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6화 (46/66)

46화. 비무장지대

그곳은 처참한 땅이었다. 황무지라고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땅. 거듭된 혹사 앞에서 더 이상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생명이 말라버린 땅이었다.

그 땅 위로 다시 한번 고난이 일어났다.

쩌저적!

벼락이 떨어졌다. 붉은 빛 벼락이었다. 아름다운 벼락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크레이터 안은 떨어진 붉은 벼락이 채우고 있었다.

직경 10미터짜리, 벼락으로 만든 붉은 카페트.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치직, 치직!

그렇게 만들어진 벼락 카페트는 한 동안, 대략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형태를 유지한 뒤 사그라졌다.

그렇게 벼락 카페트가 사그라진 땅 위로.

쿵!

이번에는 거대한 주먹이 떨어졌다. 주먹은 거대한 불덩이를 조각해 만든 것 같았다. 무시무시했고, 위엄이 넘쳤으며, 위력 역시 엄청났다. 굉음과 함께 바닥에 깊이가 성인 남자의 무릎 부근까지는 잠길 만한 깊이의 주먹 자국을 만들어냈다.

화르르르!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불주먹은 이제 불길이 되어 자신이 만든 주먹 모양 구덩이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땔감조차 없는데도 거침없이 피어오르는 불길의 열기가 범상치 않았다.

범상치 않은 만큼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런 불길을 향해 세 번째 고난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폭풍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 눈에 보였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 모양이 칼날 형태였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칼날이었다. 긴 것, 짧은 것…… 무수히 많은 형태, 크기의 칼날이, 바람으로 된 칼날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스스스! 섬뜩한 소리를 내며 접근했다.

샤샤샥!

그렇게 칼날폭풍이 불길을 다듬기 시작했다. 가지치기를 하듯, 타오르는 불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불길이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꺼져버렸다.

경천동지.

그 광경을 설명하기에는 그 표현 외에는 마땅한 표현이 없는 상황.

‘라이트닝 필드, 권염(拳炎), 칼날폭풍…….’

그 광경을 만든 건 다름 아니라 이강우였다.

이강우는 지금 문 관리센터 내에 위치한 마법 연습장에서 마법을 테스트하는 중이었다. 더불어 테스트 대상 마법은 5서클 마법들!

‘위력은 만족스럽군.’

날을 잡았다.

이강우는 자신에게 맞는 5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구하기 위해, 날을 잡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보통은 굳이 그렇게 날을 잡을 필요는 없다. 보통의 마법사들에게는 맞는 마법이 제한적이니까. 고른다기보다는 그냥 자기한테 맞는 마법을 찾으면 거기서 끝이다.

그러나 이강우에게는 대마도사의 자질이 있었다. 어떤 종류의 마법도 완벽하게 쓸 수 있는 재능이. 그렇기에 이강우는 정말 본격적으로 날을 잡았다. 문 관리센터에 있는 모든 5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를 테스트해 볼 각오를 한 것이다.

‘세 개 다 가지고 싶단 말이야.’

물론 이강우에게는 지금 사용한 마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있다.

바츠무의 손!

절망의 태양!

붉은 뿌리!

서클이란 잣대로 구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들이다. 6서클 마법은 물론 7서클 마법조차도 비교를 거부한다.

그래서 이강우는 이번 기회에 그 세 가지 마법에 대한 의존도를 최대한 줄일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절망의 태양과 붉은 뿌리에만 의존할 수는 없지. 여기서 확실하게 내 주력 마법을 구해야 돼.’

의존도를 줄이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너무 강력하다는 점이다. 너무 강력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쓸 수가 없다. 팀 포식자, 믿을 수 있는 동료 앞에서는 쓰지만 그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열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열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에게 그 마법을 보여주면, 무조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이강우는 5서클 마법의 위력에 만족했다. 전부 마음에 든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너무 잘나서 고민이란 게 이런 의미였군.’

다 몸에 잘 맞아서, 뭔가 하나를 고르는 게 힘들 정도.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리볼버가 아티팩트 룸을 만드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겠군.’

덕분에 왜 리볼버가 아티팩트 룸 같은 걸 만드는지 이해가 됐다. 마법에 대한 욕심은 한 번 불이 붙으면 꺼질 수가 없다. 쓰지 않더라도 마법 아티팩트를 자기 마음 내키는 곳에 보관할 수 있는 건…… 마법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만들어 준다고 했지?’

