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노아 프로젝트
포식자 팀이 귀국을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열 명 전부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고,
심지어 그들 외에는 퍼스트 클래스 탑승자가 없었다. 그들만을 위해 비행기 값을 지불한 칠성문이 퍼스트 클래스 모든 좌석을 구매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마치 비행기를 전세 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호사 속에서 잠드는 이는 없었다. 이미 한 달이 넘는 온천에서의 휴가 덕분에 육체적 정신적 피곤함 같은 건 없었다. 때문에 모두가 잠들지 않은 채 저마다의 할 일을 했다.
김재범은 태블릿PC를 이용해 자기 연구 과제를 정리했고, 하선우 역시 태블릿 PC를 이용해 패션 잡지 등을 진지하게 보고 있었고, 김수애 역시 태블릿 PC를 이용해 와인 잡지를 보고 있었고, 채유리는 요리를 만드는 관련 프로그램 동영상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 외에 나머지 총꾼들도 저마다 태블릿PC를 이용해 드라마를 보거나, 기사를 보거나, 개인적인 취미 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이강우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잠든 것 같았고, 때문에 그 누구도 이강우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은 방해를 하지 않았다.
‘크로포드가 의식불명이라니.’
그러나 이강우는 잠들지 않았다. 잠들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칠성문과의 이야기는 끝났다.
칠성문은 아직 7서클 마법 아티팩트 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강우가 확보한 7서클 마법 아티팩트는 이강우 본인이 사용하라고 했다.
좋은 소식이다. 파격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순순히 7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크로포드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 앞에서 이 희소식은 더 이상 이강우의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든 의문은 당연히 왜? 였다.
무슨 이유로 크로포드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까? 크로포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혹시 그냥 의식불명을 핑계로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닐까? 그런 종류의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짧았다.
오히려 의문보다는 의심이 더더욱 이강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의심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사안의 중대함 때문이었다.
‘크로포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국가 기밀이다.’
크로포드의 부재로 생길 파급 효과는 적지 않다.
이미 마법은 국가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주요한 요소가 됐다. 그런 시대 속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마법사인 크로포드의 공백은, 미국이 잠시 동안 항공모함 같은 걸 쓰지 못하게 됐다는 것과 비슷하다. 좀 더 과장하면 핵무기 사용을 못하게 된 격이다.
미국 정부 그리고 블랙 스택이 바보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도록 허락할 리가 없다.
그런데 이강우는 그 소식을 블랙 스택 같은 집단이 아니라, 류복희로부터 들었다. 칠성문 소속 류복희가 소식을 전달해 줬다.
쉽지 않은 일이다. 류복희의 정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건 류복희가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기에.
결정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건…….
‘왜 류복희는 그 사실을 내게 전달해준 거지?’
이렇게 중대한 사안이 류복희를 통해 이강우에게 전달됐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분명 이강우와 리볼버 사이에는 확실한 선이 있긴 하다. 리볼버의 제자 아닌가? 그래도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 없다. 류복희는 냉철한 사내다. 그저 감정에 취해서…… 이강우가 리볼버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중대한 사안을 곧장 떠벌릴 만한 사내가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뭔가 있어?’
지금 상황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의미.
“후우!”
이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큰 게 하나 터질 것 같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만간 대형사건들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길한 느낌이었고, 때문에 이강우는 이제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리볼버의 부재가 대형사건이지.’
자신의 불길한 생각은 높은 확률로 현실이 되었으니까.
* * *
유엔은 때때로 유명무실한 집단으로 전락할 때가 있지만, 마법부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마법부가 작심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 중심에는 마법부의 수장, 마르쿠스가 있었다.
블랙 스택의 창립자 중 한 명이며, 미국 마법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마법부의 수장인 그가 작심하고 움직이는 상황에서, 감히 그를 상대로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있는 자는 없었으니까.
칠성문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다.
칠성문의 일곱 별들, 그들과의 장거리 마라톤 회의을 마친 주성륜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를 수행하는 수행비서가 곧바로 다가왔지만, 낌새를 눈치챈 주성륜은 손을 내저었다.
오지 마.
수행비서가 발걸음을 멈췄고, 주성륜은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얼굴을 가린 채 사고에 빠져들었다.
‘파격이다.’
