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제물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를 보이던 폭풍 우라칸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라칸이 사그라졌다. 이제까지 몰아치던 폭풍이 마치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폭풍 우라칸의 흔적은 사막의 모래 위에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폭풍이 잦아들자, 고요함 그리고 적막함이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모래 괴수와 사투를 벌이던 마법사들은 모래군주의 죽음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모래 괴수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히 승리에 대한 환호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를 위해 말처럼 열심히 달리던 얼음 전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돌원숭이 갑옷을 입고도 힘차게 날리던 얼음 전사가 힘없이 무릎을 꿇는 모습은 퍽 애틋했다. 이강우는 그런 얼음 전사의 어깨 위에서 내려왔다. 이강우가 내려오자, 얼음 전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돌원숭이 갑옷 사이로 흘러나온 물이 황금빛 모래 위를 검게 적시기 시작했다. 이강우의 마력이 바닥이 났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수고했다.’
무생물.
이강우에게 마력이 있다면 수백, 수천…… 영원토록 존재할 수 있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존재.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마법의 전사 앞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이강우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이윽고 이강우가 돌원숭이 갑옷을 의자 삼아 앉았다. 이강우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힘들어 죽겠다.’
버닝 마나로 증폭한 마력 전부를 소모했다. 당분간 마법을 쓸 수 없는 몸뚱이가 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이강우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강우의 긴장감도 녹아내렸다.
긴장감을 녹아내리게 하는 건 다름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래도 이제 잡았으니까.’
다른 이들은 지금도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정말 모래군주를 잡은 걸까?
그러나 마지막 일격을 날린 이강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강우가 붉은 뿌리와 섬광을 조합해 만든 붉은 번개는 모래군주의 핵을 완벽하게 꿰뚫었다. 녀석의 존재를 관통했다.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에, 이강우는 무기력함을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강우가 가장 먼저 승리를 확신했고,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자 나머지 이들도 승리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겼다!”
곳곳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세레모니가 시작됐다.
동시에 다급한 목소리도 울렸다.
“의법사! 의법사가 필요해!”
“빨리 부상자부터 치료해!”
환호와 다급함, 그것들이 폭풍 우라칸이 꺼지고 생긴 적막감을 뭉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이 모든 광경을 무인 감시기와 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작전 지휘실의 관계자들 역시 승리를 확신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겼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전쟁 종료, 모래군주 사냥 완료, 같은 확신에 가득한 말은 뱉지 않았다.
아직 확신은 금물이다. 다시 한번 전면적인 조사가 시작될 것이다. 정말 모래군주가 사망한 것인지, 놈이 혹시 정체를 감추고 도망친 게 아닌지, 정말로 놈이 죽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전장이 되었던 모래사장, 여의도 서너 개를 합친 크기의 전장을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듯 조사하고, 확실한 결과가 나온 후에야 공식적으로 모래군주 사냥에 성공했다는 발표와 보고서가 작성될 것이다.
나중에 가서 알고 보니 잡은 게 아니더라, 모래군주가 용케 살아 있더라, 우린 죽은 줄 알았지…… 하는 식의 변명을 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그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작성된 보고서에 사인을 할 높으신 양반들이 고민할 문제고, 그게 아닌 이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의외로 싱겁게 끝났네.”
“그렇지? 못해도 두세 달 후에야 결과가 나올 것 같았는데.”
한편으로는 이 모든 과정을 싱겁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항공모함 3대에 각국을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마법사들을 한곳에 모으고, 최장 반년 이상으로 잡은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적은 피해로 끝났으니까.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이번 전투는 절대 싱겁게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 작전이 펼쳐지기 전까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7서클 마법이 무려 4개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4개의 7서클 마법이 동시에 사용됐다. 심지어 7서클 마법을 7서클 마법사들이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마치 시계 속 부품들이 맞물리는 것처럼,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싱거운 일이 아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이었다.
‘운이 좋았어.’
멕스코 대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어.’