이강우가 묘한 수집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각, 이강우의 마법 연습 장면을 카메라를 통해 지켜보던 직원들은 기겁했다.

“저, 저거 뭐야?”

5서클 마법 아티팩트는 정말 귀한 취급을 받는다. 연습을 하더라도, 당연히 관리자가 붙는다. 마법 아티팩트의 사용 기록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록된다.

당연히 이걸 관리하는 자들은 전문가다. 이런 일만 전담을 하는 만큼, 5서클 마법을 쓰는 광경은 5서클 마법사보다 더 많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연달아 마법을 쓰는 게 가능해?”

“그것도 완벽하게 썼어.”

“3서클이 아니라 5서클 마법 맞지?”

5서클 마법 테스트를 할 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거의 30분 단위로 휴식을 가진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약간의 시간만 두고, 연달아 5서클 마법을 쓰는 부류가 있다.

6서클 마법사들이다.

‘맙소사.’

당연히 전문가들이 이강우가 보여주는 능력을, 그의 힘을 모를 리가 없었다.

모두가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인정했다.

‘6서클 마법사다.’

‘5서클이 아니라 6서클 마법사였구나.’

‘심지어…… 대마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어.’

이강우는 6서클 마법사다!

사실 지금 이강우는 자신이 6서클에 도달한 걸 마법청에 알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최근 바쁜 일정 때문에 기회도 없었다.

더욱이 원래 6서클 마법사란 게 본인이 6서클이다! 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테스트를 통해서, 검증 과정을 거쳐서 6서클 인증을 받게 된다. 며칠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그 과정을 소화할 만한 시간이 이강우에게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마법 테스트는 그 검증 테스트가 된 셈.

누군가 수화기를 들었다.

‘통보해야지.’

수화기를 든 직원이 곧바로 안대욱 부청장에게 연락을 했다.

* * *

‘6서클이라니…….’

안대욱 부청장은 이강우가 5서클 마법을 연달아, 완벽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대단하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6서클 마법사가 탄생했던 경우가 있었나?

있긴 있다. 채유리 때가 그랬다. 그녀도 쥐도 새도 모르게 6서클 마법사가 된 케이스이긴 하다.

문제는 그런 채유리가 6서클 마법사가 되는데 이강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그때 일 덕분에 이강우가 4등급 유적 사냥 파티에 참가할 수 있었다.

‘대체 놈의 정체는…….’

이 순간 안대욱은 이강우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이제까지 안대욱은 이강우를 언제든 중요한 상황에서 내밀 수 있는 에이스 카드 중 한 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강우는…… 게임 체인저다.

이강우의 발전 속도를 보면, 그가 7서클 마법사가 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그가 7서클 마법사가 되면?

한국 마법계가 이강우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7서클 마법사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 중 상당수 마법사들이 이강우와의 접점을, 이강우가 좋든 싫든 그와의 접점과 연결점을 원한다는 점이었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마법사들에게는 꿈과 같은, 희망과 같은 존재다. 그걸 국내에서 유일하게 생산할 수 있는 이강우와 적대 관계가 되려는 마법사는 없다.

여기에 남은 두 명의 6서클 마법사 역시 이강우의 편이다. 명궁과 비수의 태도 변화를 모를 안대욱이 아니다. 남은 6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인 채유리와는 이미 연인이다.

심지어.

‘채유리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강우가 채유리와 결혼을 하면 그 영향력이 적지 않을 터.’

채유리의 배경도 보통은 아니다. 채유리가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활동하면서도, 정부 차원의 터치가 없었던 건 즈믄나래의 관리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이강우가 이부성 마법청장과 접촉한 꼬리를 잡았다. 접촉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이부성이 칠성문과의 다리를 만들려고 온갖 인맥을 통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 건 안대욱 부청장이 보고 이전에 예측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부성마저 이강우과 손을 잡으면…….’

이부성은 정치인이다. 필요하다면 간쓸개도 건네주는 영악한 인물. 제아무리 짓밟혀도 기회만 되면 언제든 권력을 잡고 부상할 수 있는 부류의 인물이다.

