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신의 사슴
“출발했다고요? 알겠습니다. 연락 감사합니다.”
김재범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장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서 폰이 터지긴 터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네.’
그 순간.
“김재범.”
누군가가 김재범을 불렀다.
‘헉!’
김재범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김재범의 눈에 들어온 건 하선우였다. 하선우란 걸 확인하자마자 김재범은 안도의 한숨 그리고 아주 짜증 가득한 마음을 동시에 표정으로 드러냈다.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편 하선우는 딱 봐도 좋아 보일 수가 없는 김재범의 표정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김재범이 하선우에게 그동안 이유도 모른 채 불만감을 표출했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식사하십시오. 김수애 씨 요리가 끝났으니까.”
때문에 하선우는 괜히 김재범과 시비가 붙기 전에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 잽싸게 등을 돌리는 하선우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김재범이 짧게 혀를 찼다.
‘형수님인 줄 알았네.’
이강우가 빠진 포식자 팀은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중이었다.
일본과 중국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치르고 있었다. 한국이 그 광경을 팝콘을 먹으며 보고 즐길 수 있는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순망치한, 중국과 일본이 망하면 어떤 식으로든 한국도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때문에 한국 정부와 마법청은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모든 전력을 동원해 한반도 곳곳에 있는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 속에서 팀 리더인 이강우가 빠졌지만, 여전히 한국 최강의 팀이라고 할 수 있는 포식자 팀이 휴식을 누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냥에 투입됐다. 몬스터의 강함을 떠나서 현대 병기가 닿지 않는 험난한 산악지역에 등장한 환수 타입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몬스터 사냥에는 이골이 났으니까. 심지어 여유마저 넘치는 그들은 사냥이 끝나면 산에서 취식을 하기도 했다. 산을 사랑한다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먹는 밥 아닌가? 이걸 가지고 산에서 취식행위를 했다고 벌금을 받을 일은 없을 터.
어쨌거나 잡은 몬스터로 김수애가 만드는 요리를 고요한 산에서 맛보는 건, 그 어떤 캠핑으로도 느낄 수 없는 호사였다.
“오늘도 맛있네요.”
“솔직히 너무 맛있어서, 이제 맛없다는 게 그리워질 지경입니다.”
“김수애 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사람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내일 겁니다.”
모두가 김수애의 요리를 칭찬했다.
김수애는 그 말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색은 좋지 못했다. 막상 그녀는 본인이 만든 요리를 거의 맛만 살짝 보고, 먹지 않았다.
미식가.
그동안 맛보지 못한 별미가 아니면, 도무지 먹을 수 없는 저주받은 그녀의 식성과 미각이 그녀를 메마르게 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보기 드문, 잡기 어려운 몬스터를 잡아야 할 판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그녀의 건강을 걱정했다.
한 명만 제외하고.
‘완전 샌드위치 신세군.’
김재범만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현재 포식자 팀의 팀원 중에서 이강우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 김재범뿐이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이강우가 그냥 국가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정도 사실만 알고 있다.
더불어 이강우가 김재범에게만 진실을 알려준 이유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강우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알고 뒤처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강우의 가족과 연인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도닥여줄 누군가는 필요하니까.
나름 이강우 입장에서는 작은 선물을 남겨둔 셈이다. 만약 이강우 자신이, 위험에 생기면 자기 가족을, 김재범이 한눈에 반한 이강우의 여동생을 김재범에게 맡기겠다는 의미이니까. 그만큼 김재범을 믿는다는 이야기다.
‘대장, 그냥 살아만 오십시오.’
그러나 김재범은 그런 기회 같은 건 오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냥 멀쩡히 대장 소개로 데이트해서 혜연 씨랑 사귀고 싶으니까.’
그 소원과 함께 김재범이 앞에 놓인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가득 찼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의 기쁨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재범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 식사는 잘하고 있습니까?’
* * *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가득 채운 콘크리트 잔해들 속에서 오롯하게 서 있는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가 모래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유일하게 채우고 있었다.
끼익!
그때 모래시계문이 열렸다. 문 너머의 칠흑 같은 어둠에서 사람 한 명이 등장했다.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등장한 사내는 나오자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푸른눈 도마뱀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찹쌀가루와 함께 튀긴 후에 탕수육 소스 같은 과일을 베이스로 한 소스를 바르는 겁니다. 제가 과일만 확보했으면, 정말 최고의 맛을 보여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곧바로.
“푸른눈 도마뱀은 불에 살짝 익힌 후 먹는 것이 진정한 맛이다. 괜한 조리법은 맛을 해칠 뿐. 소스를 넣는다는 건, 재료에 대한 모욕이다.”
다른 사내가 대답과 함께 등장한 사내의 등 뒤에서, 본인 역시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든 채로 등장했다.
이강우와 기예르모.
그들이 홀치기 이론을 기반으로 문을 통해 다른 문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었다.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는 문을 이용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만약 이게 역사에 기록된다면, 이강우와 기예르모는 마치 라이트 형제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터.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그 둘은 막상 이 역사적인 사건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제가 만든 튀김을 게걸스럽게 먹은 겁니까? 소스도 만들지 않았는데?”
“그러는 너도 내가 구운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었을 텐데?”
“이미 만든 걸 버릴 순 없잖습니까? 참고로 전 당신이 만든 걸 더 익혀서 먹었습니다. 더불어 정말 순수하게 구워 먹으면, 푸른눈 도마뱀 특유의 피비린내 때문에 먹기 힘듭니다. 핏물을 더 확실하게 제거한 뒤에 향신료로 피비린내를 잡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예르모, 당신이 만든 구이는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입니다.”
“20점? 그 피 맛이 푸른눈 도마뱀의 진짜 맛이다! 생명이 꿈틀거리는 맛!”
“그럼 그냥 피를 뽑아 드시지요? 그렇게 피 맛이 좋으면. 그쪽에게 도축을 맡겼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내가 도축을 해서 다행이지.”
푸른눈 도마뱀.
8등급 몬스터로 희귀종이다. 보석 같은 눈알은 보석과 같은 가격에 거래될 정도였다. 그래서 보통 푸른눈 도마뱀을 이야기할 때는 녀석의 눈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예르모와 이강우는 오직 하나, 푸른눈 도마뱀의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더불어 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벌써 한 시간째였다. 유적에서 나오기 전까지, 그 둘은 이 이야기를 거듭 반복했다.
솔직히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만, 반대로 그게 그 둘에게 활력을 줬다. 음식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으니까
그런 그들의 설전이 멈춘 건.
“그러니까 그 고기는…….”
“흥, 맛도 모르는 애송이.”
그 둘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아, 통역 마법 끝났네.”
“이제 좀 조용하겠군.”
통역 마법이 완료되는 순간,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 설전이 잠시 멈췄다. 설전이 끝난 그 둘은 곧바로 눈빛을 바꿨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번쩍!
