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5화 (45/66)

45화. 칠성문

모래시계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마법의 시대는 세상에 많은 악몽을 선사했지만, 반대로 그 시대를 반긴 이들도 있었다.

중국은 마법사의 시대를 반겼다.

중국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경쟁상대라고 생각하는 미국에 비해 중국이 나은 점은 머릿수밖에 없었고, 마법의 시대는 그 머릿수가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는 것, 그게 이유였다.

중국은 넘치는 마법사의 머릿수를 이용해, 마법의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되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은 초창기부터 모래시계문에 대한 연구와 유적 사냥을 본격적으로 했다.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부었고,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다.

‘그리고 블랙 스택의 지원을 거절했지.’

더 나아가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분명 특이한 케이스였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초창기에 블랙 스택의 지원을 받았으니까. 블랙 스택과 함께 3대 길드에 포함되는 이존 역시 초창기 블랙 스택의 지원을 받은 유럽 연합 소속 국가들이 블랙 스택과 같은 길드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만든 세력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블랙 스택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블랙 스택이 중국 정부에 지원을 제안했을 때 거절했다. 중국 정부는 알아서 처리하겠다면서, 쇄국정책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후 중국은 자신들이 했던 말처럼, 독자적인 유적 사냥 및 연구를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완성했다.

이부성 마법청장이 중국 그리고 칠성문과 접촉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 때문이었다.

이존 길드의 성향은 블랙 스택과 비슷하다. 모래시계문을 관리하고, 유적을 사냥하고, 이후 수확물을 처리하는 방식, 마법사들의 마법 사용 스타일 등이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칠성문은 두 길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는 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미. 결과는 비슷하더라도 과정이 다르면, 어디든 어필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카드를 준비했습니다! 그 사실을 싫어할 국민은 없을 테니까.

물론 이강우가 보기엔 이부성 마법청장이 정말 한국 국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중국과 접촉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노리는 바 중 하나일 뿐이다.

‘안대욱 부청장과 대립각을 세웠다지?’

안중현이 이야기를 다 해줬다. 현재 마법청 내의 권력 상태가 어떤지, 이제는 이강우도 안다. 안대욱 부청장과 이부성 마법청장이 권력 다툼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

안대욱 부청장은 중국과 이렇다 할 연결점이 없다. 그는 중국을 믿을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닌 경계의 대상으로 봤다.

그러니 이부성 입장에서는 중국을 오롯한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거다. 중국이 안대욱 부청장과 접촉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세계 멸망이냐, 아니냐 걸린 판에서 정치질이라니…… 굳이 몬스터 같은 거 모래시계문에서 꺼내오지 않아도 알아서 자멸할 것 같은데?’

이런 작금의 사태에 이강우가 비아냥거림을 곱씹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강우는 모든 것을 삼켰다. 이제는 기분 따라, 마음 따라 행동할 때가 아니기에.

‘사심은 버리고.’

칠성문이 블랙 스택과 벽을 두고 있다는 건, 이강우에게 있어서 분명한 기회다.

‘이익만 취한다.’

만약 칠성문이 한국 내에 어떤 식으로든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발휘하면 블랙 스택 그리고 즈믄나래는 칠성문을 견제하느라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이강우에게는 기회다.

더 나아가 이강우는 믿고 있다.

‘결국 그들은 내 적이 아니라, 우리의 적이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그들이 몰락을 바라는 건 한 개인이 아닌 인류 그리고 세상이다. 그런 만큼,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 인류가 이강우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이강우가 차의 시동을 껐다.

* * *

약속 장소는 일식집이었다.

간판조차 없이, 남들이 보면 그냥 평범한 3층짜리 건물이라고 생각할 법한 곳이었다.

내부도 일식집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문지방을 넘는 순간 값비싸 보이는 도자기와 그림들이 손님을 먼저 반겨 줬다. 음식점이 아니라, 미술관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어마어마하군.’