만약 이강우가 7서클 마법사가 되면, 이부성은 그의 훌륭한 아군이 될 것이다. 그를 이용해 정치계에서 영향력을 펼치려 할 것이고, 그 정치력은 이강우의 정치력이 될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이부성이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애초에 현 집권당인 여당과도 아주 긴밀한 관계고, 현 정권과는 당연히 때놓을 수 없는 관계다.

막말로 현 정부와 관계가 안 좋은 인간이 현재 최강의 정부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청의 청장이란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차후 대선에서 여당이 다시 한번 정권을 잡는다면, 마법청장의 자리는 그대로 이부성이 될 터.

그야말로 정재계 그리고 마법계에 걸쳐 막강한 이강우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설마 여기까지 그림을 그린 건가?’

안대욱은 이쯤 되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강우에 대한 경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그렇다고 안대욱이 이강우를 흔드는 건 불가능했다.

이유? 이강우를 흔들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안대욱 부청장에게도 이강우는 귀중한 패다. 타고 올라야 하는 호랑이지, 독약을 먹여 죽일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이강우가 완벽한 지위를 구축했다.

‘대단한 놈이군.’

이강우를 죽인다는 건, 이강우에게 발을 걸친 자들과 적대관계가 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그 발을 걸친 자들이 보통 자들이 아니다. 그들을 적으로 두면 안대욱도 파멸이다.

그럼 안대욱이 할 수 있는 건?

‘기호지세.’

하나다.

이강우를 밀어주는 거다.

원래도 그래왔지만, 이제부터는 이강우를 중심으로 무대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후우.”

이 순간 안대욱 부청장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내가 이제 와서 마법사 한 명에게 이렇게 끌려다닐 신세가 될 줄은 몰랐군.’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절대적 카리스마로 자리 잡은 자신이 한 명의 마법사를 두고 이렇게 속이 쓰린 경우가 생길 줄이야?

‘문제는 즈믄나래군. 이강우와 그가 이끄는 팀 포식자는 즈믄나래 길드 출신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어쨌거나 이강우의 등에 올라타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

차라리 이렇게 되면…….

‘팀 포식자를 즈믄나래로부터 떼어낼 필요가 있어.’

최소한 즈믄나래가 팀 포식자를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최소한 이강우란 호랑이가 즈믄나래란 목줄에 끌려 다니는 일 만큼은 막아야 한다.

안대욱은 이제 더 이상 즈믄나래의 마스터, 강희를 믿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이강우와 팀 포식자를 쥐어주는 건 잠재적 살인마에게 미사일 발사 버튼을 쥐여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안대욱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 * *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되네.’

숙소로 돌아가던 이강우는 마법 아티팩트 테스트를 마친 이후 안대욱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보였다. 화상 전화로 통화를 하던 도중 이강우가 6서클이란 사실을 밝히는 순간, 안대욱의 놀라던 모습이. 그 위엄 넘치는 사내가 자신이 놀란 기색을 그렇게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사람이었군.’

이강우는 안대욱이 터미네이터처럼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그때 이후로 상황이 변했다.

‘이렇게 되면…… 6서클도 받을 수 있겠어.’

6서클 마법사가 됐는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지원 받을 수 있다.

‘어디 보자…… 그럼 내가 지급 받을 수 있는 게 가름칼, 빛화살 그리고 아이스큐브인가?’

그리고 현재 한국 정부가 소유한 6서클 마법 아티팩트는 3개다.

개중에서 가름칼과 빛화살 마법은 이강우도 이미 직접 위력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지. 아니, 아주 좋아.’

절망의 태양과 궁합이 잘 맞는 마법들이다. 일단 피만 보면, 그 이후에는 절망의 태양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최근 4등급 유적 사냥을 통해 확보한 마법, 아이스큐브 역시 위력은 대단하다. 순식간에 지정된 공간을 얼음으로 채우는 이 마법은 견고한 얼음벽을 만들 수도 있고, 대상을 얼음 공간 안에 가둘 수도 있다.

‘6서클 마법이라…….’

지금 이강우에게 6서클 마법이 주어진다면, 3등급 몬스터와도 한 번 해볼 만하다.

‘그 후에 7서클 마법을 확보하면, 그다음은 2등급 몬스터인가?’