일단 기예르모가 라이트 마법으로 불빛을 만들었다. 라이트 마법이 주변을 밝혀줬다. 곳곳에 붕괴의 흔적이 역력했고, 바닥에는 무릎까지 물이 차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아마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오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저 보는 순간 무언가를 하려던 욕구 전부가 사그라질 정도.
그러나 이강우와 기예르모는 기죽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것 앞에서도 기세등등했던 둘이다.
무엇보다 그 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기예르모와 이강우가 방향을 가늠하고 자신들이 가야 하는 방향을 포착하고는 잔해 속에서 자신들이 지나갈 수 있는 틈을 찾아봤다. 다행히도 앞서 온 탐색 로봇이 이미 어느 정도 길을 확보해 준 덕분에 시간은 좀 더 아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길이 사람이 지나갈 만큼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작업이 필요한 상황.
이강우가 불의 전사 한 명과 얼음 전사 다섯 명을 소환했다. 불의 전사는 횃불 역할을 했고, 얼음 전사 다섯은 이강우가 아이스웨폰으로 만들어준 삽과 곡괭이를 들고 길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들이 지나갈 만한 길이 생겼다. 이윽고 그들이 그 틈을 통해 막힌 길 너머로 이동했다. 앞선 곳과는 다르게 덜 엉망이 된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전진했다.
첨벙첨벙.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물소리가 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첨벙거리던 물소리가 사라졌다.
‘뭐지?’
‘왔군.’
무언가의 기척을 둘이 동시에 느꼈다. 그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등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그 순간.
촤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강우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이강우는 피하지 않았다. 본인이 피하면 기예르모가 위험하니까. 더불어 이강우는 피할 필요도 없었다.
캉!
이강우를 호위하듯 서 있던 얼음 전사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것을 잡아냈다.
꽈악!
얼음 전사가 잡은 건 긴 혓바닥이었다.
벽두꺼비였다.
벽 속에서 숨죽인 채, 먹을 걸 찾지 못해 굶어 죽어가던 놈은 갑작스러운 먹잇감의 등장에 앞뒤를 재지도 않은 채 혓바닥을 발사했다. 조심성 많은 놈답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이강우가 아니라, 녀석의 명줄을 당기는 계기가 됐다.
놈의 정체를 확인한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동시에 소리쳤다.
“크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벽두꺼비였다.
* * *
호령은 두 눈을 감은 채 숨만 쉬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이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죽는구나.’
이 생각.
죽음이 코앞까지 왔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그녀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거듭 죽음에 관한 생각만 했고, 그 생각 후에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런 그녀가 살아 있는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미 비상식량은 예전에 다 먹었다. 그나마 하수 시설이라서 물이 있었지만, 실상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간신히 몸을 피했던 장소까지 물이 찼다. 하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자리를 피해야겠지만, 그럴 힘조차 없었다.
특히 2등급 모래시계문을 바라본 게 결정적이었다. 그 문을 보는 순간, 그 문은 그녀가 가진 모든 여력을 짓뭉개버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못을 때리는 망치처럼, 호령을 때려버렸다.
그런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죽는구나.’
똑같은 생각이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Cream.”
“스파게티.”
“No! Only cream!”
“스파게티가 최고라니까요.”
그런 그녀의 귀에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 * *
벽두꺼비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강우나 기예르모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이강우가 공격당하는 순간, 이강우를 호위하는 불과 얼음의 전사들이 나섰다.
까마득한 오래전, 불사황제 야크센을 위해, 그들이 살던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역전의 전사들은, 그들의 주인의 그릇이 된 이강우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심지어 이미 벽두꺼비의 혓바닥이 잡힌 상황이었다. 놈의 그 이후 처지는 끔찍했다. 얼음 전사들이 들고 잽싸게 자신의 신체 일부로 창을 만든 후에 벽 사이에 꽂아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창을 뽑아 재차 찔러 넣었다. 벽을 벌집처럼 만들었다.
“아!”
그 광경을 보고 이강우는 아차 싶었다.
가차 없는 응징에 벽두꺼비의 몸은 걸레가 됐고, 녀석의 내장이 바닥에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기예르모의 표정이 달라졌다. 저 아까운 게 더러운 하수와 뒤섞이는 장면을 본 기예르모가 소리쳤다.
“뭐해? 아깝게?”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닙니다!”
통역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둘이 각기 다른 언어를 지껄였음에도 그 둘은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일단 잽싸게 나서서 벽두꺼비의 내장을 조금이나마 건졌다.
여기서 다시 의견이 충돌했다.
“생으로. 무조건 생으로. 굳이 조리를 하자면 차갑게 얼려서.”
기예르모는 얼마 구하지 못한 벽두꺼비의 내장 크림을 그냥 생으로 먹어야 한다고 했고.
“얼마 있지도 않은데 생으로 먹으면 금방 사라집니다. 크림 스파게티가 좋을 듯합니다. 스파게티 면을 구할 순 없으니까, 스튜로 해 먹죠. 좀 더 풍미를 즐기는 방법으로 접근합시다.”
이강우는 얼마 없는 이 크림을 좀 더 즐길 수 있는 요리법을 쓰자고 말했다.
정말 별거 아닌 거지만, 그 둘은 진지하게 설전을 다시 시작했다.
그 무렵 불의 전사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적이라고 판단한 불의 전사는 그 무언가를 향해 신속하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내 불의 전사는 자신이 발견한 게 적이 아님을 알고는 그 자리에 멀뚱히 횃불처럼 서 있었다.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그런 불의 전사 근처에 몸이 반쯤 잠긴 시체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설전을 멈춘 채, 곧장 시체에게 다가갔다.
“호령?”
시체의 정체는 호령이었다.
일단 이강우는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맙소사.’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온몸에서 나는 악취는 아무래도 좋았다. 온몸에 뼈만 남았을 정도로, 앙상했고, 얼굴은 시체 색이었고, 입술은 검게 죽어 있었다. 피부 곳곳에 난 상처는 곪은 정도가 아니라 썩어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심장 고동 소리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심각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일단 이강우는 그녀를 물 밖으로 옮겼다. 기예르모도 굳은 표정으로 호령을 살폈다.
그때 기예르모가 말했다.
“벽두꺼비의 침과 크림을 섞어.”
설전을 위해 통역 마법을 쓴 덕분에 이강우는 곧장 기예르모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벽두꺼비의 왕수와 내장 크림을, 가지고 온 특수 제작된 보온병에 넣고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호령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에 그녀의 입에 직접 넣어주려고 했다.
“못 먹어.”
그걸 본 기예르모가 한마디 더 했다.
기예르모의 말이 맞았다. 지금 호령은 뭔가를 머금을 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눕힌 후에 액체 상태의 뭔가를 먹이는 건, 기도를 막아 고통을 줄여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답은 하나.
