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4화 (44/66)

44화. 시대격변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처참한 꼴로 죽어 있었다.

핏빛의 붉은 창 수십 개가 온몸에 꽂힌 채 죽은 뱀의 모습은 고슴도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처참한 뱀의 사체를 한 사내가 의자 삼은 채 앉아 있었다.

그 사내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자신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사내는 이강우였다.

“후우.”

이강우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조금 전 자신이 봤던 알림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천변과를 전부 흡수했습니다.]

[6서클이 개방됩니다.]

[새로운 마법 슬롯이 추가됐습니다.]

‘미치겠군.’

지금 이강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이유였다.

좋은 일, 기뻐함을 넘어 환호성에 비명을 내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 앞에서 이강우는 기쁨의 비명 대신 긴 한숨을 내뱉는 이유.

‘일단 정리해 보자고.’

일단 이강우는 최근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내가 맛본 게 천변과라는 놈이었나?’

아무래도 이강우가 혀만 가져다 댄 게 천변과란 과일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과일의 맛을 보는 순간, 이강우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시간은 꽤 지났어.’

더불어 주변 상황을 보면 그때 이후로 적잖은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듯했다.

‘혀만 댔는데.’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이강우가 입을 댄 천변과란 놈이 이상한 놈인 건 맞다. 하지만 이강우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그저 혀만 살짝 댔을 뿐.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

‘천변과, 대체 정체가 뭐지?’

천변과란 과일이 이상한 과일임과 동시에 그 이상함이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는 과일이란 증거다.

일단 이강우는 천변과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멈췄다.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보다 6서클이라…….’

6서클 개방.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그래서 마법이 그렇게 아주 쭉쭉 뽑혔군.’

조금 전 전투에서 마법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건, 6서클 개방을 한 덕분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대한민국 최고가 된 건가?’

어쨌거나 이것으로 이강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됐다. 현재 대한민국에 7서클 마법사는 없으니까. 6서클 마법사는 이강우를 포함해서 네 명이다.

‘생각보다 빨랐군.’

사실 6서클에 도달하는 건, 꽤 걸리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올해 내에 6서클에 도달하는 건 힘들다고 생각했다.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반대로 기쁨 뒤에 서슬 퍼런 위기감이 느껴졌다.

이강우에게 주어진 이 호사가 선의에 의한 호사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도리어 이 순간 이강우는 의심했다.

‘불사황제가 만들어준 판인가?’

저번에도 그랬다.

불사황제는 이강우를 위해서, 그의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해주는 무대를 마련해줬다.

지금도 그런 무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파격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게 선의나 호의가 아니라는 것.

‘젠장.’

불사황제가 이강우에게 자신의 힘을, 권능을 주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강우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강우를 향해 접근하는 위기와 이강우 사이의 거리가 더 좁혀졌다는 증거다.

이 무렵에야 이강우는 어수선했던 머릿속이 정리됐다.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잡은 거대한 뱀을 바라봤다.

‘뱀술 담그기에는 좀 크군.’

정리된 머릿속, 덕분에 이강우는 자신이 잡은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보다 이 녀석…… 주술방울뱀이겠지?’

스택 레코드를 비롯해 이강우도 나름 몬스터에 대한 지식은 어느 마법사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다.

하물며 주술방울뱀 같이 요주의 몬스터이자, 누가 봐도 특이한 능력을 가진 몬스터를 지금까지도 몰랐다면, 이강우의 뇌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일 터.

당연히 이 녀석으로 뱀술을 담가 먹는 건 불가능하다. 수영장 하나를 빌려서, 그 안을 술로 가득 채우고 주술방울뱀을 넣은 후에 제대로 밀봉하지 않는 이상은.

‘그러고 보니 권재용 박사가 이 녀석을 원했지. 분명 리스트에 주술방울뱀 꼬리가 있었어.’

이 순간 이강우는 권재용 박사를 떠올렸다.

권재용 박사와의 계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가 원하는 연구재료 리스트의 재료를 가져다주면, 권재용 박사는 이강우에게 그가 원하는 지식을 주기로, 그런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권재용 박사야말로 지금 이강우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군이었다.

지식이 필요했으니까.

모래시계문에 대한 정보, 단순히 표면적인 정보가 아니라 유수의 석학들이 연구와 분석을 거듭해 캐낸 진실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권재용 박사를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주술방울뱀의 뒤처리를 고민하던 이강우가 주술방울뱀의 사체에 꽂힌 창 한 자루를 뽑았다.

푸홧!

창이 뽑혔고, 이강우는 그 창끝에 달린 창날을 이용해 단숨에 주술방울뱀의 꼬리를, 성인 남자의 머리통 세 개를 붙인 듯한 거대한 방울꼬리를 단숨에 잘라냈다.

그 무렵.

“대장!”

“대장 어디 있습니까?”

“지금 다른 팀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사하면 뭐든 좋으니 신호를 보내세요!”

총꾼 두 명의 목소리가 이강우의 귓속을 두드렸다.

