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58화 (58/66)

58화. 카운트다운

비행기 격납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큰 공간, 그 공간 안에 거대한 모래시계문 하나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런 모래시계문의 앞에 두 사내가 의자를 놓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둘의 처지는 극명했다.

한 명은 구속복을 입고 있었다. 길쭉한 옷소매가 등 뒤에서 서로 묶인 탓에, 구속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강제로 팔짱을 끼고만 있어야 했다. 다리 역시 족쇄로 결박되어 있었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처럼 보였다.

그런 사내 앞에 등장한 사내는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정도가 아니라, 눈앞에 구속복을 입을 사내를 아주 짐승 바라보듯, 쓰레기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둘이 대화를 시작했다.

“네 죄를 인정하는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구속복을 입은 사내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여긴 어디지? 지금 나를 상대로 무슨 짓을…….”

“이름.”

“뭐?”

“이름과 국적을 말해라.”

일방적인 질문.

그때 구속복을 입은 사내는 자신의 정면에 펼쳐진 거대한 모래시계문을 바라봤다.

따닥, 따닥.

그의 이가 악기처럼, 캐스터네츠처럼 부닥치기 시작했다.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사내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아, 아론 테일러. 국적은 영국이다.”

“영국 국적의 5서클 마법사 아론 테일러, 이게 네 정체인가?”

“젠장 맞으니까! 일단 여기서 꺼내줘! 뭐든 좋으니까 여기서 꺼내 달라고!”

아론 테일러.

그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리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내가 말한 것처럼 그는 영국 국적의 5서클 마법사였다.

더불어 유적 사냥보다는 개방된 모래시계문을 뛰쳐나온 몬스터 사냥을 주로 하는 자였다. 팀이 아니라, 영국군과 함께 사냥을 하는…… 소위 마법군인이라 불리는 부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그는 이렇게 의지가 약한 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군인 출신이었고, 나름 최고라 불리는 군인들과 함께 하는 자였다. 어지간한 고문도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 겁에 질린 애처럼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그가 마주 보고 있는 거대한 모래시계문 때문이었다.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그냥 단순히 거대한 문이 아니었다.

3등급 모래시계문!

그 정도 문이 아니라면, 닳고 닳은 5서클 베테랑 마법사가 질질 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아론의 눈에 보이는 사내, 모래시계문을 등진 채 서 있는 사내는 자신을 심판하러 온 악마처럼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무려 삼백 번이 넘는 몬스터 사냥을 했군. 그런데 모든 사냥이 콩고에서만 진행됐지.”

그 악마가 말했다.

“빌어먹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론 그리고 영국. 네놈들이 콩고에서 등장한 몬스터를 사냥했던 이유를 말해라.”

“그야 당연히 콩고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대가 없는 봉사였나?”

“다, 당연하지!”

“대가가 없는 봉사라서 콩고의 유전에 영국 기업들이 자리를 잡고, 콩고의 온갖 자원들을 헐값에 구매하는 건가?”

“그, 그건…….”

“콩고 주민을 위한다면, 어째서 그들이 모래시계문으로부터 자생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마법사 양성과 전문 전력 확보를 지원했어야 했는데 그에 대한 지원은 얼마나 했나?”

“나, 난 그런 건 몰라! 젠장, 난 그냥 마법사일 뿐이라고!”

“결국 봉사와 희생이 아니라, 콩고가 가진 넘치는 자원을 약탈할 명분을 얻기 위한 침략이었지.”

“대체 무슨 말을…….”

공황 상태에 빠진 아론.

그러나 이 순간 놀랍게도 아론은 뒤죽박죽 엉망이 된 머릿속에서 답을 찾아냈다.

“위스프?”

이 세상에서 마법사를 그리고 세계를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집단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위스프!

모래시계문의 시대를 빌미 삼아 강대국의 약소국 약탈을 규탄하는 심판자들!

그 위스프의 수장 중 한 명인 라미 하마드는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네놈들의 약탈이 아프리카의 자생력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가 바로 사하라 사막 그리고 모래군주다.”

“미친 새끼!”

“앞으로 모래시계문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그들을 구원한다는 시답잖은 명분으로 약소국을 침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겠지.”

“말도 안 되는 궤변 따위 지껄이지 마!”

여기서 라미 하마드는 더 이상 아론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론 너머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카메라가 라미 하마드를 줌인했고, 라미 하마드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심판자다. 그리고 이제 심판을 시작하겠다. 아프리카 그리고 세상의 약자들이 받은 고통, 그와 똑같은 고통을 약탈자들이 받을 때가 왔다.”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 * *

유리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방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웠다. 안중현은 그 감옥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강희.

한때는 안중현의 상사였던 그를 바라보는 안중현의 눈빛 어디에도 존경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똑똑!

안중현이 유리를 두드렸고, 그 소리에 강희가 고개를 돌렸다. 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 한구석에 마련된 수화기를 들었다. 안중현 역시 수화기를 들었다.

-안중현 씨군요. 이제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라고 불러야겠지요?

“뭐든 좋습니다. 지내는 건 어떠십니까?”

-편하진 않습니다.

“필요한 게 있습니까?”

-많지만, 안중현 씨가 가져다줄 것 같진 않군요.

이강우가 이부성 마법청장에게 강희의 신병 구속을 요구했을 때 이부성은 그런 이강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을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강제로 감금하는 건 명백한 위법행위였으니까. 그런 짓을 정부가 한다면, 정부가 치러야 할 대가는 엄청났다. 여차하면 대통령의 자리가 위험해질 정도였다.