이 순간 이강우의 고민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면, 인류는 강해진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준 마법은 인류를 살찌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무기, 자신들이 인류에게 준 무기에 도리어 당할지도 모른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일 터.

당연히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충분히 이에 대한 대응책을, 계획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세계가 알아서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마련해둔 계단을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가도록 만들기 위한 함정.

‘내가 봤을 때 이들의 목표는 결국 1등급 모래시계문이 그 누구도 클로즈하지 못한 채 열리는 거다.’

안중현이 권재용 박사로부터 얻어온 정보를 토대로 보면, 1등급 모래시계문은 자력으로 열리지 않는다. 필시 어떠한 도움을 받아야 열릴 수 있고, 또한 열리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즉, 이제까지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벌이는 모든 일들은 시간 벌이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1등급 모래시계문을 닫느냐 혹은 파괴하느냐 또는 그 문 너머에 있는 괴물을 무찌르느냐, 그게 인류의 마지막 과제가 될 터.

그 마지막 과제를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게 이강우의 역할이 될 것이다.

‘어휴.’

이강우는 그날을 상상하며, 앓는 소리를 뱉었다.

‘영웅 같은 건 되고 싶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설마 자신의 운명이 이런 식으로 흐르게 될 줄이야. 처음 마법사가 됐을 때 기뻐하던 자신의 머리통에 꿀밤이라도 제대로 한 방 먹여주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다.

그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이강우는 부담감에 속이 쓰리기 시작한 듯, 제 손으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밥이나 먹자.’

아무래도 뭐든 먹어서 속을 달래줘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이강우가 숙소에 도착했다. 곧바로 이강우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킁킁!

이강우의 코가 개처럼 벌렁거렸다.

‘뭐야?’

심각한 수준의 탄내가 이강우를 반겼다. 이강우의 머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굴렀다.

‘부, 불을 켠 채로 나왔나?’

이강우는 육수 같은 걸 우려낼 때 불을 켜둔 채로 밖에 나왔다가 큰일이 날 뻔했던 적이 두어 번 있다.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숙명이다.

하지만 기억을 돌려도 이강우가 뭔가를 해둔 채로 밖으로 나온 기억이 없었다. 오늘 마법 테스트를 앞두고 먹은 건 어제 사둔 삼각김밥하고 라면이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가 현관을 지나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부엌에는 채유리가 있었다. 탄 것들이 가득 한 프라이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채로.

“유리야!”

이강우가 그녀를 보자마자 놀랐고, 채유리 역시 이강우가 갑자기 등장하자 헉! 하고 놀랐다.

“무슨 일이야?”

이강우의 물음에 채유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새하얀 피부, 딸기처럼 변했다. 금발머리칼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그런 상태로 우물쭈물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이게…….”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란 모양. 여러모로 이강우가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이강우는 그런 채유리의 주변을 살폈다.

‘아이고.’

익숙한 것들이 보였다. 시중에 집에서 간단히 해먹으라고 나오는 팬케이크 제품과 초콜릿 포장지들,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 달걀들. 누가 보더라도 요리를 하려다가 망했을 때 나오는 풍경이다.

당황했던 이강우가 당혹감을 얼굴에서 지우고, 대신에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여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빠, 유리 언니가 요즘 엄마랑 나한테 자주 전화해서 오빠 좋아하는 요리를 물어보더라고. 당연히 만들기 쉬운 요리를 말해줬어. 팬케이크에 초콜릿 녹여서 꿀하고 섞어 주면 좋아 죽는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뭐가 나오든 유리 언니가 주는 거면 무조건 먹어. 배 터지도록 먹어. 괜히 이러니저러니 맛 가지고 품평하지 말고. 저번에 엄마 요리 먹으면서 간이 이상하다고 투정 부렸다가 엄마 기분 상해서 다음날 맨밥 나온 거 잊지 않았지?’

그다음 말도 떠올렸다.

‘그리고 둘 다 애도 아닌데,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혼이라도 해야지. 상견례 언제 할 거야? 언제까지 어영부영 연애만 할 수는 없잖아? 유리 언니는 꼭 잡아. 오빠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가 헛소리하지 마! 끊어! 잘 지내! 그리 말하고 통화를 끊은 기억도 떠올랐다.

