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1화 (41/66)

41화. 기예르모 매니저

예전에는 사무실로 쓴 듯하지만, 더 이상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공간 안에는 예전 사무실 주인이 남기고 간 책장과 책상, 의자 따위가 너부러져 있었다.

그곳에 한 여인이 등장했다. 큼지막한 첼로 가방을 짊어진 채, 무릎을 넘지 않는 나풀거리는 치마에 여러모로 산뜻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음악을 즐기는 20대 초중반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옷차림과 달랐다.

여인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발소리를 죽였고, 조심스럽게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닫힌 창문을 열었다. 열린 틈은 손가락 두 개 정도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 문을 열었다기보다는 그저 틈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 틈 사이로 여인은 망원경을 꺼냈다. 망원경을 통해 그 틈 너머를 바라봤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우뚝 솟은 하얀색 건물이었다. 대한민국 마법 최고 기관 마법청의 본부 건물이었다. 검찰과 경찰, 군부마저 아래로 두고 부하 부리듯 다루는 마법청은 건물 자체에서도 위엄이 넘쳤다. 여인은 그 건물에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의 시선은 주차장을 향했다. 마법청의 주차장에는 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차가 많았다. 좋은 차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차가 있었다.

마치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붉은 동체. 페라리란 이름을 가진 최고급 스포츠카가 혼자서 3개의 주차구역을 쓰고 있었다. 스포츠카 주인이 3개의 주차구역을 통째로 차지한 게 아니었다. 그 옆에 그 누구도 주차를 하지 않아 3개의 주차구역을 쓰는 것처럼 보일 뿐.

여인이 숨을 죽이며 페라리를 집중했다. 페라리는 잠잠했다. 여인은 이내 번호판마저 확인했다.

그제야 여인이 망원경에서 시선을 뗐다. 여인은 이내 첼로 가방을 열었다. 하지만 첼로는 없었다. 대신에 라이플 한 자루가 분리된 채 가지런히 가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여인은 능숙한 솜씨로 총을 조립했다. 몇 번 손을 놀렸을 뿐인데, 철컥! 단숨에 저격용 라이플 한 자루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숙련된 스나이퍼도 보여주기 힘든 솜씨였다.

이후 여인은 노동을 했다. 주변에 있는 책상들을 이동했다. 총을 놓을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고, 자신의 몸을 올릴 수 있는 무대를 붙였다. 하지만 그 무대가 만족스럽지 않는지, 주변에 굴러다니는 책을 뜯어 비틀거리는 책상다리에 끼워 넣으며 균형을 맞췄다.

과정은 분주했으나, 조용했다. 여인은 그 어떤 스나이퍼보다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여인이 총구로 자신이 만든 작은 틈 사이를 겨눈 채 자세를 잡았다. 총구에 달린 스코프 너머로 포인트를 조정했다. 숨죽인 채 일을 처리했고, 그 과정은 몇 분 정도 걸렸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에야 여인은 조심히 숨을 내쉬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쏜다.’

그렇게 여인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 * *

마법청에 도착하는 순간, 이강우와 채유리 커플을 반긴 건 30대 중반의 사내, 김홍구였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엘리트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정장이나, 풍기는 분위기 등은 그저 그런 사람의 느낌이 아니었으니까.

실제로도 엘리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 중 상당수는 콧바람이 제법 센 자들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기권 중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곳이 마법청이니까. 검찰조차도 마법청의 요구에 끌려 다닐 정도다.

하지만 이강우와 채유리를 대하는 김홍구의 행동은 그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보자마자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이강우가 부담스러워질 정도의 예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홍구라고 합니다. 부청장님께 들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나가시기 전까지 모든 걸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발언하는 멘트가 엘리트 공직자의 느낌이 아니라, 나이트클럽 웨이터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날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죽이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반쯤 성공했겠네.’

어쨌거나 김홍구는 자신만만한 것처럼, 이강우가 요구하는 것을 속전속결로 처리해줬다.

“무기부터 보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일단 이강우를 곧바로 마법청 지하에 위치한 무기 창고로 안내했다. 세 단계의 보안 시스템을 거쳐야 했지만, 김홍구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그 과정을 최대한 간추렸다. 남들은 벨트까지 풀어야 했을 때, 이강우는 김홍구의 뒤만 따라가면 됐다. 채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김홍구는 확실히 엘리트가 맞았다.

그렇게 도착한 무기 창고는 제주 문 관리센터의 무기 창고를 축소한 것처럼,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권총은 물론, 소총을 비롯해서 저격용 라이플까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만 하십시오. 뭐든 가져가셔도 됩니다.”