마법부가 유엔 가입국에게 통보를 했다. 각국이 진행 중인 속칭 3대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유하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 통보를 받은 각국의 관계자들은 전부 똑같은 행동을 할 게 분명했다. 겉으로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 말하겠지만 속으로는 이제 별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리 생각하며 그 통보를 무시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법 강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속칭 3대 프로젝트라 불리는 그 사업에 투자하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걸 타국과 공유하라고? 차라리 유엔에 1억 달러 기부를 하는 게 싸게 먹힐 것이다.
그런데 마법부가 그에 대한 대가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란 카드를 꺼냈다.
탐은 난다.
‘미끼는 매력적이지만, 대어를 낚을 미끼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정말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공개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레시피를 준다면 모를까, 두세 명 먹일 마나 서클 자극 비약 같은 건 있든 말든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작 그뿐이라면, 그런 통보를 가지고 칠성문의 일곱 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크로포드의 작품이란 점이다. 크로포드가 그걸 내놓았다는 건, 이번 판을 주도하는 단체가 그 누구도 아닌 그 블랙 스택 그리고 미국이란 의미다.
즉, 미국 정부가 유엔을 통해서 전 세계 국가들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한 셈.
미국이 먼저 시장을, 무대를 마련하겠다는데, 이제까지 후발주자로 남아있던 자들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다.
당연히 그들은 달려든다. 그럼 미국을 중심으로 거대한 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건가? 아니면 치킨 레이스를 하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다른 마법 강국들도 진지하게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맞서 싸우거나 혹은 그들이 한몸이 되거나. 분명한 건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하나의 국가가 자력으로 따라가는 건 쉽지 않다는 사실.
‘대마.’
판을 정리할 거대한 말이 등장했다.
절대 죽지 않은 대마가 등장했는데, 그 말 등에 탈 기회를 저버리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칠성문도 유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 전 회의를 통해 결론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주성륜도 크게 의문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 자체는 납득이 간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왜 이제 와서?’
시기였다.
미국 그리고 블랙 스택이 정말 이렇게 상황을 마련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낌새라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이런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판을 벌이는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갑자기 판을 벌였을 리는 없다. 블랙 스택이나 미국 정부는 동네 가게가 아니다. 절대적 명분과 가치, 이유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주성륜은 그 이유가 궁금했고 염려됐다.
‘공동연구가 진행되면, 연구 결과는 빠르게 나오겠지만, 동시에 모든 게 드러나는 꼴이 될 터.’
주성륜이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행비서가 곧장 질문했다.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챠이 수.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마련해주게.”
“예.”
이강우가 오랜만에 즈믄나래 빌딩을 방문했다. 그런 이강우의 손에는 종이로 된 쇼핑백 하나가 잡혀 있었다.
“오셨습니까?”
“예, 수고하십니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던 때와는 다르게 자기 집마냥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이강우는 곧장 최고층을 눌렀다.
‘형님하고 만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이윽고 이강우가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안중현의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안중현은 통화를 막 마치고 수화기를 본래 자리에 내려놓는 중이었다. 안중현이 곧바로 이강우에게 질문했다.
“중국 여행은 어땠나?”
“나쁘지 않았습니다.”
“앉지.”
그때 이강우가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은 안중현에게 건네줬다. 쇼핑백 안을 살핀 안중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금문고량주인가?”
“마셔 보셨습니까?”
“의외로 조폭들이 이런 걸 좋아하거든. 예전에 형사 시절에 몇 번 선물로 받아 봤지.”
조폭들이 좋아하는데 형사시절에 받았다는 의미.
이강우가 묘한 눈으로 안중현을 바라봤고, 안중현이 곧장 변명을 했다.
“물론 마시진 않았네. 마시면 뇌물수수가 될 테니까. 더불어 조폭 놈들 중에는 가짜 금문고량주를 만들어 유통하는 놈들도 있고, 그래서 제법 잘 알고 있는 놈이지.”
금문고량주는 나름 유명한 술이다. 금문도라는 곳에서 만드는 고량주로, 국제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술이다.
“그런데 자네 중국을 다녀오지 않았나? 헌데 왜 선물로는 금문고량주를 사 왔나?”
문제는 그 금문도가 중국이 아닌 대만 땅이라는 의미. 선물로 나쁠 건 없지만, 중국에서 온 이강우가 사올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이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와인보단 낫지 않습니까?”