-그보다 놀랍습니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준비를 많이 하셨던 모양이군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설마 이런 식으로 감금되는 처지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일은 쉽게 풀렸다.

‘안대욱 부청장 덕분이지.’

안대욱 부청장.

일찍이 위스프의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위스프와 강희, 둘 사이의 커넥션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위스프와 강희를 엮기 위한 준비를 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위스프가 대한민국의 수도에서 테러를 두 차례나 일으키면서, 한국 정부는 위스프와 관련된 모든 것을 국가보안 그리고 긴급이란 명분으로 절차를 무시한 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했고, 강희가 첫 번째 타깃이 됐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안대욱 부청장이 몰래 일을 꾸미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강희의 신병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현은 운이 좋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희의 신병을 구속하는 순간, 이미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마찬가지다.

벌집을 쑤셨고, 이제 튀어나오는 미증유의 벌떼와 맞서 싸우는 일만 남았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인류를 위협하는 무리에게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보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안중현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하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나름 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인류를 위협하다니……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블랙 스택을 창립한 건, 인류를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까?”

-블랙 스택 창립은 모래시계문이란 미증유의 적에게 효율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3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마력을 모으기 위해서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더불어 그 마력을 생산해줄 마법사들이 성장할 시간도 필요했습니까?”

강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와서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안중현 씨, 당신의 말을 저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강희의 모습에 안중현은 실소를 지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희가 순순히 자신의 배후와 진실을 토로할 작자였다면 이런 수작을 꾸미지도 않았을 터.

애초에 그로부터 반전을 가능케 할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를 감금한 건, 그가 상황을 악화하는 걸 막기 위해서, 그가 더 이상 어떠한 수작도 부리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사실 안중현은 여기 찾아올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위스프가 보낸 영상 때문이었다.

위스프가 세상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자신들이 사하라 사막에서 마법사를 납치한 집단이란 걸 밝히며, 3등급 모래시계문이란 무시무시한 폭탄을 터뜨려, 세상 어느 한 곳을 사하라 사막과 같은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자신들을 세상을 약탈하는 약탈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중현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약탈자와 심판자.’

안중현이 강희를 바라봤다.

원흉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그를 해치워서 후환조차 남기지 않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안중현이 이를 꽉 물었다.

피가 거꾸로 솟아서, 참지 못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탐탁지 않았다.

“넘버스 멤버, 그게 아마 당신이 숨긴 지뢰인 것 같은데…….”

그래서 말했다.

“내가 기필코 그 지뢰를 찾아서 당신이 밟도록 만들 거야.”

그 말에 강희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명백한 연기였다.

* * *

안중현이 떠났다.

강희는 곧바로 자리에 앉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책을 펼쳐 얼굴을 가린 그는 실소를 지었다.

‘멋지군.’

이런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정말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강희는 정체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을 드러내서, 이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지금 그를 가로막고 있는 방탄유리 따위는 그가 가진 능력을 이용하면 종잇장보다 가소롭게 망가뜨릴 수 있다.

그가 이곳에 남아서 여유를 즐긴다는 건, 상황이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실소가 지어지는 건 안중현의 모습 때문이었다.

‘안중현,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간이었군.’

아무래도 그가 이강우의 조력자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강우가, 안대욱이 아닌 안중현이 자신을 찾아와서 자신의 진실을, 세상의 음모를 고백하는 걸 보면.

솔직히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었고, 명백한 목적을 가진 채 그들을 움직였다.

그런데 안중현은 딱히 목적이 있어서 상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굳이 말하면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보게 되는 풍경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설마 그런 그가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이야?

‘여러 문명을 무너뜨리고, 그 대가로 영생을 이어나갔지만…… 개중에서 이번 문명 그리고 이번에 마주하게 된 인간은 여러모로 재미있군.’

지구 그리고 인간.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재미있어.’

실패는 없다. 위스프가 모래시계문을 탈취하는 순간,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2등급 모래시계문은 어떤 식으로든 열릴 것이다.

그리고 2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면, 인류는 끝이다. 오직 한 명, 바츠무의 대적자가 되기 위해 불사의 힘을 손에 넣은 야크센만이 처치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2등급 몬스터의 죽음은 야크센의 현신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실체조차 없었던 그 괴물이 실체를 가지게 되는 거고, 그건 곧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영생토록 악몽을 꿀 바에는 차라리 영생을 포기하겠어.’

무엇이든 간에 강희 그리고 그의 종족인 바츠무족이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 * *

“예,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안중현과의 통화를 마친 이강우는 스마트폰을 쥔 채로 이마를 툭툭 쳤다.

‘빌어먹을 새끼.’

개점휴업.

지금 이강우의 상태를 이 단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다른 단어는 없을 것이다.

‘유적 사냥도 안 돼, 개인 활동도 안 돼, 팀 활동도 안 돼. 되는 것 하나 없군.’

위스프의 영상이 전 세계 곳곳에 전달됐다. 그건 테러 예고였다. 위스프는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3등급 모래시계문이란 폭탄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쟁을 선포했다.

한국 정부는 이미 긴급 사태에 돌입했다. 위스프의 테러를 두 번이나 당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이강우의 모든 행동과 계획에도 제약이 걸렸다. 유적 사냥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채유리와의 데이트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언제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빌어먹을 남자친구라니까.’