말과 함께 김홍구는 무기도 소개해 줬다. 권총부터 시작해서 장전 시범을 보여주고, 특징을 말해 주고, 단가까지 말해 줬다. 여기에 하나 더, 채유리가 간식을 먹고 싶다고 하자, 곧바로 다른 직원을 시켜서 공항 면세품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 초콜릿을 대접했다.

그 후 곧바로 다시 설명을 해줬다. 그 설명은 한도 끝도 없었다. 심지어 저격용 라이플에 대한 설명까지 해줬다.

“여기서는 이 녀석이 가장 좋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판매되는 저격용 라이플 중에서 가장 정밀한 녀석입니다. 현재 국방부에도 몇 자루 보급되지 않은 녀석입니다.”

이강우는 실소를 지었다.

설명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 호신용으로 들고 다닐 총을 찾으러 온 자리다. 세상천지에 누가 호신용으로 저격용 라이플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람보도 그러진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밑도 끝도 없겠군.’

결국 이강우는 김홍구의 말을 잘랐다.

“권총이면 됩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김홍구는 곧바로 자신이 소개해 줬던 모든 권총을, 19자루의 권총을 이강우 앞에 진열해놓았다.

이강우가 권총을 바라봤다. 콜렉터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녀석부터 시작해서 정말 다양한 권총이 있었다. 루거도 있었다. 루거가 있다는 건, 진짜 어지간한 건 죄다 모았다는 의미다. 애초에 루거를 실용 목적으로 찾는 일은 극히 드물 텐데, 그마저도 준비해 두었다는 의미이니까.

‘이렇게 보니까 고민되네.’

그냥 아무 권총과 탄약만 지급 받고 나가면 될 줄 알았는데, 메뉴가 다양해지니 고민이 생긴다.

결국 많이 골라봐야 두세 자루가 될 테니까. 하물며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권총을 호신 목적으로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강우의 고민이 길어졌다. 그런 이강우의 고민을 풀어준 건 다름 아니라 채유리였다.

“쏴 보고 결정할게요. 연습장으로 안내해주세요.”

* * *

타앙, 타앙!

총성이 마법청 지하에 위치한 사격연습장을 쉴 새 없이 울렸다. 사격을 마친 이강우가 권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강우의 표적이 이강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강우의 솜씨는 제법이었다. 탄착군이 예쁘장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역시 내 실력은 안 죽었다니까.’

사격은 나름 남자의 로망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과가 좋으면 뿌듯함이 생긴다.

그때 이강우의 바로 옆에서 사격을 마친 채유리의 표적지가 채유리 앞으로 츠츠츠!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걸 본 이강우가 입을 다물었다.

‘우와.’

이강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착군이 정말 제대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이쯤 되면 올림픽 사격 대표 출전을 진지하게 고려해도 될 법한, 그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정말 타고났네, 타고났어.’

마법사들은 총을 잘 다룬다. 못 다루면 훈련을 시켜서라도 다루게 만든다.

하지만 그때의 사격 훈련은 권총보다는 소총을 다루는 훈련 비중이 높다. 아무래도 몬스터를 상대로는 최소한 소총 정도는 들어야 총을 든 보람을 느끼게 되니까.

당연히 채유리는 태어나서 권총이란 놈을 제대로 쏴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놀라운 명중률을 보여준다는 건, 타고났다는 의미.

더불어 그녀는 작은 몸으로, 구경이 일반 권총보다 큰 권총마저도 무리 없이 쏘고 있었다. 심지어 한 손 사격도 했다. 반동을 가뿐하게 흡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이쯤 되자 이강우는 다시금 궁금해졌다. 대체 채유리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놀라운 딸을 낳을 수 있었던 걸까? 꼭 채유리의 부모님을 뵙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유리 부모님 만나면…… 역시 결혼 이야기가 나오겠지?’

심각한 상황이다.

세상이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한국만 하더라도 마법 테러 조직이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인류가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위기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 위기를 이강우가 막아내야 하는 상황.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을 폭파하기 위해 운석과 함께 자폭 스위치를 누르는 영화 속 주인공의 처지와 이강우의 처지는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이강우는 미소가 지어지는 상상을, 장밋빛 상상을 했다. 불행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행복한 요소를 찾고, 즐기고 있었다.

이강우는 채유리와의 결혼을 상상했다. 일단 결혼식을 화려하게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 우연히 허니문 베이비를 얻게 되고, 외동이 아니라 채유리를 닮은 딸 하나와 이강우를 닮은 아들 하나를…….

‘아니지. 아들이 나 닮으면 큰일 날 일이지. 무조건 유리를 닮아야지. 아무렴.’