이강우 본인이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머금은 후에 호령의 입에 직접 넣어줬다. 그렇게 했음에도 호령은 여전히 제대로 머금지 못했다. 이강우가 혀로 자신이 머금은 것을 그녀 입에 억지로 밀어 넣어줬다. 그 후에 그녀의 턱을 들었다. 머금은 게 조금이라도 식도에 들어가도록 했다.
“삼켜! 호령, 삼켜야 산다.”
이강우가 재차 호령을 향해 말했다.
그러는 사이 기예르모가 슬그머니 누더기 같은 옷, 그 안에 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수정으로 만든 듯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털 엘크의 무스크다.”
무스크, 사향(麝香)을 말함이다.
본래 사향은 강심제, 흥분제로 사용된다. 여기에 크리스털 엘크의 사향의 효과는 일반 사향노루의 사향보다 효과가 곱절이나 강하다. 멈춘 심장도 잠시 뛰게 해줄 놈이다.
귀한 놈이다. 보통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기예르모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강우가 곧장 그 병을 호령의 코 근처에 가져다 놓은 뒤, 손을 흔들어 향이 호령의 코에 닿게 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두근두근!
거의 멈춰있는 거나 다름없던 호령의 심장 소리가 좀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꿀꺽!
그녀의 목에서 음식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호령, 그녀가 간신히 눈을 떴다.
* * *
이강우와 기예르모.
그 둘은 홀치기 대상이 된 7등급 유적에 입장하는 순간, 단순히 식도락을 즐기진 않았다. 그들은 7등급 유적을 무대로 만들었다. 7등급 유적은 그들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는 무대로.
그 덕분에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이강우부터 자신의 실력을 숨기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할 정도로, 몬스터가 불쌍할 정도로, 이강우는 자신이 나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패를 기예르모 앞에서 보여줬다. 불사황제의 권능도 사용했다.
당연한 조치였다.
2등급 유적에서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워야 하는 상대에게 이강우 본인이 가진 패를 숨기는 건 미련한 짓이다.
또한 기예르모는 사교성이 넘치거나, 음모술수를 꾸미는 음흉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강우가 비밀을 보여주든 말든, 자신과 상관없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타입이었기에 부담감도 덜했다.
기예르모 역시 그런 이강우의 행보에 보답하듯, 자신의 유적 사냥 스타일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그런 기예르모의 스타일은 이강우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가장 놀란 건 기예르모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이강우는 홀로 유적을 사냥하는 기예르모라면 당연히 다양한 마법은 무리 없이 사용하는 대마도사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무투파였다. 온갖 종류의 버프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어 싸우는 무투파!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예르모는 유적을 사냥하는 유적 사냥꾼이 아니었다.
생존!
기예르모가 유적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그 무엇도 아닌 살아남는 것이었다.
몬스터를 발견하면, 그 몬스터를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을까? 보통의 유적 사냥꾼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기예르모는 과연 어떻게 하면 이 몬스터와 충돌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부상에 대처하기 위한 온갖 것들을 자신의 몸에 잔뜩 가지고 있었다. 몸을 씻지 않는 건 역시 생존을 위해서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는 그저 고약한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몬스터의 체향!
강력한 몬스터의 체향을 이용해 약한 몬스터들은 알아서 도망치게 만들고, 반대로 강한 몬스터를 상대로는 제이드 플라워, 마령화와 같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의 향을 이용해 놈들이 더러워서 피하게 만드는 거다.
무투파가 된 것도 결국 전투보다는 도주와 방어를 위해 버프 마법을 주력으로 쓰면서 전투를 치르다 보니 육체 능력을 이용한 무투파가 된 것이다.
여기에 생식(生食)을 추구하는 이유 역시 요리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나랑 정반대.’
여러모로 유적에 임하는 기예르모의 태도와 목적은 이강우와 대척점에 있었다.
그래서 이강우는 기예르모를 높게 평가했다.
‘기예르모가 정답이다.’
이강우와 같은 유적 사냥꾼들은 바츠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에 적응한 생물이다.
훌륭하게 적응했지만 결국 바츠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보다 강한 유적을 사냥하는 것, 보다 강한 몬스터를 잡는 것, 대부분의 유적 사냥꾼들은 그것에만 의미를 둔다.
이 모든 건 바츠무가 의도한 것이다.
반대로 기예르모처럼 생존 그리고 출문을 이용한 탈출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모래시계문이 가진 최고의 약점이 공략당할 수밖에 없다.
“호령 내가 누군지 알겠어?”
“이 선생님…….”
“그 선생이란 호칭을 쓰는 걸 보니까 좀 정신이 든 모양이군.”
어쨌거나 이런 기예르모 덕분에 호령은 깨어날 수 있었다.
시체나 다름없었던 호령에게 기예르모는 다양한 종류의 약을 줬다. 깡마른 그녀를 단숨에 정상 체중으로 만들어주는 비약 같은 건 없었지만, 호령은 이제 제대로 된 이지를 가지고,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보다 이 선생님께서 왜 이곳에…….”
물론 아직 모든 게 정상이 된 건 아니었다. 호령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 호령을 보며 이강우는 혀를 찼다.
‘시간이 없어.’
안타깝게도 호령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이강우는 그 시간에 맞게 짧게 고민했다.
‘그녀를 여기다 두고 가면 죽는다.’
호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이곳에 남겨두는 건 그녀의 죽음을 방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녀가 이곳을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출구도 없다.
그럼 그녀를 데리고 같이 이동할까? 하지만 호령을 데리고 2등급 유적에 들어가는 것 역시 여전히 위험한 일이다.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 이곳, 붕괴한 도쿄 하수 시설보다 더더욱 위험한 곳이니까.
여기서 이강우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했다.
‘여기 놔두면 필사. 같이 유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사망.’
확실한 죽음과 아주 높은 확률의 죽음.
결국 후자가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있다.
이강우가 기예르모를 바라봤다.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기예르모의 생존 전략을 기준으로 봤을 때 호령은 짐덩이가 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런 그가 호령을 거부할 가능성은 크다.
그리고 그가 거부한다면 이강우도 거부다. 어쩔 수 없다. 세상 모든 운명을 짊어질 각오를 했는데 호령의 목숨이 아까워서 무리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이강우의 질문에 기예르모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걸 보면 남다른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데리고 들어가지.”
의외로 호쾌한 대답.
“무엇보다 우리 둘이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누가 맞는지 결론이 나지 않을 테니.”
호령, 그녀가 주제에도 없는 판정단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저쪽이에요.”
길을 안내하는 호령은 이강우의 등에 업혀 있었다. 아직 자기 다리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런 그녀의 안내가 멈춘 것은 어느 통로 앞이었다.
굳이 그녀가 안내하지 않았음에도 그 통로 앞에서 이강우와 기예르모는 발걸음을 멈췄다.
‘2등급…… 확실하군.’
‘숨이 막히는군.’