생각보다 상황이 긴박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일반 회사원들에게 일이 빨리 진행되는 건 나름 호재라고 할 수 있지만, 전쟁에서 예상보다 빨리 일이 진행되는 건 반갑지 않은 변수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안 좋은 결과가 나오고는 한다.
그렇기에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운이 따른 거다. 이 긴급한 상황, 무언가 제대로 된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사하라 사막이란 혹독한 땅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속전속결 전쟁을 치른 것치고는 결과가 깔끔했으니까.
‘사망자는 서른 명 정도인가?’
어쨌거나 결과물은 완벽했다.
일단 사망자가 적었다. 이번 일은 그 무엇보다 사망자를 줄이는 게 핵심이었다. 보통 마법사도 아니고, 각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마법사 한 명의 죽음이 아니었다.
‘모래시계문을 대피소로 쓴다…… 훌륭한 작전이었어. 유엔 마법부가 용케 이런 생각을 해냈군.’
여러모로 모래시계문을 대피소로 쓴 게 제대로 먹혔다. 그게 아니었다면, 사망자는 지금 숫자보다 곱절 이상……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과감한 작전을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멕스코 대령은 모래시계문을 대피소로 쓸 계획을 만들어낸 유엔 마법부의 간부들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아니, 이미 마음속으로는 격렬하게 박수를 치는 중이었다.
치는 중이었는데…….
“멕스코 대령님.”
문제가 생겼다.
“무슨 일이지?”
“그게…….”
멕스코 대령이 말끝을 흐리는 부하의 표정을 바라봤다.
부하의 표정이 꽤 심각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찬물을 끼얹을 만한 소식을 당장 토로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는 의미다.
멕스코 대령이 표정을 바꾸었다.
“말하게.”
“……대피용으로 사용된 모래시계문을 회수했는데, 회수된 숫자가 적습니다.”
“뭐?”
멕스코 대령이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말인가?”
“모래시계문 회수율이…….”
“얼마나 부족한 건가?”
“회수율이 채 30퍼센트도…….”
멕스코 대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상황이 정리되자, 곧바로 차량을 비롯해 헬기 등이 물자를 실은 채 도착했다. 도착한 헬기나 차량은 곧바로 근처에 마련된 기지로 사람들을 옮겼다. 당연히 부상자들이 가장 먼저 이송됐다.
여러모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김재범이 이강우를 찾고는 손을 흔들었다.
“대장, 잘 끝났습니까?”
이강우는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엄지부터 들었다. 그 엄지를 본 김재범이 주먹을 쥐고 가볍게 어퍼컷을 날렸다.
나이스!
그런 의미의 제스처였다.
이강우가 그런 김재범을 보고 질문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결전지로 이동했는데, 대체 누가 내린 결정입니까?”
“당연히 제가 내렸지요. 하선우나, 형수님이 설마 이런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왜 그런 겁니까?”
“늦어서 욕먹는 것보다는 빨라서 욕먹는 게 왠지 나을 것 같았습니다.”
이강우는 그 말에 실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김재범이니까 내릴 수 있는 결단이다. 하선우나, 채유리는 이강우가 계획을 세우면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하지, 딱히 그 계획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어쨌거나 김재범이 큰일을 했다. 김재범이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 기존 계획대로 붉은 뿌리를 키우기 위한 몬스터 사냥에 열중했다면, 합류가 늦었다면, 이강우는 그저 섬광 마법만으로 일격을 날렸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다. 버닝 마나로 증폭된 마력을 머금은 7서클 마법은 사실상 8서클 마법의 위력에 근접했다. 여기에 섬광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위력적이다.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적이 보통 적이 아니었다.
3등급 몬스터!
세상에 종말을 가져와도 이상할 게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실제로 녀석의 본체도 아니고, 그저 껍질을 벗기는 데에만 7서클 마법이 두 차례 사용됐다. 챠이 수가 사용한 유성우 마법도 10발 중 8발이 적중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버텼다.
“그보다 대장이 만든 그 녀석 대체 정체가 뭡니까?”
