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9화 (49/66)

49화. 3등급 모래시계문

한기가 맴도는 동굴 속. 그 동굴 안에 마련된 널찍한 공동 안에 한 사내가 바윗덩이 하나를 의자 삼은 채 앉아 있었다.

그런 사내의 주변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덩이들이 휘휘, 움직이며 전구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덕분이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도 사내의 외모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사내는 괴상했다. 피부색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몸뚱이는 비쩍 곯아 뼈와 살가죽만 보였다. 여기에 머리털은 물론 눈썹을 비롯해 온몸의 털이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사내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노인은 아닌 듯하나, 젊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니, 사내의 꼴을 보면 나이를 가늠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런 사내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구멍 안으로 드리운 어둠이 칠흑 같았다. 퀭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윽고 사내가 눈을 떴을 때!

사내의 눈동자는 뱀의 눈처럼 세로로 갈라진 채 번쩍였다.

“야크센!”

사내는 말을 씹어 뜯듯 뱉었다. 사내의 뒤틀린 심기가 곧바로 사내의 주변을 맴돌던 푸른 불꽃에 전달됐다.

휘이이이!

잠잠하게 사내 주변을 배회하던 불꽃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동굴 안을 쉴 새 없이 헤집고 다니는 불꽃들은 귀화(鬼火), 그 자체였다.

심지어 화르르, 화르르 불꽃이 내뱉는 울음은 맹수의 울음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스산했다.

그때 한 사내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불꽃 사이를 헤집고 등장하는 사내는 동양인이었다. 실처럼 가는 눈, 사각 턱 그리고 짙은 눈썹을 가진 대머리 사내. 사내는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해골 같은 사내 앞에 납작 엎드렸다.

“마스터, 즈믄나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즈믄나래.

그 단어에 해골 같은 사내, 이바노프는 더 크게 분노했다. 그 분노를 머금은 푸른 불꽃들이 펑펑! 폭발하며 제 몸집을 부풀렸다. 불기둥이 사방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광경 속에서 이바노프가 읊조렸다.

“당장 놈을…… 그놈을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그 읊조림에 엎드린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길, 자신의 주인이 분노를 삼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런 기다림은 통했다.

이바노프가 주먹을 움켜쥐었고, 날뛰던 불길들이 사그라졌다. 불꽃이 사라지자, 어둠만이 차올랐다. 그 어둠 속에서 이바노프가 두 눈을 감은 채 명령을 내렸다.

“즈믄나래와 연결하라.”

* * *

구속영장이 청부 된 상황, 검찰 역시 구속기소 의지가 분명하고, 이 모든 게 검찰의 의지를 초월한 정부의 의지인 상황.

그런 상황에 놓인 강희가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자택에서 머무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이미 즈믄나래 길드 업무는 손조차 댈 수 없는 처지였고, 변호사를 제외한 누군가를 만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루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지루한 나날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뒤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이 터지는 순간, 그와 관련된 모든 상황을 보고받은 강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왔구나.’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다.

‘이강우, 네 녀석이 기어코 불사황제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구나!’

야크센.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린 자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원수들의 권능인 마법을 통해 불사의 힘을 얻은 몰락한 제국의 황제!

그가 드디어 깨어날 준비를 마쳤다. 자신의 복수를 행하기 위해,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린 종족의 살점을 뼈째로 씹어 삼키기 위해 직접 이 현세에 등장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준비가 끝났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몇 번 있었다.

불사황제, 말 그대로 불사의 힘을 가지게 된 야크센은 끝없이 복수를 시도했으니까.

하지만 불사황제의 존재를 오롯하게 받아들인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강우는 그 과정에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불사황제의 모든 것을 이강우가 오롯하게 소화하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대로 첫 발은 내디딘 이상, 뒤돌아갈 길은 없다.

‘불사황제가 오롯하게 이 세계에 현신한다면, 그런 그를 처지한다면 더 이상의 악몽은 없다.’

기다리면 분명 결과가 나올 터.

때문에 강희는 이강우가 첫 발은 내디딘 사실에 조금의 아쉬움도 품지 않았다.

‘안대욱 암살에 실패한 건 아쉽지만.’

하지만 안대욱 암살이 실패한 건 생각보다 속 쓰린 일이었다.

안대욱은 위스프와 강희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물증만 없을 뿐, 심증은 굳어 있을 터. 그런 그가 위스프의 서열 3위의 단독 암살의 타깃이 됐다.

당연히 안대욱은 강희를 더더욱 의심할 것이다. 아니, 이제 의심의 수준은 넘어섰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일을 끝내지 않을 각오로 덤벼들 것이다.

안대욱은 충분히 위협적인 인간이다.

그런 그가 살아남았다는 건 강희에게 있어서 외면할 수 없는 불안 요소였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안대욱의 암살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

‘어쩔 수 없지. 그는 살려두는 수밖에.’

더 중요한 일이 비무장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필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평화였다.

‘이제 한국에는 평화가 필요할 때군.’

평화.

가장 확실한 진정제이자, 환각제다. 평화에 취하면,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진다. 2015년 이후 찾아온 평화를 모두가 당연히 누리며, 그 평화에 안주했던 것처럼.

