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클로저스
크로포드는 이강우의 신병을 확보하자마자 곧바로 오키나와 미군 기지로 데려왔다. 도쿄가 초토화가 된 상황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방어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은 오키나와밖에 없었다.
이후 이강우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머물렀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이강우의 심정이었다. 하다못해 채유리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가족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어머니가 해준 요리라도 한 번 더 맛보고 싶었다. 죽음을 각오하니, 여한을 줄이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됐다.
하지만 이강우는 마음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도쿄에서 몬스터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도쿄는 물론 일본 국민 대부분이 일본을 탈출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한국은 제1의 피난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 항공이나 항로를 통해 한국으로 가는 건, 이미 불가능했다. 예약이고 자시고, 이미 민간 운행이 정부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강우는 한국 정부에서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이강우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날.
“호령이라는 여자 알아?”
떠날 준비를 마친 이강우에게 크로포드가 헤어지는 인사 대신 갑작스러운 이름을 꺼냈다.
“압니다.”
호령을 이강우가 모를 리 없다. 나름 식객이라면 식객이라 할 수 있다. 밥도 같이 자주 먹었다.
그런데 지금 왜 그녀가 여기서 언급되는 걸까?
“지금 그 호령이란 여자가 우리가 있었던 곳에 있다던데?”
“예?”
이강우는 크로포드의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있던 곳이란 단어가 이강우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강우는 자신이 크로포드와 같이 머물렀던 장소를 떠올려봤다. 떠오르는 건 시애틀의 풍경밖에 없었다.
솔직히 크로포드는 어디 가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었을뿐더러, 이강우가 크로포드와 함께한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분명한 건 시애틀 어디에도 호령이 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설마 그녀가 시애틀 블랙 스택 본부에 마련된 벙커에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도쿄 하수 시설 안에 지금 그녀가 있습니까?”
이강우가 용케 그곳을 떠올렸다.
크로포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맙소사.’
지금 도쿄 하수 시설은 붕괴했다. 크로포드와 그가 데려온 일행이 이강우를 구해내기 위해서, 이강우의 신병을 확보하는 순간 그곳을 폭발시켰다.
본래는 폭파까지 하려고 하진 않았지만, 크로포드는 이강우와 이바노프의 전투를 보는 순간 자신이 개입해서 승부를 바꿀 수 있는 수준의 전투가 아님을 파악하고 폭탄을 터뜨렸다. 그런 식이 아니면 도망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도쿄 하수 시설에 호령이 있다?
죽은 목숨이다.
하수 시설 속에서 먹을 걸 구할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붕괴한 하수 시설은 이미 출구 없는 미로와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자력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없다.
“대체 그녀가 거기 있다는 건 무슨 수로 알았습니까?”
“그녀가 그 지하 시설에 숨겨진 2등급 모래시계문을 찾아냈으니까. 그 정보를 보내줬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의 얼굴 위에는 더 이상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것 자체가 없었다.
‘2등급?’
일단 이강우는 다시 한번 2등급 모래시계문이란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는 찾았다! 그 단어가 전구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렇게 반짝이는 전구 옆에서 어떻게? 라는 의문의 전구가 반짝였다.
이강우의 표정을 본 크로포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당장 그 안으로 2등급 모래시계문을 처리하기 위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크로포드는 자신이 이 사실을 이강우에게 말해 주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결국 2등급 몬스터가 등장하길 기다린 다음, 놈을 잡기 위한 팀이 조직될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2등급 몬스터가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곳에 와야 하니까, 명심해.”
이강우가 미리 마음의 각오를 해둘 수 있도록.
즉, 크로포드의 머릿속에 지금 당장 붕괴한 도쿄 하수 시설 안으로 들어가서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는 그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고, 불가능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달랐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절호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클로즈해야 합니다.”
“뭐?”
이번에는 크로포드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조건 클로즈해야 합니다.”
이강우는 재차 강조했다.
‘이건 앞뒤를 잴 문제가 아니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2등급 몬스터는 처치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놈들의 시스템이 가지는 맹점을 노려야 해. 정면승부로는 답이 없어!’