이강우는 이 순간 채유리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인류의 존립이 걸린 위기 앞에서 연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떠오르다니?

이강우가 실소를 머금었다.

우웅!

그런 이강우의 실소를 흔들 듯,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이강우는 상관없이 받았다.

“이강우입니다.”

-접니다.

류복희였다.

“무슨 일입니까?”

-꼬리를 잡았습니다.

류복희가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이강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평소라면 금방 류복희의 말을 이해했겠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위스프, 놈들이 모래시계문을 가지고 도망친 장소 중 한 곳을 파악했습니다. 놈들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결국 류복희가 추가 설명을 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이강우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사실 우리 쪽은 이미 진즉에 위스프의 모래시계문 탈취 행위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는 건…….”

-위스프가 원하는 대로, 그들의 시나리오에 맞장구를 쳐줬습니다. 그래야 놈들이 진짜 숨겨둔 카드를 꺼낼 테니까요.

이강우의 머릿속에 곧바로 류복희, 그가 그리고, 준비한 그림이 떠올랐다.

‘그렇군.’

류복희 그리고 칠성문은 위스프가 모래시계문을 탈취하는 것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행동을 방관했다. 위스프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감수한 것이다.

비난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짓이다. 이번 위스프의 모래시계문 탈취로 인해 납치된 마법사의 숫자가 상당할뿐더러, 그들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게 맞다. 이번에 위스프의 수작을 막는다고 해도, 놈들은 당장 포기할 뿐, 다음에 비슷한 수작을 어떤 식으로 부릴 것이다. 차라리 지금 이 기회를 잡아서 놈들을 발본색원하는 게 맞다.

“그럼 지금 당장…….”

어쨌거나 이야기는 간단해졌다.

놈들의 꼬리를 잡았으면, 그 꼬리를 따라서 몸통을 잡거나 아니면 꼬리를 잡아당길 때다.

유엔 그리고 국제사회의 공조라면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위스프라도 해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위스프라면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국가들이 산더미다. 세계를 자극한 건 위스프가 먼저였으니까.

-유엔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류복희가 다시 한번 기겁할 만한 이야기를 건넸다.

“예?”

유엔을 믿을 수 없다니?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여 이강우 씨의 행보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몰라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현재 유엔 마법부의 수장인 마르쿠스는 블랙 스택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짐작하고 있는 자입니다.

류복희의 설명이 이어졌다.

-애초에 이번 모래군주 사냥 작전, 디저트 작전은 하나부터 열까지 유엔 마법부가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블랙 스택이 그들의 작전에 힘을 실어 줬습니다. 더 나아가 모래시계문을 대피소로 쓰겠다는 작전은 마법부에서 꺼낸 작전이고, 내부적인 우려 속에서도 마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섬뜩한 이야기다.

‘마법부마저 바츠무의 손아귀에 장악됐다고?’

바츠무가 세계 곳곳에 손을 뻗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 마법부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라니?

유엔 마법부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런 마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마법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아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꿀꺽!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본래는 녀석들의 꼬리를 잡을 경우, 필요하다면 미사일이라도 발사해서 놈들의 근거지를 타격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번 지역은 그럴 수가 없는 지역입니다. 만약 중국이 그곳을 미사일로 타격했다면,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요.

잡설이 길다.

“어디입니까?”

이강우가 말을 잘랐다.

-도쿄, 일본 도쿄입니다.

* * *

도쿄.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역이고, 도쿄가 유명한 이유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도쿄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쿄의 하수도 시설이다.

‘설마 하수구에 숨어 있을 줄이야.’

G-Cans이란 이름을 가진 도쿄의 빗물 제어 시스템, 하수도 시설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

단순히 크다, 수준으로 끝날 정도가 아니다. 지하 도시라고 착각할 만한 크기를 자랑한다.

간단한 사례로, 그 하수 시절을 떠받치는 기둥 중에는 그 높이가 24미터가 넘어가는 기둥이 다수 있다. 아파트 크기의 기둥이 떠받치는 지하 공간이라면 과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런 도쿄의 하수 시설을 현재 위스프가 근거지 중 한 곳으로 삼고 있었다.

‘그 크기라면 3등급 모래시계문도 보관할 수 있겠어.’

충분하다.

3등급 모래시계문 정도가 아니라, 모래시계문 수백…… 아니, 천 개도 거뜬히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하수 시설은 지금 도쿄도나 일본 정부가 관리하지 않고 있다.

‘미치겠군.’

2015년 모래시계문의 등장 이후 도쿄는 지옥이었다. 거듭 등장하는 몬스터는 산 하나 없이, 드넓은 평지 위를 가득 채운 건물들을 쉴 새 없이 부수고 다녔다.

몬스터 한 마리에 의한 피해액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지역이 도쿄였다. 오죽하면 도쿄에 전략핵을 써서 몬스터를 싹 정리한 후에, 도쿄를 재건하는 게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힐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어쨌거나 이후 마법의 등장으로 환수 타입의 몬스터 제거가 가능해지고, 보다 효율적인 몬스터 사냥이 가능해지면서 도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도쿄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을 때 도쿄가 자랑했던 하수 시설은 최악의 골칫거리가 됐다.

