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볼코프
“현재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강우는 스마트폰을 붙잡고 통화 중이었다.
-부탁하신 대로 의법사를 불러, 마법 치료를 시행했습니다. 덕분에 외상은 깔끔하게 치료됐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아직 의식은 차리지 못한 겁니까?”
-예.
“의사 소견이 어떻습니까?”
-외상은 치료됐지만, 넘어지면서 두개골에 골절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뇌에 충격이 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상처는 이제 없지만…… 의사 소견에 따르면 여기부터는 환자 본인의 역량에 달렸다고 합니다. 더 이상 의사 본인이 할 수 있는 치료는 없다고 했습니다.
통화 상대는 다름 아니라 총꾼 신영섭이었다.
“제 대신 일을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강우, 그는 강주영 중사의 모든 치료 과정에 나름의 힘을 썼다. 몸값 비싼 의법사를 고용했다. 마음 같아서는 김수애에게 모든 치료를 맡기고 싶을 정도.
그 이후 다시금 강주영 중사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총꾼 신영섭에게 자신 대신 상태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게 얻게 된 강주영 중사의 소식에서 원하던 소식, 바라던 소식은 없었다.
“괜한 부탁을 해서…… 정말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수고하십시오.”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강우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하지만 한숨을 내뱉어도 가슴의 답답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술이라도 진탕 먹고 정신을 놓아버리겠지만, 지금 이강우의 처지는 그럴 수도 없었다.
정신을 놓고 다니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게 이강우의 처지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릴렉스.’
여기서 이강우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한 자괴감에 빠지지 말자. 그런 거에 빠져 봤자 남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바꿀 때다.
무엇보다 지금 이강우에게는 처리해야 할, 당면한 과제들이 적지 않았다.
일단 4등급 모래시계문이 확보되면, 다시금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한 파티가 구성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이미 내가 벌인 일을 이제 와서 접을 수는 없다고.’
여기에 조만간 칠성문에서 사람이 온다. 거래 대금인 마나스톤을 가지고 온다.
그 마나스톤을 섭취해서 50만 마력 포인트를 달성하고, 세 번째 권능을 개방해야 하며 동시에 그 마법사를 살찌워야 한다. 이 일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안중현을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앉히는 일이다.
‘감상이나 자괴감에 빠질 때가 아니야.’
안중현은 지금 길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정치권에 적잖은 로비를 하는 중이다. 안중현이 정의감 가득 찬 인간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의 간과 쓸개를 핥을 만큼 타락한 인물도 아니다. 그런 안중현이 억지로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 결국 이강우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다.
그렇게 노력하는 안중현에게 미안해서라도 이강우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안중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결국 이강우가 보다 뚜렷한 업적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번 4등급 모래시계문 탐색에 지원한 것도 업적을 남기기 위함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한다. 개인의 이익을 떠나, 국가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좀 과장하면 이강우의 모든 행보가 뉴스로 나올 정도의 인지도를 얻어야 한다.
이강우가 그동안 탐탁지 않아 했던 일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나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이강우가 연예인 같은 걸 꿈꾸는 성격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싫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 해야지.’
그런 이강우에게 채유리로부터 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는 순간 이강우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 * *
안대욱 부청장이 타고 있는 자동차는 꽉 막힌 도로 안에 갇힌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안절부절못한 채 차 밖을 바라봤고, 안대욱 부청장도 조금은 불편한 기색을 품은 채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늦을지도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여기가 이렇게 막힐 줄은…… 제가 좀 더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운전기사가 그런 안대욱 부청장의 낌새를 백미러로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사과를 했다.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안대욱 부청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해주십시오.”
차가 밀리는 게 운전기사 탓일 리 없다.
그리고 이 길은 원래 막히는 길이 아니었다. 이걸 가지고 운전기사를 나무랄 정도로 안대욱 부청장은 정신이 썩어빠진 인간이 아니었다.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대답에 안대욱 부청장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자동차 대신 전철을 이용할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서 여의도역까지 전철로…….’
그런 그의 목적지는 여의도역 근처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이었다.
원래는 오늘이 일정은 아니었다. 7월 초에 있을 전경련 회장단 비공식 회의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방이 그날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좀 더 일찍 만날 수 없냐고 질문했다. 상대의 이름값이 적지 않았고, 본인이 아쉬운 안대욱 부청장 입장에서는 그 질문에 예, 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철로 이동하는 건 위험하지만, 지금은 시간 엄수가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늦으면 큰일이 난다.
계약서 같은 걸 쓰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용을 통해 구두뿐인 약속을 하는 자리다. 그런 자리 약속에 늦는다? 모양 빠진다, 같은 소리를 지껄일 만한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그동안 준비했던 계획의 마침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대화를 통해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강희 대신 안중현을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앉힐 수 있다.’
