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문을 넘은 자
신록(神鹿).
족적마다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신의 능력이나 다름없는 능력을 가진 사슴은 거대한 덩치와 위엄 넘치는 모습과 다르게 보보(步步)에는 적막감과 고요함이 가득했다. 여덟 개의 다리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허공을 걷는 듯했다.
소리는 사슴이 지나가고 남은 족적에서 피어올랐다.
쩌저적!
신록이 남긴 족적에서는 나무들이 수 미터씩 쑥쑥 자라났고, 자라나는 나무들은 기괴한 소리를 냈다. 청아함과는 거리가 먼, 귀곡성(鬼哭聲)이었다. 귀신 같은 소리였고, 펼쳐지는 광경 역시 귀신에 홀린 자들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쿵!
그렇게 자라난 나무들 뒤로 정육면체의 등껍질을 가진 4등급 몬스터, 큐브 터틀의 굉음이 뒤따랐다.
큐브 터틀은 불도저처럼 자라난 나무를 가뿐하게 밀어 버리고, 짓밟았다. 짓밟혔음에도, 나무들은 다시 굳건하게 자라나며, 숲을 만들었다.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한 달 내내 본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군.’
그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이강우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황홀하고, 감탄이 나오는 광경이 아니라 처참하고, 처절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란 것을.
본래 이 세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생태계를 고작 하나의 괴물이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영겁의 세월 동안 남은 흔적이 찰나의 순간 만에 부정당하고 있다. 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 본래 이 세계를 누리던 생태계는 적응과 진화, 변화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비열한 광경이란 말인가?
이런 위협을 본다면, 지금 이강우와 지구의 인류가 느끼는 종의 위협은 가소로운 수준일 것이다. 애초에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시간은 극히 가소로운 수준에 불과하니까. 인류가 멸종한다고 해서 지구가 사라지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바츠무는 그런 지구의 역사 자체를, 수억 년이 가뿐하게 넘는 생태계를 하루아침에 자기들 입맛대로, 자신들의 영생을 위한 제물로 바칠 수 있다.
이쯤 되면 화가 나기보다는 소름이 돋는다.
물론.
‘그래 봐야 괴물은 괴물.’
이강우는 그런 철학적인 주제를 논할 정도로, 철학적인 자질이나, 심성이나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강우가 잘하는 건 폭력을 행사하고, 승리자의 권한인 포식을 행하는 것, 그것뿐이지.
‘여기까지 왔는데, 녹용 정도는 가져가야 선물이 될 수 있지.’
지금도 다를 건 없었다.
이강우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걸 할 생각이었다.
“전원.”
때문에 이강우는 소리쳤다.
“돌격!”
그 순간 숨죽이고 있던 삼백의 전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강우는 크로포드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크로포드가 천변과를 이용해 만든 8서클 개방 비약이었다. 그것을 받는 건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크로포드는 매우 쓸 수도 있으니까, 같이 먹으라고 사탕도 줬다.
두 번째는 모래군주의 파편이었다. 모래군주의 핵 파편들. 모래군주 사냥이 끝난 이후 사막의 모든 모래를 헤집을 각오로 사람들이 달라붙어 모래군주의 파편을 확보했다. 이강우는 이걸 달라고 했다. 크로포드는 난색을 표했지만, 어떻게 구해 왔다. 구해 오면서 말했다.
“빌린 거야. 나중에 돌려줘야 해.”
이강우는 대답했다.
“예, 그때도 세상이 멀쩡하면 얼마든지 돌려주죠.”
그렇게 확보한 모래군주의 핵을 잘게 가루로 만든 후에 먹었다.
그때 이강우는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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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황제의 다섯 권능 중 각성을 마친 불꽃 심장을 제외한 네 개 중 하나를 각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강우는 그 권능을 이용해 불과 얼음의 군단을 각성시켰다.
그 선택에 앞서 고민 따윈 없었다.
불과 얼음의 군단은 불사황제 야크센이 바츠무와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을 약속하기 전부터 불사황제 야크센을 따랐던 백전노장의 전사들이었다.
이후 불사황제는 그들을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할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고, 이후 그들은 불사황제와 함께 오랜 세월 동안 바츠무와 맞서 싸웠다.
단언해도 좋다. 그들보다 몬스터와 잘 싸우는 존재는 없다.
그렇게 각성을 마친 불과 얼음의 전사들에게 붉은 뿌리로 만들어진 무기를 쥐여주며 명령을 내렸다.
모든 몬스터를 제거하라!
그 명령에 전사들은 자신들의 폭력성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화르륵!
불의 전사들은 경쟁하듯 질주했다. 질주하는 그들은 몸의 불꽃을 곳곳에 흘렸다. 그들이 흘린 불꽃들은 나무와 초목에 달라붙어 그것들을 활활 불태웠다.
그러다 적을 마주하면 불의 전사들은 몬스터에게 달라붙었다. 달라붙는 것만으로도 이미 몬스터는 지독한 화상 앞에서 비명을 내질렀고, 불의 전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날뛰는 몬스터의 몸뚱이를 붉은 뿌리로 된 무기를 이용해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불의 전사들이 보여주는 전투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그와 달리 얼음 전사들의 전투는 담담하고, 은밀했다.
얼음 전사들은 입김조차 내뱉지 않은 채 소리 없이 나무 사이를 질주했다. 질주하다 몬스터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몬스터의 몸에 붉은 뿌리로 된 무기를 꽂았고, 몬스터가 고통 앞에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녀석들의 입 안을 그들의 냉기로 얼렸다. 녀석들의 단말마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만들었다. 얼음 전사들에게 당한 몬스터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얼어붙은 녀석들의 시체에서도 붉은 뿌리는 뿌리를 내리고, 대나무 줄기를 키워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런 학살을 검은 구체가, 절망의 태양이 함박웃음을 지은 채 감상하고 있었다.
동시에 검은 파리 떼가 절망의 태양 아래에서 숲을 먹어치우며 자신의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신록이 만들어낸 원시림은 검은 파리 떼의 장작에 불과했다. 검은 구체 아래에 검은 파리 떼가 점차 영역을 넓히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그 어떤 이들의 난동도 허락하지 않았던 신록의 땅이 유례가 없는 혼란을 맞이했다.
이강우, 그는 전면전을 선포했다.