무엇보다 모래시계문에는 바츠무도 어찌 못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입구가 존재하고, 출구가 존재하며, 출구를 빠져나오면 입구도 기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이건 바츠무가 이렇게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다. 이렇게 해야 모래시계문이란 신비한 문을 다룰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 맹점을 찔러야 한다.
‘상대할 필요도 없다. 클로즈만…….’
클로즈만 하면 된다.
하지만 크로포드 입장에서는 그 자체도 이미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말도 안 되는 짓인데!
“알고 있는 걸 불어.”
크로포드는 볼멘소리나, 투정을 나불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강우에게 정보를 요구했다.
크로포드는 바보가 아니다. 이강우와 맞서 싸운 그 괴물을 봤고, 그 괴물을 상대로 이강우가 넝마가 됐을 때, 스스로 자가회복을 통해 살아남은 것도 봤다. 이강우가 쓰던 마법도 봤다. 리볼버가 그들이 쓰던 것이 단순한 마법이 아님을 모를 리 없다. 크로포드의 기준에서 이바노프나, 이강우나 둘 다 궤를 달리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깊게 파고들지 않은 건 이강우가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굳이 자신이 개입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이강우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스스로 정보를 공개하고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귀찮은 일이 더 생기는 건 좀 그렇지.’
어쨌거나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강우가 갑자기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는 이강우의 목숨이 걸려 있다. 이강우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 그를 구하려고 크로포드가 직접 움직였는데 이강우가 멋대로 자살행위를 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있을 리 없다.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면 세상은 종말에 다다릅니다.”
종말에 다다른다?
“2등급 몬스터가 그렇게 강한가?”
“2등급 몬스터는 미끼입니다. 1등급 몬스터를 부르기 위한 미끼. 미끼가 이 세계에 나오면, 그게 혹여 시체라고 해도 그 시체를 먹기 위한 1등급 몬스터가 이 세상에 등장할 겁니다.”
크로포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역시 뭔가 알고 있네. 제대로.’
그리고 그는 복잡한 게 싫었다. 복잡한 건 대개 귀찮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이강우에게 모든 진실을 알아낸다고 해서 크로포드의 인생이 더 편해질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진실을 안다고 해서 크로포드가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가능성도 없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크로포드는 굳이 이강우가 알고 있는 진실 전부를 알 필요는 없다. 알면 골치가 아파질 뿐이다. 필요 없는 고민거리를 늘릴 필요는 없다.
핵심만 보면 된다.
‘흠.’
이강우가 헛소리를 하는 부류인가? 아니다.
이강우가 세상의 종말을 원하는가? 아니다.
그럼 크로포드, 자신은 어떻게 나오면 되는가?
“내가 최대한 덜 귀찮을 수 있는 방향으로, 필요한 걸 말해 봐.”
이강우를 도와주면 된다.
그게 가장 덜 귀찮은 방법이다.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강우가 곧바로 요구했다.
“당신이 만든 8서클 개방 비약 그리고 모래군주를 잡고 얻은 모든 수확물들.”
아주 귀찮은 요구였다.
* * *
‘2등급 유적 사냥.’
류복희는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마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북북!
그래서 머리를 긁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류복희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 그림자가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그림자를 향해 류복희가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위스프가 분명해. 겉으로는 평범하게 다니지만 무언가 조짐이 있으면 눈빛이 달라지더군.”
“역시. 위스프가 이제 한국을 노리리란 건 뻔한 사실이지만, 이제는 정말 노골적으로 움직이는군요.”
“그보다 표정이 굳어 있는데 무슨 일이 있나?”
류복희는 그 질문에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류복희는 자신의 표정을 나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격렬한 감정이란 의미.
류복희가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글쎄, 세상은 이미 별일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렇죠.”
대답을 한 류복희는 다시 한번 이강우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무모해.’
이강우는 2등급 모래시계문을 무조건 클로즈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면, 1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는 걸 막을 수 없으며, 1등급 모래시계문의 개방은 곧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고, 그런 말만 했다. 심지어 이강우 본인이 직접 한 게 아니라 크로포드가 전달해준 이야기다.
