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51화 (51/66)

51화. 유적

모래시계문 너머의 어둠을 헤치고 지나갔을 때, 모래시계문 너머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식자 팀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놀랍게도 푸른 하늘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탐스러운 태양 빛 하나가 눈에 보였다. 그 태양을 보는 순간 모두가 굳어 버렸다. 이강우도 굳었다. 그렇게 굳어버린 팀 포식자의 일원 중에 가장 먼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연 건 김재범이었다.

“대장, 아무래도 모래시계문이 아니라 우리가 문을 착각하고 그냥 밖으로 나온 거 같은데요?”

모든 유적은 작위적인 공간이다. 빛이 있어도, 그건 전등의 빛과 비슷한 빛일 뿐이지, 태양의 빛과는 비교 자체가 거부된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천장이 있을 뿐, 유적에서 하늘이 발견됐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건 하늘이고, 구름이며, 태양이었다.

김재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모두가 3등급 모래시계문의 위엄에 정신 착란 증상을 일으켜서 이제까지 환각을 봤다, 그게 더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강우는 달랐다.

‘진짜 유적이군.’

모래시계문 너머의 세계를 처음부터 유적이라고 표현했던 건 아니다. 여러 표현이 쓰였다. 추측도 다양했다. 혹자는 지구공동설을 운운하며, 모래시계문이 지구 속 안에 있는 세계로 가는 문이라는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유적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바츠무.’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바츠무 족이 이 세계에 규칙을 정하면서, 모래시계문을 두고 인류와 바츠무 족이 펼치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면서, 그들이 그 용어를 표준화했다.

그렇다면 왜 대체 유적이란 표현을 썼을까?

유적의 뜻, 그대로다.

남아있는 자취, 건축물이나 싸움터 또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를 말함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습니다.”

이강우의 담담한 말에 모두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냥 하는 소리였으니까.

어쨌거나 이강우의 말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이강우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기가 어디가 됐건, 이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강우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을 명시시켰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우의 말처럼 여기가 다른 세계라고 해도, 그건 중요한 사실일지언정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다. 당장 중요한 건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협적인 몬스터를 제거하고, 출문을 발견해야 한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베이스캠프부터 확보하겠습니다.”

* * *

이강우가 7서클 개방에 성공했을 때, 그는 여유를 알게 됐다. 5서클 이하 마법은 더 이상 이강우의 마나 서클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마라톤을 하다가 그 짐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여기서 이강우는 새로운 전투 스타일을 습득했다.

‘칼을 쥐고 근접전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만 할 줄 아는 건 위험하다.’

이강우의 기존 전투스타일은 위력적이다. 몬스터 몸에 달라붙어 실시간으로 몬스터의 피를 빼내고, 도축 작업마저 진행하는 그 광경은 전투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그러나 리스크도 적지 않다. 작은 실수 하나가 곧바로 생사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적에게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고, 긴급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대마도사의 자질을 가진 이강우가 고작 칼만 쥐고 싸운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강우는 본격적으로 원거리에서 마법을 쉴 새 없이 퍼붓는 포격 스타일을 습득했다.

그 결과물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오오!

길쭉한 뿔을 가진 다섯 마리의 일각랑(一角狼)들이 특유의 괴음을 토해내며 뿔을 앞세운 채 이강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강우는 그들의 질주를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쿵쿵!

발을 구르자, 일각랑과 이강우, 둘 사이에 있는 대지가 꿈틀거리며 곳곳에서 큼지막한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흙기둥의 등장에 일각랑 두 마리는 기둥과 충돌했고, 남은 세 마리는 동선을 급하게 바꾸며 솟아오른 흙기둥 사이사이를 비집고 질주했다.

‘동선 파악 완료.’

덕분에 이강우는 일각랑의 동선을 예측할 수 있었고, 타이밍을 가늠한 뒤 뻗은 양팔을 순차적으로 흔들었다. 일단 왼손으로 드럼을 치듯, 가볍게 흔들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폭발했다. 4서클 폭발 마법, 버스터였다. 그 버스터에 일각랑 한 마리가 휘말렸다. 버스터의 폭발 소리에 일각랑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했다.

곧바로 이강우가 오른손을 왼손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쿠구궁!

이번에는 벼락이 떨어졌다.

붉은 벼락, 홍뢰는 자신의 표적이 보이는 순간 빠르게 궤적을 수정하며 표적에 꽂혔다.