재계가 마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일단 마법 자체를 사업적 아이템으로 바라보는 재계 인사들이 엄청 많다. 그들 입장에서는 마법사와 유적 내의 아이템을 거의 독점 관리하는 마법청의 도움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더 나아가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시장도 없고, 기업도 없다. 재계는 마법청에 협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마법청 역시 재계에게 받는 도움이 적지 않다. 모래시계문 등장 이후, 재계는 몬스터 리스크라는 새로운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다.
이 리스크는 생각보다 컸다. 표현 그대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구축한 사업장이 몬스터 등장으로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에 사운(社運)을 걸고 투자를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 몬스터 리스크에 겁에 질린 재계가 경직된 행보를 보이면, 나라가 앓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청 입장에서는 이런 재계를 다독일 필요가 있었고, 그 사실을 재계는 나름 이용해먹었다.
특히 지금 만나러 가는 AU그룹 회장인 채병호 회장은 재계에서도 영향력이 강력할 뿐더러, 즈믄나래 창립 당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던 즈믄나래의 숨겨진 자금줄이었다.
원래 각 재계는 알게 모르게 길드 서너 곳의 후원자를 자처한다. 몇몇 재계 그룹들은 자기 자본과 권력으로 길드를 창설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그가 안대욱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일은 더 쉽게 풀릴 것이다.
문제는 채병호 회장은 깐깐한 인물로 소문이 나있다는 것. 자기 눈밖에 난 사람은 가족이라고 해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깐깐함이 과하다고 평가 받는 인물이었다.
장담할 수 있다.
안대욱 부청장이 약속 시간에 늦는 순간, 만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안대욱의 결심을 다지게 했다. 안대욱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근처 역에 세워 주십시오.”
* * *
거대한 덩치를 가진 안대욱을 중심으로 여섯 명의 경호원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 하지만 그들이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람이 제법 있는 전철 안에서 그런 광경을 연출하는 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더불어 이 광경은 경호원들에게 있어 악몽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전철이란 공간이 VIP를 보호하는데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모르는 경호원은 없다. 도처에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가득 찼고, 도망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안대욱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호원들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약속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큰 소란 없이 그들은 목적지인 여의도역에 도착했고, 곧바로 전경련회관으로 향했다.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전경련회관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렇게 전경련회관 빌딩 앞에 도착했을 때, 안대욱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전경련회장 빌딩 입구 앞을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한 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꽤 많은 숫자의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 숫자가 입구 밖에만 서른을 가뿐히 넘어갔다. 투명한 1층 로비 창문 안쪽에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본래는 이 정도까지 경호원을 배치해두지 않았지만,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 이후 어느 곳을 가든 경호인력이 예전보다 곱절이 됐다.
그렇게 경호 중인 마법사들 중 몇몇은 안대욱 부청장의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대욱 부청장은 곧바로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귀찮은 검문 절차는 없었다. 안대욱 부청장은 곧바로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시기에 전경련회관에 도착한 채병호 회장이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안대욱 부청장은 채병호 회장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시계부터 확인했다.
‘20분.’
전철을 이용한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좀 더 일찍 도착했다.
‘좋아.’
다행이었다. 채병호 회장도 20분 일찍 왔는데, 본인이 일찍 오기는커녕 더 늦게 도착했다면, 오늘 자리는 어떤 수확도 누릴 수 없는 최악의 흉작이 됐을 것이다.
여기서 안대욱 부청장은 채병호 회장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안대욱 부청장의 발걸음에 맞춰 경호원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그것도 마치 미식축구 선수 같은 듬직한 덩치의 사람들이 뭉쳐서 움직이는 꼴이 마치 플래시몹을 보는 것 같았다. 절도가 넘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채병호 회장 역시 안대욱 부청장을 발견했다.
그 둘은 곧바로 악수를 나눴다.
“채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대욱 부청장이 악수와 함께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채병호 회장은 체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왜소한 편이었다. 외모는 매우 준수했다. 굵직한 선이 아니라, 마치 미소년 같은 느낌. 나이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잘생겼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안 부청장님도 오랜만입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약속시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는데.”
“늦는 것보다는 일찍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말과 함께 채병호 회장이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안대욱 부청장이 잽싸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거 아닙니다. 원래 안대욱 부청장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그제야 안대욱 부청장은 왜 채병호 회장이 일찍 등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 신경 쓰지 말고 선약부터 처리하시지요.”
“아닙니다.”
순간 채병호 회장이 결정을 내린 듯.
“그리 중요한 약속도 아니고, 안대욱 부청장님도 바쁘실 텐데, 안대욱 부청장님과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약속보다 일찍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저야 감사할 뿐입니다.”
정중한 대화가 오고 갔고, 마치 그들의 대화에 마침표를 찍어주려는 듯 띵! 명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굉음이 터졌다.
