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0화 (40/66)

40화. 습격자들

유적 사냥은 끝이 났다.

유적의 우두머리, 기둥나무 숲의 주인이었던 별 발자국의 공룡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사체가 되어 있었고, 그를 대신해 숲의 새로운 주인을 자청할 몬스터는 없었다.

“줄 묶었습니다.”

“여기도 묶었습니다.”

하지만 포식자 팀은 바빴다. 어떻게 보면 성족공룡을 잡기 전보다 더 분주하게 보일 정도.

지금도 그랬다.

“좋아, 셋에 당기는 거다.”

성족공룡의 거대한 사체.

몸길이만 12미터에 이르고, 체중을 가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녀석은 배를 바닥에 깐 채로 엎드려 있는 놈을 뒤집기 위해 팀 포식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이윽고 그 분주한 노력 끝에 배를 깔고 있던 성족공룡의 거대한 몸뚱이가 뒤집혔다.

쿵!

그저 몸을 뒤집는 것만으로도 땅이 울릴 정도!

대단한 일을 해낸 모두가 합창을 하듯, 후우! 동시에 힘겨운 기색을 토해냈다.

그 광경을 유일하게 여유를 가진 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이강우, 그는 자신의 도축용 칼의 날을 갈며 유유자적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들 고생한다, 고생해.’

조금 전 성족공룡을 뒤집은 건 보다 쉽게 도축을 하기 위해서였다. 갈비뼈가 있는 등 쪽에서 도축을 들어가는 것보다는 뼈가 없는 배를 가른 후에 내장을 제거하는 작업이 더욱 편한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강우의 실력이라면, 등 쪽에서 접근해도 충분히 도축이 가능했다.

어찌 보면 헛심을 쓴 셈.

그런데도 이런 수고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안중현의 계획 때문이었다.

‘정말 사람을 다룰 줄 안다니까.’

안중현은 유적 입장 전에 많은 계획을 세웠다.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팀 포식자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속력을 위해서 안중현은 모든 방법을 짜냈다.

“정말 다른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는 의미가 없네. 조직을 시계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품이 의미를 가져야 하지. 하지만 모든 걸 같이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같이해야만 하는 일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하네. 화합을 위해서 없던 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그 방법 중 하나가 지금 이 방법이었다. 몬스터 도축에 팀 전체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정말 대단해.’

본래 몬스터 도축은 이강우의 전유물이다. 남들은 이 도축에 참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도축 과정을 도와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팀원들이 이강우의 전유물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좋아.’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쌓은 신뢰가 결국은 견고한 동료애로 발전되는 법이니까.

이강우가 다시금 칼을 가는 데 집중했고, 그사이 도축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나머지 인원들이 성족공룡의 팔다리를 줄로 묶은 후 땅에 확실하게 고정했다.

이런 협동 무대는 단순히 이강우에게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김재범과 하선우, 정말 철천지원수와 같았던 그 두 앙숙은 작업을 하면서도 대화를 나눴다.

“네가 봐도 피가 빨린 것 같지?”

“절단면에 핏기가 없으니까.”

“특수한 능력이 피에 있는 상대로는 피를 흡수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긴 한데……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걸까? 응? 이런 마법을 본 적이 있어?”

“없지. 하지만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리볼버의 마법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역시 미국이야. 이런 어마어마한 마법을 보유하다니. 그런데 그런 마법을 대장에게 쓰라고 툭 던져주는 걸 보면…… 역시 대장은 한국에 남을 생각은 아닌 모양이야.”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물론 아직 퉁명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 둘이 생산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 이강우가 나섰다.

이강우는 사지를 대(大)자로 벌린 성족공룡의 몸뚱이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가슴을 갈랐다. 내장이 있는 배가 아닌 가슴을 가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심장.’

심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심장에는 피가 남아있을지 몰라.’

정확히는 피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절망의 태양이 성족공룡이 가진 대부분의 피를 뽑아먹었다.

좀 과할 정도로.

조금은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전투 중에 이강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전투에 임할 수는 없었다.

위험하니까.

만약 그런 생각을 품고, 피를 조금만 흡수한다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리스크가 된다.

‘뭐, 있는 만큼 빨아 먹어서 여한은 없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절망의 태양이 뽑아먹은 피 그리고 마력의 양은 포인트로 무려 8만 포인트에 가까웠다. 5등급 몬스터 한 마리의 마력량이 평균적으로 10만 포인트를 고려하면, 더 이상 피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서 심장을 찾았다.

‘쥐어짜서라도 얻어야지.’