허무맹랑한 소리다.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류복희는 반대로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건 이제 없어.’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라 현실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앞으로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이강우는 이제까지 홀로 무언가를 품은 채 인간이 아닌 무언가와 싸워왔지.’
그리고 이강우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가장 진실에 가까이 접근했고, 진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세계 종말을 운운했으면, 정말 종말이 오는 거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세계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뭘 하실 생각입니까?”
세계 종말.
그 무겁기 그지없는 단어를 가지고 한 질문에 자기 모습을 갖춘 검은 타이츠를 입고 있는 사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뭘 할 생각은 없고, 뭐든 해야지. 종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얌전한 성격이 못 되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꼴을 하고 세상 곳곳, 시궁창을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류복희 자네 역시 뭐든 하려고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움직이는 거고.”
“짧은 다리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자네가 심각한 질문을 하기에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좀 했네.”
사내의 농담이 통했는지 류복희가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정답이 나왔다.
그의 말이 맞다.
세계 종말을 앞두고 있다? 그런 일 앞에서 저울질은 필요 없다. 종말을 막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여유조차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왜 무리를 해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해야 하는가? 류복희가 해야 하는 고민은 그런 종류의 고민이 아니다.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려면 뭐가 필요하지?’
파티 구성.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기 위해서, 그것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 필요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2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결국 멤버다. 최고의 멤버를, 인류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유적 사냥 파티를 구성해야 한다.
‘이강우.’
그러면 단연코 이강우가 꼽힌다.
그다음은?
‘기예르모.’
괴식가.
이제 7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괴식가는 마나 서클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강함은 이강우가 더 강하겠지만, 유적 클로즈 능력은 괴식가가 더 높다.
여기에 추가할 멤버가 더 있을까?
‘흠.’
후보는 많다. 리볼버, 가위손, 대마도사를 비롯해 후보로 넣을 만한 자는 많다.
하지만 류복희는 여기서 냉철하게 생각했다.
그들을 추가한다고 해서 추가로 얻을 수 있는 클로즈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모든 걸 올인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못한다. 모든 이들의 생각이 류복희와 같은 건 아니니까. 올스타팀을 보내면 좋겠지만, 반대로 머릿수가 많은 게 유적 생존에 무조건 유리한 건 아니다. 괴식가 기예르모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게 본다면?
‘괴식가와 포식자.’
둘만 가는 게 추구할 수 있는 가짓수 중에 그나마 최선의 카드라고 할 수 있다. 괴식가는 자유롭고, 포식자는 본인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 둘만으로도 클로즈를 할 수 없다면, 그 외에 누구를 추가해도, 무언가를 더 추가해도 성공 가능성은 없다.
둘이 유일한 답이다.
‘좋아.’
둘은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다.
그럼 남은 과제는 그들을 어떻게 안으로 집어넣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내놓은 건 다름 아니라 권재용 박사, 바로 그였다.
* * *
모든 벽면이 거울로 된 기괴한 공간 안에 모래시계문 두 개가 기둥처럼 굳건하게 서 있었다. 두 개의 문은 쌍둥이처럼 모양과 재질 그리고 그 크기가 흡사했다. 개중 하나의 문은 모래시계가 멈춰있었고, 다른 하나의 문은 모래시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흠.”
그 모래시계문을 거울의 방 내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모니터룸에서 지켜보던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사내의 시야에 모니터룸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가 보였다. 사내는 곧장 냉동실 문을 열었고, 그 안을 가득 채운 메로나 아이스크림이 차가운 나신을 드러냈다. 사내는 개중 하나를 꺼내 잽싸게 포장지를 제거한 후 곧장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된 사내, 권재용은 모니터룸 한구석에 마련된 두 대의 디지털 시계를 바라봤다. 두 대의 디지털 시계는 똑같이 48초를 표시하고 있었다. 권재용 박사가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자, 시계는 46초를 표시했다.
‘슬슬.’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끼익!
