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3화 (43/66)

43화. 여섯 번째 고리

팀 포식자는 강하다.

그 증거로 그들은 5등급 몬스터 앞에서도 물러섬은커녕, 번 듯한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압도당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

단순히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 본다면 과연 이게 나무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 앞에서 팀 포식자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단순히 거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나무에는 그 거대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의 아우라, 위압감이 존재했다.

그런 그들의 정신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넋을 잃은 그들을 깨운 건.

“저거 무슨 맛일까?”

나무에 매달린 무수히 많은 과일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던지는 자, 채유리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이 모두를 깨웠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우가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스트렝스.’

곧바로 마법을 사용한 이강우는 휙휙, 원숭이처럼 거대한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를 오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헤이스트 마법, 스트렝스 마법, 이 두 가지 마법이면 보통 사람도 직각으로 된 절벽을 공원 조깅보다 쉽게 오를 수 있으니까.

심지어 거대한 나무의 가지들은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정글짐과 같았다. 어떤 위치에서도 쉽게 잡고 오를 수 있는 나뭇가지가 가득했다.

그렇게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간 이강우는 과일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받는 건 하선우의 몫이었다. 그는 바람 마법을 이용해 떨어지는 과일들을 허공에서 받았고, 한곳에 모았다. 마치 바람에 휘날린 낙엽이 한곳에 모이는 듯한 것과 흡사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떨어진 과일은 김재범의 몫이었다. 김재범은 모인 과일들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음.”

독술사.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독에 대해서는 한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는 과일의 과육 상태, 껍질 상태를 체크하고, 향을 맡았다.

“향은 별거 없고.”

딱히 인상적인 향은 없었다. 약간의 풋내가 느껴졌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어디 한 번 속을 봅시다.”

곧바로 김재범이 라텍스 장갑을 낀 뒤, 과일을 잘랐다. 과일이 가진 과육은 사과 정도였다. 금방 잘렸고, 반으로 잘리자 누리끼리한 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씨가 없네.”

그러나 어디에도 씨가 없었다.

본래 과육의 목적은 씨앗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씨앗이 없다는 건, 순수한 의미의 과일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의미다.

“일단 독은 없는 듯합니다.”

이후 간단한 테스트를 마친 김재범이 장갑을 벗으며 자신이 조사 내용을 짧게 브리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과일마다 과육의 상태와 색이 전부 다릅니다.”

“다르다?”

“쉽게 말해서 어떤 건 바나나고, 어떤 건 망고고, 어떤 건 배고, 어떤 건 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밤?”

“밤송이에 들어있는 밤 말입니다. 군밤 재료요.”

“그런 게 가능한가?”

“좀 더 학술적으로 말하면 과일이라고 하기도 뭐하죠. 애초에 씨가 없으니까요.”

“그럼 고구마 같은 건가?”

“……계문강목과속종, 여기에 맞춰서 제대로 분류를 하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겠죠. 참고로 그거 제 분야 아닙니다. 저한테 물어보셔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답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수준밖에 안 됩니다.”

“독은 없다는데 확실한가?”

“해독 마법은 썼습니다.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유적에 접하는 독은 해독 마법으로 해독이 가능하니까요.”

“남은 건 맛이군.”

“예, 맛이죠.”

그 순간 가장 먼저 나선 건 이강우였다. 이강우는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덥석, 잘린 파란색 과일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는 순간 아삭! 상큼한 소리가 났다. 이후 입안에서 과육을 씹을 때마다 얼음을 씹는 듯한 소리가 났다. 단단한 얼음이 아니라, 작은 얼음 알갱이를 씹는 소리. 정말 시원시원한 소리였다.

모두가 그 소리와 이강우의 입을 집중했다. 그런 주변의 관심 속에서 이강우가.

꿀꺽!

과육을 삼켰다.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된 셈.

“레몬의 신맛에 사과의 단맛. 식감은 들은 소리 그대로.”

이강우가 짧게 감상을 뱉었다.

“디저트로 괜찮겠군요. 작은 얼음을 잔뜩 넣은 레모네이드를 먹는 느낌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슬그머니, 저마다 제각각 다른 형태, 다른 색의 과일을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다른 감상을 내놓았다.

“내건 바나나 같은데? 아직 덜 익은 바나나.”

“제건 초콜릿 비슷한 맛이 납니다. 좀 쓰네요.”

“초콜릿? 누구께 초콜릿이에요? 아, 제건 수박 맛이네요. 근데 식감은 수박보다는 고구마에 가까워요.”

가지각색.

똑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과일인데, 모든 대부분의 과일들이 맛이 달랐다.

“내건…… 배의 단맛하고, 삶은 고구마의 단맛하고, 그 외의 여러 단맛이 섞인 느낌이군.”

심지어 여러 과일의 맛이 어우러지는 경우도 있었고, 과일 맛과는 전혀 다른 맛도 있었다.

“으악, 퉤퉤!”

김재범의 경우가 그랬다.

“젠장, 이건 뭐 이래? 썩었나? 무슨 썩은 폐수를 입에 넣은 기분이야. 퉤퉤!”

유일하게 꽝을 뽑은 김재범은 그 꽝을 뽑은 걸 가지고 십여 분 동안 불만을 토로했다.

어쨌거나 신비한 경험이었다.

“이거 가지고 나가면 대히트칠 거 같은데.”

“집안에 이런 나무 하나 키우면, 365일, 전부 다른 맛의 과일을 즐길 수 있겠죠.”

“아니, 이런 나무를 집에 들일 정도의 거대한 집을 가진 대부호라면 그냥 전 세계의 모든 과일을 원할 때 구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과일이 오묘하고, 복합적인 맛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과일이 고개를 들면 산더미처럼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 과일의 진가를 정말 제대로 보여준 건 그 누구도 아닌 김수애였다.

말없이 이 과일, 저 과일…… 김재범이 먹은 과일만 빼고 나머지 과일들을 먹어본 김수애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말했다.

“이거 맛이 재미있네요. 정말 이 팀에 들어오길 잘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재미난 걸 만들어드리죠.”

그녀는 곧바로 과일 몇 개를 고르더니, 곧바로 바늘을 꺼내 과일 이곳저곳을 찔러 맛을 봤다. 그리고는 곧바로 과일의 일부분만을 회처럼 잘라냈다. 잘라내는 것도 그냥 푹! 자르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부위만을 도려내듯 잘라냈다.

그렇게 그녀가 도려낸 부위들은 제각각이었지만 평균적으로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였다.

그야말로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크기. 때문에 처음 그걸 봤을 때 모든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먹으라고?’

‘아까 먹었던 거잖아?’

약간의 의구심.

“드셔 보세요.”

하지만 못 먹을 것도 아니고, 먹으라고 줬는데 마다할 수는 없는 노릇. 모두가 동시에 작은 과일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아!

