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2화 (42/66)

42화. 천변과(千變果)

형사 출신인 안중현은 다양한 분야에 인맥이 있다.

개중에는 불법과 편법, 합법 사이를 오고 가는 부류도 있다. 경찰이라면 마땅히 잡아야 하는 자들이었지만, 안중현은 그들을 잡기보다 친분을 도모했다. 더 큰 것을 잡기 위해 그들을 미끼로 삼기 위해서.

안중현은 그런 융통성을 가진 사내였다. 더 큰 악을 잡기 위해서 자잘한 악 따위는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융통성 말이다.

안중현의 그런 융통성은 지금도 빛을 발휘했다.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안가(安家)를 소개해줬다. 범죄자들 혹은 행적이 들켜서는 안 되는 이들에게 업자들이 제공하는 비밀 여관이었다.

더불어 긴급한 만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강우와 채유리에게 소개해준 안가를 다음날 오후 4시 무렵이 되어서야 찾아간 이유는 앞서 말한 융통성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도 되겠지.’

젊은 남녀, 그것도 그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조차 하지 못한 채 다사다난한 나날들을 보낸 커플이 외박을 한다. 아무도 그들이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또한 주변에 눈도 없다. 아는 사람도 없다. 긴급한 상황이기도 하고,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다.

그런 커플이 머무는 방에 다짜고짜 아침 일찍부터 찾아가는 건…… 자칫 잘못하면 안중현과 이강우, 채유리 커플이 평생 두 눈을 보고 대화할 수 없는 얼굴 뜨거운 기억이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는 법.

그런 안중현의 배려 덕분인지, 안중현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서로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은 없었다.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이강우는 뭔가 개운한 모습으로 안중현을 반겼고, 채유리는 조금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은 채 열심히 치킨을 먹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안중현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굳이 설명은 필요 없다. 분위기만 봐도 안다. 둘 사이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 더 깊고 견고한 줄이 연결되었다.

여기서 안중현은 넘치는 융통성과 배려심을 발휘했다. 괜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안중현은 일단 이강우에게 가지고 온 검은 봉투를 건네줬다.

이강우가 봉투를 받고, 안을 살폈다. 익숙하게 보던 것이 봉투 안에 있었다.

“초콜릿이네요?”

“이 근처에는 슈퍼도 없지 않나? 그래서 부식을 좀 사오려고 했는데, 자네가 좋아하는 부식 중에 생각나는 건 이것밖에 없더군.”

“예, 없어서 못 먹죠.”

이강우가 말과 함께 채유리 옆에 봉투를 놓았다. 채유리가 눈빛을 반짝였다.

그 사이 안중현이 자리에 곧장 앉으며, 기습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보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런 장소를 요구했나?”

이제는 본론으로 돌아올 때.

“마법청에 있었을 텐데, 이곳보다는 마법청이 훨씬 안전할 터. 마법청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위스프의 스나이퍼가 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마법청에 가는 걸 어떻게 알…….”

안중현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이런.’

이강우가 왜 그랬는지, 금방 이해했다. 여기서 이강우는 안중현에게 류복희와 관련된 이야기 전부를 꺼내줬다.

기예르모에 대한 것, 위스프에 대한 것, 류복희가 생각하는바, 추구하는바…… 전부를 말해줬다. 불사황제에 대한 것을 뺀 대부분의 것을 말해줬다.

기겁할 만한 이야기의 연속.

하지만. 안중현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이강우의 말이 끝났을 때 담담히 자신의 의견을 말해줬다.

“그자의 말처럼 그리고 자네 의견처럼 모래시계문의 등장과 그 이후의 과정들은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이했던 게 사실이지.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세상이 그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를 하는 모양새였으니까.”

여기서 안중현이 폭탄 하나를 던졌다.

“더불어…… 추측이긴 하지만, 만약 이번 사건에 배후가 있지만 난 그 배후가 어떤 식으로든 블랙 스택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네. 좀 과장하면, 블랙 스택이 그 배후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지.”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충격적이었기에 말을 들은 이강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채유리도 집어 든 닭다리를 그대로 놓았다.

“블랙 스택이요?”

채유리가 놀란 이강우 대신 질문을 던졌고, 안중현은 코로 크게 숨을 내신 후 대답을 이어갔다.

“그들이 모든 기준을 만들었네. 모래시계문 및 몬스터의 등급을 비롯한…… 그들이 내세운 기준이 표준이 됐지. 길이를 잴 때도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 등, 표준이란 것이 여전히 제멋대로인 세상에서 모래시계문과 관련된 표준이 딱히 이렇다 할 세계적 합의 없이 갑자기 이루어진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안중현이 나름의 조사를 통해 내놓은 결과였다.

그렇기에 안중현은 좀 더 제대로 짚고 들어갔다.

“그래서 문제가 더 크지. 나조차도, 전문가라 하기 힘든 나조차도 인터뷰와 단순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사실을 파악했네.”

안중현이 알아낸 건 대단하지만, 반대로 세계에 넘쳐나는 수십억 명의 인구 중에 안중현과 같은 답을 도출한 사람은 꽤 될 것이다. 아니,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다면, 이에 대한 의문이 필시 어떤 식으로든 공론화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 사실을 그 누구도 공론화하지 않네. 정치인들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기업들, 영향력 있는 세력가들, 누구도 떠들지 않지.”

“누군가 막고 있다는 거군요.”

채유리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이제까지 그녀가 입을 다문 건, 일단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닐뿐더러, 굳이 이강우가 하는 일에 자신이 잡음을 넘어 이강우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대화에 본격적으로 참가한다는 건, 채유리 본인 역시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심각했다.