이제까지 지나온 어둠과 똑같은 어둠.
그런데 눈앞의 어둠은 색만 같을 뿐 느낌은 전혀 달랐다.
무서웠다.
‘오지 말라고 위협을 하는 게 느껴진다.’
3등급 모래시계문도 직접 봤던 이강우다. 그리고 이강우는 3등급 모래시계문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춤거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떨렸다.
이강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신이 지친 호령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호령 역시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엄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 역시 2등급 모래시계문을 직시한다면 제정신으로 견뎌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심신이 나약해진 호령을 2등급 모래시계문 앞에 강제로 데려간다?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엄은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때 기예르모가 나섰다. 그가 가지고 온 누더기나 다름없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꺼낸 것은 갈기가 달린 도마뱀의 머리 가죽이었다. 절묘하게 벗겨낸 게 가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예르모는 그 가면을 호령에게 씌어줬다.
호령을 업고 있던 이강우가 뒤를 돌아봤다. 도마뱀 가면을 뒤집어쓴 호령의 모습이 섬뜩했다.
“기만 도마뱀의 머리 가죽이다.”
기만 도마뱀.
7등급 몬스터로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다. 7등급 몬스터 중에서 가장 약한 쪽에 속한다. 생김새도 그냥 덩치가 크고, 몸 곳곳에 갈기가 난 도마뱀이다.
하지만 놈은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수하 부리듯 부린다. 더불어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 앞에서도 조금의 기세도 잃지 않는다.
상대를 기만해서 수하로 부리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기만 도마뱀이다.
“모래시계문의 공포는 인위적인 공포일뿐.”
그런 기만 도마뱀의 머리 가죽은 공포를 차단한다. 기만 도마뱀이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 앞에서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그걸 이렇게 이용하는 건 처음 봤다.
‘진짜 괴짜군.’
어쨌거나 효과는 확실했다. 이강우는 자신에게 업힌 호령으로부터 계속 느껴지던 떨림이 멎은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심박수도 조금 전과 다르게 잔잔해졌다.
한편 기예르모는 크리스털 엘크의 사향을 마심으로써 2등급 모래시계문이 주는 공포를 이겨내고자 했다. 크리스털 엘크의 사향 효과 역시 확실했다. 기예르모의 심장이 사륜자동차의 엔진처럼,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
기예르모가 먼저 앞장서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남은 건 이강우뿐.
이강우는 숨을 골랐다.
예전이라면 이 공포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그 역시 기예르모처럼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이 공포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근 이강우는 이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포를 마주 봤으니까.
‘종말의 뱀에 비하면…….’
종말의 뱀 시이!
그 말도 안 되는 괴물에 비하면 2등급 모래시계문이 내뿜는 공포와 위엄은 애교다.
‘이건 공포도 아니지.’
이강우의 입술 떨림이 멈췄다. 동시에 이강우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세 명이 2등급 유적 안으로 입장했다.
* * *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혼란 속에서, 여러 고위 직책을 가진 마르쿠스는 그 누구보다 바빴다. 당장 세계 종말이 아니라, 과로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마르쿠스가 병가를 냈을 때 긴급한 상황임에도 그 병가는 쉽게 통과했다.
마르쿠스를 보는 사람들도 그가 지금 한계에 도달하고도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마르쿠스의 능력과 영향력을 고려하면 그의 몸에 탈이 나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는 일만큼은 피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병가를 얻어낸 마르쿠스는 당연히 휴식을 누리지 않았다. 그는 이바노프, 그를 찾아갔다.
“이바노프.”
“마르쿠스군.”
짐승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비루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토해낸 불꽃과 함께 있던 이바노프는 마르쿠스의 방문에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다. 마르쿠스는 그런 이바노프를 향해 질책하듯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대적자의 그릇을 처치하려고 했던 걸 말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이강우, 그를 처치하지 못했다. 마르쿠스, 자네와 강희에게는 희소식이겠지.”
이바노프는 마르쿠스가 이강우와 관련된 사건으로 자신을 찾아왔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무덤을 만드는 게 네 역할이었을 터!”
무덤!
그 말에 이바노프는 더 이상 심드렁한 표정 따위는 짓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덤에 문제가 생겼나?”
“대적자와 괴식가, 그들이 2등급 모래시계문을 열었다.”
“어떻게!”
마르쿠스의 말에 이바노프가 분노했다. 그가 분노하자, 그가 토해낸 불길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활활!
그렇게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잦아들었을 때.
“신록(神鹿).”
이바노프가 읊조리듯 한 단어를 머금었다. 이윽고 이바노프가 마르쿠스에게 물었다.
“아무리 놈이 대적자의 그릇이라고 해도 신록을 처치할 순 없다. 신록은 오로지 종말의 뱀만이 먹어 치울 수 있는 괴물!”
“장담할 수 있는가?”
장담!
그 반문에 이바노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장담할 수 있냐고?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이강우를 처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무엇보다 이강우가 야크센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적자, 불사황제 야크센은 2등급 몬스터를 처치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만약 야크센이 이강우의 몸을 차지하고, 2등급 몬스터를 처치하면 10년을 잡고 기획한 거대한 계획에 큰 문제가 생긴다. 남은 2등급 모래시계문마저 제 기능을 상실하면…….
‘종말의 뱀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모든 준비는 물거품이 된다.
종말의 뱀 시이!
세상을 먹어 치우는 그 뱀은 바츠무도 어찌할 수 없다.
시이는 자신의 흥미가, 입맛이 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놈을 다루는 방법은 미끼로 유인을 하는 것밖에 없다. 미끼가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최악이다.
단순히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날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가 되는 건 소모다.
모래시계문은 무한하지 않다. 그 모래시계문을 채우고 있는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하고도, 종말의 뱀 시이를 살찌우지 못한다면, 시이의 피와 살점을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영생의 바츠무가 필멸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이바노프, 그가 자존심을 죽였다.
마르쿠스의 명령을 받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모든 원흉은 칠성문이다.”
마르쿠스, 그는 이제까지 자신들의 계획이 일그러지는 모든 과정에 칠성문이 개입했음을 알았다.
그동안 괜히 벌집을 쑤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칠성문을 그냥 견제만 했다.
“칠성문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서, 정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바노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바노프의 표정은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개운해 보였다.
마르쿠스는 그런 이바노프의 표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결국 이런 일이 생기는군.’
* * *
하늘에 닿을 기세로 자라난 나무는 그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그런 나무가 바다처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숲은 그 크기만으로 모든 생명체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런 위엄 넘치는 숲에서…….
“이번 요리는 나흘 전 잡은 맹독두더지의 다리 살을 이용해 만든 불고기로 소스는 간장과 비슷한 맛을 내는 대왕독벌의 독침액을 베이스로 만들었으며, 맹독버섯인 검붉은 우산버섯과 유적송이버섯을 잘게 썰어 추가했습니다. 맹독두더지 버섯 불고기입니다.”