‘아이고, 귀여워.’

김수애가 요리로 이강우를 유혹하려는 걸 보고, 위기감을 느끼고 평생 해본 적 없는 요리를 시도하는 모습. 심지어 앞치마까지 차려입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을 리가 없다.

이강우는 그 미소를 지은 채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쓸 수 없게 된 재료들을 쓰레기봉투에 단숨에 담았다. 그리고는 채유리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리가 해주는 거 꼭 먹고 싶으니까 파이팅!”

여기서 이강우가 조언을 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이강우의 말을 따라서 채유리가 만든 요리를 이강우가 먹으면, 그건 그냥 이강우 요리다. 채유리가 노력해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딱 한 번 성공해서 나온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게 이강우의 역할이다.

그런 이강우의 마음이 통했는지, 채유리가 이강우의 그 말에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으로 상황이 정리되나 싶었다.

그때 채유리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평범한 벨소리가 들렸고, 채유리가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에 싱크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스마트폰에 손을 가져갔다.

이강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러다 물에 빠지면…….’

여러모로 이런저런 부분에서 허점투성이의 여인이다. 실제로도 사회성도 떨어졌다. 그나마 이강우랑 지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상대하면서 많이 나아진 거지, 처음에는 정말 이상한 여인이었다. 설마 그때 본 여자랑 이렇게 연인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중현 형님이 이어준 인연이군.’

만약 안중현이 이강우를 스택 레코드 공부를 위해 지하에 처박아두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만남인 셈.

‘가만, 그럼 결혼식 주례도 형님을 모셔야 하나? 하지만 아무래도 중현 형님 나이가 주례를 보기에는 젊은 편인데…….’

이강우가 곧바로 망상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망상은 통화를 하면서, 곧바로 굳어지는 채유리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사그라졌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나중에 꼭 전화 드릴게요. 네, 알았어요. 꼭 전화 드릴게요. 거짓말 아니에요.”

통화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뭐지?’

채유리가 저런 식으로 누군가와 말하는 건 이강우도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통화를 하는 그 어조가 마치…… 사이가 정말 안 좋은 부모님과 통화하는 듯한 분위기의 어조다.

이강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부모님하고 통화를 하는 건가?’

이강우의 가족과 통화할 때는 애교 넘치는 요조숙녀가 따로 없던 채유리인데, 막상 본인의 친부모님과 통화를 하니까 저런 식이라니.

‘그래서 부모님 소개를…… 아이고.’

아무래도 채유리 부모님과의 상견례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할 것 같다.

통화는 진행될수록 더더욱 무거운 분위기로 박혔다. 채유리는 어느 순간부터도 대답도 안 했다. 굳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가만히 동상처럼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을 때 이강우는 곧장 채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무슨 일 있었냐? 무슨 통화를 했는데 표정이 그러냐? 부모님하고 통화했냐? 싸웠냐? 그런 질문 대신 내뱉은 그 말.

그 말에 채유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부모님 소개해 드릴게요.”

“응?”

“어떻게든 소개해 드릴게요.”

이제는 이강우가 당황했다.

‘아니, 뭐 꼭…….’

분명 이강우가 먼저 채유리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런 묵직한 분위기를 경험했는데 굳이 지금 당장 상견례나 인사를 하러 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싫다고 말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여기서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돌려 말하는 건 더 웃긴 소리다. 자기 연인이 각오를 다지고 부모님을 소개해 주겠다는데 거기서 못하겠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강우는 그런 사내는 아니다. 이강우의 자존심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는다.

“알았어. 날짜만 잡아.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강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채유리와 이강우의 연애전선에 태풍이 한 번 몰아칠 모양이다.

* * *

“세무조사에 검찰소환.”

강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앞으로의 일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선을 앞두고 날 제물로 삼겠다, 이건가?’

국세청과 검찰이 즈믄나래 그리고 길드 마스터인 강희를 타깃으로 잡고 표적수사를 시작했다.

시발점은 다름 아니라 위스프의 삼성동 테러 사건.

그 테러 사건 이후 현 정부와 마법청에 대한 지지율과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

하물며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 야당은 현 정부와 마법청 그리고 여당을 규탄하기 위해 연신 위스프 테러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슈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의외로 득을 본 건, 신속하게 테러를 진압한 즈믄나래였다.