……어쨌거나 아들딸 하나씩 낳고, 돈 걱정 없이, 노후 걱정 없이 가족 여행도 다니는 광경들.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때 김홍구가 사격연습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강우의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우웅, 우웅

스마트폰이 이강우의 손 위에서 진동하며, 액정 위로 열한 개의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숫자만 떴다. 이강우는 어지간한 번호는 이름으로 저장한다. 그렇다는 건 모르는 사람의 연락처란 의미.

타앙!

그때 채유리가 다시 사격을 시작했고, 이강우가 그 총성을 피해 사격연습장 밖으로 나왔다. 방음벽 덕분에 소리가 뚝, 끊겼고 이강우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이강우 씨 폰이 맞습니까?

들리는 목소리. 여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남성 특유의 힘은 없었다.

더불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류복희라고 합니다.

이름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류복희? 중국인인가?’

더군다나 이름의 느낌이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국인이 스스로에게 지을 법한 이름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강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아는 거지?’

적이 많은 상황이다.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기분 좋게 받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이 이강우인 걸 알고 전화를 줬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한 일이다.

“전화를 건 목적, 짧게 말해주십시오.”

더 이상 통성명을 위한 대화는 필요 없다. 상대가 괜한 수작을 부리면 통화를 끊는 게 답.

-현재 위스프의 스나이퍼가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대로 일을 마치고 차에 탑승하려 한다면,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문고리에 집어넣는 순간 라이플 탄환이 날아올 겁니다. 스나이퍼의 저격 포인트를 보면 심장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상대는 이강우가 절대 통화를 멋대로 끊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강우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당신 누굽니까?”

이강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표정도 바뀌어 있었다.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다는 게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상대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 믿음에 대한 건 이제부터 처리해야 한다.

-류복희, 직업은 에이전트입니다. 마법사들을 도와주는 에이전트.

류복희가 그 믿음을 위해 스스로를 소개했다.

-현재는 기예르모 씨의 에이전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괴식가 기예르모, 아시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 * *

네 시간이 지났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햇살이 꺼지기 시작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어둠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 네 시간 동안 여인은 그 상태 그대로, 네 시간 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생리현상을 그녀는 무시했다. 소변이 마렵자, 그냥 그 자리에서 소변을 눴다. 이미 입고 있는 성인용 기저귀 덕분에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어찌 보면 굴욕이고, 치욕이다. 결코 추억으로 남길 수 없는 경험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대로 인형이 되고자 할 뿐이었다. 그저 방아쇠만을 당기는 인형. 마음 같아서는 숨을 쉬는 것조차 포기하고 싶었다. 숨을 쉴 때마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스코프 너머의 시계(視界)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 작은 흔들림이 실패로 이어진다는 게, 그녀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부조리함을 상대로 실패는 용납되지 않아.’

그녀는 차라리 숨마저 쉬지 않는 시체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체가 되면 생리현상도 사라지고, 숨소리도 사라지고, 인기척도 사라지고, 온몸의 근질거림과 잡념도 사라질 테니까.

그런 그녀의 소원이 하늘에 닿은 걸까?

스르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사무실 구석에 드리운 어둠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은 책상 위를 구르는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낌새 없이, 기척 없이 여인의 근처로 이동했다. 이윽고 어둠이 솟아올랐다. 이 과정에서도 소리나 낌새는 없었다.

이윽고 2미터 남짓 솟아오른 어둠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타이츠를 입은 듯한 사내의 형태가 갖춰줬다. 깡마른 몸, 뼈만 보이는 볼품없는 몸이었다. 그런 볼품없는 몸뚱이에 달린 팔, 그 오른팔 끝에는 주사기 한 자루가 잡혀 있었다.

그제야 낌새가 나타났다.

여인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네 시간 동안 똑같은 자세를 유지했던 여인의 몸은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경련을 일으켰다. 그 경련은 미약한 반항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림자 사내는 가뿐하게 주사기를 여인의 허벅지에 꽂았다.

여인은 그렇게 본인이 소원한 대로 시체가 됐다.

* * *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한옥, 자그마한 간판이 아니면 찻집이란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찻집에는 손님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안중현이 방문했다. 안중현은 사람을 찾기 위해 시선을 여러 번 돌릴 필요 없이 곧장 한 명밖에 없는 손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일단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는 깊이가 얕지 않았다. 나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인사인 셈.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

“자네도 멀쩡하니 다행이군. 그동안 온갖 굵직한 사건마다 이름을 올리던데.”

“예, 제가 이름 값 이상으로 활약을 좀 했죠.”

노인의 정체는 천영수였다.

이강우에게 도축의 기본을 가르쳐준 기술자이며, 지금은 만석루 지하에 위치한 비밀 공간에서 몬스터 고기를 도축하며 하루하루를 소소하게 보내는 도축업자.

