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7화 (47/66)

47화. 에스콰이어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백석산은 사람의 발길이 그다지 많이 닿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은 산에 있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장애물이 되는 법이다. 돌, 바위, 나무…… 무엇하나 사람의 등장에 협조하지 않는다. 그런 산속의 숲을 그냥 평지에서도 다니기에 버거운 수준의 무장을 한 채로 움직인다는 건, 고문이다.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바닥이 나는 괴로운 작업이다.

하물며 그 이유가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찾기 위해서라면?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이쪽 방향이 맞나?”

“발자국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그런 섬뜩하고,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누가 보더라도 짐승의 발자국이 아닌 괴물의 발자국이 분명한 발자국을 추적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쫓는 건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발자국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모래시계문 탐색 부대였다.

말 그대로 인적이 드문 곳, 특히 산지에 등장한 모래시계문을 찾아 파괴하거나 혹은 회수하거나 또는 이미 문이 열린 모래시계문의 경우에는 문을 열고 나온 몬스터를 추적하거나.

현재 대한민국의 평화를 가장 최전선에서 지키는 최고의 군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

물론 그런 그들의 노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인간은 아마 그들의 가족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대신 자신들과는 별 상관도 없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관련 소식을 자기 일인 것마냥 떠들고 있겠지.

강주영 중사는 갑자기 드는 그런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결국 그가 손을 들었다.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아홉 명의 분대원들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을 풀었다.

긴장이 풀리자, 대화가 시작됐다.

“이번 달은 몬스터 발자국이 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발자국만 이번 주에 아홉 개니까…… 야, 최근 양구 쪽에서 잡은 몬스터가 몇 마리지?”

“공식 집계는 어제부로 4마리입니다.”

“그럼 최소 다섯 마리는 여기서 활개 치고 있거나, 다른 곳에서 난리를 친다는 거겠네.”

“그런 것치고 민간인 피해는 없었습니다.”

“있으면 안 되지. 그게 생겼으면 이미 진돗개 둘 발령하고 우린 밤에도 이 난리를 떨어야 해.”

대화를 듣던 강주영 중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느끼고 있군.’

그는 2015년에 막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몬스터 전투에 참가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현역만이 아니라 예비군들도 지급 받은 총기를 들고 몬스터 사냥에 나섰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고생 끝에 제대를 한 후 여러 사정 때문에 다시 부사관 지원을 하면서, 2015년 이후 약간의 텀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리고 대부분 모래시계문 탐사와 몬스터 사냥으로 보냈다. 그런 만큼, 나름 그는 이 부분에서 베테랑이었다. 몬스터 좀 잡아봤다고 나대는 마법사들이나, 총꾼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베테랑.

그런 그는 최근 거듭되는 몬스터의 흔적이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있어. 분명 이건 단순한 조짐이 아니야.’

일단 출몰 숫자가 늘어났다. 2015년 정도는 아니지만, 몬스터 등장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2016년 이후로 가장 많은 것 같았다. 물론 공식집계된 숫자로는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한 지역에서 출몰하는 숫자가 많아진 셈.

‘아무리 봐도 이상해.’

그래서 더더욱 강주영 중사는 의심하고 있었다.

‘민가 피해가 너무 적어.’

몬스터들이 많이 출몰할 순 있다.

하지만 많이 출몰하면 필연적으로 먹이가 부족하게 된다. 그럼 당연히 민가 쪽으로 내려온다. 산에는 먹을 게 없지만, 산에서 내려오면 지천으로 깔린 게 인간이다.

하지만 몬스터의 등장 숫자에 비해서 민가 쪽 피해는 드물었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6월 내에 양구 지역 내에서 민간인이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신고는 단 한 번도 접수되지 않았다.

강주영 중사가 침음을 흘렸다.

사실 여기서 심각성을 인지하고 뭔가 대책이 나오면 그나마 한숨이라도 쉴 수 있겠는데 그게 아니었다.

군부는 민간인 피해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 군대가 원래 그런 조직이다. 터지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조직.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주영 중사는 마음 같아서는 날 잡고 아예 양구에 있는 모든 산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입 밖으로, 장난으로라도 내뱉지 않고 있었다. 말해서 남는 게 없는 조직 아닌가?

‘그냥 나도 차라리 전역해서 총꾼이나 될까?’

더불어 최근 강주영 중사는 전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그렇다고 보수가 짭짤한 것도 아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먹고 살 재주가 이거 하나라서 붙었을 뿐이지만, 여기까지다. 진급이라도 잘 되면 모르겠는데 부사관이 진급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실제로 그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은 대부분 전역 후에 일류 길드에 총꾼으로 계약해서 억대 연봉에 가까운 돈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길드 입장에서도 어중간한 총꾼보다는 몬스터와의 전투 경력으로 경력을 도배한 군인을 바라는 법이니까.

그때 강주영 중사가 부하들을 바라봤다. 열심히 웃고 떠드는 녀석들,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나름의 여유를 찾으려는 녀석들. 개중 전역을 얼만 남기지 않은 한 놈이 보였다.

“박 병장.”

“예, 무슨 일이십니까?”

“너 제대까지 얼마 남았냐?”

“보름 남았습니다.”

“휴가는?”

“휴가가 있었으면 지금 제가 여기 있지도 않았습니다.”

“좀 아껴 쓰지.”

“어머니가 아프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대웅 병장. 이제 전역을 얼마 안 남긴 녀석이다. 이병 때는 정말 어리바리했던 놈이 이제는 그럴싸한 놈이 됐다. 강주영 중사는 그런 녀석과 안 좋은 추억이 있었다. 1년여 전에 지금처럼 몬스터의 발자국을 따라 탐색을 했고, 그러다가 7등급 몬스터와 조우했다. 네 명이 죽고, 세 명이 의병제대를 했을 정도였다.

그때 멀쩡히 살아서 군생활을 계속하는 이들 중에 이제 군대에 남은 건 박대웅 병장이 유일했다.

‘그래, 저놈만 전역하면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자.’

강주영 중사가 이 순간 오랫동안 했던 고민을 각오했다.

그 순간.

츠츠츠!

무언가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 * *

“여기는 에코 분대! 여기는 에코 분대! 몬스터와 조우했다! 몬스터의 존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원 요청한다!”

30분 전에 부하 병사가 무전기에 대고 했던 외침이 강주영 중사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주영 중사가 주변을 바라봤다. 헉헉, 숨을 헐떡이며, 빈 탄창을 교체하는 부하들이 보였다. 다행히도 아홉 명 전부 무사했다. 단지 개중 두 명이 상태가 좋지 못했다.

“박 병장 상태는?”

“아무래도 발목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몬스터 한 마리가 등장했다. 만약 강주영 중사가 미리 설치해둔 부비트랩이 아니었다면 등장도 모른 채, 이미 두어 명이 당하고 모든 게 시작됐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 부상도 도망치다가 생긴 부상이었다. 천만다행이었지만, 이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강주영 중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봐도 7등급 이상이다.’

수칙이 있다.

처음 몬스터를 발견하면, 일단 총격을 한다. 총에 맞고 난 후의 결과물에 따라 판단을 한다.

만약 총이 아예 통하지 않는 환수 타입이라면 분산되어 도주를 한다. 어쩔 수 없다. 환수 타입은 9등급 몬스터조차도 완전무장한 군인 수백으로 어찌할 수 없다.

만약 총이 통하면? 9등급 몬스터 같은 경우는 잡을 수 있다. 폭탄 등을 이용하면 8등급 몬스터까지도 잡을 수 있다. 이때는 교전이다. 괜히 뒤로 빼지 말고 추격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7등급 몬스터부터는 달라진다. 총이 통하지만, 총이 통한다고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추격이 아닌 도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도주를 하면 안 된다. 화력 유지를 통해, 거듭해서 몬스터에게 자극을 줘야 한다. 독을 품은 먹잇감이란 사실을 인지시켜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무작정 도주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무작정 도주를 한다고 해서 몬스터를 뿌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니니까. 일명 고슴도치 작전이다. 물론 7등급 몬스터의 경우에도 각자 흩어져서 도망치는 방법이 있다.