애초에 그는 이번 작전을 기획하면서, 조금의 꼼수도 부릴 생각이 없었다.
꼼수가 먹힐 것 같지도 않았지만, 반대로 이번 전쟁은 이강우에게 시험의 무대였다.
‘내가 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내 몸뚱이를 야크센에게 건네줘야 한다.’
당연히 이강우는 이강우로 살고 싶다. 야크센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주는 게 싫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삶에 대한 집착으로 야크센에게 몸을 주는 것에 주저함이 생긴다면 결국 모두가 죽는다. 이강우가 살아야 하는 이유마저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즉, 여기서 이강우가 자신의 실력으로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이강우는 죽어 마땅하다. 이곳에서조차 자력으로 승리하지 못하는 자는 문밖으로 나갈 자격조차 없다.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불과 얼음의 군단이 만들어낸 시산혈해, 그 시산혈해가 내뿜는 피와 마력을 머금은 절망의 태양은 거대한 몸집을 자랑했다. 이강우가 절망의 태양을 작게 응축했다.
응축한 녀석의 몸에 붉은 뿌리를 꽂았고, 절망의 태양을 머금은 붉은 뿌리는 삽시간에 탐스럽게 자라났다.
이강우가 그 붉은 대나무 중 하나를 뽑았다. 오른손으로 붉은 뿌리를 잡았고, 왼손으로는 큐브를 쥐었다.
신의 사슴, 놈을 향한 효시는 유성우였다.
* * *
이강우가 하늘 위로 유성우를 머금은 붉은 뿌리를 던졌다.
쿠웅!
그러자 천둥소리와 함께 유성우 하나가 신록을 향해 떨어졌다.
첫발은 신록의 머리 위에 꽂혔다. 유성이 아니라 벼락처럼 내리친 유성은 단숨에 신록의 머리를 뚫고 바닥에 꽂혔다.
콰앙!
유성우는 너무나도 쉽게 신록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뿐이었다.
유성우에 관통당한 신록의 머리는 곧바로 본래 형태로 돌아왔다.
무효.
신록은 이 섬뜩한 공격에 감흥조차 없는 듯,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꽈릉!
그에 분노한 듯 이번에는 두 개의 유성우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신록의 몸통이었다. 두 개의 유성은 신록의 몸을 우산처럼 덮고 있는 신록의 거대한 뿔을 부수고, 신록의 척추를 뚫고, 뱃가죽을 뚫고 신록의 다리마저 자른 채 바닥에 꽂히며.
쾅!
큼지막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도 신록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세 개의 유성우가 떨어졌다. 세 개의 유성우는 신록의 뿔을 사정없이 부수며 신록의 몸뚱이를 뚫고 떨어졌다. 신록의 몸은 곧바로 회복되고, 신록의 뿔도 곧바로 자라났다. 유성우가 만든 건 신록의 뿔 파편과 크레이터, 그뿐이었다.
그때.
꿈틀꿈틀!
바닥에 떨어진 신록의 뿔 조각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던 그것들은 이내 형태를 갖추었다.
3미터의 신장을 가진 긴 팔의 거인들, 머리에 뿔이 돋아난 그들은 목소리를 가지는 순간.
우어어!
절규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냈다.
그 절규 어린 괴성을 토해내는 자들, 본래 이 세계의 원주민이었던 자들이었다.
신록에 의해, 바츠무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 그들이 신록을 위협하는 자를 무찌르기 위해, 절규를 토해내며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남은 네 개의 유성우가 떨어졌다. 세 개의 유성우는 거침없이 신록의 몸을 관통하고, 바닥에 큼지막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하나는 신록의 몸이 아닌, 녀석을 뒤따르던 큐브 터틀의 머리통에 꽂혔다.
콰앙!
큐브 터틀의 머리는 신록과 달랐다. 유성우는 큐브 터틀의 머리통을 폭파해버렸고, 큐브 터틀의 머리는 다시는 복구되지 않았다. 육중한 녀석의 전진이 멈췄다.
눈먼 유성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움직인다.’
물론 큐브 터틀 머리에 꽂힌 유성우는 실수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노림수였다.
십 중 구를 신록에게, 남은 하나는 큐브 터틀에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앞선 아홉 개의 유성을 보며 큐브 터틀이 방심하며, 고개를 내민 틈을 이용해 녀석의 머리통을 부술 생각이었다.
동시에 그건 신호였다.
기예르모가 달렸다.
이미 큐브 터틀의 지척에서 숨을 죽인 채 자연과 동화된 채, 그저 한 그루의 나무처럼 숨어 있었던 기예르모와 큐브 터틀 사이의 거리는 채 300미터도 되지 않았다.
온갖 버프 마법으로 운동 능력이 향상된 그에게는 숨 한 번 머금으면 닿을 수 있을 거리였다.
큐브 터틀의 정육면체 몸뚱이를 오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나무나, 바위도 거뜬히 타고 오르는 7등급 몬스터 빨판도마뱀의 손바닥 가죽을 이용해 만든 장갑은 어떤 사람도 스파이더맨으로 만들어주는 도구였으니까.
펄쩍!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큐브 터틀의 등껍질 중간 부근까지 이동했고, 빨판도마뱀 장갑을 이용해 달라붙은 후에 기예르모는 단숨에 큐브 터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기예르모는 문을 열지 않았다.
거대한 문을 여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렵다. 문을 여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많을수록 여는 건 더더욱 힘들어진다. 또한 곧장 문을 열기 위해 나서는 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꼴이다.
칙, 칙!
기예르모는 자신의 품에서 꺼낸 향수를 흩뿌렸다. 여러 몬스터, 약초에서 채취한 그 향수는 휘발성이 강했지만, 코가 예민한 놈들조차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놈이었다.
이 향수의 유효 시간은 약 10초 남짓.
기예르모 기준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하품 한 번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향수가 기예르모의 3등급 유적 클로즈를 가능케 해준 비결이기도 했다.
10초 동안 기예르모는 주변을 살피고, 문 주변을 살폈다. 문을 여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가늠했다. 다행히도 문을 여는 데 방해가 될 법한 방해물은 보이지 않았다. 기예르모가 문 가까이 접근했다. 이제는 문을 열 때다.
‘이강우, 수고했다.’
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듯, 기예르모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강우에게 감사의 인사도 보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예르모가 입을 콱 다물었다. 문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기예르모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흠집이었다.