그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불길이 단숨에 전경련회관의 1층 로비 유리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길은 창밖에서 대기 중인 모든 것을 휩쓸었고, 유리창마저 단숨에 부쉈다.
째재쟁!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고, 불길이 1층 로비를 단숨에 휘감았다.
그 불길 속에서 무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큭!”
“빌어먹을…….”
그나마 잽싸게 방어 마법을 전개한 몇 명의 마법사들, 그 마법사들의 주변에 있는 이들만이 처참한 몰골을 피할 수 있었다.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을 내뱉거나, 혹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빠득!
방어 마법 덕분에 불길의 등장에 무사할 수 있었던 안대욱 부청장이 이를 꽉 물었다. 자신의 경호 마법사가 전개한 방어 마법 너머로 보이던 광경,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마법을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마법의 위력이 보통 마법, 어중이떠중이 마법이 아니라 엄청난 위력을 가진 마법이란 것을.
‘6서클…….’
6서클 마법이다.
마법강국 대한민국에도 3개밖에 없는 6서클 마법 아티팩트, 그런 6서클 마법이 지금 전경련회관을 덮쳤다.
이 세상에 그런 능력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족속은 오직 하나뿐이다.
“위스프다.”
위스프.
그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 * *
볼코프의 가슴 속 마나 서클이 마력을 뿜어댔다.
뿜어댄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볼코프는 토해낼 기세로, 자신의 목젖 근처까지 끌어 올렸다. 목에 있는 경동맥이 뱀처럼 꿈틀꿈틀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감각.
그렇게 끌어올린 마력은 볼코프가 목에 차고 있는 황금빛 목걸이의 식량이 됐다. 목걸이는 탐욕스럽게 볼코프의 마력을 먹어 치웠고, 그 대가로 볼코프의 두 양손에 붉은 불길을 선물했다.
화르르!
볼코프의 두 손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이 내는 소리는 마치 늑대의 으르렁거림을 떠올리게 했다. 잠잠했으나, 힘이 넘쳤고, 살의와 적의도 넘쳤다.
볼코프가 그런 자신의 두 손을.
짝!
힘차게 부딪쳤다.
그 박수 소리는 곧바로 콰앙! 굉음을 동반하며 폭발했다.
볼코프의 박수와 함께 그의 두 손에서 폭발한 불꽃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의 정면에 있는 거대한 빌딩의 1층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진격과 함께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휩쓸어 버렸다. 쓰나미가 온 듯, 전경련회관 빌딩의 1층은 처참한 풍경이 됐다.
볼코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어마어마한 힘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미소가 지어졌고, 뻥 뚫린 광경에 대한 시원함 때문에 미소는 깊어졌다.
타앙, 타앙!
그런 볼코프의 미소를 향해 총성이 빗발쳤다.
볼코프가 만들어낸 불의 파도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자들이 반격을 시도했다.
‘흥.’
하지만 그들의 반격은 발악에 불과했다. 총알은 볼코프의 몸에 닿기도 전에 볼코프의 몸을 감싸고 있는 5서클 방어 마법 에어 쉴드에 박혔다.
투툭, 툭!
에어 쉴드에 부딪치고 찌그러진 탄환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얼음창 하나도 볼코프의 정면으로 날아왔다.
콰직!
그러나 총알이 뚫지 못한 에어 쉴드를 얼음창, 기껏해야 3서클 수준의 마법이 뚫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얼음창은 산산조각이 나며 볼코프의 에어 쉴드를 타고 미끄러질 뿐이었다.
그 발악에 볼코프는 의미도 두지 않았다.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볼코프의 눈은 자신을 향해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는 경호원과 마법을 날리는 마법사가 아닌, 찾던 표적을 쫓았다.
표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 있군.’
표적인 안대욱 부청장의 몸뚱이는 본인이 가리고 싶다고 해서 가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듬직함을 넘는 그의 체격은 아무리 자세를 낮춰도, 눈에 뻔히 보였다.
그가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전경련회관 빌딩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빨리.’
볼코프는 곧바로 마력을 뽑아내, 자신의 검지에 차고 있는 반지에 주입했다.
볼코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헤이스트 마법이 발동했고, 볼코프는 단숨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좁히며 빌딩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5분이다.’
볼코프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곳은 여의도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평화로워 보이고, 그 외에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들 전부가 한곳에 모이는 땅이다. 그 대단하신 권력자들이 이곳 여의도에 아무런 조치도, 대비도, 방비도 해두지 않았을 리 없다.
5분!
여의도 어느 지역에서든 사고가 터지는 순간, 그 사고 지역에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전력이 항시 대기 중이다.
만약 5분 후에도 볼코프가 안대욱을 처치하지 못하면, 그 후에도 절대 처치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볼코프만 아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끌어야 해.’