심장을 쥐어짠다면 핏물을 방울이라도 얻을 수 있을 터. 하물며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심장도 크고, 핏방울을 모으면 그 양이 상당할 것이다.

그런 이강우의 기대는 현실이 됐다.

가슴을 가른 이강우가 다른 장기와는 다르게 여전히 윤기를 품고 있는 심장을 발견했다.

아직 메마르지 않은 촉촉함이 보였다.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추억이 되겠군.’

* * *

성족공룡을 잡았을 때 모두가 나름 기대했다.

‘과연 무슨 맛일까?’

‘드디어 이번 유적의 메인 디시군.’

특히 앞서서 4등급 유적 사냥 당시 5등급 몬스터인 멜트 드래곤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네 명의 마법사들의 기대감은 상당했다.

채유리는 코를 높이 세우며, 그때 경험을 김수애 앞에서 자랑했다.

“멜트 드래곤 먹어 봤어요?”

“아니요.”

“전 먹어 봤어요.”

“그런가요?”

“정말 맛이 끝내줬어요. 아마 상상도 못 할걸요?”

채유리가 나름 김수애를 놀리고 싶은 모양.

“네, 그러네요.”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올 만큼 김수애는 유치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강우가 그들에게 만들어준 건, 기름기 가득하고,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돌게 만드는 두툼한 스테이크가 아닌 검은 액체였다.

커피와 비슷하지만, 커피보다 더 영롱한 느낌.

그 영롱함 때문에 석유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게 전부야? 고기는?’

고기는 만고불변의 진리.

그런 생각을 가졌던 그들의 심기가 살짝, 아주 살짝 비틀리려고 할 무렵, 이강우가 검은 액체를 잔에 따랐고, 그들의 비틀렸던 심기는 그 상태로 녹아 버렸다.

아!

모두가 감탄을 토해냈다.

그저 잔에 따랐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 우아하게, 산들바람처럼 퍼져나가는 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향을 맡는 순간 배 속이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허기?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저것을 그냥 먹고 싶다, 배 속에 넣어 달라, 투정이었고, 앙탈이었다.

모두가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그들이 군침을 삼기는 사이 이강우는 준비한 열 개의 잔에 똑같은 양을 채웠다.

“안타깝게도 한 병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짜내도 이 이상은 나오지 않더군요.”

깔끔하게 병을 비운 이강우가 병을 대충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 순간 대부분의 이들은 생각했다.

나였다면, 그냥 병 하나를 통째로 가진 채 두고두고 이 향을 혼자만 즐겼을 텐데…….

그러나 이강우는 그 열 잔을 나눴다.

그 의미.

“다들 살아서 다행입니다.”

모를 리가 없다.

모두가 묘한 두근거림과 함께 기둥나무 아래에서 잔을 들고, 동시에 성족공룡의 핏물을 머금었다.

말은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말 역시 없었다. 표현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몸이 원하던 것을 몸에 넣어 줬다. 그거면 충분하다. 더 이상 만족하고 자시고 없다. 모두가 말없이 입안을 가득 채운 향을 감상했다.

와인과 비슷하다. 과일 특유의 상큼함이 느껴지니까. 하지만 와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커피와 같은 깊은 향도 있다. 여기에 적당한 씁쓸함과 텁텁함이 향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감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끝내준다! 그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그렇게 침묵 속에서 포식자 팀이 회식을 마쳤다.

* * *

출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유적 사냥꾼들의 마음은 욕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욕구란 다양하다.

당장 맥도날드에 가서 주문 없이 그냥 만들어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잔뜩 먹고 싶은 욕구,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 머리를 푹 담그고 싶은 욕구, 그 외에 여러 가지 욕구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을 느끼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찬다. 때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달랐다. 모래시계문 클로즈에 성공하고, 출문을 통해 다시금 들어갔던 문에서 나오는 열 명의 얼굴에는 욕망에 흔들리는 눈빛이 아니라, 만족감이란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어?’

모래시계문 밖에서 문을 관리하던 직원은 처음이었다. 그런 표정의 유적 사냥꾼들을 본 적은.

‘무슨 표정들이…… 약이라도 했나?’

때문에 그 직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를 곧장 전달하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포식자 팀의 리더인 이강우가 관계자를 불러 몇 가지 요청을 하려는 순간,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긴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예?”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와서 짐 좀 정리해주고, 초콜릿 좀 가져달라고 주문을 하려던 이강우는 직원의 갑작스러운 소리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무슨 소식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누군지 몰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문 관리센터 직원의 조인트를 깔 수는 없는 노릇.

이강우가 친절하게 말을 받았다.