하지만 본래 천영수는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모래시계문이 등장하고, 몬스터에 대한 모든 것이 미지로만 존재했을 때, 귀중한 사료가 될 몬스터 해체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만석루의 이름 모를 늙은이가 아니라, 즈믄나래든 혹은 마법청이든, 번듯한 세력에 고문이든 뭐든 이름을 올려도 될 법했다.

“그보다 날 찾아오다니, 무슨 일인가?”

그런 그를 안중현이 찾아온 이유.

당연히 현재가 아닌 과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를 위한다면 그렇게 하게.”

“몬스터 해체를 처음 하셨을 때, 몬스터에 등급 같은 게 있었습니까? 규정화된 게 아니더라도, 그냥 당시 관계자들 끼리 몬스터의 급을 나누거나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그 말에 천영수는 곧장 대답했다.

“없었지. 괴물은 다 같은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름 몬스터에 급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 해체를 해보면, 칼이 잘 드는 놈이 있고 안 드는 놈이 있으니까.”

“그럼 등급을 언제쯤 쓰게 됐습니까?”

“음…… 내가 처음 불려나간 게 1월 15일, 아니, 16일이었나? 그때 납치하듯 끌려간 후에 괴물 하나 해체하는 데 2주를 꼬박 보냈지. 잠깐 고민 좀 해봐도 되겠나? 늙으니 기억력이 좀 그렇군.”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강우 녀석은 어떻게 지내나? 큰일을 내고 있다는 건 들었는데…….”

안중현은 옅게 웃었다.

아무래도 천 노인은 이강우의 현재 상황이 궁금한 모양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자는 제자. 이강우의 도축 기술은 천 노인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기술로 이강우는 지금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말해줄 순 없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안중현이 봤을 때 이강우는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을 숨기는 게 유리하다. 만약 본인을 드러내도 될 상황이었다면, 이강우는 진작에 자신을 세상에 알렸을 것이다. 이강우는 본인이 원하면 하선우 이상 가는 핫이슈 메이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적당히 말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보다 몬스터 등급을 들은 건 2월 17일이었네.”

떠오른 모양이다.

안중현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왔다.

“2월 17일? 공문이 내려온 겁니까?”

“아니, 그때 그냥 처음 들었을 뿐이네.”

“누가 말했습니까?”

“강희.”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

“그가 말했지. 8등급 몬스터에 대한 해체를 부탁한다고. 그래, 그가 처음 말했군.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몬스터 등급이란 단어를 쓰면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지.”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안중현은 짧게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 * *

이강우와 채유리는 마법청에 남아있었다. 위스프에서 이강우를 저격하기 위해 저격수를 배치해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무시하고 굳이 자가용을 타고 마법청을 빠져나가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마법청에 남은 이강우는 고민했다.

‘이 사실을 마법청에 알리고 같이 행동하는 게 정답일까?’

류복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강우는 그 사실을 마법청 관계자에게 알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으니까.

안대욱 부청장 본인이 직접 정부 관계자들을 쉽사리 신용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하물며 류복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스프의 저격수가 이강우를 노리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마법청 내에 위스프와 결탁한 스파이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강우의 마법청행은 갑작스럽게 정해진 일이다. 사전 합의나, 계획도 없었고 이강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정했다.

그런데 위스프가 이강우가 마법청에 있는 걸 파악하고 저격수를 보냈다? 이강우가 마법청에 연락을 하는 순간, 위스프가 그 사실을 파악하고 먼저 행동했다는 증거다.

물론 류복희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역시 있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류복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을 때.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그가 만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내가 뭘 믿고 당신을 만나야 합니까?”

이강우는 칼 같이 거절했다. 당장은 류복희를 믿는 것도, 마법청을 믿는 것도 어렵다.

-그럼 거기서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거기서?”

-지금 계시는 마법청 본부 말입니다. 적어도 제가 거기서 허튼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류복희가 꽤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제안을 받은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만날 필요가 있을까?’

일단 류복희는 스스로를 기예르모의 에이전트라고 소개했다. 그게 기예르모의 수하를 의미하는 건지, 그를 도와주는 매니저 같은 역할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기예르모를 만난 적은 없지만, 기예르모 레시피를 통해 그가 가진 지식과 행보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를 만나면, 궁금한 게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예르모의 에이전트가 위스프의 이강우 저격 계획을 알려줬다는 건, 기예르모가 위스프란 단체와 적대관계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기예르모가 위스프의 배후로 예상되는 모래시계문 주인들과 대척점에 있다면?

하지만 그 호기심이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

‘차라리 안전한 곳에서 만나서 결정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만나보는 게 여러모로 낫다. 류복희란 사람 역시 나름 이유가 있으니 이강우를 만나려고 할 터. 만나면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말한 대로 마법청 본부는 대한민국에서 안전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소다.