한편 김재범은 이강우가 만든 얼음 전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처음에 이강우가 갑자기 돌원숭이 갑옷을 뒤집어쓴 얼음 전사와 함께 몬스터를 사냥해서, 얼음 전사가 들고 있는 검을 키우라고 했을 때, 김재범은 이강우가 잠시 약에 취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얼음 전사의 전투 능력을 보는 순간 의심은 의구심이 되었다.
“히든카드입니다.”
“히든카드요? 제가 보기엔 그냥 에이스 카드던데?”
김재범이 다시 한번 얼음 전사의 전투 장면을 떠올렸다.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놀라운 운동 능력을 보여주며, 몬스터의 몸에 올라타 몬스터를 처치하는 솜씨는 엄청났다.
물론 이강우도 비슷한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강우가 몬스터를 해체하는 느낌이라면, 얼음 전사는 몬스터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죽이려는 느낌이었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전투 방법이었다. 마치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전사가 수십 년 동안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경험을 쌓은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싸웠나 보군.’
김재범의 반응에 이강우도 나름 놀랐다.
3등급 유적에서 실험을 했다. 과연 불과 얼음의 군단이 이강우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강우의 부재 속에서 얼마나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일단 이강우와 거리가 1킬로미터 이상 벌어지면, 불과 얼음의 군단의 마력 공급은 멈춘다. 그때부터는 이미 주입된 마력만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 한 번 마력을 공급했을 경우의 전투 지속 가능 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물론 만약 불과 얼음의 군단이 육체 복구를 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경우 이 지속 시간은 큰 폭으로 줄어들지만, 어쨌거나 이 시간 동안은 이강우가 지구 반대편에서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와 상관없이 전투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진정한 의미의 전사들이었다.
‘이거 갑자기 고민이 늘어났네.’
이렇게 되자, 이강우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불사황제의 권능을 각성시켜주는 블러드북 한 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 블러드북을 이용해서 본래는 절망의 태양과 붉은 뿌리 중 하나를 각성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까 불과 얼음의 군단도 효용성이 무궁무진하다. 만약 이들이 각성을 한다면?
‘쩝.’
이강우가 우라칸의 흔적이 남은 사막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 여기서 저 사막을 뒤져서 모래군주의 부서진 핵을 찾아봤자 내가 먹을 순 없겠지.’
만약 모래군주의 핵을 오롯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면 두 번째 블러드북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했다. 모래군주의 핵은 이강우의 붉은 번개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 파편들이 저기 모래사장 위에 너부러져 있겠지만, 그뿐이다. 그냥 그림 속의 떡이다.
이 고생을 하고, 대가는 받지 못하게 됐다.
‘결국 삽질했군.’
물론 그렇다고 이강우가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일단 이강우는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됐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후 모래군주의 핵을 수거하면, 그중 일부분이 이강우의 몫으로 떨어질 것이다. 당장 아쉬워하기에는 이르다.
동시에 오늘 전투를 기점으로 인류는 3등급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됐다.
한 번이 힘들지, 두 번은 쉽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그 사실을 수도 없이 증명했다. 오늘 전투를 기점으로 이제 3등급 몬스터는 공략 가능한 대상이 됐다.
‘위대한 삽질.’
인류는 이제 3등급 몬스터와 맞서 싸울 힘을, 가능성을, 용기를 가지게 됐다.
이강우가 가장 바라던 것이다.
오늘의 이 결과는 앞으로 시작될 바츠무와의 전쟁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도움을 줄 테니까.
그게 가장 큰 소득이다.
이제 이강우는 홀로 바츠무와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에게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이강우는 일단 그 사실에 만족했다.
“김재범 씨 수고했습니다.”
이강우의 말에 김재범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이강우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되는 모양이다.
그런 김재범에게 이강우가 선물을 줬다.
“그런데 혹시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약속 있으십니까?”
“아, 좀 많습니다. 제가 바쁜 몸이라서.”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김재범 씨를 데리고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려고 했는데…….”
“식사요?”
“제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끝내줍니다.”
