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몬스터 퍼레이드
치마만을 걸친 채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수백의 사내들. 드러난 그들의 상체는 그들이 누려온 나날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돌처럼 굳은 강인한 근육들은 각고의 훈련을 치른 흔적이었고, 그런 돌 같은 근육 위에 생겨난 무수히 많은 상처는 목숨을 건 실전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낸 훈장이었다.
그야말로 역전의 전사들!
그 역전의 전사들이 손에 쥔 칼을 높게 들고, 하늘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세상을 위하여!”
그들의 외침은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그 우렁찬 외침은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세상 끝까지 도달할 정도였다. 기어코 세상 끝에 도달한 그들의 외침은 세상 끝에 닿은 뒤 메아리가 되어 그들의 외침이 시작된 장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메아리가 돌아왔을 때, 강인한 전사들은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피비린내 가득한 그 처참한 광경 속에 유일하게 목이 붙어 있는 전사는 자신의 칼을 제 목에 가져다 댔다. 자신을 참수할 준비를 마친 전사의 표정에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전사 앞에는 붉은빛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전사는 그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제 목숨이 당신이 걷게 될 고통의 길에 자그마한 등불이 되기를.”
말과 함께 전사는 제 목을 제 손으로 잘라냈다. 잘려나간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잘려나간 목에서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는 그 핏줄기를 몸으로 맞으며, 잘려나간 사내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바츠무! 내가 네놈들의 공포가 될 것이다. 영생을 추구하는 네놈들의 영원한 악몽이 될 것이다.”
그 읊조림 속에서 전사의 머리가 불꽃이 되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강우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그들이구나.’
고개를 돌리자, 이강우가 보던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고, 이강우의 정면에 이제는 친숙함마저 느껴지는 얼굴이 붉은 도포를 입은 채 이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사황제 야크센.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며 동시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츠무에게 빼앗긴 사내.
이강우는 그 야크센을 향해 말했다.
“내가 죽은 건가?”
기억이 난다.
이바노프, 그가 토해낸 뱀이 자신의 등 뒤에서 심장을 관통하고,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 순간에도 이강우는 살아 있었다. 불꽃 심장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바노프가 격발한 산탄총 앞에서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총성이 터질 때마다 의식이 점차 희미해졌고, 네 번째 총성을 들은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죽음이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 건가?”
이 순간 이강우는 스스로 뱉은 말이 스스로도 우스운지, 실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넘치는 배려심이군.”
죽은 이강우를 위해 야크센이 인사 자리를 마련해주다니? 이강우는 야크센의 이 넘치는 배려심에 눈물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야크센이 입을 열었다.
“시이.”
말과 함께 새하얀 공간이 다시금 바뀌었다. 거대한 뱀이, 어둠을 뭉쳐 만든 듯한 뱀이 세상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정말 거대하기 그지없는 뱀이었다. 녀석에게 높게 솟아난 나무는 작은 막대 과자에 불과했다.
녀석은 큼지막한 산의 산등성이를 케이크처럼 베어 먹고 있었다. 거대한 호수를 컵에 담긴 물을 마시듯 빨아들였고, 만년설은 아이스크림 먹듯 먹고, 용암이 들끓는 화산도 몸부림을 치며 먹어 치웠다.
이 압도적인 괴물 앞에서 이강우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고작 보는 것뿐인데, 온몸이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말의 뱀 시이.”
야크센이 그 뱀의 정체를 말해줬다.
“녀석은 세상을 먹어치우는 뱀이다. 바츠무는 놈의 피와 살점을 먹고 영생을 유지한다.”
바츠무가 영생을 추구하는 방법도, 그들이 세상을 넘나들며 세상을 종말에 이르게 하는 이유도 말해줬다.
“놈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바츠무조차 종말의 뱀을 어찌할 수 없다. 바츠무와 종말의 뱀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일 뿐이다.”
그리고 참담한 현실도 말해줬다.
“두 개의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문이 열리면, 그것이 곧 종말의 뱀을 이끌 것이다. 명심하라. 하나의 문이라도 열리면, 네가 사는 세계에 언젠가 종말의 뱀이 찾아올 것이다.”
아득한 현실이다.