“안대욱 부청장님이 유적 클로즈를 마치면 긴급하게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더 갑작스러운 말을 했다. 이강우는 여기서도 평상심을 유지했다.

“부청장님 번호 모르는데…… 스마트폰이 수중에 없으니까 잠깐 빌려주시겠습니까? 번호 찍어서.”

“곧바로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이강우는 결국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회의실?’

거듭되는 이상한 낌새에 이강우가 슬그머니 안중현에게 눈빛을 보냈다.

스윽!

안중현이 이강우 근처로 다가왔다. 대화에 끼지는 않았다. 그저 대화에 귀를 기울였고, 그의 등장을 눈치챈 이강우가 좀 더 대화를 끌었다.

“왜 회의실입니까?”

“영상 통화를…….”

“굳이 영상 통화를 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음성 통화는 안 되고? 그 긴급한 소식이 언제쯤 나온 겁니까? 유적 입장 후에?”

취조하는 듯한 이강우의 모습에 직원이 조금은 당황한 듯 말을 쉽사리 뱉지 못했다.

결국 직원은 다시 처음부터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이강우 팀이 유적 입장하고 보름 뒤에 안대욱 부청장이 직접 찾아와 이강우 팀이 유적 클로즈를 마치면 곧장 회의실로 보내, 자신과 화상통화를 가능케 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자세한 사정은 말단직원인 자신은 모른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안중현과 이강우는 동시에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안대욱 부청장이 직접 여기 와서 이야기를 전달할 정도라면 보통 사안이 아니라는 건데?’

‘화상 통화가 가능한 회의실에서 대화를 나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의미. 혹은 말뿐인 통화가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일 터.’

그런 그 둘의 조짐은 곧바로 현실이 됐다.

* * *

100인치짜리 큼지막한 모니터 안, 그 모니터를 꽉 채운 안대욱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존재감에 눈에 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수 김지홍, 그분이 현재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입원 중입니다.

그가 한 말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의 풍채에 이목을 집중시킬 여유가 없었으니까.

마법사들, 안중현과 이강우 그리고 김재범과 하선우 여기에 채유리까지. 다섯 명의 마법사들은 안대욱 부청장의 말에 침음을 흘렸다.

‘김지홍이 당했다? 진짜?’

‘이건…… 코엑스 테러보다 더 심각한 문제군.’

여기 모인 이들이 안대욱 부청장이 한 말의 의미를, 저의를, 무게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그런 충격에서 가장 먼저 회복한 건 이강우였다.

‘유적을 효과적으로 클로즈 할 수 있는 건 마법사. 그런 마법사가 당하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예정된 시나리오이기도 하지.’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강우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시나리오로 그려둔 덕분이었다.

‘방해가 시작됐어.’

그들이, 모래시계문의 주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들이 1단계 계획을 했다면, 2단계 계획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번 습격은 필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강우는 곧바로 질문했다.

“누가 습격을 했습니까?”

-위스프입니다.

“일개 테러 조직이 한국 정부 요인을 습격한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은 합니다. 한국 정부가 제 기능을 못 한다면.

한국 정부가 제 기능을 못 한다, 그 말은 곧 내부에 간자가 있다는 의미.

여기서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채유리마저 상황을 파악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사태의 심각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겠어.’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 * *

이강우는 두 눈을 감은 채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 앉아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하루의 피곤을 씻는 모습.

하지만 지금 이강우는 피로가 씻기기는커녕, 고민으로 머릿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당하다니.’

안대욱이 전달해준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비수 김지홍, 멜트 드래곤을 상대로도, 신기루호랑이를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던 검호(劍豪)가 습격을 당했다.

그 누구도 아닌 테러리스트 조직 간부에게 습격을 당했고, 심지어 부상을 입고 입원 중이라고 한다.

솔직히 이강우는 김지홍이 당하는 모습, 그 자체마저도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골치 아프게 됐어.’

어쨌거나 김지홍의 입원이 세상에 미치게 될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일단 김지홍은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경호를 받는 사람이다. 좀 과장하면, 그는 대통령이 받는 수준의 경호를 받는다.

그런 그가 습격을 당했고, 부상을 입었다는 건, 대한민국의 경호 시스템에 구멍이 생겼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즉!

‘당장은 대통령 경호팀이 난리가 났겠군.’

그와 비슷한 수준의 경호를 받는 이들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안심할 수 없다는 거다.

앞서 말했듯, 김지홍의 경호는 대통령 수준에 버금가는 경호다. 그나마 비수니까, 6서클 마법사이자, 몬스터 사냥으로, 범인(凡人)의 기준으로 가늠할 수 없는 전투로 단련된 그니까 부상 그리고 입원으로 상황이 끝났을 뿐, 만약 평범한 인간이, 그저 지위만 높은 인간이 똑같은 습격을 당했다면 병원의 VIP룸이 아니라, 영안실에 입원했을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 권력자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할 거야.’

