다. 설마 김수애가 강희의 스파이였을 줄이야? 심지어 그녀가 동료들에게 조금씩 독을 먹였다는 사실은 기겁할 만한 사실이었다.

안중현이 그걸 막았다.

덕분에 이강우는 최소한 자기 의지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일찍 눈치를 채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안중현이 아니었다면 그는 무조건 강희 말을 따랐을 것이다.

동시에 안중현 덕분에 이강우에게는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이강우는 그 시간의 일부를 안중현과의 만남에 할애했다.

헤어지기 위한 인사를 하기 위해서.

“미안하실 건 없습니다. 그보다 절 받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말을 뱉은 이강우가 다시 한번 얼굴을 닦았다. 땀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알 순 없었다.

알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너와 알게 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강우에게 정말 빛을 준 건, 야크센이 아닌 안중현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이강우가 야크센의 힘을 빌려 여기까지 오는 게 가능했을까.

자신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치 않은 그는 이강우에게…….

모르겠다.

뭔가 많은 말을 하게 될 것 같았는데, 시시껄렁한 농담이라도 나눌 것 같았는데, 이강우는 이 순간 과연 안중현을 향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말이 안 나오네요.”

“나도 말문이 막히는군.”

죽음은 각오했는데, 그 사실보다는 안중현에게 무언가 제대로 헤어지는 인사를 남길 수 없다는 게 더 속이 쓰렸다.

그런 이강우에게.

“받게.”

안중현이 무언가를 던졌다. 검은 봉지, 그 안을 가득 채운 것.

“초콜릿이군요.”

“우리끼리 알게 된 지 꽤 오래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좋아하는 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이강우는 피식, 웃었다.

초콜릿.

“이것도 오랜만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초콜릿을 안 먹은 지 꽤 됐다. 평소에는 주머니 가득 채워 넣고 다니던 게 초콜릿이었는데 말이다. 이강우가 봉지 속 초콜릿을 바라봤다. ABC초콜릿이 보였다. 언제나 주머니 가득 채우던 녀석, 이강우가 재차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거다.

이강우, 앞으로 이 세상을 위해 유적으로 떠나는 그에게 필요한 건 그 어떤 무기도 아니라 이 초콜릿이다.

이강우는 곧바로 봉지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진짜 대단한 거 알려 드릴까요? 조금 전까지 전 평양에 있었습니다. 평양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삼성동 거리에서 이렇게 조용하게 초콜릿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초콜릿 덕분인지, 막혔던 말문이 풀렸다.

“그보다 맛있네요.”

“원래 초콜릿은 맛있지.”

정말 멋진 단맛이다.

많은 맛있는 몬스터를 먹었지만, 결국 이강우는 이것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안중현이 그런 이강우에게 말했다.

“거래는 어디서 할 생각이지?”

“이제부터 모든 건 혼자 할 겁니다. 제가 우려하는 건 놈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입니다.”

“포기하긴 이르다.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2등급 문만 찾으면 우리의 승리다.”

그 말에 이강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즈믄나래 빌딩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다.

지금 당장에라도 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은 없다. 이미 앞서서 2등급 모래시계문에서 살아남은 이강우 아닌가?

그렇기에 놈들은 아주 꽁꽁, 그 누구도 모르는 곳에, 상상하기도 힘든 곳에 문을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르는 곳 오직 강희, 그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숨겨 뒀을 것이다.

“제시간 내에 찾기 힘들 겁니다.”

“당장 포기하긴 이르다.”

사실 안중현은 이강우를 설득하고자 했다. 세상을 위해 그가 희생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강우가 희생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방법이 있는데, 시간이 조금이나마 남았는데, 최후까지 발악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이강우의 희생에만 모든 걸 건다는 건, 안중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문은 작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만한 크기의 문을…….”

안중현이 손가락으로 즈믄나래 빌딩을 가리켰다.

“저 정도 크기의 문을 숨기는 게 쉬울 리 없다. 저 정도 크기라면 위성으로도 잡을 수 있다.”

“그렇긴 하죠.”

틀린 말은 아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은 분명 거대하다. 즈믄나래 빌딩과 비슷한 크기다.

그런 걸 어딘 가에 몰래 숨긴다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불가능한…….

“형.”

……일일 것이다.

“응?”

“즈믄나래 빌딩은 원래 있던 빌딩을 리모델링한 겁니까?”

“아니,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새로 세운 거로 알고 있다.”

“왜 새로 지었습니까?”

“그야…….”