‘내 후임으로는…… 안중현이 올라오겠군.’

이제 강희는 무대에서 퇴장을 할 때가 왔다는 의미다.

‘다음 즈믄나래 빌딩에 오를 때가 기대 되는군.’

물론 잠시 퇴장할 뿐이다.

클라이맥스는 결국 강희의 무대가 될 테니까.

* * *

이강우는 상의를 탈의한 채 거울 앞에 선 채로,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죽을 뻔했지.’

볼코프의 허를 노린 공격에 허를 찔렸다. 가슴도 찔렸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이강우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고, 그때의 감촉은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 후의 기억은 없었다.

단지 이야기만 들었다.

이강우가 손으로 볼코프의 얼굴을 잡고, 그를 단숨에 미라 꼴로 만들었다고. 채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목격자는 그녀뿐이었고 동시에 그녀는 그 사실을 이강우에게만 말했다.

‘야크센.’

이강우가 아니라 야크센이 이강우를 움직였다. 이강우의 육신을 지배했다.

‘이런 의미였나?’

이제야 야크센이 했던 말의 의미를 그리고 야크센이 자신에게 권능을 준 이유를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이강우는 그릇이다. 야크센이 무수히 많은 세계를 넘나들며, 그 세계를 먹어 치우는 바츠무 족의 숙원을 방해하고, 종국에 바츠무 족 전부를 해치우기 위해 필요한 그릇.

이강우의 시선이 곧바로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이 손은 결국 야크센이 바츠무 족으로부터 빼앗은 힘이로군.’

더불어 야크센이 준 바츠무의 손은 본래 그의 능력이 아닌 바츠무 족, 마법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는 그들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이 이강우의 몸에 생겼다.

차근차근, 야크센이 원하는 형태로 이강우의 몸뚱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육체가 어느 초월적인 존재의 농간에, 수작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미 한 번 빼앗겼다는 사실이, 너무 소름이 끼쳐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츠무 족의 권능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모래시계문을 통해 강력하기 그지없는 괴물들을 세상에 흩뿌린다.

그렇게 흩뿌려진 몬스터들이 마력을 토해내고, 그 마력은 다시금 보다 거대한 모래시계문의 원동력이 되어, 보다 강한 괴물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 마법을 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마나 서클을 가진 마법사가 늘어날수록, 지구에 존재하는 마력의 양도 늘어난다. 마법사가, 몬스터가 세상에 늘어날수록 종말로 가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더 빨리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1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면, 그건 곧 세상의 종말이다.

그 무엇으로도 1등급 모래시계문 너머의 괴물을 처치할 수 없다. 때문에 1등급 모래시계문이 열리기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한다. 지구에서 수작을 부리는 바츠무 족들을 먹어 치우고, 그들이 마련한 장치들을 제거해야 한다. 종말로 가는 계단을 도중에 부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게 가능한 건 야크센밖에 없다.

‘나로는 부족해.’

볼코프와의 전투에서 이미 증명됐다. 이강우는 아직 부족하다. 볼코프를 상대했을 때 이강우가 좀 더 과감하고, 단호하고, 잔혹했으면 이야기는 쉽게 끝났을 것이다.

이강우는 주변 사람들, 숨이 붙은 사람들을 우려해 절망의 태양을 쓰지 못했지만, 야크센이라면 당연히 절망의 태양을 써서, 볼코프가 무얼 하든 간에 시름시름 피가 빨려 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야크센이라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상대하는 게 무리다 싶으면 그냥 도망쳤을 것이다.

결국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야크센에게 이강우는 자신을 주는 게 옳다.

야크센이 이강우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 한 말의 의미도 그것이다. 세상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의 힘이, 이강우가 아니라 야크센의 존재가 필요할 테니까.

‘빌어먹을.’

평생 무기력함에 몸부림쳤다. 그야말로 발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무기력함은 처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빌어먹을 인생이라니까. 아버지 때부터 내 인생은 재수가 없었어.’

쉽사리 머릿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동안 수십 번 넘게 각오를 다졌는데, 그 각오를 뛰어넘는 고난이 등장했다.

“후우!”

그런 이강우의 눈에 자신의 머리에 반짝이는 고리들이 보였다. 이미 개방된 6개의 고리 그리고, 남은 3개의 고리 중 한 개의 고리가 절반 이상 빛나고 있었다.

‘68퍼센트였나?’

현재 7서클을 68퍼센트까지 개방했다.

볼코프, 그의 무시무시한 마법 능력, 7서클이나 다름없었던 마법 능력은 오로지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힘이 아니었다. 바츠무 족의 권능을 이용해 깃든 힘이었고, 이강우는 그 힘을 바츠무의 손을 통해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게 확실한 답이다.

분명한 건 이강우가 세상의 종말을 막든, 야크센이 종말을 막든, 머리 위의 고리가 지금 이 수준 그대로라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종말을 막기 위해서 이강우는 더 먹어 치워야 한다. 폭발적으로, 미친 듯이, 게걸스럽게, 탐욕스럽게 포식을 해야 한다.

다른 건 없다.

정치적인 부분, 경제적인 부분…… 솔직히 고민한다고 이강우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강우가 할 수 있는 역할, 이강우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정해졌다.