굳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굳은 채로, 입을 꽉 다문 채로 과일을 사탕처럼 녹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맛봤던 맛이었다. 대신에 그 맛의 깊이가 달랐다. 마치 바나나의 슈가 스폿처럼, 그 과일이 가진 맛이 가장 극대화됐을 때의 맛, 그 맛을 지금 이들이 맛보고 있었다.

그 맛 앞에서 표현은 무의미했다.

그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김수애가 그들에게 설명을 해줬다.

“이 과일은 과일 자체에 다양한 맛이 각 부분에 존재하고, 그 맛이 퍼지면서, 맛들이 마블링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맛의 근원지를 잘라내면,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죠.”

그녀의 설명에 모두가 감탄했다.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차원이 다르네.’

맛있는 요리를 만들라면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맛의 한계점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이강우는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김수애, 미식가란 별명답게 한계를 초월하는 미각을 통해 대상의 모든 맛을 단숨에 분석할 수 있는 그녀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신기(神技)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다.

‘맛은 좋은데…….’

신기하고, 재미있고, 맛이 있다. 누구 말대로 이걸 상품화할 수 있다면, 아마 과일 재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이 과일은 아무리 먹어도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분석 마법은 종료됐지만, 분석 마법으로 이 나무를 봤을 때의 광경은 여전히 눈앞에 선명했다.

‘최소 백만.’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지금 이 나무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강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 백만 단위는 가뿐하게 넘을 정도로 많은 마력을 이 나무가 품고 있다.

그런데 과일에는 아무런 마력이 없다?

그렇다는 건 어느 한곳에 마력이 집중된 게 있다는 의미.

‘어떻게 할까…….’

당장 분석 마법을 쓰고, 마력의 근원지를 찾아보고 싶다. 최소 1백만 포인트란 건,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의미. 아니, 1백만 포인트라면 플래티넘북 두 권짜리 포인트다. 불사황제가 말한 권능 세 개 중 남은 두 개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유적 사냥을 위한 대비를 해야 한다. 과일을 즐기는 것도 여기까지다. 팀 포식자에게 유적 사냥은 피크닉과 비교되고는 하지만, 절대 피크닉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농담은 할 수 있어도,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가는 누구든, 언제든 죽을 수 있기으니까.

당연히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것들을 할 때. 베이스캠프를 정리하고, 주변 탐색을 하고, 몬스터 사냥에 나서야 하며, 간간이 마법 아티팩트도 발굴해야 한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이런 모든 과정은 리더인 이강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강우가 딴 눈을 팔 여유는 없다.

‘일단 당장은 내 역할에 충실하자.’

이강우가 일단 당장의 행동은 접었다.

‘조만간 기회가 오면, 그때 행동하면 되겠지.’

물론 포기한 건 절대 아니었다.

* * *

“다섯 번째 입구 발견.”

안중현은 토굴로 들어가는 큼지막한 입구를 바라보며 무덤덤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트랩 설치.”

“예.”

명령이 나오기 무섭게 총꾼 한 명이 잽싸게 토굴 입구 근처에 트랩을 설치했다. 대상에게 타격을 주기보다는 입구 주변을 오고 가는 것들을 감시하기 위한 트랩이었다. 감시 카메라도 설치했다.

그렇게 트랩을 설치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안중현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짧은 생각에 빠졌다.

‘이번 유적은 특이하군.’

이번 유적은 기본적으로 숲 타입이었다.

그런데 숲에서 발견되는 몬스터의 개체수가 극히 적었다. 5등급 유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적 입장 5일 차에 발견한 몬스터가 3마리뿐이었고, 전부 9등급짜리 놈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거대한 입구를 가진 토굴들이 발견됐다.

‘대충 상황을 보면 진짜배기는 이 안에 있겠지.’

상황을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호랑이굴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에 들어가듯,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는 이 굴 안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런 타입의 유적은 처음이었다. 숲 타입, 개미굴 타입의 유적은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이렇게 숲 타입인데, 토굴이 잔뜩 있는 타입의 유적은 처음이었다.

‘반길 일은 아니지만.’

유적 사냥에서 처음은 좋은 게 아니다.

하지만 안중현은 긴장하지 않았다.

‘어려울 거 없어. 몬스터들의 행동 패턴을 보면 토굴 안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하나씩,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공략을 하면 된다. 시간에 쫓길 이유는 없다. 이미 식량도 상당수 확보했다.’

동시에 안중현은 믿었다.

‘이강우의 능력이라면…… 제대로 된 전투 환경만 조성하면, 변수만 배제하면 전투는 백전백승이다.’

이강우의 능력은 최고다. 그는 이미 대한민국 최강의 마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비수나 명궁 혹은 채유리라고 해도 성족공룡을 그렇게 가뿐하게 잡을 순 없다.

즉, 이강우에게 무대만 마련해주면 된다. 특별한 변수가 개입되지 않도록, 몬스터와 이강우가 맞짱을 뜰 수 있는 환경만 만들면, 그 어떤 몬스터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안중현의 역할이었다.

단순히 이번 유적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강우를 도와서 이강우가 마주하는 모든 적을 이강우가 오롯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주변을 만들어주는 것.

‘좋아.’

안중현이 다시금 자신의 역할을 되새김질했다.

그때.

-안 선배, 큰일 났습니다.

김재범,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중현이 곧장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대장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뭐?”

안중현, 그가 보조해야 하는 이강우에게 심각한 일이 생겼다.

* * *

이강우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가슴 언저리가 아니었다면, 시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이강우를 바라보는 포식자 팀의 분위기는 팀 포식자 결성 이후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착잡하게,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아있었다.

‘후우.’

‘맙소사.’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그 누구도 섣불리 이 상황을 두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말 많은 김재범 역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 대신, 열심히 자신의 실험 도구를 이용해 이강우의 몸에 생긴 이상 현상을 분석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깊은 고뇌에 휩싸인 건 당연히 안중현이었다.

이강우의 부재 속에서 당연히 이강우를 대신해야 하는 그는 나무뿌리 하나를 의자 삼아 앉은 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는 이가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분위기를, 고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왜?’

정말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강우가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기절을 했다.

목격자도 없었다. 이강우가 대체 어떤 일 때문에 기절했는지 본 사람조차 없었다. 그저 이강우가 쓰러진 걸 누군가 발견했을 뿐.

‘공격을 당한 건…….’

이강우가 쓰러졌을 때, 베이스캠프에 머물던 김수애와 김재범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둘이 이강우를 검사했다.

‘아니야.’

검사 결과는 깨끗.

이강우의 몸 어디에도 외상으로 보일만 한 흔적은 없었다. 작은 생채기조차 없었다. 너무 깨끗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

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재범은 이강우의 피를 뽑으면서까지 이강우의 이상 현상을 조사했지만, 독에 의해 영향을 받은 증상이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김재범은 해독 마법을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마법을 쓰고 난 김재범이 탈진을 할 정도로, 5서클 마법사가 숨을 몰아쉴 정도로 마법을 썼지만 이강우의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동안 알리지 않은 지병이 발병한 건가……?’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의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거듭 떠올려 봤다.