“좋습니다. 만나봅시다.”

* * *

류복희의 첫인상은 유약함이었다.

그는 정말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왜소함으로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채유리마저 류복희 앞에서는 기세등등할 수 있을 정도. 여기에 크고 동그란 안경테는 그의 인상을 더더욱 연약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는 양손에 묵직한 것을 든 채 이강우 앞에 등장했다. 워낙 유약한 모습 탓에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그런 그는 마법청 지하 1층에 위치한 구내식당에서 이강우를 발견하고는, 그 버거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강우 씨,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 인사를 받았을 때 이강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강우는 여기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기세 싸움이다.’

괜히 아쉬운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인사를 받는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군요.”

표정만으로 부족했는지 직접 제 입으로 자신의 불쾌함을 전달했다. 류복희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긴박했습니다. 설마 그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나름 제 덕분에 목숨을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저격수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죠.”

“시체라…….”

이강우의 말에 류복희가 실소를 머금은 뒤 가지고 온 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적어도 먹을 거 앞에 두고 비위 상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류복희, 그가 가져온 건 다름 아니라 찬합이었다. 그것도 다섯 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찬합, 4인 가족이 나들이 갈 때나 쓸법한 거대한 찬합을 두 개나 가지고 온 것이다.

그제야 이강우는 왜 류복희가 구내 식당에서 만나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걸 다른 장소에서 먹는다면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아주 이상해질 테니까.

그때 이강우가 묘한 낌새를 느꼈다.

‘이거…….’

이강우가 반사적으로 분석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이강우의 눈앞에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떠올랐다.

‘일십…….’

최소 10만이 넘어가는 마력 포인트들!

이강우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굳지 않도록 유지했다. 그런 이강우의 표정을 알 리 없는 류복희는 단계적으로 찬합을 열었다. 가장 먼저 가장 위에 있는 뚜껑을 제거했다. 디저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저트는 과일들이었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망고와 비슷한 느낌의 과일이었다.

‘기생망고.’

보통의 망고와는 색감부터가 다른 그건 기생망고가 확실했다.

구하고자 해도 구할 수 없고, 구하는 순간 마법청에 전부 상납해야 하는 귀한 놈이다. 대한민국에서는 6서클 마법사 정도 되어야지, 1년에 한두 번 정도 디저트로 먹을 수 있는 매우 귀한 놈!

그런 기생망고가 당연하다는 듯이 찬합에 들어 있었다. 그 외에 나머지 과일들 역시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최소 1천 포인트 이상의 마력을 품고 있는 희귀한 것들이었다.

채유리 역시 기생망고를 발견하고는 눈빛을 빛냈다. 그녀는 기생망고 맛을 아니까. 없어서 못 먹을 정도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칸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벽두꺼비 크림…….’

벽두꺼비 크림이 생크림처럼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강우의 머릿속에 벽두꺼비 크림으로 만든 요리의 맛이 스쳐 지나갔다. 그 황홀한 맛의 기억에 입안에 침이 가득 찼다.

꿀꺽!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세 번째 칸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강우는 더 이상 침을 머금지 않았다.

대신 표정을 굳혔다.

‘……설마 옥뱀의 구슬은 아니겠지?’

세 번째 칸에 있는 건 마치 방울토마토를 연상케 하는 붉은색 구슬들이었다. 그런데 그 구슬들 표면에 검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떠올릴 수 있었다.

6등급 몬스터 중에 옥뱀이란 놈이 있다. 몸길이 2미터 남짓한 뱀인데 이 뱀은 독특한 소화액을 가지고 있어서, 먹은 먹잇감을 소화액을 이용해 작은 구슬 형태로 응축한다.

그래서 옥뱀이다. 옥을 품은 뱀이란 의미다.

그리고 이 옥뱀의 구슬은 어마어마한 보양 효과가 있다. 원기회복에는 그만이다.

문제는 이 옥뱀은 기생망고거북 이상으로 희귀종이란 점이었다. 오죽하면 스택 레코드에 옥뱀의 사진이나 영상 자료가 등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목격자의 진술을 이용해 만든 CG자료만 있을 뿐이었다. 스택 레코드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옥뱀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로또 1등 당첨 수준이란 의미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5칸짜리 찬합 2개다. 지금 이강우는 그중 고작 3칸을 봤을 뿐이다. 아직 7칸이 남아있다는 의미. 이강우는 그 7칸을 전부 보기 전에 질문을 던졌다.

“이게 뭡니까?”

“기예르모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말에 미소가 지어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런 선물을 마다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미소를 참은 후 오히려 진지하게, 불쾌한 기색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가 내게 이런 선물을 주는 겁니까?”