“어휴, 그런 자리라면 가야지요.”
“약속이 있으시다니, 그냥 나중에 좋은 식사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예? 아뇨, 약속이…… 젠장, 대장! 눈치 깠죠?”
김재범의 되물음에 이강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유쾌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아주 잠시 동안만 허락된 유쾌함이었다.
* * *
사하라 사막은 넓다.
그 넓은 공간에 흩뿌려진 모래시계문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건 고작 몇 명의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하나의 팀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모래시계문 회수를 위해서 유엔은 세 개의 팀을 구성했다.
발견팀과 회수팀 그리고 보관팀.
팀이 많은 만큼 마법사들이 모래시계문으로 대피한 이후 그 문이 회수되어 보관소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모래군주의 등장으로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을 모래군주에 집중했다. 위성을 비롯한 동원 가능한 모든 무인감시기가 모래군주 사냥에 동원됐다.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이유.
마법사들의 대피 장소로 사용된 모래시계문 중 상당 숫자가 사라진 이유.
‘고작 이런 이유를 변명이랍시고 지껄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하고 일차적으로 보고를 마친 멕스코 대령은 상관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의 상관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멍청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괜한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보고를 받는 순간 알았다, 그런 짧은 말만을 뱉었다.
‘이미 한 명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번 사건은 그 정도로 심각했다.
누구 한 명이 책임진다고 해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책임 소재를 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누가?’
마법사들이 대피소로 이용한 모래시계문을 대체 왜, 누가 도중에 가로챘을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필시 관계자가 매수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달아놓은 위치추적장치까지 무용지물이 됐을 리 없다.
‘왜?’
그뿐만이 아니다. 회수 자체가 되지 않은 모래시계문도 있다. 그렇다는 건 그 의문의 집단이 직접 사막에서 모래시계문을 회수해갔다는 건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몬스터 소굴이나 다름없는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시계문을 빼돌린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형마트에서 물건 몇 개 훔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굉장한 능력과 배경 그리고 아주 섬뜩한 목적을 가진 세력이 개입됐을 것이다.
“후우.”
멕스코 대령이 우려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분명한 건 이번 전쟁에서 얻은 소득은 이제 사라졌군.’
이 사건은 공개될 수밖에 없고, 이 사건이 공개되는 순간 모래군주를 잡아 얻은 모든 가치가 사라질 테니까.
* * *
적지 않은 집단이 문제가 생길 경우, 그 문제를 숨기려고 하다가 일을 더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유엔은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유엔은 모래군주 사냥 작전 과정에서 마법사들이 대피소로 사용한 모래시계문의 실종 사건을 세상에 공개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숨길 수 있다고 숨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실종된 마법사는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저마다 자국을 대표하는 수준의 마법사였다.
그들의 부재를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비밀로 하다가 나중에 들켰을 경우의 파급 효과는 보통의 유적 사냥꾼들이 유적 사냥에 나섰다가 실종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소식은 모래군주 사냥 소식과 뒤섞이며,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실종인가, 납치인가?
-명백한 의도를 가진 납치, 그렇다면 납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몸값을 노린 납치? 그렇다면 과연 납치된 마법사들의 몸값은 얼마가 될까?
더불어 이 사건은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각색되기에 너무나도 좋은 사건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번 일이 초자연적인 현상일 리는 없었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인 결과물이었고,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필시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모래시계문과 함께 사라진 291명의 마법사를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고, 그 모든 과정은 이번 모래군주 사냥 작전에 참여한 모든 국가에 실시간으로 공개됐다.
안중현 역시 이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을 수 있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실종자 명단에 포식자 팀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불어 실종자 명단에 한국 국적을 가진 마법사나 총꾼은 없었다. 한국 정부 그리고 마법청 입장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안중현은 예의주시만 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굳이 그가 나설 만한 사항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그로부터 전화가 오고, 그가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권 박사님.”
권재용 박사.