“어마어마한 세력이…….”

만약 블랙 스택이 세상을 어둠과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으려는 미지의 세력, 그 세력의 배후라면?

“그렇다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어떤 꼴인지 세상이 실감할 수 있겠지.”

세상은 지금 자신들을 죽일 살인자에게 경호를 요청하는 꼴이다.

하물며 여기 모인 세 명은 전부 블랙 스택의 지부인 즈믄나래 길드 소속이다. 그들의 행적 대부분은 즈믄나래로 들어갈뿐더러,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이상 그들은 절대 즈믄나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안중현도 류복희와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때문에 당장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해야 하네. 의심을 하더라도, 속으로만 해야 하고, 행동으로 보이면 안 되네.”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할 때.

괜히 세상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세력을 만드는 건, 선두에 서서 화살을 맞아주겠다는 희생에 불과하다.

잠시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을 안중현이 깼다.

“상황을 종합한다면…… 블랙 스택이 이 모든 걸 계획했고,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모래시계 관련 기준이 블랙 스택이 만든 기준이라면, 결과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모래시계문과 몬스터는 1등급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겠죠.”

“그렇다면 만약 그들의 목적이 인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거라면, 1등급 모래시계문을 2015년에 개방했으면 훨씬 더 그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겠지?”

“그렇겠죠.”

“그럼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강우는 곧장 대답했다.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할 수 있으면 했다. 그런데 안 한 건 할 수 없다는 것, 그 이유 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

“꺼낼 수 없었다…… 그럼 왜 꺼낼 수 없는 걸까?”

“상황이 여의치 않았거나, 누군가의 방해가 있었거나 혹은 지금 역량으로는 부족하거나.”

“그럼 이제까지 그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지금의 상황을 유도한 건 여의치 않은 상황을 해결하고, 부족한 역량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의미가 되겠군.”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이강우가 안중현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안중현이 그 눈빛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아마도 반격을 하고 싶다면…… 내 생각에는 그 부분을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을 듯하네.”

* * *

강희의 일정에는 쉼표가 없다. 국내 일정은 물론 해외 일정을 합친 그에게 쉼이란 다른 세계의 일이니까.

하물며 최근 이부성 마법청장이 중국과 활발한 접촉을 하면서 그의 일거리는 그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는 블랙 스택과 함께 3대 길드로 평가받는 칠성문이 있었고, 칠성문은 블랙 스택은 몰라도 즈믄나래 세력만으로는 상대하기 버거운 집단이었으니까.

‘의도한 바이긴 하지만, 우리가 준 것들 때문에 이렇게 의미 없는 고생을 하는 건 조금 짜증이 나는군.’

그런 강희의 바쁜 일정을 단숨에 무시하게 만든 건, 핫라인 전화기의 울음이었다.

강희는 모든 작업을 멈추고 수화기를 들었다.

-강희.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음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다른 누군가와 헷갈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목소리.

그렇기에 강희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표정을 버렸다. 평소의 인자한 미소 대신 뱀처럼 차가운 얼굴을 품었다.

“이바노프, 무슨 일이지?”

이바노프.

블랙 스택 창립자 중 한 명이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 아는 사람조차도 많지 않은 이름이다.

더불어 강희가 이바노프와 통화를 하는 건 근 3년 만이었다.

둘은 역할이 전혀 달랐고,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달랐기에 통화를 할 이유도, 해야 할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연락, 그 의도가 평범할 리 없다.

-왜 나를 방해했지?

대화 내용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바노프는 다짜고짜 강희를 나무라듯 말했다.

음울한 목소리에 분노를 섞어 나무라듯 말하자, 듣는 입장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

하지만 강희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이강우에게 암살자를 보냈군.”

-보냈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암살자의 모든 행보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안 됐군. 하지만 왜 갑자기 내 탓을 하는 거지? 못했으면 자기 무능을 탓해야 할 문제 아닌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말을 내뱉는 이바노프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런 이바노프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름 재미있군.’

강희는 이런 분위기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이바노프의 이런 반응을 보는 것도, 심지어 이런 반응을 강희 마음대로 유도할 수 있는 경우는 쉽게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 이상 도발을 하면, 이바노프는 작정하고 덤벼들 것이다. 그는 그런 부류다. 자기가 최고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부류. 자신 외의 것들은 전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

“말장난은 그쪽이 하는 것 같군. 단언하는데, 난 수작을 부린 적이 없네. 적어도 이번 이강우 암살에 대해서는 지금 처음 상황을 알게 됐네.”

-믿어 주지.

“정말 고맙군, 내 말을 믿어 줘서.”

-그러나 자네의 행보는 믿을 수 없어.

이야기가 곧장 옆길로 샜다.

피식, 강희는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지기 싫어서 대화 주제를, 그것도 강희를 나무라는 식으로 돌리는 이바노프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이걸 가지고 놀릴 필요는 없을 터.

“난 열심히 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어. 장담하는데 자네가 내 역할이었으면 한 달도 못 가서 앓는 소리를 뱉으며, 아직 제대로 숙성되지 못한 최후의 종을 무작정 울렸겠지.”

-왜 대적자의 그릇을 그대로 살려 두는 거지? 당장 네가 나서면 문제없이 대적자의 그릇이 싹을 피우기도 전에 제거할 수 있을 터! 실패를 반복할 생각인가?

“내 생각은 다르네. 우린 지금 대적자의 그릇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가 어떤 인간인지도 알고 있지. 차라리 이번 기회를 이용해 대적자의 싹만 뽑는 게 아니라, 줄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키운 후에 뿌리째로 뽑는 게 내 계획이지.”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강희는 이바노프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귓가로 들리는 것 같았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바노프가 입을 열었다.