“중국에 있는 술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 굳이 대만의 금문고량주라…… 뭐 자네 말대로 나쁠 건 없지. 받는 입장에서 투정부릴 사안이 아니니까.”
그때 안중현이 쇼핑백 안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꺼냈다. 묘한 놈이었다. 손바닥에 올려 놓을 만한 크기의 정육면체를 안중현이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건 뭔가?”
“별거 아닙니다. 마법 아티팩트입니다.”
“마법 아티팩트?”
보통 마법 아티팩트는 무기 형태나 장신구 형태가 대부분이다. 비석 형태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장신구 형태가 많다.
그렇기에 지금 보는 큐브 형태의 마법 아티팩트는 안중현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안중현이 슬그머니 마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마력을 주입했음에도 마법 아티팩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중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 아티팩트라고?”
이강우는 대답 대신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5서클?’
안중현이 재차 고개를 갸웃했다. 5서클 마법 아티팩트이라면, 5서클인 그가 발동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때 이강우가 활짝 펼친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엄지와 소지, 약지를 접었다. 검지와 중지만 폈다.
“헉!”
안중현이 깜짝 놀라며 손에 있던 큐브를 놓쳤고, 다시 한번 기겁한 안중현이 헛손질을 두어 번 한 후에 간신히 바닥에 떨어지던 큐브를 잡을 수 있었다.
안중현의 표정을 본 이강우의 표정도 굳었다. 장난 한 번 친 건데, 이런 반응과 결과가 나올 줄이야?
“괜찮으십니까?”
“……사람 골 때리는 재주가 늘었군.”
“이 정도까지는 골 때리는 상황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묘한 침묵이 깔렸고, 그 침묵 속에서 안중현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소파 앞에 마련된 탁자 위에 큐브를 올려놓았다. 좀 더 침묵이 깔렸고, 안중현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전부 잊어 버렸어.”
이강우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니까 일단 축하부터 하겠네. 대단한 일을 해냈군.”
머릿속이 정리된 듯한 안중현이 말을 이어갔고, 이강우도 이야기를 했다. 이강우는 3등급 유적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듣던 안중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질문도 오고 갔다. 유적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마저도 비서가 안중현에게 약속 시각이 다가왔다고 통보를 하는 바람에 도중에 한 시간짜리 대화가 됐을 뿐이었다. 하루가 주어져도 부족할 정도로 이야깃거리는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길드 마스터가 된 안중현에게는 그 담소를 위한 본인만의 시간이 많지 않았다.
“미안하네. 약속이 있어서 곧 일어나야겠군.”
“바쁘시군요.”
“어디든 관리자는 바쁜 법이지.”
“제가 괜히…….”
“그래도 나름 만족하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이 있으니까. 보수도 괜찮고. 찾아보니까 내 연봉이 AU그룹 계열사 사장 수준이더군. 그보다 시간이 없으니, 주요한 것들부터 말하겠네.”
안중현이 본래 이강우에게 해주려고 했던 말들을 꺼냈다.
“한국 정부 그리고 마법청이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에 가입을 했네.”
노아의 방주?
“그건 또 뭡니까?”
“앞으로 등장할 미지의 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범세계적 기구라고 할 수 있지. 유엔의 마법부가 관리를 하게 되네.”
“마블 코믹스의 어벤저스 같은 겁니까?”
“비슷하지만, 그저 마법사들만이 몬스터 사냥을 위해 모이는 집단이 아니라,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논의하는 통합기구가 될 가능성이 높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면 3대 프로젝트를 공동 연구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할 예정이라더군.”
“그런데 프로젝트 이름이 노아의 방주입니까?”
안중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분 좋은 이름은 아니지.”
노아의 방주.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세계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주다.
달리 말하면, 마치 세계가 멸망을 앞두고 대비책을 세우겠다는 의미다.
섬뜩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한국은 그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했네. 대세가 될 그 프로젝트에서 낙오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러자 유엔에서는…….”
“저를 원했겠군요.”
“거절할 방법은 없네. 혹여 조만간 치러질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한국 정부와 마법청은 이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밖에 없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 세계적 대세의 흐름에서 벗어났던 적은 없다. 벗어나서도 안 되는 처지였다.
더불어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는 대세 중의 대세였다. 세계열강들이 참가하는 일이 될 테고, 한국 정부는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이 대세에 몸을 담그려고 할 것이다. 그런 국가적 사업을 개인이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거절할 방법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무엇을 얻어내셨습니까?”