이강우가 벗어 놓은 상의를 입었다. 상의를 입으면서, 이강우는 불사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워라. 그리하면 네 몸을 양분 삼아 자라난 나의 권능들이 너의 충실한 종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 아주 뒤룩뒤룩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주마.”

세상은 복잡해졌지만, 이강우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해졌다.

* * *

볼코프의 전경련회관 빌딩 테러 사건이 남긴 여파는 컸고, 몇날며칠이 지나도 그 테러 사건의 흔적은 지워질 기미가 없었다.

그 소란 속에서 한때 대선 핫이슈였던 즈믄나래 비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용하게 진행됐다.

당장에라도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인 강희를 화형대에 올릴 기세였던 검찰은 강희가 자신들이 제시한 협상카드를 순순히 받는 순간, 조용한 일처리를 시작했다.

일단 강희가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탈세를 비롯해 많은 범죄 행위를.

물론 그동안 강희가 현 정부와 야당, 여당을 가리지 않고 펼쳤던 비리 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는 조건이 동반됐다.

정부는 곧바로 준비한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즈믄나래의 비리 사건을 기점으로 길드라는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현 정부가 나서서 길드의 비리를 척결하고, 새로운 길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대선을 준비하는 여당은 그걸 대선 슬로건으로 썼다.

길드를 개혁하겠습니다! 여당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현 정부가 길드 중에 압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즈믄나래를 제대로 터는 모습을 전국에 보여줬기에, 그 슬로건의 위력은 어느 때보다 효과적이었다.

여론이 반전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즈믄나래 2대 길드 마스터 자리에 안중현이 선임됐다.

그동안 정치권을 상대로 알아서 고개를 숙였던 안중현의 노력이 빛을 발휘했으며, AU그룹 회장인 채병호 회장이 힘을 실어줬고, 결정적으로 즈믄나래 내부적으로 반대 의견이 적었다.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상 즈믄나래는 강희를 제외하면 실권을 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도리어 안중현에게 기회가 됐다. 굳이 실권이라면, 길드를 대표하는 마법사들이 쥐고 있는 셈인데, 즈믄나래에 소속된 5서클 이상 마법사들은 전부 안중현의 편이었으니까.

블랙 스택이 이 과정에 대해서 유감을 표명했지만, 유감 표명만 할 뿐,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다.

야당 역시 즈믄나래를 이용한 정치 공세 대신, 전경련회관 빌딩 테러 사건을 정치 공세를 위한 주요 소재로 삼았다. 정부 그리고 마법청의 무능력을 열심히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즈믄나래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식었다.

그렇게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이 정쟁(政爭)을 시작할 무렵, 세상을 위협할 사건이 아프리카에서 터졌다.

* * *

투투투투!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사막 위로 다섯 대의 헬기가 거친 날갯소리를 토해내며 지나갔다.

헬기 안의 분위기는 다급했다.

“정신 차려!”

헬기 프로펠러의 소음 때문에 사람이 내뱉는 육성이 상대방에 들릴 리 만무했지만, 소리를 지르는 자는 악을 쓰며 계속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내뱉었다.

후욱! 후욱!

말과 함께 깍지 낀 두 손으로 누워있는 사내의 가슴은 쉴 새 없이 누르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이었다.

그 광경을 다른 이들도 심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 명은 차마 동료가 죽어가는 광경을 직시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채로 마이크를 통해 헬기 조종사에게 말을 걸었다.

“베이스캠프까지 얼마나 걸리지?”

“빨라도 30분은 걸립니다.”

“젠장!”

쓴소리가 나왔다. 헬기 조종사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다그치는 듯한 그 소리가 마음에 들 리 없지만, 이 심각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고운 소리였다. 이런 일을 자주 겪었던 헬기 조종사는 동료의 죽음 앞에서 이성을 잃는 이들을 적잖게 봤으니까.

그리고 이런 투정과 불만이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퍼진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의법사가 먼저 죽다니.”

“의법사를 보호했었어야 했어. 의법사만 있었어도…….”

헬기 조종사의 예상대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지기 시작한 불만을 한 사내가 혓바닥으로 단숨에 잘랐다.

“하필이면 의법사가 당한 게 아니야. 의법사가 먼저 공격당한 거지.”

말을 내뱉는 사내는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침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내는 명품 손수건으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섬세하게 닦고 있었다. 손바닥의 손금 사이에 낀 핏자국을 조심스럽게 제거했고, 손톱 사이도 깨끗하게 닦았다.

더불어 사내의 손은 사내의 손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섬섬옥수라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칼을 보는 듯했다.

그런 사내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심폐소생술을 하는 사내만 정신없이 움직였고,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내가 다른 이에게 말했다.

“교대하도록.”

주변 이들은 사내의 말을 곧장 따랐다. 반문 없이, 의문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새로운 이가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을 때, 예쁜 손을 가진 사내가 헬기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사막을 바라봤다.

‘6서클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 핵폭탄 정도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건데…… 기어코 다시 인류가 괴물들에게 따라잡혔군.’

사내의 이름은 버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 * *

유엔 휘하에는 마법부란 기구가 존재한다.