그 순간 이강우는 소리쳤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거지? 저승으로 가는 내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야기를 대체 왜?”
이강우의 꿈은 거기까지였다.
* * *
“헉!”
이강우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이강우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두근두근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블러드북으로 불꽃 심장의 권능을 각성한 덕분인가?’
한 권밖에 없던 블러드북으로 다섯 개의 권능 중에 불꽃 심장을 각성시켰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몰라서, 최소한 시체라도 온전하게 남기기 위해서 고른 선택지였다.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건가? 아슬아슬하게?’
살기에 허락되는 고뇌.
그렇게 고뇌를 시작한 이강우의 눈앞에 한 사내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
이강우가 재차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 크로포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독보적인 게으름을 품고 있는 사내, 크로포드의 얼굴이었으니까.
크로포드는 자신을 보자마자 헉! 소리를 내뱉는 이강우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런 사람에게 받는 첫인사치고는 그리 기분 좋은 인사는 아니군.”
이강우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리볼버?”
이강우의 그 모습에 크로포드가 코웃음을 내뱉은 뒤, 오른손 약지에 착용하고 있는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일단 말부터 통해야지. 이강우, 네가 그동안 영어 능력이 향상됐을 리 없으니까.”
통역 마법이 발동했다.
곧바로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해석되는 크로포드의 말 덕분에 이강우 역시 통역 마법이 발동한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괜한 영어 문장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강우가 곧장 물어봤다.
“죽은 거 아니었습니까?”
“죽어? 누가?”
“그야…….”
눈앞에 크로포드가 있다. 하지만 이강우는 그를 귀신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크로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죽었다고 소문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분명 의식불명으로…….”
“그래, 의식불명이라고 소문을 내긴 했지.”
소문을 냈다?
그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자신을 의식불명으로 위장한 후에, 일선에서 물러난 뒤 침낭에 몸을 집어넣은 채 씻지도 않고, 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크로포드의 모습이.
‘맙소사, 정말 그냥 놀고 싶어서 그런 수작을 부린 건가? 사고를 위장한 거야?’
이강우의 그 눈빛을 본 크로포드가 곧바로 이강우의 머릿속 생각을 읽었다.
크로포드가 표정을 바꿨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쉬고 싶어서, 일하기 싫어서 사고를 위장한 건 절대 아니야.”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정은 했지만, 생각을 읽힌 이강우가 살짝 눈을 피했다. 크로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지금 이 변명을…… 너까지 포함하면 딱 스무 번째가 되겠군. 젠장, 어떻게 날 만나는 인간들 전부 다 내가 그동안 의식불명을 명분 삼아 현장에서 안 뛴 걸, 내가 놀고 싶어서 그런 거로 의심할 수 있는 거지?”
“아닙니까?”
“더 이상 표면에 드러난 활동을 할 필요도 없어서, 내 활동을 감추기 위해 위장을 했을 뿐이야. 그동안 휴식은커녕 오히려 그 현역 때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지.”
“대체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이강우의 질문에 크로포드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이야기는 그가 천변과의 씨앗을 확보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크로포드는 천변과의 씨앗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천변과의 씨앗은 일종의 원자로 같은 역할이었다. 작은 마력들을 모아, 아주 순수하고 강력한 마력 결정체를 만드는 장치였다.
그럼 대체 왜 이런 게 필요할까?
답은 간단했다. 그만큼 강력한 마력 결정체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누가 그걸 필요로 할까? 이 답 역시 간단했다. 모래시계문을 세상에 가지고 온 자들. 그들 외에 다른 이들이 순수한 마력 결정체를 필요로 할 리가 없다.
즉, 크로포드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래시계문의 등장이 누가 보더라도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일이지. 여기에 블랙 스택이 등장했을 때 대충 감이 오더군.”
모래시계문 그리고 블랙 스택.