-목줄은 채웠나?

“목줄이라…… 무엇을 목줄이라고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군. 그에게 걸린 게 너무 많으니.”

이강우에게 목줄은 많다. 그의 가족, 동료들과 연인까지. 심지어 모르는 사람을 잡아다가 그의 목숨을 걸고 협박을 하면 이강우는 일단 고민할 것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강희를 비롯해 이바노프, 마르쿠스 등이 대적해야 하는 그 무시무시한 괴물, 존재를 초월한 존재와 이강우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게 이유였다.

‘대적자, 아무리 그릇이 좋아도 이 세계의 인간을 대적자로 택한 게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강희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 지금 이 세계가 아니면 다음에 이런 기회가 온다는 보장은 없다.

-일단 이강우에 대한 판단은 네게 맡기겠다.

이바노프가 이내 답을 줬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화는 끝이었다. 이바노프는 강희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통화를 끊었고, 강희의 사무실 안에 적막감이 찾아왔다.

강희는 그 적막감 속에서 짧게 고민했다.

‘이바노프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필시 녀석은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아니다 싶으면 이강우를 처치하겠지.’

대화만 끝났을 뿐, 답이 나온 건 아니다. 통화를 끊은 건 그냥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강우는 언제든 다시 이바노프의 타깃이 될 테고, 이바노프는 작정하고 움직일 것이다. 밑의 부하들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권능마저 건네준 에스콰이어들을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움직인다면 놈의 힘을 이어받은 것들이 움직일 테고.’

에스콰이어는 강하다. 비수 김지홍마저 당할 정도이니, 그들의 강함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이강우는 분명 기회다.’

강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강우의 가치를 가늠했다. 이강우는 대적자의 그릇이다. 그대로 키우면 골치는 아파진다.

하지만 대적자의 그릇치고는 너무 인간답다. 약점이 넘쳐난다. 좋은 그릇이지만, 그릇 자체의 재질이 좋지 못하다.

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대적자를 그릇째로 부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모든 건 완벽하다.’

무엇보다 그 대적자를 자신의 계획으로, 자신의 손으로 처치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강희의 결단을 자극했다.

“천변과(千變果)가 좋겠군.”

디자인을 해줄 것이다.

‘만약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다면 거기서 끝. 하지만 만약 버텨낸다면, 보다 견고한 그릇이 되겠지.’

이강우, 그가 자라날 수 있도록, 더욱 견고한 그릇이 되어 대적자를 담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마련해줄 것이다.

그게 강희의 선택이었다.

* * *

이강우와 채유리는 안중현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계속 머물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전체적인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고, 적아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심이 가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세상이 너무 불안하게 보였다.

물론 그런 것치고 이강우와 채유리는 잘 지냈다. 누가 보면 안가가 아니라 신혼방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는 게 너무 좋아서, 일부러 나가지 않는 게 아니냐? 하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더불어 딱히 움직일 이유도 없었다.

‘엄마랑 혜연이는 잘 있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의 얼굴이 간간이 눈앞을 아른거렸지만, 여기서 가족과 접촉하는 게 오히려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이강우와 채유리를 움직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니라 즈믄나래에서 온 연락이었다.

강희.

그가 이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강우 씨. 유적 사냥 계획이 잡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다 할 상황 설명 없이, 다짜고짜 유적 사냥 계획을 통보했다. 물론 그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통보였을 것이다. 길드 마스터인 그가 관리하는 마법사의 숫자는 엄청나니까.

하지만 이강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번 기회에 날 확실하게 죽이려고?’

지금 이강우는 강희가 사람인지, 호랑이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의심만 하고 있다.

어쨌거나 물증은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런 통보를 듣고 상대의 의도를 안 좋은 방향으로 상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이강우는 소리 내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최고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연기력을 발휘했다.

“유적 사냥이라니, 조금 쉬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유적 클로즈를 마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들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내가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휴가 좀 주십시오…… 하는 직장인의 감정을 연기했다.

물론 이 세상에 그런 직장인을 위해 아낌없는 배려를 해주는 회사는 많지 않다.

강희도 마찬가지였다.

-일정은 한 달 뒤입니다. 휴식기간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지금 이 정도 제안이면 정말 대단한 기업이다. 꿈의 직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실제로 이게 즈믄나래가 마법사들, 총꾼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 소리를 듣는 이유다.

“좀 더 긴 휴식을 주셨으면 하는데…….”

그래도 이강우는 좀 더 호소력 짙은 연기를 했다. 솔직히 휴식이고 나발이고 그냥 하기 싫다.

-죄송하지만, 이 이상의 휴식 기간을 드린다면 아마 전체 일정이 어긋나게 됩니다.

“그보다 마법청이 유적 사냥을 허가해 줬습니까?”

여기서 이강우는 마법청을 걸고 넘어졌다.

비수 김지홍의 습격 사건 이후 마법청은 5서클 이상 마법사들의 유적 사냥을 쉽게 허가해주지 않고 있다. 당연히 즈믄나래도 그에 따른 제약을 받는 중일 터.

-현재 마법청은 추가로 유적 신청 계획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유적 사냥의 경우에는 진작에 마법청으로부터 유적 사냥 허가를 받은 모래시계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적용되는 사항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 유적 사냥이 중요합니다. 만약 이번 유적 사냥에 나서지 못할 경우, 앞으로 유적 사냥 계획을 잡기가 힘들어질 겁니다. 하지만 계약 내용에 따라 길드가 주관하는 유적 사냥 횟수는 채워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약이 파기됩니다. 즈믄나래와의 계약을 유지하시려면 이번 유적 사냥은 진행해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정말 의미도 없는 7등급 이하 유적 사냥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강희는 회심의 일격이나 마찬가지인 계약을 언급했다.