그가 안중현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건 굉장히 특별한 일이었다. 권재용 박사는 세종 유적 연구소에 부임한 이후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 그 외출도 정말 국가적 사업, 연구와 관련된 경우에만 움직일 뿐, 본인이 사적인 이유로 세종시를 벗어나는 경우는 최근 사이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적인 이유로 안중현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안중현의 물음에 권재용 박사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안중현이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움직였다. 권재용 박사는 안중현이 머무는 즈믄나래 내의 사무실을 의심하는 듯했다. 무언가 도청장치나, 감시장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
실제로 이곳에는 감시장치가 있었다. 안중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감시장치를 설치해두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권재용 박사의 심중을 이해한 안중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지 말고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권재용 박사가 안중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고맙네. 안 그래도 급하게 올라오느라 휴게소에 들러서 뭘 먹지도 못했는데.”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괜찮은 곳으로 자네가 알아서 안내해주게.”
“이강우가 극찬한 곰탕집이 있습니다.”
“나쁘지 않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
여전히 사람으로 득실거리는 소음 가득한 곰탕집에 들어오는 순간, 주문을 받으러 온 가게 종업원에게 안중현은 곰탕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자 곧바로 권재용 박사가 추가 주문을 했다.
“혹시 캔콜라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는 병음료만 취급합니다.”
“아, 그럼 됐습니다.”
갑자기 캔콜라를 주문하는 권재용 박사를 보며 안중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권재용 박사가 콜라를 좋아했던가? 하지만 콜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굳이 캔콜라를 요구할 리는 없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주문일 터. 안중현이 질문을 던졌다.
“캔콜라가 필요하시면 제가 근처 가게에서…….”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그 순간.
‘아.’
안중현은 눈치챘다. 왜 여기서 캔콜라가 나오는지, 병이 아니고 캔이 언급되는지.
‘알아냈구나.’
이강우가 위스프의 조직원을 해치우고 몰래 빼돌린 그것, 의문의 캔의 정체!
그걸 파악한 것이다.
안중현의 예상대로 권재용 박사가 하려는 말은 그 캔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결과가 나왔네. 사실 결과 자체는 지금보다 꽤 오래전에…… 미안하지만, 한 달도 더 전에 나왔네. 그동안 그걸 자네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다 사정이 있는 법 아닙니까?”
그 부분은 아무래도 좋다. 안중현은 그런 일을 가지고 심기가 뒤틀리는 부류가 아니다.
“고맙군.”
“아닙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안에 담긴 건 다름 아니라 마력이었네.”
“마력?”
“마나스톤을 정제하면 액상의 마력을 확보할 수 있지. 그런데 특이한 건, 그 안에 있는 건 마나스톤을 정제해 얻은 마력이 아니었네.”
현재 눈에 보이는 정제된 마력을 얻기 위해서는 마나스톤을 재료로 써야 한다. 그래서 마나스톤이 그렇게 비싸게 거래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나스톤을 재료로 쓰지 않고 정제된 마력을 얻는다? 안중현의 지식으로는 마나스톤 외에 마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마법사?”
권재용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안중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안중현은 자신도 놀랄 만큼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던 퍼즐 조각을 순식간에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퍼즐 조각은…….
‘맙소사.’
놀라울 정도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설마?’
너무 소름 끼치고 기겁할 만한 사실이라서, 안중현은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완성된 퍼즐 조각을 천천히 검토했다. 자신이 이상한 걸 만든 건 아닌지, 망상을 펼치는 건 아닌지 살펴봤다. 동시에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정확한 겁니까? 정말로…….”
“연구를 할 만한 사료가 많지 않아 확답을 내릴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말에 내 이름 정도는 걸 수 있네.”
안중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다시 한번 머릿속 퍼즐을 바라봤다.
‘위스프가 마법사가 가진 마력을 정제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마법사의 마력을 마나스톤처럼 정제하는 기술!
대혁명이다.
이 기술만 있다면, 마법사를 이용해서 어마어마한 수준의 마력을 생산할 수 있다. 산업혁명 수준의 기술이다. 괜히 어렵게 마나스톤을 구하기 위해 몬스터를 사냥할 필요도 없다. 그냥 마법사로부터 헌혈을 하듯 마력을 뽑아내면 된다.