“내 요리도 맹독두더지로 만든 요리다. 맹독두더지의 몸에서 독성이 가장 약한 부위인 뱃살을 해독기능을 가진 약초로 덮어 나흘 동안 숙성시킨 후에 구운 맹독두더지 뱃살 구이다.”
때아닌 요리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강우와 기예르모.
그들은 어느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살이 오른 만큼 올라 예전 모습을 거의 되찾은 호령 앞에 자신들이 만든 요리를 제공했다. 호령은 그런 그 둘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대신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재 35승 19무 31패로 이 선생님이 앞서고 있습니다.”
호령의 말에 이강우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고, 기예르모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호령이 품에서 조심스럽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낸 뒤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만든 각각의 요리를 맛봤다.
이강우의 요리는 불고기란 설명에 딱 어울렸다. 불고기 특유의 달곰한 맛과 고기가 가지는 감칠맛 여기에 버섯이 보여주는 식감은 진짜 제대로 된 불고기 요리를 맛보는 것 같았다.
기예르모의 뱃살 구이는 처음 보는 맛이었다. 뱃살에 가득 찬 기름기는 무겁고, 느끼했지만 반대로 독성을 없애기 위해 쓴 약초의 알싸함이 요리를 씹는 순간순간마다 기름기를 눌러줬다.
그렇게 두 가지 요리를 맛본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곧바로 감상평을 내놓았다.
“이 선생님의 맹독두더지 불고기 요리는 오리지널 불고기 요리에 가까운 맛을 냈습니다. 맹독을 품은 요리재료를 가지고 이런 요리를 만든 게 대단할 따름입니다. 달곰했고, 식감 역시 훌륭했습니다. 특히 곁들인 버섯들과 고기의 식감이 아주 잘 어우러졌습니다. 달달하면서도 적당한 짠맛을 가진 소스 역시 훌륭했습니다.”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척박한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에서 가지고 온 조미료 도움도 없이 불고기를 만들어내는 건, 요리가 아니라 작품이었다.
‘대왕독벌을 잡은 게 컸지.’
이강우는 이런 요리를 만들어낸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기예르모 님께서 만드신 맹독두더지 뱃살 구이의 경우에는 이제까지 맛본 그 어떤 요리와도 다른 맛을 품고 있었습니다. 기름진 뱃살 사이를 채운 약초의 향은 맛있다기보다는 신비한 맛이었습니다. 특히 뱃살의 기름기가 입안에서 녹아내릴 때의 감칠맛과 그 감칠맛을 곧바로 해소해주는 약초의 알싸함의 어우러짐이 절묘했습니다.”
훗! 기예르모가 코웃음을 뿜었다.
“두 분 다 멋진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호령의 칭찬은 여기까지였다.
이제는 이 중 하나의 요리를 승자로, 다른 하나를 패자로 만들 때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전 기예르모 님께서 만드신 요리를 꼽겠습니다.”
이윽고 호령이 판정을 내리는 순간 이강우가 미간을 찌푸렸고, 기예르모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맛있었지만, 이 선생님의 요리가 부족한 환경에서 불고기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면, 기예르모께서 만드신 요리는 그 요리 자체의 맛을 극대화한 요리였습니다. 둘 다 대단하지만 맹독두더지의 진미를 살린 건 기예르모 님께서 만드신 요리였습니다. 솔직한 말을 하면, 이 선생님의 요리는 굳이 맹독두더지가 아니더라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버섯이 더 맛있었습니다.”
“3게임 남았군.”
기예르모가 곧장 호령의 말에 자기 말을 덧붙였다.
“하루 3끼, 내일이면 동점이 되겠군.”
“6게임 차가 되겠죠.”
그 말에 이강우가 어림도 없다는 듯 반문했다.
2등급 유적 입장 두 달째.
2등급 유적은 2등급에 어울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숲이었다. 입장 두 달 동안 최대한 전투를 피했음에도, 무려 오백이 넘는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다.
또한 상대한 몬스터의 평균 등급은 6등급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와 연거푸 조우했다. 심심하면 5등급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고, 4등급 몬스터와도 열다섯 번이나 전투를 치렀다.
그런 거듭된 유적 사냥 속에서 그나마 활력소가 되는 건 지금과 같이 치러진 이강우와 기예르모의 요리 대결이었다.
요리 대결을 하는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기예르모의 지론이 답변이 될 것이다.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고,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는 건 인간이 생존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과 즐거움과 오락이다!”
세상의 운명, 인류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식사를 할 때마다 세상의 운명을 부르짖으며, 일부러 맛없는 것을 억지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욱이 이들이 요리에만 빠진 건 절대 아니었다.
우오오!
울창한 숲을 기괴한 울음이 가득 채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맛 대결을 펼치던 이강우 일행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강우가 두 눈을 감았다.
‘뭐지?’
그런 이강우의 감은 두 눈앞에 자신이 소환한 얼음 전사가 어떤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는 장면이 어렴풋하게 아른거렸다. 그 아른거림에서 이강우가 곧장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5등급 몬스터 성족공룡입니다.”
몬스터의 정체를 말하는 순간 기예르모가 곧장 답을 내렸다.
“성족공룡은 포악한 놈이지. 놈의 영역에는 어지간한 몬스터가 접근하지 못할 터. 잡아도 뒤끝은 없다.”
이 파티에서 전투 여부를 판단하는 건 기예르모였다. 생존이 최우선 과제인 상황에서는 그의 판단이 가장 믿을 수 있으니까. 그는 혼자 몸으로 3등급 모래시계문도 클로즈했던 생존의 대가이니까.
이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잡는다.’
이강우가 전투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우 일행 머리 위로 얼음 전사들이 지나갔다.
개중 얼음 전사 한 명이 이강우의 근처에 착지했다. 이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음 전사의 등에 올라탔다. 얼음 전사가 이강우를 짊어진 채 달려갔다.
* * *
거대한 성족공룡의 몸에 붉은 뿌리로 된 무기를 쥔 얼음 전사들 일곱이 달라붙어 있었다. 달라붙은 일곱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무기를 성족공룡의 몸에 쉴 새 없이 찔러 넣었다.
찔러 넣은 붉은 뿌리는 성족공룡의 몸에 뿌리를 내리며, 줄기를 키웠고, 얼음 전사들은 자라난 줄기를 꺾은 후에 그것을 다시 성족공룡의 몸에 찔러 넣었다.
크아아아!
성족공룡이 괴성을 토해냈다. 넘치는 생명력과 회복력을 가진 자신의 육체를 탐스럽게 빨아들이는 붉은 뿌리의 존재는 성족공룡을 공포라는 늪에 빠뜨렸다.
