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불을 토하는 뱀
부산 해운대.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의 바닷가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 추운 모래사장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거침없는 질주를 하고 있었다.
쿠쿠쿠!
굉음을 터뜨리며 질주하는 건, 거대한 공이었다.
정확히는 공처럼 몸을 말고 있는 기괴한 생물체였다. 그 크기가 거대한 트럭과 비교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외형은 아르마딜로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저 방어를 위해 몸을 돌돌 마는 아르마딜로와 다르게 그 괴물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할 줄 알았다.
그런 괴물 난동 앞에서 해운대의 백사장은 그야말로 유린당했다. 이번 여름 장사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 그마저도 녀석이 곡선을 그리며 모래사장을 벗어나는 순간, 그런 고민은 하찮은 고민이 되었다.
콰과광!
평소에는 드넓은 해운대가 보이는 운치 좋은 풍경을 자랑하던 호텔이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녀석은 마치 과자를 부수듯, 굳건한 콘크리트와 철근 건물들을 가차 없이 부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슈유우우!
녀석의 파괴에 동참하려는 듯, 해안가 먼 곳에서 거대한 미사일이 과격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와 도미노처럼 건물들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괴물의 몸뚱이에 꽂혔다.
콰광, 콰광!
굉음과 함께 시작된 폭발의 여파는 강력했다. 미사일이 타격한 주변이 쑥대밭이 됐다. 괴물도 제법 타격을 입은 듯했지만, 녀석의 질주와 회전은 멈추지 않았다.
끼이이!
그러는 사이 해운대 곳곳에 배치된 전차들이 포신을 움직이며, 괴물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포격을 준비하는 전차의 숫자는 세 자릿수를 가뿐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포격이 시작된다면, 앞선 미사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해운대라는 도심지가 향후 몇 년 동안 사람이 지낼 수 없는 폐허가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조준을 마친 전차들은 곧바로 포탄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다림 속에 헬기 한 대가 괴물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헬기에 타고 있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소녀 한 명이 섬뜩한 눈빛으로 6등급 몬스터 디아르마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채유리.
부산에 등장한 6등급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한 마법사 팀의 수장으로 그녀가 뽑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6서클 마법사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그녀를, 지금처럼 국가적 재난 사태에서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 긴급한 사태에서 채유리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형수님.”
그런 채유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김재범이 마이크와 헤드폰의 도움을 받아 소란스러운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 사이로 채유리를 불렀다. 김재범의 부름에 채유리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강우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김재범이 이강우의 여동생이자, 채유리의 아주아주 소중한 동생이기도 한 이혜연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더 나아가 김재범이 채유리와 이강우를 포섭해서 이혜연과 긴밀한 관계가 되기 위한 수작을 열심히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채유리는 그런 김재범이 탐탁지 않았다. 김재범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이혜연에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아주아주 멋진 남자친구가, 적어도 이강우만큼 멋진 남자가 붙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채유리가 봤을 때 김재범은 절대 그녀의 안목을 채우지 못하는 사내였다는 게 문제일 뿐.
채유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 해운대를 초토화하고 있는 디아르마딜로를 볼 때보다 더 차가운 그 눈빛에 김재범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했다.
“하하, 채유리 씨, 장난입니다, 장난.”
‘장난 두 번 하면 몬스터가 아니라 날 잡을 기세네.’
김재범이 속으로 한숨을 돌리고는 곧장 눈빛을 바꿨다. 말장난은 여기까지다. 김재범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온 건, 국가적 위기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시작할까요?”
김재범의 말에 채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처치해야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디아르마딜로의 외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두껍다. 어지간한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이 지금처럼 몸을 공처럼 말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을 시작하면, 녀석의 몸은 팽이처럼 날아오는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튕겨낸다.
물론 그래도 어마어마한 포격을 집중시키면, 잡을 순 있다. 문제는 잽싸게 움직이는 놈을 잡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포격이 필수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놈을 잡기 위해서 해운대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면 되지만, 지금은 최악보다는 최선의 선택지를 시도해볼 때였다.
그래서 채유리가 온 것이다.
채유리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 6서클 마법, 아이스 큐브 마법 아티팩트로 놈을 가두면 집중포격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전투를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아이스큐브 마법은 순간적으로 얼음 공간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벽을 만들 수도 있고, 대상을 얼음 속에 가둘 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얼음의 견고함은 어마어마하다. 강화 콘크리트보다 더 강인하다. 아무리 디아르마딜로가 대단한 힘과 덩치를 가지고 있더라도, 아이스큐브 안에 녀석을 가두면, 녀석은 멈출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시간과 마법이 유효한 범위.
벌 수 있는 시간은 5초 남짓.
더불어 아이스 큐브의 유효 발동 범위는 300미터 정도.
쉽게 말해서 디아르마딜로와 300미터 거리까지 접근을 해야 한다.
그래서 헬기가 투입됐다.
그런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디아르마딜로의 움직임은 헬기로 쫓는 게 쉽지 않았다. 예상 이상으로 놈은 날랬고, 예민했다. 헬기가 접근하자, 헬기를 피해 움직이는 걸 보면, 적어도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놈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쉽지 않은 사냥이 될 터.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채유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시작해.”
“예, 알겠습니다.”
곧바로 김재범이 한 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김수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수애 씨, 혹여 문제 생기면 빨리 치료 부탁드립니다. 수애 씨만 믿고 무리하는 거니까.”
그 말에 김수애는 방긋 웃었다.
“예,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리죠.”
“흥.”
그녀의 말에 채유리가 곧바로 콧방귀를 날렸다. 그 모습을 보던 김재범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김수애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 * *
안중현은 자신의 책상 앞에 쌓여 있는 문서 뭉치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쾅!
이윽고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분노를 표출한 안중현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무실 한구석에 마련된 커피포트에 담긴 커피를 컵에 따랐다. 그리고는 각설탕을 컵 안에 잔뜩 넣었다.
‘설마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전부 위장일 줄이야. 강희, 이 빌어먹을 새끼.’