이 상황 속에서 최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그게 세상 속에 살아가는 개인이 살아남는 비결이다.
이강우의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안중현이 곧장 대답했다.
“아이기스 슈트 세 벌을 얻어냈네. 반영구적 소유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이강우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 * *
두 여인이 쇼원도우 너머를 가득 채운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두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강우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강우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푸념을 뱉었다.
‘쟤는 대체 왜 따라온 거야?’
데이트였다.
3등급 유적 클로즈 이후 이강우에게는 거의 강제나 다름없는 휴식이 주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유적 사냥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력을 섭취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때문에 언제 이강우에 대한 소집령이 떨어질지 몰랐고, 그런 상황에서 이강우가 확실한 일정을 기약할 수 없는 유적 사냥에 참가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많았다. 전 세계가 참가하는 일에 이강우가 유적 사냥을 이유로 불참하면 그보다 무례하고, 우스운 꼴은 없을 테니까.
이강우는 이런 자신의 강제 휴식을 차라리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그동안 못했던 데이트를, 채유리와의 데이트로 이번에 주어진 휴식의 나날을 전부 채울 속셈이었다.
나름 계획은 좋았다. 이곳저곳 맛집도 다니고,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동생인 이혜연이 등장하더니, 이강우와 채유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휴, 저 골치. 누가 좀 안 데려가나?’
그때 이후로 줄곧 이 모양이다. 이혜연과 채유리는 사이 좋은 자매처럼 붙어 다니고, 이강우는 짐꾼 역할에 물주 역할을 할 뿐, 이제 어디에도 데이트 같은 느낌은 없었다.
‘물주는 아니지.’
물론 진짜 물주는 로드리게스 회장이었다. 그가 준 카드를 이강우는 여전히 알토란 같이 잘 써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카드 덕분에 돈은 엄청나게 잘 모였다. 이강우가 자비로 뭔가를 할 일이 없으니까.
‘어디 보자…….’
딱히 할 게 없던 이강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뇌를 이용해 심심풀이라도 할 겸, 돈 계산을 시작했다.
‘내 통장에 얼마가 쌓였지?’
마법사가 된 이후 지출이 컸던 적이 없었다. 스포츠카를 구매하면서 적잖은 돈을 썼지만, 그런 스포츠카가 우스워질 정도로 목돈을 벌었던 적이 꽤 된다.
그렇게 번 돈이 너무 많아서 재산 관리를 어느 순간부터 그냥 전문 재산관리 담당자에게 위임했다. 이강우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의 통장 잔고에는 현금으로만 약 20억 원 정도가 있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 액수가 실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빌딩 살 수 있으려나?’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강우의 최종 목표가 건물주였다. 외식사업으로 제대로 돈을 벌어서, 빌딩 하나 사서 평생 임대료로만 호사를 부리며 먹고 사는 것!
이강우가 슬그머니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 가로수길에 빌딩 한 채에서 나오는 임대료가 얼마쯤 되려나?’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몬스터 한 마리가 등장해서 쑥대밭 되면…… 부동산값이 아주 작살이 나겠네. 그럼 싸게 구할 수 있으려나…… 아니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할 일이 너무 없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마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이강우가 건물주가 되고, 자신의 건물에 정말 멋진 음식점 하나를 차리는 것까지 상상할 무렵.
“오빠가 아직 약혼 이야기는 안 꺼냈죠?”
“응.”
“오빠는 연애에 젬병이에요. 자기는 연애를 잘 아는 줄 아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죠. 그러니까 절대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하면 안 돼요. 그랬다가는 유리 언니는 서른이 되어서도 결혼 못 할 거예요.”
“응.”
“그래서 가장 좋은 건 기정사실을 만드는 건데…… 이건 유리 언니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 그보다는 어떻게든 상견례 약속을 유도해야 해요. 오빠가 고지식한 게 있어서 부모님끼리 얼굴 뵈면, 절대 발 못 뺄 거예요. 저희는 얼마든지 준비됐어요.”
“응?”
“그러니까 유리 언니가 치고 들어오세요.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상견례 날짜를 잡는 거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약혼도 건너뛰고 결혼식 날을 잡는 거예요.”
“아, 그게…….”