벼락으로 된 창이 또 다른 일각랑의 등줄기를 꿰뚫었다. 일각랑은 입을 크게 벌린 뒤 온몸을 부르르 떤 뒤 바닥에 쓰러졌다. 탐스러운 털이 일부는 새카맣게 타버리고, 일부는 가시처럼 빳빳하게 섰다.

그러나 아직 남은 한 마리가 이강우를 향해 여전히 흉포한 기색을 드러내며 질주하고 있었다.

놈을 확인한 이강우는 이번에는 드럼이 아니라 지휘관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처럼, 클라이맥스 도달을 앞두고 지휘관이 양팔을 휘두를 때처럼, 우아하지만 강렬하게 팔을 흔들었다.

그 손놀림에 응하듯 버스터 마법과 홍뢰 마법이 동시에 발동됐다.

콰앙! 그리고 쿠구궁!

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울리며 절묘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그 하모니 앞에 일각랑은 처참한 몰골이 됐다. 이강우가 바라보는 풍경도 처참한 몰골이 됐다.

이강우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연습을 하지 않은 것치고는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

그런 수준이 아니다. 지금 이 전투를 보고 있는 다른 마법사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지경이었다.

김재범도 한 마디 했다.

“게임에서도 이렇게 마법 쓰면 버그 소리 듣는데…… 미치겠군. 우리가 할 일은 있는 건가?”

이강우가 보여준 전투능력은 5서클 마법사마저 자격지심을 보이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단순히 강한 마법을 연속해서 쓸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각기 다른 성격의 마법을 완벽하게 쓴다는 것이 더더욱 무서운 일이었다.

심지어 이강우에게는 헤이스트 마법을 비롯해 다양한 버프 타입의 마법이 있었다.

이 역시 이강우가 준비한 또 다른 노림수였다. 준비해둔 버프 마법의 종류만 여섯 가지였다. 인간 하나를 초인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 버프 마법으로 무장한 이강우가 근접전에서 도축을 행하는 것도 무시무시하지만, 쉴 새 없이 이동하면서 강력한 원거리 마법을 쉴 새 없이 포격하는 건 무시무시한 수준을 넘어 끔찍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강우의 전투 스타일에는 정말 치명적인 단점 하나가 존재했다.

* * *

“너무하시네요.”

김수애는 이강우를 향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너무해.”

채유리 역시 김수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강우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대장, 너무합니다.”

김재범도 한 마디 했지만 그 말은 그냥 무시당했다.

어쨌거나 이 반응은 혼자서 7등급 몬스터인 일각랑 다섯 마리를 깔끔하게 해치우고 돌아온 이강우에게 보여줄 만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강우는 이 반응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 말과 함께 이강우가 발치에 늘어진 일각랑의 사체를 바라봤다.

일각랑의 사체는 처참했다. 정상인 게 없었다. 불에 새카맣게 탄 놈, 벼락에 맞아 몸이 걸레가 된 놈, 벼락에 맞아 걸레가 된 몸이 불에 새카맣게 탄 놈까지. 남은 두 마리는 그나마 온전한 몸 상태를 유지했지만 산 채로 내장이 파열되고,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모양만 온전할 뿐 어떤 식으로 도축을 하고 재료를 처리해도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점이었다.

이강우의 포격 스타일은 남는 게 없었다.

보통의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이상할 것 없는 부분이었지만 팀 포식자에게는 아니었다.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이야.’

이강우도 나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잘 싸웠지만, 먹을 게 없으면 남는 게 없는 거다.

한편 이 광경을 보던 호령은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강우의 전투 능력은 놀라웠다.

놀라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런 건 사부님도…….’

호령은 대마도사 챠이 수의 제자였다. 챠이 수의 기겁할 수준의 전투를 적잖게 봤다.

그랬음에도 이강우의 전투 능력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분명했다.

‘이 선생은 7서클 마법사다.’

공개된 적도 없고, 이강우가 스스로 밝힌 적도 없지만 이강우는 7서클 마법사가 확실했다.

그런 7서클 마법사가 자력으로 몬스터를 잡아왔는데, 축하 분위기는 고사하고 모두가 이강우를 나무라고 있었다.

물론 그 나무란다는 게 진심을 담아 나무라는 건 아니었다. 장난에 가까웠지만, 호령의 기준에서는 그런 장난을 친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하신 겁니까?”

결국 호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총꾼 한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총꾼은 어색하게 웃었다.

“잘못한 건 없습니다.”

일단 오해부터 풀었다. 김수애와 채유리는 정말 진심으로 섭섭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장난일 뿐입니다. 저기 두 분은 먹는 것에 목숨을 거시는 분들이니까요.”