크로포드는 이미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이 단순히 우연히 등장한 게 아니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로포드는 블랙 스택의 일원이 됐다. 동시에 크로포드는 블랙 스택이 요구하는 일을 전부 소화했다. 세계를 대표하는 게으름뱅이인 그가 열심히 블랙 스택의 일을 처리한 건 블랙 스택이 원하는 바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크로포드는 로드리게스 회장을 이용했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자신이 투자해 만든 블랙 스택에 자신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만감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블랙 스택에 대항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독립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온갖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크로포드 입장에서는 이용하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어마어마한 권력자이자, 재력가이자, 블랙 스택에 엿을 먹일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협조해줄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로드리게스 회장을 이용해 천변과를 키웠다. 강력한 마력의 결정체를 확보했고, 그 마력의 결정체를 모아 8서클 개방도 가능케 할 강력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먹는 척했다.
크로포드가 8서클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처럼, 무리해서 먹다가 탈이 난 것처럼 상황을 연출했다.
여기까지가 크로포드의 설명이었다.
크로포드의 설명을 이강우는 전부 납득할 수 있었다.
참 대단한 인간이구나! 감탄사도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시작됐다.
“왜 그걸 마시지 않은 겁니까?”
하나는 크로포드가 8서클 개방을 가능케 해줄지도 모르는 비약을 마시지 않은 일이었다.
크로포드는 8서클 개방을 원한다. 게으르기 그지없는 그가 거듭해서 마력 관련 연구를 한 것도, 결국 8서클 개방을 가능케 해줄 비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리스크는 있다. 하지만 크로포드는 8서클 개방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크로포드는 마시려고 했다.
“마시려고 했지.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 내가 그걸 마시고 8서클이 된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생각해 봐. 세상의 유일무이한 8서클 마법사가 됐는데, 편하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문제는 8서클 마법사가 됐을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이곳저곳 불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7서클 마법사일 때보다 곱절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크로포드의 시도를 막았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크로포드는 이미 자신의 후계자를 선정해둔 상황이었다.
이강우!
그를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게 이강우가 품은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네가 사지로 간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내가 그동안 이강우, 네게 얼마를 투자했는데?”
왜 크로포드는 이강우, 그를 구하러 왔을까?
“이강우, 넌 무조건 날 대신해야 해. 넌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네가 죽으면 네가 할 일이 오히려 나한테 몰려온다고.”
이강우는 그 말에 실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크로포드다운 선택이었고, 결정이었다.
물론 실소를 지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강우는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바노프!
그 무시무시한 존재로부터 크로포드는 자신을 어떻게 구했을까? 그리고 대체 자신이 기절한 이후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해 크로포드는 말 대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 *
이바노프는 어둠 속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 앉아 있었다. 그런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푸른 불꽃이 조금씩 흘러나왔고, 그 푸른 불꽃이 내뿜는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음산하게 비추었다. 그 푸른빛 사이로 보이는 이바노프의 표정은 최악, 그 자체였다.
스윽!
순간 이바노프가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움푹 파인 해골 같은 뺨을 만졌다. 인간의 피부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흥.’
이바노프는 이 감촉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그들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굴욕이었다. 동시에 현실이기도 했다.
바츠무는 결국 외계(外界)의 존재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지구의 모든 것이 그를 배척할 것이다. 모든 세계, 모든 문명이 그래 왔다. 외계에서 온 걸 친근하게 대하는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빌어먹을.’
그게 이바노프가 이강우를 홀로 상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바노프에게는 수하가 넘쳐났다. 한 명은 죽었지만, 자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에스콰이어도 있고, 시답잖은 가치에 목숨을 거는 광신도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들을 동원했다면 더더욱 확실하게 이강우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정체가 드러나면 모두가 이제는 그의 적이 될 테니까.
나름 변수가 난입하는 걸 막고자 조처를 했지만, 결국 결전 도중에 방해꾼이 등장했다.
그것도 리볼버 크로포드가 등장했다.
크로포드의 이야기는 이바노프도 알고 있었다. 크로포드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했으니까. 블랙 스택을 대표하는 마법사인 그는 블랙 스택을 위해 그리고 바츠무를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블랙 스택의 의도를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였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데 그 크로포드가 변수로 작용했다. 누가 보더라도 일이 틀어진 것이다.
더불어 크로포드는 하수 시설을 붕괴시켰다. 크로포드의 방해에도 어떻게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던 이바노프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강우, 놈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강우의 마지막을 확실하게 보지 못했다.