선명하지도 않고, 어찌 보면 흠집이 아니라 그냥 결, 자국, 본래의 형태라고 봐도 무방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기예르모는 그게 흠집이란 것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그게 이유였다.
‘가짜.’
이 문이 가짜인 이유.
2등급 모래시계문에는 절대 흠집이 생길 수 없으니까.
* * *
몽둥이를 든 3미터 장신의 원주민과 붉은 뿌리로 만들어진 칼을 쥔 불의 전사, 그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우어어!
원주민이 구슬픈 괴성을 내지르며 쥐고 있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휘두르는 몽둥이에는 절제가 넘쳤고, 위에서 아래, 곧게 내려치는 몽둥이는 마치 벼락같았다.
휘릭!
그런 벼락같은 몽둥이를 빙그르르, 몸을 회전하며 피하면서 동시에 원주민의 목덜미 부근에.
푹!
붉은 뿌리칼을 찔러 넣는 불의 전사의 몸놀림은 예술이었다.
마치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불의 전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원주민의 몸통에 주먹을 꽂고, 발차기로 무릎을 꺾었다.
빠직!
부서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화르르!
상처 부위에서 격렬한 불길이 치솟았다. 원주민은 삽시간에 장작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전사는 장작이 된 원주민의 몸뚱이에 꽂힌 붉은 뿌리칼을 회수했다.
그러자 곧바로 다음 상대가 우어어! 괴성을 토해내며 불의 전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불의 전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연전에 돌입했다.
이런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신록의 뿔에서 태어난 천여 명의 원주민들과 이강우가 만들어낸 삼백의 전사들이 격전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실력은 불과 얼음의 전사들이 곱절이나 강했다.
하지만 세 배가 넘어가는 숫자 차이는 실력만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신록의 뿔에서 태어난 원주민들은 생명력 하나만큼은 질겼다.
우어어!
활활, 불타오르면서도 거듭 움직였다.
이강우는 이 광경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시간은 벌었다.’
이런 난전은 이강우가 염두에 둔 상황은 아니었다. 돌발 상황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시간을 벌다가, 때가 되면 기예르모와 호령을 따라 이강우가 모래시계문 너머로 넘어가면 된다.
‘이제 계획대로만…….’
그 순간 이강우의 눈이 머리를 잃고 바닥에 배를 깔고 죽은 큐브 터틀의 등껍질을 향했다. 계획과 다르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은 채,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강우가 시간을 가늠했다.
‘30초가 넘었어.’
계획대로라면 이미 문이 열렸어야 한다. 그러나 문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기예르모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고, 기예르모가 오픈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문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건, 기예르모가 예고된 시간 내에 작업을 하지 못한 이상 이강우도 그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
‘플랜B.’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는 거다.
이강우는 당장 검은 파리를 움직였다. 이미 숲의 일부분을 뒤덮을 정도로 숫자를 늘린 검은 파리들은 이강우의 의지를 받는 순간, 곧바로 구름을 형성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검게 타오르는 구름이 벌떼보다 빠른 속도로, 나무 사이를 파고들며 움직였다.
이강우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손을 움직였다. 휘익, 휘익! 이강우의 손짓에 따라 구름처럼 떠올랐던 검은 파리 떼에서 빗줄기가…… 아니, 폭포가 떨어졌다.
푸후후!
검은 폭포는 불과 얼음의 전사들과 맞서 싸우는 원주민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은 폭포는 삽시간에 원주민을 휘감았다. 원주민의 몸을,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의 눈이 신록을 향했다. 신록은 이 난리법석 속에서 여전히 고고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이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하게.
‘나를 보고 있군.’
이 난전과 접전 속에서 신록은 이강우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신록의 눈빛에 살의와 적의 같은 게 없다는 점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심드렁한 표정. 이강우가 무엇을 하든 그게 귀찮은 일이 될지언정, 자신에게 위협은 되지 않는다는 표정.
‘빌어먹을.’
이강우 입장에서는 참 기분이 더러워지는 표정이었다.
이강우는 나름 전력을, 최선을 준비했다. 절망의 태양을 머금고 자라난 붉은 뿌리를 이용해 7서클 마법 세 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유성우로 본체를 타격하고, 엑스칼리버로 녀석을 반으로 잘라낸 후 녀석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섬광으로 파괴할 생각이었다.
이미 모래군주를 상대로 검증된 마법 콤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성우부터 꼬였다.
무효.
녀석에게는 마법 자체가 아무런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녀석의 몸뚱이로부터 절망의 태양은 그 무엇도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뿌리도 먹힐 리 없지.’
당연히 붉은 뿌리도 녀석의 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검은 파리 떼로 놈을 뒤덮어도 녀석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터. 이강우가 가진 마법으로 녀석을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혹여 방법이 있다면 그건 야크센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게 이유였다.
‘여기서 물러나든, 나중에 물러나든 달라지는 건 없다.’
기예르모가 문을 여는 데 실패했을 경우, 이강우는 본격적으로 신록과 전투를 치른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게 플랜B의 내용이다. 그 후에 셋이 다시 합류한다.
그리고 지금 이강우가 계획 하나를 더 세웠다.
‘모인 후 승부수를 건다.’
플랜C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유적에서 발견한 건 이럴 때 써먹으라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남긴 모양이군.’
발견한 유적에서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강우가 비밀 통로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이강우를 반긴 건 수정으로 된 원주민의 유골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 생각하고 이강우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불이 꺼졌다. 활활, 횃불처럼 타오르던 불의 전사가 갑자기 사그라진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주변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마력을 무력화하는 수정구슬,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아이템이 무언가 특별히 쓸모가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걸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보관만 했다. 그 보관마저도 호령이 했다. 폭격을 퍼붓듯 마법을 써야 하는 이강우 입장에서는 그 아이템은 약이 아니라 독에 가까웠고, 기예르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무래도 이 세계의 원주민들이 신록을 잡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카드였던 모양이다.
‘그래 복수는 본인들이 해야지. 남이 해주면 그건 복수가 아니지.’
그래서 더더욱 그 카드의 가치를 살려주고 싶기도 했다.
여기서 그냥 출문을 빠져나간다면, 결국 여기 있는 신록은 다른 세계를 이곳과 같은 처참한 세상으로 만들 터.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물론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내 목숨 기꺼이 준다.’