때문에 이번 사건으로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라 불리는 정재계 인사들이 정말 제대로 겁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지금의 시스템이 뿌리째로 바뀐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 수백 명이 죽어도 사회 시스템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고충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는 다른 세계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 권력자들이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면, 사회는 놀라운 속도로 변화한다.

‘사회 시스템이 바뀔 거야.’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강우는 짐작할 수도 없는 시스템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화로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게 테러를 저지른 이들의 시나리오의 한 부분일 테니까.

‘당장 직면한 문제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겠지.’

일단 시스템을 바꾸기에 앞서 권력자들 사이에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안전하다는 사실에 대한 불신.

불신이 싹을 트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실제로 안대욱 부청장이 화상통화로 대화를 요청한 것 역시 그 불신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변조가 쉬우니,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최소한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황, 그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심지어 안대욱 부청장이 본인 입으로 말했다.

‘마법청 고위 관계자가 정부 고위 관계자 및 길드 관계자를 쉽사리 믿지 말라는 말을 하다니.’

쉽사리 주변의 세력과 권력자를 믿지 말 것.

여기에 하나 더.

‘유적 사냥에 당분간 나서지 말 것.’

안대욱 부청장은 이강우와 그가 이끄는 포식자 팀의 유적 사냥 자제를 부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모래시계문과 함께 제거당할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유적 사냥을 위해 모래시계문을 넘어간 마법사들이 모래시계문과 함께 사라지는 최악의 시나리오 말이다. 만약 그런 사례가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마법사와 마법청 사이에도 불신이 싹을 피울 것이다.

이미 이강우뿐만이 아닌 제법 서클 개수가 되는 마법사들에게 유적 사냥 자제 통보가 갔을 것이다.

여기에 겁먹은 높으신 양반들은 테러 소재가 됐던 모래시계문에 대한 관리 강화를 요청할 것이다. 검찰, 경찰, 군대…… 모든 권력을 동원할 것이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공생 관계였던 크루와 유적 암시장은 초토화가 될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말이다.

‘초토화될 리가 없지.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뿐.’

하지만 크루 출신인 이강우는 절대 크루와 암시장이 뿌리 뽑히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제까지는 암묵적인 공생을 통해 크루나, 암시장 자체가 물밑, 얕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정부의 관리와 감독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탄압이 계속되면 얕은 곳이 아니라 아주 깊숙한 곳으로, 정부와 관리와 감독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럼?

문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쌓인다.

크루나, 암시장 관계자들은 애초에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세상의 평화와 안녕 따위를 신경 쓸 리 없다. 자기 보신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가 그들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이 모르는 곳에 쌓인 문이 아무도 모르는 순간 폭발한다. 그럼 정부는 다시 더 강한 탄압을 할 테고, 누르는 만큼 더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갈 것이다.

그 후에는?

‘세상이 전쟁터가 되겠군.’

세상이 곧 유적이나 다름없는 전장이, 몬스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 이게 그들이 원하는 시나리오군.’

이강우가 감았던 눈을 떴다.

* * *

목욕을 마친 이강우는 거울을 바라봤다. 그동안 제대로 이발을 하지 못해 덥수룩해진 머리칼은 지저분했지만, 그래도 면도를 한 덕분에 얼굴은 깔끔해졌다. 이강우는 그 허여멀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군.’

거울 속에 보이는 것들, 자신의 머리 위에 뜬 다섯 개의 고리와 초록빛 문자들.

오직 이강우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순간.

‘붉은 뿌리.’

이강우가 단어 하나를 곱씹었다. 거울에 비친 이강우의 얼굴이 굳었다. 표정 자체가 얼굴에서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지?’

성족공룡과의 전투 과정에서 절망의 태양을 쓰며 이강우가 그 힘에, 권능의 위대함에 취할 무렵, 이강우는 저도 모르는 행동을 했다.

‘왜 내가 그랬지?’

써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는 넘어갈 수 없다.

이강우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만졌다. 피부 너머로 단단한 두개골이 느껴졌다. 이윽고 과거 불사황제의 손가락이 미간을 뚫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한 퍼포먼스는 아니겠지.’

불사황제가 꿈에 나올 때마다 불사황제는 이강우에게 무언가를 주고 갔다. 정보, 권능, 가능성…… 어쩌면 이미 불사황제는 이강우란 그릇 안에 원하는 바를 다 채웠을 수도 있다.