‘아니야.’

그러나 어느 순간 안중현은 깨달았다. 이강우가 지금 어떤 이유로 정신을 잃었는지 이유를 파악한다고 해서 그를 치료할 방법이 나오리란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만약 정신적인 것, 뇌에 관련된 거라면 절대 유적 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 문 관리센터 내에 위치한 전문가들, 전문적인 설비의 도움을 받는 게 우선이다.

‘여기서 이 이상 뭔가를 할 수는 없어.’

즉, 지금 이강우를 구하고 싶다면 하루빨리 출문을 통해 이강우를 내보내는 게 우선이다.

적어도 지금 팀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이강우의 뇌를 해부하거나, 어떤 특수한 의약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름 전력은 충분했다.

‘전력은 충분하다.’

이강우는 강하다. 그는 혼자서도 5등급 유적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실력자다. 그런 이강우의 부재와 전력의 공백이 아무런 영향도 없다면 거짓말일 터.

하지만 그런 이강우를 빼더라도 팀 포식자는 충분히 강했다. 일단 모든 마법사가 5서클 이상이다. 김수애의 마나 서클은 본인 입으로는 4서클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비전투전력이니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여기에 채유리라는 6서클 마법사가, 강력한 패가 있다.

5서클 마법 아티팩트도 무려 여섯 개를 지급 받았다. 마법청의 전폭적인 지원의 결과다. 5서클 마법사 머릿수보다 많은 5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지급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정도면 5등급 유적 사냥은 충분히 가능하다. 약간의 속도를 붙여도 된다.

문제는 유적 타입.

‘토굴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현재 숲의 탐사는 70퍼센트 정도 완료됐다. 그리고 출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문 역시 토굴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토굴은 깊고, 컸으니까.’

그렇다면 출문은 이제까지 발견한 토굴 속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토굴을 조사하는 건, 일단 탐색부터 꽤 시간을 잡아먹으니까. 본래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처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걸 단기전으로 끝내려면 한다면…… 그만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탐색도 빠르게, 사냥도 빠르게.

‘안 돼.’

여기서 안중현은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 자신의 생각에, 계획에 스스로 태클을 걸었다.

‘이강우 목숨만을 위해 나머지 목숨을 밑도 끝도 없이 담보로 잡을 순 없어.’

이강우만을 위해서 나머지 팀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다? 계산이 가능하면 한다. 목숨을 담보로 확실한 결과를 보장 받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한다.

하지만 보장이 없다면, 그건 그저 단순한 베팅이다. 도박에 가깝다. 팀원들 목숨을 희생한다고 해서 이강우가 백퍼센트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나머지 팀원들이 죽으면 이강우도 죽는다. 이게 지금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안중현이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이 순간 안중현이 내릴 수 있는 답……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이라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방관.’

이강우를 무시하는 거다.

어쩔 수 없다. 리타이어 한 사람만을 위해 팀을 이끌다가는 결국 공생이 아닌, 공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강우가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라면 다르다.

그리고 안중현이라면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할 것이다. 이강우를 위해 모두를 희생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방법을. 이강우 본인도 자신의 처지라면 같은 판단을 내릴 터.

‘젠장.’

때문에 안중현은 이를 꽉 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걸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 * *

“이대로 유적 사냥을 진행한다.”

안중현이 결론을 말했을 때, 안중현이 가장 먼저 바라본 건 채유리였다. 이강우의 목숨이 걸렸다면, 물불도 가리지 않는 그녀가 쉽사리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음.’

하지만 채유리는 안중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반발하지 않았다.

‘의외로군.’

그녀는 이글이글 눈빛을 불태웠지만 그뿐이었다. 당장 안중현을 향해 언성을 높이거나, 악을 쓰거나, 자기주장을 격렬히 주장하지 않았다. 의지만 불태웠다.

‘강우하고 약속했어.’

이강우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강우는 채유리에게 언제나 말했다. 팀은 우리 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더 나아가 이강우는 채유리가 자신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게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해줬다. 충고가 아닌 부탁.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그 말을 채유리는 가슴 속에 심어두었다. 이강우가 한 말이니까. 평생 잊지 않도록 가슴 속에 꼭, 깊이 담아두었다.

채유리의 반발이 없는 상황에서 안중현의 선택에 더 이상의 반대 의견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매정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모두가 비슷한 생각은 했다.

“좀 더 타이트하게 움직이죠.”

“대장이 없으면 식량 확보도 쉽지 않을 테니까…… 기존 식량도 나름 충분하지만, 그래도 일단 유적 사냥을 빨리 진행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차피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 좀 더 감수한다고 해서 부들부들 떨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너무 평소대로 천천히 유적 사냥을 하는 것보다는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좀 더 과감하고, 빠른 유적 사냥이 필요하다는 생각.

또한 도축 기술자인 이강우의 부재로 몬스터 도축을 통한 식량 확보가 쉽지 않아진 만큼, 예정된 것보다 유적 사냥을 빨리 마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결국 그런 생각을 하는 진짜 이유는 하루빨리 출문을 발견해서 이강우에게 제대로 된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이유였다.

“걱정 말게. 8등급 이하 몬스터라면, 아는 녀석들은 충분히 내가 도축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안중현이 그동안 숨겨둔 능력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안중현, 그 역시 공부를 했다. 몬스터 도축은 작금의 대세였다. 이제는 대부분의 길드가 몬스터 도축의 가치를 파악하고 제대로 된 도축 기술자를 양성하는 중이었고, 안중현이 속한 즈믄나래의 스택 레코드에는 몬스터의 도축에 대한 정보가 충분했다. 안중현은 그 정보를 토대로 나름 공부를 했다. 이강우가 할 때 옆에서 도축 방법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강우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량 확보를 위한 도축 정도는 이제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 사실을 안중현이 굳이 공개한 건, 팀 전체가 이강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말 무리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의지를 가지는 건 좋다.

하지만 그건 선원들의 이야기다. 항해사는 그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빙산을 향해 돌진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그런 안중현의 모습에 모두가 새삼 감탄을 했다.

‘안 선배 대단하네. 그런 걸 또 공부했단 말이야?’

‘믿을 수밖에 없군.’

정말 철두철미하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그의 모습은 이강우의 부재 속에서도 모두에게 안도감을 줬다.

그러나 그들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오는 법이니까.

* * *

유적 입장 20일째.

팀 포식자의 유적 사냥은 이강우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사고를 제외하면, 완벽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탐색은 매우 순조로웠다. 토굴 탐색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하지만 안정적으로 진행됐다.

사냥도 마찬가지로 순조로웠다. 토굴 내에서 몬스터를 발견하면, 상황에 따라 토굴 내에 진입해서 사냥을 하거나 혹은 미끼로 몬스터를 유인해 처리를 했다.

인상적인 건 몬스터 사냥에 걸리는 시간이었다. 어떤 몬스터든, 전투가 시작되면 3분 내에 정리가 됐다. 6등급 몬스터마저도 3분을 버티지 못했다.