‘목숨으로 시간을 번다.’
경호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시간만 끌면, VIP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경호원들이 놀라운 속도로 로비 안으로 진입한 볼코프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떤 식으로든 뒤엉켜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개중에서 일부는 지원사격을 했다.
탕, 탕, 탕!
규칙적으로 울리는 총성 사이로, 마법사들은 마법을 준비했다.
한 명이 땅바닥을 얼렸다. 불바다였던 땅바닥이 빙판이 됐다. 경호원 두 명이 그 빙판에 오히려 넘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화살을 만들어냈다. 얼음, 불, 번개. 총알과 함께 볼코프의 사방으로 섬뜩한 공격이 날아왔다. 하지만 볼코프의 에어 쉴드가 그 모든 것을 막아냈다.
에어 쉴드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마력이 다한 에어 쉴드가 깨졌다. 그 사이 볼코프는 자신을 향해 접근하던 경호원들을 향해 칼을 쥔 것처럼 주먹을 쥔 채, 칼을 휘두르듯 팔을 휘둘렀다.
스윽!
맨손을 휘둘렀을 뿐인데,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바람만 가르는 게 아니었다.
투둑!
경호원의 몸뚱이도 단숨에 갈랐다.
바람 가르는 소리, 사람 가르는 소리는 연달아 들렸다. 그 광경을 본 이들 중 몇 명이 얼어붙었다.
‘이게 마법사야?’
그들이 보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강함을 보여주는 볼코프의 존재감이 단련된 경호원들의 심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틈, 볼코프가 놓칠 리 없었다. 볼코프는 헤이스트 마법의 힘으로, 경호원들과의 거리를 눈 깜박할 때마다 좁혔고, 거침없이 맨손을 휘두르며 경호원들을 베어냈다.
팟, 팟!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이곳저곳에서 등장한 볼코프는 1분도 채 되기 전에 경호원 그리고 마법사들을 처치했다.
일격에 반 토막이 난 경호원 시체들이 바닥에 너부러졌고, 엉망이 된 바닥 위로 핏물이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이쪽으로!”
안대욱은 여전히 경호원의 안내에 따라 도주하는 중이었다. 아직 남은 것들, 불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은 것들을 엄폐물 삼아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움직였다.
더불어 채병호 회장 일행은 그런 안대욱이 움직이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서 볼코프가 안대욱을 쫓았고, 채병호 회장이 아닌 자신이 볼코프의 타깃이라는 걸 파악하는 순간 안대욱은 이를 꽉 물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비수 김지홍에게 큰 부상을, 지금도 김지홍이 실전에서 뛰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힌 볼코프의 실력이 가소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군대 수준의 병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만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6서클 마법을 사용하고 곧바로 5서클 마법을 사용…….’
확신은 없다.
그러나 여러 마법사들을 봐오고, 그들의 마법을 봐온 안대욱은 볼코프의 마나 서클 개수를 6개 이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7서클인 건가?’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조직의 서열 3위가 7서클 마법사라니?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그 순간 안대욱 일행의 뒤를 잡은 볼코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 낌새를 확인한 경호원 중 한 명이 위험! 그 짧은 한마디와 함께 안대욱의 등을 밀어 앞으로 자빠뜨렸다.
퍽!
안대욱은 가슴팍을 두드리는 강력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 안대욱처럼 자빠지지 않은 두 경호원의 몸이, 가슴을 중심으로 반으로 잘려나갔다. 토막 난 시체가 바닥에 너부러졌고, 시체는 곧바로 피를 물줄기처럼 토해냈다.
그 물줄기가 안대욱을 흠뻑 적셨다. 짙은 피 냄새가 안대욱의 오감을 움켜쥐었다.
거기서 안대욱은 손발을 떨기보다는 오히려 바닥에 떨어진 경호원의 총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총을 잡았다. 총을 잡자마자, 바닥에 누운 채로 몸만 돌렸다.
흐릿한 무언가가 보이자마자,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총알 한 발이 볼코프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볼코프는 곧바로 에어 쉴드를 펼쳤다. 에어 쉴드가 펼쳐지자, 총알은 더 이상 볼코프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 상태로 볼코프가 안대욱과의 거리를 좁혔다.
쿵!
그 순간 볼코프와 안대욱 사이에 시멘트를 뭉쳐 만든 듯한 큼지막한 문 하나가 솟아올랐다.
문은 쾅! 천장마저 뚫었다. 문이 아니라 벽이었다. 볼코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의 머리 근처에서 생성된 푸른색의 조짐이었다.
쩌저정!
볼코프가 반응하기도 전에 푸른 번개가 에어 쉴드 위로 떨어졌다.
청뢰!
5서클 마법 중에서도 손에 꼽을 법한 강력한 그 마법은 에어 쉴드를 단숨에 산산조각 냈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은 듯, 볼코프의 온몸을 두드렸다. 볼코프가 이를 꽉 물었다.