문제는 최근 사건이다.
“역시 권 박사님도…….”
“적어도 몸값을 노린 납치는 아니겠지. 정말 몸값이 목적이었다면, 나 같으면 그 노력과 수고로 대부호를 납치하겠네.”
사막에서 마법사들이 대규모로 실종됐다. 실종자 숫자가 무려 291명이다.
그리고 실종된 마법사들은 최소 4서클 이상의 마나 서클을 개방한 마법사들이었다. 5서클 마법사도 100명 가까이 된다. 요즘 아무리 마법사의 숫자가 늘어나서 마법사의 몸값이 떨어졌다고 해도 4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가지는 가치는 엄청나다. 5서클 마법사는 두말할 것도 없다. 자국을 대표할 만한 실력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국가 단위의 유적 사냥 프로젝트는 5서클 마법사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소름 끼치는 결과물이 나온다.
‘위스프가 마법사들로부터 마력을 뽑아내기 위해 그들을 모래시계문과 함께 납치했다.’
이번 일의 원흉이 위스프라는 결과가.
심지어 흡혈귀도 아니고 살아 있는 마법사로부터 강제로 마력을 뽑아내기 위한 납치라니?
하지만 안중현이 소름 끼치는 건 그 이상이었다.
‘위스프의 배후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하다. 위스프는 그냥 단순히 자기주장을 위한 테러집단이 아니다.
‘그놈들이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그들의 배후에는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결국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이야기란 의미다.
“좀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정제된 마력의 사용방법일세.”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통 마나스톤을 통해 마력을 정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네. 하나는 마법 무기에 쓰일 연료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최근 트렌드인 마력 회복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녀석들은 그냥 순수하게 정제된 마력만을 캔에 가지고 다녔네. 그 자체만으로는 쓸 곳이 없네. 그런 건 마법사가 먹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지. 굳이 말하면 알프스에서 채취한 공기를 돈 주고 사서 마시는 수준이랄까?”
“그럼 대체 왜……?”
“저번에도 한 번 말했지만, 전후 사정을 봤을 때 문의 개방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여기서 안중현은 판단을 마쳤다.
이미 답은 나왔다.
‘보다 높은 등급의 모래시계문을 개방하기 위해서…….’
안중현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문한 곰탕이 나왔지만, 식사할 시간 같은 건 그에게 없었다.
종말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으니까.
* * *
널찍한 공간이었다. 넓이는 축구장 정도 됐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5미터 정도였다. 공간 안은 대부분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군데군데 설치된 조명에서 내리쬐는 빛이 이 공간의 크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동시에 그 빛은 이 넓은 공간 안을 가득 채운 연기의 존재 역시 비춰주고 있었다.
푸슈슈, 푸슈슈!
곳곳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그 바람 소리와 함께 뿜어진 연기는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들 사이를 헤집으며 다니고 있었다. 연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의 정체는 문이었다.
가지각색, 크기도 다르고 재질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오직 문 위에 달린 모래시계만이 유일한 공통점인 모래시계문들은 마치 도미노 블록처럼 널찍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덜컥!
문 하나가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으니, 그 문을 여는 건 문 너머가 분명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뭐여?”
사람 한 명이 문 너머 미지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등장하자마자 컴컴한 주변 풍경에 놀랐다. 놀라면서 동시에 자욱한 연기를 들이마셨다.
컥컥!
곧바로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부들부들,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경련만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사람들이 사내 뒤를 따라 등장했고, 사내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다섯 명이 뭉개진 햄버거처럼 뒤엉킨 채 쓰러져 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초 후.
철컥!