안중현.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파주, 제주, 부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몬스터 출몰 사건 앞에서 그를 찾는 이들은 넘쳐났다. 정부 관계자, 마법청 관계자는 물론 재계 인사들까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런 바쁜 상황 속에서 안중현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넘버스 멤버를 추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넘버스 멤버를 추적하다니? 세상에는 넘버스 멤버란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그러나 안중현은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지금 등장한 몬스터들은 처치가 가능했다. 피해는 있겠지만, 한국이 가진 전력이라면 2015년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 일은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모래시계문의 개방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위스프가 시간을 벌기 위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컸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안중현이 신경 써야 하는 건, 이미 터진 사건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지금 숨겨진 변수들이 등장해서 판이 더 개판이 되는 걸 막는 거였다.
특히 강희, 그가 즈믄나래에 남긴 지뢰, 넘버스 멤버를 추적하는 건 중요했다.
그리고 안중현은 기어코 추적을 했다. 넘버스 멤버 소속 9명을, 1명을 제외한 8명의 신분 전부를 파악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파악한 이들이 눈속임을 위해 마련된 함정이란 걸 지금 막 깨달았다.
‘빌어먹을 넘버스 멤버라고 해서 숫자대로 있는 줄 알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넘버스 멤버로 숨겨 뒀을 줄이야.’
분노를 표출한 건 그 때문이었다. 강희의 함정에, 수작에 넘어가 시간을 허비했다. 지금 상황에서 천금보다 더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만 것이다.
물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넘버원.’
강희, 그는 단 한 명을 숨기기 위해 넘버스 멤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달리 말하면, 그 나머지 한 명을 잡으면 강희의 의중을, 노림수를 찌를 수 있다는 의미.
물론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해볼 건 다 했다. 그런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젠장.’
안중현이 커피를 마셨다. 식은 커피의 쓴맛과 각설탕의 거친 단맛이 입안에서 따로 놀았다. 최악의 커피였다. 카페인과 당분을 위해 억지로 먹는 음료였다.
‘어떻게 하지?’
그때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스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중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또 어떤 자기밖에 모르는 멍청이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오는 중이다.
특히 정재계 인사들이 즈믄나래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마법사와 총꾼을 자기들 보디가드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쉽게 말해서 다른 국민은 죽어도 상관없으니, 자기들 목숨 좀 지켜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다.
안중현이 그리 착한 인간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의 중심에 놓이게 되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그게 안중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누구지? 만약 신변 보호 요청이라면 거절하도록.”
-백광현이라는 분이 연락을 했습니다.
“백광현?”
안중현은 잠시 고민했다.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분명한 건, 정재계 인사의 이름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분명 떠올렸을 것이다.
-거절할까요?
보통은 거절한다. 아는 사람 전화도 받기 힘든 상황인데 모르는 사람 전화를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들어본 이름이라는 건 필시 뭔가 있는 사람이란 거다.
“연결하도록.”
곧바로 전화가 연결됐다.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 안중현입니다.”
-백광현이라고 하오. 예전에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했었소.
차이나타운에서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했다?
‘아! 만물상 백광현!’
안중현은 백광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수완이 좋은 인물이다. 크루와 암시장이 활개 칠 당시에는 어지간한 정보는 백광현을 통해서 전부 구할 수 있었다. 그가 그 바닥에서 모르는 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루와 유적 암시장이 위스프의 테러 사건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되면서, 그와 같은 정보 상인의 역할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런 국가의 칼부림 앞에서 몸을 꼿꼿이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가 안중현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강우가 내게 부탁을 했소. 안중현 씨, 당신을 도와주라고.
‘이강우가?’
-믿든 안 믿든, 이강우와의 인연이 적지 않아 일단 내가 모은 정보를 드리겠소.
이강우가 안중현 몰래 뭔가를 한 모양이다. 물론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석루의 몬스터 고기 밀거래 루트를 개인적으로 기록했소.
만석루.
즈믄나래의 수작 중 하나다.
달리 말하면 강희의 수작 중 하나다. 그래서 안중현도 만석루를 한 번 뒤져 봤다.
그러나 딱히 뭔가 장부 등에서 의심스러운 흔적이 나오거나 그러진 않았다. 툭 까놓고 말하면, 장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조작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만물상 백광현이 그런 만석루를 몰래, 하나부터 열까지, 그것도 만석루의 가장 큰 비밀인 몬스터 고기 밀거래 루트를 감시하고, 기록했다?
‘엄청난 기회다.’
물론 백광현이 주는 정보가 거짓 정보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오히려 그 정보가 안중현의 머릿속에 혼선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요행수가 아니라면, 안중현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자료는 문서로 정리해 보내 드리겠소.
“감사합니다.”
* * *
백광현이 준 자료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즈믄나래는 오래전부터 만석루를 통해 다양한 이들에게 몬스터 고기를 공급했다. 수익이 목적이 아니라, 인맥을 확보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마약을 밀거래하듯이,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광현은 그 사실을 예전부터 조사했다. 누가 보더라도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즈믄나래와 접점이 있는 만석루의 비밀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백광현 같은 정보 상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정보를 손에 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안중현을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맙소사.’
몬스터 고기 중에 가장 중요한 부위들, 핵심 부위들, 다양한 부위들이 유통 세탁을 거쳐 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냥 유통도 아니고, 유통 루트를 숨기기 위해 세탁 과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마지막으로 유통된 곳은 안중현도 아는 곳이었다.
‘당장 이강우에게 연락을…….’
그 순간 안중현이 무언가의 낌새를 느끼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의 유리창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불덩이들이었다.
콰앙!
이윽고 굉음이 터졌다.
즈믄나래 빌딩이 테러를 당했다.
* * *
이강우의 인생사에서 병원과 얽힌 좋은 추억은 많지 않다. 오히려 안 좋은 추억만이 잔뜩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안 좋은 추억 목록에 최악의 추억이 추가됐다.
이강우는 집중치료실에서 온갖 장치의 도움을 받아 숨을 이어가는 안중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꽉 물었다.
테러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모든 이목을 빼앗긴 상황에서, 즈믄나래 빌딩의 본부가 테러를 당했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마법이 즈믄나래 빌딩의 최상층,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을 공격했다.
‘위스프, 이 개새끼들이…….’