그저 이강우의 능력이 부족해서, 자각이 부족해서, 자신의 그릇 안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순 없다.

만약 그렇다면…….

‘불사황제, 당신은 내 몸을 노리는 건가? 나란 그릇에 당신을 담을 생각인가?’

불사황제는 이미 준비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이강우를 차지할 수 있는 준비.

‘불사황제…… 나는 결코 당신을 믿을 수 없어.’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다.

불사황제는 세상의 평화, 인류의 존립, 세계의 안녕…… 그런 걸 꿈꾸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인류를 위협하는 미지의 적들이 아니었다면 본인이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이 되었을 존재다.

그런 그가 이강우를 향해 하염없는 호의를 가졌을 가능성은 없다.

그저 필요하니까 쓰는 거다. 인간이 그릇을 쓰면서 필요성은 느끼되, 그릇에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깨지지 않게 잘 다루는 것처럼, 불사황제에게 이강우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이강우는 거울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망치로 못을 두드리듯, 머리로 거울을 두드렸다.

‘나를 노리는 적이 있다.’

불사황제의 힘을 가진 이상, 불사황제와 대적하는 자들이, 세상의 혼란을 원하는 자들이 이강우를 노릴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강우는 자신의 세상을 위협하는 그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나를 노리는 자의 힘이 필요하다.’

동시에 불사황제, 그 역시 이강우를 탐내고 있다. 이강우의 육신과 정신을 필요로 한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견고하다.

‘이이제이.’

그야말로 오랑캐로 오랑캐를 상대하는 격이다. 물론 이 전쟁 속에서 승자가 누구든 피를 보는 건 이강우가 될 것이다.

‘빌어먹을 인생이군.’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바라봤다.

최악의 상황. 그동안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이강우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 힘겨울지도 모르는 운명이 주어졌다.

하지만 거울을 바라보는 이강우는 울상 따윈 짓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 이런 인생을 가지고 푸념을 뱉고, 자기 비하를 하고, 우울증에 빠지는 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반대.

‘그래, 네 힘의 포로가 되어주마.’

모래시계문의 주인들, 불사황제.

두려워한다고 봐줄 놈들이 아니다. 용서를 구한다고 용서를 해줄 자들도 아니고, 봐달라고 사정한다고 봐줄 놈들도 아니다.

그럼 굳이 구차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불사황제, 어디 한번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줘라. 내 그릇 안에 최고의 음식을 채워 봐.’

“붉은 뿌리든, 절망의 태양이든 뭐든 한번 집어넣어 봐!”

이강우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외쳤다.

* * *

유적 사냥에 따른 정산이 끝났다.

일단 아티팩트 중 확보한 5서클 아티팩트 1개와 4서클 아티팩트 2개를 제외한 3서클 이하 아티팩트는 한국 정부에 팔았다. 팔아치운 아티팩트의 숫자가 15개였다.

정산 과정에서 나름 난관은 있었다.

마법청 입장에서는 문 관리센터 내에 모래시계문을 클로즈 한 유적 사냥꾼을 상대로 마법 아티팩트를 구매한 경력 자체가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그 협상을 통해 70억 원이 넘는 이익을 거두었다.

계산표를 받아든 김재범이 한마디 했다.

“그동안 내가 한국 정부에 벌어다 준 거 다 합쳤으면 대학교는 힘들더라도 내 이름을 딴 고등학교 한 채는 지었겠네.”

여기서 세금도 뗐다. 세금으로만 30퍼센트가 넘는 돈이 나갔다. 김재범이 다시 한마디 했다.

“대장, 미국은 세금 얼마나 뗍니까? 젠장, 이거 더러워서…… 우리 다음 멤버는 세무사로 합시다.”

어쨌거나 적지 않은 돈, 이강우는 그 돈을 머릿수대로 나눴다. 총꾼, 마법사 상관없이 나눴다.

이 부분에서 놀란 건 총꾼들이었다.

세금을 제하고도 두 당 5억 원 가까운 돈이 배분됐다. 나름 안중현을 따라서, 즈믄나래 소속으로 총꾼들 중에서는 최고 대우를 받았던 그들이지만, 그래도 쉽사리 만지기 힘든 돈이 현금으로 들어온 셈.

그 부분에 대해서 이강우는 분명하게 말했다.

“돈은 공평하게 나눕니다. 마법사들을 위해 바칠 각오를 한 목숨값을 대신해 주기엔 부족하지만.”