도망친 몬스터들이 하수 시설로 도망친 것이다. 전투기를 집어넣을 수도 없는 하수 시설 내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작업은 상상만으로도 골치 아픈 작업이었다. 더 큰 문제는 하수 시설 내의 몬스터를 처치하더라도, 하수 시설 내에 모래시계문이 등장할 경우, 그걸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수 시설을 쓰지 않을 순 없는 노릇.

때문에 일본 정부와 도쿄도는 하수 시설 내의 모래시계문을 관리해 줄 전담 기구를 만들고자 했다.

그때 나선 게 바로 블랙 스택이었다.

‘그게 블랙 스택 최초의 아시아 지부이자, 일본 지부였지.’

당시 길드라는 시스템을 유행시키던 블랙 스택은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지부 설립에 박차를 가하던 중이었고, 그런 블랙 스택이 도쿄도 하수 시설 관리를 정말 싼값에, 헐값이나 다름없는 값에, 봉사라고 해도 될 법한 가격에 해주기로 했다.

물론 그 조건으로 블랙 스택 도쿄 지부 설립을 승인해달라고 했지만, 도쿄도 입장에서는 호박 두 개가 넝쿨째 굴러오는 격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블랙 스택 일본 지부가 도쿄에 자리를 잡았다.

‘도둑놈에게 보안을 맡긴 격이었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도쿄도의 하수 시설에 문제가 생긴 것부터 거대한 시나리오의 프롤로그였다.

누가 보더라도 3등급 모래시계문…… 아니, 그 이상도 숨길 수 있는 장소 아닌가?

더군다나 블랙 스택이 도쿄도 하수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문제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블랙 스택은 그 사례를 한국 지부를 설립할 때 들이밀었다. 이 정도로 잘 관리하는 우리에게 지부 설립 기회를 달라! 그렇게 광고를 한 것이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굳이 그걸 들쑤실 사람은 없다.

‘꼬리가 아니라, 몸통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아.’

여기에 하나 더, 블랙 스택은 여러 지부 중에서도 일본 지부인 이치 길드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이치 길드는 일본 제일의 길드였고, 그 세가 블랙 스택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시애틀에 버금갈 정도였다.

블랙 스택이 적이라면, 도쿄는 적의 아가리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대체 의도가 뭐지?’

류복희의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일단 통보만 했다.

통보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강우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같은 국가 긴급 사태에서 이강우보고 일본 도쿄로 가서 하수 시설 관광 좀 하고 오라고 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불어 류복희는 말했다.

이런 일에 대비해서 나름의 세력을 마련해두었고, 그들이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이강우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건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강우의 느낌은 달랐다.

‘그곳이 정말로 본진이라면, 고작 비밀 첩보 조직만으로 일이 해결될 리는 없어.’

바늘로 찔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수술을 하듯, 과감하게 피부를 절개해서 속을 드러내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

분명한 건, 이강우가 손만 빨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호령은 복면을 뒤집어쓴 다섯 명의 부하를 보는 순간, 본인도 복면을 착용했다.

검은 유성, 흑성단(黑聖團).

칠성문이 은밀한 작업 처리가 필요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고, 그런 흑성단의 단장이 바로 호령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흑성단의 단장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복면을 쓰고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굳이 흑성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만큼 중대한 상황이 없었기에.

달리 말하면, 이번 상황은 흑성단 전력을 투입해도 부족할 정도로 중대한 상황이란 의미.

이윽고 그녀가 수신호를 보내자, 부하 한 명이 곧바로 바닥에 지도 한 장을 펼쳤다.

G-Cans.

지도 상단에 적힌 이름이 이 지도의 정체를 말해 주고 있었다.

호령은 지도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도를 보며 수신호로 말했다.

-지금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색. 절대 정체가 드러날 만한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마라.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하들을 바라보던 호령이 수신호를 보냈다.

-죽을 땐 유성처럼.

유성처럼 죽으라는 의미.

유성처럼 대기권에서 흔적도 없이 타 버리란 의미다. 섬뜩한 말이었지만,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호령도 각오를 다졌다.

‘흔적 없이 살다, 흔적 없이 죽는다.’

이 순간 우습게도 호령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 선생이 해주는 요리, 한 번 더 먹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강우, 그의 요리였다.

물론 짧은 회상이었다. 호령은 언제나 그래 왔듯 식욕을 가차 없이 짓눌렀다.

* * *

“그래서 현재 상황은?”

작은 뱁새 같은 눈에 짙은 눈썹 그리고 반질거리는 대머리 사내의 말에 무겁게 보일 정도로 두꺼운 안경테를 쓰고 있던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쓴 후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세토 박사, 지금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오. 단지 상황을 설명받고 싶을 뿐.”

“그게, 그러니까…… 침입자가 있었는데, 침입자들 전부가 분신을 하는 바람에…….”

분신.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머리 사내, 리란칭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단숨에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흑성단이군.”

“예?”

세토 박사란 인물이 반문했지만, 리란칭은 그 반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뭇거뭇 돋아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흑성단이 여기 왔다는 건, 꼬리가 잡혔다는 의미. 칠성문의 행보가 잠잠하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하마드, 그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거사를 앞두고 있었다. 9년째 접어드는 시간, 결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준비한 작전이 이제는 종막에 다다르고 있었다.

당연히 종막을 위한 모든 것을 마련했다. 남은 건 이제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일을 처리하면, 그러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설마 종막에 다다르는 상황에서 무대 위로 방해꾼이 난입을 할 줄이야?

‘음.’

심각한 문제였다.