원흉은 위스프였다.
확실하게 위스프가 흉수라고 밝혀진 건 아니지만, 굳이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그런 테러를 저지를 세력은 위스프밖에 없을뿐더러, 즈믄나래 빌딩을 공격한 마법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아직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최소 5서클 이상의 마법이었다. 이 세상에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테러에 이용하는 집단은 위스프를 제외하면 없다.
‘젠장.’
사실 어떻게 보면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바츠무는 위스프란 테러 집단을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는 건, 자신들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향해 일말의 망설임 없는 본격적인 테러 행위를 저지를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다.
안중현을 향한 테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비단 안중현만이 아니다.
모든 이들.
세상 모든 이들이 바츠무 그리고 위스프의 표적이다. 지금 이 테러는 어떤 의미에서 본격적인 테러가 아니라, 경고였다. 정말로 그들이 안중현을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고작 최상층에 마법을 퍼붓는 것만으로 만족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그런 이강우에게 연락이 왔다.
* * *
-내 이름은 리란칭.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전화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통성명. 이 긴박하고,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강우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품지 않은 듯,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표정이 되어있었다. 이강우는 지금 감정을 품으면 자신이 미쳐 버릴 걸 알고 있었으니까.
“원하는 게 뭐지?”
상대의 정체는 곧장 파악했다. 예전에 류복희가 이강우에게 해준 말을, 이강우는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도쿄로 와라.
도쿄!
이강우는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칠성문에게 역추적을 당했다는 사실을, 도쿄 하수 시설의 존재를 들켰다는 사실을, 위스프도 알게 됐다.
특이한 점은 보통 테러 조직이 근거지를 들키게 되면, 근거지를 버리기 마련인데, 위스프는 오히려 역으로 이강우에게 도쿄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이강우를 제대로 도발하기 위해, 그의 주변 인물에게 테러를 가했다.
‘도쿄에 뭔가 있긴 있군.’
그들 입장에서도 도쿄라는 무대를 버릴 생각이 없다는 의미다. 어쩌면 2등급 모래시계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내 발로 함정으로 들어가란 의미인가?”
물론 그곳은 이강우에게 함정이다. 아니, 함정이라기보다는 지옥에 가까울 것이다. 위스프가 이강우에게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 이렇게 연락을 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이 도쿄에 놈들의 전력(全力)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전력이 있는 곳에 이강우가 제 발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네가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인다.
위스프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안중현을 습격한 것이다. 테러집단이란 테러라는 폭력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집단이다. 위스프는 자신들이 원하는 걸 이룰 때까지 테러라는 폭력을 아낌없이 사용할 것이다. 이강우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것이다. 포식자 팀 그리고 가족, 이강우가 분노를 참지 못해 도쿄에 올 때까지 테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리고 이강우는 절대 그걸 참지 못할 것이다.
안다.
이강우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다. 그는 바츠무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런 그가 상대의 꼬드김에 넘어간다는 건, 세상의 위기를 외면하는 짓이다.
‘젠장…….’
그러나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가족을 희생하라는 건,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사랑스러운 연인을 포기하라는 건, 적어도 이강우 기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총꾼이 된 이유, 푼돈을 위해 목숨을 내건 이유. 가족을 위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때의 심정이 이제 와서 달라졌을 리 없다.
“내가 가면 더 이상 내 주변은 건드리지 않을 건가?”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목적을 달성하면, 불필요한 폭력은 행사하지 않는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강우는 터져 나오려는 그 말을 삼켰다. 그 말을 삼키는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난 당한 것 이상으로 갚는다. 내가 직접 가서 네놈들 전부를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주지.”
-기다리겠다.
* * *
류복희가 이강우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하나였다.
“절대 놈들의 수작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안중현이 위스프의 테러에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류복희는 위스프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위스프가 이강우를 도발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다.
류복희는 이강우란 인간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의 일생과 경력을 봤을 때 그가 가족 앞에서 희생적인 인간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류복희의 연락은 한발 늦은 연락이었다.
-위스프가 이미 연락을 했습니다. 당신이 말해 준 리란칭, 그가 직접 제게 연락을 하더군요.
“리란칭은 뱀보다 더 차가운 피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입니다. 결코 거래나, 타협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그가 도쿄로 저를 불렀습니다.
“도쿄…….”
이 순간 류복희는 직감했다.
“설마 혼자 갈 생각입니까?”
이강우가 결심을 마쳤다는 사실을. 이강우가 놈들의 도발에 응할 작심을 했다는 사실을.
“이강우 씨 그건…….”
말려야 한다.
이강우는 귀중한 패다. 아니, 압도적인 패다. 여기서 이강우를 잃는 건, 체스에서 퀸을 잃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당연히 이강우를 혼자 도쿄로 보낼 수는 없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합…….”
-내가 미끼가 되면,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끌 수 있습니까?
그 사실을 이강우도 잘 알고 있었다.
류복희는 이강우가 미끼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머릿속의 그림을 곧바로 바꾸었다.
이강우는 어떤 식으로든 도쿄로 갈 것이다. 가족, 그리고 연인과 지인이 위기에 빠지는 게 세계가 종말에 빠지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이강우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미끼가 되겠다는 겁니까?”
체스에서 퀸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퀸을 언제까지 아껴둘 수는 없다. 체스의 말은 움직여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이미 도쿄 하수 시설에 대한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나셨을 터. 도쿄 하수 시설에 놈들의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류복희는 이강우의 말에 동의했다. 흑성단으로부터 아직 보다 확실한 정보가 오진 않았지만, 흑성단이 분신을 한 후에도 도쿄 하수 시설을 관리하는 집단들은 그 사건을 공개하기는커녕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은폐했다. 도쿄 하수 시설에 마련된 무언가가 세상에 공개되기를 원치 않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더불어 이강우가 미끼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최고의 미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스프가 이강우만을 주목할 테니까.
“그래도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미끼가 된다는 건 이강우 씨가 죽는 경우를 상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여기서 이강우를 미끼로 쓸 수는 없었다.
원래 미끼란 게 제 역할을 하더라도, 미끼 자체는 표적에게 먹히거나, 엉망이 되는 법이니까.