플랜D, 죽음(Death)만이 남는다.
* * *
호령이 숲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헤이스트 마법은커녕 자신의 몸을 보호해줄 그 어떤 버프 마법 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달리는 그녀의 주변으로.
카앙!
이강우가 소환한 불과 얼음의 전사들과 원주민들이 쉴 새 없는 격전을 펼치고 있었고.
쿠어어어!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내지른 단말마와 귀곡성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와중에.
콰앙, 쿵!
포탄이 떨어지듯, 무시무시한 위력을 품은 온갖 것들이 사방에 추락하며 거목을 쓰러뜨리고, 바닥에 큼지막한 크레이터를 만들고는 했다.
그야말로 전쟁터.
이런 전쟁터 속에서 그 무엇의 보호도 없이 달린다는 건, 지뢰밭 위를 걷는 심정과 다를 바 없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오금이 저리고, 눈물이 나오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호령은 힘차게 달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냉철하게 주변을 살피며, 곳곳에서 그녀를 노리는 위협을 피하며, 표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달려.’
작전이 세워졌다.
이강우가 유적에서 발견한 아이템을 신록의 몸에 박아 넣는 것이 작전의 전부였다. 이강우가 길을 뚫고, 기예르모가 보조를 하며, 호령이 아이템을 운반하는 역할이었다.
이 작전에 대한 논의는 길지 않았다.
어차피 뒤로 물러나서 전력을 추스른 후에 움직이든, 당장 움직이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뒤로 물러나서 전력을 추스르면, 그 시간 동안 신록이 어떤 짓을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더 강력한 몬스터를 호위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이강우가 전력을 다해, 나름 접전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행동하는 게 나았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필요한 건 논의가 아닌 각오였다.
특히 호령, 그녀의 각오가 중요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이다.
아무리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길을 만들고 서포트를 해준다고 해도, 이 난전 속에 휘말리기만 해도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예전에 각오를 마쳤다.
어차피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아니었다면, 하수도에서 하수와 함께 썩어 문드러졌을 운명이다.
또한 이후 이강우와 기예르모는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기념이 될 만한 기억을 만들어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이후 마법사의 재능을 인정받아, 언제든 소모될 수 있는 소모품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이 배제된 병기로 키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지난 석 달간 동안의 2등급 유적 사냥은 우습게도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나날들이었다.
그런 호령의 질주 앞에 이강우도 의지를 품었다.
‘이번 작전이 통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내 차례.’
호령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결국 죽을 터.
그 죽음을 좌시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작전을 짠 것부터가 이강우 본인마저도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승리한다.’
결국 여기서 결판은 난다. 이강우는 승리한다.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신의 사슴은 죽는다.
단지 문을 넘는 것이 이강우인지, 야크센인지, 그 차이만 있을 뿐.
* * *
그곳은 병실이었다.
한 사내가 무수히 많은 종류의 생명유지장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눈을 꾹 감은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사내는 살아 있다기보다는 시체에 가까웠다. 기계의 도움을 이용해 억지로 명줄을 간신히 이어붙이는 꼴이었다.
참담한 광경.
그 광경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십 일…… 아니, 백 일을 훌쩍 넘긴 기나긴 시간만의 변화였다.
사내가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간신히, 반쯤 열렸다. 사내가 눈을 뜨는 순간, 적막했던 공간에 미약하나마 활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 활기 속에서.
‘어디지?’
사내의 의식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미약했다. 사내는 그 의식의 흐름을 키우기 위해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나는 누구지?’
가장 먼저 스스로를 자각하고자 했다. 사내는 곧바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던졌다.
‘안중현.’
사내, 안중현이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 곧바로 의식의 흐름이 좀 더 커졌다. 미약했던 물줄기에 약간의 살이 붙었다. 안중현은 여기서 의식을 잃지 않은 채 계속 의식을 이어갔다. 당장 자신이 답할 수 있는 간단한 것부터 자각하고자 했다.
‘난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
그렇게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 의식의 흐름이 어느 정도 거센 물결이 되었을 때.
‘이강우가 위험해.’
안중현은 단숨에 자신이 해야 할 임무에 다다랐다. 그 순간 안중현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안중현, 그가 깨어났다.
* * *
안중현이 위스프에게 테러를 당하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 때, 많은 이들이 그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안대욱 역시 안중현이 깨어나기를 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안대욱의 그런 마음이 순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안중현이란 훌륭한 인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런 순수한 마음이 있긴 하다. 그러나 세속적인 마음도 있었다.
‘안중현이 뭔가를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위스프는 타깃을 정해두지 않는 무작위, 무차별적인 테러를 저지르는 집단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칠성문과 중국 정부를 상대로 밑도 끝도 없는 전면전을 벌이는 중이지만,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위스프는 테러를 저지르는데 분명한 목적과 타깃이 존재한다.
그런 그들이 안중현을 공격했다면, 그럴 만한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안중현, 그가 위스프의 정체에 대해서, 위스프가 감추고자 하고 싶었던 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단서가 될지도 몰라.’
그리고 현재, 위스프는 세상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고작 테러리스트 집단이, 국가를 상대로…… 그것도 중국이란 대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밀리지 않는다는 거다. 국가를 상대로 테러리스트가 전면전을 치르는데 밀리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위스프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다.
‘위스프의 저력은 이미 세상의 예상을 벗어났다.’
중국과 일본이 흔들리는데, 한국을 그냥 놔둘 리 없다. 심지어 안대욱은 이미 위스프와 강희, 둘이 어떠한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세상에 종말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안대욱은 안중현이 가졌을 비밀에 관심이 많았다.
그게 지금 그가 깨어난 지 이틀조차 되지 않은 안중현을 만나러 가는 이유였다.
* * *
달리는 호령을 호위하는 불과 얼음의 전사들은, 호령의 발걸음에 맞추어 같이 움직였다. 거대한 원이 질주를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광경은 마치 미식축구 시합을 보는 듯했다. 터치다운을 하기 위해 공을 쥐고 날리는 러닝백을 동료 선수들이 지켜주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 질주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모습까지, 전형적인 미식축구의 한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령이 해야 할 일은 단순했고, 그녀의 머릿속도 복잡할 이유는 없었다.
반면 작전과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된 이강우는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밑도 끝도 없다.’
정말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다. 숫자로 따지면 이미 천 단위는 예전에 넘어갔다.