은은한 조명 아래 펼쳐진 검은 벽, 그 사이에 놓인 길을 안내에 따라 이동하던 이강우는 곧바로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강우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지하로 내려가다니…… 완전 비밀의 방이군.’

이쯤 되면 확실하다. 적어도 평범한 식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음식점은 아니라는 건.

보안 유지.

오로지 귀빈들의 보안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보다 중국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나름 굵직한 이야기를 일식집에서 나누다니…… 참 웃긴 조합일세.’

그렇게 이강우가 지하로 내려간 뒤 도달한 방에는 이미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이부성 청장이었다. 그는 이강우의 등장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6개의 자리 중 비어있는 자신의 왼쪽짜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강우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강우가 정면을 바라봤다.

‘여자 하나, 남자 둘.’

이미 차려진 만찬, 하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음식 너머로 보이는 세 명의 사람들.

견적은 금방 나왔다.

‘가운데가 진짜, 양 옆은 보좌관.’

가운데 앉은 사내. 눈매가 쫙 찢어지고, 두툼한 입술을 가진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머리를 바짝 단정하게 자른 걸 보면, 개성을 표출할 만큼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명령을 받고, 명령을 내리는 위치의 사람이 분명했다.

그 옆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둘 다 20대 중반으로 젊어보였다. 젊어보였고 동시에 반지를 비롯해 악세사리를 좀 과하게 착용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 정체는 분명했다.

‘마법사.’

“자, 그럼 대화를 시작해봅시다.”

이강우가 상대의 인상평가를 마쳤을 때, 이부성 마법청장이 넉살 좋은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그 목소리에 상대방이 곧장 반응하는 걸 보니, 통역 마법이 사용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상대방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거나.

“일단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 자리, 힘들게 와주신 칠성문의 주성륜 문곡(文曲)께 감사드리오.”

문곡.

‘헉! 문곡?’

그 말에 이강우는 안중현의 설명을 떠올렸다.

‘칠성문의 칠성은 북두칠성의 칠성을 의미하네. 일곱 개의 별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그 일곱을 보필하는 두 개의 별을 포함해서 아홉 명의 우두머리가 있다고 하지. 아무래도 중국 땅이 넓다보니, 길드 마스터가 한 명이면 문제가 생기니, 일곱 명에게 각자의 권한을 주고 활동하게 하네. 이런 이유로 문주라는 직위는 없네. 일곱 명 모두가 대등한 위치이고, 그렇기에 북두칠성에 붙은 별이름을 하나씩 직위로 삼고 있지.’

그 설명을 정리하면, 눈앞의 째진 눈, 두툼한 입술의 사내가 칠성문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이란 말이다.

이강우가 긴장했다.

‘어마어마한 거물을 데려왔군.’

칠성문 입장에서도 대한민국 마법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부성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동안 빗장을 잠그고 있던 대한민국에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자리이니 급이 되는 인사를 보냈겠지만, 그래도 최고 우두머리 중 한 명을 보낼 줄이야?

여러모로 대단한 자리.

그런 자리에 이부성과는 사실 거의 이번이 초면이나 다름없는 이강우를 데려온다?

‘예상대로 날 협상 카드로 썼군.’

견적은 금방 나왔다.

이부성 입장에서도 자기 급을 높이기 위해,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강우의 마나 서클 자극 비약 이야기를 들었을 터.

중국 입장에서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탐나는 아이템이다. 마법사 숫자가 넘치는 만큼,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의 효과로 득을 볼 마법사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블랙 스택에 미국 소속인 리볼버와 접촉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런 와중에 이강우란 귀한 인재가 나왔으니, 중국 그리고 칠성문 입장에서 오히려 이부성에게 먼저 이강우와의 합석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즉, 이 자리는 이부성도, 칠성문도 이강우를 베껴먹기 위해, 꿀단지나 다름없는 이강우를 맛보기 위한 자리다.

‘흥.’

물론 이런 상황을 이강우는 나름 예상했다.

애초에 이강우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 온갖 종류의 힘에 밀려을이 됐던 적, 셀 수 없다.