‘합리적으로 간다면, 여기서 부상자는 버리고…….’

고슴도치 작전이 안 먹히면 자연스럽게 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부상자를 데리고, 거친 산길을 함께 이동하는 건 힘들다. 보유한 탄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몇 명은 희생하고, 나머지의 생존을 기원하는 게 답.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됐다면, 군인이 아닐 것이다. 강주영 중사는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젠장.’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았지만, 이렇게 오고 나니, 베테랑인 그조차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강주영 중사의 마음을 움직인 건, 박 병장의 말이었다.

“어차피 이 발로는 여기서는 도망 못 칩니다. 발목만 아프지, 다른 곳은 멀쩡합니다. 부상자 둘이 녀석의 시선을 끄는 사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이미 다른 부상자와 이야기를 마친 듯, 박 병장의 말에는 확실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더군다나 마법사가 온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거 같지 않습니다. 솔직히 공무원 마법사가 와 봤자…… 시체만 늘어날 겁니다.”

강주영 중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 둘 그리고 나를 포함한 셋이 남는다. 나머지 일곱 명은 2인 1조로 2개 조, 3인 1조 1개 조로 도망친다. 도주 루트는 겹치지 않도록 잡는다. 알파, 베타, 찰리. 알파는 남쪽으로, 베타는 동쪽으로, 찰리는 서쪽으로 이동한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그 말에 박 병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추가 희생을 자처하는 중사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러는 사이.

쾅!

폭발음이 들렸다. 강주영 중사가 잽싸게 설치해둔 간이 부비트랩을 몬스터가 밟았단 소리였다. 폭발음과의 거리는 짧았다. 거리로 따지면 약 100미터 정도. 이제 도망칠 시간도 얼마 없다. 인사를 나눌 시간도 아깝다.

“흩어져!”

강주영 중사가 소리쳤다.

동시에 그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잽싸게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그림자의 등장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지나가는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남자였다.

“마법사?”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숲을 제집 앞마당처럼 날아가듯 움직일 수 있는 건 마법사밖에 없다.

그 순간.

“이강우 중사님?”

강주영 중사가 저도 모르게 그 사내의 이름을 언급했다.

* * *

헤이스트 마법을 발동한 이강우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날아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에코 분대를 발견하고, 그 위를 지나갔다. 그들과 인사할 시간은 없었다.

‘속전속결.’

그들을 지나친 이강우는 조금 전 그들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터진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했다. 바닥에 착지한 이강우의 주변은 조금 전 소란이 일어난 것치고는 고요했다. 들리는 건 미약한 바람소리가 전부였고, 그 바람소리가 적막감을 더 짙게 만들었다.

‘아이스웨폰.’

그 적막감 속에서 이강우가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스으으!

이강우의 오른손바닥에서 얼음으로 된 칼 한 자루가 마술처럼 등장했다. 칼은 단숨에 자신의 형태를 갖추었다. 칼끝부터 자루 끝까지 1미터 길이의 칼이었다. 특이점은 자루였다. 마치 T를 거꾸로 잡은 듯한 모양새였다.

‘마력검 발동.’

그리고 곧바로 그 검에 마력검 마법을 덧씌웠다.

여섯 개의 고리에서 나오는 마력, 그 마력을 머금고 발동된 마력검의 위력은 섬뜩했다.

츠츠, 츠츠…….

주변의 공기마저 베어나는 소리. 그 소리와 얼음칼이 내뿜는 한기가 섞였다.

그야말로 서슬 퍼런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는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건 여전히 없었다. 그저 평범한 숲의 광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무가 오롯하게 서있고, 바위와 풀들이 너부러진 공간. 여름날 녹음을 머금은 숲의 모습이었다.

그때 이강우의 눈썰미가 찾아냈다. 소리 없이 짓밟히는 이름 모를 풀을 발견했다.

‘꽃등도마뱀.’

이강우는 그걸 보는 순간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했다. 많은 몬스터가 있지만, 이 정도로 은밀한 기색과 놀라운 수준의 기동 능력을 가진 몬스터는 많지 않으니까.

하물며 꽃등도마뱀은 이강우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인연이 깊은 놈이기도 했다.

‘공격이 오겠군.’

그래서 더더욱 녀석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몸통박치기 혹은 꼬리치기.’

이강우의 예상.

그 예상에 대한 꽃등도마뱀의 대답은 꼬리치기였다. 녀석이 몸을 크게 회전하며, 꼬리를 움직였다. 반원을 그리듯 녀석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지끈!

그 궤적에 놓인 나무들의 기둥이 순차적으로 격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힘이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사람이 저 꼬리에 맞는다면 수수깡이 아니라 먼지처럼 뭉개질 것이다.

이강우는 당연히 그 꼬리에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부러지는 나무의 형태를 통해 녀석의 몸통 위치를 가늠했다. 가늠하자마자 이미 이강우는 세 번의 발걸음과 함께 도약을 한 상태였다.

이강우는 화살처럼 날아갔고, 이강우가 쥐고 있는 얼음칼은 화살촉이 되어.

푹!

꽃등도마뱀의 몸에 꽂혔다. 그냥 꽂히는 수준이 아니라, 칼자루까지 박힐 기세로, 깊숙하게 꽂혔다. 투명한 꽃등도마뱀의 몸뚱이 덕분에 이강우는 칼자루만 쥔 채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등이네.’

꽂히는 순간, 이강우는 자신이 어느 부위를 찔렀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보지 않아도, 찔리는 순간의 감촉만으로 알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 정도 수준이니, 여기서 더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이강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꽃등도마뱀의 형태가 그려졌다.

이 순간 이강우가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칼자루에서 오른손을 때고, 왼손으로 T자 모양의 윗부분을 손잡이처럼 잡았다.

그 상태로 자유가 된 오른손의 손바닥을 펼쳤다. 그 손바닥 위로 얼음칼 한 자루가 생성됐다. 30센티미터 길이에 직각삼각형 형태의 날렵한 모습, 이강우가 자주 애용하는 도축용 칼과 똑같은 형태였다.

그 칼을 꽉 쥔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군.’

* * *

꽃등도마뱀 몸 위에 올라온 이강우의 도축 작업은 기존의 도축과는 전혀 달랐다.

이강우는 아이스웨폰 마법을 이용해 50센티미터 길이의 T자 모양의 굵직한 송곳칼을 만들어냈고, 마력검 마법을 이용해 송곳칼의 절삭력을 극대화시켰다.

그 상태로.

푹푹!

꽃등도마뱀의 몸 구석구석을 찔렀다.

가죽을 뚫고, 근육을 가르고, 뼈 사이를 지나친 송곳칼은 꽃등도마뱀의 장기에 도달했다. 이강우는 그것을 굳이 빼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송곳칼을 하나씩 찔러 넣고, 하나씩 만들어내며, 꽃등도마뱀의 몸에 꽃꽂이를 하듯 송곳칼 장식을 시작했다.

키에에!

이강우의 송곳칼이 꽂힐 때마다 꽃등도마뱀은 난리법석을 피우며, 온몸으로 절규를 내뱉었지만 동시에 꽂힌 송곳칼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꽃등도마뱀의 힘이 약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중에는 꽃등도마뱀이 발악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시체처럼 너부러졌다. 이강우는 바닥에 너부러진 꽃등도마뱀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했다.

여기까지가 꽃등도마뱀과 조우 이후 3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강우는 곧바로 도축을 위한 작업으로 넘어갔다. 오랜만에 얻는 꽃등도마뱀의 고기를 최대한 완벽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피를 빼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이루어지는 이강우의 도축 과정은 이제까지의 도축과는 조금 달랐다.

이강우는 아이스웨폰 마법을 이용해 꽃등도마뱀의 부위별에 맞는 도축용 칼을 만들었다. 큼지막하게 써는 작업이 필요할 때는 큼지막한 칼을 만들었고, 세밀한 도축이 필요할 때는 작은 칼을 만들어냈다. 도축이 아니라 의사의 수술을 보는 것 같았다.

꽃등도마뱀에게 쫓기던 에코 분대가 이강우를 발견하고, 이강우가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고 굳어버린 건, 이강우의 도축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말이 돼?’