‘버텨!’
나갈 뻔한 정신을 간신히 잡은 채, 볼코프가 잽싸게 몸을 옆으로 날렸다.
곧바로 붉은빛의 다트 하나가 잽싸게 몸을 옆으로 날린 볼코프를 쫓아가며, 그의 왼손바닥을 뚫었다. 붉은 것은 곧장 뿌리를 내렸다.
붉은 뿌리.
이강우, 그가 이곳에 등장했다.
* * *
채병호 회장.
세계적인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AU그룹의 총수인 그가 채유리의 아버지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강우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채유리가 채병호 회장의 드러낼 수 없는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현실감은 없었다.
상견례라고 할 수도 없는 인사를 하기 위해 채유리의 손을 잡고 전경련회관 빌딩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언질을 받은 직원의 안내를 받는 순간에도 이강우는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강우의 현실감을 깨워준 건 다름 아닌 폭음이었다.
빌딩이 요동칠 만큼 강력한 폭음이 터지는 순간, 이강우는 오히려 그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테러. 위스프!’
심지어 단서조차 없는 그 폭음 한 번에, 단숨에 결론을 도출했다. 이후 이강우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뭐든 행동이 우선되어야 할 때고, 빌딩을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곧바로 머물고 있던 방의 유리창을 깬 뒤에, 밖으로 몸을 날렸다. 15층에 위치해 있다는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이스트 마법을 이용해 가뿐해진 몸과 스트렝스 마법으로 강화된 근력은 15층 건물 외벽을 정글짐 타듯 탈 수 있게 해 줬으니까.
순식간에 빌딩 1층까지 내려온 이강우는 곧바로 처참한 광경을 바라봤고, 그 처참한 광경 속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위스프의 에스콰이어 얼굴을 발견했다.
볼코프!
그를 보는 순간 이강우는 류복희의 충고는 떠올리지 않았다. 당장은 안대욱을 구하기 위해 토문 마법을 사용했다. 그 사이 긴장감 가득하던 채유리도 현실감을 찾고, 전투개시 상태에 돌입하며, 볼코프의 머리 위로 청뢰 하나를 떨어뜨렸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강우의 붉은 뿌리였다.
이후 이강우는 채유리의 등을 거세게 치며 말했다.
“아버님부터 구해.”
채유리가 눈빛으로 싫어! 그리 말했지만, 이강우는 반문 따윈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뽑았다. 거칠게 뽑느라, 그 과정에서 입고 있던 정장이 찢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상태로 이강우가 볼코프의 확인사살을 위해 로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강우!”
채유리가 소리쳤지만,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그 소리는 볼코프에게 닿았다.
‘강우?’
볼코프는 그 이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왼손 손등에 박힌 붉은 뿌리를 강제로 뽑아냈다.
“끄아아악!”
볼코프의 손등 혈관에 이미 깊게 뿌리를 내린 붉은 뿌리를 빼내자, 어마어마한 출혈과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볼코프의 등줄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 통증 속에서 강우, 그 두 글자의 이름이 더 선명해졌다.
‘이강우!’
볼코프의 눈빛이 달라졌다. 성난 맹수가 아닌, 이성 잃은 맹수의 눈빛이 됐다.
그러는 사이 볼코프를 쫓던 이강우가 크리스털 아머를 전개하며, 동시에 왼손바닥을 팟! 펼쳤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세 개의 라이트닝 다트가 생성됐다. 그리고 곧바로 볼코프가 숨은 기둥을 향해 오른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기둥의 일부분을 깎고 지나갔다. 기둥 옆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찔했다.
이강우가 숨을 멈췄다. 여기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런 짧은 고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 찰나를 노린 듯, 그림자를 들썩이며 기둥 뒤에서 볼코프가 깜짝 등장했다.
깜짝 등장한 볼코프가 이강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탕!
이강우가 오른손으로는 방아쇠를 당기고, 왼손은 힘차게 휘둘렀다. 탄환 그리고 라이트닝 다트가 볼코프의 몸에 동시에 박혔다. 그런데도 볼코프는 멈추지 않았다. 단숨에 이강우와의 거리를 좁힌 뒤 맨손을 휘둘렀다. 이강우가 팔을 들었다.
드는 순간.
‘아!’
아차 싶었다.
오는 길에 토막 난 시체를 다수 봤다. 볼코프가 날카로운 무언가를 무기로 쓴다는 의미.
그런데 팔을 들어 방어를 하다니?
‘오냐.’
찰나의 순간, 이강우는 각오를 마쳤다. 왼팔, 준다. 대신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오른팔로 볼코프의 얼굴을 잡을 것이다.
‘팔은 주마!’
