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64화 (64/66)

64화. 6월 25일

안중현은 특수 제작된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 강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둘의 모습은 그때와 다르게 여러모로 망가져 있었다.

아무리 의법사를 통해 치료를 받았다고는 하나, 온몸에 화상을 입었던 안중현의 얼굴 곳곳에는 화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여러모로 질 나쁜 고문을 받은 강희의 모습 역시 엉망이었다.

하지만 안중현, 그의 눈빛만큼은 이곳에서 첫 번째로 만났을 때보다 견고하고, 강렬했다.

아니, 그때 그 이상이었다. 유리벽 너머의 상대와 대화를 가능케 해줄 수화기를 든 안중현은 적을 바라보는 짐승처럼, 살의와 적의를 듬뿍, 자신의 목소리에 담았다.

“강희, 네 배경은 외계인인가?”

안중현은 많은 게 궁금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건 결국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다.

사람이 한 짓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결국 안중현은 이 모든 게 외계인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지구의 역사와는 동떨어진 다른 역사를 품은 자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건 분명할 테니까.

안중현의 그 말에 초점 없는 눈동자를 품고 있던 강희가 무기력한 모습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난 모든 정보를 토해냈습니다. 나는 내 배후가 누군지 모릅니다. 단지 따랐어야 했을 뿐입니다.”

힘없는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굉장했다.

그러나 안중현은 그 목소리에 넘어가지 않았다. 안중현은 즈믄나래를 운영하면서, 강희가 겉보기와 다르게 얼마나 지저분한 일들을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빌어먹을 새끼.’

더불어 놈이 숨긴 수작을 알아냈다. 놈이 얼마나 비열한 놈인지 그리고 용의주도한 놈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안중현이 이곳에 온 것이다.

“마지막 기회다. 정말 숨기고 있는 걸 뱉어라.”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니다. 안중현은 강희를 용서해줄 생각도 없고, 안중현은 그를 용서해줄 자격 같은 것도 없다. 마지막 검증을 위해서, 이곳에 왔다.

“나는 모든 걸 말했습니다.”

“북한.”

반응.

“북한과 접촉했지?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북한에 숨겨두었겠지.”

말을 뱉은 안중현은 강희의 반응을 봤다. 강희는 북한이란 단어에 어떤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무기력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입니다.”

안중현은 강희의 모습을 더더욱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눈빛, 입꼬리, 눈꼬리,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었다. 강희의 얼굴에서 그의 진심을 읽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느꼈다.

강희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 형사 출신인 안중현의 감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설마…… 북한이 아닌 건가?’

문제는 그 연기가 놀란 자신의 가슴을 달래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연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안중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서 다시는 나올 일이 없을 테니, 상관없는 일이겠지.”

* * *

“대통령께서 언질을 주셨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말과 함께 소파 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크로포드를 바라봤다.

크로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쌕쌕, 콧소리를 내며, 누가 보더라도 꿀맛 같은 잠을 자는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그런 크로포드를 발로 툭툭 찼다. 듬직한 수준을 넘어서 조금은 무시무시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체격을 가진 로드리게스 회장이 크로포드를 발로 차는 광경은 꽤 험악하게 보였다. 크로포드는 그런 로드리게스 회장의 발길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라. 깨어 있는 거 알고 있다. 잠귀 밝은 크로포드, 자네가 이런 상황에서 잘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크로포드는 자는 척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로드리게스 회장의 지적에도 계속됐다. 아마 세상에서 로드리게스 회장을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크로포드가 유일할 것이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실소를 머금었다.

“별수 없군. 자네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 한 마디에 크로포드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바쁘실 텐데 그럴 시간이 있으십니까?”

일어난 크로포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일어났군.”

“할 말만 하고 끝냅시다. 정말 지금은 피곤합니다.”

“자네가 피곤하지 않은 적이 과연 있는지 궁금하군.”

“만화책 볼 때는 이러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느 때보다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납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 할 말만 하고 끝내도록 하지. 조만간 대통령께서 서명을 하실 걸세.”

미합중국 대통령의 서명.

그 누구의 서명보다 무게감이 넘치는 서명이다.

“북한을 향한 전방위 공세가 시작될 걸세.”

하물며 그 서명이 북한을 향한 서명이라면…….