‘진짜 마법이군.’

몸길이기 10미터에 다다르는 도마뱀…… 말이 도마뱀이지 공룡에 가까운 괴물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 가뿐하게 잘라내며 고깃덩이를 즉석에서 생산해내는 광경은 아마 오늘 이후로 평생을 살면서 다시 보기는 힘든 광경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구경만 했다. 감탄사도 그냥 삼켰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병사들임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오직 이강우만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입을 연 건 강주영 중사였다.

“혹시 이강우 중사님 맞으십니까?”

몬스터 해체가 거의 끝날 무렵, 이강우는 아주 오래전의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강주영 중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누구…… 라는 의문을 품던 눈빛을 품던 이강우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놀라며 반문을 던졌다.

“강주영 이병?”

“맞습니다.”

“진짜 강 이병이야?”

이강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7년 전 이후 본 적 없었던 아련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자네가 여기 왜? 설마?”

“지금은 중사입니다.”

“부사관 지원한 거야? 제대하자마자?”

“예. 제대하자마자 할 게 없어서 곧바로…….”

이강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보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한 이강우가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퍽 우스웠다.

강주영 중사도 우스웠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이강우와 재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놀란 표정은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감상보다는 현실로 돌아올 때다.

“아니, 그런데 왜 굳이 군대에 말뚝을…… 그 정도 짬이면 길드에서 은근슬쩍 오퍼 오지 않나?”

“예, 그래서 원래 조만간 제대해서 길드나 들어갈까, 했습니다. 그보다 이강우 중사님은…… 아니, 마법사가 되셨군요.”

이강우가 실소를 머금었다.

“인생 참 신기하지?”

“예. 신기하군요.”

직업 군인이었던 사내는 마법사가 되어 등장했고, 당시 이병이었던 사내는 직업 군인이 되어 그 마법사를 만났다. 동시에 둘 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정말 기구하기 그지없는 운명이다.

“그보다 지금 하시는 건…….”

“도축. 가져가기 편하게 잘라놓는 거지.”

“몬스터를 먹습니까?”

“없어서 못 먹지.”

말과 함께 이강우는 자신이 조금 전 막 잘라낸 후 비닐에 싸두었던 꽃등도마뱀의 안심을 꺼냈다.

“한 번 먹어 봐.”

“예?”

“이번 몬스터 사냥에서 내가 잡은 노획품은 우리 쪽이 가져가기로 계약했거든. 그러니까 먹어도 문제없어. 바짝 구워 먹으면 재미있을 거야. 단맛이라면 환장하는 군인들 입맛에는 정말 제격일 테니까, 부대원들이 굉장히 좋아할 거야.”

강주영 중사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기를 받았다.

‘어이쿠.’

10킬로그램은 가뿐히 넘을 법한 고기의 중량에 강주영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그런 강주영을 보는 이강우는 여전히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연이 이어질 줄이야. 동시에 이강우의 기억 속에 에코 분대를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상자가 있었지.’

“그보다 정말 위험했겠군.”

“예, 정말 위험했습니다. 만약 이강우 중사…… 아, 전역하셨죠.”

“편한 대로 불러.”

“이강우 씨가…….”

호칭 부분에서 굉장히 어색함이 넘쳐났다. 결국 강주영 중사는 호칭 부분은 그냥 넘어갔다.

“지원 오셨을 때, 부상당한 부하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이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때는 그렇게 겁 많은 녀석이었는데, 이제 베테랑이 다 됐군.’

강주영의 말이 농담이란 걸 이강우가 모를 리 없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가차 없이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사람이었다면, 이미 예전에 전역했을 것이다. 강주영 중사 같은 베테랑이 남은 이유는 결국 자신이 떠나게 되면 남게 될 이들이 눈에 밟혀서, 그것밖에 없다.

이강우의 미소에 강주영 중사도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이 깔렸다. 어색한 침묵이었고, 이강우가 침묵을 깨기 위해 대충 말을 던졌다.

“그보다 최근 바쁘지? 이 근처에 몬스터가 많이 출몰했다고 들었는데.”

“예. 개체 수가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특이 행동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특이 행동.

그 말에 이강우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지.’

이강우는 보물이다. 6서클 마법사 정도 되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허송세월을 보내도 상관없다.

물론 긴급 사태에는 6서클 마법사가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7등급 몬스터 잡는 일에 6서클 마법사가 투입되는 경우는 없다.

달리 말하면, 이강우가 양구에 온 이유는 단순히 7등급 몬스터를 잡기 위함이 아니라는 의미다.

몬스터의 개체 수가 증가하고, 몬스터들이 이상 행동을 보일 경우 4등급 모래시계문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최근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양구에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어느 때보다 양구 지역에 4등급 혹은 그 이상의 모래시계문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 4등급 모래시계문을 확보하기 위해 이강우가 팀 포식자의 일부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물론 공짜로 온 건 아니었다.

현재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마법청을 상대로 무언의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마법청과 현 정부가 즈믄나래를 건드리면서, 기어코 마법사들이 폭발했다. 길드 소속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나름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유적 사냥 등에 나섰는데, 그 대가로 한국 길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즈믄나래가 가차 없이 당하는 꼴을 보게 됐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심지어 이부성 마법청장이 이 기회에 블랙 스택의 영향력을 줄이고, 칠성문과의 교섭을 통해 한국 내에서 블랙 스택과 칠성문을 경쟁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법사들의 기분은 완전히 비틀어졌다.

그렇게 되면 마법사들의 입지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때문에 마법청이 비밀리에 5서클 이상 마법사들, 길드에 양구 지역에서의 모래시계문 탐색 지원 요청을 했을 때 모든 이들이 담합을 한 듯, 마법청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거나 무시했다.

이런 와중에 안중현이 잽싸게 안대욱 부청장과 접촉했고, 4등급 모래시계문을 찾는 대가로 엄청난 거래를 제안했다.

‘즈믄나래…… 빠져나올 수 없으면 먹어 치운다.’

안중현이 역발상을 했다.

즈믄나래의 감시가 두렵다면, 차라리 즈믄나래를 먹어 치우는 거다!

길드 마스터 강희가 건재하다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비리 사건으로 현재 검찰 수사 중인 강희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차후 결과에 따라 유죄 판결이 나오는 순간 강희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안중현이 앉고자 했다.

안 될 건 없었다.

이미 즈믄나래의 핵심 전력들, 이강우를 비롯해 즈믄나래를 대표하는 5서클 마법사들 대부분이 안중현의 편이다. 여기에 즈믄나래 길드 내에서 안중현의 입지는 크다. 인지도도 크고, 업무 능력도 마법사 중에서 독보적이다.

물론 그걸 고려하더라도 블랙 스택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안중현이 즈믄나래의 2대 길드 마스터가 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안대욱 부청장은 이 제안을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솔직히 이 제안을 너무 시원하게 받아들여서 안대욱 부청장의 의중이 의심이 될 정도였다.

어쨌거나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나름 대역전의 기회가. 그런 기회를 앞두고 몸을 사리는 건 말이 안 됐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강주영 중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이강우가 담담하게, 강주영 중사와 대화를 이어갔다.

“특이행동이라, 다른 건 없었고?”

“다른 거라면…… 인적이 발견됐습니다.”

“인적?”

“확실치는 않지만,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두어 곳 발견됐습니다.”

이런 곳에 인적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모래시계문문 암시장이 활발할 당시에는 오히려 이런 오지에 인적이 드문드문 있었다.

물론 다른 경우일 수도 있다.

‘위스프.’

지금 다른 의미로 모래시계문이 필요한 족속들이 대한민국 땅에 있다.

그들이 만약 문제를 일으켰다면?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번 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 * *

무언가가 틀어졌다.

강희가 그 사실을 눈치챈 건, 검찰이 자신을 상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었다.

강희는 이제까지 검찰 수사에 최대한 협조적으로 나왔다. 검찰에 출석도 했다.

그런데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강희를 더 세게 조일 작정이란 의미였다.

검찰의 의지가 아닌 현 정부의 의지이기도 했다.