그런데도 몬스터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미 포위를 당한 상황이고.’
더군다나 이 주변의 모든 몬스터가 신록을 지키기 위해, 신록을 위협하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신록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만들었던 이강우가 역으로 포위망에 갇힌 모양새였다.
‘전력을 추슬렀으면,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몰랐겠군.’
만약 그때 곧바로 긴급회의를 가졌을 때, 일단 물러난 다음을 기약하자! 같은 의견이 나왔다면…… 아마 다음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몬스터 군단을 뚫고 다시 한번 거사를 기약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좋을 거 하나 없군.’
어쨌거나 상황은 좋지 못하다. 만약 호령의 목숨을 건 터치다운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면, 그때는 결국 이미 한껏 화가 난 몬스터 무리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치면서, 이 드넓은 땅에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모래시계문을 찾는 아득한 작업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때 가서도 신록이 저런 담담한 표정으로 이강우를 무시하리란 보장은 없다. 놈이 작심하고 이강우를 처치하고자 움직인다고 했을 때, 과연 이강우는 이강우로 남을 수 있을까?
‘이번에 끝내야 해.’
다음은 없다. 다음을 기약하려는 순간 이미 끝난 것이다.
재차 그런 생각을 곱씹던 이강우가 손을 휘저었다. 이강우의 지휘에 따라 검은 파리 떼가 움직이며, 호령을 노리는 몬스터들의 몸을 덮쳤다. 지금도 그랬다.
거대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를 타며, 호령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했고, 검은 파리 떼가 삽시간의 거대 원숭이를 덮쳤다.
우오, 우오!
그러나 놈은 괴성을 내지르며, 괴성을 내지르는 와중에 입안으로 검은 파리 떼가 들어오는 와중에도 계속 움직였다. 검은 파리 떼가 놈의 몸을 파먹었지만, 녀석은 질주를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때 불의 전사가 거대 원숭이를 막기 위해 나서고자 했다. 불의 전사가 몸을 돌리고 움직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주민 한 명이 한눈을 판 불의 전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태클이었다.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불의 전사와 원주민이 뒤엉켰다.
그렇게 해서 벌린 몇 초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검은 파리로 뒤덮인 거대 원숭이가 호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떤 마법도 쓰지 못한 호령이 거대 원숭이의 공격을 피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그가 나섰다.
퍼억!
기예르모.
숨죽인 채 호령의 그림자처럼, 호령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던 그가 버프 마법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품은 주먹을 달려오는 거대 원숭이를 향해 거침없이 날렸다.
주먹에 맞은 거대 원숭이의 몸뚱이가 날아가며, 굵직한 나무 기둥에 부딪혔고, 나무 기둥을 부러뜨렸다.
기예르모는 두 번째 러닝백이다.
호령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리타이어할 경우 그녀를 대신해 터치다운을 해줄 두 번째 카드.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정말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는 의미.
당연히 다음은 없다.
호령,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따위는 없다.
“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호령은 더 악착같이 달렸다. 반면 기예르모가 호령을 위한 장막이 됐다. 이강우의 지휘 속에서도, 그 지휘를 뚫고 나오는 몬스터들을 가로막았다.
막느냐, 뚫리느냐, 닿느냐!
그 승부의 승자는.
‘왔어!’
호령이었다.
호령과 신록의 거리가 지척이 됐다. 신록의 뿔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에 호령이 있었다.
이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얼음 전사 한 명이 호령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호령에게 접근하는 얼음 전사의 몸이 녹았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 전사는 녹고 남은 몸뚱이에서 힘을 쥐어짜내, 호령을 신록의 등을 향해 던졌다.
푸수수!
던지는 순간 얼음 전사가 얼음 조각이 되어 바닥에 너부러졌고, 날아오른 호령은 덩크를 하듯.
푹!
신록의 등줄기에 구슬을, 이 세계를 살아가던 원주민이 남긴 복수의 화살을 집어넣었다.
작업을 마친 호령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추락하면서, 그녀는 곧장 마법을 썼다.
‘헤이스트!’
그녀의 몸이 깃털처럼 움직이며, 곧장 바닥에 착지했다. 호령은 이 순간 승리에 대한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기보다는 곁눈질로 신록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순간.
‘아!’
신록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녀석의 아름다운 몸이 마치 빗방울에 포격을 당하는 호수의 표면처럼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달리 보면 마치 신록의 몸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오오오오오……!
신록의 입에서 처음으로 울음이 나왔다. 그 울음이 숲을, 세상을 흔들 듯 퍼지기 시작했다.
그 울음 앞에 모든 몬스터가 행동을 멈췄다. 숲의 나무조차도 숨을 멈춘 듯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섬뜩한 고요 속에서, 신록이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에 처음으로 살의와 적의가 맴돌았다. 이강우가 이를 콱 물었다.
‘이제…….’
그 순간, 멈춰있던 모든 몬스터의 눈빛이 검게 변했다. 눈에 뵈는 게 사라졌고, 모든 놈들이 오직 하나!
이강우를 잡기 위해.
우어어어!
괴성을 토해내며 질주하기 위해 움직였다.
‘……시작이군.’
말과 함께 이강우가 큐브 하나를 높게 들었다. 이강우의 마력을 머금은 큐브는 곧바로 하늘을 바꾸었다. 하늘이 칙칙하게 변하더니, 거대한 폭풍이 만들어졌다.
우라칸!
강력하기 그지없는 7서클 마법이 신록의 몸을 가두는 벽이 되었다.
하지만 신록은 그 우라칸의 거센 바람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가뿐하게 뚫고 나왔다.
무효!
다시금 신록의 무시무시한 능력이 발휘됐다. 그리고 이제 신록은 그 능력으로 이강우를 처치할 속셈이었다.
꿀꺽!
이강우가 침을 삼켰다.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이강우가 자신의 가슴을 쾅! 세게 두드렸다.
“이 빌어먹을 곳, 내 발로 직접 나간다. 내가 나간다!”
진짜 전투가 시작됐다.
* * *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병상에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던 안중현의 모습은 굉장히 좋지 못했다. 그나마 의법사들이 달라붙어 화상 치료를 비롯해 전력을 다해 외상치료를 한 덕분에 보기 흉할 정도의 상처가 없다는 게 위안이었다. 머리털과 눈썹을 비롯해 체모들이 상당수 타버린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안대욱이 그런 안중현 앞에 섰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드실 텐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남을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안대욱의 말에 안중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답을 하는 안중현은 그 대답 하나만으로도 이미 벅찬 기분이었다.