“좋은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왜 갑자기 좋은 관계를 운운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당신은 이 선물을 전해주려 온 겁니까?”

“선물은 말 그대로 선물인 법이지요. 제가 여기 온 건 이강우 씨에게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이강우가 눈빛으로 질문을 재촉했다.

“이강우 씨, 당신의 주변에는 지금 많은 위협이 있습니다. 그 위협을 알려 주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이강우는 그 말에 등골이 싸늘했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지금 전 세계에 이강우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 정도가 비교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수는 없다.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자리.

“무슨 위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위협으로부터 날 구해주기 위해 왔다는 겁니까?”

“예.”

“이유는?”

“당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

‘무언가 알고 있어.’

촉이지만, 류복희는 이강우가 가진 비밀의 일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더 나아가 기예르모도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의미.

그 순간 이강우는 옥뱀의 구슬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 구슬을 입에 넣고 깨무는 순간 농익은 과즙과 비슷한 진한 달콤함과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놀라운 건 포만감이었다. 고작 방울토마토 크기의 구슬을 먹었을 뿐인데, 뱃속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몬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배가 터지도록 먹은 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5,000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고작 이거 한 알에 5천 포인트를 습득했다. 지금 보이는 옥뱀의 구슬만 10알이 넘는다.

다 먹으면 5만 포인트.

그 외에 기생망고를 비롯해서 여기 있는 모든 걸 먹는다면 최소 30만 포인트 이상 섭취는 가능할 것 같았다. 5등급 유적을 독식해도 채우기 힘든 마력 포인트가 도시락이 되어 눈앞에 있다.

기겁할 만한 광경.

하지만 이강우는 이 광경에 넘어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눈으로, 맹수의 눈으로 류복희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1시간 드리겠습니다. 1시간 안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날 설득해 보십시오.”

* * *

“모래시계문은 무기입니다. 일종의 쥐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즈를 무는 순간 상황은 끝이 나죠. 문제는 그 치즈가 너무나도 탐이 납니다.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고, 오직 쥐덫 위에서만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래시계문을 처리하지 않고, 치즈를 위해서, 심지어 모래시계문을 독점하려고 하죠.”

류복희는 말을 하며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는 지금 자신의 볼을 해바라기 씨를 먹은 햄스터처럼 부풀리고 있었다. 그 옆에 채유리 역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햄스터 암수를 보는 것 같았다.

‘연인이라더니, 천생연분이군.’

류복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자 그 둘이 말을 멈춘 류복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물론 입은 계속 움직였다. 우걱우걱, 쩝쩝. 보통은 이렇게 되면 말하는 입장이 불쾌해질 법도 한데, 워낙 잘 어울리는 한 쌍인 덕분에 그렇게 보기 흉하진 않았다.

더불어 류복희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이들보다 더 괴팍하게 먹는 괴식가 기예르모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와 비슷했으니까.

기예르모는 그저 단순히 몬스터를 먹어서 괴식가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별 이상한 걸 다 먹는다. 말 그대로 괴식을 한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보면 혐오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요리 과정도 투박하기 그지없다. 요리라기보다는 그냥 먹을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다, 단지 그뿐이다.

그에 비하면 나름 젓가락과 숟가락과 포크 따위를 쓰는 이강우, 채유리 커플은 충분히 정상이었다.

류복희가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사회가 이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회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사회 시스템이 굴러간다는 점이죠. 지금 당장 아프리카를 가보십시오. 거긴 지옥입니다. 몬스터가 이미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뉴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터넷 검색으로도 안 됩니다. SNS를 통해서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악몽 앞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이강우는 먹는 걸 멈추고 씹기만 했다.

이제까지 씹고 먹기를 끊임없이 하던 그가 먹기를 멈췄다는 건, 이번 것만 씹어서 목으로 넘긴 후에 말을 하겠다는 의미다.

꿀꺽!

이내 음식물을 삼킨 이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거대한 권력에 의한 일이니까, 위스프처럼 반정부세력이라도 만들자, 이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분명한 건 현재 모래시계문을 관리하는 각국의 정부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기예르모 씨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기예르모 씨는 애초부터 어떠한 세력의 도움 없이 홀로 유적 사냥을 했습니다.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그들의 감시를 받고, 목줄을 채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제야 이강우는 기예르모의 기행을 알 수 있었다.

기예르모는 모래시계문의 등장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의도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손바닥에서 놀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혼자서, 행적을 감춘 채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기예르모 레시피가 외부로 유출되는 걸 그토록 경계했던 거군요. 유출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면서…….”

그렇게 자기 비밀에 철저한 인물이니, 자신이 비밀스럽게 고생해서 얻은 정보가 퍼지는 걸 그토록 경계한 것이겠지.