여기서 강희는 곧바로 이 모든 수작의 원흉을 단숨에 지목할 수 있었다.

‘안대욱인가?’

판을 벌이는 건 이부성이다.

그러나 이부성이 굳이 강희를 세게 조일 필요는 없다. 현 정부 인사들 중에서도 강희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는 있어도, 강희와 원수 관계가 되고 싶어 작심을 하고, 강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다.

안대욱만 빼고.

위스프의 삼성동 테러 사건 이후, 안대욱 부청장은 이미 강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안대욱 입장에서는 강희가 길드 마스터 자리에서 나오는 걸 최상의 시나리오로 생각할 것이다.

‘위험해.’

안대욱이 정치인은 아니지만, 마법사들의 세계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그런 안대욱이 작정하고 강희를 즈믄나래에서 뽑아내고자 한다면, 이미 손발이 묶인 강희 입장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

구속수사가 두려운 게 아니다. 구속수사 과정 속에서, 안대욱이 부리는 수작에 강희가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그게 우려되는 것이다.

‘역시 안대욱을 진즉에 처치했었어야 했어.’

여기서 강희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 상황은 괜한 저울질을 할 때가 아니다. 안대욱, 그는 이제까지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처치해야 한다.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몸뚱이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는 놈을 그대로 놔 둘 수는 없다.

‘이바노프에게 부탁을 해야겠어.’

그리고 이런 상황을 위해서 이미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

그게 바로 이바노프,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 * *

볼코프의 눈앞에는 한반도가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큰 지도였다. 그려진 한반도의 크기가 성인 남자의 몸 크기와 비슷했다. 볼코프는 그런 지도 앞에 서서 지도에 압정을 하나씩 꽂았다. 큰 덩치를 가진 그가 지도에 압정을 꽂는 모습은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더군다나 볼코프가 지도에 꽂는 압정은 작은 나무토막이 머리에 달린 압정이었다. 장난감 같은 압정을 지도에 꽂는 건 어린아이나 할 법한 장난이었고, 볼코프의 모습을 더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볼코프는 정말 많은 압정을 지도에 꽂았다.

푹, 푹…….

백여 개가 넘는 압정을 꽂았다. 나중에는 압정을 꽂아 넣을 공간이 없어서, 압정과 압정 사이를 간신히 비집으며 새로운 압정을 꽂아 넣을 정도였다.

그렇게 꽂힌 압정이 한반도의 중심, 군사분계선을 가득 채웠다. 마치 압정으로 된 강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볼코프는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군.’

사자의 미소였다.

사냥을 마치고, 이제 사냥감을 포식하는 일만 남은 사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미소였다.

그런 볼코프의 미소를 그의 입가에서 지운 건, 벌컥! 통보 없이 자신의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부하였다.

부하가 들어오자마자 볼코프의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눈매가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사나운 외모가, 마치 늑대 혹은 사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외모가 더 사납게 변했다. 보는 이의 심장을 옥죄는 사나움이었고, 부하는 그런 볼코프의 기세를 마주하는 순간.

헉!

뱉고자 했던 말을 그냥 그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기 할 말을 삼킨 채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볼코프가 그의 말을 허락해 준 후에야 부하는 간신히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마스터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마스터!

볼코프에게 있어서 신이나 다름없으며, 실제로도 신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권능을 가진 그의 존재가 언급되는 순간, 볼코프는 사자나 늑대가 아닌 순한 양이 됐다.

“편지만 왔나?”

“예.”

“개봉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거울방에 있습니다.”

볼코프가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 거울의 방으로, 마법진이 그려진 그 신비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공간에는 부하의 말대로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볼코프는 주저 없이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지 한 장에는 러시아어로 짤막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처단하라.

그 편지와 함께 동봉된 사진. 사진 속 인물은 볼코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버금갈 정도로 듬직한 체격, 그런 체격을 가진 주제에 2대8 단정한 가르마와 뿔테 안경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외모와 체격이었으니까.

‘안대욱.’

한국 마법청의 부청장이자, 마법청의 숨은 실세이자, 한국 마법계를 움직이는 실세 중 한 명.

그런 자를 처단한다는 것, 암살을 한다는 것, 습격을 한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다.

위험하다. 살해는 과정도 위험하고, 그를 살해하고 난 이후의 상황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러나 볼코프는 그런 점들, 그를 죽이는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과 그를 죽이고 난 이후의 여파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그의 시종에게, 에스콰이어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에스콰이어는 그 명령을 완수할 생각만 하면 된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 볼코프는 마스터의 지령을 완수하지 못했다. 이강우의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이유조차 여전히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치욕과 굴욕, 두 번은 없다.

그렇기에.

‘내가 움직여야겠군.’

볼코프, 그는 이번에 본인이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다.

* * *

에코 분대의 분대원들은 부상자 둘을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가는 그들에게 이강우가 선물을 줬다.

“가지고 갈 때는 무겁겠지만, 내려가서 먹어 보면 충분히 만족할 거야. 요리 방법은 간단해. 그냥 구우면 돼. 삼겹살처럼 팬에 구워도 좋고, 그릴에 구워도 괜찮아.”

꽃등도마뱀의 고깃덩이를 선물로 줬다. 가는 길에 고기가 변질하지 않도록 마법으로 살짝 얼려줬다.

나름 비싼 선물이었다. 꽃등도마뱀 고기는 특유의 맛 때문에 현재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꽤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꽃등도마뱀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의 양을 생각하면, 더 챙겨 주지 못하는 게 오히려 아까웠다.

그렇게 에코 분대가 하산했다. 하지만 분대장인 강주영 중사는 하산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이강우 마법사와 함께 탐색을 시작하겠습니다.”

-알았다.

이강우는 강주영 중사가 말한 인적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고, 강주영 중사가 본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보통은 마법사와 군인, 둘만이 몬스터가 등장한 산을 탐색하는 건 허락되지 않겠지만 이강우는 달랐다. 7등급 몬스터를 장난감 다루듯 다루는 이강우가 산을 돌아다니는 건 몬스터들에게 악몽 같은 일이 될 테니까.

그렇게 그 둘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둘 사이에서 대화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그리고 군대 시절 추억을 공유하는 만큼 할 말이 많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말문이 다시 열린 건, 식사시간 때였다.

“선배님은 현재 길드 소속이십니까?”

“그렇지.”

“그럼 어디…….”

“즈믄나래.”

“대단한 곳에 들어가셨군요. 소문으로는 총꾼이 되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총꾼으로 활동하다가 은퇴했고, 운 좋게 마법사 재능이 발견되면서 즈믄나래에 입사했어.”

이강우가 식사를 준비하는 도중에 강주영 중사가 이것저것 질문을 건넸다.

은퇴 이후 총꾼으로 입사를 염두에 둔 강주영 중사 입장에서는 이강우의 지식이 어느 때보다 귀중했고, 이강우는 나름 도움이 되는 정보들은 대부분 건네줬다.

그러는 사이 식사가 완성됐다.

“이게 뭡니까?”

“꽃등도마뱀 다릿살 육회.”

이강우가 가져온 꽃등도마뱀의 다릿살. 그 다릿살을 마법으로 살짝 얼린 후에 육회처럼 잘게 썰었다. 그게 전부였다. 참기름이나, 기타 재료는 포함되지 않은 채, 그저 잘린 고깃덩이만이 접시도 아닌 스테인리스 컵에 담겨 있었다.

강주영 중사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이 육회지, 그냥 보이는 건 조리되지 않은 생고기다.

‘이걸 먹어야 하나…….’

군인인 만큼 어지간히 맛없는 요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강주영 중사였지만 쉽사리 손이 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강우가 만들어준 요리인데, 여기서 못 먹겠다고 버릴 순 없는 노릇.

강주영 중사가 포크를 이용해서 육회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씹었다.

‘와우.’

신세계였다.

보통 고기를 얼린 채로 썰면, 육질이 입 안에 넣는 순간 물컹물컹하거나 푸석푸석해지기 마련인데 지금 먹은 다릿살은 여전히 탄력이 넘쳤다. 여기에 차갑게 얼린 만큼, 입 안을 시원하게 만드는 식감은 여름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줬다.