총꾼 출신인 이강우다. 총꾼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이번 팀 포식자에 합류한 총꾼들이 순전히 돈 때문에 참가한 건 아니고, 돈 때문에 팀을 배신할 자들은 아니지만, 반대로 그들이 총꾼이 된 계기는 결국 돈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해도,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런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줄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돈에서 차별을 두는 것만큼은, 최소한 총꾼 출신인 이강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더불어 이강우는 현금이 급한 게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로드리게스 회장을 통해서 현금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로드리게스 회장이 잠잠하군. 내가 알아서 자랄 때까지 봐주겠다는 건가? 적어도 나한테 관심을 뗀 건 아닐 텐데.’

어쨌거나 돈을 공평하게 나눴고, 이 과정에서도 김재범이 한마디 했다.

“그 돈 말이야. 다들 후학 양성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지성의 양성을 위해 교육에 투자할 생각 없어?”

우스갯소리가 아닌 진심 어린 말이었고, 그 말에 의외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당장은 힘들지만, 자네가 재단을 만들면 내가 투자를 해주지.”

안중현, 그가 김재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의외의 소득을 얻은 김재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입니까? 안 선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제가 학교 재단 같은 거 만들면 돈 투자해주실 겁니까?”

“좋은 뜻을 위해 돈을 쓰는데 주저할 이유는 없지.”

“약속하는 겁니다.”

“그것보다 차라리 그렇게 돈이 급하면 하선우한테 돈을 빌리는 게 어떻겠나? 여기 있는 사람들 재산 다 합쳐도 하선우보다 많은 사람이 없을 텐데.”

김재범이 휙, 하선우를 바라봤다.

확실히 하선우는 마법사로 받는 돈 외에도 모델 등, 마법사 활동 외적으로 버는 돈이 엄청나다. 거기에 간간이 연예계 가십거리 기사를 보면, 하선우가 부동산 투자로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도 적잖게 들린다. 백억 대 빌딩만 두 채를 가지고 있다.

하선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재범의 시선에 옅게 웃었다.

그 미소…… 투자를 원한다면 해주겠는데 투자를 받으려면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수준의 굴욕은 감수해야 할 텐데?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재범이 얼굴을 팍 구겼다.

“젠장, 나도 모델을 하든가 해야지.”

어림도 없는 소리를 뱉는 김재범의 모습에 모두가 실소를 지었다.

그 상황에서 김수애가 이강우의 곁에 접근했다.

“저랑 결혼하신다면 아마 평생 돈 걱정은 없으실 거예요. 사랑은 낭만이지만, 결혼은 현실인 법이죠.”

정말 매력적인 유혹.

그 유혹 소리를 들은 채유리가 곧바로 이강우의 오른팔을 확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도 돈 많아!”

“어머, 그럼 누가 더 강우 씨를 위해 돈을 쓸 수 있는지 대결 한번 해볼까요?”

“흥!”

그 모습을 본 김재범이 마지막 한마디를 했다.

“젠장…….”

김재범은 울먹이고 있었다.

* * *

한 사내가 방 안에 누운 채 잡지를 보고 있었다. 잡지는 다양한 무기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 한 밀리터리 잡지였다. 사내는 잡지 내에 있는 여러 병기들, 강력한 무기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끼익!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듬직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사내가 등장했다. 사내는 러시아어로 침대에 누운 사내에게 말했다.

“보스.”

“말하도록.”

“마스터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사내가 잡지를 잽싸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사내가 비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식을 전한 사내가 곧바로 다가와 넘어진 사내, 볼코프를 부축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난 볼코프가 이를 콱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김지홍, 대단한 인간이군. 인사만 하러 갔는데 죽을 뻔했어.”

“상처가 심각합니다.”

부하의 걱정.

하지만 볼코프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편지만 도착했나?”

“상자와 같이 도착했습니다.”

“상자?”

“마스터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패잔병에게 선물이라니, 마스터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여리고 너그럽군.”

여기서 부하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꾹 참았다. 볼코프가 말하는 그 마스터를 본 적이 있는 부하는 마스터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서슬 퍼런지, 섬뜩한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왔을 때 거실에 있던 여러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각색.

다양한 인종이 그곳에 있었다. 여자도 있었다.

볼코프는 그들에게 말했다.

“쉬어.”

그들이 곧바로 자리에 앉았고, 볼코프는 거실을 가로지른 후에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방은 기괴했다. 거울로 된 방이었고, 거울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런 거울의 방 중심에 평범한 종이 상자 하나가 외로이 있었다. 상자는 개봉되어 있었고, 개봉된 상자 안에는 캔 음료 비슷한 것과 반지, 목걸이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편지가 있었다.