모든 게 그렇지만 초반에 문제가 생기면 수정이 가능하지만, 절정을 앞두고 문제가 생기면 준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건 이 소식에 대한 반응이다.

‘마스터는 폭발 직전이다.’

마스터 이바노프.

이미 볼코프의 죽음으로 분노로 가득 찼던 그는 이 중요한 순간 방해꾼이 등장한다면 자제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칠성문은 그가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라 잠자코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잠자코만 있을 수는 없다.

‘위험해.’

결정적으로 이곳은 중요했다.

도쿄, 이곳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바노프는 본격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여길 버리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런 선택지는 없으니까.

사수(死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방해꾼이 이곳까지 넘어와서 수작을 부리는 건 막아야 했다.

“세토 박사.”

“예? 예!”

“카운트다운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얼마가 정확히 얼마인가?”

“다행히도 최근 확보한 마력의 양이 상당합니다. 조금 더 재료를 확보하고, 정제 과정을 거치면…… 드디어 원하시는 대로 모래시계를 작동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 설명에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리란칭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세토 박사, 정확히 얼마인가?”

이 경고에 세토 박사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기겁했고, 다시금 비뚤어진 안경을 떨리는 손으로 고쳐 썼다.

“그게…… 변수가 있지만…….”

“목숨을 걸 수 있는 숫자를 말하도록.”

“한 달여…….”

“확실한 숫자.”

“34일…… 아니, 35일! 예, 그 정도 걸릴 겁니다.”

세토 박사의 대답에 리란칭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숫자보다 일찍 끝났으면 좋겠군. 그 시간을 넘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리란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제 해야 할 일은 확실해졌다.

‘일단 조직원을 이용해 테러로 시선을 돌리고…….’

시간을 벌 것이다.

모든 비밀이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없다. 그저 이곳을 의심하는 수준, 그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수준일 것이다. 이곳에 숨겨진 진짜 비밀을 파악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당장 녀석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시간을 끌 것이다.

‘일단 포식자 이강우의 발목을 잡는 게 최우선. 그가 등장하면…… 마스터가 어떻게 나올지 감조차 잡히지 않으니까.’

리란칭의 머릿속에 동료가 진행했던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 카드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되니까 볼코프의 죽음이 아쉽게 느껴지는군.’

볼코프.

그가 죽기 전 설치해둔 폭탄을 터뜨릴 때가 왔다.

* * *

“이쪽 지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A13 구역 클리어.

-B11 구역도 클리어.

라이트가 달린 헬멧을 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거대한 하수 시설 곳곳을 가득 채운 어둠을 수색하는 이들은 손에는 소총을 들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군인 혹은 그와 비슷한 부류의 인물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역시 이쪽까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때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결국 입구 근처에서만 소란이 일어난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차피 이 안까지는 우리도 들어갈 수 없잖아?”

말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세 명의 사내들이 칠흑 같은 어둠 너머를 바라봤다. 그들의 헬멧에 달린 라이트가 어둠을 비추었지만, 비출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 어둠은 보통의 어둠이 아니었다. 끈적끈적한 느낌의 어둠이었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내디딘다면, 그 어둠이 발목을 잡아당기고, 온몸을 먹어 치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어둠. 공포가 어둠이란 형태로 현신한 듯한 느낌이었다.

부르르.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떨었다.

“……그래, 혹여 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몸을 숨기는 건 불가능하지.”

그 세 명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모두가 외면했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갔군.’

호령.

복면과 함께 특수 제작된 고글을 뒤집어쓴 그녀는 어둠을 헤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는 이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기지가 아니야.’

도쿄 하수 시설 내부 잠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수 시설인 만큼, 하수도를 이용해 소형 로봇을 보내면 내부 파악이 생각보다 쉬우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하수 시설 곳곳에 소형 로봇이 파고들 만한 틈이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이곳에서 소형 로봇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누군가 추가적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수고와 노력을 한다는 건, 이 장소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

그래서 무리를 해서 틈을 만들었다. 부하의 희생을 이용해서 틈을 만들었고, 호령이 그 틈을 이용해 내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잠입수색.

놀라웠다.

일단 곳곳에 숨겨진 모래시계문의 개수가 엄청났다. 호령이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만 오백이 넘을 정도였다. 도쿄 하수 시설의 크기를 고려한다면, 천 단위의 모래시계문이 있을 게 분명했다.

개중에는 크기가 상당한 것도 제법 있었다. 7등급 이상…… 5등급으로 보이는 것들도 상당했다. 놀라운 건 그 모든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들이 작동을 멈췄다는 점이었다. 클로즈된 건 아니었다.

‘모래시계문을 멈추는 기술이 있어.’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 속도를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기술. 세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그 기술을 모래시계문을 테러에 이용하는 테러집단이 가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섬뜩한데, 그 테러리스트 집단이 수천 개나 되는 모래시계문을 일본의 중심 도쿄 지하에 숨기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블랙 스택의 협조를 받으면서.

‘이것만 알려지면, 블랙 스택은 무너진다.’

그래서 직접 움직였다.

이번 일은 단순히 위스프의 기지에 타격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이 공개된다는 건, 위스프와 블랙 스택 사이의 커넥션을 공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밝혀지면 블랙 스택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블랙 스택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상대적으로 칠성문의 영향력이 커질 터. 칠성문이 모래시계문과의 전쟁을 주도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이 귀중한 정보를 이제는 외부에 전달하는 일만 남았다.

이 순간 호령이 이를 꽉 물었다.