“아뇨, 그건 그냥 자기 일기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그런 겁니다. 정확히는 기예르모 씨는 자기가 악필인 걸 굉장히 부끄러워합니다. 그게 알려지는 게 부끄러운 거죠.”

……는 아닌 모양이다.

류복희의 대답에 이강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기예르모,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강우는 이 대목에서 류복희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다. 그들에게 진실을 고백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상대하는 대척점에는 불사황제와 이강우를 노리는 무리들이 있다.

같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손을 잡는 건, 여러 사례를 덧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이런 식의 동질감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외로웠던 싸움에서 함께할 수 있는 동료를 얻은 느낌이다.

류복희가 이강우를 속이는 게 아니라면, 그와 손을 잡는 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

문제는 어떤 식으로 공동전선을 펼치는가, 그 점이다.

“제게 원하는 바가 정확히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적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러이러하니 손을 잡자, 손을 잡았으니 무슨 이름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이런 짓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또한 그런 세력을 만들면, 그 세력이 타깃이 됩니다.”

확고한 목적을 가진 세력을 만들지 않는다.

지금 확고한 목적을 세우기엔 적이 불투명하다. 그럴싸한 존재감만으로 적을 규정하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세계를 암약하는 적을 상대로 명백한 적의를 가진 세력을 만든다면?

가차 없는 응징을 당할 터.

“단지 미지의 적, 마법이란 초월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적과의 전쟁을 앞두고 보다 많은 바둑알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제가 바둑알이다? 이겁니까?”

“바둑판이라면 바둑알이 될 수도 있고, 체스판이라면 체스말이 될 수도 있는 법이죠.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적이 어떤 판을 벌이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준비할 때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준비해둔 바둑알은 얼마나 됩니까?”

류복희의 시나리오는 대충 파악했다. 그는 당장 대항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위기가 오면 대항세력이 될 수 있는 재목들을 확보하고 싶은 거다.

에이전트란 단어를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요원이 아니라 프로스포츠 세계의 에이전트들, 선수를 대신해 여러 계약과 주변 일들을 처리해주는 것처럼, 바둑알이 될 수 있는 능력과 가치를 가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제법 됩니다. 전부 밝힐 수는 없지만, 세상에는 모래시계문에 대해 의구심이 아닌 의심을 가지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실행에 옮기겠죠.”

제법 된다.

이강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일은 없겠군.’

외로운 전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치열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조만간 죽고 죽이는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쪽과 막으려는 자들 사이의 전쟁. 이미 사태는 꽤 심각합니다. 아프리카는 이미 유엔군이든, 미군이든 유럽이든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습니다. 아프리카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유럽입니다.”

류복희는 말을 하면서 이강우에게 눈빛을 보냈다. 당신이 지금 그 전쟁의 중심에 있다!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강우는 굳이 그런 류복희의 눈빛에 겁을 먹거나, 긴장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각오를 마쳤으니까. 중2병 환자처럼,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지껄일 정도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짓을 하면서까지 각오를 다졌던 일이다.

때문에 이강우는 이 상황에서 새로운 각오 대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을 계산했다.

‘기회군.’

일단 이건 좋은 기회다.

이강우와 같은 목적을 가졌으며, 필요에 따라서 이강우를 도와줄 수 있는 정보력과 행동력을 가진 사내가 눈앞에 있다. 물론 여전히 백퍼센트 신뢰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상황에 따라서는 파트너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득을 얻어내는 게 정답.

이강우는 찬합을 바라봤다. 많이 먹었다. 10인분은 될 법한 양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채유리는 정말 여전히 자신의 식성을 자랑하려는 듯, 그 자그마한 몸에 클래식하게 구운 스테이크를 썰어 넣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채유리가 많이 먹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강우가 먹을 것까지 먹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먹는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이강우의 눈에도 콩깍지가 씌인 모양.

이강우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은 류복희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여기서 요구할 수 있는 건 하나지.’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쪽 의견을 정리하면 언젠가 내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예.”

“호의입니까?”

“호의라고 받아주시면 나쁠 건 없지요.”

“기예르모 레시피, 몇 권까지 나왔습니까?”

이강우의 질문에 류복희가 대충 이강우의 의중을 파악한 듯, 이강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말해주기 전에 건네줬다. 류복희, 그가 USB하나를 꺼냈다.

“기예르모 레시피를 기반으로 만든 기예르모 레코드입니다.”

아주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다.

“그리고 저격수는 제거됐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움직이셔도 됩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아주 제대로.

정말 많은 걸 준비한 모양이다.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살아남으십시오. 제 호의에 대한 보답은 그거면 됩니다.”