“먹는 것에 목숨을 걸다니, 무슨 의미입니까?”

“몬스터는 맛이 특별하지 않습니까? 그 몬스터를 맛볼 기회가 없어진 게 아쉬워서 그러는 겁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여기서 서로가 고개를 돌리면 지금 있었던 해프닝은 기억에도 남지 않을 겁니다.”

“몬스터가 맛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몬스터를 먹습니까?”

이쯤 되자, 대답하던 총꾼 신영섭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 안 먹어 보셨습니까?”

“그걸 왜 먹습니까?”

“예?”

몬스터 요리는 지금 전 세계적 미식 유행의 트렌드다. 몬스터 요리를 먹어보지 못한 인간은 어디 가서 미식가라고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다. 오죽하면 마법사들이 직접 몬스터 도축 방법을 공부할까? 요즘은 본래 도축업을 하던 기능사들이 총기 사용 훈련을 받고 총꾼으로 유적 사냥에 참가하고는 했다. 도축 기술이 있으면, 보수가 일반 총꾼의 두세 배는 가뿐하게 넘어갈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그런데 호령은 아무래도 평생 몬스터를 이용한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단 한 번도 먹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신영섭의 질문에 호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먹어 봤습니다. 최악이었습니다.”

최악?

‘제대로 처리 안 된 놈을 먹었나 보네.’

총꾼 신영섭이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최고 등급, 가격이 수천만 짜리 소도 그냥 몽둥이로 때려죽인 후에 그 상태로 그냥 불구덩이 속에 넣고 구워서 먹으면 맛이 없다. 맛있는 걸 얻기 위해서는 도축과 요리라는 아주 섬세하면서도, 중요한 작업 거쳐야 하는 법이다.

총꾼 신영섭이 옅게 웃었다.

“최악이라…… 아마 이번에 대장님이나 김수애 씨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으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먹지 않습니다.”

여기서 호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보급 식량이면 충분히 맛있습니다. 굳이 먹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예전에 몬스터를 먹어 봤던 기억이 정말 최악이었던 모양. 그런 그녀에게 신영섭은 굳이 억지로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요리를 보면, 절대 지금 같은 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 이강우가 반성의 의미로 직접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 재료는 일각랑의 뿔이었다.

* * *

보통 뿔은 요리로 해 먹기보다는 가루를 내거나 혹은 진액을 내서 먹고는 한다. 단단한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요리로 써먹을 엄두를 내기도 쉽지 않다.

일각랑의 뿔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이 뿔을 보면 어떻게 써먹지? 그런 생각을 할지언정 어떻게 요리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건 생각이 아니라 망상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망상을 하는 인간이 있기 마련!

이강우가 그랬다.

‘일각랑의 뿔은 향이 괜찮아.’

일각랑을 잡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연히 일각랑을 요리해 본 경험은 없다. 대신 예전에 일각랑의 뿔가루를 맛본 적이 있었다. 그때 일각랑의 뿔가루를 맛보면서 생각했다.

‘이거 얇게 썰면 감자칩하고 비슷할 거야.’

보통 뿔가루라고 하면 이미지가 고약하고, 쓴 것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각랑의 뿔가루는 달랐다. 찍어 먹는 순간 뿔가루가 아니라 미원 느낌이 낫다. 감칠맛이 숨겨져 있었다. 감칠맛 속에 고소함도 담겨 있었다.

신기한 건 혓바닥에 맛이 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맛은 훌륭했고, 동시에 깔끔했다. 국물 요리를 할 때 미원 대신 넣으면 정말 멋진 요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뿔만으로 뭔가를 만들어야 했고, 이강우는 이 뿔을 이용해 칩 스타일의 과자를 만들 생각이었다.

‘일단 얇게 썰어야지.’

원래 과감한 시도가 명작을 만드는 법이다. 실패한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요리사는 없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이강우는 일단 일각랑의 뿔을 정말 얇게 썰기 시작했다. 종잇장을 만드는 기세로, 빛이 통과할 정도로 얇게 썰었다. 단단한 일각랑의 뿔을 칼만으로 써는 작업이 쉬울 리 없었지만, 이강우에게 통하는 기준은 아니었다.

스윽, 스윽!

이강우는 마치 양파 같은 걸 썰듯이 일각랑의 뿔을 썰었다. 아이스 웨폰으로 만든 칼에 주입한 마력검 마법의 위력은 이미 상상을 초월했다. 마력검은 사용자가 가진 마나 서클 수준에 비례해서 날카로워지고, 강해지니까.