“언론사들이 좋아할 만한 일이군요. 24시간 내내 뉴스만 틀어도 부족할 테니까.”

세상이 기겁할 것이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우리 편일세.”

심지어 이번 일에는 중국이 북한의 편이 아닌 미국의 편을 들 예정이었다.

“용케 포섭했군요.”

“바보가 아니라면, 핵폭탄보다 더 무시무시한 괴물을 손에 쥔 놈들의 후견인을 자처할 이유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위스프 테러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 간부가 무려 열두 명이나 죽었네. 스무 명이 부상을 입었고, 테러로 인한 재산과 인명 피해는 엄청났지. 그런 위스프와 북한이 긴밀한 관계라면, 중국은 북한에 대한 마땅한 응징이 필요하지.”

북한의 처리는 곧 미국과 중국의 권력 싸움이기도 했다. 때문에 중국은 이 파워게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손익을 떠나 북한의 편을 들어줬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위스프가 중국 그리고 칠성문에 남긴 상처는 너무 컸다.

동시에 북한은 너무 위험한 상대와 손을 잡았다. 만약 북한이 2등급 모래시계문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무기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면, 그건 엄청난 문제가 될 테니까.

핵무기와는 전혀 다르다. 핵은 위협적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2등급 모래시계문이란 폭탄은 미국도, 중국도, 그 어느 나라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가진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위스프의 전력이 예상외로 너무 강했다. 북한이란 나라가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전력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파워게임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고개를 숙이더라도 북한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곧장 쳐들어가는 겁니까?”

“일단 단서를 확보해야지. 북한이 위스프와 접점이 있다는 단서를 말이야.”

“그게 가능합니까?”

“마법으로 안 되는 건 없네.”

“단서를 확보하면?”

“대통령께서 서명을 하시는 거지.”

“이야기가 자꾸 빙빙 도는 것 같은데,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그 서명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북한이란 단어를 역사책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될 걸세.”

크로포드는 그 말에 실소를 머금었다.

“더불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내 이름은 곳곳에 박힐 걸세. 북한이란 세기의 골칫거리를 제거하는데 내가 가장 뚜렷한 이름을 남기겠지.”

이게 로드리게스 회장의 목적이었다.

로드리게스 회장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마무리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대중에 공개된다면, 세상은 로드리게스 회장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동시에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명분만 주어진다면, 세계 최악의 골칫거리 국가조차도 무너뜨릴 권력을 쥐게 된 로드리게스 회장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재주는 사람이 부리고, 돈은 곰이 버는 격이군요. 그래서 제게 바라는 게 있습니까?”

“긴급한 상황에서 2등급 몬스터를 상대해줄 드림팀이 필요하네. 모래군주를 사냥했을 때보다 더 확실한 드림팀이.”

“거기 제가 들어가면 됩니까?”

“그냥 들어가는 거라면 여기에 직접 올 이유가 없지.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할 터. 자네가 그 팀의 리더가 되어주게.”

그 말을 들은 크로포드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일은 사양입니다.”

“괜한 문제가 생기면 더 귀찮아질 텐데?”

“그 문제가 생기면 가장 골치 아픈 건, 내가 아니라 로드리게스 회장, 당신 아닙니까?”

“그래서 싫은가?”

크로포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추고, 로드리게스 회장을 지그시 바라봤다.

“지금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맞춰볼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 나왔다.

그 질문에 로드리게스 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해보라는 의미.

“노벨 평화상 수상 소감문 작성을 어떤 전문가에게 맡길지, 그걸 고민하고 있지요?”

그 말에 로드리게스 회장이 옅게 웃었다.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네. 세계 평화를 위한 자네의 헌신을 세상은 잊지 않을 걸세.”

* * *

라미 하마드.

위스프의 서열 1위인 그는 그 길이를 알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정말 깊군.’

엘리베이터를 이렇게 오랜 시간 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중년 사내의 얼굴은 평범했다. 그냥 중년 사내였다.

하지만 라미 하마드는 그런 중년 사내에게서, 자신들보다 더 지독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라미 하마드가 고소를 머금었다.

‘많은 미치광이들을 만났지만, 이곳에 비할 바는 못 되겠군.’