“당신도 그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이강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총꾼 출신인 그가 미끼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총꾼 시절 내내 미끼나 다름없는 인생을 살아온 그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강우가 거듭 괜찮다는 말을 했다. 류복희는 이를 꽉 물었다. 이강우가 결심을 했다. 지금 류복희가 그런 이강우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다. 결국 류복희가 반대를 하더라도 이강우는 도쿄로 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강우 말대로 따라주는 게 맞다.
무엇보다 이미 준비를 해두었다. 류복희 그리고 칠성문은 도쿄 하수 시설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특별팀을 만들었다. 언제 어느 순간 그 팀을 투입할 것인가, 시기만을 가늠하던 중이었다.
“좋습니다. 최대한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류복희가 결정을 내렸다.
-고맙습니다.
* * *
통화가 끝나는 순간, 이강우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런 이강우의 눈에 가방 하나가 들어왔다. 큼지막한 스포츠가방을 바라보던 이강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멜트 드래곤의 고기.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한 맛을 가진 그 고기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도축을 하면서, 맛있게 요리된 멜트 드래곤의 고기를 먹자마자 방긋! 채유리가 지을 미소를 떠올리며 답답했던 가슴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안중현의 습격 사건 이후 멜트 드래곤의 고기는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강우는 곧장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위기 상황인 건 분명했다. 어쩌면 이강우는 류복희가 우려한 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을 기획한 이유는 오직 하나.
이강우가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자, 아련했던 채유리의 얼굴 대신 섬뜩하기 그지없는 불사황제 야크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시체가 된다면…….’
야크센.
그가 이강우가 믿는 구석이었다.
‘네가 내 시체를 차지하겠지.’
이강우는 죽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츠무를 막을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바츠무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야크센이 이강우의 몸을 차지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강우의 죽음이 안중현에 대한 최고의 복수이자, 가족과 지인 그리고 세상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셈이다. 야크센은 이강우와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모른다. 이강우는 안중현이 습격을 당하기 전에, 좀 더 일찍 대의를 위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순순히 야크센에게 건네줬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
이강우가 탄식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강우는 지금 야크센이 자신을 대신해 바츠무와 싸워준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었다.
‘미안해.’
단지 정말 미안할 뿐이었다.
야크센은 이강우보다 낫다. 이강우보다 강하고, 바츠무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줄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지만 야크센이 절대 할 수 없는 게 있다.
‘유리야, 미안해.’
채유리에게 요리를 해주고, 그녀를 옆 좌석에 태운 채 운전을 해주고, 그녀의 입이 심심할 때 주머니에 숨겨둔 초콜릿을 건네주는 것. 그러다가 달콤하게 이마에 키스하는 것.
오직 이 세상에서 이강우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말 미안해.’
그래서 미안했다.
채유리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미안한 감정 때문일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이강우의 어깨가 잔잔하게 들썩였다.
* * *
“이강우가 도쿄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모양입니다.
그 두루뭉술한 부하의 표현을 듣는 순간 리란칭은 차갑기 그지없는 어조로 반문했다.
“확실한가?”
리란칭의 반문에 부하는 식겁했다. 리란칭의 성격을 모를 부하가 아니다. 리란칭이 이렇게 반문할 경우, 예? 같은 되물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대답을 하려면 확실하게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내뱉은 대답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부하는 전부 알고 있었다.
때문에 부하는 짧게 고민했고.
“예, 도착했습니다.”
확실하게 대답했다.
리란칭은 그 대답에 만족했고,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풀도록.”
“예.”
* * *
이강우가 도쿄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그를 반긴 건 비명이었다.
끄아아악!
온갖 종류의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란 속에서 무장한 공항 경비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어눌한 영어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소용은 없었다.
이강우는 마치 세상 모든 시계를 2015년으로 되돌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몬스터가 등장한 모양이군.’
그때도 그랬다. 몬스터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었고, 통제는 되지 않았다.
‘한두 마리가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몬스터 한두 마리 등장한 것을 가지고 나라가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 몬스터가 5등급 이상의 몬스터라면 모를까.
또한 일본은 7서클 마법사를 보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몬스터에 대한 충분한 대처 능력과 인프라를 구축한 국가다. 개중에서도 도쿄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의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도쿄 국제공항이 이 정도의 패닉 상태에 빠진다는 건, 단순한 수준의 소란이 아니라는 의미다. 세상이 뒤집힐 만한 소란이 일어났다는 거다.
하물며 이강우가 도착하는 순간 소란이 일어났다.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은?
‘흥.’
없다.
이건 격한 축하 인사다.
이강우는 그 인사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죽으러 이곳에 왔다. 죽음을 각오한 인간의 속에 번듯한 감정이 있을 리 없다.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 이들이 대불(大佛)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 대자대비의 품격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강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죽여 버리겠어.’
격렬한 증오.
‘전부, 전부 씹어 먹어 주마.’
그리고 그 증오를 머금고 자라난 폭력성만이 이강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안중현의 습격 사건은 다시 한번 한국 정재계 인사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온갖 뉴스에서는 이번 습격으로 한국이 수조 원의 피해를 입었다, 국가적 손해를 입었다, 같은 이야기를 뱉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손해를 봤다.
딱 한 명.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나마 득을 본 이를 꼽으라면, 안대욱 부청장 정도만이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긴급 상황에서 이부성 마법청장은 결국 안대욱 부청장의 현장 복귀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수완으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혼란을 상대할 수가 없었을뿐더러, 이부성 마법청장은 여차하면 그냥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권력에 연연할 때가 아님을, 정치인들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현장에 복귀한 안대욱 부청장.
하지만 그런 안대욱 부청장 역시 득을 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해야 했다.
하나는 도쿄에서 일어난 몬스터 퍼레이드였다.
‘최악이군.’
도쿄, 그 드넓은 땅 위에 몬스터들 수천 마리가 등장해 날뛰기 시작했다.
이 심각한 상황 앞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읍소했다.
제발 도와 달라고,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처절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요청을 한 것이다.