사실 이강우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당장 계약을 파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이강우의 현실. 이강우의 마음과 입은 따로 놀았다.

“계약이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곧 준비하겠습니다.”

-예, 푹 쉬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곧바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강우가 제안을 받아들였고, 통화가 끝이 났다. 숨죽인 채 통화 내용을 듣던 채유리가 이강우에게 질문했다.

“그거 그냥 해도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

즈믄나래가 의심되는데, 즈믄나래의 의뢰를 받고 유적 사냥을 하는 건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일이다.

“여기서 뒤로 빼면, 우리가 즈믄나래 길드를 의심한다는 사실이 너무 노골적인 게 보이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번 의뢰는 섣불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계약이 걸렸다. 만약 이번 일을 이강우가 일방적으로 거절하면 즈믄나래와의 계약이 파기될 터.

그렇게 되면 이강우와 팀 포식자가 즈믄나래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류복희와 기예르모 등이 세력을 만들지 않는 것도 의심의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인데, 여기서 이강우가 당장의 안위를 위해서 판을 망칠 순 없다.

또한 여기서 즈믄나래 길드를 나온다고 모든 위협으로부터 해방되는 게 아니다.

당장 지금 이곳에서, 범죄자들이 쓰는 안가에서 머무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한국 정부와 길드의 지원이 사라질 경우 마법사 한 명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준비 없이 나오면 그냥 도망자 신세가 될 뿐이다.

‘유적 사냥도 계속해야 해.’

결정적으로 유적 사냥을 멈출 순 없다.

힘을 얻기 위해서, 마나 서클을 개방하기 위해서, 유적 사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유적 사냥을 위해서는 마법청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범의 소굴이지만, 그 소굴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 지금 당장 이강우가 날뛰는 건, 범의 소굴에 들어온 하룻강아지가 범을 상대로 짖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범의 소굴에 있다는 건, 언제든 범이 기분이 나빠지면 범의 한 끼 식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 더 나아가 이대로 가만히 현상을 유지해도 좋은 건 없다. 범이 원하는 건 인류 역사 그 어디에도 없었던 무시무시한 폭력이다. 방관하면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틈을 찾아야 해.’

결국 본론으로 들어가면 판을 뒤집을 계기가 필요하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고꾸라뜨릴 수 있는 계기가.

‘놈들의 노림수를 파악하고, 거기를 찌를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야 해.’

* * *

팀 포식자는 금방 소집됐다.

사실 소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안중현과 채유리, 이강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전히 제주도에 그대로 머무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안중현과 채유리, 이강우가 제주도까지 가는데 한세월이 걸리는 것도 아닌 상황. 서울에서 제주도까지는 비행기 타고 1시간이며, 그 셋에게 비행기 값은 택시비 수준에 불과했다.

이강우의 소집령이 문자로 도착하고, 정확히 6시간 만에 팀 포식자가 문 관리센터에 위치한 회의실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팀원 앞에서 이강우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5등급 유적 사냥에 나서겠습니다. 이번 유적 사냥은 즈믄나래와의 계약에 따른 사냥입니다. 때문에 저번 사냥과는 다르게 조건이 붙습니다.”

5등급 유적 사냥.

즈믄나래 길드와의 계약에 따른 내용으로 획득하는 마법 아티팩트의 지분 중 25퍼센트를 즈믄나래에 양도하고, 유적 사냥에서 얻은 총소득의 25퍼센트를 지급하는 조건이 붙었다. 딱히 즈믄나래의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들에게 소득의 1/4을 바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조건에 따른 불만은 없었다. 사실 여기 모인 이들 대부분은 즈믄나래 길드 소속이었고, 고작 그 정도만 지불하면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본래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길드와 마법청이 가져갔으니까.

‘고작 그 정도 조건만 충족하는 걸로 즈믄나래와의 계약이 유지된다는 건가?’

‘어마어마하군. 대체 어떻게 해야지 그 정도로 파격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지?’

그 정도로 팀 포식자가 누리는 혜택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대박이네.’

그래서 더더욱 팀 포식자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

실제로 팀 포식자로 꾸준히 활동하면, 그냥 아파트가 아니라 빌딩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유적 사냥 한 번에 기대할 수 있는 기대수익이 3,4억을 넘으니 빌딩을 산다는 꿈만 같은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아마 다른 마법사들이 이 파격적인 혜택을 안다면, 마법사 협회 같은 걸 만들어서 궐기대회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유적 사냥은 열흘 뒤입니다.”

유적 사냥 날짜도 통보됐다. 열흘 뒤, 달리 말하면 유적 사냥 후 주어진 휴식기간이 보름이라는 의미였다.

즈믄나래는 오늘을 기점으로 최대 한 달의 휴식 기간을 보장했지만, 이강우는 5등급 문이 확보됐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 달 뒤가 아닌 열흘 뒤로 날짜를 잡았다.

한 달이란 시간을 주면 오히려 상대가 그 동안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의 계획을 조금이라고 엉망으로 만들기 위한 이강우의 노림수였다.

동시에 이강우는 긴 휴식기간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짧은 휴식기간에 불만을 가진 이는 없었다. 보통은 유적 사냥을 한 번 마치면 한 달 이상의 휴식이 주어지지만, 저번 유적 사냥은 일반적인 유적 사냥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까놓고 말하면 이강우가 다 했다. 가장 어려운 상대인 5등급 몬스터, 성족공룡은 이강우 혼자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이강우가 알아서 몬스터를 해체하고, 요리까지 본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팀원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극히 적었다.