이강우가 왼팔에 힘을 줬다. 그 사이 무형의 칼을 쥔 듯한 볼코프의 팔이 이강우의 왼팔을 자를 기세로 떨어졌다.
그냥 떨어졌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 없이, 힘없이 떨어졌다.
속임수였다.
칼을 쥔 척하고 팔을 움직였다. 목표는 방어하는 이강우의 품 안으로 들어가 이강우의 가슴팍에 5서클 마법,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찔러 넣는 것.
‘이강우, 네놈도 끝이다.’
그게 볼코프의 노림수였다.
그리고 그 노림수는.
콰직!
섬뜩한 소리로 보답했다.
* * *
이강우가 볼코프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채유리는 채병호를 지키기 위해 그를 찾아 움직였다. 채병호는 잘 도망친 듯,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채유리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이강우의 품 안을 파고든 볼코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채유리의 머릿속 이성은 녹아버렸다. 머릿속이 망가졌다.
그녀는 무작정 볼코프를 향해 달렸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그녀의 존재를 볼코프가 확인했을 때, 볼코프는 다가오는 채유리를 향해 이강우를 던지듯 밀어냈다. 이강우는 시체처럼 밀려났고, 채유리는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이강우의 시신을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아악!”
채유리의 비명이 처참하고, 적막한 1층 로비를 가득 채웠다.
‘안대욱.’
하지만 볼코프에게는 의미 없는 외침이었다. 그의 임무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황. 시간도 끌릴 만큼 끌렸고,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 움직일 힘도 없다. 그의 처지도 이강우의 처지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코프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강우를 받아든 채유리를 뒤로 했다. 그 둘에게 등을 보인 채 안대욱을 찾았다.
그때.
휙!
귀신에 홀린 듯, 볼코프가 뒤로 몸을 다시 돌렸다.
볼코프가 기겁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강…….’
이강우, 그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게 아니라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볼코프를 바라보며 괴물 같은 눈빛과 표정과 기세를 품은 채, 삽시간에 볼코프와의 거리를 좁힌 이강우는.
덥석!
자신의 오른손으로 볼코프의 얼굴을 잡았다. 농구공을 한 손으로 잡듯, 꽉! 볼코프의 머리를 잡았다.
‘큭!’
순식간 그리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상황에서 볼코프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을 듯한 이강우의 손, 그 손의 손목을 잡았다.
실수였다.
잡는 게 아니라 잘랐어야 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강우의 손목을 잘라내는 것, 그게 볼코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볼코프에게 찾아온 건.
“끄아아악!”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이강우의 손이, 바츠무의 손이 볼코프가 가진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말라가기 시작하는 볼코프, 이강우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볼코프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바츠무, 네놈들처럼 불사가 된 내가 영원토록 네놈들을 저주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 * *
거대한 문이 보였다. 순백색의 문은 드넓은 대지 위를, 모든 것이 메마르고 황폐하게 변해버린 땅 위를 오롯하게 지키고 있었다. 문 위에 달린 모래시계는 이제 모래가 거의 바닥에 전부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강우는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광경이 바뀌었다. 한 사내가 우물우물, 뱀의 비늘을 가진 인형(人形)을 뜯고, 씹고, 꿀꺽! 삼키고 있었다. 사내는 피비린내 가득한 입으로 소리쳤다.
“으흐흐, 네놈들의 권능으로 나 역시 불사가 될 것이다. 불사의 괴물이 되어, 영원토록 네놈들을 저주할 것이다. 네놈들 전부를 먹어 치우는 네놈들의 포식자가 될 것이다.”
섬뜩하고, 살벌하고, 잔혹한 사내의 기세 앞에서 이강우가 차마 그 광경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인간을 닮은 혹은 뱀을 닮은 것이 이강우와 비슷한 감정을 품은 채 동족을 씹고 있는 괴물 같은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강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바뀌었다. 또다시 모래시계문이 보였고, 모래시계문이 열리자마자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몬스터들이 보였으며, 몬스터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무수히 많은 것들, 문명을 가진 것들 혹은 그렇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그렇게 다양한 것들이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모래시계문에 맞서 싸우는 광경도 보였다.
스쳐 지나가듯, 그 모든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이강우의 눈앞을 지나갔고, 이강우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더 나아가 그들의 노력이 침략자들의 수작 앞에 물거품이 되어 무너지는 광경이 보였다. 침략자들이 마법이란 힘과 모래시계문이란 무시무시한 도구 그리고 간악한 수작을 앞세워 처절할 정도로 하나의 세계를, 문명을 몰락시키는 과정들을 이강우는 하염없이 바라봤다.
종국에 침략자들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존재했던 흔적만이 이강우의 눈앞에 남아있었다.
‘몰락한 문명의 흔적…… 그래서 유적인가?’