이제까지 지원을 요청한 적은 있어도, 읍소를 할 정도로 자세를 낮춘 적은 없었던 일본의 이런 모습은 나름 이 바닥에서 오래 지낸 안대욱 부청장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마법사들이 막지 못하면, 피난조차 이루어질 수 없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의 행보가 이해가 됐다.
지금 당장 이 몬스터 퍼레이드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 후에는 그냥 전부 쓸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폭격을 하는 거다.
폭격 방법은 다양하다. 오키나와에 있는 전투기들이 나와도 되고, 좀 멀긴 하지만, 괌에 있는 B-2 폭격기가 오기를 기다려도 된다. 가장 깔끔한 건, 이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둔 전략핵무기를 쓰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무너진다. 쑥대밭이 된 도쿄를 재건하는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물론 이렇게 안 해도 몬스터가 도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쿄가 무너지는 건 고려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대피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마법사를 비롯한 주변 지원을 통해 도쿄도에 머무는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대피시켜야 한다. 전쟁이 나면, 남는 건 사람밖에 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당장 일본을 현실적으로,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 전력은 한국이다.
중국?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공조를 위해서 중국 그리고 칠성문에 대해서 힐난에 가까운 비난을 최근까지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자존심 문제를 떠나서 중국이 요청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도와주면 메리트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쉬운 이야기는 아니야.’
하지만 반대로 이런 일본을 돕기 위해 적지 않은 전력을 파견하는 건, 전력 공백을 야기하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에도 최근 연달아 몬스터가 등장했다. 5등급 몬스터가 수도권 내에 등장한 건 2015년 이후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마법사를 보낸다? 어림도 없다. 딱 봐도 매국노 소리 듣기 좋은 선택이다.
물론 일본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한국이다. 국가의 안위를, 미래를 본 저울질이 필요할 때다.
‘이부성 마법청장이 내게 책임을 떠넘길 만하군.’
안대욱 부청장 입장에서는 머리가 터질 지경.
그런 와중에 두 번째 고민이 안대욱 부청장을 더더욱 미치게 했다.
‘이강우.’
이강우가 무단으로 도쿄로 갔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출입국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몰래 갔다.
사실 안대욱 부청장은 도쿄에서 일어난 몬스터 퍼레이드 사건보다, 이강우의 도쿄행 사건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강우가 멜트 드래곤을 혼자서 해치웠다는 희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중현이 습격을 당하더니, 갑자기 상황 파악을 하려니까 이강우는 도쿄에 있단다. 심지어 그 도쿄에서 몬스터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이쯤 되니까 화가 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안대욱 부청장은 위기감을 느꼈다.
‘세상이 바뀔 준비를 하는 모양이군.’
언제나 그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건, 시대가 변하는 기점이 되고는 했다.
어쩌면 이강우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무언가를 상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대욱 부청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때는 결국 대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강우가 이런 모든 상황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나름 메시지를 남겼다는 점이었다.
가족 그리고 포식자 팀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메시지.
자신이 잘못될 경우,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얼마든지 이용하라는 내용의 메시지.
강희, 그를 어떤 식으로든 사로잡고 있으라는 내용의 메시지.
이 메시지에서 안대욱 부청장이 초점을 맞춘 건 마지막 부분이었다.
‘강희.’
이제까지는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는 바람에 강희를 잡고도, 그를 제대로 취조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안대욱 부청장은 강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즈믄나래라는 집단을 세우는 순간부터 말이다.
‘이강우가 직접 이렇게 언급한 걸 보면, 강희, 놈에게 분명 뭔가가 있다.’
심지어 즈믄나래 출신인 이강우마저 강희를 의심하라고 한다.
안대욱 부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희와 위스프에 대항하기 위해 따로 독립적인 조직을 만든 게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 * *
도쿄는 지옥이었다.
그 숫자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도쿄가 위치한 드넓은 간토 평야 위를 활개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라난 빌딩을 수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류가 자연을 혹사하며 가차 없이 이룩한 문명이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불길과 폭음과 괴성과 비명이 치솟았다.
지옥도.
그 우글거리는 몬스터 세상 속에서 이강우는 원하는 목적지로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개판이군.’
이동하는 이강우의 주변에는 그가 불과 얼음의 군단으로 소환한 열 명의 전사들이 있었다.
전사들은 헤이스트 마법을 쓴 이강우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며, 이강우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때 이강우를 발견한 몬스터 두 마리가 이강우에게 접근했다. 이강우는 놈들에게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스윽!
이강우가 신경을 쓰기도 전에 불의 전사 한 명과 얼음 전사 한 명이 움직였다. 둘은 각각 양옆으로 갈라지며 접근하는 3미터 몸길이의 늑대와 채찍처럼 긴 팔을 가진 원숭이에게 접근했다.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그 두 전사가 쥐고 있는 붉은 뿌리창이 늑대의 머리를 자르고, 원숭이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비명도 없었다.
깔끔하게 두 마리의 몬스터를 제거한 두 전사는 붉은 뿌리를 놈들의 몸에 꽂았다.
붉은 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몬스터 사체에 뿌리를 내리고 피를 흡수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가 향하는 방향 부근에서 거대한 덩치를 가진 코끼리가 날뛰기 시작했다. 길쭉한 코를 채찍처럼 이용하며 야단법석을 피우는 코끼리의 두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광기만이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쿵, 쿵!
놈은 접근하는 모든 것을, 몬스터라고 해도 가차 없이 긴 코로 때리고, 거대한 발로 짓밟았다.
네 명의 전사들이 그 코끼리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두 명의 전사는 건물을 타고 올라가 코끼리의 몸뚱이를 노렸고, 남은 두 명은 엉망이 된 도로를 질주하며 코끼리의 다리를 노렸다.
푸욱, 푹!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피륙을 유린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기 시작했다.
꼬오오오!
그 소리 뒤로 구슬픈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코끼리가 무너졌고, 이강우는 그런 코끼리를 밟고 지나갔다. 공포의 세상 속에서 이강우만이 담담함을 품을 수 있었다.