볼코프가 편지를 개봉했다. 곧바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볼코프가 사진을 봤다.

사진을 보고 편지 내용을 읽었다.

읽은 후, 볼코프가 그 편지를 자신을 부축해줬던 부하에게 건네줬다.

“다음 표적이다. 이름은 이강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도록.”

* * *

팀 포식자의 본래 계획은 한 달을 주기로 5등급 또는 6등급 유적 사냥을 꾸준히 치르는 것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많은 마력을 섭취하는 게 이강우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마법청 부청장이 유적 사냥을 자제해줬으면 한다고 화상통화를 통해 말해줬다.

그런 상황에서 안대욱 부청장의 디지털 면전에 대고, 세상 정세는 내 알 바 아니니 모래시계문이나 준비해주시죠?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불어 마법청의 협조 없이 한국 내에서 7등급 이상의 유적 사냥을 진행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약 없는 자유시간이 주어진 셈.

김재범과 하선우 그리고 김수애는 제주 문 관리센터에 남겠다고 했다. 나머지 총꾼들 역시 제주도에서 잠시 지내다 일이 생기면 떠날 거라고 말을 해줬다.

그렇게 남은 세 명만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지금 이강우의 옆좌석에는 안중현이 앉아 있었다. 묘한 광경이었다. 이강우가 연인인 채유리를 다른 곳에 앉힌 채 안중현을 옆에 앉히다니? 물론 이유가 있다. 적어도 안중현이 이강우와 채유리의 애정행각을 막기 위해 이렇게 앉은 건 아니니까.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대화를 위해서 이렇게 앉았다.

“예전 동료하고 통화를 했네.”

그 중요한 대화가 시작됐다.

“예전 동료라면 경찰분이시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크루와 모래시계문 암시장을 뿌리 뽑기 위해서 인력을 증원하고, 아예 전담부서를 만든다는군.”

“코엑스에 그 난리가 났을 때도 만들지 않던 전담부서를 마법사 한 명이 입원하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다…… 평범한 시민들 발등에 불 떨어질 때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는데 자기들 발치 근처에 불똥이 떨어지자, 기겁하는 꼴이라니, 그리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군요.”

“원래 세상일이란 게 그런 거지. 솔직히 이런 식으로라도 지금 일어난 문제를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크루 출신인 자네가 보기에 크루와 모래시계문 암시장을 뿌리 뽑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정부가 전담부서를 만드는 것만으로?”

이강우는 대답 대신 비웃음을 지었다.

가능하냐고?

‘가능하긴 개뿔.’

그럴 리가 없다. 그걸 뿌리 뽑을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는 범죄 청정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

“더 음성적으로 변하겠죠.”

여기서 안중현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때문에 이 모든 게 위스프, 그들의 노림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안중현, 그 역시 작금의 상황이 가지는 중대함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나름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 이강우와 거의 근접한 결과까지 내놓았다.

‘역시 그 정도까지 추론이 되는구나.’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위스프의 테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네.”

“예?”

안중현은 좀 더, 이강우가 보지 못한 것을, 더 깊고 더 넓은 것을 봤다.

“이미 벌집을 들쑤셨는데 당분간은 몸을 사리지 않을까요?”

“놈들은 테러 집단이지. 그들은 목적을 위해 공포를 조성하지. 그러나 지금 그들은 공포만 조성했을 뿐, 자신들의 목적은 그 누구에게도, 정부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이강우가 후우, 짧게 한숨을 뱉었다.

“……진행 중이군요.”

“코엑스 테러 사건을 통해 일반인들 사이에 공포감을 조성했고, 김지홍을 습격하면서 권력자들 사이에 공포감을 조성했지.”

솔직히 시민이 아무리 죽어도 높으신 양반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상황의 변화로 인해 자신들이 보는 손해지, 남의 목숨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높으신 양반들이 위기감을, 자신들이 테러 집단의 타깃이 될 수 있고, 타깃이 되면 지금 상황에서는 목숨을 구하기 힘들다는 걸 인지했다.

상황이 달라지면, 과정도 달라진다.

“내가 전문적으로 심리학 같은 걸 공부하진 않았지만, 대개 이런 상황이 오면 의견이란 게 흑백으로 나뉘게 되네.”

흑백.

“위스프와의 전쟁을 선포하거나 혹은 타협을 하거나.”

공포 속에서 인간의 선택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중현과 함께하는 걸 택한 건, 내 최고의 선택이야.’

여기까지는 이강우도 예상치 못했다. 그저 말도 안 되고, 심각한 일이 벌어지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중현은 이강우는 감히 상상도 못 하던 요소를 추가했다.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네.”