유엔 가입국이 자국 내에 설치한 마법 관련 단체들은 예외 없이 이 마법부에 가입해야 한다.

마법부가 마법 그리고 모래시계문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이런 마법부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마법과 모래시계문에 따른 분쟁을 막는 것, 특히 강대국들 사이의 분쟁을 막는데 주력한다. 강대국들이 마법에 국가의 사활을 건 상황에서, 마법으로 인해 생긴 충돌은 곧 국가 간의 충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건 곧 전쟁의 시발점이 될 확률이 높았으니까.

두 번째는 마법 약소국들의 지원이었다. 약소국에 등장한 몬스터를 제거하고, 그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모래시계문을 처분해주는 것 역시 마법부의 역할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역할은 마법과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마법부가 하는 일은 많았지만 마법부가 주력으로 하는 일은 세 가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일은 결과적으로 세계 평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일들이었다.

때문에 마법부의 역할을 잘 아는 이들은 마법부를 표현할 때 이런 표현을 쓰고는 했다.

“마법부가 필요 없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세상이다. 반대로 마법부가 가장 바쁜 날이, 세상이 종말에 가장 가까운 날이다.”

그 마법부가 지금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부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바쁘게 활동하던 마법부 간부들이 48시간만에 전부 소집됐다.

긴급 소집이었다. 마법부가 창설된 이후 다섯 번을 넘지 않는 긴급 소집이 이루어졌다.

긴급회의는 유엔 마법부 부장 마르쿠스가 회의장에 참석하는 순간 곧바로 시작됐다.

“아프리카에 등장한 3등급 몬스터의 조사 및 사냥을 위해 파견된 마법사 중 현재까지 사망자는 스물다섯, 부상자는 열세 명입니다. 6서클 마법사 두 명과 5서클 마법사 일곱 명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회의 시작부터 심각한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6서클 마법사의 죽음 앞에서는 몇몇 이들은 이미 통보를 들었음에도 침울한 기색을, 암담한 안색을 보였다.

이야기를 들은 마르쿠스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버튼의 보고서는 도착했나?”

“사안이 급해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답니다. 때문에 버튼이 화상 전화를 통해 직접 내용을 전달해주겠다고 합니다.”

“버튼과 연결됐습니다.”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상황이 빠르게 맞물렸다.

팟!

회의장 한쪽 벽면에 마련된 모니터들 중 가장 큼지막한 모니터가 켜졌다. 얼굴이 보였다. 덥수룩한 갈색 수염과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30대 초반의 백인 사내가 보였다. 백인 사내는 화상통화용 카메라를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버튼, 연결됐네.”

마르쿠스가 한마디 했다.

그제야 화면 속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녀석…… 현재 가칭으로 모래군주라 칭하고 있는 녀석과 일곱 차례 교전을 치렀습니다.

거두절미, 단도직입.

인사 같은 건 없었다.

영사엥 뜬 사내 버튼란 본명보다는 가위손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마법부 간부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이 맨손으로 몬스터를 거침없이 잘라내는 것처럼, 사람을 상대할 때도 거침이 없는 자였으니까.

-알제리에서 세 번, 리비아에서 두 번, 니제르에서 두 번입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싸웠다고 말하게. 그래서 결과는?”

마르쿠스는 그런 가위손 버튼의 말을 더 짧게 잘랐다. 1초가 아깝다는 의미.

-저는 놈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적막감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버튼이 못 잡는다고?’

‘가위손이 못 잡는다면, 누가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역시 리볼버를 포함시켰어야 했나?’

가위손 버튼은 세계를 대표하는 마법사다.

동시에 그는 몬스터 사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유럽의 가위손, 아시아의 대마도사, 북중미의 리볼버!

이 셋이 잡지 못하는 몬스터는 다른 그 어떤 마법사도 잡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버튼이 포기선언을 한 것이다.

-놈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환수 타입인데, 적어도 제가 가진 6서클 마법으로는 제대로 된 데미지를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곧바로 나왔다.

환수 타입인데,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못 잡는 게 당연했다.

그 설명을 들은 마법부 간부들은 당혹감보다는 오히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올게 왔군’

‘기어코…….’

마법에 있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이기에, 그들은 오히려 이런 날이 올 것이란 예상을 미리부터 했으니까.

그 사이 마르쿠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핵이 통할 것 같나?”

그 질문에 버튼은 잠시 고민한 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3등급 모래시계문이 그라운드제로 레벨인 걸 고려한다면, 확답은 못하겠습니다.

핵폭탄, 인류가 만든 그 무시무시한 폭탄으로도 처치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녀석이 자리 잡은 사하라사막은 너무 광활합니다. 녀석을 그곳에서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남은 건 유인뿐인데…… 쉽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마법부 간부들은 물론 유엔과 각국의 관계자들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몬스터들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건 현대 병기의 물리력이 쉽사리 통하지 않는 환수 타입이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대우를 받는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환수 타입의 몬스터에게 유효한 데미지를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5등급 환수 타입의 몬스터를 상대로 3서클 마법이 효과적인 데미지를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런 논리라면 3등급 이상의 환수 타입의 몬스터에게 6서클의 마법도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 못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마법강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보다 상위의 유적 클로즈를 시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현대병기와 마법사들로 잡을 수 없는 환수 타입 몬스터의 등장은 국가붕괴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2015년의 악몽보다 더 심각한 악몽이 재림할 가능성은 일반인들의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결국 이런 날이 왔군.’