야당이 즈믄나래를 언급하면서, 일개 길드만도 못한 현 정부와 마법청의 무능을 지탄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들의 활약상이 유튜브 등을 통해 올라오면서, 더더욱 이슈화가 됐다. 즈믄나래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 즈믄나래 길드가 상장사였다면, 아마 강희는 어마어마한 신흥 대부호가 됐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과 마법청 입장에서 즈믄나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니, 그 이전부터 즈믄나래는 부담스러웠다. 즈믄나래는 마법청 설립 초창기부터 영향력을 발휘했고, 단순한 길드를 넘어선 존재로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었으니까. 모래시계문과 마법사 전부를 자기 관리로 두고 싶은 현 정부와 마법청 입장에서 즈믄나래가 너무 커지는 건 막아야 한다.

그래서 기획한 게 지금 시나리오다.

검찰 그리고 국세청을 이용해 즈믄나래 길드를 터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이름 좀 있는 집단치고 국세청과 검찰에게 두들기듯 맞아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집단은 없다.

즈믄나래도 마찬가지.

아니, 즈믄나래에는 먼지 한 톨이 아니라, 뒤가 굉장히 구린 것들이 다수 있다.

당장 만석루만 털어도 강희는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 마나스톤 불법 거래, 모래시계문을 일부러 터뜨려서 몬스터를 구해다 고기로 도축해 판매하는 불법 도축 거래를 비롯해, 자금 세탁, 뇌물 수수, 탈세, 불법 유적 사냥까지. 걸릴 것 천지다.

물론 강희가 정말로 하고자 하는 어마어마한 계획에 비하면 사소한 죄일 뿐이다. 인류가 종말에 다다르는 것에 비하면 정말 가소롭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이 모든 건 강희가 세운 계획의 일부일 뿐이다.

‘재미난 경험이 되겠군.’

강희, 그의 이름이 모든 방송사 뉴스에 속보로 장식되는 순간이 신호탄이 될 테니까.

* * *

“푸훗!”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오랜만에 자신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안중현은 만화에서나 볼 법한 짓을 했다.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마치 칼부림을 앞둔 망나니가 자기 칼에 물을 입으로 뿌리듯, 분사한 것이다. 언제나 진지한 모습, 진중한 모습을 보이던 안중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속보입니다. 즈믄나래 길드가 마나스톤 불법 거래 혐의 및 탈세, 뇌물수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 앞에서 제아무리 안중현이라고 해도 평소 모습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맥주를 바닥에 흩뿌린 안중현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 그리고 TV로 보이는 기겁할 광경 앞에서 멍하니, 있었다.

‘맙소사.’

그 순간 안중현이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강우, 그와 통화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안중현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아니지.’

지금 당장 이강우랑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무언가 유효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상황을 파악하는 거다.

일단 안중현은 이게 가능한 일인지, 그것부터 고려해봤다.

‘즈믄나래는 걸릴 게 많아.’

충분히 가능하다.

검찰이나 국세청이 작심하고 즈믄나래를 털면, 먼지가 한 톨 나오는 게 아니라 바닥에 수북이 쌓을 정도로 나올 것이다.

즈믄나래는 그 정도로 뒤가 구린 짓을 많이 했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길드 중에 불법의 세계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은 길드가 없다.

문제는 그런 불법 행위가 즈믄나래의 독자적인 판단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즈믄나래가 불법행위를 통해 본 이득을 정재계 인사들이 나눠 먹었다. 즈믄나래가 자폭을 하면, 굴비 엮이듯 이름 좀 있는 자들도 같이 끌려갈 것이다.

당장 뇌물수수혐의만 해도 그렇다. 즈믄나래가 뇌물을 줬다면, 당연히 받은 작자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즈믄나래를 턴다?

‘국면 전환.’

현 정부가 작심을 했다는 의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즈믄나래를 완전히 짓누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말하면 길들이기다. 즈믄나래가 영웅이 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현 정부와 마법청이 비교 대상이 되어 격하당하는 건 좋은 게 아니니까.

‘선거철은 선거철이군.’

물론 이건 강수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갈 일.