위스프라는 세계적인 테러 조직의 서열 1위. 두말할 것도 없는 지상 최악의 악당이다. 이제까지 죽인 사람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상에 남긴 상흔은 역사에 남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라미 하마드의 폭력과 악의는 이곳, 북한이란 땅에서는 참으로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그런 하마드의 시선을 느낀 듯, 북한 조선인민군 특수부 소속의 리철기 대좌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는 매끄러운 영어가 흘러나왔다.

하마드가 대답했다.

“예, 정말 깊습니다.”

“본래는 핵이 터질 경우에 대비해서 마련해둔 장소였습니다. 그런 장소가 핵보다 더 위력적인 무기를 쓰게 해줄 무대가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 장소를 쓰게 될 날이 오는군요.”

“그보다 작업은 얼마나 진척이 됐습니까?”

“약속된 디데이가 7월 15일이었지요?”

“예.”

대답을 하는 하마드는 살짝 긴장했다.

‘설마 기한에 맞추지 못한 건가?’

디데이.

그건 문이 열리는 날을 의미한다.

모래시계문을 열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력을 가장 빨리 모을 수 있는 건 마법사로부터 채취하는 것이다. 마법사로부터 피를 뽑듯 마력을 뽑아내는 게 가장 빠르다.

즉, 모래시계문을 빨리 열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마법사의 희생을 담보로 해야 한다.

쉽지 않다.

마법사는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작자들이니까. 어지간한 국가들은 이런 일에 마법사를 쓰지 않는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마법사를 쓸 곳은 넘쳐나니까.

그래서 북한과 손을 잡았다. 이런 미친 짓을 오히려 국가적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진짜 미치광이들이니까.

동시에 북한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들에게 몬스터를 병기화하고,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미 벼랑 끝에 몰린 북한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터.

물론 그것만으로도 국가를 움직이는 게 가능할 리 없다. 처음에는 북한의 간부들을 미끼를 이용해 접근했다. 그렇게 조금씩 높게 향하다가, 종국에는 북한의 우두머리에게까지 닿았다.

거기서 마법을 이용해 북한의 최고권력자를 세뇌시켰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모래시계문의 병기화는 북한의 새로운 권력이 될 테니까.

결정적으로 모래시계문의 등장으로 북한이란 국가는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없다면 더 이상 서슬 퍼런 총칼을 통한 독재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 입장에서든 무엇이든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했고, 그렇게 잡은 이 반전의 계기에 전부를 걸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광기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는 법.

‘만약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면…….’

하마드가 염려를 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기한을 7월 1일까지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인민 동지들이 위대하신 장군님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들을 희생했습니다.”

리철기 대좌가 기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하마드는 놀랐다. 정말 놀랐고.

꿀꺽!

‘기한을 2주나 줄이다니, 대체 얼마만큼의 희생을 담보로…….’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을 희생했다? 그런 일이 북한에서 있을 리 없다. 강제적인 희생만이 존재할 뿐.

아마 수천, 아니 수만이 넘어가는 이들이 2주라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소모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개돼지처럼 도살됐을 것이다.

그 광경을 떠올린 라미 하마드의 등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이 살짝 핥고 지나갔다. 그런 하마드에게 리철기 대좌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선인민공화국의 힘입니다. 라미 하마드, 우리와 함께 세상을 바꿉시다!”

“예, 세상을 바꿉시다.”

북한, 그들이 가진 광기는 하마드의 예상보다 더 섬뜩했다.

* * *

몬스터 퍼레이드로 지옥이 된 도쿄 앞에서 일본 정부 그리고 세계가 내릴 수 있는 처방은 하나였다.

폭격.

무려 다섯 차례의 폭격이 이루어졌다. 드넓은 도쿄 지역이, 간토 평야가 활활 타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격이었다. 세계 2차 대전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폭격이기도 했다. 그 무시무시한 폭격 앞에서 도쿄라는 땅 위에 세워진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그건 끝이 아니었다.

“흩어져서 도망쳐!”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도쿄에서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무시무시한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있었다. 땅을 파고 숨어서 화마를 피한 놈들이 있었고, 환수 타입으로 물리적인 폭격에 영향을 덜 받은 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냥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다.

분명한 건 그 무시무시한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강한 놈들이란 것.