이강우, 그는 그렇게 야크센의 기억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 * *
-현재 이곳 전경련회관은 여전히 모든 출입이 통제된 채…….
-정부는 이번 테러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야당 대변인은 이번 사태에 대해 정부의 무능을 지탄하며, 이번 테러 사건에 대해 보다 공개적인 조사와 수사가 필요하다고 발표했습니다.
안대욱, 환자복을 입은 채 병실에 머물고 있는 그는 TV를 통해 떠들썩하게 나오는 뉴스를 배경음 삼은 채 노트북의 영상을 거듭해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그 영상은 굉장히 질이 떨어졌다. 6서클 마법, 파이어 웨이브에 의해 손상된 렌즈는 그저 사람의 형태를 분간할 정도의 영상만을 촬영했다.
그 영상 속에는 한 사내가 다른 사내를 손으로 잡고 있는 광경 정도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영상을 수십 번 반복해서 보던 안대욱의 시선이 곧바로 노트북 옆에 놓인 사진으로 이동했다.
사진 속에는 비쩍 마른 미라 한 구가 있었다. 온몸의 수분이, 핏물이 빨린 듯한 괴기한 모습이었다.
‘볼코프.’
그가 바로 볼코프였다.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 그리고 전경련회관 빌딩 테러 사건을 일으킨 국제적 마법 테러 조직의 서열 3위! 무시무시한 마법 능력을 선보이며, 혼자서 군대도 상대할 법한 위엄을 보여줬던 볼코프!
그러나 그런 그의 시체는 그런 그가 남긴 결과물에 비해서 너무나도 처참했다.
‘가짜인가?’
때문에 안대욱은 이 사진을 받고, 사진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간 의심부터 했다.
볼코프의 시체가 가짜일 가능성!
없진 않다. 국제적인 범죄자들이 가짜 시체를 만들고, 죽은 척 위장을 한 채 유유히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례는 생각 이상으로 많다.
그러나 제대로 된 분석을 할수록 시체의 주인은 볼코프일 확률이 높았다.
안대욱은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상만으로는 영상에 나오는 인물들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대욱은 영상 속에 있는 흐릿한 사람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강우.’
그 영상 속에 찍힌 건 바로 이강우와 볼코프였다. 이강우, 그가 볼코프를 처리했다.
안대욱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 최근 정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강우를 영웅으로 만들 속셈이다.’
이번 볼코프의 테러는 무시무시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실패다. 피해자가 적지 않았지만, 정작 볼코프가, 위스프가 노린 VIP인 안대욱은 무사하다.
또한 볼코프를 잡았다.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을 비롯해 다수의 테러 사건으로 국제적인 지명 수배를 받던 그를 한국인 마법사 한 명이 확실하게 해치웠다.
‘어필할 만한 요소는 충분하지.’
현 정부 입장에서는 기회였다. 거듭된 테러 사건으로 겁에 질린 국민에게 이 테러를 단신으로 막아낸 이강우의 존재는, 국면전환을 위한 최고의 카드였다.
‘내 입장에서도 나쁘진 않아.’
그리고 안대욱 본인 역시 이강우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강우가 가진 자유라는 이름의 특권, 그 특권에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강우가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이 된다면, 이강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족이 달릴 것이다. 때문에 이강우 본인이 아주 빌어먹을 놈으로 남고 싶지 않다면, 그는 세상과 어느 정도 절제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대욱에게 이강우는 생명의 은인이지만, 그래도 사적인 고마움과 공적인 일은 분류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이야기들.
문제는 이 힘이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상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미라 꼴로 만드는 마법이 있을까? 물론 있을 순 있다. 마법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마법청이 가진 마법 아티팩트 중에 이런 마법은 없다.
‘블랙 스택 쪽에서 가지고 온 건가?’
이강우는 블랙 스택과의 접점도 있다. 특히 마법 아티팩트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리볼버의 제자다. 리볼버가 이강우에게 특별한 마법 아티팩트를 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레시피도 줬는데, 아티팩트가 아까울 리 없다.
분명한 건, 이런 이강우의 마법은 영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파고들면, 걸릴 게 많다. 이강우가 영웅이 된다면,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면 이 부분은 필시 약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안대욱은 고민했다.
‘이용하든가 아니면 덮든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병실에서 안대욱이 나름 손을 썼다. 또한 당시 생존자나, 상황을 알려줄 만한 자료도 없다. 안대욱이 사건을 정리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 이상 시간이 끌리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안대욱도 모른다.
때문에 안대욱은 결정을 재촉했다.
‘이강우를 만나봐야겠지.’
* * *
이강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안중현은 자동차를 끌고 전속력으로 이강우가 머무는 병원으로 향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안중현 본인이 교통사고로 입원할지도 모를 정도로 밟았다.