안중현이 기억을 되돌렸다.

블랙 스택 지부인 즈믄나래의 설립은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파격이었기에 설립이 승낙된 된 이후에도 논란이 있었다. 그런 논란 속에서 즈믄나래는 굳이 삼성동에 새로운 즈믄나래 빌딩을 세웠다.

일종의 과시였다. 자신들이 가진 역량,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나름 비싼 축에 속하고,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땅에 자신들의 상징을 지어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

‘정말 과시를 위해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과시가 이유일까?

안중현이 기억을 돌렸다. 즈믄나래 본부 빌딩은 한국과 블랙 스택의 협상이 발표되기 전부터 지어졌다.

장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즈믄나래 설립이 기획되는 순간 곧바로 즈믄나래 본부 빌딩이 운영됐으니까. 빌딩이 컵라면도 아니고, 며칠 공사한다고 지을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공사 과정은 짧지 않았다.

물론 그 공사 과정이 드러난 적은 없었다. 이곳에 빌딩이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그냥 빌딩이 지어지는구나, 그게 사람들의 생각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순간 안중현과 이강우는 생각을 시작했다.

‘평양에 가짜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마력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은 가짜가 아니다. 마력을 확보했다면, 그걸 운반해야 할 터.’

‘운반을 고려한다면, 문을 숨기더라도 평양에서 가까운 지역에 숨겨두었을 수밖에 없어.’

‘북한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북한 근처에 무언가를 숨길 수밖에 없으니까.’

‘중국 아니면 한국이다. 바다 건너 일본은 힘들어. 평양에서 중국 국경까지도 너무 멀다.’

‘북한 본토 내에는 건물이 많지 않다. 땅속에 숨긴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냥 드러낸 채로 숨긴다면, 건물이 많은 곳, 그것도 빌딩이 많은 곳이 제격일 수도…….’

‘나무를 숨기려면 숲속에.’

‘자신의 발치 아래라면 잊어버릴 일도 없지.’

이강우와 안중현이 동시에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 * *

콰앙!

굉음이 터졌다. 강희는 그 굉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의 양옆에는 마르쿠스와 뮤, 둘이 있었다.

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즈믄나래 빌딩이 무너지는 과정을 바라봤다.

강희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저들을 방해하면…….”

강희의 말에 마르쿠스가 반문했다.

“당장 우리에게 저들을 막을 힘이 없다. 인정해라. 우리의 패배다. 우리가 나서면 우리는 죽는다. 이바노프를 잃은 것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 잃을 순 없다.”

“악몽을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저기 있어!”

그때 뮤가 강희의 머리를 잡았다. 그 순간 강희의 두 눈동자가 사라졌다. 흰자만이 남았다.

강희는 기절했다.

마르쿠스가 그런 강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흔들고는 다시금 즈믄나래 빌딩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실패.

오랜 세월 그리고 많은 것을 투자한 계획이 실패했다.

물론 다시 도전할 것이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 그 세계를 종말의 뱀에게 바칠 것이고 그 대가로 다시 영생을 손에 넣을 것이다.

영생을 품은 이상, 그들은 거듭 도전할 것이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결과였던 거지.’

거듭 도전하기에, 언젠가 다시 실패할 것이다. 실패하면, 다시 한번 동료를 잃을 것이다.

‘변화하지 못한다면 결국 멸종을 맞이할 수밖에.’

마르쿠스, 그는 바츠무족의 미래가 참담하다,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강희만큼은 살아남기를 원했다.

“변화하고자 한 강희만이 우리 종족의 미래가 되겠지. 그를 살리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말에 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대답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처음에 문을 열고, 끝날 때 문을 닫는 것, 그뿐이다. 마르쿠스가 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문을 닫고, 무대에서 퇴장할 때가 왔군.”

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건물이 포격 앞에 무너지고, 거대한 모래시계문이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츠츠츠!

모래시계문에 달린 모래시계는 여전히 모래알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은 모래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곧장 사람들이 달라붙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 앞에 한 사내가 섰다.

“이강우, 혼자 들어가도 괜찮겠나?”

“시간이 없잖습니까?”

안중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려했다. 아무리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한 전적이 있다고 해도 2등급 모래시계문을 혼자서 들어가는 게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런 그의 표정에 이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구입니까?”

그 말과 함께 이강우가 주머니에 넣은 ABC초콜릿을 다람쥐가 도토리 까먹듯, 까먹었다.

초콜릿을 입에 머금은 그가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포식자…… 유적 포식자 이강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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