단순히 등급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 괴물들은 몬스터 사냥을 업으로 살아온 유적 사냥꾼들을 역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지원 요청해!”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잔당 처치를 위해 군대가 도쿄 땅을 밟았다. 소수가 아니었다. 무려 7천 명이 넘는 병력이 동시에 도쿄 땅을 밟았다. 전차를 앞세웠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았다. 마법사들만 해도 오백 명이 넘게 배치됐다.

잔당 처치를 위해서는 충분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 전력이 지금 도망자 신세, 지원을 요청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통신이 안 돼? 맞아, 놈은 디지털 킬러 능력이…….’

시작은 꽃등도마뱀이었다. 놈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은신 능력이 뛰어난 놈은 보는 순간 잡아야 하는 놈이었고, 놈을 잡기 위해 부대가 놈을 쫓았다.

그 부대가 갑자기 땅에서 등장한 7등급 몬스터, 땅굴사마귀에게 당했다. 부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전차를 앞세운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렇게 움직이던 전차 속의 전차병들이 갑자기 미쳐버린 채, 아군을 향해 포신을 돌리 포격을 시작했다. 6등급 몬스터, 싸이코 고스트에 당한 것이다. 계속 문제가 생기자 다수가 동원됐다.

그렇게 다수가 움직이는 순간…….

‘신기루 호랑이라고 했나?’

놈이 등장했다.

4등급 몬스터 신기루 호랑이.

딱 한 번, 한국이 4등급 유적 사냥 당시 발견한 놈으로, 그저 명칭과 특징만 알려진 녀석이었다.

약점이 무엇인지, 그 사실은 조금도 밝혀진 바가 없는 놈은 분신 능력을 이용해 삽시간에 군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환수 타입인 녀석에게는 어지간한 화력은 먹히지 않았으니까.

결국 7천의 병력이 꽁무니를 빼는 모양새가 됐다. 이 중에서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철수다. 어차피 통신은 안 먹힐 테니까.”

히데키 소위의 말에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상관의 명령 같은 건 솔직히 이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도 당연히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과연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뿐이었다.

그때.

스으…….

정말 고요한 소리와 함께, 그들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신기루처럼 등장했다. 고요한 소리조차도 사실상 신기루 호랑이의 소리가 아니라, 그냥 갑자기 불어온 바람 소리였다.

“헉!”

신기루 호랑이를 본 모두가 굳었다.

히데키 소위도 마찬가지였다. 도쿄에서 몬스터 퍼레이드가 시작될 당시에 도쿄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일선에 참가했고, 그때 이후 거듭 몬스터 전쟁에 투입되며 본인이 원치 않아도 단련되었던 그지만, 신기루 호랑이의 존재 앞에서는 하룻강아지조차 되지 못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명령을 내려야 하는 그가 굳어버렸다.

죽음이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그런 그들을 구해준 건…….

쉬익!

갑자기 등장한 괴상한 병사였다. 활활, 온몸이 타오르는 붉은 전사는 소리 없이 등장해.

푹!

신기루 호랑이의 몸뚱이에 창을 꽂아 넣었다. 신기루 호랑이가 놀라며 자신을 향해 창을 꽂은 전사를 향해 앞발을 크게 휘둘렀지만, 전사는 몸을 낮춰 앞발을 가뿐하게 피했다.

스윽!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등장한 푸른빛의 얼음 전사가 신기루 호랑이의 등골을 칼로 베었다.

총탄은 감히 뚫을 수도 없는 신기루 호랑이의 몸뚱이를 얼음 전사의 칼은 종이 베듯 베어냈다.

‘뭐, 뭐지?’

‘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 광경 앞에서 히데키 소위를 비롯해 그의 부하들 전부가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그 사실이 그들 인생의 흠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곳에서 그들과 다른 표정을 지은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을 테니까.

* * *

일본 도쿄는 이제 당분간 사람이, 최소 3∼5년 동안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됐고, 중국은 위스프의 거듭된 테러 앞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혼란을 맞이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터지는 몬스터의 출몰은 인류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그 어디에도 희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희소식조차 들리지 않았다.

인류의 시계는 마치 10년 전, 몬스터가 처음 등장했던 2015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 순간 희소식이 나왔다.

“이강우의 귀환.”

로드리게스 회장은 이강우가 2등급 모래시계문으로부터 무사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나를 위한 무대로군.’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자신을 위한 시나리오가 그려질 리가 없을 테니까.