하지만 대선이 걸린 상황이니, 무리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1년 후가 아니라, 올해 12월에 있을 대선, 그것 하나뿐이니까. 투표가 끝나면 그 이후는 아무래도 좋다. 무엇보다 즈믄나래를 뿌리째 뽑는 건 불가능하다. 블랙 스택과의 거래는 쉽게 파기할 수도 없고, 파기해서도 안 된다.

분명한 건, 그래도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대선이 끝나기 전까지 즈믄나래의 활동 범위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길드 마스터인 강희는 당분간 외부 활동을 전혀 못 한다.

틈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하지만 이 틈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 잠깐 동안은 즈믄나래의 영향력이 약해지겠지만 순간이다. 즈믄나래는 결국 한국에 남을 것이다. 현 집권여당이 정권을 다시 잡든, 야당이 잡든 즈믄나래와의 거래는 이어질 것이다.

안중현과 이강우의 목에 걸린 즈믄나래란 목걸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골치 아프군.’

이윽고 자신의 손에 든 맥주캔을 바라보던 안중현이 그 맥주캔을 치웠다.

이제부터는 술에 취한 정신머리로는 할 수 없는 냉철한 판단이 필요했으니까.

* * *

위스프는 한국 곳곳에 거처를 만들었다. 외부와의 접촉 없이도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그곳에서 항시 대기 중인 조직원들의 일상은 굉장히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 단조로운 삶을 해소하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경우는…… 몇 없었고 대부분의 이들은 큼지막한 대형TV앞에 모여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간간이 보스인 볼코프의 허락을 받아 맥주라도 먹는 날이면, 그 날이 축제였다.

무료하기 그지없는 삶, 그런 삶 속에서 정말 아무런 연관도 없는 다른 사람을 자기들만의 명분을 위해서, 그들의 가치를 위해서 얼마든지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는 테러리스트들의 눈빛과 기세도 바람맞은 돌덩이처럼 풍화되어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맹수의 눈빛이 사슴의 눈빛이 됐다.

위스프 조직원들의 어디에서도 테러라는 살 떨리는 범죄를 저지를 만한 낌새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속보다.”

그들의 눈빛이 맹수로 변하기까지는 정말 짧은 시간, 하나의 계기면 충분했다.

“즈믄나래가 압수수색을 당했다. 마스터 강희가 조만간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는다는군.”

한 명이 스마트폰을 통해 속보를 전달했다. 그러자 모두의 눈빛이 그 말을 뱉은 자에게 도달했다.

동시에.

덜컥!

보스의 방, 그 방문이 열리면서 거대하고 우람한 덩치를 가진 사내, 볼코프가 등장했다.

“즈믄나래가 압수수색을 당해?”

“예, 보스.”

부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볼코프에게 건네줬다. 볼코프가 스마트폰을 봤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그는 금방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 뜬 속보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볼코프가 미소를 지었다.

“동지들, 때가 왔도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에 다부진 결의를 품은 채,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볼코프를 바라보았다. 볼코프가 그들에게 말했다.

“DMZ로 향한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검찰에 소환되어 12시간이 넘는 조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강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쏟아지기 시작한 질문들이었다.

“즈믄나래의 탈세 범위가 수천억 원에 다다른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한 말씀 해주십시오.”

“마나스톤을 불법 유통하셨다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현재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들이 즈믄나래와의 계약 파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받아 주실 건가요?”

“하선우 씨의 이적설에 대해 한마디 해주십시오!”

쏟아지는 질문에 강희는 대답 대신 고개만 거듭 숙인 채 준비된 차에 몸을 실었다.

몸을 실은 후에도 플래시 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강희는 자동차 유리창 너머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표정만 굳혔다. 강희의 심중은 그의 표정과는 달랐다.

‘쇼에 흠뻑 취했군.’

강희는 지금 상황이 버겁거나,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염두에 둔 정도가 아니라, 이 역시 하나의 계획이었다.

‘드디어 킹메이커가 될 여건이 마련됐군.’

현 정부와 여당은 즈믄나래를 이용해 국면전환을 노리고 있고, 야당이 그 사실을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이제 즈믄나래에 대한 처사가 대선 후보들의 주요 쟁점 과제가 될 것이다. 모 아니면 도, 마지막 베팅을 시작할 터.