* * *

안중현은 형사 시절부터 보통 사람들은 못 볼 꼴들, 평생 볼 이유도 없고, 봐서도 안 되는 꼴을 많이 봤다.

불운하다면 불운하다고 해야 할까…… 형사들도 쉽게 볼 수 없는 처참한 살해 현장을 그는 자주 봤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안중현은 현실에서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괴하고, 처참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래시계문의 등장 이후, 마법사가 된 이후에는 그때의 깨달음은 보다 견고해졌다.

그런 안중현에게도 눈앞의 광경은 쉽사리 적응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맙소사.’

스무 마리의 몬스터들.

9등급부터 6등급까지.

만약 이 무리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등장했으면, 국가적 재난 상태가 선포됐을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조합의 몬스터들이 처참하기 그지없는 꼴로 죽어 있었다.

‘이게 대체?’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건 그들의 눈과 코, 입이 날카로운 것에 잔뜩 베인 흔적이었다.

고문도 이렇게는 안 한다. 시체를 능욕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처참한 광경은 그 상태로 모든 피가 빨린 채로 죽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로데스크하다. 아니, 누가 보더라도 이건 악마나 하는 짓이다.

문제는…….

‘이강우가 정말 이렇게 했단 말인가?’

이강우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거다.

안중현이 아는 이강우는 비밀이 많지만, 적어도 그 본성이 악으로 가득 찬 타입은 아니다.

몬스터를 잡은 후에 도축이라는 행위를 하지만, 반대로 그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 언제나 진지한 자세를 갖춘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어찌 보면 처절한 섭리에 따라 몬스터를 사냥하고, 도축한다. 그 과정에서 악의 같은 건 없다.

몬스터를 증오하고 저주해도, 몬스터를 해치우면 거기서 모든 증오심을 불태운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

‘이강우가 무슨 마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이강우가 한 게 아니다.

장담할 수 있다.

이강우가 혹여 했더라도 그건 이강우 본인이 한 게 아니다. 이강우의 속에 있는 다른 무언가가 한 짓이다.

‘이강우가 가진 힘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악의와 적의로 가득 찬…… 괴물의 힘이다.’

그 순간 안중현이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찬 팔찌를 만졌다. 팔찌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리고 마법을 발동시켰다.

쿠쿠쿠!

5서클 마법 불도저가 모습을 드러내며, 안중현의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밀어 버리기 시작했다. 5서클 마법답게 몬스터의 사체쯤은 단숨에 깔끔하게 처리됐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안중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강우, 대체 넌 무엇을…….’

* * *

베이스캠프에 때아닌 만찬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긴급 상황 속에서 아무런 피해도 없이 그리고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던 이강우가 멀쩡히 깨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만찬을 모두가 즐겼다.

“술이 없는 것만 빼면 완벽하군.”

“술이야 나중에 나가서 잔뜩 먹을 수 있으니까, 참자고.”

물론 술을 비롯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요소들은 배제됐다. 어디까지나 만찬을 즐길 뿐이었다.

그 만찬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야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런데 대장은 대체 어떻게 놈들을 다 싹 해치운 거지? 무슨 치트키라도 썼나?”

하나는 이강우에 대한 것이었다.

이강우가 강한 건 모두가 안다. 성족공룡조차 혼자서 깔끔하게 잡아낸 솜씨를 여기 있는 모두가 봤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번의 경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정신을 잃고 있던 이강우가 갑자기 깨어나서 동료를 구해주고, 상황을 반전시키다니…… 영화 속에서도 쓰지 않을 반전 소재였다.

“그런데 안 선배는 왜 대장이 잘 잡은 몬스터를 전부 불도저로 밀어 버린 거야?”

“본인 말로는 주술방울뱀의 주술에 걸린 몬스터 사체는 그냥 태우는 게 좋다고 하던데…….”

“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는데?”

“뭐, 안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면 맞는 거겠지.”

두 번째는 그렇게 이강우가 잡은 몬스터의 사체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안중현이 몬스터 사체를 불도저 마법으로 싹 밀었다.

물론 안중현은 설명을 했다.

주술방울뱀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술방울뱀의 주술에 걸린 몬스터를 썰어다가 먹을 순 없어서 전부 깨끗하게 치웠다고,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곧이 대로 믿을 순 없었다. 안중현과 이강우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 둘 사이만이 공유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 모두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뭐, 이유가 있나 보지.”

“알아서 말해 주겠지.”

만약 보통 조직이었다면, 의심으로 번졌겠지만 팀 포식자는 이강우와 안중현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다. 그들이 무엇을 숨긴다고 해도, 팀 포식자에게 득이 될지언정 해를 입힐 만한 걸 숨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안중현의 빠른 조치 덕분에 변명거리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이강우는 안중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신이 없으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자네야말로 정신이 없었겠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뭘 잘못 먹은 모양입니다.”

둘만이 있는 자리에서 나누는 조용한 대화. 그 대화 속에서 이강우의 말을 들은 안중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독도 소화할 것 같은 자네도 뭔가를 먹고 탈이 나긴 나는 모양이군.”