‘이것으로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는 걱정이 없다.’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가 이제는 충분히 시도 가능한 일이 됐다.

즉, 문을 발견만 하면 된다. 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다.

‘결국 문제는 북한.’

이제 위치만 파악하면 된다. 북한 어디에 모래시계문이 숨겨져 있는지,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다. 중국의 비호를 받지 않은 북한을 침공하는 건 애들 장난이다. 명분이 확실한 이상, 미 대통령이 사인을 하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탄을 받는 북한을 일주일 안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동정표를 받을 수 있는 땅덩어리로 만들 수 있다.

‘의심이 가는 곳은 결국 북한 정권이 만든 대규모 방공호인데…… 평양이냐, 신의주냐, 둘 중 한 곳일 텐데.’

방아쇠를 당길 준비는 마쳤다.

그리고 이미 탄창도 가득하다. 표적이 2개라고 해도, 탄창이 가득 찬 이상, 표적 전부를 무너뜨릴 순 있다. 단지 무엇을 먼저 쏘느냐, 해야 하는 고민은 그뿐이었다.

‘평양은 간부들이 대피해야 하는 곳. 그러면 신의주에서 작업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겠지.’

2024년 6월 19일, 로드리게스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

* * *

“생각보다 일정이 앞당겨졌군.”

마르쿠스의 말에 이바노프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북한은 인구가 많지도 않은데, 어떤 식으로 마법사를 확보했는지 그게 궁금하군.”

“천변과를 이용했다더군.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일단 천변과에 제물로 주었다더군.”

이야기를 들은 마르쿠스는 실소를 머금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의 개방 속도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많은 숫자의 마법사를 희생시켜야 한다. 인구가 많지 않은 북한 입장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여기서 북한 정부는 생각을 단순히 했다. 마나 서클을 개방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해 고생하지 않았다. 그냥 보통 사람들을 데려다가 천변과의 제물로 주었다. 마력이 있다면 마력이 빨릴 것이고, 그게 아니면 그냥 죽을 터.

무식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면 마법사에 미치기는 힘들지만, 어쨌거나 마력을 가진 이들의 마력이 흡수된다. 티스푼을 이용해 거대한 페트병을 채우는 격이지만, 어쨌거나 채워진다.

‘몇 명이 죽었을지 가늠도 안 되는군.’

수천? 아니다. 수만 단위 혹은 그 이상이 시체가 됐을 것이다.

“인간은 여러모로 대단해.”

마르쿠스는 이런 북한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기보다는 나름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

목적을 위해서는 동족조차 가차 없이 소모품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인간이란 종은 바츠무족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으니까.

놀라운 건, 인간이 인간을 소모해 발전을 이룩한다는 점이었다.

정체.

그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발전 없이 영겁 동안 같은 약탈과 종말을 꾸민 바츠무족의 일생과는 많이 달랐다.

“흥.”

물론 그런 마르쿠스의 심중을 이바노프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바노프는 그저 짜증이 났다.

“이제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을 터. 강희, 그는 언제 우리와 합류하는가?”

본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것보다 더 깔끔하고, 더 멋졌어야 한다.

“신록마저 죽었는데 언제까지 연기를 할 생각이지?”

무엇보다 신록이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확인은 안 했지만, 문을 열고 나온 이강우는 사람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도쿄에서 이강우가 보여준 활약은 대적자, 그에 가까웠다. 불사황제의 권능을 완벽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사황제가 다루던 그 삼백의 전사들은 불사황제의 권능이 각성했다는 증거였다.

불사황제라면 신록을 죽일 수 있다.

아니, 불사황제만이 신록을 죽일 수 있다.

신록의 죽음은 분명 타격이 컸다. 신록은 유적을 구성하는 재료를 만들어주는 자다. 낚시를 위한 미끼를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존재다. 그래서 신록이 이 세계에 등장하는 순간, 지구에 등장하는 순간 신록을 다시 옮기기 위한 준비도 해두었었는데, 그 준비가 무의미한 게 됐다.

“나야 모르지.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으니까.”

여기에 강희는 여전히 합류하지 않은 채 한국 정부에게 잡혀 있었다. 솔직히 잡혀 있는 것도 아니다. 강희는 본인이 원하면 그 정도 속박은 가뿐하게 벗어던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강희, 즈믄나래의 초대 길드 마스터를 연기하고 있다.