7서클 마법사인 이강우가 쓰는 마력검은 강철이나 당근이나 구분을 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얇게 썬 뿔을 불에 구웠다. 여기서 이강우는 그냥 불이 아니라, 마법을 썼다.

‘너무 세면 타 버린다.’

유적에서 확실하게 온도 조절이 가능한 가전제품이 있다면 모를까, 그냥 무작정 불에 구웠다가는 절반은 새카맣게 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법으로 만든 불은 달랐다. 화력 조절이 가능했다. 이 역시 사용자의 놀라운 조절 능력을 요구하지만, 이강우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이강우가 절묘한 솜씨로 일각랑의 뿔을 구웠다. 시간이 흐르자, 일각랑의 뿔은 감자칩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탐스러운 빛깔을, 노르스름한 색을 품기 시작했다.

‘뭐지?’

‘고소한 냄새네.’

‘감자 같은 걸 굽나? 냄새가 그거랑 비슷한데…….’

그렇게 은은한 향이 풍기기 시작하자, 모두가 그 냄새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강우가 1미터짜리 일각랑의 뿔을 썰어 만든 속칭 뿔칩을 깔아놓은 비닐 위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양은 어마어마했다. 보통 감자칩 한 봉지에 들어가는 감자의 양이 감자 한 알 수준인 걸 고려하면, 1미터짜리 일각랑의 뿔로 만들 수 있는 칩의 양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마법사가 마법을 부렸다.

그때부터 이미 모두의 신경은 뿔칩을 향하고 있었다.

“간식부터 먹으면 배불러서 안 되는데…….”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김재범이 한 마디 했다. 아무래도 김재범은 이강우가 이 요리를 내놓고, 곧바로 소라도 한 마리 잡아서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김재범의 말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포식자 팀의 팀원들도 전투 도중을 제외하고, 김재범의 말은 듣기보다는 한 귀로 흘리는 게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 먹읍시다.”

이윽고 이강우가 먹어도 좋다! 그 허락을 내리는 순간 모두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산 사람을 발견한 좀비 떼처럼 보였다.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면서도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좀비였으니까.

그렇게 모인 이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강우가 만든 뿔칩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바삭!

씹는 순간 터지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퍼졌다.

‘와.’

모두가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끝내주는군.’

일단 식감이 훌륭했다. 정말 감자칩을 씹는 것과 비슷한 식감이 났다. 놀라운 건 씹은 후에 입안에서 침과 섞이면서 뿔칩이 바스러진다는 점이었다.

바스러지면서, 일각랑의 뿔이 가지고 있던 고소함은 후각을, 감칠맛은 미각을 자극했다. 기분 좋은 농락이었다.

화룡점정은 꿀꺽! 잔해물들을 삼켰을 때였다.

깔끔했다.

흔히 과자를 먹으면 생기는 입안의 잔류물들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초월한 뭔가를 먹는 느낌이었다.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미난 맛이었고,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즐길 수 있을 법한 맛이었다.

만족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진짜 맛있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후회가 없을 말이야.’

바삭, 바삭, 바삭…….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쟁적으로 뿔칩을 먹었다. 채유리는 그냥 먹는 수준이 아니라 한입 가득 먹었다. 햄스터처럼 양쪽 볼을 한껏 부풀리며 먹었다.

그 무렵에 누군가 말했다.

“여기에 콜라나 사이다 한 잔이면…….”

“맥주도 좋지 않아?”

“술을 마실 순 없잖아?”

“이 뿔칩에 어울리지 않는 건 없어. 아마 그냥 오렌지 주스를 먹어도 끝내줄걸?”

언제나 그렇지만 하나만으로 완벽한 건 없다. 진정한 완벽은 하모니가 필요한 법이다. 일각랑 뿔칩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체만으로도 맛있지만, 절정은 탄산음료를 곁들이는 것이었다.

이강우는 그런 팀원들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에 들었으니, 기쁠 따름이다.

‘응?’

그런 이강우의 눈에 호령이 보이지 않았다.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이 어디 간 거지?’

이번 유적 사냥에서 이강우는 호령에게 나름 적당한 지원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녀를 억지로 7서클 마법사로 만들어 줄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다른 마법사들에게 해 줬던 수준의 지원은 해 줄 생각이었다.

즉, 제대로 먹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강우가 곧바로 마이크를 찾았고, 마이크를 들었다.

“호령 씨 어디 있습니까?”