이강우의 심장은 이바노프가 토해낸 불꽃뱀에 꿰뚫렸다. 꿰뚫린 정도가 아니라, 불꽃뱀이 이강우의 심장을 먹어 치웠다. 심장 자체가 사라졌다. 그렇게 심장을 잃은 이강우의 몸에 이바노프는 산탄총을 다섯 번이나 격발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죽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실제로도 이강우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크센이란 괴물이, 바츠무의 마법을 자기만의 권능으로 이룩한 괴물 중의 괴물이 이강우의 몸속에 있다.
‘이강우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여기서 이바노프는 긍정적인 판단 따윈 하지 않았다. 야크센은 그런 게 통하는 족속이 아니라는 걸 이미 수도 없이 경험했다.
이강우는 살아 있다.
‘빌어먹을.’
이바노프가 재차 표정을 구겼다. 표정을 구긴 그의 눈빛이 뱀처럼 갈라진 채 푸르게 빛났다.
리란칭이 그런 이바노프를 찾아와 말했다.
“마스터, 계속 이곳 도쿄에 머무실 겁니까?”
이바노프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대답했다.
“문은?”
“모래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리란칭의 대답에 이바노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생각보다 일찍 작업이 끝났군.”
“조만간 도쿄에 폭격이 있을 겁니다. 그 폭격이 가장 확실한 무덤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바노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바노프, 그는 이번에 실수를 했다. 이강우를 죽이고자 무대를 만들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실수에 집착하면서 대의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2등급 모래시계문이 온전하게 열리는 것이니까. 문이 열리고, 2등급 몬스터가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 그 2등급 몬스터를 먹어 치우기 위해 종말의 뱀이 이 지구라는 세계에 등장할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도쿄를 떠난다.”
이바노프가 결정을 내렸다.
* * *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강우는 일찍이 한 번 방문했던 이곳에서 이바노프와의 일전에서 얻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강우에게 지금 치료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거울에 비치는 이강우의 몸 어디에도 탄흔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산탄총, 수백 발이 넘는 탄환에 맞은 상처도 아물었고, 부서졌던 심장도 다시 힘차게 뛰고 있었다.
‘결국 불꽃 심장을 강화한 게 내 목숨을 구했군.’
한 권뿐이던 블러드북을 이용해 불꽃 심장을 강화했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버틸 수 있었다. 다른 권능을 강화하는데 블러드북을 썼다면, 필시 이강우는 거기서 죽었을 것이고, 야크센이 이강우를 차지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슬픈 사실은, 이강우가 이런 현실을, 자신이 살아 있다는 현실을 하염없이 기뻐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야크센이었다면…….’
이바노프, 그는 정말 강했다. 이강우는 나름 쓸 수 있는 방법 전부를 동원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현대 병기까지 가져와서 써먹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패!
이강우는 그런 괴물로부터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걸, 도무지 해낼 자신이 없었다.
절망적인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강우는 일주일 동안 기절해 있었고, 그동안 세상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바츠무, 놈들이 더 이상 의도를 감출 생각이 없어.’
가장 큰 사건은 도쿄에서 시작된 몬스터 퍼레이드였다. 도쿄는 9년 전, 2015년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때보다 더 참혹했다. 그때는 몬스터는 많았지만, 3등급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도쿄에는 3등급 몬스터가 등장한 상황이었다. 이미 그것으로 도쿄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도쿄가 무너지면, 일본이 무너지는 것 역시 수순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에도 소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가동 중인 다섯 개의 원전 전부가 폐쇄됐다. 중국 정부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대처를 하기 위함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다섯 개의 원전은 모래시계문 등장 이후 몬스터의 침입에 대비할 만한 인프라와 시스템을 갖춘 채 운영되던 곳이었다. 막대한 인구를 보유한 중국 입장에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게 원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원전을 전부 가동 중단한다? 이미 일각에서는 광둥성에 위치한 원전 하나가 몬스터의 습격으로 방사능 유출이 시작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원전 가동을 중단한 중국 정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다.
일본 그리고 중국.
동아시아를 대표하고, 나름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대국들이 연달아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면 그다음 타깃은?
‘한국…….’