‘그쪽 마음대로는 안 될 거다.’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빨대가 꽂히면 끝이다.

무엇보다 여기 모인 작자들은 보통 작자들이 아니다. 아주 대단한 권력자들이다. 빨대 꽂고 빨아먹는 걸 가지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라.

“저 역시 세계적인 모범이 되고 있는 한국의 마법 인프라 및 시스템을 구축하신 이부성 마법청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강우의 심중을 알 리 없는 그들은 당연히 이강우를 제외한 채, 저들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얼굴에 금칠부터 했다. 그 후에 식사를 하면서, 세계정세 이야기가 나왔다. 유럽이 이렇다더라, 미국이 저렇다더라, 남미가 이랬군, 러시아가 저랬군…… 딱히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그냥 뉴스에서 나온 소식에 자기 의견을 첨부하는 정도.

이강우는 말없이 내용만 들었다. 간간히 질문이 오면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더 이상 주절거릴 만한 대화 소재도 떨어지고, 식탁 위의 음식도 조금씩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강우 씨, 정말로 그걸 만드실 수 있습니까?”

주성륜, 그가 이강우에게 질문을 했다.

‘왔군.’

드디어 시작됐다.

이강우가 곁눈질로 이부성의 기색을 살폈다. 이부성은 묵묵부답, 이강우에게 공을 넘긴 듯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강우 혼자 드리블을 할 차례라는 의미.

이강우는 곧바로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크기가 검지 크기의 병이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하얗게 빛나는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불을 꺼도 빛을 낼 수 있을 정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가락 길이의 전등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예,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병을 본 주성륜이 눈빛을 빛냈다.

“효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진실만을 말씀드린다면, 이건 어디까지나 부족해진 2퍼센트를 채워주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마법사가 먹어 봐야 큰 소용은 없습니다. 그냥 기분만 좋아지겠지요. 꾸준히 복용하면 효과는 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지요. 쉽게 말해서 98퍼센트에서 더 이상 본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나머지 2퍼센트를 채울 수 없는 이들, 그들에게 효과를 발휘합니다.”

주성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품 설명은 끝이 났다. 남은 건 바이어가 된 주성륜이 얼마의 값을 제시하느냐, 그 부분이다.

여기서 이부성이 나서려고 했다. 이강우의 이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이용해 칠성문으로도부터 나름의 협조, 긴밀한 공존 관계를 이룩하는 게 오늘 그의 목적이었다.

목적이었는데…….

“참고로 이걸 팔 생각은 없습니다.”

이강우가 말과 함께 병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이부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풀어졌다.

‘이 녀석…….’

동시에 이부성은 내뱉으려는 말을 삼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름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그가 여기서 자기감정을 토로할 리가 없다.

모두가 다시 이강우를 집중했다.

“일단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저 혼자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제 스승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스승님이라면 리볼버 크로포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의 허락이 없다면?”

“판매도, 양도도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주성륜은 이부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한 말과는 조금 다르지 않느냐? 하는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런 주성륜이 표정에 이부성은 미안한 기색이나 당황한 기색 대신 눈에 힘을 줬다. 단호한 표정을 보니, 이강우가 하는 말에 딱히 반박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이강우, 그냥 순순히 따를 줄 알았는데…… 오냐, 당장은 밀어주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부성이 칠성문을 위해 이강우를 설득하려고 나서는 거야말로 최악이다. 이미 아쉬운 입장을 보이는 셈이다. 어차피 흥정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이강우를 설득할 기회도 차후 여러 번 있다.

결정적으로 이강우도 이제 섣불리 권력자가 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 사실을 이강우가 여기서 말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최근 물량 주문이 밀렸습니다. 스승님께서 대량 제조를 요청하셨습니다.”

리볼버의 이름을 언급했고.

“때문에 로드리게스 회장에게 납품해야 하는 물량 생산만으로도 올해는 힘듭니다.”

로드리게스의 이름을 언급했다.