그때 성족공룡의 주둥이 속으로 검은 파리 떼가 들어왔다. 검은 파리 떼는 성족공룡의 입을 막고, 녀석의 얼굴 전체를 휘감았다. 검은 복면을 쓴 듯한 성족공룡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런 성족공룡의 몸에서 흘러나온 모든 것들은 성족공룡을 향해 작열하는 절망의 태양이 흡수했다. 덕분에 피 튀기는 전투는 없었다. 흘러나온 모든 것을 절망의 태양이 청소기처럼 깔끔하게 흡수했으니까.
이강우는 이 광경에 그 어떤 참가도 하지 않은 채, 무덤덤한 눈빛으로 이 광경을 지켜만 봤다.
왕의 위엄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왕의 위엄이 이강우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성족공룡과의 전투에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 정도로는 그놈을 잡을 순 없어.’
이강우는 만족감 대신 불만감을 품었다.
이바노프.
불만감의 원흉이었다.
이강우는 여전히 그를 상대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크로포드가 건네준 8서클 개방 비약 덕분에 8서클을 개방했지만, 여전히 이바노프의 강함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강우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큰 문제였다.
‘그를 죽이지 못하면, 결국 모든 건 의미가 없다.’
이강우가 이번 2등급 유적을 클로즈한다고 해도 2등급 유적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바츠무는 이강우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방해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강우 일행이 밖으로 나갔을 때 세상은 엉망이 되어있을지도 몰랐다. 이강우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최악에는 2등급 몬스터가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빌어먹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이강우는 다시금 조급함을 느꼈다. 이강우가 기예르모와의 요리 대결에 집중하는 것도 사실 이 조급함을 잊기 위해서였다. 조급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강우가 아주 오래전에 깨달은 인생의 진리였으니까. 조급함에 쫓겨서 일을 그르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급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강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이강우가 성족공룡을 단숨에 해치우고, 입술을 깨물며 조급함을 억누르고 있을 때.
‘음.’
기예르모는 이곳저곳을 누비며 약초로 쓸 수 있는 것들, 식용 가능한 풀들만을 고르고 있었다.
지금 이강우가 전투를 치르는 상황이었지만, 기예르모는 신경 쓰지 않았다. 늑대와 호랑이가 싸운다고 해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줍지 않는 건 아니니까.
‘음?’
그런 기예르모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 * *
유적이었다.
오래전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흔적이 원시림 속에 머리만을 빠끔히 내밀고 있었다. 발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기예르모가 약초를 찾기 위해 바닥의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눈길을 주는 게 아니었다면 절대 못 찾았을 것이다.
이강우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이강우와 기예르모, 호령이 그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은 생각보다 컸으며, 잘 만들어져 있었다. 바위를 반듯하게 잘라 만든 통로는 어지간한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적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을 반긴 건 반듯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정육면체였다. 변 하나의 길이가 5미터는 될 법했다. 그런 거대 정육면체에는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그림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첫 번째 면에는 찬란한 문명이 새겨져 있었다.
두 번째 면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새겨져 있었다.
세 번째 면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문명을 처참하게 유린하는 광경이 있었다.
네 번째 면에는 한 마리의 사슴이, 사슴이 가슴에 품고 있는 풍성한 가슴 털마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디테일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사슴은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뿔은 제 몸보다 더 거대했다. 또한 뿔은 가지마다 각기 다른 잎사귀가 자라나 있었다.
그 사슴을 보는 순간 이강우는 직감했다.
‘이게 2등급 몬스터구나.’
이건 흔적이다.
멸망을 앞둔 문명의 존재들이 그 사실을 남겨두기 위해, 마지막 전력을 다해 만든 흔적.
자신들은 존재했었다!
그리 말하고 싶었던 자들이 마지막 힘을, 여력을 쥐어짜내 만든 흔적.
당연히 이걸 만든 이들은 모든 걸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문명이 이룩한 모든 것을 이 돌덩이에 가득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면 하나하나가 아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면을 하나의 사슴으로 가득 채웠다는 건, 그 사슴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터.
“신기하군.”
“대단하네요.”
한편 호령과 기예르모는 이 거대한 정육면체를 바라보며, 그저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이강우처럼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학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그들 입장에 눈앞에 있는 정육면체는 그저 대단한 작품, 그것에 불과할 따름이었으니까.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요?”
그때 호령이 질문했다.
이강우가 대답했다.
“이 세계에서 살았던 자들이 남긴 거겠지.”
그저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다.
그런데 그 대답을 뱉는 순간.
‘가만.’
이강우는 묘한 의문에 빠졌다.
‘이곳은 분명 바츠무에 의해 문명이 몰락한 세계다. 그리고 2등급 몬스터도 있는 세계.’
2등급 몬스터는 미끼다. 종말의 뱀 시이, 놈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 그리고 여기에 2등급 몬스터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곳에 종말의 뱀이 와야 한다.
그런데 왜 이 세계는 종말의 뱀으로부터 안전한 것일까? 이 세계가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아니다.
이강우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바츠무에게 이 세계는 이대로 남겨둘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남겨 뒀겠지?’
종말의 뱀을 살찌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세계를 남겨둔 것이다.
이강우가 다시금 사슴 그림을 바라봤다. 이강우는 사학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이 그림을 그린 자들이 이 그림에 담은 걸 일일이, 세세하게 알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그림을 보고 나름의 감상을 할 수는 있었다.
‘뿔마다 각기 다른 잎사귀가 달렸고, 족적마다 나무가 자라나는 걸 굳이 집어넣었어.’
사슴이 지나갈 때마다 각기 다른 나무들이 자라난다.
‘자라난다.’
이 순간 이강우의 눈앞에 이제껏 상대한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떠올랐다. 종류가 상당했다. 더 신기한 건, 각각의 종들이 각각의 영역을 구축한 채 살아간다는 점이었다.
이강우가 나름의 답을 내렸다.
‘여기가 사육장이구나.’
이 세계가 아직 존재하는 이유. 바츠무가 이 세계를 그대로 남겨둔 이유.
사육장으로 쓰기 위함이다.
이 세계에서 바츠무는 몬스터를 키워 내고, 그 몬스터를 모래시계문 너머의 유적에 투입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처참한 진실이었다. 나름의 문명을 이룩한 세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유린당할 줄은 이 세계에 살아갔던 생명체 중 그 어떤 생명체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강우는 속이 쓰렸다.
그러나 그 속쓰림 속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강우가 손으로 사슴의 그림을 만졌다.
‘달리 말하면…… 이 사슴을 해치우면 바츠무 새끼들에게도 적잖은 타격이 된다는 의미이겠군.’
2등급 몬스터와의 전투는 예정된 일이 아니다. 아니, 피해야 하는 일이다.
애초에 이강우와 기예르모, 단둘만이 이번 2등급 유적 사냥에 투입된 건 그들이 2등급 몬스터와 전투 없이 유적을 클로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투를 위한 조합이 아닌, 생존 그리고 유적 클로즈를 위한 조합이다.
하지만 이 순간 이강우는 2등급 몬스터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그때.