-신호를 찾고 있습니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던 호령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강우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신호를 찾습니까?”

“선발대가 남긴 신호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는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그래, 중국 정부와 칠성문이 바보가 아니라면 필시 선발대를 보냈겠지.’

중국 정부와 칠성문은 몇 차례 3등급 모래시계문 안으로 파티를 보냈을 것이다.

당연히 생존율은 극악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냥 자살 특공대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쌓이면, 차후 유적 사냥 파티는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보급품은 정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또한 3등급 모래시계문의 유효시간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안에 들어간 사냥꾼들이 사망하기 전까지 모래시계는 작동을 멈추니까.

실제로 이 방법은 문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아프리카 같은 무법지대에서 쓰이고는 한다. 억지로 사람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럼 그 사람 목숨만큼 짧게는 하루, 길게는 며칠을 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클로저 라이센스를 강희가 만든 이유가 그 이유 때문이었지.’

그 결정판이 클로저 라이센스다.

권재용 박사가 말해 줬다.

강희, 그가 클로저 라이센스를 기획할 당시 추진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클로저들이 목숨을 걸고 모래시계문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였다고.

클로저들에게는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긴급한 상황…… 당장 48시간 내에 3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이 열리는 상황이라면, 당장 그 모래시계문의 파괴를 앞두고 시간을 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때 클로저들이 투입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권력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사람을 희생하면 모래시계문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 수명을 늘리면, 공략할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즉, 당장 모래시계문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나중을 기약할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본인이 직접 들어가지 않고, 명령만 내리는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사람 목숨이 얼마나 소모되든, 그건 의미가 없다. 자신들에게 오는 피해는 전혀 없지 않은가? 권력자들에게 클로저 라이센스는 여러모로 거부할 이유가 없는 최고의 시스템이다.

‘교묘하고, 영악한 놈들이지.’

바츠무 족, 참 대단한 족속들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인류가 모래시계문에 집착을 하게 만들고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세상을 위협하는 모래시계문을 버리지 못하게,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바츠무 족이 인류에게 모래시계문을 통한 혜택을 주는 결정적인 이유다. 모래시계문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먹으면서 하십시오.”

이강우가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현재 식사를 할 만큼 허기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에 이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입이 짧은 편인가? 내 요리를 이렇게 단숨에 거부하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유적 사냥을 하면서, 이강우는 온갖 기상천외한 요리를 만들었고, 그 요리는 언제나 좋은 호응을 받았다.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강우의 요리를 단언하며 거절한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신선한 기분. 이런 말을 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그런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말이 순간 터져 나올 뻔했다.

“간식입니다. 그냥 맛만 즐기세요.”

이쯤 되자 살짝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먹기 싫은 사람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맛조차 보여주지 못한 채 거절당하니, 요리사의 자존심이 꿈틀거릴 수밖에.

더군다나 이강우는 눈앞의 여인을 먹여야 한다. 먹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먹여야 한다. 그게 칠성문과의 거래였다. 그렇다면 못해도 그녀의 식성 취향이라도 파악해야 한다. 뭘 싫어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는 단련됐습니다.”

거듭되는 사양에 이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니 견적이 나왔다.

‘뼛속부터 훈련을 마쳤군.’

식욕만큼 대단하면서도 위험한 게 없다. 이런 식욕만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못할 게 없다. 그래서 사람을 훈련시킬 때 식욕을 억제하는 훈련도 한다. 먹기 힘든 걸 먹는 훈련, 참는 훈련 등…… 처절한 훈련이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호령은 그런 훈련을 받은 게 분명했다.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나름 국가적 사태에 투입할 수 있는 진짜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도 먹여야 한다.

“좋습니다. 그럼 명령입니다. 먹으세요.”

“예!”

이강우가 명령이라고 하는 순간 호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한 뒤 절도 넘치는 걸음으로 모두가 뿔칩을 먹는 곳으로 갔다. 김재범과 총꾼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는 정말 절도 넘치는 모습으로 뿔칩을 집어든 후에 입에 그냥 구겨 넣었다. 그녀는 맛을 즐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명령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바삭!

입안에서 뿔칩이 바삭거리는 순간, 호령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평생 절제된 삶을 살았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를 절제했다. 맛있는 걸 먹는다? 그런 개념은 2015년, 혼란의 시대에서 가족을 잃은 그녀가 칠성문에 들어가는 순간 사라졌다. 그녀에게 식욕은 그저 육체를 움직이기 위해 연료를 주입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어쩜 이렇게 맛있지?’