모래시계가 움직이던 모래시계문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너머로 가득 찬 어둠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곧바로 양손을 머리 위에 들고 큰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 문이 열렸음에도 문이 열린 모래시계는 계속해서 모래알을 야금야금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권재용 박사가 메로나를 입안에서 뺐다. 그리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걸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처음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이강우와 기예르모가 될 줄이야.’
권재용 박사.
그가 모래시계문의 비밀을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 * *
‘나도 나름 똑똑하지만, 권재용 박사는 진짜 천재군.’
크로포드는 권재용 박사의 홀치기 이론을 보면서 진심 어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흥미 없는 것, 자기 관심 분야가 아니면 억만금을 줘도 읽지 않는 크로포드다. 그런데 권재용 박사의 홀치기 이론은 그런 그를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해석한 거지?’
모래시계문에 대한 연구는 거듭 진행됐다. 어떤 의미에서 모래시계문의 이용가치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무궁무진했다. 이 모래시계문의 작동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이제 인류는 더 이상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시대를 맞이할 테니까. 그렇기에 모든 국가가 포털 프로젝트란 이름을 달고 모래시계문을 연구했다.
하지만 3대 프로젝트 중 다른 두 가지 프로젝트에 비해 포털 프로젝트는 거듭된 연구 속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심지어 유엔 주도하에 공동 연구가 시작됐을 때도 포털 프로젝트는 조금의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관련 연구자들이 모여서 내놓은 건, 이건 정말 못 해먹을 짓이다! 그게 전부였다. 칠성문이 7서클 마법 아티팩트 복제에 성공하고, 천변과를 이용하긴 했지만 크로포드가 8서클마저 개방시킬 만큼 마력을 응축하는 데에 성공한 것에 비하면 정말 미약한 성과였다.
그런데 그 미약한 성과를 권재용 박사가 단숨에 최고의 성과로 만들어버렸다.
‘통로를 가로채다니.’
홀치기 이론.
이 이론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모래시계문은 크게 세 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 통로, 공간.
권재용 박사는 이 통로의 존재를 발견했고, 더 나아가 이 통로를 강력한 마력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다른 통로와 연결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바꿀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조건이 붙었다.
홀치기가 되는 두 개의 문은 일단 등급이 같아야 한다. 크기도 거의 흡사해야 한다. 또한 문을 구성하는 재질도 똑같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클로즈 된 문은 이용할 수 없다. 모래시계가 여전히 작동하는 문이어야만 가능하며, 통로를 이용하는 작업이기에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출문으로 나올 때만 유효하다.
유적 안의 상대가 출문을 여는 순간 통로를 바꿔치기해야 한다. 그리고 통로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시간 역시 길지 않다. 4등급 마나스톤 10개를 소모하면, 약 44초 정도. 그 이후에는 마력을 더해도 시간을 연장하는 건 일단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요건들이 갖춰지면 성공 가능성은 98.8퍼센트 이상이다. 반면 이러한 요건 중 하나만으로도 갖춰지지 못하면, 성공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내려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게 유일한 방법이겠어.’
도쿄 하수 시설에 잠든 2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 작전의 책임자가 된 류복희는 이 방법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 방법을 이용해 붕괴된 도쿄 하수 시설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에만 목숨을 건 건 아니었다. 류복희는 나름 다각도로 붕괴된 도쿄 하수 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단순히 크로포드가 입구를 폭탄으로 붕괴시켜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위스프가 그곳을 떠나면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통로 전부를 붕괴시켜 버렸다. 그들 역시 2등급 모래시계문이 그 어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모래시계의 모래를 전부 떨어뜨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한다면 답은 나오겠지만, 몬스터 퍼레이드가 지금도 진행 중인 도쿄에서 그런 본격적인 작업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나마 지금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건 권재용 박사의 홀치기 이론을 이용해서, 도쿄 하수 시설 내에 위치한 모래시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두 가지군.’
물론 이 홀치기 이론도 정답은 아니었다.