“저도 사람 아닙니까?”

“사람이라…….”

이 순간 안중현은 무언가를 질문하려다가 꾹 참았다.

‘본인이 밝히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강우가 가진 힘의 정체,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그것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안중현이 무언가를 참고 있을 때, 이강우는 반대로 품고 있던 걸 기다렸다는 듯이 뱉었다.

“권 박사님 말입니다.”

“음?”

“믿을 만합니까?”

이강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안중현은 잠시 고민을 했다. 이후 이강우의 말뜻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권 박사는 즈믄나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네. 마스터가 즈믄나래에 오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반대로 마스터 입장에서 권 박사는 쓸모 있는 사람일지언정 비밀을 쉽사리 공유할 만한 사람은 절대 못 될 걸세.”

“무슨 의미입니까?”

“권 박사는 그 누구보다 본인의 탐구심과 호기심에 충실한 사내지. 그런 그에게 만약 마스터가…… 그러니까 그들이 가진 비밀이 새어 들어간다면 권 박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호기심을 풀어내려고 할 테고, 비밀 유지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가 되겠지. 내가 만약 그들이라면, 세상 60억 인구에게 자신의 비밀은 말해줘도, 권 박사에게는 말하지 않을 걸세. 비밀이 공개되는 것보다, 비밀이 저당 잡히는 셈이 될 테니까.”

설명을 들은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군요.”

“권 박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뭐든 좋습니다.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정보, 그냥 표면상의 정보가 아니라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끌려다닐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이강우는 이번에 다시금 더 견고한 각오를 다졌다.

‘이제까지는 수동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바뀌어야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한 방 날릴 수 있는 노림수를 하나쯤은 만들어두어야 한다.

안중현 역시 이강우의 심정에 동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안중현이 짧게 혀를 찼다.

“권 박사가 쉽사리 정보를 주는 양반은 아닌데…….”

“주술방울뱀의 꼬리라면 충분히 거래가 되겠죠.”

“괜찮겠군.”

여기서 안중현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권 박사와의 거래는 내가 하지. 자네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내가 움직이는 게 나을 터.”

이미 위스프에게 한 번 찍혔던 이강우다.

현재 위스프가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의 사주를 받는다고 의심되고 있으니, 돌고 돌다 보면 이강우도 나름 요주의 인물로 경계 대상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

그런 이강우가 권재용 박사와 정보 거래를 하는 건 의심을 더 구매하는 꼴이다.

안중현이 나서는 게 그림이 훨씬 낫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강우가 거기서 대화를 마쳤다. 그런 이강우를 바라보며 안중현은 다시 한번 말을 꿀꺽 삼켰다.

* * *

“보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수화기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은 강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즈믄나래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 창문, 그 밖을 바라봤다.

특별할 건 없었다. 건물의 숲이고, 즈믄나래 빌딩보다 높은 빌딩이 주변에 가득 찬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건 그냥 건물과 도로 위의 자동차와 거리 위의 사람들뿐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강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무사히 돌아왔군.’

조금 전 통화 상대는 문 관리센터 관계자였고, 그들은 팀 포식자 전원이 무사귀환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해줬다. 즈믄나래 길드의 주관으로 이루어진 유적 사냥이 길드 마스터인 그에게 통보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강우, 그도 멀쩡하게 돌아왔을 터.

강희는 이강우를 떠올렸다.

‘아무 일도 없었거나…….’

이강우, 그를 위해 무대를 마련해줬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권한 이상의 일을 벌인 셈이었다. 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천변과를, 이제까지 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에게는 결코 보여준 적 없었던 천변과와 접할 기회를 줬다.

물론 기회를 준 것일 뿐이다. 이강우가 그 기회를 살릴 수 있을지, 아니면 그 기회를 모른 채 지나갈지, 알고도 무시를 하고 넘어갈지, 그건 지금 당장은 모른다.

‘혹은 예상대로 천변과를 흡수했거나.’

그래도 강희는 이강우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흡수해야지.’

그래야 담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순간 강희의 머릿속에는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언제까지 대적자가 두려워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영원불멸하리라 생각했었던 때, 그 무렵에 자신의 동료가 산 채로 뜯어 먹혔다.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리라 예상했던 자신의 동족이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음식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한 몰골로 먹혔다.

그때 이후 모두가 겁에 질렸다. 겁에 질려서 대적자란 이름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했다.

심지어 강희는 그 광경을, 자신의 동료가 씹어 먹히는 광경을 유일하게 본 목격자였다.

‘언제까지 그를 두려워해서 악몽을 꿀 수는 없다.’

그 덕분에 생긴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강희를 괴롭히는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그가 불사를 자처한 이상, 그 악몽은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남길 것이다.

강희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이 죽을 생각도 없었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 한다면, 사멸(死滅)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마땅히 강희가 아닌 그 대적자가, 야크센이 되어야 했다.

그 기회가 왔다.