그 생각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동안 맛있는 걸 안 먹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미 퇴화한 그녀의 미각은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굳이 구분할 생각도 없었다. 남들이 맛있다고 말하는 음식도 그녀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달랐다.

먹는 순간, 더 먹고 싶다는 욕구가 끓어 올라왔다. 심지어 혓바닥이 입안을 맴돌며, 곳곳에 남은 맛을, 잔해물을 미친 듯이 핥았다. 자신의 혓바닥이 이렇게 탐욕스러웠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맛 자체도 훌륭했다. 미식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그녀지만, 맛에 대한 품평이 저절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삭한 식감 속에 담긴 고소함과 감칠맛……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심지어 그녀는 이 맛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강구해야 했고, 고뇌해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김재범이 한 마디 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서운 법인데…….”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모두의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호령, 그녀의 손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 난 요리를 해야 한다니까. 요리로 사업을…… 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 *

뿔칩의 양은 적지 않았지만 금방 사라졌다.

“나머지 뿔 네 개는 나중에 먹읍시다.”

이강우는 남은 네 개는 그냥 보관해두었다. 굳이 당장 해치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멋진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포식자 팀은 계획을 수정했다.

“신호가 잡힙니까?”

“예. 잡혔습니다.”

호령이 말한 선발대가 남긴 신호를 찾았다.

물론 선발대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랬다면 포식자 팀이 유적에 들어왔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단지 기대하는 건 선발대가 남긴 보급품들과 자료들이었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후발주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들어온 자들이다. 그들이 남긴 것은 단순히 남은 것들이 아니라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렇게 신호가 잡혔고, 신호를 따라 이동한 포식자 팀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베이스캠프로 삼기에도 괜찮은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 안에서 선발대의 유산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꽤 많은 양의 보급품을 확보했다.

“보급품을 거의 쓰지 않았네요. 보급품 상자 중에 제대로 개봉하지 않은 상자도 꽤 됩니다.”

보급식량을 비롯해 탄약과 유적 사냥에 도움이 되는 각종 장비들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귀중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3등급 모래시계문의 선발대의 선발대장 장린이다. 이곳은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다른 환경과 문명을 가진 우리 지구와는 또 다른 세계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인류가 맞이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모습이다. 만약 이 영상을 보는 자가 있다면, 이 진실을 세상 밖으로 꼭 가져다주기 바란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선발대장 장린, 그가 남긴 영상 데이터.

세상이 드디어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 *

장린.

그는 본래 생물학자였다. 이름난 학자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가 모래시계문의 등장 그리고 유적의 등장을 두고 나름의 주장을 했을 때,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생물이란 것에 대해서, 생물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서 나름의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런 내게 있어 유적 속 세계는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했다. 이질적인 것은 그게 정상적인 생태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익숙한 것은 그와 비슷한 것을 이미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나는 유적을 동물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동물원.

인간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확실한 목적성을 위해 생태계를 무시한 채 만들어진 세계.

그게 장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장린은 좀 더 나아간 생각을 했다.

-동물원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끌어 모아 장사를 하기 위해서 혹은 동물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종의 보존이 목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적 역시 어떠한 존재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목적이 우리 인류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유적의 진실을 통해 모래시계문을 세상에 내놓은 자들의 속셈을 알고 싶었다.

이런 장린의 말은 사실상 헛소리였다.

증거가 없었으니까. 증거 없이 가설만을 지껄이는 건 과학자나 연구가가 아니라 종말론자, 온라인상에서 자칭 전문가라고 칭하는 족속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장린이 운이 좋았던 건, 그의 말을 믿는 이들 중에 칠성문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칠성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유적을 탐사했다. 단 한 곳도 작위적이지 않은 세계가 없었다. 온실 같았고, 동물원 같았고, 가짜로 만든 개미굴 같았다.

마법사도 아니고, 총꾼도 아닌 연구원을 유적 안으로 데려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명의 전투 전력을 빼고 들어간다는 의미이니까. 그만큼 칠성문은 장린에 대한 믿음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 확실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장린은 3등급 모래시계문에 몸을 던졌다. 목숨을 걸더라도, 연구를 마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장린의 도전은 값진 결실을 보았다. 유적에 들어온 모든 이들의 죽음이란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영상으로 남기는 장린의 표정에 그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내 예상대로 진실은 이곳에 있었다. 이곳, 3등급 모래시계문 안의 세계는 동물원도, 온실도 아니었다. 이제껏 우리가 마주한 유적이 동물원이라면, 이제부터 우리가 마주할 곳은 괴물의 둥지다. 이제까지 악어를 보기 위해 동물원에 갔던 자들은 악어가 우글거리는 밀림에 들어온 셈이다.