안 봐도 뻔하다.
중국과 일본을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었는데, 한반도를 그냥 그대로 놔둘 리 없다.
더불어 이 모든 작업은 의도를 가진 집단이 저지르는 테러의 결과물이다. 이제까지 나름 은밀하게, 의도를 숨긴 채 일을 진행하던 바츠무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강우는 그들의 의도를 이제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시간 벌이야.’
다른 건 없다.
2등급 모래시계문이 개방되고, 그 문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올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 후에는?
‘시간만 벌면 놈들이 이긴다.’
끝이다.
이강우는 이제까지 자신이 불사황제의 힘 전부를 각성한다면, 그리고 이강우가 아닌 야크센이라면 1등급 모래시계문이 개방되더라도 어찌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종말의 뱀, 시이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건…… 이미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건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마 불사황제가 그 종말의 뱀을 미리 보여주지 않은 건 이강우가 자포자기하는 걸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사황제의 의중을 이강우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놈의 존재감은 절대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막아야 해.’
결국 답은 하나다.
무조건 2등급 모래시계문의 개방을 막아야 한다. 1등급 몬스터를 상대한다, 그런 선택지는 머릿속에 넣어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난리 속에서 2등급 모래시계문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심지어 이강우는 그 모래시계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놈들이 꼭꼭 숨겼을 모래시계문의 위치조차 모르는 상황.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여기에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그조차도 모르고 있다.
최악의 연속.
이강우는 용케 살아났음에도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옥 속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이강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이강우에게 긴급 소식이 전달됐다.
* * *
-이곳에 2등급 모래시계문이 있다고 판단됨. 더 이상 연락이 불가능할 듯.
지옥이 된 도쿄.
그 도쿄로부터 정말 귀중한 정보 하나가 칠성문, 주성륜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호령, 그녀가 해냈군.’
정보를 보낸 건 다름 아니라 호령이었다. 이제까지 홀로, 제대로 된 음식섭취조차 못 한 채 도쿄 하수 시설에서 버텼던 그녀가, 도쿄 하수 시설이 붕괴하면서 생긴 틈을 이용해, 기어코 세상을 구할 만큼 귀중한 정보를 보낸 것이다.
그녀 덕분에 2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그 소란을 피운 거군.’
그 정보를 받는 순간 주성륜은 놈들이 그리고자 했던 그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창고군.’
놈들은 2등급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가 떨어질 때까지, 도쿄라는 거대한 무덤 안에 그것을 보관할 생각이었다.
‘젠장.’
그리고 이미 그들의 의도는 거의 완벽하게 성공했다. 도쿄 하수 시설은 이미 파괴됐다. 어지간한 충격에 버티도록 설계됐지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전부 파괴됐다. 그 외에는 하수로를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도 쉽지 않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 도쿄는 지금 몬스터 퍼레이드가 시작된, 몬스터로 우글거리는 지옥의 땅이다. 개중에는 3등급 몬스터마저 있다.
또한 조만간 도쿄에 대규모 폭격이 시작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 말도 안 되는 난장판을 마법사를 파견해 처치하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시작된 폭격은 도쿄의 지하 하수 시설을 완벽하게 파괴해줄 것이다. 파괴된 도쿄 하수 시설에서 문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은 아마 전 세계의 모든 인력이 동원되어도 1년 넘는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2등급 모래시계문은 이미 그라운드 제로 레벨을 아득히 벗어난다. 핵폭발에 직격으로 노출되어도 파괴되지 않는다.
‘2등급 몬스터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겠군.’
주성륜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유적 사냥 파티를 조직해서 유적 사냥에 나서는 건, 나름 무모한 짓을 제법 해본 주성륜이 보기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럴 만한 전력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런 일에 투입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일단 류복희에게 정보를 줘야겠군.’
2등급 몬스터의 등장.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아마 일본은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는 땅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파는 일본에서만 그칠 리 없다. 한반도를 타고, 곧장 중국, 더 나아가 세상을 덮칠 것이다.
주성륜이 두 눈을 감았다.
‘종말론자들이 부르짖던 인류의 종말이 이렇게 눈앞에 다가오다니, 내 인생도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인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