몬스터 사냥을 속전속결로 끝내는 건, 단순히 마법사의 서클이 높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몬스터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완벽한 전투법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볼버가 최고라 평가 받는다. 여섯 개의 마법이면 어떤 몬스터도 잡을 수 있는 리볼버 스타일의 사냥법, 그 사냥법을 팀 포식자가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강우의 상태도 괜찮았다. 악화는 없었다. 오히려 이강우가 너무 멀쩡해서 이상하게 보일 정도. 링거를 통해서만 영양분 섭취가 가능한 이강우는 조금의 체중감량도 보이지 않았다. 수분 섭취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고, 그건 이강우가 단순한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이상 현상을 겪는다는 증거였다.

어쨌거나 이강우가 시간이 흘러도 악화되지 않는다는 건, 나름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 사실에 팀 포식자의 팀원들은 조급함을 덜어낸 채 유적 사냥에 임할 수 있었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하는 심리가 그들에게 여유를 줬고, 여유는 보다 빠르고, 완벽한 사냥을 가능케 했다.

여기에 백미로 작용한 게 김수애의 요리였다.

그녀의 요리는 이강우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강우의 요리는 분명 맛이 있었다. 먹을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유적에서 이런 맛을 즐길 수 있는 게 호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수애가 만들어준 요리는 감탄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맛을 떠나서 요리 자체의 수준이 달랐다. 당장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그 요리의 맛을 탐구하게끔 만드는 요리. 요리 앞에서 감탄사가 아니라 진지한 고뇌를, 과연 이 요리의 맛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이런 맛이 나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자세를 갖추게 만드는 요리였다.

심지어 채유리마저 인정했다.

“대단하네요.”

채유리가 김수애를 칭찬했다. 그런 그녀의 칭찬에 김수애는 짧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여유는 어느 순간 송두리째 무너졌다.

“맙소사.”

탐색 로봇이 가져온 영상을 보는 순간 안중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죠?”

유적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김수애만 의문을 표했다. 그런 그녀에게 김재범이 짧게 설명했다.

“5등급 유적에서 가장 만나서는 안 되는 괴물 같은 놈이 등장했습니다.”

“원래 다 괴물 아닌가요?”

“그 괴물 중의 괴물이죠.”

“얼마나 대단한 놈이죠?”

대답은 안중현의 입에서 나왔다.

“이름은 주술방울뱀.”

“독특한 이름이군요.”

“꼬리에 딸린 방울로 몬스터를 조종하고…… 몬스터를 보다 흉포하게, 저돌적으로 만드는 최악의 몬스터지.”

5등급 몬스터 주술방울뱀.

유적 사냥꾼들, 개중에서도 일찍 마법사가 되었고,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유적 사냥꾼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더불어 알제리와 이집트, 모로코에서 무려 1만 명이 넘는 인간을 학살한 최악의 몬스터이기도 하고.”

1만 명.

그 말에 언제나 여유를 뛰어넘는 우아함마저 가지고 있던 김수애가 긴장했다.

이 순간 안중현이 판단을 내렸다.

“몬스터 개체 수를 빨리 줄여야 해. 주술방울뱀이 우리의 낌새를 느끼기 전에 빨리.”

이제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서둘러야 할 때가 왔다.

* * *

주술방울뱀은 혼자서는 그리 대단한 몬스터가 아니다. 순수한 전투력은 6등급 몬스터 수준에 불과하다. 때문에 처음 주술방울뱀이 등장했을 때, 녀석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이 몬스터들의 대규모 출몰로 무질서의 땅인 아프리카에 등장했을 때, 녀석은 악마조차 두려워할 만한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당시 등장한 주술방울뱀의 주술에 취한 몬스터의 숫자가 오백이 넘었고, 그 오백의 몬스터 군단이 공포를 잊은 채, 주술방울뱀의 지휘를 받아 진격을 하는 광경은 어찌 보면 장관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듯한 광경.

어쨌거나 그때 사건 이후 모든 국가와 길드는 주술방울뱀을 최우선 제거 명단에 포함시켰다. 등장이 파악될 경우, 국가적 역량 전부를 투입해 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일선에서 활약하는 마법사들 역시 주술방울뱀에 대한 공략법을 숙지했다.

안중현은 당연히 주술방울뱀을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녀석이 주술로 부릴 수 있는 몬스터의 개체수를 줄이는 게 최우선이다.

이 정도는 모두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중요한 건 그다음, 과연 어떻게 녀석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가?

“주술방울뱀은 시각과 후각이 예민하다.”

일단 주술방울뱀은 냄새에 민감하다. 특히 피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때문에 미끼를 이용해 몬스터를 유인하는 작전은 보류한다.”

즉, 몬스터를 유인하기 위해 몬스터의 사체를 잘라 만든 미끼를 쓰는 건 도리어 주술방울뱀을 자극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번에 주술방울뱀을 영상으로 찍을 수 있었던 것도, 미끼로 두었던 사체 근처에 주술방울뱀이 등장한 덕분이었다. 녀석이 미끼에 반응했다는 의미다.

“당연히 이제는 몬스터가 함정에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잡으러 간다.”

미끼를 통한 유인이 불가능해졌다면 당연히 가서 잡는 수밖에.

“전투는 속전속결.”

직접 적군 앞마당에서 싸우는 격이다. 장시간 전투를 치르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빨리 잡고, 빨리 빠져야 한다.

당연히 그걸 위해서는 팀 포식자의 전투 능력을 한 곳에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그렇기에 안중현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강우를 보호하기 위해 총꾼 두 명을 남기고, 나머지 전부가 전투에 투입된다.”

이강우, 그를 보호하기 위한 병력으로 총꾼 두 명을 남겼다. 그 외의 나머지 일곱 전부가 몬스터 사냥에 투입됐다.

안중현 입장에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이강우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베이스 캠프를 지키기 위해서 과도한 병력을 집중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총꾼 두 명을 남긴 것도, 그들이 이강우를 지키는 걸 원해서 그런 게 아니다. 유사시에 그들이 이강우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도록, 그걸 위한 병력 배분이었다.

김수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강우 곁에 머문다고 해서 전력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녀는 몬스터 사냥팀과 함께 움직이는 게 낫다.

그렇게 몬스터 사냥팀이 조직됐다.

그리고 안중현은 여기서 다시 한번 과감하기 그지없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번 몬스터 사냥팀의 지휘는 하선우와 김재범이다.”

“응? 안 선배? 뭐라고요?”

“안 선배님, 지금 잘못 말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 둘은 천생연분이다. 그러니까 둘이 이번 몬스터 사냥의 처음과 끝을 지휘한다.”

안중현의 결정에 김재범과 하선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너무 흡사해서, 똑같이 생긴 점은 하나도 없는 그 둘이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안중현은 진심이었다.

‘이 둘의 능력은 최고다.’

김재범과 하선우의 능력은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조합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 둘은 서로의 관계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냥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다.