솔직히 이바노프는 그런 강희의 행동이 이해되지도 않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강희, 그는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거지?”

이바노프의 물음에 마르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마르쿠스도 강희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이제 강희가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연기가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문이 열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지구에 온 네 명의 바츠무들은 도주를 할 것이다.

도주를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그리고 훗날, 이 지구가 종말의 뱀에 먹히면 그때 와서 종말의 뱀의 피와 살점을 보상으로 얻어갈 것이다.

종말의 뱀이 가진 힘이, 세상을 먹어 치우는 힘이 바츠무족에게 영생을 부여해줄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강희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강희, 대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냐?’

마르쿠스는 그게 궁금했다. 어떤 의미에서 강희는 보통의 바츠무와 달랐다. 대적자에 대한 두려움이 그 누구보다 강했고, 때문에 대적자에 대한 적개심도 그 누구보다 강했다.

대적자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바츠무족의 영생이 달린 계획조차 미끼로 삼을 인간이었다.

대적자를 피하기 위해, 그저 대비하기만 하려는 다른 바츠무와 다르게 강희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기 위해 움직였고, 그래서 마르쿠스는 강희의 편을 들어줬다.

바츠무족의 일원들 대부분은 현상을 유지하길 원할 뿐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자는 없다.

그런데 그 변화를 강희는 하고자 했다.

물론 그를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강희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제 상관없다.

남은 시간을 벌기 위한 모든 밑준비는 끝났으니까.

“이바노프.”

마르쿠스가 이바노프를 부르는 순간, 이바노프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두 에스콰이어에게 명령을 내렸다.

2024년 6월 25일, 몬스터 대군이 휴전선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세상을 상대로 먼저 선공을 취했다.

참혹한 역사가 반복됐다.

* * *

김재범은 은밀하게 전달된 속보를 받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미친!”

그만큼 김재범이 받은 속보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몬스터가 남하한다니?’

몬스터가 등장했다!

……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몬스터의 출몰 빈도수가 급상승한 상황이다. 동아시아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이미 일본은 걷잡을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중국도 피해를 감추긴 하지만, 타국이 그 피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한국이라고 해서 그 몬스터 재해 앞에서 자유로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몬스터 출몰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다수의 몬스터들이 군대처럼 기습작전을 펼치듯, 군사분계선 부근의 주요 거점들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다.

심지어 몬스터의 습격 이후 북한군이 몬스터들이 만든 루트를 통해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있었다.

북한, 그들이 몬스터를 군대처럼 다루고 있다는 증거였다.

김재범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칭얼거릴 수는 없잖아?’

이제 말도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이건 분명한 현실이고, 이게 현실이라면 섬뜩한 일이기도 했다.

‘놀라지 말고 답을 찾아. 김재범, 답을 찾아.’

일단 군사분계선에 마련된 대비책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한 대비책이다. 2015년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이후 비무장지대, 군사지역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한 대비책을 구축하긴 했지만, 국방부가 그렇게 일을 잘할 리 없지 않은가? 허점은 있다. 몬스터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길드 소속 마법사들이 강원 산간지역 등에 출장을 가서 몬스터를 잡고는 한다.

결정적으로 지금 군사분계선의 전력과 대비책으로 환수 타입의 몬스터를 잡는 건 굉장히 어렵다. 마법사를 배치하지만, 국방의 의무라는 명분 하에 싼값에 마법 노동력을 제공하는 마법사들이 넘치는 열정과 의지를 가질 리 만무하다.

심지어 실력도 보잘것없다. 실력 좋은 인간들은 그런 전방에 두지 않고, 항시 몬스터 사냥에 나설 수 있도록 중앙에 대기한다.

‘이거 무조건 뚫린다.’

몬스터만이라면 막을 수 있다.

북한군만이라면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둘이 섞이면 막을 수 없다.

‘수도권까지 내려오겠지.’

때문에 김재범은 장담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앞세운 북한군은 충분히 수도권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25일…….’

심지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날이 다시 한번 고통과 절망을 번복하는 날이 될 것이다.

‘젠장!’