좀 과장하면 피크닉 수준, 안중현 정도만이 부상의 후유증이 있겠지만, 그마저도 심한 건 아니다. 실제로 이미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 통보에 부담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럼 이제부터 유적 사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히려 팀원들은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강우가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저마다의 의견을, 특히 앞서서 진행했던 5등급 유적 사냥에서의 부족했던 점, 개선점 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번 탐사 로봇의 성능이 별로였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써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대장, 여유가 생기면 실험 도구 좀 가지고 가면 안 될까? 개인적인 연구를 보장해줘서 고맙지만, 도구가 없으니 연구고 나발이고 그냥 가서 대장이 만들어준 육포나 쭉쭉 빠는 수밖에 없더라고.”

“아티팩트 교체가 필요할 듯합니다. 마법청과 교섭해주십시오.”

그렇게 진행되던 논의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급품에서 전투식량 비중은 유지되는 겁니까?”

시발점은 전투식량의 비중이었다.

저번 5등급 유적 사냥에서는 결국 유적 사냥을 마친 후에 보급품 중 전투식량이 꽤 남았다. 보통은 남은 식량을 땅에 묻을 때 아까워하는 경우보다는 시원섭섭한 마음을 품기 마련인데, 너무 많이 남아서 아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팀 포식자는 전투식량의 비중을 일반 유적 사냥 파티보다느 줄여도 무방했다. 이 부분은 중요했다. 전투식량의 비중이 줄어들면, 다른 것을 그만큼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그럼 자연스럽게 무엇을 채워 넣는 게 더 이득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터.

여기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어디까지나 전투식량을 줄이는 거지, 식량 자체를 줄이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전투식량 대신 뭘 가져가는 게 좋을까요?”

“일단 그래도 어느 정도 유통기한이 있는 걸 가져가야하니까 신선식품보다는 쌀 같은 게 되겠지.”

“쌀 말고 밀도 좀 가지고 들어가죠.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저번에 쌀도 좀 부족하지 않았나? 차라리 쌀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게 좋지 않습니까? 한국인은 밥심인데.”

“떡은 어때?”

“떡은 보존이 어렵지 않나?”

“그래도 한 달은 가잖아?”

“라면사리나 우동사리 같은 걸 넣자고. 이쪽도 보존식이니까.”

“그것보다는 고추장이 필요하다니까.”

정말 그 어떤 유적 사냥 파티에서도 볼 수 없는 논의가 시작됐다. 심지어 안중현마저도 이 논의에 자기 의견을 던졌다. 안중현의 경우에는 치즈 같은 진한 맛이 나는 유제품을 가지고 들어가자는 의견을 냈다. 채유리의 경우에는 이미 초콜릿을 다섯 번이나 외쳤을 정도.

이 광경을 본 이강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다들 전부 나 같은 인간이 되어버렸군.’

이강우 입장에서는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총꾼 시절부터 마법사 시절까지, 수도 없는 유적 사냥 중에 이런 식의 논의를 했던 적은 없다. 맛있게 먹는다? 그것보다는 그냥 죽지 않기 위해 먹을 수만 있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그보다 김수애는 말이 없네.’

이런 상황 속에서 의견을 내지 않는 건 이강우와 김수애, 둘 뿐이었다. 이강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수애를 향했다. 김수애는 마치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웃음으로 이강우의 시선을 반겼다.

곧바로 김수애가 손을 들었다. 좌중이 김수애의 손을 집중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이제부터 유적 내 요리는 제가 했으면 좋겠어요.”

이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요리가 별로였습니까?”

“별로이긴요. 이번 유적 사냥에서 체중이 5킬로나 늘었는걸요. 아마 제 인생에서 체중이 가장 높을 거예요. 덕분에 가슴 사이즈도 예전보다 더 커졌답니다.”

가슴 사이즈란 말에 사내들의 눈이 모두 그녀의 가슴을 향했다. 평범한 티셔츠를 입은 그녀의 가슴은 성이 난 것처럼, 당장 티셔츠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그 와중에 채유리는 슬쩍 자기 가슴을 바라봤다. 그녀가 묘한 긴장감을 품기 시작했다.

“분명 강우 씨 요리는 맛있었어요. 하지만 요리 실력은 제가 더 나은 것 같네요. 무엇보다 모든 걸 처리하시는 강우 씨가 요리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김수애는 말과 함께 좌중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김수애의 말은 다른 이들을 나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강우가 요리를 할 때 나머지 팀원들은 손님이 되고는 했다. 손님은 아무것도 안 한다. 자기 숟가락, 젓가락만 준비하지. 그 정도로 이강우에게 대부분의 요리를 떠넘긴 게 사실이다. 이강우는 딱히 그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한도 끝도 없이 그저 얻어만 먹은 셈.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는데 그동안 열심히 먹기만 한 입에서 나올 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하면 어떤 음식이든 독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요리를 안 합니다.”

이 와중에도 김재범은 나름 변명을 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이었고, 김수애는 김재범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유적 사냥에서 제 역할이 마땅치 않더군요. 사실 제가 할 일이 없는 게 좋긴 하겠지만, 하염없이 얻어먹는 건 좀 그러니 제가 요리를 하는 게 나을 듯해요.”

그 말에 이강우는 딱히 반대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본인이 해주겠다는데, 나야 고맙지.’

어차피 도축은 이강우 몫이다. 도축 과정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효소를 이용해서 몬스터 고기의 마력을 섭취 가능한 상태로 바꾸는 것 역시 이강우의 도축 과정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궁금했다. 미식가라 불리는 그녀가 과연 정말 얼마나 멋진 요리를 만들어낼지. 이강우의 요리를 맛보고도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걸 보면 정말 제대로 만들 자신이 있다는 의미다.