야크센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기회가, 뿌리째 뽑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강희가 주먹을 쥐었다.

‘전부 뽑아 주마.’

주먹을 쥔 채로 창밖의 광경을 바라봤다. 그 순간 창에 비친 그의 눈동자가 뱀처럼 갈라졌다.

* * *

5등급 유적 사냥이 끝난 이후 팀 포식자는 각자의 숙소를 배정 받았다. 호텔방이 부럽지 않은 숙소였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이강우가 한 건, 마법청의 관계자와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한 이유.

‘이걸로 주술방울뱀의 꼬리는 확보했다.’

다름 아니라 주술방울뱀의 꼬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보통은 불가능하다.

주술방울뱀의 꼬리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길드라고 해도 섣불리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하물며 마법사 개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강우가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건 안대욱 부청장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클로저 라이센스 덕분이었다.

‘클로저 라이센스…… 대단하단 말이야.’

클로저 라이센스의 위엄이 새삼스러웠다.

물론 이강우가 개인적인 목적으로 주술방울뱀의 꼬리를 얻어낸 건 절대 아니었다.

즈믄나래 유적 연구소에 연구 재료로 기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게 이강우의 조건이었다. 아무리 클로저 라이센스와 마법청 부청장의 전폭적인 지원이라도 이강우가 멋대로 주술방울뱀의 꼬리를 가져다가 술에 담가 먹을 수는 없다.

빼돌린 건 역시 권재용 박사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안중현을 믿어야지.’

권재용 박사는 받는 만큼 주는 양반이다. 그런 그는 괜찮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핵심은 그 정보 중 필요한 걸 끄집어내는 것. 안중현이라면 충분히 이강우가 원하는 바를 꺼내올 것이다.

때문에 이강우는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거기서 접었다. 안중현을 믿으면 된다. 굳이 더 고민을 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고민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천변과라고 했나?’

이강우, 그의 6서클 개방을 가능케 해준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천변과였다.

알림 덕분에 천변과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기뻤다.

단숨에 6서클 개방이라니, 이보다 더한 운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불사황제가 정말 제대로 된 계단을 마련해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이강우가 손거울을 통해 자신이 섭취한 마력 포인트를 확인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천변과를 통해 마력 섭취는 없었어.’

이강우의 계산에 따르면, 그 무렵 이강우가 6서클 개방을 위해 먹어야 하는 마력 포인트는 최소 200만 포인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6서클을 개방했을 때 이강우는 200만 포인트 이상의 섭취 마력 포인트를 확보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섭취한 마력 포인트는 이강우가 몬스터를 전부 해치운 후, 절망의 태양을 흡수해 얻은 포인트가 전부였다.

여기서부터 의심이 시작됐다.

‘생각해보면 난 그냥 혀만 댔을 뿐이지, 섭취한 적이 없어.’

이강우는 먹어야 강해진다. 먹지 않고 강해지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의 능력, 불사황제가 준 능력은 포식을 기본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기억을 돌려보면 이강우는 천변과를 섭취한 적이 없다. 혀만 댔을 뿐이다. 맛만 봤을 뿐이다. 적어도 이강우의 기준에서 그건 먹은 게 아니다. 그저 접촉했을 뿐이다.

그런데 접촉만으로 6서클 개방에 성공했다? 섭취가 아니라 접촉만으로 6서클 개방이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럼 이강우가 아닌 다른 어떤 마법사도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마.’

예전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의문이다. 그러든 말든 이강우는 관심 없는 문제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래시계문 너머의 세계는 주인이 있다.

그리고 그 주인들이 지금 온갖 방법을 이용해 지구의 인류를 절망에 빠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마법사의 마나 서클을 인위적으로 더 많이 개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섬뜩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저 내 망상으로 끝나길 빌어야지.’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한 상상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 * *

세종시에 위치한 즈믄나래 유적 연구소에 도착한 안중현을 가장 먼저 반긴 건 권재용 박사였다. 이미 문 관리센터로부터 주술방울뱀 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그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안중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드디어 내 투자의 성과가 빛을 보이는군.”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이강우 덕분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권재용 박사는 이 자리에서 이강우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양반이었다. 이강우가 이번 일에서 최대한 언급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자, 그럼 근처 식당에서 밥이나 한 끼 하지.”

“예.”

그렇게 권재용 박사가 식사를 위해 안중현을 데리고 간 곳은 시끌벅적하기 그지없는 비빔밥 집이었다. 나름 유명 맛집인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나가며, 시장통 분위기가 연출됐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도 집중하지 않으면 대화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수선함 속에 안중현과 권재용 박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중현이 컵에 물을 따랐고, 그 컵을 권재용 박사 앞에 놓는 순간, 대화가 시작됐다.

“듣고 싶은 말이 있나?”

“요즘 3대 프로젝트는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안중현도 3대 프로젝트를 안다. 이쪽 바닥에서는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다.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연구를 하고 있는…… 그야말로 숙원사업 같은 거니까.

더 나아가 3대 프로젝트의 결과물에 따라서 세계 권력의 판이 바뀔 수도 있다.