‘말하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이야.’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그냥 잠들고 싶었다. 의사들도 괜히 무리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휴식에 전력을 다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주변 상황에 대해서 보고받은 바는 없었다. 그 누구도 안중현에게 세간의 정보를, 안중현이 병상에 누워 생사를 오고 가던 와중에 생긴 일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일단 보통 사람과의 면회 자체가 불가능했다. 현재 안중현은 신변안전을 위해서 입원한 장소조차 공개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외부와의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또한 안중현 본인도 긴급한 상황 속에서 아무에게나 정보를 듣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조작된 정보를 들어서 생길 오판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안대욱과의 만남은 중요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안중현의 말에 안대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브리핑을 하듯 모든 상황을 간략하게, 그러나 중요한 요소들은 빼먹지 않고 전부 말해줬다.
정보를 얻은 안중현의 표정은 굳었다.
‘강우가 또다시…….’
이강우가 다시 한번 목숨 걸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 모습이 대단했고, 미안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을 무조건 클로즈해야 한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동시에 상황이 시급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강우가 밑도 끝도 없이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럼 그걸 도와야 한다.
그리고 지금 안중현이 도울 수 있는 건 2등급 모래시계문을 찾아주는 것이다. 안중현이 그 문을 클로즈 할 수는 없으니까.
‘2등급 모래시계문을 찾아야 해.’
어디일까?
하나는 도쿄 하수 시설에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모래시계문은 과연 몇 개이며,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안중현은 한 곳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2등급 모래시계문은 북한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 말입니까?”
그 말에 안대욱의 표정이 굳었다. 대답을 한 안중현 역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안중현이 북한을 의심한 건 꽤 오래전이다. 더불어 북한을 의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3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도 개인이나, 평범한 집단이 가능한 게 아니라, 상당한 자금과 인력과 세력을 가진 집단이어야 한다.
여기에 확실하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절망에 몰아넣는 이 참담한 악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요소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집단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 그리 많지 않은 후보군 중에서 북한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리 말했어야 했나?’
사실 의심은 진즉에 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섣불리 말하지 않은 건, 북한이 의심된다고 해서, 딱히 한국 쪽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이 북한에 무어라 말하는 건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실력행사에 나선다? 그거야말로 최악이다.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힘을 이용한 행동에 나서면 그건 곧 전쟁 선언이다. 이미 잃을 게 없는 북한은 언제든 전쟁을 터뜨릴 수 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솔직히 나라라고 할 수도 없다. 세계 최강의 테러 조직이 맞는 말일 터. 안중현이 미리 이 생각을…… 심증은 확실하지만 물증조차 없는 이 의견을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안대욱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늦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 안중현을 나무라지 않았다.
안대욱은 냉철하게 현재 상황을 다시금 가늠했다. 북한이란 요소를 추가했다.
‘최악이군.’
안대욱의 머릿속에서 곧장 답이 나왔다.
‘그래서 중국을 흔든 건가?’
만약 북한에 정말 2등급 모래시계문이 있다면, 지금 위스프가 칠성문과 중국 정부를 흔드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이다. 북한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개입할 수 있는 국가는 결국 중국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현재 중국 정부와 칠성문은 한국 정부에 협조적이었다. 안대욱이 원하기만 하면 칠성문의 간부와 직접 대화를 통해 이런 상황에 대한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 정도로 현재 중국과 한국 사이는 긴밀한 상황이었다. 중국이 위스프의 테러에 몸살을 앓지만 않았어도, 곧장 핫라인을 통한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중국이 아주 심각한 몸살을 앓는 중이다.
그렇다면 몸살을 앓는 중국이 당장 한국의 말을 듣고 북한의 행보에 개입할 가능성은? 중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면 분명 움직일 것이다. 손을 놓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안대욱은 결단을 내렸다.
‘여기 오길 잘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안중현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미뤄두었던 결정을 이 자리에서 내렸다.
‘로드리게스 회장,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로드리게스 회장.
현재 이 혼란 속에서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한 자.
그런 그는 작금의 혼란 속에서, 혼란에 몸살을 앓고 있는 자들에게 제안을 했다.
“안중현 씨.”
“말씀하시죠.”
“로드리게스 회장을 아십니까?”
“예, 당연히 압니다.”
“그가 한국 정부를 비롯해 세계 각 세력과 국가에 제안을 했습니다.”
안중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대부호가 각 국가에 제안을 한다?
“무슨 제안입니까?”
“자신이 모든 일을 해결할 테니, 모든 마법 권력을 자신의 손에 쥐게 해달라고.”
그 말에 안중현은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로드리게스 회장.
그는 세상 마법 권력의 정점을 꿈꾸고 있었다.
* * *
중국 광저우.
이 번성한 도시에는 다양한 목적의 사람들이 모인다. 순수한 여행을 위해 오는 이들이 있고, 광저우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마카오를 향해, 도박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 이들도 있고, 그런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사기를 쳐서 한몫을 잡으려는 이들도 있다.
다양한 목적과 의도와 심성과 인성을 가진, 그야말로 인간군상이 모인 도시.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으아악!”
그 광저우에 모인 이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쿠쿠쿠쿠!
광저우시의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천둥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비명이 곳곳에서 터졌고, 모든 사람이 어디로든 도망치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그걸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테러였다.
위스프, 그들이 광저우를 무너뜨리기 위해 작심을 했다. 드높은 빌딩 다섯 채를 폭파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등장을 알린 그들은 이후 목적 없이, 그저 사망자 숫자를 늘리기 위한 무차별적인 살인을 벌였다.
화르륵!
사람들이 도망치던 길목을 불줄기가 휩쓸었고.
후두둑!
골목에 갇힌 이들의 머리 위로 고드름이 비처럼 떨어졌으며.
푸슈, 푸슈!
달리던 차는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흙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꼬리를 문 채 따라오던 자들이 연쇄 충돌하며, 결국에는 가솔린에 불이 붙어 큼지막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광저우. 그런 광저우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유성 하나가 떨어졌다.
콰앙!
7서클 마법, 유성우의 등장은 강렬했다.