놀라운 건 맛이었다.

‘달다.’

고기가 달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달았다.

그런데 그 단맛이 거북한 단맛이 아니었다. 강주영 중사는 자신이 이제까지 먹어봤던 무수히 많은 단 음식들 중에서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단맛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설탕 같은 것이 내는 단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또한 단맛은 적당했다. 진하지 않았다.

이강우가 그런 강주영 중사에게 조언을 해줬다.

“꽃등도마뱀은 고기에 열을 가할수록 단맛이 강해진다. 때문에 육회로 먹을 거면, 차갑게 먹는 게 낫지. 참고로 내가 준 안심은 그냥 구워 먹는 게 제일 좋아. 이것저것 해봤는데 그릴이나, 팬에 굽는 게 가장 맛을 즐기기에 좋더라고.”

“예?”

이강우의 조언에 강주영 중사가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강우가 그 모습에 실소를 머금었다.

“아니, 그냥 잘 먹으라고.”

이강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육회를 우물우물 음미하기 시작하는 강주영 중사의 얼굴은 군 입대 이후 훈련소 생활 동안 처음으로 초코파이를 먹는 훈련병의 모습 같았다. 음미하고, 아껴 먹고, 먹을 때마다 기뻐하며 동시에 먹을 것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모습.

그 모습에 이강우는 강주영 중사의 이병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이병이었던 강주영은 정말 어리바리했다. 거듭된 실수로 선임들에게 갈굼을 받은 그에게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뽀글이를 끓여줬는데 먹는 법을 몰라 그냥 봉지를 든 채로 우유 마시듯 마셨다가 입 주변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모습, 그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 참…….’

그런 그가 베테랑 군인이 되어, 최전선에서 모래시계문과 맞서 싸우는 역전의 용사가 됐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고, 훈련받은 마법사나 총꾼도 혀를 내두르는 작업을 일상처럼 행하고 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런 날이 와서는 안 됐다.

이강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참 빌어먹을 세상이지.’

강주영 중사는 용사가 맞다.

하지만 강주영 중사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에 대한 대가는 처참하기 그지없다.

위험수당이니, 뭐니 이것저것 돈을 챙겨줘도 그 액수는 보잘것없다. 공무원 마법사들이 하는 것 없이 그냥 마법사란 이유로 억이 넘는 연봉을 받을 때 강주영 중사 같은 사람들이 억이 넘는 돈을 모으려면 몇 년을 고생해야 한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목숨 걸고 활약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결국 몬스터에게 살해당하면, 누군가는 찾아볼 일도 없는 기록만 남을 뿐이다. 뉴스에서 짤막하게 기사로 다뤄주면 다행이다.

‘내 인생이 이랬겠지.’

그리고 이강우가 만약 불사황제의 권능을 얻지 못했다면, 그의 처지는 강주영 중사랑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나마 군인인 강주영 중사는 죽으면 최소한의 명예도 남기겠지만 총꾼인 이강우는 죽으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처지다.

‘모래시계문.’

결국 모든 문제의 원흉은 모래시계문이다. 모래시계문의 등장이 필요 없는 희생과 죽음과 절망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되지 않는 더욱더 큰 절망을 강요할 것이다.

이강우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스윽.

이강우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 * *

“여깁니다.”

해가 지기 전, 강주영 중사는 자신이 인적을 발견한 장소에 이강우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이강우 역시 보는 순간 확실히 사람이 있었던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최근이군.”

“예.”

더불어 흔적이 최근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몸을 눕힐 만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땅을 적당히 갈아엎는 과정에서 뽑힌 풀들이 아직 파릇파릇한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이강우의 의심과 고심이 시작됐다.

‘이 지역은 경보가 내려졌다.’

일단 현재 이강우가 있는 백석산은 몬스터 등장으로 경보가 내려온 상태다.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이 지역은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이다. 군사분계선을 앞두고 있고, 몬스터도 자주 출몰하고, 결정적으로 주변에 민가도 없다.

이런 곳을 멋대로 다니는 건 여러모로 자살행위다. 그러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고 총 맞아도 솔직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문 수집업자인가?’

물론 그렇기에 주인 없는 모래시계문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지만.

‘하지만 문 수집업자라면 지금 몸을 사릴 때인데? 문을 구해도 팔 곳이 마땅치 않을 텐데?’

최근 문 암시장은 초토화를 당했다. 정신이 박힌 모래시계문 수집업자라면, 굳이 무리를 해서 이곳까지 와서 문을 수집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흔적을 보면 한 명이야.’

더불어 이 인적은 다수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흔적이었다. 다수가 머물면 그 흔적이 더더욱 커진다. 한 명이 1의 공간을 쓴다면, 두 명이 머물 경우 2가 아니라, 3이나, 4의 공간을 쓴다.

문 수집업자들은 대개 서너 명이 움직인다. 이런 지역에서는 문을 발견하면 위치만 파악하고 그대로 놔두기보다는 문을 운반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9등급 문은 힘들지만, 그래도 운반이 가능한 크기다. 8등급 혹은 7등급 이상이면 그냥 포기하겠지만.

물론 문의 위치만 파악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 경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나중에 문을 구매한 크루나 유적 사냥 파티에게 이곳을 안내해줘야 한다. 당연히 이런 지역에 있는 문은 인기가 높을 수가 없다. 크루가 몰래 빼돌린 총을 들고,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에서 모래시계문을 찾아 움직인다? 누가 봐도 간첩이다.

그런데 혼자서 왔다?

‘미친놈인가?’

그런 경우도 없진 않다. 푼돈에 목숨 거는 작자들이 너부러진 곳이 크루 그리고 암시장이니까. 돈 수백만 원에 총 들고 유적으로 목숨을 던지는 인생 막장이 모이는 곳이 크루 소속 총꾼들이고, 암시장 관계자들이다.

하물며 문을 발견하는 건 아무래도 복권 당첨 확률보다는 높으니까, 혼자서 문을 구하려고 이런 곳에 오는 정신 나간 부류가 있다.

‘미친놈치고는 흔적이 적어.’

하지만 그런 부류는 도처에 흔적을 만든다. 비전문가에 정신 나간 놈이, 푼돈에 목숨 건 놈이 흔적을 신경 쓸 리 없다.

심지어 산에서 불도 피우고 담배도 뻐금뻐금 피우고, 먹은 것들은 그냥 버린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깨끗하다. 정말 몸만 조심스럽게 눕힌 흔적이 전부다. 강주영 중사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이런 산을 쉴 새 없이 타고, 본인 스스로도 산에서 수도 없이 밤을 보내본 그가 아니었다면 보통은 지나쳤을 흔적이다.

심지어.

“발자국은?”

“그게…….”

“잠깐.”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산에서 족적을 남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새처럼 날아다니지 않는 이상은. 이곳에도 나름 족적이 있긴 했다. 이강우가 그 족적을 쫓았다.

‘이거?’

그런데 어느 순간 보폭이 멀어졌다. 단순히 보폭이 길어진 정도가 아니다. 3미터, 5미터…… 심지어 족적이 희미해졌다.

이런 경우.

‘헤이스트!’

헤이스트 마법을 쓰는 경우에만 볼 수 있다.

‘마법사다.’

그렇다는 건 곧 이곳에 마법사가 있었다는 의미다. 마법사가 혼자서 이곳을, 민간인 통제 구역을, 아무런 통보 없이 다니고 있다.

느낌이 싸했다.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 정도 수준의 헤이스트 마법을 쓸 정도면, 못해도 3서클 이상의 마법사다.’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이었다.

‘위스프?’

자신마저 노렸던 그 테러리스트 단체의 존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설마 문을 확보하기 위해서…….’

더군다나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르는 그들에게, 이런 장소…… 정부의 관리가 힘든 장소는 그야말로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천연공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4등급 모래시계문이 넘어간다면?

물론 4등급 모래시계문을 그들이 운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신비한 능력을,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테러까지 저지르는 그들을 기존의 가치관으로 설명하는 건 위험한 짓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제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마법이란 단어가 가능케 해줄 테니까.