“예,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이강우의 말에 상황은 정리됐다. 나머지 인원들 역시 이번 일을 반겼다. 더 이상 이강우에게 미안할 감정을 품을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반면 이 순간 채유리만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수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우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직 채유리와 김수애의 싸움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 * *

안중현이 유적 계획 관련 보고서를 마법청에 제출했고, 마법청이 계획을 승인했다.

곧바로 디데이가 잡혔고, 팀 포식자는 문 관리센터에 위치한 숙소에서 머물며 디데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강우는 통보를 듣는 순간 숙소 내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결국 내가 강해져야 해. 다른 건 없어. 나중에 가면 결국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할 거야. 약한 놈은 죽고, 강한 놈이 살아남겠지.’

이강우가 각오 어린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는 이강우의 능력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강우]

-마력 : 6서클 개발 중(19%).

-보유 마법 : 8개

-마법 슬롯 : 6개

-섭취 마력 : 503,123 포인트.

50만 포인트가 넘는 포인트를 섭취했다.

특히 류복희, 그가 가져온 선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여기서 플래티넘북을 구매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호기다. 절망의 태양에 버금가는 새로운 권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나중으로 미룰 이유는 없었다. 이강우는 지금보다 더더욱 강해져도 부족한 상황 아닌가?

이강우는 고민하지 않았다. 플래티넘북을 구매했고, 곧바로 새로운 마법이 등장했다.

[붉은 뿌리 마법을 습득하셨습니다.]

붉은 뿌리!

이강우, 그가 저도 모르게 언급했던 그 미지의 단어가 이제 마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빌어먹을.’

소름이 돋았다.

이제까지는 그저 꺼림칙하기만 했던 기분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더러운 수준을 넘어서, 등골에 누군가 얼음을 집어넣은 것만 같았다.

분명 그때의 일을 경험한 후에 각오는 했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막상 그 사실을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속이 쓰렸다. 자신이 암에 걸린 걸 알고 있었지만, 의사로부터 확진을 듣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불사황제, 그는 이강우의 몸에 몰래 무언가를 숨겼다. 그게 아니라면 이강우가 예언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붉은 뿌리란 단어를 거기서, 그 중요한 전투 순간 언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좋아.’

이강우는 심호흡을 했다.

‘어디 한 번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보자.’

이강우는 일단 붉은 뿌리에 대한 설명부터 확인했다.

[붉은 뿌리.]

-5서클 마법.

-붉은 뿌리는 피를 머금고 자라납니다. 자라난 줄기는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의 무기가 됩니다. 붉은 뿌리로 만들어낸 무기는 강력한 능력을 자랑합니다. 또한 마법을 머금으면, 더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설명만으로도 붉은 뿌리의 가치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놈이긴 하네.’

피를 머금고 자라나는 무기. 달리 말하면 피를 흡수한다는 의미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표적에 타격을 주는 셈. 여기에 마법을 머금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섬뜩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사용자의 마법의 성질을 흡수한다고 한다. 만약 바츠무의 손, 절망의 태양이 가진 힘을 흡수한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5서클 이상의 마법을 흡수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절망의 태양이 보여준 힘을 고려하면, 섬뜩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섣불리 위력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대단할지, 이강우는 감조차 잡지 못했다.

물론 그 위력에 대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면.

‘오랜만에 불사황제를 만나겠군.’

불사황제, 그가 직접 설명을 해줄 테니까.

그리고 이강우의 예상은 바로 그날 밤중에, 잠든 밤중에 현실이 됐다.

이강우, 그에게 불사황제가 찾아왔다.

* * *

‘시작됐구나.’

이강우는 시커먼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황무지를 보는 순간, 자신이 꿈을 꾼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꿈에서 다시 한번 불사황제와 조우하리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곧바로 이강우가 주먹을 쥐고, 제 주먹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한 번 두드렸다.

퍽퍽!

가슴이 소리를 냈다. 이런 모든 작업이 무리 없이, 이강우의 의지 그대로 사지가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움직인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다섯 개의 마력 서클 역시 또렷하게, 번듯하게 자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내 몸 그대로다.’

자유였다.

이강우는 이 꿈속에서, 불사황제를 조우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육신과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런 기회 앞에서 이강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버닝 마나.”

곧장 버닝 마나 마법을 사용했다.

적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불사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온다.

이 무대를 만든 불사황제가 이강우에게 겁을 먹고, 오던 발걸음을 무를 가능성은 없다.

무엇보다 불사황제는 무시무시한 자다. 그가 등장하고 나서 행동하면 늦는다. 그가 등장하지 않은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 이강우는 자신의 여력을 아낌없이 끄집어냈다.

버닝 마나로 자신의 마력을 불태웠다. 불타오르는 마력은 보다 순수하고, 위력적으로 변했다.

그 순수한 마력으로 태양을 만들어냈다.

‘절망의 태양.’

이강우의 오른손 위로 마력이 모였다. 모인 마력은 곧바로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마력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검은 망울들이 한곳에 모이며 이강우 머리 크기의 구체가 됐다. 그 구체는 곧바로 이강우의 머리 위에서 어둡게 빛났다.

타오르기 시작한 절망의 태양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을 살찌워줄 희생양을 찾고 있다는 게 절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이강우는 다시 쥐어짜 낸 마력을 오른손에 모았다.

바츠무의 손!

그 놀라운 힘을, 대상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권능마저 발동시켰다.

5서클 마법사 그리고 버닝 마나로 순수해진 마력을 머금은 바츠무의 손은 무시무시한 병기다. 닿는 모든 것을 처참한 꼴로 만들어줄 것이다.