대신 장린은 다른 것을 우려하고, 두려워했다.

-부디 인류가 사는 세상이 괴물들의 둥지가 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 * *

“……한다.”

호령,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영상이 멈췄다.

호령을 통해 장린이 남긴 영상의 내용을 알게 된 좌중은 고요했다.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정리 좀 해 보자고.”

이런 혼란 속에서 말을 꺼낸 건 역시 김재범이었다. 이쯤 되면 그의 혓바닥을 인정해 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그러니까 모래시계문을 만든 어느 외계인 비슷한 집단이 인류를 괴물 판으로 만들겠다, 이거지?”

깔끔한 정리였다.

그런 김재범의 정리에 이강우가 반문했다.

“김재범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강우, 그에게 지금 상황이 나름의 기회였다.

‘기회가 무르익었다.’

불사황제 야크센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바츠무 족에 대한 존재를 인지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솔직히 안 맞았던 퍼즐이 맞아떨어지긴 합니다.”

한편 김재범은 이강우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그래도 지식인 축에 속하고, 본인 스스로도 연구가인 김재범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게, 유적에서 몬스터나 식물로부터 채취 가능한 독이 굉장히 단순합니다. 원래 독이라는 건 생태계의 섭리에 따라서 진화와 변화를 거듭하는데, 유적의 독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장린 학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부분이 설명이 됩니다.”

김재범은 이후 독에 관련된 지식을 길게 늘어 놓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강우는 그런 김재범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출문의 확보입니다.”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됐지만, 포식자 팀이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바뀌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더욱 본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 중요한 정보를 유적 밖으로 가져가야 할 역사적 사명감이 생겼으니까.

“플랜 A로 움직입니다.”

플랜 A.

몬스터의 개체 수를 차츰 줄이면서, 상황을 유적 사냥꾼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작전이다.

여기서 김재범이 의견을 제시했다.

“당분간 장린 학자의 연구결과를 검토해도 되겠습니까?”

장린은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결과를 따로, 귀중하게 안전한 곳에 보관해두었다. 김재범은 그걸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문제는 김재범이 중국어를 모른다는 것.

“번역을 위해서 호령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김재범과 호령은 귀중한 전력이다. 자료 분석도 중요하지만, 그 둘이 전력에서 빠지는 건 팀을 위협하는 일이다.

“하루 3시간만 허용하겠습니다. 또한 식사 시간 전후로 1시간씩만 허락합니다.”

이강우가 단호하게 커트라인을 제시했다.

물론 이강우의 능력이라면, 그 둘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몬스터 사냥을 지휘할 수 있다. 좀 과장하면, 나머지는 이강우에게 도움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거나, 판단을 하면, 애초에 팀 포식자를 만든 이유가 없다.

누구 한 명이 뛰어나다고 나머지가 그 한명에게 무작정 기대는 건, 팀이 아니다. 그냥 무리일 뿐이지.

이강우는 팀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커트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고, 김재범은 받아들였다.

“남은 시간 동안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재범의 그 말에 모두가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열심히 할 테니까 이번에는 과자 말고 든든한 거 먹으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어진 김재범의 말에 각오를 다진 이들이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

김재범, 여러모로 대단한 혓바닥의 소유자였다.

* * *

인류 문명의 운명이 걸린 전쟁!

소름이 끼칠 만큼 무거운 진실을 알게 됐지만, 포식자 팀은 그 무게감에 휘둘리지 않았다.

‘우리는 부품이다. 본인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돼.’

‘무리할 필요도 없고, 무리해서도 안 된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백전노장.

거듭된 유적 사냥 속에서 포식자 팀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연마를 마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대장만 따라가면 돼!’

이강우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심신을 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이강우는 그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총꾼들이 드론과 감시 로봇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면, 이강우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이 다시 한번 펼쳐지려고 했다.

-전방 50미터 내에 6등급 몬스터, 흑혈우(黑血牛)가 있습니다.

“위치 확인 완료. 10초 후에 전투에 돌입하겠다.

-카운트다운 시작. 10, 9, 8…….

6등급 몬스터 흑혈우.

이름 그대로 검은 피를 가진 놈으로, 외형은 거대한 황소와 흡사하지만 가죽 색이 검다.