‘당장 탈출은 위험해.’

벌집을 들쑤시며 벌집 안으로 들어왔다. 벌들이 쉴 새 없이 날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놓고 탈출을 하는 건 벌들에게 찔리고 싶다고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벌들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그들이 잠잠해지면 그때 움직이는 것이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한두 시간이 아니라, 며칠 동안을 숨죽인 채, 시체처럼 머물러야 한다.

고독 그리고 허기, 그 외에 인간이 마땅히 충족해야 하는 욕구와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버티자.’

호령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 * *

씨이이이!

파주시청 위로 F-15k 전투기 다섯 대가 호쾌한 궤적을 그리며 지나갔다. 굉음이 파주시청을 비롯해 그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러는 사이 파주시 곳곳에서 전운을 일으키기 위한 전쟁 병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은 물론,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전차까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군복을 입은 마법사들이 채우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한 전쟁 연습 따위가 아니었다.

실전.

지휘본부에 참석한 장성들의 심각하기 그지없는 표정들이 지금 상황이 명백한 실전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성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된 이강우의 존재는 이번 전쟁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멜트 드래곤.’

5등급 몬스터 멜트 드래곤이 파주시 북부 지역에서 등장했다.

더 큰 문제는 파주시에서 등장한 놈이 아니라는 것.

‘비무장지대에서 내려오다니.’

흔적을 추적한 결과, 녀석의 흔적은 비무장지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그곳에서 놈이 내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대한민국은 긴급 사태에 빠졌다. 현실에서 5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등장한 건 2015년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또한 파주시, 고양시 다음은 곧바로 수도 서울! 멜트 드래곤이 서울에 닿는다면, 그건 긴급 사태라는 표현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소란은 이마저도 아니었다.

“부산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현재 몬스터 처리와 함께 민간인 대피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소.”

“설마 바다에서 몬스터가 등장할 줄이야…….”

“제주 쪽은?”

“포격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포격이 끝나고, 남은 환수 타입 몬스터를 제거하기 위해 명궁을 비롯해 마법사들이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부산 그리고 제주.

두 곳에서도 각각 6등급 몬스터를 포함해 다수의 몬스터가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손실이다…… 같은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

물론 현재 이걸 테러로 규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생각은 올 게 왔다,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아무리 한국이 자체적으로 모래시계문 관리를 철저히 해도 한계가 있는 법 아닌가? 그동안 운이 좋아서 큰 소란이 없었을 뿐, 2015년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재해가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생각보다 긴밀한 대처가 가능했던 것도 이런 상황을 나름 예상하고 대비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강우의 생각은 달랐다.

‘바츠무의 수작이다.’

일본 도쿄 하수 시설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로부터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사건이 터졌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시간을 끌기 위해서 부리는 수작이 분명했다.

결정적으로 이강우의 발이 확실하게 묶였다. 5등급 몬스터가 등장했는데 이강우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강우는 5등급 몬스터는 물론 이번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한국에서 머물러야 한다. 동시에 그가 있어서 지금 소란이 그나마 제어되고 있었다.

3등급 몬스터, 모래군주마저 해치운 7서클 마법사 이강우가 대한민국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이 한국의 국민들은 2015년과 다르게 지독한 공황 상태에 빠지는 걸 막아줬다.

달리 말하면 이강우가 사라지면, 대한민국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영웅이라니.’

솔직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범죄자나 다름없는 총꾼이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손을 모아 승리를 기도하는 영웅이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사실에 발목이 잡힐 줄이야?

이강우가 두 눈을 감았다.

그때.

“멜트 드래곤을 발견했습니다.”

속보가 나왔다.

작전 회의를 하던 모든 장성이 속보를 뱉은 군인을 바라봤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장성이 아니었다.

“저 혼자 움직입니다. 서포트, 부탁드립니다.”

이강우, 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 * *

-놈이 문산역 역사로 들어갔습니다!

멜트 드래곤이 문산역에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포위망이 형성됐다.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 건 레미콘 차량이었다.

콰콰콰!

레미콘 차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산역 주변의 하수구에 시멘트를 붓기 시작했다. 동시에 군인들이 분주하게 도로 곳곳에 있는 배수구를 막기 시작했다.

멜트 드래곤이 작심한다면, 제대로 굳지 않은 시멘트 따위로는 막을 수 없겠지만,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한 호구지책이었다.

그렇게 수천 명이 넘는 인력이 멜트 드래곤이란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지척에 둔 채 목숨을 건 작업을 시작했다.

“젠장, 이런 일에 목숨을 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가 아니래냐? 군대에서 만날 작업만 해서 이게 군대인지, 공사판인지 몰랐는데, 설마 진짜 그게 전쟁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러는 사이 이강우가 문산역을 향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멜트 드래곤.’

세 번째다.

처음에는 시체인 녀석을 만났고, 두 번째는 유적 내에서 살아 있는 녀석을 만났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는 현실에서 녀석을 만났다.

생각보다 대단한 인연이다.

보통 5등급 몬스터를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심지어 제각기 다른 장소, 다른 입장에서 만난다는 건, 더더욱 힘들다.

반대로 멜트 드래곤 입장에서는 악연이 될 것이다.

‘속전속결.’

지독한 악연.

그렇기에 이강우는 멜트 드래곤을 상대로 여유를 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악연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뿐더러 그가 실수하면, 지금 이 주변에서 목숨 걸고 작업을 하는 군인들이 위험에 빠지니까.