드르륵!
갑자기 굉음과 함께 유적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강우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리자, 기예르모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문 앞에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예르모도 놀란 듯, 이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했다.
“먹을 게 있나 찾다가 이상한 걸 밟았을 뿐이다. 뭔가를 일부러 한 건 아니다.”
이때 이강우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 유적은 최후의 흔적이다.
당연히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은 최후까지 바츠무 그리고 몬스터에 저항한 자들이다.
“잘하셨습니다.”
그런 그들이 최후까지 숨기고자 했던 게 있다면?
이강우가 새롭게 등장한 통로 너머로 몸을 날렸다. 호령과 기예르모가 그 뒤를 따랐다.
* * *
불의 전사가 횃불이 되어 앞장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건 이강우뿐이었다. 처음에는 셋이 같이 움직였지만, 비밀 통로의 길이가 짧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기예르모와 호령은 비밀 통로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함정은 없고.’
비밀 통로는 길이가 상당했다.
이강우는 제법 걸었음에도, 아직 통로의 어둠이 계속 이어지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함정 같은 건 없다는 부분이었다. 보통은 비밀 장소인 만큼, 외부 침입자를 방해하기 위해 함정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시에 통로 자체가 꽤 조잡했다.
이 유적을 만든 문명의 존재들은 나름 훌륭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유적 자체가 그 증거였다. 그런데 지금 이강우가 걷는 비밀 통로는 그들이 가진 기술력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다. 투박하고 조잡했다.
‘전형적인 날림 공사의 결과물이지.’
시간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급하게, 일단 당장 남길 게 있어서 이 비밀 통로를 만들었을 것이다.
“후우.”
이강우가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때 마치 이강우가 숨을 한 번 고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의 전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불의 전사가 고개를 돌려 이강우를 바라봤다. 비밀 통로 끝의 공간에 도달한 것이다.
이강우가 눈빛을 보내자, 불의 전사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던 공간이 불의 전사가 내뿜는 불빛으로 가득 찼다.
‘시체.’
10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
그 공간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무언가의 유골이었다. 일단 분명한 건 인간의 유골은 아니었다. 유골은 반투명한 수정으로 되어있었고, 신장도 3미터를 훌쩍 넘겼으며, 뼈의 구조와 굵기 역시 어느 것 하나 인간과 비슷한 게 없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개수도 달랐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대략적으로 봤을 때 이 유적을 만든 문명의 존재들도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했으리란 점, 그게 전부였다.
이강우가 해골 앞에 섰다.
‘무덤인가?’
비밀 무덤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의외로 권력자들은 비밀 무덤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징기스칸, 진시황제…… 어쩌면 이게 이들의 풍습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이상할 건 없다.
단지 정말로 이곳이 비밀 무덤이라면, 이강우 입장에서는 힘이 빠질 법한 상황이다.
최후의 저항자들이다.
바츠무에 의해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마지막까지 지켜본 자들이고, 그 사실을 어떻게든 남기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라면 혹시 바츠무 혹은 바츠무가 다루는 몬스터, 이 세계를 사육장으로 만든 그 사슴에 대한 대비책, 최후의 무기 같은 걸 만들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이강우는 솔직히 그런 걸 기대했다.
혹은 강력한 마법 아티팩트가 있을 가능성도 기대했다. 바츠무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침략하고자 하는 문명의 존재들에게 마법을 주는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마법에 의존할수록 바츠무 입장에서는 오히려 상대하기 쉬워지니까.
‘혹시 모르니까.’
물론 면밀한 조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분석.’
이강우가 곧바로 분석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 마력의 흔적이라면 눈에 보일 것이다.
‘흠.’
그러나 분석 마법을 썼음에도 무언가 인상적인 것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숫자도, 마력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무덤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강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 * *
이강우가 유적 밖으로 가장 먼저 나왔다. 그런 이강우를 드넓은 원시림이 반겼다. 이강우의 뒤를 이어 호령이 나왔고, 마지막으로 기예르모가 나왔다.
그렇게 기예르모가 나오자마자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쿠쿠쿠!
유적의 입구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 붕괴에 가장 놀란 건 기예르모였다.
“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정말 놀랐는지, 기예르모는 통역 마법을 쓰지도 않은 채 곧바로 자기변호를 했다.
그런 기예르모를 바라보며 이강우와 호령은 실소를 지었다. 딱히 기예르모가 뭘 했으리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단지 기예르모의 저 반응이 재미날 뿐.
이강우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식사나 합시다.”
유적 탐사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앞선 식사 시간은 성족공룡 때문에 망쳤다. 호령은 든든히 배를 채웠지만, 기예르모와 이강우는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음식 재료가 추가됐다.
성족공룡의 피!
붉은 뿌리와 절망의 태양이 성족공룡이 가진 피와 마력 대부분을 빨아들였지만, 녀석의 심장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 핏물이 남아 있을 터. 앞서 만든 맹독두더지 요리에 어울리는 훌륭한 음료가 될 것이다.
기예르모도 동의했다.
“식사를 해야지. 대신 성족공룡의 피는 무조건 순수한 그대로.”
기예르모가 한마디 했고, 이강우는 조금의 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의 모습에 호령이 눈빛을 빛냈다. 성족공룡에 대해 포식자 팀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는 이번에 성족공룡의 피를 맛볼 수 있게 된 기회를 당연히 반겼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이강우가 피식, 웃었다.
‘유리랑 참 비슷한 점이 많단 말이야.’
식탐 넘치는 호령이 그 식탐을 절제하면서 살아온 게 이강우는 정말 신기할 지경이었다.
참 잘 버텼다.
그리고 정말 큰일을 했다. 호령은 나름 호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평생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순간 이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는 잘 있을까?’
이제까지는 잘 버텼지만, 과연 앞으로도 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이곳을 정말 벗어날 수 있을지, 출문은 어디에 있는지, 세상은 어떻게 됐는지, 온갖 고민이 이강우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더 거대한 고민이 안겨졌다.
2등급 몬스터가 그들 앞에 등장했다.
* * *
‘최악.’
사슴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위엄이 넘치는 사슴. 몸길이는 10미터 남짓했으며, 가슴에는 은빛의 털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소리 없이 걸었으며, 그런 사슴의 몸을 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난 뿔은 가지마다 제각기 다른 잎사귀가 매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사슴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족적마다, 발자국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나무와 초목이 자라난다는 점이었다.
너무나도 성스러운 존재였다. 때문에 최악이라는 표현은 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잃게 만드는 이 몬스터…… 아니, 차마 몬스터라고도 부르기 힘든 이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었다.
이강우 역시 그 사슴을, 마치 신이 만든 듯한 신의 사슴을 보고 최악이라 표현을 쓴 건 아니었다.
‘정말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군.’
최악의 의미는 그 신의 사슴 뒤를 따라다니는 거북이의 존재였다.