‘로드리게스 회장? 이강우 녀석이 로드리게스 회장과 알고 지내?’

이부성은 살짝 놀랐다. 로드리게스 회장의 정재계 영향력은 막강하니까.

‘자, 건드리기 힘들지?’

이게 이강우가 준비한 방패다.

7서클 마법사와 로드리게스 회장이란 막강한 권력자의 이름을 방패로 내세웠다. 그러면 더더욱 이부성이나, 칠성문 입장에서 이강우를 멋대로 다루기가 힘들어진다.

‘남이 침 바른 거, 섣불리 입에 대기 힘들겠지.’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강우 입장에서도 칠성문의 도움이 필요하고, 칠성문 역시 이강우의 그 능력이,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책을 고를 수밖에.

그걸 위해서 이강우는 이미 진작에 떡밥을 던져놓았다.

“안타깝군요. 하지만 이강우 씨에게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만이 아니라, 몬스터를 요리해서 비슷한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인 겁니까?”

이거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마나스톤을 이용해 크로포드가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그런 그의 효소 사용법을 응용해서, 이강우는 몬스터 요리를 통해 마나 서클을 자극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건 나름 이강우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다.

크로포드의 허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강우의 마음이 중요한 문제.

“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앞서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부족한 2퍼센트를 채워준다면, 그 요리는…… 0.2퍼센트 정도 되겠군요.”

“열 번 먹으면 2퍼센트군요.”

그 순간 주성륜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이강우도 미소를 지었다.

* * *

이강우가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판매할 수 없다는 말을 꺼낸 이후, 대화 분위기는 빠르게 식었다. 식은 분위기에서 굳이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굳이 요리를 더 먹을 사람도, 더 이상 나눌 만한 대화 소재 자체도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일어나겠습니다.”

주성륜이 결국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주성륜의 보좌관 두 명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후에 주성륜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있던 이부성과 그의 보좌관 그리고 이강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상태에서 주성륜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음에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그때는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으리라 기대하겠습니다.”

모난 곳 없는 말이었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을 기약한다는 건, 이번 자리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이니까.

그렇게 주성륜이 보좌관들과 함께 사라졌을 때, 이부성과 이강우만이 자리에 남았다.

거기서 이부성은 곧장 이강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칠성문에 판매하는 게 불가능한가? 몰래 판매하는 것조차?”

질문을 던지는 이부성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질책하는 어조가 섞여 있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오늘 만남은 어렵게 성사된 만남이었다. 주성륜 정도 되는 인물을 만나는 건 연줄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간과 여건과 마음과 운이 따라야 한다.

그런 자리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다?

그야말로 허공에 삽질을 한 셈이다.

“예, 팔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강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부성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는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네.”

이후 나온 이부성의 목소리는 좀 더 강했다. 선생이 학생을 나무라는 수준의 강도였다.

“정말 불가능한가?”

재차 이어진 질문.

이강우는 그런 이부성의 질문에 옅게 웃었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까 확실히 칼자루는 내 쪽에 있군.’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이부성에게 반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이강우가 치러야 할 대가도 고려해봤다. 국내에서 이부성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을 리 없으니, 잘못 건드리면 역풍이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이강우가 칼이었다. 이부성은 이강우란 칼을 써서 칠성문과 거래를 하려고 했다.

즉, 이강우가 뭘 썰든 이강우 마음이란 소리다.

“중국 칠성문에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넘겨주라는 건, 저보고 블랙 스택과 리볼버를 상대로 얼굴 붉힐 작정을 하라는 의미인데, 그럼 제게 뭘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이강우, 그가 드디어 작정을 한 듯 내뱉은 단호한 말에 이부성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언가를 준다…… 미안하지만 내 위치에서는 가족이라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네. 하지만 적어도 날 도와준 사람을 외면할 정도로, 난 그 정도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 아닐세.”

‘확실히 정치인이군.’

확답은 없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대신 그럴싸한 말만 한다. 도와주면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 그 정도의 말만.