하늘 위에서 떨어진 유성은 곧바로 5층짜리 건물의 천장을 부수고, 1층까지 도달했다. 1층까지 떨어진 유성은 강력한 폭탄처럼 폭발했다. 1층에 위치해 있던 가게들의 창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소리도 비산했다.
콰과광!
그 소음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지 않은 유일한 사람, 챠이 수는 눈동자를 움직이며 주변을 훑었다.
‘어디로 도망쳤지?’
그녀가 찾는 건 다름 아니라 리란칭이었다.
한때는 칠성문의 일원이었으나, 이후 칠성문을 배신하고 위스프의 서열 2위가 된 그가 이번 광저우 테러 사건의 원흉이었다. 아니, 그이기에 이런 테러가 가능한 것이다. 중국 그리고 칠성문의 사정을 어떤 의미에서 관계자들보다 더 잘 아는 그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테러 행위가 가능하지, 다른 이들은 기회를 주어도 이런 테러를 저지를 수 없었다.
‘놈의 목적은 나다. 분명 멀리 도망치지 않는다. 내 주변에 있겠지.’
더불어 그의 목적은 챠이 수, 그녀였다. 이제까지 칠성문의 간부들, 핵심 인원을 처리하던 위스프가 칠성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마도사마저 노렸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챠이 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리란칭은 도망치지 않은 채 자신을 노릴 테니까.
그런 그녀의 눈에 자신을 향해 총구를 막 겨누는 리란칭의 모습이 포착됐다.
챠이 수는 그 총구를 피하지 않았다. 총구를 바라봤고,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슈우우!
그러자 유성 하나가 리란칭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고.
타앙, 타앙!
연거푸 총성이 터졌다.
피잉!
그 총성은 챠이 수의 몸에 닿기 전에 투명한 막에 튕겨 나갔다.
콰앙!
이 모든 작업이 끝난 후에 떨어진 유성이 애꿎은 건물 한 채를 순식간에 박살을 냈다.
‘잡았다.’
이 순간 챠이 수는 여기서 펴고 있던 여덟 개의 손가락 전부를 꽉 쥐었다. 양손을 주먹 쥐었다. 하늘 위에서 맴돌던 남은 여덟 개의 유성이 땅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콰앙, 콰앙, 쾅!
연거푸 터지는 여덟 번의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리란칭이 있었던 장소 전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도망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광범위한 폭격이었다. 후폭풍만으로 챠이 수의 몸도 날아갈 정도였다.
“후우!”
챠이 수가 숨을 돌렸다.
‘죽진 않았겠지.’
이것만으로 리란칭이 죽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터.
챠이 수는 숨을 돌리며, 입에 머금고 있던 캡슐 하나를 씹었다. 캡슐에서 나온 액체가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위장이 아닌 가슴팍에 위치한 마나 서클을 향해 움직였다. 7서클 마법을 사용하며 메말라진 그녀의 마나 서클이 마력을 머금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 듯, 챠이 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순간 생기가 돈 챠이 수의 얼굴 아래, 그녀의 발치 아래에서.
콰앙!
폭발이 일어났다.
‘아!’
폭발은 챠이 수를 그녀가 두르고 있는 마법 보호막과 함께 동시에 띄워버렸다. 챠이 수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허공에 붕 뜬 그녀는 무사했다. 몸 어디에도 상처의 흔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법을 유지하는 그녀의 집중력과 정신력은 대마도사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더 안 좋아졌다.
자유를 잃었으니까.
허공에 뜬 그녀는 무방비상태였고, 그것을 그냥 눈 뜨고 용납할 위스프가 아니었다. 숨죽인 채 대기 중이던 위스프의 마법사들이 무방비상태의 그녀를 집중공격할 게 뻔했다.
뻔했는데…….
‘이런.’
리란칭은 허공에 뜬 그녀가 그 상태로 무사히, 헤이스트 마법 덕분에 바닥에 착지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당했군.’
리란칭은 챠이 수를 미끼로 자신이 역으로 잡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리란칭, 자신이 대기 시켜놓은 저격수들이 전부 처리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리란칭은 의문을 품었다.
‘광저우에 머무는 칠성문의 세력만으로는 절대 나를 잡을 수 없을 텐데?’
칠성문의 세력 현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란칭이다. 지금 칠성문은 광저우에서 리란칭을 잡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배치한 부하들을 칠성문이 자력으로 처리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온 것이다. 대마도사라는 대어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대마도사가 미끼였던 모양이다.
‘누가 칠성문과…….’
칠성문을 도와주는 세력이 있다는 의미. 그것도 보통 세력이 아니라 강력한 세력이 있다는 의미.
그 순간.
피윳!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얼음 화살 하나가 숨어 있던 리란칭의 어깻죽지에 꽂혔다.
‘큭!’
놀라운 정확도 그리고 놀라운 위력이었다. 방어 마법은 물론 몬스터의 가죽을 이용해 만든 강력하기 그지없는 방어구를 착용한 리란칭의 어깨를 뚫는다는 건, 4등급 몬스터의 몸뚱이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낌새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리란칭은 지금 모든 감각을 극한까지 곤두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다. 그런 그를 이렇게 무참하게, 무기력하게 저격할 수 있는 궁수는 세상에 많지 않다.
그 덕분이었다.
‘프로스트 스나이퍼.’
리란칭은 칠성문을 도와주는 세력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 회장……!’
* * *
로드리게스 회장은 야심가다.
‘드디어 이런 날이 왔군.’
그런 그는 모래시계문이 등장했을 때, 세상이 위기 앞에 겁에 질렸을 때, 그는 오히려 이것이 정체된 세계의 권력 구도를 재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게 말하면 야심가고, 툭 까놓고 말하면 미치광이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기회의 무대로 생각하는 놈들치고 제정신인 놈들이 있을 리 없다.
‘10년 가까이 걸렸군.’
어쨌거나 로드리게스 회장은 이 기회를 살리고 싶었고, 그게 그가 블랙 스택 설립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 이유였다. 그는 그렇게 미국 내에서 블랙 스택이란 강력한 마법 집단을 손에 넣은 후, 그를 통해 미국이란 세계최강대국을 좌지우지하고, 그 미국을 움직여 세계를 움직이고자 했다.