거북이는 사슴보다 더 컸다. 몸길이가 50미터는 될 법했다. 등껍질은 정육면체 모양이었다. 그런 거북이는 등에 거대한 모래시계문을, 이강우 일행이 처음 들어왔던 문을 짊어지고 있었다.
‘문과 함께 저런 식으로 이동을 하다니.’
사전에 염두에 두긴 했다. 바츠무가 바보가 아니라면, 2등급 유적의 클로즈 자체도 어렵게 만들어뒀을 것이다. 그저 문만 열고 잽싸게 나오는 걸 막기 위해, 문에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2등급 몬스터와 문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도 염두에 두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이상 접근하지 말도록. 전방 30미터부터는 몬스터들의 영역이다.”
기예르모의 경고처럼, 이 아름다운 사슴과 문을 짊어진 거북의 주변…… 대략 반경 1킬로미터 내에 몬스터가 가득했다. 그 몬스터들은 사슴의 느긋한 움직임에 맞추어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몬스터 대군이 사슴을 호위하고 있었다.
즉, 반경 1킬로미터짜리 지뢰밭이 통째로 움직이는 격이었다.
심지어.
“주변 지형을 아예 새롭게 만드네요.”
사슴의 발걸음에 따라 시시각각 새로운 나무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지형 자체가 분 단위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단순히 문만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건 소원해 보였다.
‘힘들겠어.’
이강우의 푸념마냥 힘든 정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강우는 물어봤다.
“방법이 있습니까?”
탈출의 귀재, 기예르모. 이강우는 그에게 방법을 질문했고, 기예르모는 잠시 고민한 후에.
“35초.”
시간을 말했다.
“35초만 시간을 번다면,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면 나갈 수 있다.”
그 말에 이강우는 꽤 놀랐다.
‘35초라고?’
이강우의 기준에서는 35초 만에 이 몬스터 지뢰밭을 뚫고, 거북이 등껍질 위로 올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건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런 이강우의 표정에 기예르모가 설명을 했다.
“보름 동안 녀석의 영역에 스며들면, 반경 1킬로미터 내의 몬스터 지뢰는 무용지물이 된다. 오히려 놈의 주변에 우글거리는 몬스터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무리에 동화된 인간 세 마리 따위에 의미를 둘 녀석은 없을 테니까. 그럼 저 거북이와의 거리는 300미터 남짓까지 줄일 수 있다. 이후 거북이의 등 위에 오르고, 문을 여는데 걸리는 시간 채 10초도 필요치 않는다.”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예르모의 말이 맞다. 이강우처럼 어렵게 보면 어렵지만, 쉽게 보면 방법 자체는 금방 나온다.
“시간만 있으면 문을 여는 건 애도 할 수 있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다. 방해받지 않을 시간만 확보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결국 하나.
“그 30초란 시간을 버는 게 핵심이군요.”
“이제부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나설 때.”
시간이다.
30초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또한 혹시 모를 변수를 확보하기 위해, 사슴과 거북이 그리고 이 주변 몬스터들의 정체를 보다 확실하게, 자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 탐색 과정에만 최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소모될 터. 하지만 변수만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30초 정도는 벌 수 있어.’
못할 건 없다.
무엇보다 주변에 넘치는 몬스터는 오히려 이강우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줄 것이다. 붉은 뿌리와 절망의 태양에게는 최고의 만찬이 되어줄 테니까. 여기에 이강우가 확보한 7서클 마법 아티팩트 4개까지!
시간을 버는 건 어렵지 않다.
변수를 줄이면 된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 * *
“문곡께서?”
류복희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등골이 오싹하게 식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곧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동시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말도 안 돼.’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를 위해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칠성문과 위스프의 전면 대결이 시작됐다.
어찌 보면 우스운 표현이다. 칠성문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가 세력이고, 위스프는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도 테러 조직에 불과하다. 테러 조직과 중국이란 강대국이 전면 대결을 한다는 표현 자체는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표현은 작금의 상황에서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위스프는 작정한 듯, 중국 전역에 정체를 감춘 채, 경호를 받은 채 활동하는 칠성문의 일곱별을 공격하고, 중국 공산당 간부들을 습격했다.
‘리란칭과 하마드는 염두에 두었다.’
물론 대비책은 세워두었다. 일단 중국 정부와 칠성문이 위스프의 전력을 모를 리 없다. 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할 땐 당하더라도 쉽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스프 역시 뼈를 주고 살을 취할 각오로 덤벼든다는 점이었다. 한 번의 습격에 수십이 넘는 조직원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빌어먹을.’
정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최강의 실력자가 어떤 대비책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이었다.
푸른 불꽃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는 제아무리 경호를 단단히 구성해도, 군대를 경호원으로 붙여도, 그 모든 것을 우습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강우는 그런 괴물과 싸워 지지 않았단 말인가?’
대략적인 상황을 보면, 도쿄 하수 시설에서 이강우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인류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려는 다른 세계의 존재임이 분명했다.
결국 그들이 류복희의 가장 큰 지원자라고 할 수 있는 문곡 주성륜마저 습격을 했다. 주성륜은 팔과 다리가 하나씩 잘리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물론 주성륜을 잡기 위한 습격 과정에서 위스프의 조직원은 무려 마흔 명이 죽었다고 한다.
‘칠성문을 흔들기 위해 위스프 전부를 써먹을 작정이군.’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위스프는 세상과 싸울 생각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칠성문 그리고 중국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생각이다.
류복희는 얼굴에서 두 손을 뗐다. 하얗게 질렸던 그의 얼굴색이 나름 정상으로 돌아왔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반대로 이건 어떤 의미에서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결국 이제까지 참고, 또 참았던 그가 최고의 수혜자가 되겠군.’
이런 날을 기다리며, 몸을 웅크린 채 강력하게 세력을 모으던 자가 있었으니까.
‘로드리게스 회장, 정말로 그가 원하던 그림이 마련됐군.’
로드리게스 회장.
그는 이런 날에 대비해서, 세상을 구해내고, 그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권력을 쥐게 될 날을 위해서, 블랙 스택의 입김이 닿지 않는 자신만의 세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최근 도쿄 하수 시설 사건으로 블랙 스택이 대대적인 감사를 받으면서, 로드리게스 회장은 미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걷잡을 수 없이 키우고 있었다.
미국이 이제는 블랙 스택보다 로드리게스 회장을 더 믿고, 그에게 베팅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칠성문이 위스프와 상잔을 치르는 건, 로드리게스 회장 입장에서는 가장 멋진 시나리올 것이다. 경쟁자인 칠성문의 희생 위에 그는 영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류복희는 그 사실이 씁쓸했다.
하지만.
‘그래, 누가 영웅이 되어도 좋다. 누가 영웅이든, 그를 기억해줄 미래가 남아있다면.’
여기서 로드리게스 회장을 전폭적으로 서포트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