이혜연, 그녀가 이강우, 채유리 커플 사이에 끼어든 이유는 오직 이것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면 둘은 영영 그냥 커플로만 남을 팔자였다. 채유리도 연애를 모르고 이강우도 연애를 모르고 있으니까.
또한 그 둘의 주변 상황은 그 둘이 뭔가를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이혜연은 이 둘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하나로 붙여 버릴 속셈이었다.
더불어 이혜연은 확신했다. 양쪽 부모님들이 서로 인사를 하는 순간, 이 둘의 성격과 태도를 보면 무조건 내년에 봄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오빠가 외모는 딸리지만, 그래도 이제 번듯한 직업도 가지고 있으니까, 가능할 거야.’
문제는 이혜연이 아직 채유리의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는 점. 만약 그녀가 채유리의 부모님을 알았다면,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상견례를 운운했을 리가 없다.
채유리가 그런 이혜연을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강우가 그 둘을 바라봤다.
‘아니, 케이크를 고르는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려? 그냥 전부 사면 될 텐데?’
이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창밖을 바라봤다.
“헉!”
그 순간 이강우는 진심으로 기절할 뻔했다.
‘뭐, 뭐야?’
가게 유리창 밖에서 한 사내가 이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기, 김재범?’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재범이었다.
그는 우연히 약속 장소로 가던 길에 케이크 전문점 안에서 이강우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고, 그래서 이강우의 얼굴을 보다 자세히 확인하려고 창문에 붙어있는 걸 이강우가 발견한 것이다.
“대장!”
이내 가게로 들어오는 김재범을 보며 이강우는 묘한 느낌의 한숨을 내뱉었다.
“김재범 씨가 여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보다 대장은…….”
그때 김재범의 등장을 확인한 채유리와 이혜연이 이강우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김재범이 곧바로 채유리를 확인했다.
“데이트군요.”
눈치 없는 김재범이 아니다. 괜히 자신이 끼어들 만한 판이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다.
인사도 했으니, 잽싸게 빠질 타이밍.
그런데.
“어, 그런데 이쪽은 누구시죠?”
제가 괜한 방해를 했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라고 말하려던 김재범이 갑자기 떠오른 말을 잊은 채 채유리 옆에 있는 이혜연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강우가 푸념을 뱉듯 말했다.
“이혜연.”
“대장하고 관계가…….”
“내 여동생.”
“예?”
“혜연아, 이쪽은 김재범.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야.”
그제야 상대의 신분을 확인한 이혜연이 활짝 핀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혜연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아!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재범이라고 합니다. 즈믄나래 마법사로 활동 중이고, 현재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대장님…… 아니, 그러니까 이강우 씨에게 여러모로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혜연의 가벼운 인사와 다르게 넙죽 허리까지 숙이려는 김재범의 모습에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여러모로 남의 일에는 눈치가 빠른 이강우였다.
* * *
유엔이 주도하는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모든 국가들이 앞다투어 프로젝트 참가를 선언했고,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 중 일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각국을 대표하는 석학들이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3대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였고, 그동안 폐쇄적으로 진행되었던 각국의 연구 결과들과 두뇌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놀라울 정도의 파급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득을 본 건, 다름 아닌 중국 그리고 칠성문이었다.
주성륜은 망원경을 들어, 멀찌감치 떨어진 민둥산 위에 생겨난 새로운 크레이터를 살펴봤다.
“하하.”
주성륜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주성륜이 자신의 망원경을 옆에 있던 비서에게 건네줬다.
“자네도 한 번 보게.”
비서는 군말 없이 망원경으로 주성륜이 봤던 곳을 바라봤다. 주성륜이 그런 비서에게 말했다.
“어떤가?”
“놀랍습니다.”
“처음 이 세상에 마법이란 게 등장했을 때 놀라운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마법이 현대 병기를 대체하는 일은 없으리라 장담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군.”
실험무대였다.
칠성문이 확보한 7서클 마법 아티팩트, 유성우(流星雨)의 복제품을 시험하는 무대.
사실 일찍이 주성륜은 유성우 마법을 본 적이 있었다. 어렵게 구한 그 마법을, 칠성문의 가장 귀하신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마도사 챠이 수가 칠성문의 일곱 별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여 줬다.
그때의 위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다시 놀란 건, 복제품이 진품과 거의 똑같은 수준의 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현대 병기와 비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제 진짜 병기가 됐군.”