정치인식 화법이다.

‘이 인간, 결국 날 써먹다가 필요 없어지면 버릴 인간이군.’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부성은 끈으로 잡을 만한 사내가 아니다. 이부성을 믿고 뭔가를 저지른다는 건, 자살행위다.

“그런 두루뭉술한 말만 믿고 움직이기에는 제 처지도 그리 좋진 못합니다.”

이강우의 말에 이부성이 지그시 이강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말 칠성문과 저를 통해 다리를 만들고 싶으시다면, 스승님을 설득해서라도 해보겠습니다.”

채찍 두어 대 때리고, 당근을 눈앞에서 흔드는 이강우.

이부성이 살짝 표정을 바꿨다.

“그래 주겠나?”

“하지만 이 사실이…… 제가 칠성문 사람과 접촉한다는 사실이 즈믄나래 쪽에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아무렴.”

“솔직히 말해서 중국의 칠성문과 손을 잡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 중 좋아할 사람은 소수입니다. 드러나면 정치적으로 그리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 부분에서 이부성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치적으로 좋지 않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괜한 잡음을 만들 필요는 어디에도 없지요.”

심지어 대선을 언급하는 이강우의 모습에 이부성은 이강우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이 놈…… 정치판을 아는 놈이군. 그냥 마법만 아는 약아빠진 마법사가 아니라.’

정치를 아는 놈.

어찌 보면 다루기 힘들지만 반대로 적당한 저울만 완성되면 얼마든지 교섭이 가능한 대상이다. 이부성 입장에서는 멋대로 다룰 수 없지만, 흥정을 통해 다루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칼을 발견한 셈이다.

이부성이 보좌관을 불렀다. 보좌관이 잽싸게 품에서 명함지갑 하나를 꺼내더니, 그 명함을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주게.”

이강우가 명함을 받았다.

명함을 받으며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다.

‘이부성을 내 편으로 만들 경우, 잘만하면 정부기관을 움직일 수 있다. 만약 검찰이나 경찰, 국세청이 즈믄나래를 동시에 털면…….’

중국과 이부성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자연스럽게 블랙 스택과의 관계는 멀어질 터. 더 나아가 정부기관을 움직이면 즈믄나래의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좋아. 남은 건 칠성문과의 교섭이군. 필시 나를 지목해서 찾아온 걸 보면, 일주일 내에 접촉하겠지.’

칠성문.

그들과 결판을 내는 일이다.

* * *

-오빠.

이강우는 오랜만에 듣는 여동생의 목소리에 호텔방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무슨 일 있어?”

이강우는 최근까지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위스프의 추가 위협이 없었지만, 그래도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괜히 위스프 애들에게 가족과 친하게 지내는 꼴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인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여동생의 연락.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심장이 살짝 쪼그라들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무슨 일이 있구나.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고 자시고, 왜 갑자기 오빠 이름 앞으로 이렇게 많은 소포가 오는 거야?

“소포?”

-너무 많이 왔어. 오빠 거 맞아?

소포라니, 이강우는 홈쇼핑 중독자도 아닐뿐더러, 택배가 올 이유가 없다.

심지어 이강우가 정재계 대단한 인사라서, 명절날 명절선물이 어마어마하게 오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거 아니지?”

-너무 많아서 하나만 열어봤는데…… 요리 재료가 잔뜩 있어. 중국햄이라든지, 난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중국 요리 재료가 대부분이라고 했어. 그것도 고급 요리 재료. 오빠가 혹시 주문한 거야? 유리 언니 주려고?

“잠깐, 중국?”

이 순간 촉이 왔다.

‘벌써? 칠성문이?’

“보낸 사람 주소 좀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줘.”

-주소? 그건 왜?

“부탁한다.”

이강우의 진지한 말에 이혜연도 상황이 장난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안 듯, 곧바로 통화를 끊고 사진을 찍은 후 보내줬다. 사진에 찍힌 내용 중 두 가지만 눈에 들어왔다.