‘몬스터에게 추월을 당하는 날이 왔어.’

그나마 이제까지는 이러한 도전이 나름 유효했었다.

5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4등급 모래시계문도 클로즈했다.

현실에 등장하는 몬스터들보다 더 높은 등급의 모래시계문을 클로즈하고, 마법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3등급 모래시계문의 클로즈는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클로즈는커녕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적은 것과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가지는 가치가 너무 크다는 것. 3서클, 4서클 마법사들도 귀하지만,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국력이 되어 버렸다는 것.

결국 그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 이제는 몬스터가 인류가 가진 마법력을 뛰어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더 이상 손익을 계산기로 두드릴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고맙네.”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7서클 마법사라도 7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버튼과의 대화가 끝이 났고, 마르쿠스는 곧바로 간부들에게 말했다.

“각국에 긴급으로 공문을 보낼 준비를 하도록.”

비상사태다.

다시 한번 2015년의 혼란과 악몽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최소한의 차선책을 유엔은 나름 준비해 두었다. 그걸 위해서 마법부가 존재했으니까.

그 대비책은 다름 아닌…….

“그리고 모든 클로저 라이센스 보유자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클로저 라이센스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방송 스태프들이 한 사내를 향해 허리 또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의 행동 끝에는 이강우가 있었다. 이강우는 자신을 향한 방송 관계자들의 인사에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때 이강우의 어깨를 하선우가 가볍게 두드렸다.

“방송 초보치고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선우의 모습에 이강우가 실소를 지었다. 실소 사이로 푸념을 뱉듯 말을 뱉었다.

“예전에는 하선우 씨처럼 인기가 있는 게 소원이었는데, 막상 이루어지니 미칠 지경이군요.”

하선우도 실소를 머금었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면 못하는 일이죠.”

그렇게 말없이 방송국 복도를 지나가는 그들 앞으로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유명 연예인들은 이강우와 하선우를 발견하자, 오히려 본인들이 먼저 와서 인사를 했다. 아쉬운 입장이 돼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그들이 이강우와 하선우 앞에서는 쉽게 자세를 낮췄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셀카와 사인을 요구했다.

이강우는 그 모든 과정이 꿈처럼 느껴졌다.

‘기분 좋은 꿈은 아니군.’

그다지 달갑지 않은 꿈.

‘어쩔 수 없지. 내 선택인데.’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건 다름 아니라, 볼코프의 테러 사건 이후 정부의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정부는 거듭된 테러 사건 앞에서 국민들의 공포심을 짓누를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이강우가 뽑히는 건 당연했다. 이강우는 외모만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강우의 매스컴 노출이 시작됐다.

여기에 하선우가 붙었다. 이미 유명세를 떨치는 하선우가 이강우에게 붙자, 매스컴에서는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 과정에 기름을 부은 건 안중현이었다.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내가 2대 길드 마스터가 됐지만, 즈믄나래 전부가 내게 협력하는 상황은 아니야. 그런 만큼 이강우, 네가 즈믄나래를 대표하는 마법사가 되어 내게 힘을 실어줬으면 하는군.”

안중현의 이강우를 대세로 만들고 싶었다. 대세가 되면 거슬러 오를 수가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처음에는 나름 기대도 있었다. 유명인이 되는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못 해 먹겠어.’

그러나 이 유명세는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았다. 이제 밖에서 밥을 사 먹는 것조차 마음 편히 하지 못했다. 채유리와의 데이트는 당연히 꿈도 꾸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일을 하면서, 하선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자신의 존재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남기고 싶어 하는 하선우의 마음을 이강우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이강우의 처지도 이제 다를 게 없었으니까.

언제 어느 순간 불사황제에게 육체를 빼앗겨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 속에서 그나마 이강우가 존재했다는 흔적이 이런 식으로 남는 건…….

‘유서는 나중에 써도 늦지 않아.’

이강우가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런 이강우의 감상에 젖은 마음을 단숨에 산산조각내준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이강우가 퇴근을 위해 마련된 자가용 안에 몸을 집어넣는 순간, 전화가 왔다.

-유엔 클로즈 라이센스 관리감독위원회입니다.

이강우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유엔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처음이다. 당연히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3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를 위한 프로젝트에 앞서서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3등급 유적 클로즈?

‘올 게 왔군.’

예상은 했다.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

‘그런데 왜 클로저 라이센스 보유자들에게 이런 연락을 하는 거지?’

단지 클로저 라이센스, 즉 유엔이 나서서 이런 일을 주도할 줄은 몰랐다.

“말씀하시죠.”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한국 마법청을 통해 공식으로 전달될 겁니다. 그 전에 상황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3등급 유적 클로즈의 목적은 3등급 몬스터 사냥이 아닌 7서클 마법 아티팩트 확보입니다. 아티팩트를 확보하고, 문을 닫는 게 우선입니다.

‘사냥이 아닌 아티팩트 확보 및 유적 클로즈. 이게 유엔이 클로저 라이센스를 만든 이유 중 하나군.’