이윽고 이강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쿄 하수 시설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 섰다. 철조망과 검문소가 이강우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지만, 그것들을 관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CCTV만이 이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강우가 CCTV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강우의 옆에 있던 얼음 전사가 팔을 휘둘렀다. 팔을 휘두른 얼음 병사의 손에서 날아간 얼음 비수가 CCTV를 박살을 냈다. 철조망 역시 이강우의 옆에 있던 불의 전사가 쥐고 있는 붉은 뿌리 칼로 단숨에 잘라냈다.
거칠 것 없는 이강우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고, 종국에 지하 속에 마련된 거대한 콘크리트 공간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곳곳에 자욱하게 깔린 어둠, 그 어둠 속을 듬성듬성 밝혀주는 불빛 사이로 모래시계문의 부분 부분이 보였다.
‘미친 새끼들.’
그 숫자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래시계문이 있었다. 심지어 그 문들은 이제 제구실을 할 수 없는 문들이었다. 모래시계가 모든 모래를 떨어뜨리고, 몬스터를 토해낸 문들이었다.
더 이상 분노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강우는 재차 이 광경 앞에 분노했다.
그때.
“네놈이 야크센의 그릇이군.”
어둠 속에서 러시아어가 튀어나왔다.
이강우가 고개를 돌리고, 이강우의 주변을 호위하는 열 명의 전사들 역시 이강우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치 군무를 보는 듯했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통역 마법을 쓰도록.”
이강우가 어둠을 향해 말했다. 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런 이강우의 말에 어둠 속에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대화를 위해 마련한 무대가 아니다.”
사내의 입에선 굉장히 능숙한 한국어가 나왔다.
그리고.
푸후후후!
사내의 입에서 푸른 불꽃이 흘러나왔다.
푸른 불꽃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점차 영역을 넓히더니, 축구장 넓이만큼 퍼졌다. 퍼진 불꽃은 활활 타오르기보다는 얌전하게 타올랐다. 그 모습이 불꽃으로 만들어진 잔디를 보는 듯했다.
푸른 불꽃이 자욱했던 어둠을 걷어냈다.
그런 불꽃 들판 속에 이강우와 그가 소환한 열 명의 전사들이 밟고 있는 지역만이 불꽃의 침범을 받지 않은 채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이 불꽃에 포위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강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포위한 푸른 귀화(鬼火)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이 불길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해골처럼 깡마른 사내를 바라봤다.
“바츠무족인가?”
그 말에 등장한 사내는 대답 대신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바노프.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왔구나!’
불사황제 야크센, 영생을 추구하는 바츠무족에게 죽음의 공포를 주는 그 무시무시한 존재의 그릇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이 토해낸 불꽃으로 산산조각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까.
또한 이것은 증명이었다.
‘강희, 마르쿠스! 네놈들은 결국 틀렸다.’
자신만이 오롯하게 옳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며, 동시에 다른 동족들은 틀렸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나만이 옳았다!’
이바노프에게는 다른 그 무엇보다, 이 세계의 종말보다, 자신이 옳다는 걸 그들에게 증명하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그 증명은 이강우의 죽음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으하하!”
이바노프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 동조하듯, 바닥에 풀처럼 깔린 불꽃들이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터지는 불꽃들이 이강우의 몸을 향해 날아갔고, 불의 전사들이 방패가 되어 다가오는 불꽃들을 막아냈다. 그 불의 전사들 속에서 이강우가 손바닥을 펼쳤다.
펼친 손바닥에서는 절망의 태양이 솟아올랐다.
시커먼 절망의 태양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절망의 태양을 바라보는 이바노프의 두 눈동자가 뱀처럼 세로로 갈라졌다.
부르르!
갈라진 이바노프의 눈동자 사이로 악몽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이바노프는 양팔을 크게 펼친 뒤 이강우가 만들어낸 절망의 태양을 향해 입을 다물고 볼을 크게 부풀렸다.
푸후후후!
이바노프가 자신이 머금은 것들을 절망의 태양을 향해 토해냈다. 물줄기처럼 터져 나온 푸른 불줄기가 절망의 태양을 휘감았다.
동시에 스멀스멀, 이강우를 덮치려던 푸른 불꽃들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검은 파리!
불사황제의 또 다른 권능이 푸른 불꽃을 천천히 먹어 치우며, 자신의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절망의 태양이 푸른 불꽃에 뒤덮였고, 푸른 불꽃이 검은 불꽃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역사에 남지 않을, 그러나 역사를 가를 전투가 시작됐다.
* * *
이바노프는 쉴 새 없이 불을 토해냈다.
그가 토해낸 불은 단순한 불과는 전혀 달랐다. 메뚜기떼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고, 승냥이처럼 바닥을 빠르게 기어 다니며, 이강우를 먹어 치울 기세로 덤볐다.
이강우는 검은 파리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지켰다. 검은 파리는 이강우의 주변으로 덤벼드는 이바노프의 불꽃들을 먹어 치웠다. 반대로 이바노프의 불꽃들이 검은 파리를 먹어 치우고 했다. 두 불꽃이 서로의 색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그 색깔 전쟁 속에서 움직인 건 불의 전사들이었다.
쉬익!
그들은 푸른 불꽃을 뚫고, 이바노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녹아 버린 얼음 전사들을 대신해 등장한 스무 명의 불의 전사들, 개중 열다섯이 이바노프를 노리고 움직였다.
불의 전사들은 거대한 하수 시설의 콘크리트 공간을 훌륭하게 이용했다. 일부는 벽면을 타고 단숨에 이바노프의 뒤로 넘어갔다. 삽시간에 이바노프의 후방을 점하고, 포위망을 구축했다.
포위망이 구축되는 순간, 불의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앞세운 채 돌진했다.
동시에 두 명의 전사들이 벽을 타고 높게 도약했다. 이바노프의 머리 위까지 도달한 그들은 낙하했다.
사방 그리고 머리!
이 순간 이바노프가 도망칠 곳은 굳이 찾자면, 땅바닥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바노프는 땅을 파고 도망치는 모습을,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꼿꼿하게 바닥 위에 서 있었다.
서 있는 이바노프의 볼이 다시금 크게 부풀어 올랐다.
푸후후!
이바노프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불의 전사를 향해 머금은 불꽃을 토해냈다. 그가 토해낸 불꽃은 두 명의 불의 전사를 휘감았다. 휘감은 불의 전사들은 날개 잃은 새처럼,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화르륵!