평소에는 상관없다. 자기 몫만 해둬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실력자들이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 문제가 생길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까지 그들의 감정싸움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쓸 수 있는 최고의 패를 꺼내야 할 때 아닌가?

“아, 이 재수 없는 놈하고 파트너라니.”

“저도 그리 달갑진 않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재수 없더라도 살아남아야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거니까.”

“예, 그렇죠.”

그런 안중현의 의중을 김재범과 하선우도 나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김재범과 하선우도 나름 번듯한 성인이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감정싸움으로 판을 망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이 팀은 그저 급조된 팀이 아니다. 나름 그 둘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같이 함께하며, 동료애를 쌓은 곳이다. 자신들의 감정싸움으로 동료가 희생당하는 걸 그 둘은 원치 않았다.

“그럼 우리 둘이 몬스터와의 전투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지휘하는 겁니까?”

“둘이 지휘를 하고, 채유리와 내가 전투에 돌입한다. 체스말 다루듯, 우리들을 다루면 된다.”

“안 선배를 턱짓으로 부리는 날이 왔군요.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김재범의 말에 안중현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 옅게 웃었다. 이걸 노렸다. 그 둘이라면,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충분히 서로 감정을 죽이고 화합을 도모해 줄 테니까.

당연히 이번 일이 끝나면, 오늘의 유적 사냥 경험은 팀 포식자의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이 전투에서, 주술방울뱀과의 전투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하면 된다.

‘쉽지 않겠지.’

물론 그게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 *

하선우의 바람잡이 능력은 굉장히 대단하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은, 표적의 몸 구석구석에 얼마든지 접촉할 수 있다. 그 접촉이란 단어가 독이라는 단어와 합쳐질 경우의 시너지 효과는 매우 우수하다.

김재범의 능력의 놀라움은 단순히 독의 강함이 아닌 그가 다룰 수 있는 독의 다양성에 있다. 더 나아가 김재범은 어떤 독을 썼을 경우 표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그 둘을 상대하게 될 6등급 몬스터 가시꼬리늑대에게는 악몽 같은 이야기였다.

거대한 몸뚱이 그리고 언제 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는 독을 품은 가시가 꼬리에 잔뜩 돋아난 가시꼬리늑대가 토굴 안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발견하는 순간 모습을 감춘 몬스터 사냥꾼팀은 곧바로 전투를 준비했다.

김재범이 독을 만들었다.

“오른쪽 눈에는 이거, 왼쪽 눈에는 이거.”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만들었다.

“뭡니까?”

“하나는 통증을 주는 거고, 다른 하나는 환각을 보게 해주는 놈이지.”

“두 가지를 따로 씁니까?”

“오른쪽 눈에 통증을 주는 걸 뿌리고, 왼쪽 눈에 환각을 보게 해주는 걸 뿌리면 재미난 일이 생기거든. 일단 통증이 있는 눈은 질끈 감지. 그러면 환각만 보게 되는데, 질끈 감은 눈을 살짝 뜨는 순간 세상이 멀쩡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그 후에는? 통증을 참고, 오른쪽 눈만 뜨지. 왼쪽 눈은 꾹 감고. 그런데 이게 웃긴 게 뭔지 알아? 통증 때문에 오른쪽 눈은 제구실을 못하고, 왼쪽 눈도 지가 알아서 감았으니 제 구실을 못하지.”

“장님이 되는 거군요.”

“장님은 차라리 나아. 장님이 못 볼 뿐이지, 잘못 보고 착각을 하는 게 아니니까.”

김재범의 설명을 듣던 안중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독하군.”

“지독하다는 말에서 지독을 한자로 풀이하면, 더할 나위 없는 독으로 해석됩니다. 전 그래서 그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지독한 인간이군요, 김재범 씨.”

하선우가 한마디 했다. 그 말에 김재범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쌍욕이 나오질 않는 걸 보면 그의 인내심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의미다.

말장난은 거기까지였다.

김재범의 독을 하선우가 곧바로 사용했다. 바람을 이용해 가시꼬리늑대의 눈덩이에 각기 다른 독을 발랐다. 반응은 즉각 왔다. 가시꼬리늑대가 오른쪽 눈을 질끈 감았고, 왼쪽 눈을 번뜩 떴다.

동시에.

파바밧!

환각을 본 녀석이 있지도 않은 적을 향해 자신의 꼬리를 휘두르며 가시를 발사했다.

폭발하듯 터진 가시.

그러나 아무런 조짐도 없자, 놈은 통증 가득한 오른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양. 그때 김재범이 손짓을 했다.

그 손짓과 함께 안중현과 채유리가 움직였다. 그 둘은 헤이스트 마법을 이용해 가시꼬리늑대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빠르게 좁히며 소총의 총구를 앞세운 채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 투투!

박자감과 함께 끊기는 총성에 가시꼬리늑대가 몸을 돌렸다. 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놀란 모양.

더 나아가 녀석은 이 긴박한 상황에 싸움보다는 도주를 택하고자 했다.

딱!

그때 안중현이 도망치려는 녀석의 발치 근처, 바로 앞 부근에서 불지뢰를 폭발시켰다.

쾅!

터져 오르는 불지뢰의 불기둥에 가시꼬리늑대가 곧바로 도주하지 못한 채 멈칫했다.

멈칫하는 시간 동안 어느새 녀석에게 접근한 채유리가 마력검을 발동한 단검을 녀석의 옆구리에 꽂았다.

푹!

피륙을 뚫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아우우!

가시꼬리늑대가 울음을 토해냈다. 울음을 토해내는 녀석의 눈동자 빛이 달라졌다.

당혹감, 고통 그리고 분노. 여러 복잡하기 그지없는 감정이 눈알 안에서 어우러졌다. 채유리는 그런 녀석의 눈빛을 무시한 채 뒤로 몸을 뺐다.

이 순간 김재범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마지막 숫자 일곱을 외치는 순간 채유리와 안중현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 앞에서 가시꼬리늑대가 보여준 반응은 우습게도 휘청거리는 것이었다.

마취다.

채유리의 단검에 발라진 김재범의 마취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만큼 중독증상을 보이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김재범은 확실히 계산을 끝냈다.

그 계산을 끝낸 결과물은 톡톡히 누렸다. 안중현과 채유리가 마력검을 이용해, 가시꼬리늑대의 몸뚱이 곳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총알도 쉽사리 뚫지 못하는 가시꼬리늑대의 가죽이 종잇장처럼 뚫렸다. 5서클 마법사와 6서클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력검의 위력은 그 정도로 섬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둘은 가시꼬리늑대의 약점만을, 혈관이 지나가거나, 주요한 장기가 있는 부분만을 그리고 뼈에 걸리지 않는 부위만을 정확히 찔렀다.

마치 이강우처럼.

거듭된 치명상 앞에서 가시꼬리늑대는 곧바로 쓰러졌다. 쓰러지자마자 나선 건 하선우였다. 하선우가 바람으로 막을 만들어, 가시꼬리늑대의 혈향이 퍼져나가는 걸 막았다.