제대로 된 대가조차 받지 못한 채 희생을 강요받는 그들에게 불운마저 강요할 필요는 없다.

‘추가 피해는 무조건 막는다.’

이강우가 품어야 할 슬픈 사건은 강주영 중사, 그와의 일화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

문산역 역사 안으로 들어간 이강우는 양 손바닥을 펼쳤다.

왼손에는 절망의 태양, 오른손에는 붉은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망의 태양은 이강우의 머리 위에 떴고, 오른손에 있는 붉은 뿌리는 그대로 움켜쥐었다.

움켜쥔 붉은 뿌리는 라이트닝 다트 마법을 머금고, 붉은색의 작은 벼락이 되어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멜트 드래곤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냐?’

그 순간 이강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위에 검붉은 액체가 모여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칫.’

이강우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 호수가 출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강우가 앞으로 몸을 날리며, 갑작스러운 날벼락을 피했다.

쿵!

떨어진 날벼락이 돌덩이 같은 묵직한 소리를 내뱉었다. 앞으로 몸을 날린 이강우가 곧바로 구르기를 한 번 하고, 몸을 돌려 자신이 본래 있던 위치를 바라봤다.

떨어진 액체들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용의 머리 형태를 갖추었다.

이윽고 그 용이 자신의 입을 열었다.

드래곤 피어!

멜트 드래곤은 단 한 번의 울음으로 눈앞에 등장한 사냥감을 전투 불능 사태에 빠뜨릴 속셈이었다.

크아아!

멜트 드래곤의 피어가 문산역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째쟁!

일단 유리로 된 모든 것이 깨졌다.

“으악!”

동시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들 역시 피어에 노출되는 순간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이들 중 과반수가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품고 있었다.

반면 이강우는 오히려 기뻐했다.

‘고맙다.’

틈이었다.

놈이 굳이 피어를 써준 덕분에 녀석은 잠시 동안 실체를 드러냈다. 심지어 입마저 벌렸다.

마치 넣어 달라는 듯이.

이강우가 손에 쥐고 있는 붉은 벼락을 달라는 듯이.

그럼?

쉬익!

‘먹어라.’

주면 된다.

이강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쥔 붉은 번개를, 그 작은 번개를 멜트 드래곤의 입에 넣었다.

파직!

녀석의 입에 들어간 붉은 뿌리는 깊숙하게 박혔다. 박히는 순간 뿌리를 내린 붉은 뿌리가 멜트 드래곤의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액체 상태였던 멜트 드래곤은 다른 몬스터들보다 훨씬 더 빨리 붉은 뿌리에 흡수됐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크오오!

기겁한 멜트 드래곤이 자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호수에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듯, 액체로 만들어진 웅덩이에서 멜트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는 이미 나와 있었고, 그다음 길쭉한 목이 나왔고, 팔이 나왔다.

팔까지 나왔을 때 멜트 드래곤의 머리가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멜트 드래곤이 머리를 휘두르듯 흔들었다.

콰콰콰!

녀석의 머리가 천장을 헤집었다.

그 소란 사이로 멜트 드래곤의 울음이 터졌다.

끄오오오!

절규나 다름없는 그 울음은 붉은 뿌리가 만들어내는 울음이었다. 붉은 뿌리는 멜트 드래곤의 입 안을 사정없이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고슴도치를 입에 머금고 있는 것보다 더 섬뜩하고, 더한 고통이 멜트 드래곤을 괴롭혔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는 자신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멜트 드래곤의 가슴을 바라보며, 몸을 날렸다.

이강우가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아이스웨폰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제아무리 이강우라고 해도 그가 아이스웨폰으로 만든 칼이 멜트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리 만무했으니까.

그렇기에 이강우는 오른손으로 만든 얼음칼을 왼손에 건네줬다.

그 후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멜트 드래곤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츠츠츠!

바츠무의 손!

그 무시무시한 손이 순식간에 멜트 드래곤의 비늘을, 매끈하기 그지없는 몸뚱이를 지독한 가뭄을 맞이한 논밭처럼 갈라지게 만들었다.

갈라지고, 푸석푸석해졌다.

이강우는 그렇게 푸석푸석해진 녀석의 몸뚱이에 왼손에 쥔 얼음칼을 꽂았다.

푹!

그 단단하고 견고하기 그지없는 멜트 드래곤의 비늘이 썩은 과일처럼 잘렸다.

순식간에 비늘과 살점이 잘려나가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절망의 태양이 그 안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멜트 드래곤의 절망이 시작됐다.

* * *

리란칭.

그는 섬뜩한 사내다.

이제는 죽고 사라진 서열 3위 볼코프와 서열 1위 라미 하마드가 동료 그리고 부하가 흘리는 피에 분노하는 자라면, 리란칭은 언제든 동료나 부하의 피를 보는데 망설임이 없는 자였다.

때문에 위스프 조직 내에서 그는 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는 했다.

이런 귀신을 떨게 만드는 유일한 자가 있다.

“마스터. 무슨 일로 이곳에…….”

해골이나 다름없는 외형을 한 괴물 같은 사내.

“놈들을 이곳으로 불러라.”

이바노프.

신비하고도 놀라운 힘을 가진 괴물 중의 괴물. 그리고 리란칭에게 놀라운 권능과 지식을 준 자.

그의 앞에서만큼은 귀신이라 불리는 냉혈한 리란칭은 뱀 앞의 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무슨…….’