그렇게 헐레벌떡 병원 VIP룸에 도착한 안중현을 반긴 건, 의사 몰래 먹고 있던 초콜릿을 잽싸게 감추는 이강우의 모습이었다. 이강우는 의사가 아니라, 안중현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감춰 두었던 초콜릿을 꺼냈다.
“형님, 전화는 하고 옵시다.”
이강우의 모습에 안중현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허술한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입에 초콜릿 묻었네.”
“아, 그래요?”
이강우가 손으로 제 입가를 훔쳤다.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의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안중현은 뜸 들이지 않았다.
“대략적인 상황은 들었지만, 본인 입으로 듣고 싶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강우는 곧바로 자신이 밝힐 수 있는 수준의 모든 이야기를 꺼냈다. 채유리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거기 갔는데 테러 사건이 터졌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섰고, 볼코프와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그 후 정신을 차리니 이 상태라는 이야기까지.
안중현은 그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해 줄 건 다 해 준 거겠지.’
이강우가 이 이야기에서 꺼내지 않은 내용들은 말하기 힘들다는 의미일 테니까.
“일단 살아서 다행이네.”
“예. 정말 다행이죠.”
그 순간 다시금 병실 문이 열렸다. 이강우가 다시 한번 잽싸게 초콜릿을 감췄다. 안중현과 이강우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문을 향했다. 그곳에는 왜소한 체격의 중년 사내가, 곱상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채병호 회장.
그의 방문에 이강우와 안중현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유리 아버님이…….’
‘채병호 회장이…….’
“실례 좀 하겠네.”
그 둘의 표정을 본 채병호 회장이 그 말과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강우가 앉아 있는 병상 옆에 섰다.
“자네가 유리의 연인인가?”
“그렇습니다.”
“유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도 되겠는가?”
안중현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유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예의다. 안중현이 곧바로 병실을 나갔고, 채병호는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말을 이어갔다.
“유리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을 터. 내가 그때 하려고 했던 말은, 유리를 통해 AU그룹 경영 또는 내 명의로 있는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경고였네.”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유리만 제게 맡겨주시면, 그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재산 따윈 아무래도 좋다. AU그룹이 아니더라도 이강우는 이미 부자다. 채유리를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부자.
“고맙군.”
채병호 회장은 그런 이강우의 대답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채유리에 대해서 그는 굉장히 무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이강우는 왜 채유리가 그토록 부모님과의 대화를 꺼렸는지 알 수 있었다.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네. 조금 전 나간 안중현 씨를 불러주게.”
“형님!”
이강우가 소리를 지르자, 곧바로 안중현이 안으로 들어와, 조금 전 자신이 있었던 자리에 섰다.
“즈믄나래 설립 당시 필요한 초기 자금부터 지금까지 즈믄나래의 운영 자금에 AU그룹의 돈 그리고 내 개인적인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갔네. 그리고 안중현 씨, 당신이 즈믄나래의 차기 길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현재 정치권에 로비 중인 걸 알고 있소.”
“예, 맞습니다.”
“현재 길드 마스터인 강희가 구속수사가 확실시된 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준다면 안중현 씨, 당신에게 힘을 실어주겠소.”
예상치 못한 기회에 안중현이 눈빛을 빛냈다. 물주의 힘은 언제나 강력한 법이다. 하물며 AU그룹 정도 되면, 즈믄나래와 전혀 상관없더라도 즈믄나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첫째 이강우를 즈믄나래의 대표 마법사로 만들 것. 동시에 AU그룹과만 광고를 비롯한 모든 상업적 계약을 맺을 것. 둘째 즈믄나래의 마법사 중 일부를 AU그룹의 경호원으로 배치해줄 것. 셋째 지정된 몬스터로부터 얻는 수확물은 AU그룹에만 독점 납품할 것.”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문제 될 게 없다.’
채병호 회장이 원하는 건 즈믄나래와 AU그룹의 기존 관계가 유지되는 것, 그뿐이다.
문제는 첫 번째 조건이다.
안중현은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 네 선택을 존중한다.’
이제까지 이강우는 스스로를 감춰 왔다. 유명세를 떨치고자 한다면, 하선우 이상으로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 대신 잠자코, 물밑 아래에서, 대중의 관심 밖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이강우가 즈믄나래 대표 마법사가 되고, 심지어 AU그룹의 광고모델을 한다면 이강우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된다. 공인이나 다름없는 신분이 된다.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많다.
그런 안중현의 눈빛에 이강우는 짧게 고민했다. 눈앞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유적들.’
불사황제 야크센이 오랜 세월, 무수히 많은 세계의 몰락을 지켜본 기억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세상에 등장할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존재가 보였다.
이강우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자신의 가족이 그런 처참한 흔적으로, 유적으로 남기를 원지 않았다.
결국 최전선에서 이강우가 돌격대장 역할을 해야 한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