그렇게 되면 즈믄나래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그들은 현 정부의 약점을 쥐고 있다. 즈믄나래의 창설 과정에서 세상에 알리지 못한 비밀과 즈믄나래의 비리를 통해 현 정부의 인사들이 누린 이익이 적지 않다. 이걸 터뜨리면? 선거는 야당이 유리하게 가져갈 것이다.

반대로 즈믄나래가 입을 다문 채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품고 추락한 영웅이 되어,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짊어진다면 국면전환이 충분히 될 터.

이미 거래는 시작됐다. 검찰 조사 과정 속에서 강희는 이미 은유적으로 여러 번 통보를 받았다.

이번 일, 적당히 구색만 맞추면 차후 정권을 다시 이어가는 순간 즈믄나래에 대한 더더욱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겠다. 그리니 일단은 독박을 써줬으면 한다. 그런 통보.

야당도 다를 건 없다. 강희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야당 쪽 인사들이 모든 인맥을 동원해 부디 의로운 영웅으로 남아 현 정부의 부정을 알려주고, 대의를 도모하자는 그럴싸한 말을 전달할 것이다. 당연히 은유적으로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이제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도 해주겠지.

재미난 상황이다.

누가 보더라도 즈믄나래가 핍박받는 상황인데, 즈믄나래의 선택에 따라 정권이 바뀔 수 있고, 무엇이 선택되든 즈믄나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있는데 강희가 지치고, 피곤하고, 불편한 기색을 품을 이유가 있을까?

이내 차가 출발하고, 기자들이 멀어지는 순간, 강희는 연기를 위해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입에 미소를 지었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채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강희의 시선이 향한 건 달이 움직이는 동선을 가로지르는 북쪽이었다.

‘이바노프가 움직이겠군.’

그 순간 강희의 눈앞에 한반도에 펼쳐질 처참한 모습이 번지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희가 미소를 지었다.

‘올해가 2025년. 최후의 종이 울리기까지 이제 3년이 남았군. 10년의 대계, 이제 절정에 다다를 때가 됐지.’

* * *

남한과 북한, 둘 사이에 자리 잡은 비무장지대는 과거에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비무장지대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곳곳에 남은 포격의 흔적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포격에 파괴된 모래시계문의 잔해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심스럽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사체들은 거름조차 되지 못한 듯 그저 흉물스러운 형태 그대로 남아 참상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 심각한 건, 때때로 그 몬스터들의 사체가 다른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였다.

지금도 그랬다.

죽은 칼니멧돼지의 사체를 향해 무언가가 접근했다. 울렁거림,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광경 속에서 칼니멧돼지의 사체가 거침없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 잠깐, 위장색을 품고 있던 것이 정체를 드러냈다. 정체를 드러낸 건 거대한 도마뱀, 꽃등도마뱀이었다. 녀석은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갑자기 고개를 오른편으로 휙 돌렸다.

그리고는.

꽤액!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지르며, 식사조차 멈춘 채, 자신이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놈만이 아니었다. 놈이 달리기 시작하자, 꽃등도마뱀의 주변으로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몬스터들이 속속 등장했다. 하늘 위에도 있었다. 박쥐 날개를 가진 거대한 뱀, 박쥐뱀 암수 한 쌍이 날개를 펄럭이며 꽃등도마뱀보다 더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5미터 높이의 거대한 문 하나가 오롯하게 서 있었다.

문틀의 재질이 특이했다. 눈으로 만든 듯,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 문 위에 달린 모래시계가 좀 더 빠르게 모래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몬스터가 등장할 때마다 한 톨씩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래시계는 좀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는 사내가 무전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4등급 위치 확인했습니다.”

-상황은?

“현재 스무 마리 남짓한 몬스터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때 다른 무전 소리도 들렸다.

-C팀, 9등급 문 확보. 캔을 주입하겠습니다.

-E팀도 8등급 문 확보했습니다. 캔을 주입하겠습니다.

-A팀, 캔이 떨어졌습니다. 복귀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대장격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수고했다. 모든 팀, 임무를 마무리 짓고 복귀한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망원경을 들고 있던 사내가 잽싸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다.

단숨에 복귀 준비를 마친 사내는 잠시 멈칫한 뒤, 고개를 돌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시계문을 바라봤다. 모래시계문을 바라보던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이곳은 지옥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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