자세를 낮춘 채 발자국을 확인하던 이강우가 고개를 들어 강주영 중사를 바라봤다. 강주영 중사가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본인의 표정을 굳혔다.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그 순간.

타앙!

머나먼 곳에서 울린 총성과 함께 강주영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 * *

총성이 터지는 순간 이강우는 총성이 난 방향으로 달렸다.

‘제발, 살아 있어라.’

총성과 함께 크게 요동치며 쓰러진 강주영 중사의 모습이 달리는 이강우의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뿐이었다. 이강우는 쓰러진 강주영 중사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있었으니까.

2015년 이후 이강우는 많은 이들의 죽음과 죽음에 도달한 자들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이강우는 뭐든 해보려고 했지만 무엇도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수도 없이 해봤다.

그저 기도. 이강우는 그 기도를 읊조리듯 씹으며, 이제는 모든 신경을 총성이 터진 방향으로 집중했다.

복수!

그걸 운운할 생각은 없었다. 복수심은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머릿속을 어둡게 만든다.

‘거리가 꽤 돼.’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게 우선이다. 복수는 다 잡은 물고기를 상대로 해도 늦지 않다.

일단 총성은 꽤 멀었다. 산이 아니었다면, 듣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권총은 당연히 아니고, 소총도 아니다. 저격용 라이플을 이용한 저격이었다.

‘작정했군.’

이런 산속에서 저격용 라이플을 가지고 온다는 것 자체가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단발의 총성으로 표적을 정확히 맞췄다. 자신이 남긴 흔적, 그 흔적을 타깃 포인트로 삼고 이미 진작부터 대기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일을 할까?

흔적 삭제.

감춰야 할 게 있어서, 군인을, 사람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더라도 숨겨야 할 게 있어서.

달리 말하면.

‘무조건 잡는다.’

놈을 잡으면 그들이 감추고자 한 것, 숨기고자 한 것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는 총성이 들린 곳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헤이스트 마법 덕분에 길조차 없는 산속에서도 이강우는 평지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타앙!

그런 이강우를 향해 재차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이강우에게 닿았다. 달리던 이강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이강우가 균형을 잃은 자동차처럼, 고속을 유지한 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나무기둥과 부딪칠 것 같은 모양새.

그러나 어느새 자세를 잡은 이강우가 눈빛을 빛냈다. 그런 이강우의 온몸에는 투명한 수정이 덮여 있었고, 이강우의 가슴팍은 날아온 총알 때문에 거미줄처럼 수정이 깨져 있었다.

4서클 방어 마법, 크리스털 아머였다.

이 마법을 믿고 일부러 직선거리로 달려줬다. 상대방이 좀 더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저기구나.’

상대방이 그런 이강우의 수작에 넘어왔다. 두 번째 총성은 가까웠고, 선명했다.

총격에 흔들리던 이강우가 균형을 되찾았고, 다시금 가속했다. 이강우가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발구름판 삼아 도약하며 성큼성큼, 삼단뛰기를 하듯 산의 비탈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강우는 자신이 찾던 놈을 볼 수 있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다.’

사내 혹은 여성.

성별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카멜레온처럼, 주변에 동화된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다.

장비? 아니다. 저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장비는 없다. 마법만이 설명을 가능케 해준다.

그런 보호색 사이로 빼꼼히 드러낸 총구가 이강우가 등장하자마자 불꽃을 토해냈다.

투투투!

연사되는 총성과 함께.

피잉, 피잉!

크리스털 아머에 총탄이 박히며 터지는 청명한 소리가 산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강우의 온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이강우가 허리춤에 있는 총을 꺼내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노리는 곳은 상대의 발등. 지혜라면 지혜다. 이강우는 이제까지 살면서 방탄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탕!

이강우의 총성은 짧았지만, 정확했다. 상대방이 마법으로 스스로를 위장했다고 해도, 어렴풋한 그 모습에서 단숨에 상대의 형태를 가늠했고, 그 상태로 정밀한 사격을 했다.

푹!

탄환이 상대의 발등을 꿰뚫었다.

그러는 사이.

투투투!

상대 역시 쉽사리 기세를 죽이지 않은 채 이강우를 향해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피잉, 이강우가 뒤집어쓴 크리스털 아머 깨지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크리스털 아머 너머로 느껴지는 총격의 위력도 거듭 강해졌다. 상대방의 탄창이 비워질 무렵에는 총탄 두어 발이 기어코 크리스털 아머를 부수고, 이강우의 몸뚱이에 총상을 남길 듯했다.

‘토문(土門).’

이강우가 왼손 약지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라이트닝 다트.’

동시에 슬롯에 있는 라이트닝 다트 마법으로 상대를 타깃팅했다.

두 가지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쿠쿠쿠!

땅 아래에서 거대한 문이 솟구쳤고, 동시에 이강우의 오른손의 손가락 사이사이, 검지와 중지, 중지와 약지, 약지와 소지. 세 개의 틈에 번개 다트가 잡혔다.

이강우는 라이트닝 다트를 솟아오른 흙으로 된 거대한 문 위로 던졌다. 직선으로 곧게 솟구친 라이트닝 다트가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토문 너머의 상대를 향해 급하강했다.

이 순간 이강우는 멈추지 않고, 오른손바닥을 펼쳐 붉은 보석을 만들어냈다.

붉은 뿌리의 씨앗.

꽈악!

이강우가 씨앗을 움켜쥐었고, 움켜쥔 손바닥 안에 라이트닝 마법을 담아두었다. 그 상태로 이강우가 4미터 높이에 4미터의 폭을 가지고 있는 토문에 등을 기댔다. 토문을 방패삼아 숨을 골랐다.

‘해치웠나?’

이강우가 낌새를 가늠하는 사이 이강우의 몸을 덮고 있던 크리스털 아머가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강우의 전신으로 찌릿한 통증이 엄습했다.

총격의 위력은 상당하다. 관통은 되지 않았지만, 그 총격에 당한 만큼 한동안 피멍을 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불만을 품을 문제는 아니다. 총에 난사를 당했는데 피멍으로 끝나는 건, 수지맞는 장사다.

‘후우.’

숨을 돌린 이강우가 손에 잡고 있던 붉은 번개를 정말 다트 던지듯 쥐었다.

낌새는 여전히 없었다.

보통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발등을 쐈다. 핏물이 터졌다. 단발의 총성이었지만, 위력은 확실하다. 발등이 뚫린 인간이 도망쳐봤자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여기에 라이트닝 다트 마법은 충분히 위력적이다. 번개에 맞고 멀쩡한 사람은 없다.

‘상대는 마법사.’

그러나 상대는 마법사다. 마법사와의 전투, 어떤 의미에서 이강우에게는 처음이다.

확신은 금물.

이강우는 필요하다면 절망의 태양마저 꺼낼 각오였다.

‘하나둘…….’

이윽고 이강우가 시간을 가늠했다. 크리스털 마법을 다시 재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했다. 마력은 충분하지만, 크리스털 마법의 경우에는 아티팩트 자체가 사용 대기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으로 달려오기 전에 크리스털 아머를 발동했으니까.

‘셋!’

셋, 그 소리와 함께 이강우의 몸에 다시금 투명한 막이 감싸졌고, 이강우가 등지고 있던 토문 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강우가 정면의 그림을 크게 바라봤다.

그 순간 이강우의 가슴팍을 향해 불화살 한 발이 들어왔다.

상대도 상황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강우가 튀어나오는 순간 불화살을 날리고, 그 불화살이 크리스털 아머를 녹이는 사이, 탄창을 교환한 소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하지만 이강우는 자신의 가슴팍에서 활활 타오르며, 시야마저 방해하는 불화살에 놀라지 않았다. 그 불길 틈 사이로 보이는 대상을 확인하고, 손에 쥔 붉은 번개를 던졌다.

타깃은 이강우가 만들어낸 발등의 상처.

이강우가 던진 붉은 번개가 날아가는 순간, 상대도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투!