하물며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가뜩이나 흑성단의 침입과 그에 따른 대처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바쁜 상황 속에서 이바노프를 보게 된 리란칭은 등골이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라면…….”

“칠성문 그리고 이강우. 놈들을 이곳, 도쿄로 불러라.”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리란칭의 오싹함은 사라졌다.

‘마스터께서 더 이상 분노를 삭이지 않으실 작정을 하셨구나!’

“그놈들을 마스터께서 직접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십년대계(十年大計).

세상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 준비한 십 년짜리 기나긴 대계가 이제 9년째에 접어들었다.

올해, 2023년이 지나고 2024년이 되면 인류는 새로운 시대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구부능선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정해진 길만을 오롯하게 걷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길을 찾고, 다른 행동을 하고, 계획 외의 무언가를 하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바노프가 가야 하는 길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렇다. 결국 놈들이 문제다. 칠성문과 이강우, 둘만 사라지면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하는 방해물은 없다.”

리란칭이 반문했다.

“마스터, 그것은 계획한 바와 전혀 다른…….”

그 반문, 말대답 앞에서 이바노프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의 피를 머금고 힘을 얻은 종자여,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것이더냐?”

이바노프의 그 말에 리란칭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리란칭은 간언을 뱉었다.

“마스터, 십 년의 대계입니다. 제 목숨으로 대계를 이룩하라 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대계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이 목숨을 바쳐서 그 요소를 제거할 것입니다.”

리란칭은 자신이 의심이 아닌 충심을 품었다는 걸 보여줬고, 그의 그 대답에 이바노프는 코웃음을 흘렸다.

짧은 웃음과 함께 그가 굳이 설명을 해줬다.

“강희, 놈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즈믄나래는 이미 우리를 향하는 비수가 되었다.”

강희.

중책을 맡았던 그는 모든 권력을 빼앗긴 채 강제로 수감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원한다면, 그는 언제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강제로 탈출을 한 그에게 찾아오는 건 세상으로부터의 수배 그리고 칠성문을 비롯한 무리들의 단합과 그들이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것, 그뿐이다. 그는 대계를 위해서 차라리 그냥 계속 이대로 무용지물인 상태로 남는 게 나았다.

“마르쿠스는 결국 문제를 야기했다. 놈의 부주의함과 무능력함이 결국 이곳을 놈들에게 들키게 했다.”

마르쿠스.

마법이란 분야에 있어서 세계 제일의 권력자 중 한 명이다. 그 위치만큼, 그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는 결국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모래시계문을 이용한 마법사 납치 작전에서 결국 그가 틈을 만들었다. 그 틈을 칠성문이 파고들었다. 행동은 위스프가 했지만, 사하라 사막에서의 작전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가진 건 마르쿠스였다.

만약 그가 제 역할을 했다면, 꼬리가 밟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혹여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는 이후 확실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수작을 부렸어야 했다.

그러나 수작을 부린 건, 결국 위스프였다. 이바노프의 수족인 위스프가 움직여서 시간을 끌고 있다. 마르쿠스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뿐.

이 상황 속에서 이바노프는 깨달았다.

“내가 옳다. 놈들은 대적자의 존재에 눈이 멀어, 악몽 앞에 겁에 질려 정당하고 합당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다시 모든 걸 바로 잡을 것이다.”

자신만이 옳았다는 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정답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만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행동하고자 했다.

“대적자를 죽인다.”

방해물은 두 가지다.

칠성문. 그들은 블랙 스택, 더 나아가 바츠무가 이룩한 세력에 대항할 세력이다.

이강우. 그는 바츠무를 대항할 대적자를 품은 그릇이다. 어떤 의미에서 칠성문 그리고 중국이란 집단보다 더 위험한 적이다.

대계를 위해선 둘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

개중에서 우선순위를 꼽자면, 이강우다. 이바노프는 이강우를 직접 죽이고자 했다.

“대적자를 키울 필요는 없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이 이상 대적자가 커지면 그조차도 힘들어질 터. 그러니 지금 놈을 죽인다. 놈을 이곳으로 불러라.”

이바노프의 말에 리란칭은 이를 꽉 물었다.

“그러하다면 마스터가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포식자를 처치하겠습니다.”

이강우를 처치하기 위해 이바노프가 나선다면, 그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바노프가 표면에 등장하는 건, 너무나도 큰 변수를 야기한다. 차라리 그냥 이미 얼굴도 팔리고, 이름도 팔린 리란칭이 이강우를 처치하는 게 낫다. 리란칭이 이강우를 죽이면, 세상은 기겁하겠지만 그 이유에 의문을 품진 않을 테니까.

“볼코프도 잡지 못한 대적자다. 또한 녀석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저는 볼코프보다 강합니다.”

리란칭의 단호한 대답.

틀린 말은 아니다. 서열을 나눈 건, 단순히 구분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실력이 구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거듭된 리란칭의 충심 앞에서 이바노프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볼코프 때와 같은 실패를 다시는 곱씹을 생각이 없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확실하게 놈을 끝장내겠다.”

확고한 그 말에 리란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이바노프가 마음을 돌리는 일은 없다.

‘마스터는 뜻을 굳히셨다.’

그렇다면?

“예, 마스터의 뜻대로.”

이제는 이바노프가 원하는 바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이룩해주면 될 뿐이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였으니까.

“포식자 이강우,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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