일단 하수 시설 내에 모래시계가 작동 중인 모래시계문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어떤 방법을 써도 불가능하다. 문을 집어넣는다? 그럴 바에는 그냥 사람을 집어넣는 게 정답이다.
동시에 문을 발견하더라도, 그것과 흡사한 모래시계문을 찾아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시도만 해볼 뿐이다. 크로포드는 솔직히 이게 해답이 될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뭐, 죽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리스크는 없다는 점이었다.
출문을 통해 나오는 순간 홀치기를 시도하지만, 그 홀치기가 실패할 경우 영영 알 수 없는 시공간의 통로 속에서 미아가 되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냥 본래 문으로 나올 뿐이다.
리스크가 없으니 시도는 해봄 직하다.
‘성공하면 오히려 그게 더 리스크 자체는 크지.’
사실 결국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이걸 성공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도쿄 하수 시설 안으로 들어가면, 그 이후에는 제 발로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
‘2등급이라…….’
크로포드는 이강우와 기예르모를 떠올렸다.
‘둘은 망설임 없이 들어가겠지.’
분명 그 둘이라면 지옥으로 발을 들여놓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다.
그 둘은 남들은 겁에 질려서 하지 못하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해왔다.
‘대단한 놈들.’
크로포드는 그런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귀찮은 짓을 어떻게 하는 거지?’
정말 진심으로 감탄했다.
* * *
이강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4개의 큐브를 바라봤다. 주먹 크기의 큐브들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단번에 7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4개나 생겼구나.’
7서클 마법 아티팩트 복제품이었다. 이강우가 확보한 섬광의 복제품을 시작으로, 칠성문이 확보한 유성우, 이존이 확보한 엑스칼리버와 이스라엘이 확보한 우라칸까지.
모래군주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7서클 마법 아티팩트 복제품들이 이강우 앞에 있었다. 이강우는 그것들을 특수 제작된 가방 안에 가지런히 넣었다. 가방에 넣는 이강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결전의 날이다.’
이강우는 2등급 모래시계문을 무조건 클로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크로포드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강우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주장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말도 안 되는 걸 가능케 하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마저 걸었다.
비유가 아니다. 붕괴한 도쿄 하수 시설, 그 붕괴 속에서 남은 작은 틈 사이로 로봇을 넣어 내부를 수색하기 위해 적지 않은 이들이 나름 목숨을 걸고 도쿄 근처까지 가서 작업을 했다.
결국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할 준비가 끝났다.
‘일을 벌인 놈이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럼 이제 이강우가 그들의 각오에 보답할 차례다. 이강우가 자신이 머무는 숙소에 설치된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그런 이강우의 머리 위에는 여덟 개의 고리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 * *
모든 준비가 끝났다. 거울로 된 공간에는 모래시계문 하나가 고고하게 서 있었고, 이강우와 크로포드는 특별히 마련된 모니터룸에서 모래시계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크로포드가 입을 열었다.
“대체 이 문을 몇 시간이나 더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크로포드와 이강우는 작업이 완료되는 순간, 곧바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곳에 왔다. 그 과정에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다름 아니라 괴식가 기예르모였다.
약속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강우는 크로포드의 불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꽉 다물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솔직히 이강우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기예르모는 선구자다.’
기예르모.
그에 대해서는 나름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쓴 기예르모 레시피를 수도 없이 읽어봤다. 기예르모 레시피 덕분에 받은 도움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기예르모의 괴팍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도움이 되리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 그와 이강우가 제대로 된 호흡을 맞출 수 있을까?
하물며 기예르모는 이제까지 홀로 유적을 사냥하고, 탐사했다. 그 이유도 알고 있다.
기예르모, 그는 하나의 인간으로, 문명이 아닌 그냥 순수한 인간으로 유적과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국가의 도움을 받거나, 현대 병기를 쓰는 건 그 순수함을 해치는 행위이며,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과 의존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기예르모는 모래시계문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모래시계문을 사냥한답시고 나서는 세력들 자체를 믿지 못했다.