周星綸.

그리고 열한 개의 숫자들.

‘아주 끝내주는 방법으로 연락처를 알려주는군.’

이강우는 곧바로 열한 개의 숫자를 눌렀다.

* * *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고급 중식당, 간판부터 메뉴까지 모든 게 중국어로 되어있는 그곳은 한국인보다는 중국인 손님이 훨씬 많이 오는 장소였다.

그것도 그냥 중국 관광객이 아니라, 돈 많거나 권력 좀 있는 사람들만이 찾는 곳으로 요리 메뉴는 물론 가격도 상당했다.

이강우는 그런 중식당에서 베이징덕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베이징덕…… 여기 집 진짜 맛있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유적에서 닭 같은 거 잡으면 베이징덕으로 해먹을까? 중식은 탕수육 빼고는 별로 해먹은 적이 없네?’

열심히 요리를 맛보는 이강우, 그런 이강우 앞에는 주성륜이 말없이 앉아있었다.

이강우는 당연히 그런 주성륜의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강우는 그럴수록 더더욱 음식에 집중했다.

‘아쉬운 입장인 걸 보일 필요가 없어. 로드리게스에 크로포드, 방패는 확실하다. 저쪽이 아무리 대단한 양반이라도 쉽사리 날 멋대로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건 불가능해.’

지금 이강우의 행동은 연기인 셈.

그런 그 둘의 대화가 시작된 건, 이강우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됐을 때였다.

이강우가 차를 주문했고, 그제야 주성륜이 손짓을 했다. 손짓을 하자 그의 보좌관이 통역 마법을 발동시켰다.

“식사는 맛있으셨습니까?”

“예, 정말 괜찮네요.”

“다행입니다. 입맛에 맞으셔서.”

“그보다 식사만 제공하시려고 절 부르신 건 아니실 테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강우가 담담하게, 그러나 잽싸게 본론을 꺼냈다.

그런 이강우의 스트레이트 펀치에.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필요합니다.”

주성륜 역시 스트레이트 펀치로 답했다.

이강우가 표정 연기를 시작했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신분과 상황이 마땅치 않습니다.”

진지한 이강우의 표정과 태도, 오스카상 감이다.

하지만 주성륜은 그런 이강우의 연기력에 맹점을 지적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즈믄나래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죠. 칠성문과 블랙 스택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이강우의 연기력은 좋지만, 이 자리에서 할 만한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강우가 그 말에 당황할 리는 없었다.

“호의를 외면하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나왔을 뿐입니다. 절대 즈믄나래나 블랙 스택을 배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강우의 거듭된 반박에 주성륜은 식탁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 두드림으로 이강우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주성륜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 절대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미국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그냥 그 자체로 들어주십시오. 블랙 스택은 절대 믿을 수 있을 만한 조직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라?

오해하고 자시고, 누가 보더라도 그냥 경쟁사를 밑도 끝도 없이 폄하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강우가 표정을 구겼다.

“설마 제가 그런 말을 믿고, 블랙 스택을 배신한다는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블랙 스택이 세상이 아는 것처럼 정상적인 조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칠성문만큼은 그 사실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칠성문은 그 어떤 세력의 도움 없이 밑바닥부터 모래시계문을 상대하기 위한 체계를 갖추었으니까요. 그렇기에 블랙 스택이란 길드가 얼마나 이질적이고, 일그러진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지요.”

이강우는 여기서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짓눌렀다.

‘과연…… 그러면 칠성문이 블랙 스택을 의심할 만하지.’

칠성문은 밑바닥부터 모래시계문을 상대해봤다.

그런 만큼 블랙 스택이 보여주는 능력과 그들의 시스템, 정보력이 얼마나 비이상적인지 알 수 있었다.

인간이 100미터를 9초에 달리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5초에 달리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그 이상함을 느낀 셈이다.

‘어쩌면 칠성문이 블랙 스택의 대항마가 될지도 모르겠군. 아니,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칠성문.