현대병기의 무시무시한 점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총은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그 총을 지구의 인구수만큼 찍어낼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마법이 생산을 위한 기술력이 확보됐다. 당장 대량생산이 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나 7서클 마법 아티팩트마저 복제가 가능해진 이상, 그 아래 마나 서클의 복제품 양산은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진정한 마법사의 시대가 온 셈.
‘우습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성륜은 조금 전 지었던 헛웃음 사이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반대로 이 모든 게 인류가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는 건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마법은 인류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찾아낸 것도 아니다. 인류를 알아서 찾아온 거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이 역시 놈들의 시나리오이겠지.’
인류는 이제 보다 강한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무기를 쥐여 준 건 그 누구도 아닌 인류가 몬스터와 싸울 수밖에 없는 무대를 만든 자들이다.
마치 고대 로마 시대에서 검투사에게 검을 쥐어주고 사자와 싸우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런 처지 속에서 좋은 검을 받았다고 미소 지을 검투사는 없다.
‘검투사. 딱 그 처지군. 필요에 의해 사육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주성륜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이 모든 게 놈들의 시나리오라고 해도 당장 7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주성륜은 만나야 했다.
주성륜이 비서에게 말했다.
“이강우에게 연락하도록.”
* * *
마르쿠스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정보들, 보고서들을 쉴 새 없이 읽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직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마르쿠스가 하루에 처리하는 보고서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때 마르쿠스가 읽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사무실 방문을 바라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열렸다. 깡마른 체격의 가진, 시체 꼴을 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바노프!
그의 등장에 마르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 없이 갑작스러운 방문.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군.”
“강희는?”
“그걸 묻기 위해 나를 찾아온 건가?”
“그가 즈믄나래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계획의 일부였나? 언질을 받았었나?”
“내게 따질 문제가 아니군.”
둘의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싸움에 가까웠다. 이바노프는 자기 할 말만 했고, 마르쿠스는 그 말에 꼬리만 잡았다. 먼저 대답하는 쪽이 지는 싸움이었다.
“강희의 독단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어진 이바노프의 그 말 앞에서 마르쿠스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가 결국 항복을 선언하듯, 이바노프의 말에 응수를 해 줬다.
“이강우를 처리할 속셈인가?”
“대적자의 싹을 미리 제거해 두는 것이 능사.”
“그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나는 강희의 계획에 찬성한다.”
마르쿠스의 찬성 표시에 이바노프의 눈동자가 활활, 섬뜩한 빛을 풍기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그 눈빛에 개의치 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대적자의 그릇을 처치하면 결국 대적자와의 전쟁은 영원토록 이어질 터. 우리는 영생을 추구하나, 불멸은 이룩하지 못한 바. 대적자의 존재는 우리들의 종말이 될 수도 있다.”
“무슨 수로 대적자를 처리한단 말인가?”
“우리가 처리할 필요는 없지.”
말과 함께 마르쿠스가 이바노프를 지나친 후에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열린 문을 등진 채 말했다.
“대적자가 최후의 문 너머로 들어갈 테니까.”
“대적자가 그 문을 넘을 일은 없다. 대적자가 그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 않을 터.”
“대적자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선택권을 가진 건 대적자를 담고 있는 그릇이니까.”
그 말에 이바노프가 마르쿠스가 열어둔 문 너머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문을 넘으려던 이바노프가 마르쿠스 옆에 멈췄다.
“만약 대적자가 그 문 너머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모든 것을 잃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될 뿐. 어차피 최후의 문 너머에 있는 괴물이 소용이 없다면 모든 게 부질없는 일 아닌가? 그보다 강희를 탓하는 자네는 자기 일에 충실한가?”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그래서 자네의 에스콰이어인 볼코프가 죽음을 맞이했나? 암살에 실패한 채?”
이바노프는 대답 대신 섬뜩한 눈빛의 살기를 쏘아댔다. 마르쿠스는 그런 이바노프에게 오히려 다그치듯 말했다.
“네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도록. 내 수준에서 일을 무마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무엇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 필시 놈들 중에서도 의심을 가진 채 행동에 나서는 자들이 있을 터. 명심하라. 우리는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자. 이 세계에 우리를 환영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바노프는 마르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밖으로 나갔고, 마르쿠스는 문을 닫으며 실소를 머금었다.
‘종말이라……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조금도 변화하지 못한 우리 종족이야말로 언제 멸종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