그렇다면 몬스터들이 수도권까지 남하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당연히 모른다.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무언가 주장을 한다면, 그건 확신이 아닌 억측일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김재범은 아주 이기적인 생각을 시작했다.

‘정말 비열하고 야비한 짓이지만…….’

아직 이 정보는 모든 국민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조만간 공개되겠지만, 그 조만간이란 서너 시간 다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서너 시간 후에는 한국은 대공황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그 서너 시간이 흐르기 전에.

‘엄마하고 아빠하고…….’

가족을 몰래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정말 비열한 짓이다. 김재범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지. 하지만 김재범은 대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거룩한 인간이 아니었다. 김재범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국가가 대대적인 조치를 취하기 전에 통화를 해야 한다.

그때 김재범의 머릿속으로.

‘대장의 가족도 챙겨야지.’

이강우의 가족이 떠올랐다.

아직 이강우의 무사 귀환 소식을 듣지 못한 김재범은 이강우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쓰렸다. 정말 이대로 이강우가 죽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런 이강우가 자신의 가족과 연인을 김재범에게 부탁했다. 그럼 빌어먹을 쓰레기 소리를 듣더라도 그들은 챙겨줘야 한다.

우웅!

그때 고민하던 김재범의 스마트폰의 울었다.

“깜짝이야!”

김재범이 기겁하며 스마트폰 액정에 뜬 발신자 이름을 봤다. 발신자 이름을 본 김재범의 얼굴이 굳었다. 김재범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안 선배, 김재범입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 * *

2024년 6월 25일.

북한이 몬스터와 군을 앞세워 남침을 시도했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세계 그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몬스터의 병기화에 성공한 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사건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수도권,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 방어선에 큰 역할을 한 건 미군이었다. 도쿄 수복 작전을 위해 일본 근처에 대기 중이던 항공모함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인천항을 향해 이동 중이었고, 주한미군기지에도 평소보다 곱절은 될 법한 전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한국군의 대응 역시 긴밀하고, 재빨랐다.

하지만 아무리 대응이 빠르고 긴밀해도, 선공을 당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몬스터가 전선을 뭉개는 순간, 북한군이 무혈입성했다. 동시에 북한은 몬스터 너머로 무차별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구식 병기, 낡아 빠진 병기였지만 그런 병기도 분명한 병기였다.

그들의 병기가 수도권, 서울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서울까지 향하는 길을 만들고, 시간을 벌었다.

그 시간과 길을 이용해 몬스터가 빠른 속도로 서울함락을 목표로 움직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잠복 중이던 북한 간첩들 그리고 위스프의 테러리스트들이 혼란이 시작되는 순간, 순차적으로 테러를 일으켰다. 서울 곳곳에서 폭음이 들렸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이성이 무너졌다.

이 긴박한 순간 속에서 길드 역시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 특히 환수 타입을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처치할 수 있는 건 마법사밖에 없으니까.

“즈믄나래 빌딩은 이 시간부로 폐쇄된다. 즈믄나래 역시 기능을 정지한다. 모두 군과 합류하여, 군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 이제부터 즈믄나래의 마법사들 그리고 총꾼들은 군인이 된다.”

즈믄나래 2대 길드 마스터 안중현, 그는 이 긴박한 상황이 터지는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확실한 명령을 내렸다.

다른 길드가 마법사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놓고 저울질을 하며, 정부와의 협상을 꾀하는 과정을 안중현은 전부 무시했다.

더 나아가 안중현은 명령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마법 아티팩트를 챙겼다. 불똥 마법 그리고 불꽃 지뢰, 길드 마스터란 자리 대신 그는 불놀이꾼이란 예전 별명을 품었다.

그 역시 전장에 나설 생각이었다.

테러에 당해 지옥에서 돌아온 게 얼마 전의 일이지만, 그게 이 긴급한 국가적 재난 속에서 손가락이나 빨며, 일신의 안위만을 꾀해야 하는 근거와 이유가 되진 않았으니까.

‘이게 마지막이다.’

무엇보다 안중현은 2015년부터 시작된 전쟁, 10년에 걸친 모래시계문과의 전쟁이 종막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이제까지 정체를 감춘 자들이 가면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면을 쓸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괜한 미래를 기약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적이 전력을 다하는데, 어영부영 머릿속으로 계산기만 두드리다가는 오히려 당한다.

안중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생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이강우,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이강우.