“최근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얻은 건 마법 아티팩트 쪽이지. 미국과 독일 그리고 이스라엘이 3서클 마법 아티팩트 제작에 성공했다더군.”

“3서클 말입니까?”

여기서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인 정보가 나왔다.

“일단 이거 어디 가서 말하진 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정보를 섣불리 풀 정도로 여유가 넘치진 않습니다.”

“룬 코드는 예전에 발견했지만 그동안 조합과 조합된 코드를 수용할 매개체 확보가 난제였지. 그런데 최근 이 매개체 확보에 대한 답이 나왔지. 기존 마법 아티팩트들을 녹여서 쓰면 된다…… 간단한 답이었지.”

이야기를 들은 안중현이 후우, 짧게 숨을 고른 후 물을 홀짝였다.

“꽤 파란이 크겠군요.”

“아무렴. 3서클 다음은 4서클, 그다음은 5서클. 한 번이 어렵지, 그 이후에는 일도 아니지.”

마법 아티팩트의 생산.

모든 국가가 최우선 과제로 진행 중인 일이다. 마법사는 늘어나지만, 마법 아티팩트는 그렇게 많지 않다. 또한 마법 아티팩트 공급의 가장 큰 문제는 원하는 마법 아티팩트를 특정해서 유적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선호도가 높고, 수요가 많은 마법 아티팩트의 가치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데 그걸 양산할 수 있다면?

단순히 마법 아티팩트가 많아지는 게 아니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굳이 마법 아티팩트라고 해서 장신구에만 만들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만약 거대한 병기, 전투기 같은 곳에 투명 마법 같은 걸 건다면? 날아가는 미사일의 온도를 감추는 마법을 건다면?

‘끔찍하군.’

섬뜩한 이야기다.

안중현은 식은땀이 흐르는 등줄기를 뒤로한 채 다음 질문을 던졌다.

“모래시계문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요즘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인데…….”

“추측이라도 괜찮나?”

“제가 추측과 정보를 구분할 짬이 있겠습니까? 뭐든 듣겠습니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때 직원의 말이 둘의 대화를 끊었다. 안중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육회비빔밥 2인분 부탁드립니다.”

“네.”

빠른 주문에 직원 역시 빠르게 행동했고, 빠르게 사라졌다. 안중현이 얼마나 급한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권재용 박사가 그런 안중현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권재용 박사가 말을 이어갔다.

“모래시계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모래시계문을 마법 아티팩트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마법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죠.”

모래시계문은 마법을 발동하는 마법 아티팩트다!

아직 정확히 증명된 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관련 학자들이 그 명제를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솔직히 마법이 아니라면 그런 신비한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자, 그럼 그 가설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고. 모래시계문이 마법 아티팩트라면, 과연 그 마법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는 마력은 어디에서 올까? 마법은 마력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는데? 그리고 모래시계에 달린 모래시계의 정체는?”

안중현이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모래시계는 마력이 모이는데 걸리는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겠군요.”

“그럼 왜 그 모래시계는 모래시계문 문 안으로, 유적으로 사람이 들어가면 멈추는 걸까?”

“……그 시간 동안은 마력이 모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자네 말대로 모이지 않는다는 건, 다른 곳에 마력이 사용된다는 의미이겠지. 자, 그럼 정리해보지. 모래시계문은 마법 아티팩트이고, 어디선가 마력을 주입 받으며, 마력이 차는 건 모래시계를 통해 알 수 있고, 마력이 전부 차면 문이 열리고 몬스터가 등장한다.”

이 순간 안중현은 권재용 박사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마력을 외부에서 주입하면…….’

“즉, 마력이 외부에서 유입된다면, 모래시계문이 열리는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는 거겠지.”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는 말 그대로 시계, 모두가 당연히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철칙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오류를 일으킨다? 심지어 시계를 더 빨리 가게 만든다?

“최근 큰 사건을 일으킨 위스프가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테러를 했다면, 그들이 그 기술과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네.”

안중현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만약 위스프가 정말로 모래시계문의 원리를 알고, 그것을 보다 빨리 개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사태는 매우 심각해진다.

결정적으로.

“더불어 이 세상에 마법사는 매일 늘어나고 있네. 마력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아주 쉬워.”

마력을 주입하기 위한 마력을 구하는 건, 폭탄을 구하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의 일이었다.

어렵지만, 못할 건 없다.

이 대목에서 안중현의 머릿속에 있던 몇 개의 퍼즐들이, 퍼즐 구멍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뭐, 이건 내 추측이니 정보라고 할 수 없지. 주술방울뱀 꼬리 정도라면 더 대단한 걸 알려 줘야겠지.”

그런 안중현에게 권재용 박사는 진짜 귀한 정보를 줬다.

“아프리카 지역에 3등급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네.”

“예?”

“아직 정보일 뿐이지만, 신빙성은 높네. 못해도 4등급 몬스터는 등장했네. 단지 4등급인지, 3등급인지 판단이 되지 않을 뿐.”