때문에 이강우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 힘이면, 지금의 힘이면 4등급 몬스터와도 맞짱을 뜰 수 있다고!

“와라!”

그 넘치는 자신감 앞에 기어코 불사황제가 등장했다.

쿵!

굉음과 함께.

쿵!

땅울림과 함께 등장한 불사황제는 코끼리와 비슷하지만, 코끼리보다 덩치가 곱절은 크고, 뼈만 남은 해골 코끼리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말이 의자지,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왕좌(王座)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위엄이 넘쳤다.

불사황제가 앉으니, 그야말로 황좌라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해골 코끼리 주변으로 수백의 병사들이 열을 맞춘 채 코끼리의 보폭에 따라 전진하고 있었다. 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이었다. 불로 만들어진 것들은 입은 갑옷과 투구 사이로 자신의 살덩어리들…… 불꽃을 내뿜었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갑옷에 잔뜩 달라붙은 성에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그렇게 등장한 불과 얼음의 병사들은 모두 붉은 빛깔의 무기, 마치 피를 굳혀 만든 듯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무기의 종류는 다양했다. 도검을 비롯해 창과 활까지!

그 광경을 본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건 너무 하잖아?’

발악을 준비했다. 그뿐이다. 솔직히 이강우도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불사황제를 이기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건 이강우의 꿈이 아니니까.

그저 그 괴물 같은 얼굴에 주먹 한 방 날리면 다음 날 쾌변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쾌함에 오늘 기억을 악몽이 아닌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군대를 이끌고 등장하다니?

‘진짜 빌어먹을 새끼!’

불사황제는 그런 이강우에게 말 한마디 뱉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었고, 이강우를 보며 들어 올린 손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는 병사들이 열을 무시한 채 이강우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곧장 시작됐다.

가장 먼저 화살이 날아왔고, 이강우는 화살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건, 뒤로 가봤자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강우는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돌적으로 돌진을 강행했다.

자신감은 넘쳤다.

‘이깟 병사들 따위로!’

최강의 마법들을 전부 펼쳤다. 최소한 잡졸들 정도는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강우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가소로웠는지 파악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콰앙!

이강우의 주먹이, 바츠무의 손이 발동된 주먹이 불꽃 병사의 머리를 투구째로 치는 순간 투구는 일그러지고, 바츠무의 손이 대상의 마력을 흡수했지만.

푹푹!

그와 동시에 다른 병사들의 창칼이 이강우의 몸을 파고 들어왔다.

‘헉.’

여기서 이강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통증?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강우를 식겁하게 만든 건, 자신의 몸에 박히는 순간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창칼의 존재 때문이다.

붉은 뿌리!

‘……이거구나.’

그것이 이강우의 혈관에 박힌 채, 혈관 속 핏물을 머금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강우는 그 무기에 꽂힌 채 반항했다. 두 팔을 휘둘렀고, 병사를 때려잡았다. 이강우의 발악은 병사 다섯을 뭉갰다. 바츠무의 손은 그 상태로, 얼음과 불을 가리지 않고 흡수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절망의 태양은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이강우가 날뛰는 틈 사이로 더 많은 무기를 이강우의 몸에 꽂았다.

결국 이강우는 고슴도치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채 그 자리에 기둥처럼 섰다.

아득했다.

고통을 초월하는 고통과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면서 생기는 무기력함에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불사황제는 그제야 이강우의 앞에 섰고, 이강우의 피를 머금고 자라난 멋진 붉은색 검을 이강우의 몸에서 뽑았다. 뽑은 후에 이강우의 가슴을 푹! 찌르며 말했다.

“절망의 태양을 주었고, 붉은 뿌리를 주었다. 앞으로 네게 세 가지를 더 줄 것이다. 그 세 가지를 통해 앞으로 마주할 진짜 괴물들을, 그들이 만든 괴물이 아닌, 그들이 잡아온 괴물들을 무찌를 때마다, 놈들을 먹어 치울 때마다 검은책이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검은책이 너의 권능을 더더욱 오롯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내게 원하는 게 뭐냐?”

여기서 이강우는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저 속절없이,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당하던 처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불사황제를 직시하며, 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내 몸을 차지하는 게 네 목적이냐? 불사황제, 당신이 말하는 적은 무엇이며,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 질문 앞에 불사황제는 웃음 대신 찔러넣은 칼을 비틀며, 이강우의 숨을 막으며 대답을 해줬다.

“너 스스로 나를 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나는 불사황제, 그들의 대적자가 되기 위해 불사가 된 황제다. 나만이 이제껏 그들의 대적자였고, 앞으로도 나만이 그들의 대적자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너는 기어코 나를 원할 것이다.”

꿈은 거기까지였다.

이강우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불사황제만을 바라봤다. 가슴을 찌른 검이 비틀리며 이강우의 숨통도 비틀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데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이강우의 눈에 비친 불사황제는 여전히 미소 대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웃으라고.’

불사황제의 그 표정이 이강우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이 절망과 공포 속에 빠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제 더 이상 여유 따윈 없다고.

* * *

우거진 나무와 너부러진 바위가 포식자 팀을 반겼다.

이강우가 수신호를 내자, 모두가 보급품을 바닥에 내려놓고, 총을 들고, 마법사들은 마법 아티팩트를 바로 끼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강우 역시 각오를 되새김질했다.

‘필요하면 전부를 꺼내야 해. 절망의 태양이든, 붉은 뿌리든.’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들을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게 좋겠지만, 팀원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그들의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바츠무의 손이든, 절망의 태양이든, 붉은 뿌리든 전부 쓸 속셈. 그런 각오 속에서 마지막으로 이강우가 쓴 건 분석 마법이었다. 마력을 품은 것들을 파악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마법도 없다.