맨 구석 쪽에 문이 열리며, 우주복을 떠올리게 만드는 방호복을 입은 이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하는 이들의 목에 가지고 온 주사기의 바늘을 꽂고, 무언가를 주입했다. 경련하던 이들의 몸이 멈췄고, 그 후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쓰러진 이들을 한 명씩 데리고 공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 * *
이강우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모래군주 사냥을 마치고 한국에 보다 빨리 복귀하기 위해 협조를 요청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사전에 이강우는 통보를 했었다. 모래군주 사냥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카이로 국제공항에 데려다 달라고. 이미 비행기 표 예약도 끝난 상황이었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이동한 후 곧바로 한국 인천공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 관계자 쪽은 문제없다고 대답을 해준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번복한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죄송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밝힐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유를 말해 주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 누구도 아니고 모래군주 사냥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강우에게도 통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보통 문제일 리 없다.
이후 이강우는 카이로에 위치한 호텔에서 감금 상태나 다름없이 지냈다. 포식자 팀 전부가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물고 있을 때 유엔의 발표를 들었다.
발표를 듣는 순간 이강우는 확신했다.
‘바츠무.’
사하라 사막에서 모래군주와의 전투를 위해 그야말로 세계 연합군이 활동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피소로 쓰는 모래시계문을 탈취하고, 도중에 빼돌린다?
이건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짓을 해서 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은 거의 하나밖에 없다.
바츠무족.
인류의 종말을 꿈꾸는 그들이 이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직접 나선 건 아니다.
‘위스프를 움직인 건가?’
아마도 그들의 사주를 받는 집단이 움직였을 것이다. 위스프 혹은 위스프 외의 집단. 뭐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니까. 중요한 건 이번 일이 미칠 영향이었다.
이제까지 위스프가 테러를 자행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탈취된 모래시계문에 있는 마법사는 각국을 대표하는 실력자들이다. 더 나아가 각국을 대표해서 세계를 구하는 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가한 영웅이기도 하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납치된 건, 유적 사냥을 하다가 사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전 세계가 범인을 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이제까지 은밀하게 수작을 부리던 바츠무가 처음으로 대범한 수작을 부린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제 클라이맥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3등급 몬스터가 등장했으니, 그다음은 2등급.’
2등급 몬스터.
이강우가 놈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승산은 가늠하기 힘들다. 확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이강우가 실패하면, 이강우를 대신해 놈을 잡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건 단언할 수 있다.
‘등장하기 전에 막아야 해.’
그렇기에 2등급 모래시계문이 개방된 후의 전투는 정말 최후의 선택이다. 최선은 그 전에 모래시계문을 우주로 보내든, 마리아나 해구에 처박든 해야 한다.
필시 문은 전 세계 어딘 가에 있을 것이다. 세계지도를 놓고 보물찾기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득한 작업이다.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작업.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면, 그게 더 정신 나간 짓이다.
그런 이강우에게 안중현, 그가 최악의 소식을 전해줬다.
* * *
2022년 대한민국 대선은 여당 대표의 승리였다. 선거는 접전이었지만, 그동안 여당과 현 정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덕분인지, 여당이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 승리는 곧 이부성 마법청장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부성 마법청장은 현 정권의 임기 동안 다시 한번 마법청장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여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이부성 마법청장의 활약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충분히 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안대욱 부청장을, 그의 부상을 명분 삼아 현장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부성 마법청장은 이번 기회에 마법청의 실권 전부를 틀어쥘 생각이었다. 실세 중의 실세가 되어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부성의 심정은 조만간 날아오를 대붕(大鵬)의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사내를 앞에 두고 있는 이부성은 나름 담담한 기색을 보였지만,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이부성의 속을 바짝 태우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조금 전에 귀국했다고 들었는데…… 피곤하지 않나?”
“피곤합니다.”
이강우였다.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이강우는 곧바로 마법청에 전화를 걸었다. 이부성 마법청장을 만나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파리를 떠난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고, 마법청으로 곧장 왔으니 대략 2시간 전에 전화를 건 셈.
보통은 이부성 마법청장 같은 사람이 그런 약속에 응할 리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피곤하면 쉬었다, 차후 약속을 잡지, 무엇하러…….”
“내 사정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마법청장님을 인천공항까지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하하, 내 생각을 해줘서 고맙네.”