상황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이강우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쳤다. 목소리도 다듬었다. 그 후에 진중하게 질문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몇 개를 해도 괜찮습니다.

“유엔의 지원 하에 3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 하는 게 맞습니까?”

-예.

“그럼 유적에서 얻은 전리품은 어떻게 처리 됩니까?”

-클로저 라이센스에 나온 조건 그대로 처리됩니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이강우가 꺼진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의외로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기회다. 유엔이란 거대 집단의 지원 아래에 3등급 모래시계문을 포식할 수 있는 기회.

중요한 건 각오뿐.

그때 이강우의 머리를 두드리던 스마트폰이 짧은 진동과 함께 알림음을 토해냈다.

이강우가 스마트폰을 바라봤고,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 중국 음식 전문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주 날 잡았군.’

역시 이강우의 몸에는 꿀이 발린 모양이다.

* * *

예전 주성륜과 대화를 나눴던 중화요리전문점에 도착했을 때, 이강우가 안내받아 간 곳은 음식점 뒤편에 위치한 창고였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감춰진 비밀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잘나가는 중국집은 죄다 지하에 뭔가 거대한 비밀을 숨기는 게 요즘 트렌드인가?’

예전 만석루의 지하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광경에,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철저한 보안을 거치고 도착한 비밀의 방에는 이미 세 명이 대기 중이었다. 두 명은 마련된 식탁 앞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주성륜의 뒤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강우의 시선은 일단 서 있는 사람을 향했다.

‘군인이군.’

여자였다.

머리는 짧은 단발머리였고, 키가 제법 컸다. 눈에 띄는 점은 다부진 몸이었다. 여자라기에는 체격이 꽤 좋았다. 외모는 곱상했지만, 화장을 하지 않은 듯, 주근깨가 살짝 피어오른 걸 비롯해 얼굴 곳곳에 투박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눈에 확 들어오는 건 그런 외모가 아닌 자세였다. 서 있는 자세에서 뿜어지는 절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군인이네.’

군인 출신인 이강우가 그 절도의 깊이를 모를 리 없다. 어지간한 군생활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자세였다.

이윽고 이강우가 고개를 돌려 다부진 여성과는 대조적인 연약한 사내를 바라봤다.

‘류복희.’

기예르모의 매니저. 그가 주성륜과 같은 테이블을 차지한 채 앉아있었다. 이강우는 그런 류복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주성륜이 곧장 말을 꺼냈다.

“둘은 구면이지?”

“예?”

하지만 갑작스레 튀어나온 중국어에 이강우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리 만무했고, 주성륜이 곧바로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여자 군인이 열중쉬어 자세를 한 번 취한 뒤, 곧바로 차렷 자세로 돌아왔다.

그러자.

“둘은 구면이지?”

주성륜의 말이 잘 들렸다.

‘마법을 아주 다이나믹하게 쓰시는 분이시군.’

통역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이강우가 실소를 지으며 여자를 한 번 바라봤다.

“예, 저번에 만나서 좋은 걸 얻어먹었습니다.”

“잘 드셔서 기분이 좋군요.”

“최근에 좋은 정보도 얻었죠. 큰 도움은 안 됐지만. 그런데 설마 두 분이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말과 함께 이강우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툭툭 두드렸다.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걸 제스처로 표현했다.

사실 지금 기분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었다.

‘굳이 기분 좋은 티를 낼 필요는 없지.’

류복희를 완벽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이 혼란 속에서 그나마 자신을 도와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 세계에 찾아온 위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 그와 칠성문이 손을 잡았다는 건, 칠성문 역시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바츠무 족과 맞서 싸운다는 의미다.

‘더욱이…….’

물론 그렇다고 칠성문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이강우, 그는 볼코프와의 일전 이후 야크센의 기억을 봤고, 그 기억을 통해 지금 자신의 세계를 찾아온 간악한 무리들의 정체와 진면목을 알아냈다.

‘바츠무 족은 마법을 이용해 침략하고자 하는 문명의 지도자들을 먼저 포섭한다.’

바츠무 족.

마법이란 신비한 힘을 쓰며, 그 마법을 통해 세상과 세상을 넘나드는 그들은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대상의 문명을 침략, 몰락시킨다.

방법도 간단하다.

그들은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 된다. 그럼 그 안의 괴물들이 뛰쳐나와 알아서 모든 걸 정리한다.

그렇게 되면 그 문명은 흔적으로만 남아, 유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다시 필요할 때 문을 통해 몬스터를 불러내는 것을 반복한다.

문제는 문이 열리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고, 그 환경을 조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강우는 야크센의 기억을 통해 다양한 세계가, 문명이 무너지는 과정을 봤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우는 없었다. 모래시계문을 여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했고,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바츠무 족은 마법을 이용해 다양한 수작을 부렸다.

세계를 구하는 영웅인척 연기를 하고, 그 문명의 지도자를 포섭하거나, 살해하거나, 변장을 하거나. 때로는 바츠무 족이 제시하는 불로불사라는 거짓에 넘어가 세상이 지도자들이 그 세상을 통째로 넘기는 경우도 있다.

지금 지구도 다를 건 없었다.