그와 동시에 채유리가 아직 숨이 붙은 가시꼬리늑대의 뱃가죽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자 채유리의 손바닥에서 시작된 얼음조각들이 거칠게 퍼지며 단숨에 가시꼬리늑대를 뒤덮었다. 피 냄새를 비롯한 모든 것을 어둠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평소라면 도축을 해서 고깃덩이를 가져갔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다음 녀석을 잡는다.”

몬스터 사냥팀이 다음 표적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쯔릉쯔릉!

그들이 있는 곳과 다른 토굴 입구에서 기괴한 방울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이강우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총꾼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베이스캠프 주변에 설치해둔 보안 장치가 신호를 내보냈을 때였다. 나무 사이에 설치해둔 보안 장치가 반응했다. 곧장 한 명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스스, 스스!

묘한 소리와 함께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빠르게 이동하는 게 보였다. 너무 빨라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젠장.”

분명한 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그들이 있는 베이스캠프 쪽으로 온다는 점이었다.

총꾼들이 긴박하게 움직였다.

“내가 업을게.”

한 명은 일단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우를 등에 업었고, 끈으로 이강우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그 후에 그들은 사냥꾼 팀에게 연락을 했다.

“몬스터 습격, C포인트로 이동한다.”

그 연락과 함께 그 둘은 최소한의 무장만 갖춘 채로,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든 후에 베이스캠프를 버리고 C포인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마법은 없었지만, 그들은 나름 날랬다. 베테랑 총꾼답게, 숲이라는 장애물 넘치는 공간을 능숙하게 이동했다.

그러나 그 둘은 도망치는 순간, 이미 직감했다.

‘이대로 셋이서 뭉치면 결국 다 죽지.’

애초에 안중현이 총꾼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세 명도 아닌 두 명을 붙여준 이유는 이강우를 단순히 업고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명이 업고 뛰고, 다른 한 명이 시간을 버는 것.

그 시간을 버는 것에는 희생도 포함되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각오를 마쳤다. 애초에 마법사의 목숨을 대신하는 게 총꾼의 역할 아닌가? 총꾼이 될 때 다진 각오를 굳이 이제 와서 되새김질할 필요도 없다.

눈빛 교환이면 충분했다.

이강우를 업고 있는 총꾼 정대웅이 동료 총꾼 신영섭을 바라봤다.

묘한 감정이 눈빛으로 오고 갔고, 정대웅이 그 눈빛을 뇌리에 각인시킨 채 달리기 시작했고, 신영섭이 자리에 멈췄다. 자리에 멈췄던 신영섭이 들고 있던 총을 하늘 위에 대고.

투투투투!

난사했다.

“와라!”

소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신영섭이 곧바로 정대웅이 도망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도망치던 신영섭은 이를 꽉 물었다.

‘악착같이 도망친다.’

희생이었지만, 속절없는 먹잇감이 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동료도 구하고, 본인 목숨도 구할 생각이었다. 괜히 일찌감치 주마등을 감상하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 각오를 품은 채 신영섭이 열심히 달렸다. 달리던 그의 머리 위로.

휙휙!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영섭은 발을 멈췄다.

‘젠장.’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를 피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아니, 왔던 길을 돌아가면 된다. 이강우를 업은 정대웅이 도망친 방향으로 가는 게 유일한 살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투투투투!

신영섭이 사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수류탄을 꺼냈다. 자신의 이 발악이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상대로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지만, 그게 발악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 법.

신영섭이 이를 꽉 물었다.

그 순간.

쯔릉쯔릉!

소름 끼치는 소리가 신영섭의 귓가를 파고든 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영섭은 이 순간 난생 본 적도 없는 주술방울뱀의 존재를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럴 때 이 유적에서 가장 만나서는 안 될 족속들과 조우할 줄이야?

이쯤 되자 발악을 하려던 마지막 마음마저 사그라졌다.

신영섭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순간 그가 수류탄의 핀을 뽑고, 곧바로 전방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전방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셈.

그런데 그 순간.

퍽!

둔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신영섭의 등을 밀었다. 등을 밀어 신영섭이 바닥에 넘어지게 했다. 바닥에 정면으로 넘어지며 땅바닥에 가슴이 부딪치자 숨이 멎을 듯한 통증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그때 고통 속에서 신영섭은 들을 수 있었다.

“수류탄 던졌으면 숙여야지, 뭐하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

“대, 대장?”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 * *

이강우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우거진 숲의 수풀과 나무, 녹음 가득한 그 공간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낌새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이강우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둘셋…… 낌새를 감춘 녀석들의 머릿수를 가늠했다.

가늠하면서.

‘대체 이게 뭔 일이야?’

짙은 의구심을 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총꾼 두 명만 도망치는 거지? 몬스터가 왜 갑자기 이렇게 등장했지? 탐색 실패인가? 몬스터는 토굴에만 있지 않았나? 그보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왜 내가 업혀 있었던 거지?’

이강우는 도무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이강우의 기준에서는 이해불가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이강우는 지금 자신이 잠들었다가 깨어났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저.

‘그때 그걸 먹어 치우고…….’

마지막 상황만 떠올랐다.

나무에 올랐다. 나무에 올라서, 분석 마법을 통해 거대한 나무의 중심에 자라나는 자그마한 것을, 계란 크기의 신기한 것을 꺼냈다. 꺼낸 후에 그것을 그냥 맛만 봤다. 혀만 가져다 댔다. 아주 빌어먹을 맛, 마령화 100송이를 응축해서 향수로 만든 듯한 맛이 났고,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끔 감았다.

‘퉤.’

그 후에 퉤! 뱉으려고 했다.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갑자기 자신이 총꾼 뒤에 업혀 있었다. 그냥 업혀 있는 게 아니라 줄에 묶인 채로, 마치 아이 엄마가 아이를 포대기로 업은 것처럼 업혀 있었다. 덕분에 이강우가 퉤! 했을 때 그 침은 이강우를 업고 있던 총꾼의 머리통에 제대로 튀었다.

그 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와서 보니 신영섭이 수류탄을 던지고 멀뚱히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그냥 길을 가다가 눈이 침침해서, 눈 좀 1,2초 정도 감았다가 떴는데 세상이 바뀐 기분이다.

하지만 이강우는 차츰 혼란을 잠재웠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간단했다.

잡는다.

눈앞에 다수의 몬스터가 등장했고, 그 몬스터가 지금 자신의 동료를, 팀원을, 부하를 위협하고 있다. 더군다나 총꾼 두 명이 다수의 몬스터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나머지 팀원들도 위기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다른 팀원들과 합류를 해야 한다.

속전속결!

물론 속전속결을 위해서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대충 가늠해도 스무 마리가 넘는 숫자의 몬스터들. 적지 않은 숫자다. 전부 9등급 몬스터라고 해도 스무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로 필승을 자신하는 건 6서클 마법사도 힘들다.