이 순간 안중현은 깨달았다.

‘시작됐구나.’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 * *

크로포드는 종이 박스에 포장된 스파게티를 포크로 휘휘 저어 돌돌 만 후 입에 넣었다.

그런 크로포드의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 로드리게스 회장이 앉아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하는 7서클 마법사 리볼버와 블랙 스택의 창립주 중 한 명이며, 마법사의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부호 로드리게스 회장.

거물 대 거물의 만남이다.

이 정도 스케일이 거대한 거물 간의 만남이면, 조금 과장하면 역사적 현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

그러나 그런 거물 대 거물의 만남치고 그들이 있는 자리와 장소는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둘은 의자 대신 코카콜라 페트병이 들어있는 박스에 앉아 있었고, 둘 사이에 있는 건 빈 박스를 뒤집어 만든 간이 테이블이 전부였다.

사실 크로포드에게는 이런 무대가 퍽 어울렸지만, 로드리게스 회장은 누가 보더라도 어린애 소꿉놀이에 어쩔 수 없이 낀 어른의 모양새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으로 보였다.

당연히 로드리게스 회장은 빨리 본론을 마치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정말 제대로 된 스파게티를 맛보고 싶다면 내 전용기를 타고 지금 당장 이태리로 가지. 이야기는 내 전용기에서 하고.”

“됐습니다. 이거 먹고 잘 겁니다.”

“내 전용기 좌석이 잠자기에는 더 편할 걸세.”

“고도가 높아지면 잠을 못 자는 체질입니다. 저 비행기 싫어하는 거 모르셨습니까?”

“몰랐군. 미안하네.”

“사실 조만간 잠잘 사람 대뜸 찾아와서 괴롭히는 게 더 미안한 일이죠.”

기어코 로드리게스 회장이 폭발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자네는 참 빌어먹을 인간이야.”

그 말에 크로포드는 스파게티만 우물우물 씹었다. 크로포드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 둘이 알고 지낸 지는 꽤 오래됐다. 오래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모래시계문 등장과 함께 시작된 마법의 시대를 이끈 주역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 그 둘의 친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

“괜히 눈앞에 있는 사람 욕하지 말고 본론만 말합시다. 어차피 농담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고 일거리나 늘려 주려고 왔을 텐데.”

크로포드에게 로드리게스 회장은 일거리만 주는 귀찮은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크로포드에게 로드리게스 회장은 정말 만나기 싫은 상대다.

더불어 크로포드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나름 마법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막강한 카르텔을, 언제든 자신을 위해 마법사 전력을 운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어지간한 경우라면 크로포드를 찾아오지 않는다. 자기를 동네에서 헛소리나 하는 치매 걸린 노인 취급하는 크로포드를 굳이 만나고 싶지도 않다.

달리 말하면 아쉬운 게 있으니까 찾아오는 거다.

물론 로드리게스 회장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그가 크로포드를 위해 해주는 배려는 적지 않다. 적어도 크로포드가 돈 걱정 하지 않고 나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 로드리게스 회장 덕이다.

어쨌거나 공생하는 관계, 굳이 표현하면 기분 나쁜 공생관계다.

“본론부터 말하지. 수단.”

“아, 됐습니다.”

수단이 나오자마자 크로포드가 혀를 내둘렀다.

“3등급이고 4등급이고 나발이고 안 갑니다. 내가 왜 아프리카까지 고생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3등급 몬스터 잡으려면 그냥 군대를 동원하는 게 낫지, 마법사를 왜 씁니까? 내가 아무리 마법으로 지랄을 해도 폭격기 떨어뜨리는 폭탄 한 방의 위력을 내는 건 불가능한데.”

크로포드도 소식을 들었다.

현재 아프리카에 3등급 혹은 4등급으로 판단되는 몬스터가 등장했다고.

이미 유엔이 조사를 위해 팀을 구성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팀 구성을 위해 지원자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연히 크로포드는 그 지원자에 지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 부탁이라면 내가 직접 올 일도 없지. 유엔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지.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이놈일세.”

말과 함께 로드리게스 회장이 사진 하나를 꺼냈다.

“이건 뭡니까?”

“내 친한 친구가 보내준 사진이지.”

“먹성 이상한 놈?”

“음? 뭐라고 했나?”

말을 돌리는 로드리게스 회장을 보며 크로포드는 피식, 웃으며 사진을 봤다. 사진 속에는 거대한 나무가 존재하고 있었다. 메마른 황무지 위에 자라난 나무는 황무지처럼 메말라가고 있었다. 크로포드가 나무를 좀 더 유심히 바라봤다.

“여기 지역의 환경을 보면 절대 이 정도 사이즈의 나무는 자라날 수가 없는데…….”

“한 달 동안 자라나고, 반나절 동안 사그라졌네. 그리고 지금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없어졌네.”

“특이하군요.”

“적어도 지구의 것은 아니지. 지구에 이런 나무는 없으니까.”

“유적에서 나온 거다?”