칠성문이 그랬던 것처럼, 기예르모는 처음부터 블랙 스택 혹은 그에 준하는 집단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반면 이강우는 그 시스템을 최대한 이용했다. 이강우가 기예르모처럼 행동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둘이 과연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보다 이강우, 너 스페인어 공부했어? 들어가서 내내 통역 마법을 쓸 수는 없잖아?”
기예르모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설마 그 녀석하고 글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몸짓으로 대화를 하라고. 그게 더 이해가 쉬울 테니까.”
기예르모가 영어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이강우가 할 수 있는 영어 수준이 그리 대단치 못하다.
통역 마법이 있지만, 긴박한 상황 내내 통역 마법을 쓰면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의외로 큰 문제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이강우와 크로포드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들을 반긴 건.
“헉.”
지독한 악취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가 모니터룸을 가득 채웠다. 그 악취의 시작점에는 야인(野人)이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가슴팍까지 내려올 기세로 자라난 덥수룩한 수염. 여기에 봉두난발한 머리칼은 기름에 잔뜩 절어 있었다. 나름 지저분하게 사는 크로포드조차 섬찟하게 만드는 더러움이었다.
반면 이강우는 기예르모를 보는 순간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강우라고 합니다.”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했지만 통역 마법이 발동된 공간이었기에, 대화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기예르모는 이강우가 내민 손을 잡기는커녕 이강우가 내민 손에 눈빛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이강우를 지그시 바라만 봤다.
그런 기예르모의 뒤에서 단신의 류복희가 등장했다. 류복희는 이강우를 보고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기예르모를 향해 곁눈질을 한 번 한 뒤, 이강우를 향해 말했다.
“인사성이 그리 좋으신 분이 아닙니다.”
류복희의 말에 크로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 일기 좀 읽은 인간들을 죽이겠다고 설치는 인간이니, 인사성이 아니라 인간성이 그리 좋은 게 아니겠지.”
“남이 자기 일기를 읽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순간.
“내 일기를 읽었나?”
기예르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강우가 대답했다.
“예.”
류복희가 표정을 구겼다. 기예르모가 자기 일기를 읽는 이들에 대해 증오심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류복희는 잘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기예르모는 지금 이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제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유적 사냥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리던 그다. 순수하게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맨몸으로 유적과 맞서 싸워온 것을 긍지이자, 마땅한 일로 생각한 그를 여기에 데려오기 위해 류복희는 정말 며칠 동안 그를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그 설득이 완전히 통한 건 아니다. 언제 기예르모가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
“난 내 일기를 읽은 놈과 상종하지 않는다.”
기어코 기예르모가 분노를 표출했다.
크로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류복희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 순간 이강우는 기예르모를 향해 내민 손을 그에게 더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나도 굳이 당신과 끈끈한 관계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같은 음식점에서 자리가 없어 합석을 하게 된 관계, 단지 그뿐입니다. 서로 잘 먹고, 알아서 계산하고, 가게 문밖으로 나오면 되는 겁니다.”
그 말에 기예르모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기예르모에게.
“물론 내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겠지만.”
이강우가 시비를 걸었다.
기예르모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요리? 유적 속에 담긴 진정한 맛조차 모른 채 고작 향신료와 양념 따위로 맛을 왜곡하는 주제에?”
“날로 먹어봤자 그 요리가 가진 궁극의 맛을 느끼는 건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 말, 내 요리를 맛보는 순간 아마 평생 후회하게 될 겁니다.”
“네가 내 입을 만족시키겠다고?”
“괴식가의 별명을 미식가로 바꿔 드리죠. 뭐, 이 별명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그 순간.
덥석!
기예르모가 이강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꽉, 잡았다.
“네놈에게 진정한 재료의 참맛을 알려주지.”
“요리는 손을 거쳐야 진정한 요리인 겁니다.”
그 광경을 보던 크로포드가 한마디 했다.
“아니, 귀찮게 요리를 왜 해? 그냥 시키면 다 나오는데? 아니, 그보다 지금 먹으러 유적 안으로 들어간단 말이야? 진짜 저런 놈들에게 이 세상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 거야?”
크로포드의 반문에 류복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귀찮은 게 싫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