근접전을 통해 최소한의 마력 소모로 전투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수 김지홍도 9등급 몬스터 스무 마리를 상대로는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해야 한다. 저울질을 통해 쉽사리 확신을 가늠할 순 없을 것이다. 그저 한 마리의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니까.

하물며 느껴지는 낌새, 기척, 은신 능력을 비롯해 먹잇감 앞에서도 쉽사리 나서지 않는 판단력까지…… 여기에 9등급 몬스터는 극히 드물다. 보지 않고 느끼고만 있지만, 확신할 수 있다. 9등급 몬스터가 있다고 해도, 있어 봐야 두세 마리 수준. 나머지는 8등급 이상이다. 8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스무 마리라면, 혼자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하나 더, 좀 더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이라면, 몬스터들의 행동 패턴을 통해 다수의 몬스터가 상쟁 대신 호흡을 맞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기생망고 때처럼 조종을 당할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는 결론 역시 얻을 수 있다.

그저 다수와의 싸움이 아닌 다수로 구성된 무리의 협공을 단신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오는 질문…… 이 무리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필요할 때.

이강우는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고.

‘어.’

명쾌하게 대답을 했다.

‘이상하게 될 거 같네.’

자문자답.

답이 나왔으니 더 이상의 질문과 고려, 저울질은 필요 없다.

딱!

이강우는 오른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자그마한 검은색 태양이 떠올랐다.

절망의 태양이었다.

크기는 테니스공 수준. 평소의 농구공 크기와는 달랐지만, 그 탐욕스러운 성정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평소 이상이었다. 절망의 태양은 작아진 만큼, 평소보다 더 지독한 허기를 느끼는 듯, 탐욕을 보였다.

그 탐욕이 주변 대상에 영향을 미쳤다. 아직 개봉도 되지 않은 음식을 다짜고짜 씹듯, 절망의 태양이 상처 하나 없는 몬스터들을 자극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누군가 멀쩡한 자신의 몸뚱이를 핥고, 깨무는 듯한 느낌, 그런 걸 좋아하는 생명체는 없다.

결국 한 놈이 그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크왕!

괴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원숭이였다. 신장이 4미터는 될 법했고, 꼬리 길이만 2미터는 될 법한 거대 원숭이의 온몸 근육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이 울퉁불퉁했고, 그 근육 위를 털이 아니라 갑옷 같은 비늘이 덮고 있었다.

7등급 몬스터 아머 몽키다.

단단한 비늘 가죽과 넘치는 힘으로 사람 따위는 종이인형처럼 찢어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다. 동시에 흉포하기 그지없는 놈으로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제아무리 자기보다 강한 몬스터라고 해도 덤벼드는 놈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 흉포함과 공격성을 참지 못하고 멋대로 먼저 이강우를 향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은 일단 등장하자마자.

쾅쾅!

양팔로 대지를 두드렸다.

굉음이 터졌고, 땅이 울렸고, 땅바닥에 포탄이 떨어진 듯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힘의 과시.

그런 녀석의 과시 앞에서 이강우는 입꼬리 한쪽을 비튼 채, 손바닥을 펼쳤다.

펼쳐진 손바닥, 그 위로 날카로운 날과 뾰족한 끝을 가진 붉은빛의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뿌리다.

이강우는 그 붉은 뿌리를 꽉, 움켜쥐었다. 동시에 자신의 주먹 안에서 붉은 뿌리와 마법을 섞었다.

섞는 마법은 다름 아닌 라이트닝 다트!

이강우가 다시 손바닥을 펼쳤을 때 붉은색의 작은 번개가 다트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이강우는 그 붉은 번개 다트를 잽싸게 다트 던질 때처럼 쥐었고, 어깨와 팔꿈치, 손목의 스냅만을 이용해서 가볍게 던졌다.

팟!

가볍게 던진 것치고, 섬뜩한 소리가 났다.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였고, 그 소리의 끝에는 아머 몽키의 콧구멍이 있었다.

붉은 번개 다트는 곧게 가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더니, 뒤집힌 포물선을 그린 후 위로 솟구치며, 깊게…… 쑥!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보일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아무리 단단하기 그지없는 비늘 가죽을 가진 아머 몽키라도 콧속마저 단련할 수는 없는 노릇.

크릉!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머 몽키의 머리가 뒤로 한 번 크게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콧구멍에서 터진 핏물을 붉은 뿌리가 엄청난 속도로 머금기 시작했다.

‘오케이.’

붉은 뿌리가 뿌리를 내렸다.

뿌리를 내리자마자 녀석은 먹어 치운 핏물로 스스로를 키우기 시작했다. 뿌리를 뻗었고, 줄기가 자라났다.

자라난 줄기의 형태는 칼이었다. 날카로운 날을 품은 칼이 콧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셈이다.

크엉? 크엉!

이 해괴망측하고 소름 끼치는 상황에서 아머 몽키는 당황했다. 갑자기 자신의 콧구멍 속에서 날카로운 칼이 자라나는데,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 리 없다.

심지어 출혈이 심해질수록, 칼은 더더욱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고, 길쭉해졌다.

끄엉!

아머 몽키가 기겁과 함께 괴상망측한 울음을 토해내며, 자신의 콧속에서 자라나 이미 콧구멍 밖으로 나온 칼날을 손으로 잡았다. 이대로 이 괴상망측한 것을 뽑아낼 생각.

그때.

퍽!

어느새 아머 몽키의 지척에 다다른 이강우가 제 손바닥으로 아머 몽키가 뽑으려고 하는 칼을 밀어 넣었다.

헤이스트를 이용한 가속, 그 가속이 남긴 손바닥에 담긴 힘이 가소로울 리 없다.

푹!

칼이 깊숙하게 들어갔다. 콧속을 파고든 칼자루는 아머 몽키의 뇌까지 도달했다. 아머 몽키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던 살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초점도 사라졌다.

녀석이 선 채로 죽었다.

그 순간 죽은 아머 몽키의 몸으로부터 절망의 태양이 마력과 핏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테니스 공만 했던 녀석이 좀 더 커졌다. 이강우가 아머 몽키의 콧속에서 120센티미터 길이의 칼을 뽑아내자, 더 많은 출혈이 일어났다. 절망의 태양이 그 출혈의 핏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은 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강우는 절망의 태양이 내뿜는 은은한 열기를 뒤로 한 채 붉은 뿌리가 만들어낸 칼을 힐끔, 살펴봤다.

칼끝부터 칼자루 끝까지의 길이는 120센티미터 남짓. 칼날의 폭은 좁았고, 칼날이 완만하게 휘어진 것이 검이라기보다는 도에 가까운 형태였다.

칼자루는 이강우가 손에 쥐는 순간 이강우의 손 모양에 따라 바뀌었다. 찰흙을 쥔 것처럼, 이강우의 수형(手形)에 맞는 칼 한 자루가 만들어졌다.