또한 가죽이 굉장히 질기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상당한 편이다. 여기에 머리 달린 두 개의 뿔에는 독이 숨겨져 있다. 뿔이 아니라 독니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정도.

‘피가 별미지.’

이런 흑혈우의 특징은 그의 검은 피가 탄산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단맛도 있다.

피의 맛이 콜라와 흡사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름이 블랙 블러드 카우가 아니라, 콜라 카우라고 부를 정도였다. 더 놀라운 점은 보통 콜라는 건강에 안 좋다고 생각하지만, 흑혈우의 피는 굉장히 훌륭한 보양식이었다. 맛도 콜라보다 훨씬 깔끔했다. 콜라를 마시게 되면 남게 되는 특유의 끈적끈적함이 없다.

‘뿔칩에 어울리겠어.’

여기에 육질의 맛도 독특하다. 두꺼운 가죽에 비해, 탄산을 품은 혈액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기 자체는 굉장히 부드럽다. 그냥 무작정 포격 스타일로 잡기는 아까운 놈.

그렇다면?

-……2, 1!

‘헤이스트!’

도축 스타일!

이강우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만히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흑혈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펑!

흑혈우의 주변에서 묘한 폭발음이 터졌다. 감시 로봇이 설치해 둔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흑혈우는 그 폭발에 시선이 끌렸고, 이강우는 그 틈을 노려 흑혈우와의 거리를 좁히는 건 물론, 흑혈우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걸 피할 수 있었다.

흑혈우, 놈의 무시무시한 뿔과 접촉할 확률을 떨어뜨렸다.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이강우를 발견한 흑혈우가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강우가 좀 더 빨랐다.

흑혈우의 뒤쪽으로 접근한 이강우가 흑혈우의 뒷다리를, 발목을 아이스웨폰으로 만들어낸 장도(長刀)를 이용해 단숨에 잘랐다. 몸을 돌리려던 흑혈우가 발목을 잃자마자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흑혈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목이 잘린 채로 가공할 힘으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 지나간 이강우를 쫓았다.

이강우가 발을 굴렀다.

푸홧!

흑혈우의 주변으로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흑혈우는 그 흙기둥을 요리조리 피하지 않았다.

퍼억, 퍼억!

자신의 뿔을 앞세운 박치기로 흙기둥을 산산조각 냈다.

푸스스!

심지어 흑혈우의 뿔에 닿은 흙은 시커멓게 죽었다. 지독한 수준을 넘어가는 독성(毒性)이었다. 그렇게 흑혈우가 단숨에 세 개의 흙기둥을 부쉈을 때 그의 앞을 가로 막은 건 문이었다.

토문!

흑혈우는 그 토문의 등장에도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머리로 들이 박았다.

쾅!

단단한 토문이 추한 꼴이 됐고, 흑혈우가 토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흑혈우의 시선에 이강우는 없었다. 흑혈우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거친 콧김과 함께 주변을 보았다.

그런 흑혈우의 머리 위에서.

쉬익!

떨어진 이강우가 장도로 단칼에 흑혈우의 목을 내리쳤다. 흑혈우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이강우가 흑혈우의 머리가 잘려나간 절단면에 손바닥을 댔다. 손바닥에서 뿜어진 냉기가 단숨에 상처의 절단면을 막았다. 출혈이 멎었다. 피가 별미인 흑혈우 아닌가? 평소라면 이대로 피가 빠지길 기다리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냥 완료.”

그렇게 이강우가 사냥을 마쳤다.

* * *

구치소에 수감 중인 강희는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구치소에 있다고 해서 행동에 제약이 생기거나 그러지 않았다. 많은 감시의 눈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마법을 통해서, 그는 얼마든지 외부에 심어둔 자신의 수족들이 보내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 소식도 받았다.

‘이강우가 중국으로 갔다…… 누가 보더라도 3등급 유적 사냥을 위해서 갔겠지.’

이강우의 소식.

그가 팀 포식자를 이끌고 중국으로 갔다는 소식.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는 소식.

단편적인 정보들이었지만, 그 정보를 통해 이강우의 목적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칠성문이 보유한 3등급 모래시계문이라면…… 돌원숭이와 여의거북. 둘 중 하나와 싸우겠군.’

그리고 그 목적을 파악하는 순간 강희는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일천의 몬스터 군단을 이끌었던 기생망고거북의 오리지널인 여의거북과 단신으로 이스마할 제국을 무너뜨린 돌원숭이. 과연 이강우가 불사황제의 도움 없이 놈을 해치울 수 있을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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