“곧바로 즈믄나래 본부로 가야 하니까 겸사겸사 온 겁니다.”
퉁명스러운 이강우의 반응. 누가 보면 이부성 마법청장을 상대로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부성 마법청장은 그런 이강우 앞에서 싫은 기색을 조금도 드러낼 수 없었다.
‘이 녀석…….’
이번 모래군주 사냥을 앞두고 마법청과 한국정부는 이강우를 매우 능력이 출중한 6서클 마법사로 판단했다.
하지만 모래군주 사냥이 끝났을 때, 이강우는 세계를 대표하는 마법사 중 한 명이 되어있었고, 모래군주란 무시무시한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 되어있었다. 이제 한국 정부와 마법청이 다룰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이제 이강우가 오롯한 갑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이강우의 비위를 맞추는 모든 작업을 이부성 마법청장에게 위임했다. 이부성이 가진 마법청장이란 꼬리표가 이강우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올가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그쪽 신경을 써줄 여유는 없어.’
이강우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자기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이부성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지금 이강우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앞서 말했듯이 급하니까,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경청하겠네.”
“전대 길드 마스터 강희, 구금을 해주십시오.”
“음?”
이부성은 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당장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주겠나?”
“전대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강희, 그를 한국 정부가 감옥이든, 아니면 밀실이든 어디든 좋으니 그가 도망칠 수 없도록 구금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방법은 그쪽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이 순간 이부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보통 사람이 그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분노는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부성은 분노조차 표출할 수 없었고, 그게 이부성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반면 이강우는 진지했다.
‘안중현의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이야기는 매우 심각해.’
안중현, 그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말해줬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위스프를 이용해 마법사들을 납치한 후, 납치한 마법사들로부터 마력을 추출해 모래시계문의 개방 속도를 앞당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납치한 마법사들을 모래시계문을 열기 위한 제물로 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강우도 더 이상 모르는 척, 연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강희를 잡는다.’
이제까지 괜한 의심을, 상대방을 자극해서 위기에 몰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강희의 존재를 그대로 놔두었다. 또한 그가 길드 마스터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가 혹여 의심이나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칠 경우를 염두에 두고 그를 자극할 만한 일은 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강희는 바츠무와 깊은 관계를 맺은 존재였고, 지금 상황은 이미 절정에 다다랐다.
차후 문제가 생기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강희의 신병을 확보한 뒤.
“이건 제안이나, 거래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강희의 신병을 확보해 주십시오. 그가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그를 통해 바츠무의 정체, 더 나아가 놈들의 의도와 놈들이 세상에 숨겨준 모래시계문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네가 지금…….”
“마법청장님. 안대욱 부청장이 현장에 복귀해서 마법청장으로 승진하는 꼴을 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대로 마법청장에 남아 커리어를 쌓고, 차후 정치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싶으십니까?”
이 대목에서 이부성 마법청장은 표정을 바꿨다.
“이강우, 난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야. 고작 자리에 연연해서, 굴욕을 감수할 인간이 아니라고.”
이강우가 작정하고 나오는데 정치계에서 닳고 닳은 이부성이 약한 모습을 보일 리 없다.
“그런데 지금 날 상대로 협박을 해? 네가 지금 사막에서 무언가를 했다고 대단한 게 된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지금 국가를 상대로 협박을 하겠다는 건가?”
허세라도 좋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이부성의 정치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었고, 그런 이부성의 반응에 이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형님 예상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나오는군.’
안중현, 그의 예상 그대로 나오는 이부성의 모습 때문에 나오는 실소였다.
그런 이부성에게 이강우는 짤막하게 말했다.
“국가 상대로 협박을 한다면 고작 정부 산하 기관인 마법청의 수장이 아니라 대통령을 찾아갔겠지요. 뭐,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마법청장님 말대로 국가 상대로 협박을 해보겠습니다.”
빠득!
이부성의 이가는 소리가 대답 대신 터졌다.
그것이 이부성이 내지른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