그 무렵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기색을 드러냈다. 일부는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은 쉽사리 이강우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그들의 본능이 이강우가 만들어낸 두 개의 권능, 불사황제의 권능의 위엄과 무시무시함을 파악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계심만 가진 건 아니었다. 녀석들은 경계심 속에서 이강우의 틈을 가늠했다.

이강우는 그 광경을, 자신의 틈을 노리는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생망고인가?’

이런 광경은 쉽게 볼 수 없다. 본래 몬스터란 족속들은 덤비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만 한다. 군대처럼, 사냥꾼처럼, 다수의 몬스터가 이렇게 동시에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그런 것치고는 애들 상태가 망고 중독자라기보다는 군인 같은데?’

그때.

쯔릉쯔릉!

기괴한 방울 소리가 이강우의 고막을, 신경을 아주 제대로 건드렸다. 이강우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기생망고는 아니군.’

그 방울 소리가 몬스터들의 망설임과 주저함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적을 향한 흉포함과 공격성을, 불과 같은 그 기질에 기름을 부었다.

활활!

녀석들의 눈빛이 독기와 살의와 투쟁심으로 가득 찬 채 타올랐다.

이강우를 반원 형태로 포위한 녀석들이 동시에 이강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름 장관이었다.

거대한 몬스터들, 못해도 신장이 3미터는 넘어가고, 큰놈은 집채만 한 것들이, 그것도 같은 종류의 몬스터가 아니라 가지각색, 원숭이, 도마뱀과 호랑이, 사자와 온갖 짐승들을 섞은 것 같은 놈들이 작은 인간을 향해 동시에 몸을 날리는 광경은 마치 신화 속의 영웅이 덤벼드는 다수의 몬스터를 무찌르는 벽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이강우는 그 광경에 방점을 찍었다.

쉬익!

칼을 휘둘렀다.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검기 따위를 날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날리는 건 다름 아니라.

‘라이트닝 다트.’

3서클 마법, 라이트닝 다트였다.

손에 쥔 붉은 뿌리칼에 라이트닝 다트 마법을 부여했고, 그 상태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파직!

칼이 분열되었다. 잘게 잘게 조각이 났고, 조각난 파편들은 백 개의 다트가 되어서, 자그마한 붉은 번개가 되어, 표적을 향해 벌처럼 날아갔다.

파바밧!

백 개의 붉은 번개가 동시에 각자의 타깃을 향해 움직였다.

타깃은 몬스터의 눈과 코 그리고 입.

벌처럼 목표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백 개의 번개가 만들어낸 광경은 마법 같다, 라는 표현 외에 다른 표현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마법 같은 광경이 만들어낸 결과는 끔찍했다.

푹! 푹!

눈코입에 박힌 붉은 번개들이 뿌리를 내렸다. 그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그 광경 앞에서 이강우는 굳이 더 이상 이 무리를 맞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칼을 휘두르는 순간 이강우는 뒤로 발걸음을 돌렸다. 몸을 뺄 속셈. 몸을 빼면서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엎드리고 있는 총꾼 신영섭을 옆구리에 끼었다.

몬스터들, 두 눈이 멀고, 코와 입안에 붉은 뿌리를 키우기 시작한 몬스터들이 그런 이강우를 쫓고자 했다. 쫓고자 했는데…….

츠츠츠!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우후죽순처럼, 그들의 눈코입에 박힌 붉은 뿌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콧속에서, 눈덩이 속에서 날카로운 날붙이가 자라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경험을 하게 되면 끔찍함이란 수준을 넘어선다.

더 나아가 그들은 볼 수 없었고, 맡을 수 없었고, 심지어 고통을 제대로 울음으로 토해내지도 못했다.

그저 공포와 고통에 취할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절망의 태양이 환호의 몸부림을 쳤다. 스멀스멀, 절망의 태양이 녀석들의 핏방울과 마력을 머금었다. 지름이 2미터 가까이 될 정도로 거대해진 녀석이 이내 열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절망의 태양이 뿜어대는 열기는 단순한 고열이 아니다. 대상의 피와 마력을 메마르게 한다. 피가 메말라서 끈적끈적해지고, 마력이 말라 굳어버릴 때의 고통과 무기력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더 나아가 열기 자체는 감각을 비틀어 버린다.

작열하는 사막 위에서 신기루가 보이고, 목이 마르고, 코가 제구실을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비틀린 감각으로 도망친 이강우를 쫓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

표적을 잃은 몬스터들은 멈췄다. 그들의 사고도 멈췄다. 그들은 이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판단조차 불가능한 처지, 인형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그때.

쯔릉쯔릉!

녀석들에게 주술방울뱀이 주술을 걸었다. 고통 속에 절규를, 주술로 잊게 만들었다. 모든 아픔이 눈 녹듯 사라졌다. 또한 주술방울뱀이 본인이 보고 있는 이강우의 위치를 그들에게 알려줬다.

저기다!

네놈들은 저기 도망치는 인간을 쫓아야 한다.

저기 네놈들에게 고통을 준 인간이 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이 고통과 절망을 이겨내고, 가서 놈을 죽여라!

주술방울뱀의 의지의 심기가 그의 주술을 통해, 주술방울을 통해 몬스터의 몸에 들어갔다.

쯔릉쯔릉!

여기서 주술방울뱀은 한 번 더 그들에게 힘을 줬다. 그들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낼 수 있도록, 마약 같은 주술을 걸었다. 그들이 가진 생명력에 불을 붙여줬다. 생명력은 타들어 가지만, 대신에 더더욱 강한 힘과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주술방울뱀의 조잡한 주술이 감히 불사황제의 권능과 비교할 바가 될 리 없었다.

붉은 뿌리!

불사황제 야크센이 가진 무수히 많은 마법과 권능 속에서 그가 고르고 골라, 최고라 자부하는 다섯 권능 중 하나다. 대상의 몸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 피를 더 빨아먹기 위해 모세혈관까지 자기 뿌리로 채워 버리는 무시무시하고, 탐욕스러운 힘이다.

절망의 태양!

탐욕만으로는 불사황제 야크센의 다섯 권능 중 제일이다. 넘치는 탐욕이 기어코 대상을 메마르게 할 정도다.

그 두 가지 권능의 앙상블 앞에서 주술방울뱀의 주술은 산불 속의 부채질에 불과했다.

힘을 내던 몬스터들이 도리어 쓰러졌다.

쯔릉쯔릉!

주술방울뱀이 쓰러진 몬스터들을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하기 위해 힘차게 꼬리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쯔릉쯔릉!

주술방울뱀이 포기하지 않고 재차 꼬리를 흔들었지만, 이 역시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쯔릉쯔릉!

그리고 녀석이 재차 꼬리를 흔들었을 때.

“쯔릉쯔릉, 새끼 겁나 시끄럽네.”

그 소리가 기어코 녀석의 명을 재촉했다.

도망쳤던 이강우, 그가 신영섭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뒤 다시 돌아왔다.

“넌 특별히 소주에 담가주마.”

뱀술을 만들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