연사되는 총성이 이강우의 몸을 덮쳤다. 불길이 녹여낸 크리스털 아머는 조금 전보다 더 쉽게 깨졌다. 이강우의 몸에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더욱 강력한 통증이 엄습했다. 관통상만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수준, 피멍이 아니라, 그냥 살점이 터지고, 뼈에 금이 가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의 총격이었다.

그 총격이, 조금 더 집중됐다면 이강우에게 치명상을 줄지도 모르는 총격이…….

“큭!”

신음 소리와 함께 이강우의 가슴팍을 지나, 머리를 지나, 하늘로 향했다. 총을 들고 있던 사내가 경련을 일으키며 총구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다.

붉은 뿌리.

놈이 순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통증 앞에서는 아무리 힘든 훈련을 거친 단련된 실력자도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강우가 다른 권총을 꺼내, 이제는 드러난 상대의 얼굴을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타앙!

세 발의 총성이 났다. 상대를 죽이고 한 발의 총성 그리고 두 번의 확인 사살이었다.

* * *

하늘 위에 떠오른 헬기에서 내려온 들것 위로 강주영 중사의 몸이 올라갔다. 강주영 중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하얀 천은 덮이지 않았다. 시체는 아니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목숨만 구했지.’

정확히는 목숨만 구했다. 총탄이 가슴팍을 관통했다. 방탄 조끼 덕분에 위력이 감소했지만, 관통상으로 폐를 다쳤다. 그 후에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크게 부딪치며 두개골에 골절이 생겼다. 보다 자세한 건 정밀 조사를 받아야 알겠지만 동공 상태 등을 보면, 그저 목숨만 붙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강우는 이 상황에서 이를 꽉 물었다.

자책은 없다.

이강우가 이곳에 오자고 했고, 그게 강주영 중사를 죽이는 일이 됐지만, 그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소란이 다른 누군가를, 더 많은 희생을 야기했을 것이다.

대신에 이제는 이강우는 참았던 분노를 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놈을 죽였다. 사내였고, 외국인이었다.

하얀 피부에 머리카락은 삭발하듯 밀어버린 채, 얼굴 전체를 문신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런 사내의 몸에서 다섯 개의 마법 아티팩트가 발견됐다. 개중 하나는 4서클 마법이었다. 동시에 사내가 저격을 하던 장소, 그 주변에 숨겨 두었던 가방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방에서는 현금과 최대한 부피를 줄인 식량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빈 음료수캔이 가득 했다.

‘기필코 터뜨려준다.’

그것들이 단서가 될 것이다. 그것을 도화선 삼아, 이강우가 분노를 불태울 생각이었다. 나중에는 놈들을 폭발시킬 생각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강우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군인이 아닌, 마법청 직원이었다. 마법청이나 군 입장에서도 놀랐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4등급 모래시계문 확보라는 중요 과제를 비밀리에 처리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설마 외국인으로 보이는 마법사에게 군인이 습격을 당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이런 전투를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스페셜리스트였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4서클 마법사가 고작 이런 일을 위해 훈련을 받고, 그렇게 훈련 받은 마법사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기록된 바가 없다.

하물며 이강우가 당할 뻔했다. 6서클 마법사, 이 귀중한 나라의 보배가 상처라도 입었으면, 아마 이렇게 상태의 심각성을 논하는 상황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저 모두가 정신이 나간 채, 일을 수습하기 바빴겠지.

“예, 괜찮습니다.”

이강우의 대답에 마법청 직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강우가 멀쩡한 건 눈으로 봤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이후 이강우는 상황 설명을 해줬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전부를 말해줬다.

이야기를 들은 마법청 직원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전후 사정을 보면, 위스프 소속일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

마법청 직원도 곧장 위스프를 의심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짓을 할 만한 족속은 위스프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기서 이강우가 마법청 직원에게 말했다.

“상대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 전부는 정리해서 건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저도 산을 내려가겠습니다.”

“헬기가 다시 올 텐데, 기다리시죠?”

“헬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제 발로 내려가는 게 더 빠릅니다. 산은 알아서 내려가겠습니다. 대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제가 잡은 꽃등도마뱀을 아래로 운반해 주십시오.”

이강우의 말에 마법청 직원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다른 말도 그렇지만, 이 와중에도 몬스터 사체를 챙기라는 이강우의 말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섬뜩했다.

사람이 죽었고, 사람을 죽였는데, 몬스터를 챙긴다?

‘이 인간도 괴물이군.’

마법청 직원인 이런 이강우를 굳이 더 잡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런 마법청 직원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산을 내려가는 이강우가 가슴팍을 만졌다.

빈 음료수 캔의 존재가 느껴졌다.

* * *

큰 사건이 터졌지만, 4등급 모래시계문 탐색 작전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기존 병력의 곱절이나 되는 병력이 추가로 증원되면서, 더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젠장.’

하지만 그 탐색 작전에서 이강우는 배제됐다. 이강우는 하산하자마자 쫓겨나듯,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강우 본인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법청 관계자는 이강우가 다시 양구 지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지 않았다.

이강우가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그에 대한 답변은 안대욱 부청장이 직접 전화를 통해 해줬다.

-이강우 씨가 해치운 자는 위스프의 조직원, 고르바초프였습니다. 이미 몇 번의 테러 사건의 주역으로 지목되어 국제 지명 수배를 당한 위스프의 행동대장격 인물이었습니다. 위스프의 조직원이 다시 활동을 하는 상황에서 이강우 씨의 위험한 행동은 마법청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상대로 위스프의 조직원이었다. 그것도 보통 조직원이 아니라, 얼굴이 확인되는 순간 몇 십 분 만에 신원이 확인될 정도로, 위스프에서는 얼굴이 알려진 놈이었다.

그런 위스프의 주요 조직원이 활동했던 지역에 이강우를 투입하는 건 어려웠다. 예전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 누구도 아닌 비수 김지홍이 위스프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강우도 납득했다. 머리로는 안대욱 부청장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신세라니.’

그러나 그 통보를 받는 순간, 이강우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강주영 중사에 대한 한없이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강주영 중사는 앞으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가 됐는데, 본인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장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다니?

한편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된 치료 마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강주영 중사가 중태에 빠진 건, 머리를 다친 탓이지만 그래도 이강우가 김수애 수준의 치료 마법을 배웠다면, 좀 더 상황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치료 마법은 대마도사의 자질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니까. 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머리나, 내부 장기 같은 걸 치료할 때 어설픈 치료 마법 사용은 그냥 상처에 시멘트를 넣어 출혈만 막는 사태가 될 수도 있다.

김수애도 이강우의 부탁으로 강주영 중사의 상태를 보며 말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총상은 치료 가능하지만, 머리는 치료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그래도 만약 이강우가 치료마법을 어느 정도 수준이라도 쓸 줄 안다면, 이번과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 도움이 될 터.

‘머리 나쁘다고, 못한다는 핑계는 개나 줘야지.’

못하겠다, 그런 말은 이제 필요 없다. 소중한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앞에서 멍청해서 구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멍청함을 뛰어넘는 미련한 소리다.

‘위스프…….’

한편으로는 이번 일의 원흉인 위스프에 대해서 이강우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분노를 품었다.

어쨌거나 더 이상 양구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이강우는 곧장 세종시 즈믄나래 유적 연구소로 향했다.

권재용 박사를 통해 몰래 빼돌린 음료수캔의 정체를 확인해볼 속셈이었다. 어쩌면 이강우를 분노케 한 위스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는 단서가 캔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강우가 강원도 양구에서 세종시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운전하다 볼일을 보기 위해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때.

-위스프와 전투를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류복희, 그가 예고 없이 전화를 했다. 그런 그는 이강우가 위스프와 교전을 치렀다는 특급 비밀 정보를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강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별로 좋지 못했던 심기가 좀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틀어졌다.

‘대단한 정보력이군.’

류복희가 가진 정보망은 무서울 정도다. 이 정도로 속보가 잡히는 걸 보면, 류복희도 마법청 내부에 제대로 된 정보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보망을 이용해서 위스프의 행동을 파악하고 이강우에게 미리 언질을 해줬다면? 잘하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류복희와의 연락마저 너무 일방적이다. 이강우는 문제가 생기면, 류복희에게 연락한 수단이 변변치 않은 반면, 류복희는 일이 터지면 언제든 이강우에게 연락을 할 수 있다.