‘그때 블랙 스택만 장악했었어도 이런 시간 낭비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계획은 블랙 스택 설립 이후 곧바로 송두리째 흔들렸다. 블랙 스택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실력행사도 먹히지 않았다. 블랙 스택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로드리게스 회장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었다.
‘뭐, 애초에 강희나 마르쿠스, 놈들도 정상적인 이유로 블랙 스택을 만든 게 아니었으니…… 싸우는 종족이 달랐으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지.’
그때 로드리게스 회장은 블랙 스택이란 집단이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단순히 이상한 집단이 아니라, 세상의 규칙과 섭리로부터 괴리된 집단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놈들이 사고를 쳐줄 거란 믿음은 확고했을 뿐.’
때문에 로드리게스 회장은 블랙 스택이 언젠가 아주 큰 소란을 피우리라 생각했다. 세상의 규칙과 섭리를 따르지 않은 것들이 앞장서서 달리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블랙 스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만의 세력을 야금야금 모았고, 결국 기회가 왔다.
‘그래도 설마 위스프와 커넥션이 있을 줄이야.’
최고의 기회는 도쿄 하수 시설 사건이었다. 블랙 스택이 관리하던 그곳이 위스프의 아지트로 이용됐다는 소식이 터지는 순간, 미국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블랙 스택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압박이 시작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로드리게스 회장이 나서서 미국을 움직이는 권력자들을 포섭했다.
정확히는 협박이었다.
‘후후후, 그래도 그게 최고의 선물이었지. 내 일생에서 최고의 서프라이즈 파티였어.’
블랙 스택이 위스프와 같은 음모를 품은 집단이란 게 밝혀질 경우, 과연 지금 미국의 권력자들이 권력자로 남을 수 있겠는가?
블랙 스택 스캔들이 터질 경우 블랙 스택의 뒤를 봐주고, 그들을 앞세웠던 미국의 권력자들이 입을 타격은 명백했다. 그들의 권력이 그 순간 끝날 게 뻔했다.
그렇게 블랙 스택을 대신해 로드리게스가 실권을 잡았다. 그 이후 그는 미국을 앞세우며, 각 세력들에게 제안을 했다. 자신이 마법 권력의 정점을 찍는 걸 도와달라고.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이미 세상은 상식의 선을 벗어난 비상식의 시대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결국 비상식의 시대가 로드리게스 회장에게 대어를 안겨 줬다.
‘일본은 유명무실. 여기에 중국과 한국을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줄이야.’
칠성문 그리고 한국의 마법청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건 정말 대사건이었다.
칠성문이 로드리게스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1970년대 핑퐁외교 이상 가는 미중(美中)의 관계 개선을 의미했으며, 한국의 마법청이 고개를 숙였다는 건, 이강우라는 최고의 스페셜리스트 카드가 로드리게스 회장의 에이스 카드가 된다는 의미였다.
블랙 스택의 리볼버, 칠성문의 대마도사, 즈믄나래의 이강우. 3등급 모래군주마저 가뿐하게 잡아낸 4명의 영웅 중 3명이 이제 로드리게스 회장의 편이 된 셈이다.
‘이제 반수가 넘는 세력을 확보했으니…… 게임은 끝이군. 명분만 있으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
“회장님.”
세월의 나날들을 회상하며, 스스로 주석을 달던 로드리게스 회장은 비서의 말에 생각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한국 마법청 부청장이 통화를 원합니다.”
“연결하도록.”
“예.”
그리고 곧바로 안대욱 부청장, 그와 통화를 했다. 그 통화에서, 안대욱 부청장은 로드리게스 회장이 그토록 원하던 확실한 명분을 줬다.
-2등급 모래시계문과 위스프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곳은 북한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드리게스 회장은 세계가 파멸로 갈지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진심 어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바라던 최고의 명분이 왔으니까.
* * *
강희의 모습은 추레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듯,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멀쩡했지만, 그의 손목에는 무언가에 묶였던 흔적이 역력했다.
고문의 흔적이었다.
21세기, 문명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된 시대, 그러나 문명이 발전했다고 인간의 폭력성이 퇴화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이 발전한 덕분에 인간은 더욱더 야비하고, 확실하게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약물을 이용하고, 특별하게 제조된 도구를 이용해, 법적으로 걸릴 게 없는 고문과 심문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안대욱 부청장은 그런 방법을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그가 다시금 마법청의 실권을 쥐었을 때, 그는 강희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강희의 추레한 모습은 그 결과물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세계야. 이토록 간악하고, 사악하고, 야비한 종족이 수천 년 동안 공존을 하다니.’
물론 그 추레함은 강희의 연출이었다.
그에게 시도된 고문, 솔직히 강희는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정말 그를 고문하고 싶었다면, 팔다리를 잘랐어야 한다. 고작 손톱 사이를 바늘로 찌르고, 손목을 묶은 채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자백제 따위를 투약하는 것으로는 강희의 성정에 조금의 티도 만들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그는 연기를 했다.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이 정말로 팔을 자를지 모르니, 고문에 고통스러운 척하면서 적당히 정보를 건네줬다.
하지만 이 과정이 재미있거나, 그러진 않았다. 강희, 그는 솔직히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미 일이 틀어졌다.’
계획을 세웠다.
불사황제 야크센이란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계획.
이강우, 그를 야크센으로 각성시킨 후에 종말의 뱀과 마주 보게 하는 게 계획의 마침표였다.
그런데 지금 그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누구의 실수라기보다는 인간을 과소평가한 우리들의 잘못이겠지.’
절망의 뱀을 유인하기 위해 가져온 2개의 2등급 모래시계문, 개중 하나가 이미 위치가 발각당했다. 마르쿠스의 실수였다. 여기에서 이바노프 역시 실수를 하면서 뒤처리도 실패했다.
당연히 2등급 모래시계문은 클로즈될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나오는 건 야크센이 되겠지.’
이강우는 못해도, 야크센은 2등급 문을 열 수 있으니까.
문을 여는 자, 문을 넘는 자는 야크센이 될 것이다.
그런 야크센이 제 발로 절망의 뱀이 있는 1등급 문 너머로 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이제 본래 목적에 충실해질 때다.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벌고, 2등급 몬스터가 지구에 등장토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면 순리대로 종말의 뱀이 지구를 먹어 치우기 위해 올 것이다.
그 순간.
‘아.’
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렸다.
아주 멀리 있지만, 강희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야크센…… 기어코 네놈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