“왜 이제까지 소식이 없던 3등급 몬스터가 이제야 등장했다고 생각하나? 응?”

질문이 바뀌었다.

크로포드는 눈살을 찌푸린 뒤 손에 들고 있던 스파게티 포장상자를 박스 위에 올려놓았다.

진지하게 대화를 할 모양.

“운이 좋았거나 혹은 여건이 안 됐거나. 두 가지가 겹쳤거나. 셋 중 하나겠죠.”

3등급 모래시계문은 왜 이제까지 개방되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답이 나온 적은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 3등급 몬스터가 등장한 적이 없으니까.

3등급의 경우에는 클로즈에 성공한 것조차 없다. 일단 칠성문이 3등급 유적 사냥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지만, 칠성문의 그 주장을 믿는 사람은 없다. 칠성문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세간의 당연한 생각이다.

어쨌거나 3등급 모래시계문이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세계 각국의 대처가 훌륭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말을 못한다. 정부는 거대할 뿐이다. 이 세상에 유능한 정부는 없다. 덜 무능한 정부만 있을 뿐.

즉, 정부의 활약 덕분에 3등급 모래시계문이 터지지 않은 게 아니다. 그냥 운이 좋거나 3등급 모래시계문이 개방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아는 자들은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자네는 모래시계문이 열리기 위한 여건이 뭐라고 생각하나?”

“서로 아는 거, 입 아프게 계속 이런 식으로 주고받아야 합니까?”

“대답해주게.”

“마력이죠.”

모래시계문은 마법 아티팩트다.

증명된 적은 없지만, 정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설이다. 당연히 모래시계문은 작동하기 위해서 마력이 필요하다.

이 부분을 앞서 말한 것과 섞으면?

지구에는 3등급 모래시계문이란 마법 아티팩트가 작동할 만한 마력을 확보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부는 그 사실의 연장선으로 모래시계문을 뛰쳐나온 몬스터가 높은 등급의 모래시계문 근처에 모이는 걸 몬스터가 가진 마나스톤의 마력을 문에 주입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한다.

즉, 3등급 모래시계문이 개방됐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수작에 의해서, 외부적인 개입에 의해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모든 수작에는 조짐과 흔적이 있는 법이다.

“이 사진 속에 있는 나무가 3등급 모래시계문의 개방을 유도했다, 이겁니까?”

“보다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는 3등급 모래시계문이 이 나무 때문에 가능했다면…… 더 이상 내가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이 분야에 있어서는 자네가 전문가니까.”

크로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로드리게스 회장 말대로 강력한 마력, 무한에 가까운 마력, 현자의 돌이라 불리는 강력한 마력을 손에 넣는 건 크로포드의 숙원 과제이며, 크로포드가 가장 잘 아는 분야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정말 제대로 된 미끼를 가져왔다. 귀찮은데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가져왔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정보를 주지.”

“그러니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자네의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 필요하네.”

“나 말고 이강우한테 구하시지 그럽니까? 그거 만드는 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라서.”

이 순간 크로포드는 잽싸게 이강우에게 공을 넘겼다.

이런 날을 위해서 그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줬다. 그럼 요긴하게 써먹어야 하는 법!

“그럼 자네의 허락은 받은 거로 하겠네.”

“예, 허락했습니다.”

확답을 들은 로드리게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포드는 그런 로드리게스 회장의 모습에 인사 대신 스파게티가 담긴 상자를 다시 들었다. 고독한 식사가 시작됐다.

* * *

-좋은 정보를 얻었네.

“그렇습니까?”

-혹시 모르니,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지.

“그럴까요?”

-날짜와 장소를 잡게.

“아뇨, 어차피 제 일정은 당분간 아무것도 없으니까 형님이 약속을 잡아주시죠.”

-알겠네.

“그럼 잘 들어가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자네도.

통화가 종료됐다. 이강우는 통화 종료와 함께 자신의 애마에서 시동을 걸었다.

‘좋은 정보.’

안중현이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낸 모양이다. 이강우의 머릿속이 자연스럽게 복잡해졌다.

‘정보도 정보지만, 이제 슬슬 내 위치를 좀 더 견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과연 모래시계문과 그 배후를 막을 방법이 있을까? 그들의 틈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방법을, 어떤 틈을, 어떤 공략법을 만들어도 이강우가 즈믄나래라는 이름에 얽혀 있는 이상, 결국 독 안에 든 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이강우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즈믄나래와 블랙 스택이란 목줄을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로드리게스 회장에 아예 전폭적으로 붙을까?’

이 상황에서 의외로 잡을 만한 동아줄은 로드리게스 회장이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블랙 스택과 사이가 좋지 않다. 사이가 좋다면 이강우에게 그런 긴밀한 접촉을 통해, 굳이 블랙 스택에 속한 마법사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할 리가 없을 테니까.

블랙 스택과 반목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세력보다는 신뢰가 간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로드리게스 회장은 블랙 스택과는 벽을 두고 있는 나름의 독자적인 세력은 물론 세계 각국 정재계에 긴밀한 관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즈믄나래를 나가면, 백퍼센트 의심받을 테고.’