이 세상, 지구 그리고 인류에 찾아온 미증유의 재난과 혼란과 악몽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를 도울 생각이었다.

물론 힘으로 그를 도울 수 없다. 이강우는 너무 거대한 존재가 됐다. 그의 옆에서 안중현은 작은 반딧불에 불과하다. 그 사실은 안중현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안중현은 그저 이강우가 중요한 순간, 무엇을 선택하든 타인의 의도가 아닌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달리 말하면.

‘강희, 결코 네놈들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럴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안중현, 그에게도 나름 준비해 둔 수가 있었다.

* * *

이바노프는 의자 하나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라미 하마드와 리란칭, 그의 권능 중 일부를 이어받은 두 명의 에스콰이어가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거대한 모래시계문 하나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롯하게 서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어둠을 깎아 만든 듯한 그 문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섬뜩했다. 손을 대면,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 문이 뿜어대는 공포 앞에서 리란칭과 하마드 역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문을 등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저번 광저우에서 간신히 목숨만 구한 채 큰 부상을 입은 리란칭은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이바노프만이 담담하게…….

“흠.”

아니, 그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굉장히 즐거운 듯,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 상황이 기분이 좋았고, 즐거웠다.

‘인간이란 족속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지만, 놈들의 폭력성은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군.’

이바노프, 그는 싸움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폭력을 통해 상대를 가차 없이 짓누르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마법이란 힘을 손에 넣은 족속들이 그 힘에 취해, 이바노프와 같은 존재마저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힘과 희망을 가차 없이 뭉개며, 자신들의 종말을 바라보는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는 게 영생 동안 이바노프가 꾸준하게 즐기는 몇 안 되는 취미이기도 했다.

이제 그 절망 어린 인류의 표정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힘든 만큼 보람이 있는 법이지.’

이번 세계는 여러모로 어려운 세계였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 수준은 놀라웠고, 그들이 가진 병기는 섬뜩했다.

바츠무족이 지구를 고른 것 역시 그 점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곳을 약탈하고, 종말의 뱀을 위한 제물로 삼는 건 물론 인류가 가진 문명의 기술을 빼돌린 상황이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많은 투자도 했다.

사실 이렇게 단계적인 작업을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보통은 그냥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도록, 작업만 하면 됐으니까.

어쨌거나 실패의 위기도 있었지만, 이제 곧 그 실패의 위기는 위기로만 끝이 날 것이고, 이바노프는 그토록 바라던 인류의 절망 어린 표정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표정을 오랜 세월 추억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다음 세계, 종말의 뱀을 위한 무대를 찾기 전까지, 또 다른 종말을 맞이할 세계를 찾기 전까지.

‘와라.’

이바노프가 미소를 지은 채 방문객을 기다렸다.

* * *

로드리게스 회장이 마법사란 전력을 확보한 후에 가장 먼저 꾀한 건 다름 아닌 암살이었다.

그는 그 누구라도, 심지어 그 대상이 미대통령이라고 해도 암살을 할 수 있는 암살마법사부대를 만들고자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요인 암살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일개 부호에 불과한 로드리게스 회장이 세계 권력을 뒤흔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니까.

마법을 연구하고, 필요한 마법 아티팩트를 확보하는 한편, 몬스터 사냥이 아닌 사람을, 마법사를 잡을 수 있도록 마법사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훈련을 시켰다.

지금 그 비밀병기들이 평양시 아래에 숨겨진 지하 비밀 벙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눈으로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림자 그리고 곳곳에 드리운 어둠이 그들의 발소리와 숨소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감춰줬다. 그들은 곳곳에 놓인 어둠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이동했다. 도중에 등장하는 경비나 보안 시스템도 최첨단 장비의 도움을 이용해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 평양시 지하 벙커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들은 발견했다.

‘이곳에 2등급 모래시계문이 있다.’

2등급 모래시계문.

그들이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 사실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로드리게스 회장에게 전달됐다.

당연히 새로운 지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 지령을 내린 건, 미 대통령도, 중국 주석도 아닌 로드리게스 회장, 바로 그였다.

“이 시간부로 피스메이커 작전을 실시한다.”

명령을 내린 로드리게스 회장은 그 명령을 내리는 순간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겼다. 내가 이제 새로운 시대의 왕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