* * *

류복희는 가벼워진 두 개의 찬합을 들고 마법청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류복희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주차해둔 차에 탑승했다. 차는 경차였다. 박스 모양의 작은 경차. 그런데도 류복희가 차문 앞에 서자 차가 SUV 차처럼 보였다.

이윽고 류복희가 탑승하고, 찬합을 조수석에 올려놓자, 그의 뒤편에 짙게 깔렸던 어둠이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류복희가 백미러를 확인한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나이퍼는 어떻게 했습니까?”

“죽었지. 네 시간 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몸이 굳은 터라 제대로 반항조차 못한 채.”

죽음.

류복희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안타깝군요. 평범하게 살았다면 굳이 죽을 필요도 없는 운명인데. 위스프, 참 섬뜩한 조직입니다.”

“본인이 순교자가 되기로 했으니, 여한은 있어도 어디 가서 투정은 부리지 못하겠지. 그보다 이강우란 자, 포섭이 됐는가?”

이강우가 언급되자, 류복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포섭이 아닙니다. 단지 경고 어린 조언을 해줬을 뿐이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강희, 그가 있는 즈믄나래의 땅에서 우리 정체가 드러날 작정을 하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이강우의 가치.

그 말에 류복희는 곧장 대답했다.

“그는 꽤 인상적인 변수입니다.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한국 마법계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만 보더라도 한국 마법계의 핵심 권력자들이 이강우를 중심으로 판을 짜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호수 위에 떨어진 돌멩이로 남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강우만 특별한 건 아니잖아?”

“에펠탑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에펠탑.

그 말에 검은 그림자 사내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검은 타이츠 복면을 쓴 듯한 얼굴이라서 그런지 그 비릿한 미소가 더 진하게, 비릿하게 느껴졌다.

“베르사유 궁전에 숨은 비밀 공간이 몇 개인지 말해줄까?”

“에펠탑은 웅장하죠. 거대합니다. 하지만 그뿐이죠. 에펠탑을 보고 위험하다, 경각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에펠탑 옆에 에펠탑에 버금가는 탑이 1년 만에 지어진다면, 사람들은 기겁할 겁니다. 아마 매일매일 온갖 난리가 일어나겠죠.”

“이강우의 존재가 판을 흔들 변수는 된다, 이거군.”

“그런데 블랙 스택이 그런 이강우의 행보를 터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제야 검은 그림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류복희는 그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차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 사이로 류복희가 말을 이어갔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에게는 분명 대적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적자가. 그게 아니라면, 마법이란 초월적인 힘을 가진 그들이 이렇게 복잡하고, 골치 아픈 방법을 쓸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 대적자 후보들이 대적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그 초월적인 존재들을 상대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검은 그림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후.

“좋은 말이군. 좋은 말인데…… 여기서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기왕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면,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답게 차를 좀 바꾸는 게 어떻겠나?”

작은 푸념을 뱉었다.

류복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이 차도 큽니다.”

“키 크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없어서 다행입니다. 만약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제 영혼을 그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에게 팔아넘겼을지도 모르니까.”

* * *

이강우는 채유리를 데리고 마법청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고, 언제까지 마법청에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류복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스프가 나를 노린다는 건데…… 이대로 집에 가는 건 위험해.’

마법청보다 집이 안전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마법청도 마냥 안전하진 않아.’

그렇다고 마법청 내에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법청에 모든 상황을 말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도 애매한 상황.

‘안대욱은…….’

안대욱 부청장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는 건? 하지만 이 역시 확신이 서진 않았다. 무엇보다 안대욱이 할 수 있는 건 마법청을 통한 움직임이다. 마법청 자체가 신뢰가 가지 않으니, 의미가 없다.

여기서 이강우는 기예르모의 행보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 꼴이었군. 언제든 우물에 물이 차면 익사할지 모르는 신세.’

정부 또는 거대한 세력의 도움만 받다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막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자력으로 지금 당장 이강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별수 없지.’

결국 이강우가 믿을 수 있는 건 안중현이었다. 이강우는 안중현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자세한 상황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안전하게 피신할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고, 안중현은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소 하나를 곧바로 찍어줬다.

정말 믿음직한 사내다.

이강우는 그 주소를 본 뒤 채유리를 바라봤다. 배부른 채유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이강우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외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그 말에 채유리가 살짝 놀랐다. 그녀가 오! 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란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강우는 아차 싶었다.

애인에게 남자가 외박을 하자고 말한다? 그 속내가 너무 노골적이다. 상남자도 그리 말은 못한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그런 의미의 외박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테러 조직의 위협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안전한 비밀 장소에서 외박을 하자는…….”

이강우가 곧장 변명을 시작했다.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채유리가 방긋 웃었고, 그 웃음에 이강우는 변명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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