동시에 불의 전사들의 발목이 잡혔다. 그들의 발목을 잡은 건 발아래 들판처럼 펼쳐진 푸른 불꽃들이었다. 발목을 잡힌 전사들이 멈칫하는 사이, 석상처럼 굳은 불의 전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콰직!
떨어진 불의 전사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불의 전사들의 몸뚱이가 파편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기세등등했던 불의 전사들의 공세가 제대로 결과도 보이지 못한 채 막혔다.
이바노프는 이 광경을 무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 이바노프의 머리 위에서, 푸른 불꽃의 푸른빛이 닿지 않는 어둠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검은 파리!
이강우가 어둠 속에 감추어 놓았던 검은 파리 떼가 그물처럼 떨어지며 단숨에 이바노프의 몸을 덮쳤다.
검은 파리들은 이바노프의 전신으로 퍼졌다. 시커멓게 변한 이바노프를 향해 불의 전사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푸른 불꽃을 뜯어내듯 이겨내며 돌진했다.
쉬익!
네 방향에서 네 자루의 붉은 뿌리창이 교차했다. 이바노프의 몸에 창날이 꽂혔다.
카앙!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쇳소리였다. 피륙을 날붙이가 뚫는 섬뜩한 소리는 없었다.
놀라운 방어력.
그때 검은 파리로 뒤덮인 이바노프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은 붉은 뿌리창의 창대를 잡았다.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그 어떤 것보다, 강철보다 굳건하고 탐욕스러운 붉은 뿌리로 만들어진 창이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바츠무의 손!
이바노프가 붉은 뿌리의 힘을,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창을 잡고 있던 불의 전사는 곧장 창에서 손을 뗐다. 창대를 빨대 삼아 이바노프가 자신의 마력마저 빨아들이는 걸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불의 전사의 머리통을 이바노프의 오른손이 잡았다.
화르륵!
불의 전사는 곧장 반항했다. 불의 전사는 자신의 머리를 잡은 이바노프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의 양손으로 이바노프의 팔뚝을 잡았다.
그뿐이었다. 불의 전사가 제대로 힘을 쓰기도 전에 그가 가진 힘이 빠르게 이바노프에게 흡수됐다.
이것이 바로 바츠무족의 권능이었다.
마법을 다루는 그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권능, 마법으로 이룩한 모든 것들을 흡수할 수 있는 힘!
이 힘이 그들이 마법의 종주(宗主)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은 바츠무족의 힘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을 위협할 수는 없기에, 그렇기에 바츠무족은 어떤 문명에게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마법을 줄 수 있었으니까.
하물며 불사황제의 권능이라고 해도, 그 근간은 마력이다.
그 사실을 바츠무의 손을 가진 이강우가 모를 리 없다. 작금의 상황은 이강우의 상정 범위 내의 일이었다.
“음?”
이바노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돌덩이 비슷한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수류탄이었다.
‘이강우……!’
낌새를 느낀 이바노프가 푸른 불꽃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덮었다. 검은 파리 떼를 떨쳐낼 틈도 없이, 그냥 그 상태로 불꽃으로 된 보호막을 만들었다.
떨어지는 수류탄은 불꽃 보호막에 맞고 튕겨 올랐다. 그렇게 튕겨 오른 수류탄을 불의 전사 한 명이 제 손으로 잡았다. 수류탄을 잡은 불의 전사는 신속하게 이바노프가 만든 불꽃 보호막을 손에 쥐고 있는 붉은 뿌리로 된 검으로 찌른 후, 간신히 만들어진 틈 사이로 쑤셔 넣었다.
콰앙!
곧바로 굉음이 터졌다.
굉음과 함께 불의 전사의 팔이 통째로 날아갔고, 푸른 불꽃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일그러졌다.
투투투! 투투투!
그 사이 이강우가 불길 사이로 가지고 온 소총의 방아쇠를 규칙적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소총은 악기처럼, 박자를 토해내듯, 탄환을 토해냈다. 탄환은 이바노프의 불꽃 보호막을 뚫었다. 거기까지였다. 탄환이 피륙을 뚫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일그러진 보호막이 제 형태를 다시 갖추는 순간부터는 탄환이 튕겨 나오는 소리만 들렸다.
이강우의 눈빛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콰앙!
이강우의 눈빛과 함께 불꽃 보호막 근처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폭발음의 정체는 불의 전사였다.
불의 전사가 자폭을 했고, 그 자폭의 위력이 이바노프의 불꽃 보호막에 적잖은 타격을 줬다. 불꽃 보호막이 다시 한번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본 이강우가 사격을 잠시 멈춘 뒤 허리춤에 있던 수류탄을 휙! 가볍게 옆으로 던졌다. 안전핀을 뽑지도 않은 수류탄. 그 수류탄을 불의 전사가 잽싸게 받은 후에 안전핀을 뽑고는 불꽃 보호막을 향해 질주했다.
화르르륵!
그런 불의 전사의 질주를 막기 위해, 바닥에 깔린 들판 불꽃이 불의 전사 발목을 잡으려고 나섰지만, 불의 전사는 가뿐하게 도약해서 불꽃을 피했고, 이후 징검다리처럼 자리를 잡은 동료의 몸을 밟으며 불꽃 보호막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다시금 수류탄을 불꽃 보호막 사이로 집어넣었다.
콰앙!
수류탄이 터졌고.
퍼엉!
불의 전사도 자폭했다.
거듭된 폭발 속에 푸른 불꽃들이 분노한 듯, 화산처럼 치솟기 시작했다.
치솟은 불길들이 이강우의 시야를 방해했다. 이강우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여기까지가 이강우가 준비한 승부수였다.
마법이 통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불사황제의 권능 그리고 이강우가 이제까지 습득한 마법은 분명 강력하지만, 상대는 그런 마법을 인류에게 준 마법의 종주다. 그들이 마법에 대한 대비책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무기를 준비했다. 현대 병기, 어떤 의미에서 마법보다 더 강력한 무기들을 준비해왔다.