분명 권력자들 중 일부는 바츠무 족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들과 손을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한 이유였다.

이런 이강우의 반응에 류복희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의 적은 이 세계에 존재치 않는 미지의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안 유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 보안을 여기서 푼다는 건 의도가 대체 뭡니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강우가 자세를 고쳤다. 이강우의 모습을 본 류복희가 말을 이어갔다.

“현재 사하라 사막에 3등급 몬스터, 모래군주가 등장했습니다.”

“모래군주?”

“환수 타입의 몬스터로, 모래를 수족처럼 부립니다. 본인 스스로를 모래를 이용해 형상화할 수도 있고, 다수의 몬스터를 모아 몬스터 군단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분열 능력입니까?”

“좀 더 고차원적인 능력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래로 군단을 만듭니다.”

“군단을 아무리 처치해봤자 본체에는 영향을 못 줍니까?”

“본체로 파악되는 개체와 전투를 했습니다만, 6서클 마법사가 두 명이 죽는 피해만 남았습니다. 결정적으로 몬스터 조사반 총책임자였던 버튼이 공식적으로 사냥 포기 선언을 했습니다.”

버튼!

그 이름에 이강우가 입을 다물었다.

‘가위손이 포기해?’

리볼버, 대마도사와 함께 3대 최강의 마법사로 평가받는 가위손이 사냥을 포기했다는 건, 지금 마법사들 중에 놈을 잡을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는 의미다.

마법으로 잡을 수 없다.

그런데 환수 타입이다?

‘맙소사.’

핵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는 의미. 그게 아니라면 7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확보해야 한다. 그게 그나마 시도해볼 수 있는 가장 나은 해결책이다.

‘모래라니…….’

심지어 이강우도 이런 상황에서 쉽사리 나설 수 없다.

‘실체가 없는 환수 타입에 붉은 뿌리와 절망의 태양이 먹힐까?’

모래로 만들어진 괴물에게 피가 있을까? 놈의 몸을 벤다고 해서 절망의 태양이 놈이 가진 마력과 피를 흡수할 수 있을까? 감히 단언할 수 없는 상황. 당연히 치명적인 문제다. 이강우에게 붉은 뿌리와 절망의 태양을 뺀다는 건, 어마어마한 페널티나 마찬가지이니까.

이강우가 이 정도인데 다른 마법사들이 느끼는 아득함은 더 어마어마할 수밖에.

유엔이 긴급하게 나온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클로저 라이센스를 모으는군,’

그리고 유엔이 긴급하게 나선다면, 결국 이강우도 나서야 한다.

이미 대한민국의 영웅이 되어버린 이강우가 여기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다. 비단 이강우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에 있는 최강의 마법사들이 자유로울 수 없다. 리볼버를 비롯해 세계를 대표하는 마법사들이 7서클 마법 아티팩트 확보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사활이 걸렸으니까.

모래군주를 막지 못하면, 막을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류가 위험하다. 지금은 사하라 사막이지만, 그 사막을 시작으로 점차 영역을 넓힐 것이다. 그 영역 안에서 모래시계문이 등장할 테고,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면 더더욱 강한 놈이 나타날 터.

그렇게 되면 2015년보다 더 한 악몽이 올 것이다.

류복희가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한 이유, 주성륜과의 관계를 공개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는 보다 확실한 전면전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조직을 만들어 대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

“대충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원하시는 건?”

이강우가 나름 각오를 다지고 말했다.

“7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확보하시면, 우리 칠성문에 잠시 동안 대여해주십시오.”

그런데 그런 이강우의 각오를 산산조각 내는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나왔다.

‘잘못 들었나?’

지금 목숨 걸고 가져온 7서클 아티팩트를 빌려달라고? 이강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 표정을 본 주성륜이 말을 이어갔다.

“이미 우리 칠성문은 7서클 아티팩트를 확보하고, 룬 코드를 해석, 복제품 양산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뭐?’

칠성문이 3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 했다는 게 사실인가?

“누가 확보했습니까?”

대답은 류복희의 입에서 나왔다.

“괴식가가 했습니다.”

“어떻게?”

이제는 반말이 나올 지경이다. 그 정도로 놀랐다는 의미.

“괴식가는 이제까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유적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언제나 혼자서 유적을 클로즈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가진 노하우는 이강우 씨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결국에 그는 3등급 유적에서 몬스터와 전투 없이, 아티팩트만을 가져오는 게 가능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괴식가 기예르모.

그의 괴팍한 유적 사냥 인생이 기어코 사고를 터뜨렸다.

이강우가 표정을 바꿨다.

“그럼 정말 양산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양산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걸렸습니다. 마법사는 양산할 수 없으니까요.”

7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구하기 위해 6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투입하는 건 위험하다. 희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7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많아도 그걸 써 줄 마법사가 없으면 무용지물 아닌가?

“아티팩트를 확보하더라도 대체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진지하게 이 시나리오를 받아들였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우리 쪽에서 양산한 복제품을 드릴 겁니다. 그걸 확보한 7서클 아티팩트처럼 위장하시면 됩니다.”

“복제품?”

“아직 룬코드 분석이 끝나지 않았기에 확답은 드리기 힘듭니다. 그러니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복제품이 완성되면 대여를 해주십시오.”