어떤 식으로든 연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저를 부르신 거라면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일단 튕겼다.

“죄송합니다. 사실 정말 하고 싶은 건,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팔 수 없다면, 마법사 한 명을 먹여주고 재워주셨으면 합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

“그것마저도 블랙 스택이나 리볼버의 허락을 받을 만한 일입니까?”

이강우의 요리가 마나 서클 자극 비약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이미 퍼졌다.

“그건 아니죠.”

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새로운 마나 서클을 개방시키고 싶은 마법사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와 함께 이강우와 다리를 놓을 속셈이다. 원래 거래란 게 그렇다. 거래 루트를 뚫어두면, 그냥 부식거리를 거래하다가 좀 더 대단한 걸 거래하게 되는 법이다.

사실 이강우는 그저 마나 서클 자극 비약대신 비슷한 효과를 가진 몬스터 요리 혹은 고기를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예 사람을 붙이겠다는 건…….

‘작정을 했군.’

칠성문 쪽에서도 이강우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뚫고 싶다는 의미.

“물론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마나스톤, 필요하시다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공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마나스톤을 생산하는 국가입니다.”

심지어 대가로 마나스톤을 주겠다고 한다.

조사를 한 거다.

아니, 조사라기보다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발명한 리볼버는 마나스톤과 마력 연구에 있어서는 권위자다. 그런 그라면 주는 마나스톤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리볼버의 제자인 이강우가 필시 마나스톤을 필요로 하리란 예측은 당연하게 나온다.

“6등급 마나스톤 10개, 7등급 마나스톤 20개를 드리겠습니다. 결코 적은 게 아닙니다. 나름 파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말 표현 그대로 파격적인 제안이 나왔다.

‘못해도 30만 포인트.’

이강우가 단숨에 섭취 가능한 마력 포인트 계산을 마쳤다. 지금 이강우가 섭취한 마력 포인트에 30만 포인트를 추가하면, 50만 포인트가 넘어간다. 그건 즉, 플래티넘북 하나를 더 구매할 수 있다는 의미.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성륜의 마지막 통보에 이강우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주성륜이 최고급 세단을 타고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스마트폰이 울렸을 때, 주성륜은 번호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복희,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할 말이군.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누비느라 바쁘겠어.”

-최근에는 한국에 꽤 오래 머무른 덕분에 그리 바쁘진 않았습니다. 그보다 거래는 어찌 됐습니까?

“성사됐네.”

-잘 됐군요.

“이 거래면 되는 건가?”

-예,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임에도 잘 처리해주셔서.

“이쪽도 좋은 기회였네. 그동안 즈믄나래와 블랙 스택 때문에 쉽사리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한국에 접점을 만들었으니까. 그보다 요즘 아프리카 상황은 어떤가?”

-지옥입니다. 기어코 터질 게 터졌습니다. 절대 아프리카나 유럽 힘만으로 이제부터 시작될 혼란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미국이 개입하겠군.”

-예, 세계의 모든 힘이 아프리카에 집중될 겁니다. 그다음에는…… 제 예상으로는 북한이 터질 겁니다.

주성륜이 북한이란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프리카보다 더한 나라가 북한이다. 주민도 통제가 안 되는 나라가, 모래시계문을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중국이 북한을 도와주면서, 북한 내에 출몰하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북한 역시 중국을 완전히 믿지 않는 만큼, 중국의 원조를 받는 와중에도 자체적으로 수작을 부리니까.

문제는 그 수작이 세계정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대부분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런 북한이 터지면, 한국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한국이 영향을 받으면? 일본과 중국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미국, 유럽까지…… 악몽이 도미노처럼 번질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네.”

-어떤 식으로든 막을 겁니다. 그걸 위해 이제까지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생이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군.”

-동감입니다.

“그럼 좋은 소식은 없는가?”

-괴식가가 7서클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7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확보했습니다. 현재 7서클 마법 아티팩트는 곤륜에 보냈습니다.

그 말에 주성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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