물론 류복희의 도움에는 감사한다. 그의 심정과 행동도 이해한다. 초월적인 존재를 상대로, 수면 밑에서 대항 세력을 조직해야 하는 류복희 입장에서는 정보망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그 정보망이 그들에게,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에게 들킨다면 그 시간부로 그 정보망은 공중분해가 될 테니까.

“정보가 빠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미리 알려주셨으면 더더욱 감사했을 텐데.”

때문에 이강우가 투정 섞인 듯한 말을 내뱉은 건, 류복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냥 볼멘소리였다. 자신의 처지, 최근 겪은 안타까운 소식에 대한 볼멘소리.

-죄송합니다.

그런 이강우의 심중을 파악한 류복희가 곧바로 사과를 했다. 이강우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짧게 스스로를 자책한 이강우가 곧바로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냥 한 소리입니다. 옛 동료가 크게 다쳐서…… 그냥 잊어주십시오.”

이강우가 곧장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 이강우에게 류복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크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지도 모를 만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스프의 조직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시면 좋을 듯합니다.

모든 걸 말해줄 순 없지만, 그래도 이강우가 알아두면 좋을 만한 정보를 꺼내줬다.

“감사히 듣겠습니다.”

-위스프의 조직도는 단순합니다. 일단 위스프는 크게 3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열 1위부터 3위가 각각 조직의 보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마스터라고 부르는 자가 있습니다.

보스 위에 마스터.

“조금 유치한 호칭이군요.”

-더불어 서열 1위부터 3위까지는 에스콰이어라고 분류됩니다.

“에스콰이어…… 훨씬 더 유치한 표현이군요. 신발 이름도 아니고.”

-신발 이름? 그게 뭡니까?

“아닙니다. 별거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셔도 됩니다.”

류복희의 반문에 이강우가 제 헛소리를 대충 얼버무렸다. 류복희가 멈춘 말을 이어갔다.

-에스콰이어들의 호칭이 유치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들은 정말 강합니다.

강하다.

그 표현을 말하는 류복희의 어조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들은 몬스터가 아니라 마법사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된 마법사들입니다.

“아…….”

-실제로 비수 김지홍이 서열 3위인 볼코프에게 당했습니다. 비수 김지홍 역시 마법사를 상대로 전투를 제법 치러본 사내입니다. 그런 그가 어디도 아닌 본인의 저택에서 당했습니다.

꿀꺽!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맞는 말이었다.

이강우는 상처 없이 위스프의 조직원인 고르바초프를 해치웠지만, 만약 상대의 숫자가 두세 명이 넘어갔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상처가 없다는 것도 과언이다. 이강우의 온몸에는 지금도 피멍 자국이 역력하다. 심지어 이강우에게 붉은 뿌리라는 권능이 없었다면, 피멍 자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이강우의 현재 약점이기도 했다. 이강우는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는 완벽하다. 좀 오만하게 지껄이면, 3등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승산을 점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사를 상대로 이강우는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그냥 없다고 봐야 한다. 비단 이강우만의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몬스터 사냥할 생각을 하지, 마법사를 사냥할 생각은 안 한다.

위스프의 위협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위협적이란 의미다.

-그리고 서열이란 말 그대로 서열입니다. 볼코프보다 강한 실력자가 위스프에는 둘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일단은 이름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서열 2위는 리란칭입니다.

“중국인이군요.”

중국인 이름을 가진 마법사.

자연스럽게 이강우의 머릿속에 칠성문이 떠올랐고.

-칠성문 소속이었지만, 배신자입니다.

예상대로 칠성문이 언급됐다.

-때문에 그는 칠성문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중심으로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인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의 역할은 인력 수급입니다. 인도 그리고 중국,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마법사가 많은 나라이니까요.

“서열 1위는 누구입니까?”

-라미 하마드, 팔레스타인 출신의 마법사입니다.

팔레스타인이란 말에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 최악의 조합이군.’

팔레스타인은 마법의 시대에서 아프리카 국가만큼이나 피해를 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이 문제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마법의 시대 속에서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마법 강국이 되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팔레스타인과의 지리멸렬했던 전쟁을 갑자기 압도적인 우세로 이끌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은 조만간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런 팔레스타인 출신이 강대국들의 약소국 약탈에 저항하는 위스프란 조직 내에서 최고 서열이라면…… 아마 테러와 폭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성난 상어를 피로 채운 수조에 집어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셋하고는 절대 싸우지 마십시오.

설명을 마친 류복희가 이번에는 경고를 했다.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십시오.

“그 셋 중에 제가 아는 얼굴은 하나뿐입니다.”

-우편으로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이강우 씨는 귀중한 전력입니다. 절대 목숨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이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마법사들입니다. 몬스터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기술자라고 해도 됩니다.

이강우는 거듭 자신을 걱정해주고, 자신에게 경고를 하는 류복희의 목소리에 예,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싸우라고 해도 싸우고 싶지 않아서, 도망칠 방법부터 궁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하게 예, 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피하라니…….’

만약 이강우가 그들과의 싸움을 피한다면, 과연 누가 이강우를 대신해서 그들과 싸울까? 안중현? 김재범? 하선우? 혹은 채유리?

‘그럼 나 대신 누가 다치는 거지?’

분명한 건 이강우가 피하면 다른 누군가가 다친다. 그 누군가가 전혀 모르는 타인일 수도 있지만, 이강우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 타인이라면 눈 한 번 질끈 감고 피하겠지만 소중한 사람이 희생양이 된다면…….

‘그건 이제 못 참아.’

이강우는 싸울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오기 위해 이강우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유적 사냥이란 도박판에 칩처럼 베팅해오는 삶을 살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때문에 이강우는 예, 라는 대답을 쉽사리 뱉지 못했고, 류복희가 그런 이강우의 의중을 눈치챈 듯 거듭 강조했다.

-절대 싸우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이강우는 기어코 예,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안대욱 부청장은 눈앞에 너부러진 보고서를 바라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위스프의 행동대장이 왜 양구 지역에, 그것도 4등급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예상지역에 있는 거지?’

골치 아픈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심지어 지금 안대욱 부청장은 즈믄나래 길드로부터 강희를 축출하기 위한 작업으로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강희를 축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결단이 무조건 필요했다. 블랙 스택과의 협상은 단순히 마법청의 자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니까.

‘강희.’

여기서 안대욱 부청장은 다시 한번 강희를 의심했다.

삼성동 코엑스 테러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인 강희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강희는 지금 이대로 놔두면 너무 힘이 커졌다.

만약 그가 이대로 불구속수사를 받았다면, 그는 오히려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강희의 행동과 결정이 차기 대선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안대욱 부청장이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 택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강희를 이대로 놔두면 차후 정권을 잡아도 강희와 즈믄나래에 끌려다닐지 모르니까, 이번에 확실하게 강희를 뽑아내고 더 쉽게,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을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자리에 앉히자고.

그런 상황에서 다시금 위스프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강희와 위스프가 한패라면, 좀 더 과감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검찰 수사를 통해 강희에게 집행유예가 아니라 실형을 내릴 정도의 과감한 행보가 필요하다.

‘설득 카드는…….’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다. 현 정부 입장에서는 이 이상 강하게 움직이면, 역풍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검찰을 통해 사람을 작업할 때는 적정선이 중요하다. 무작정 죽이려고만 하면, 당하는 쪽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동귀어진의 각오로 덤벼든다. 그럼 벌집이 되는 거다.

때문에 정계 쪽이 아닌 다른 쪽을 움직여서 압박을 해야 했다. 그 다른 쪽은 뻔하다.

안대욱이 수화기를 들었고, 비서에게 연락을 했다.

-예, 부청장님. 말씀하십시오.

“전경련회장단 회의가 언제였지?”

-비공식 회의로는 7월 6일 수요일에 잡혀 있습니다.

“참가자 명단은?”

-확보했습니다. 곧바로 출력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안대욱 부청장이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음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마법청 부청장 안대욱이라고 합니다. 채병호 회장님과 통화 가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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