이 말.

만약 정말 이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획기적인 반격의 도구를 얻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이강우는 고민했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마법사의 양산이 힘들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름 마법사의 성장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강우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걸 계속 비밀로 삼키고만 있는 게 정답일까? 차라리 칠성문에게 이 방법을 넘겨서 보다 강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정답 아닐까?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이 나을까?

이강우가 고민하는 사이, 주성륜이 뒤에 있던 여성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전히 절도 있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여성이 옆에 있던 가방을 든 채로 뚜벅뚜벅, 절도 넘치는 자세로 걸어왔다.

“그럼 이제는 거래를 할 차례군요.”

저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

“이름은 호령. 현재 6서클 마법사로 칠성문의 비밀병기이자, 공식적인 마법사 기록이 없습니다. 때문에 한국 내 활동에는 큰 제약이 없을 겁니다. 물론 유적 사냥은 조금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과 함께 호령이라 불린 여인이 가방을 열었다.

‘헉!’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나스톤이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강우는 분석마법을 쓰지 않았다. 보면 숫자 때문에 눈이 아플 것 같았으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일단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꺼냈다.

“그녀를 데리고 국내에 있는 유적 사냥은 불가능합니다.”

“중국 내에 유적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클로저 라이센스가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내가 중국으로 가면 정치적으로 여파가 적지 않을 텐데요?”

“아니죠. 지금 당신 덕분에 지금 칠성문은 한국 정부와 관계가 좋습니다. 우리 관계에 토를 달 블랙 스택의 한국 지부인 즈믄나래를 이강우 씨가 손에 쥐지 않았습니까?”

“길드 마스터는 제가 아니라 안중현 씨입니다.”

“실례했군요.”

주성륜이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어갔다.

“우리 쪽은 7서클 마법사만 등장한다면…… 아니, 이제 그런 걸 언급할 필요가 없겠군요. 공공의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우리 쪽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 모래시계문은 넘쳐 납니다. 중요한 건 이강우 씨의 의사입니다. 이강우 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공개적으로든 혹은 비공개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한국 정부는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답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시간은 얼마 없습니다. 유엔이 이미 보낸 공문을 정부 관계자들이 검토 중일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 다른 유적 사냥보다는 곧바로 3등급 유적 사냥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3등급 모래시계문이 있긴 합니까?”

“미국에 2개, 중국에 2개, 유럽과 러시아에 3개가 확보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모래시계문 비밀리에 확보한 결과물이지요.”

주성륜 말대로 여기서 이강우가 개인적인 유적 사냥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결국 마법청 허락 없이는 문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7서클까지 남은 퍼센티지를 떠올렸다.

‘앞으로 약 100만 포인트 정도 섭취하면, 7서클 개방이 가능하다.’

70퍼센트 근처에 돌입했다. 남은 30퍼센트 정도는 100만 포인트 넘는 마력을 섭취하면 된다.

5등급 유적 하나에서 섭취 가능한 마력 포인트가 20만 포인트 안팎이니, 5등급 유적 5번만 클로즈하면 된다. 휴식일을 포함해서 약 8개월 정도 걸릴 터.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간을 가늠할 때가 아니다. 바츠무 족은 자신들의 계획을 상당수 진행했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7년이 넘었으니 어지간한 건 다 했을 터.

그러니 일반적인 방법으로 강해지는 건, 그들도 예상하는 바일 것이다.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필요하다.

변수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 혹은 무모한 오판으로 만들어진다.

‘모 아니면 도.’

이강우가 눈앞에 있는 상자를 닫았다.

“이 가방과 똑같은 가방 6개를 주신다면, 중국에 있는 3등급 모래시계문을 단독으로 클로즈해서, 7서클 아티팩트를 칠성문에 건네주겠습니다.”

그러면서 파격 제안을 했다.

그 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기에 그냥 멍하니 있었다.

툭!

이강우가 닫은 가방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소리를 냈다. 그 둘이 긴 침묵에서 깨어났다.

주성륜이 대답하려고 했다.

“그건…….”

“3등급 모래시계문의 클로즈, 가능하십니까?”

그런데 류복희가 말을 가로챘다.

이강우가 류복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을 생각이라면, 굳이 문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모래시계문에 들어가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 제가 남긴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레시피를 약소하나마 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럼 남는 장사 아닙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류복희가 대답하자, 이강우는 주성륜을 바라봤다. 누가 보더라도 칠성문의 일곱 별 중 하나인 주성륜이 높은 사람으로 보였으니, 최후 결정권은 그에게 있을 터.

그런 그는 류복희를 바라보더니, 후우!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팀은 어떻게 구성할 겁니까?”

“제 팀인 팀 포식자는 세계 최고입니다. 4등급 유적 사냥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호령을 포함시키겠습니다. 감시자이자, 도우미입니다.”

“좋습니다.”

주성륜이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호령이 가방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수갑으로 가방의 손잡이와 자신의 손목을 연결했다.

주성륜이 빈 식탁 너머로 이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6개 분량.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 부디 그게 좋은 일에 쓰이길 바랍니다.”

이강우는 옅게 웃었다.

“예,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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