그 순간.

‘응?’

이강우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잘못 봤나?’

이강우가 두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눈을 깜박여도 이강우의 시야는 바뀐 게 없었다.

숫자들이 보였다. 물론 숫자 자체가 보이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분석 마법이 원래 그 숫자를 보기 위해 쓰는 마법 아닌가?

그러나 지금 보이는 광경은 이제까지 봐왔던 광경과 차원이 달랐다. 이강우가 이번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으로 숫자도 셌다. 하나, 둘, 셋…… 그 후에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런 이강우의 시선에는 여전히.

‘맙소사.’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숫자가 움직인다?’

땅 아래로, 숫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물이 흐르듯, 수맥이 흐르듯, 여러 방향에서 숫자들이 한 곳을 향해 쉴 새 없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

그 정도가 아니었다.

과거 멜트 드래곤의 위장에 들어갔을 때 녀석의 용옥이 있는 곳으로 마력이 흐르며 모이는 걸 본적은 있지만, 그때도 그냥 마력의 흐름이 보인 거지, 마력의 흐름 속에 들어있는 마력의 숫자가 보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기사(奇事)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이 이강우를 맞이했다.

‘설마 불사황제가 또 나를 위해서 선물을 마련해준 건가?’

동시에 엄청난 기회였다.

이강우는 반사적으로,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손을 댔다. 마력이, 숫자가 지나가는 자리에 바츠무의 손을 댔다. 빨아들이기 위해서. 이 힘을 혹시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자.

‘헉!’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치도록 거센 물살 속에 손을 담근 느낌, 너무 강력한 위압감 때문에 바츠무의 손이 그 마력을 흡수하지 못할 정도였다.

‘흡수했으면 내 팔이 터졌을지도…….’

이 역시 처음이다.

어지간한 몬스터들, 4등급 몬스터의 마력마저 빨아들이는 바츠무의 손이 흡수하지 못하는 힘이라니?

“무슨 일이 있나?”

그때 안중현이 이강우에게 질문을 건넸다.

갑자기 바닥에 손을 대는 이강우의 모습이 정상으로 보일 리 만무. 이강우는 살짝 놀랐다. 이윽고 이강우가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느낌이 이상하다.

이강우가 그렇다면 뭔가 있는 거다. 안중현이 이강우가 바라봤던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에 뭐가 있나?”

그 질문에 이강우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걸 그대로 말해줄까? 아니면 모른 척할까?

보통 경우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냥 자신이 잠깐 착각을 했다고, 느낌이 이상했다고 얼버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안중현을 상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예,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강우의 말에 안중현이 곧바로 답을 내렸다.

“선발대 움직인다.”

* * *

“거대한 나무가 있었네. 과일나무라고 해야겠지.”

하선우와 안중현 그리고 총꾼 두 명이 포함된 선발대가 곧바로 정보를 가져왔다.

“거리는 여기서부터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네.”

그곳에서 안중현은 이제까지 그가 봐왔던 그 어떤 나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발견했다. 나무의 크기가 20층짜리 아파트 크기였다. 또한 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들면 빛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가지들을 자랑했다.

“특이한 점은…… 영상으로 보는 게 낫겠지.”

거기까지였다.

그 외의 특징에 대해서, 나무에 대해서 설명할 만한 표현력이 안중현에게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그냥 찍어온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으로 보여준 나무는 과연 말로 표현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거대함 그리고 그 거대함 속에 보석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린 과일들이었다. 신기한 점은 과일들이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다양했다. 가지각색. 형태도 제각각이었고 크기도 제각각이었으며 색도 제각각이었다.

모두가 그 영상 속의 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유적에서 이런 걸 보는 적은 처음입니다.”

“스택 레코드에도 기록된 바 없지.”

‘기예르모 레시피의 모든 내용에도 이런 나무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어.’

어쩌면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이 최초로 보게 되는 나무일지도 몰랐다.

최초의 발견자!

그 사실에 몇몇 이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적이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면서도 막상 최초로 무언가를 해내기란 쉽지 않은 법, 최초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특히 하선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세상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은 그는 이 나무에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다. 이 나무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고, 연구해서, 최초의 결과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이름과 이 나무를 엮고 싶었다.

“이 나무를 조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본인의 감정을 말로 표현했다. 그 말에 모두가 이강우를 바라봤다.

결국 이 팀의 리더는 이강우고, 모든 결정은 그가 내린다. 다른 이들은 의견을 제시할 뿐이다.

“이곳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네. 일단 이 나무가 가장 높아. 꼭대기에 감시 장치를 설치하면 주변 감시에는 유용할 터. 또한 주변에 엄폐물들도 적잖게 있고 결정적으로 나무줄기 아래에 뿌리들이 동굴 비슷한 걸 만들었는데 공간이 꽤 넓네. 베이스캠프로 충분할 듯하네.”

“몬스터의 흔적은?”

“당장 주변을 조사했을 때는 없었네. 보다 면밀한 조사를 해야겠지만 당장은 없었네.”

“좋습니다. 그럼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하겠습니다. 모두 이동할 준비 하시죠.”

답이 나왔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특히 하선우는 기쁜 마음으로 연약한 몸을 가진 주제에 가장 무거운 짐을 들었다.

그 순간 이강우가 다시 한번 분석 마법을 사용했다. 숫자의 흐름이 모였다. 눈과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숫자. 그 숫자가 과연 이강우의 몸에 들어온다면?

‘내가 과연…….’

이 순간 이강우는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저걸 먹어 치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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