이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쉽사리 제안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블랙 스택과 같이 비교되는 3대 길드 중 두 곳인 이존이나 칠성문과 접촉하는 건…… 젠장! 보통 천재들은 여기서 멋진 아이디어가 번뜩이던데…….’

그때.

꼬르륵!

번뜩이는 아이디어 대신 이강우의 배가 아우성을 내질렀다. 이강우가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디어는커녕 난 뱃속만 번뜩이는 모양이군.’

식사를 하지 않은지 꽤 됐다.

심지어.

“초콜릿? 아…….”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초콜릿도 없었다. 차 곳곳에 숨겨 놓았던 초콜릿이 하나도 없었다.

‘유리…… 정말 잘 먹는구나.’

채유리, 그녀가 다 해치운 모양이다.

당장 허기를 달래줄 초콜릿도 없으니, 뱃속이 더더욱 격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정말로 울부짖는 것처럼, 꼬르르르륵! 긴 소리가 났다. 어쨌거나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1년 후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사람은 일주일만 굶어도 사경을 헤맨다.

우습고도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그래, 결국 먹고 살려고 이 짓을 하는 건데, 죽기 전에 입이라도 최대한 호사를 누려 봐야지.’

이 순간 이강우는 로드리게스 회장이 준 블랙 카드를 이용해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비싼 음식으로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걸려온 한 통화의 전화와 함께 끝이 났다.

스마트폰이 울렸고, 처음 찍힌 번호가 떴다. 이강우는 짧게 고민했다. 모르는 번호, 받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번호다. 이강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강우 씨 폰이 맞습니까?

“예, 누구십니까?”

-통화하게 되어서 반갑네. 이부성이라고 하네.

이부성.

이강우가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마법청장님?”

-하하, 용케 알아주는군.

이부성.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마법청의 최고 권력자, 마법청장이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통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런 그가 이강우에게 전화를 했다.

본인이 먼저.

이강우는 갑자기 두통이 오는 걸 느꼈다.

‘젠장.’

그냥 안부 인사나 하려고 전화했을 리는 없다.

하물며 이런 높으신 양반이 이강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전화했을 리도 없다. 분명 귀찮고, 복잡하고, 어려운데,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했을 것이다.

‘아니, 내 몸에 꿀이라도 발랐나? 날 핥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새끼들만 잔뜩 있는 거 같아.’

폭발할 듯한 심정, 이강우는 그 심정을 꾹 가슴 속으로 눌렀다. 심정 대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시간이 있나?

“중요한 일입니까?”

-중요하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친구군. 이번에 중요한 분들과 자리를 간신히 만들었네. 자네가 그 자리에 참석해 줬으면 하는군.

“참석자들을 알 수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참석자분들은 말해줄 수 없네. 대신에 중국에서 오신 분들일세.

중국.

감이 왔다.

‘칠성문 관계자인가?’

위스프 테러 사건 이후 이부성 마법청장의 지지도는 꽤 떨어졌다.

동시에 즈믄나래의 평판도 제법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몇 이들은 긴급한 사태에 대비해 블랙 스택과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물며.

‘위스프가 3등급 모래시계문을 가지고 있으니, 칠성문의 힘이 필요해질지도 모르지.’

위스프가 가진 또 다른 무기, 3등급 모래시계문을 염두에 둔다면 중국의 지원이 꼭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부성 마법청장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다시 한번 위스프의 모래시계문 테러가 일어나면 모가지다. 정치인으로 꽤 높으신 자리까지, 총선을 지나 대선까지 노리시는 권력가 양반에게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일일 터.

‘칠성문이라…….’

의외로 이강우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제가 준비할 게 있습니까?”

물론 이부성이 호의로 이강우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줄 리 없다. 견적은 금방 나온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 얼마나 준비할 수 있나?

마나 서클 자극 비약!

‘오케이.’

드디어 이강우가 준비해둔 미끼를 대어가 물었다. 이런 날을 위해서, 이런 거래를 위해서 크로포드까지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다.

“당장은 힘듭니다.”

-내 이름으로 모든 지원을 해주면?

“마법청의 도움을 받으면 대량은 힘들어도 이틀 이면 충분합니다.”

-좋군.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면 연락하겠네.

“예.”

이부성은 거기서 전화를 뚝 끊었다. 이강우는 통화를 종료했고,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꺼진 스마트폰의 검은빛 액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머리 위에 여섯 개의 고리를 반짝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강우, 아주 대단한 양반이 됐구나.’

그때.

우웅!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이강우는 발신자를 보는 순간 이를 꽉 물었다. 뜬 번호의 주인은 다름 아니라.

“젠장.”

로드리게스 회장이었다.

이 순간 이강우가 혓바닥으로 자신의 손등을 핥았다. 짠맛만 느껴졌다. 이강우가 그 짠맛에 혀를 찼다.

‘내 몸에 꿀 발라진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오늘 나한테 이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