문제는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지금까지 준비한 게 효과가 있다면, 밀고 나간다.
하지만 효과가 없다면? 사실상 이강우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여기서부터는 바톤 터치를 해야 할 것이다.
야크센!
그에게 모든 걸 넘길 것이다.
각오는 했다.
그러나 자력으로 뭔가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을 리 없다.
이강우가 정면을 집중했다.
아직 무언가를 이룬 것도 아니니, 감상에 빠지기에는 이르다.
이강우가 쥐고 있는 총구도 정면을 집중했다. 남아 있는 열여섯 명의 불의 전사들도 붉은 뿌리로 된 무기를 혹은 자신의 신체에서 만들어낸 활활 타오르는 무기를 쥔 채 경계했다.
그들에게 주목받던 불꽃 보호막이 이내 사그라졌다.
검은 파리 떼가 보였다. 검은 파리 떼는 여전히 이바노프의 몸에 달라붙은 채, 그가 덮고 있는 것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 순간.
푸홧!
이바노프가 자신의 손으로 온몸에 달라붙은 검은 파리 떼를 옷처럼 뜯어냈다.
아니, 뜯어내는 건 검은 파리 떼가 아니었다.
살점.
이바노프, 그의 몸을 덮고 있던 것들,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인간의 탈을,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뚱이를 뜯어냈다.
휙!
그렇게 뜯어낸 것들을 넘실거리는 푸른 불꽃에게 주었다. 푸른 불꽃들이 게걸스럽게 검은 파리가 달라붙은 가죽을 먹어 치웠다.
이바노프가 드러낸 그의 진면목.
뱀이었다.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뱀의 비늘을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불사황제가 꿈속에서 이강우에게 보여줬던 그 시체와 흡사했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바노프의 비늘은 탐스럽기 그지없는 푸른빛을 잔뜩 품고 있었다. 온몸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무.”
이강우가 입을 열었고, 이바노프도 입을 열었다.
푸홧!
이바노프의 입에서 불꽃이 창처럼 튀어나왔다.
불꽃이 향하는 방향은 이강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곧바로 불의 전사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이강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휘릭!
그 순간 창처럼 곧게 날아오던 불꽃이 뱀처럼 휘어졌다. 휘어진 불꽃은 불의 전사를 넘어간 뒤에 곧바로 이강우를 향해 입을 벌렸다.
굵직한 불꽃뱀이 이강우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몸을 스프링처럼 날렸다. 이강우가 자세를 낮추며 공격을 피했고, 곧바로 활활 타오르는 푸른 들판 위에 몸을 날렸다.
그런 이강우의 몸을 덮고 있던 검은 파리들이 이강우를 위협하는 불길들을 먹어 치웠다. 이강우가 몸을 날리고, 굴러가고, 자리를 잡은 주변이 검게 물들었다.
이 순간 이강우는 이바노프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고, 이바노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불의 전사들 모두가 이강우와 같이 행동했다.
실체를 드러낸 놈의 몸에 붉은 뿌리를 하나라도 꽂을 수 있다면, 최소 양패구상을 꾀할 수 있기에!
이강우를 포함한 열일곱 명의 전사들이 이바노프를 향해 돌진했다. 이바노프가 입을 벌린 채로, 여전히 불로 된 뱀을 입으로 토해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 광경을 봤다.
그때.
푹!
이바노프의 입을 통해 나온 뱀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이바노프를 향해 돌진하던 이강우의 등줄기를 파고든 후 가슴팍을 뚫고 나왔다.
이강우의 몸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
동시에 관통당한 이강우의 심장이 불꽃이 되어, 자신을 관통한 뱀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이바노프가 입을 콱 다물었다. 뱀의 몸뚱이가 잘렸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했군.’
이강우는 그저 그릇일 뿐이다. 정말 무서운 건, 그 그릇을 야크센이란 괴물이 차지했을 경우다. 야크센을 상대로는 이바노프도 쉽사리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흥!’
때문에 이바노프는 야크센이 등장하는 것 자체를 애초에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난 강희와 다르다!’
강희는 이강우가 야크센이 되어 죽기를 바랐지만, 이바노프는 이강우가 야크센이 되기 전에 이강우로 죽일 속셈이었다. 이바노프가 다시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바노프가 자신의 입에서 꺼낸 것을 잡고, 이강우를 향해 겨누었다.
이바노프가 꺼낸 것의 정체는…….
파앙!
다름 아니라 샷건이었다.
샷건의 산탄이 이강우를 덮쳤다. 이바노프는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파앙!
보통 총성과는 전혀 다른 섬뜩한 총성과 함께 무수히 많은 산탄이 이강우의 몸에 박혔다. 산탄이 이강우의 몸에 박히는 순간 불의 전사들이 휘청거렸다.
불의 전사들에 공급되는 마력이, 이강우의 마력이 갑자기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영혼은 불멸해도, 육체는 불멸하지 못하지.’
불꽃 심장의 재생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안다.
그래서 단순한 총이 아니라 샷건을 준비했다. 산탄총은 재생능력이 뛰어난 부류에게 아주 유용한 놈이었으니까.
효과는 확실했다.
네 번째 총성이 들렸을 때, 이강우의 재생능력이 앞선 첫 번째 총성 때보다 느려졌다.
이바노프는 그런 이강우를 바라보며 뱀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끝이다.
재생능력이 떨어지면, 그 후에는 자신이 토해낸 불꽃들이 이강우가 죽을 때까지, 뼈가 녹을 때까지 먹어 치울 테니까.
이바노프가 미소를 지으며, 좀 더 제대로 총구를 조준했다. 이제까지는 이강우의 몸뚱이를, 큼지막한 표적을 노렸지만, 이번에는 이강우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게 마지막 방아쇠다.
그때.
‘음!’
이바노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주변에 일곱 개의 거대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의 다리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매끈하고, 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일곱 개의 창!
세븐 피어싱!
그 마법이 이바노프의 주변을 포위했다. 이바노프가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놈, 미끼였군……!’
그 순간 일곱 개의 창이 이바노프를 향해 움직였다.
파앙!
총성이 터졌고.
콰앙!
일곱 개의 창이 이바노프의 몸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