“변수요?”

“올해 뭐가 있지?”

반문에 이강우가 다시 반문했다.

“뭐가 있습니까?”

“대선.”

아!

이강우는 탄식을 내뱉었다.

‘……대단하네.’

올해는 2022년,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잊고 있었다. 현실보다 유적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기니,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쨌거나 대선이 있는 해에 과연 한국 정계가 이번 사건을 두고 가만히 있을까?

‘이건…… 중요한 변수야.’

무조건 저울질을 한다. 중요 이슈로 끄집어 나올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계약을 하는 자들이 정치인이란 자들이니까.

“만약 위스프가 한국 정재계의 권력자와 손을 잡았다면, 이 시기에 이런 일을 터뜨리는 게 마냥 우연은 아닐 가능성이 높네. 물론 비약이 심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여기서 선거철 정치인들처럼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 말에 이강우는 침음을 흘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선이라니…… 어휴.’

상황을 보면, 한국 내에 위스프에 협조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 만큼 위스프가 정부 고위 관계자와 접점이 있을 가능성은 막연한 의심이 아니라, 당연한 추측이다.

이강우가 고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안중현은 더 하고자 했던 말을 그냥 그 자리에서 삼켰다.

‘여기서 더 골치 아픈 문제를 떠넘길 필요는 없겠지.’

* * *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안중현은 약속이 있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안중현은 먼저 떠나면서, 이강우에게 중요한 충고를 해줬다.

“마법청에 연락을 해서, 총을 지급받게. 마법사가 마법사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건 총이니까.”

“총을 가지고 다니면 불법 아닙니까?”

이강우의 반문에 안중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크루 소속 총꾼 출신인 이강우가 총기 휴대 불법을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개그나 다름없는 일.

한편으로는 안중현의 조언을 곱씹었다.

‘그래, 총이 낫지.’

마법사와 마법사가 싸운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마법으로 서로 싸우는 광경이 연출될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마법사를 상대로는 마법보다 오히려 총이 더 위력적이다.

총은 마법보다 빠르고, 위력적이고, 조작 역시 간단하며, 연사도 가능하다.

마법청 역시 이강우가 요청을 하면 충분히 총기를 지급해줄 것이다. 어차피 이강우가 총으로 소란을 피울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소란을 피우고 싶다면 총이 아니라 마법으로 부리면 될 테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오늘 계획을 수정했다.

‘쇠뿔도 단숨에 뽑아야 하는 법.’

가족부터 보고, 인사를 한 후에 즈믄나래 길드 본부로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마법청에 연락을 하고, 총을 받을 것이다. 마법사와의 전투, 마법 테러 조직 위스프의 일원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무기들을 지급받는 거다. 그게 기본이다. 이강우의 예상대로 위스프가 모래시계문 주인들이 만든 조직이라면, 그들의 위협이 언제 이강우를 덮칠지 모른다.

“유리!”

이강우가 채유리를 불렀다.

* * *

“마법청 본부로 가면 됩니까? 아뇨, 차는 보내실 필요 없습니다. 직접 가겠습니다. 아마 두세 시간쯤 걸릴 겁니다.”

통화를 마친 이강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잡은 운전대의 한가운데에는 말 한 마리가 힘차게 달릴 준비를 마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페라리.

이강우는 한 달 넘는 세월 만에 만져보는 애마의 감촉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 타지도 않은 차인데, 오랜 세월을 탄 것처럼, 운전대가 손에 착 감겼다.

이내 이강우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채유리를 바라봤다. 채유리는 담담한 눈빛으로 이강우가 언제나 차 구석구석에 놓아두는 초콜릿을 까먹고 있었다. 다람쥐처럼 초콜릿을 먹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최고급 스포츠카에 예쁜 여자친구를 옆에 태운 채로 드라이브.’

지금 이 광경, 생각보다 멋진 광경이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

이강우의 입가에 지은 미소가 깊어졌다.

‘역시 이게 맞아. 괜히 딴 눈을 팔 필요가 어디 있겠어?’

채유리가 싫을 리 없다. 싫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었어도 무시했을 것이다. 그 고백에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좋다.

외모를 떠나서 자신의 가족과도 친하게 지내는 그녀의 모습이, 그래도 나름 가족들 앞에서는 성깔 죽이고 조신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이강우가 위험하다 싶으면 성깔을 드러내며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 모든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해야 한다.

“유리야.”

“응?”

“날짜 한번 잡아서 유리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 생각인데, 언제가 괜찮을까?”

김수애의 밑도 끝도 없는 애정 공세에 제법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던 채유리다. 불안감도 없진 않을 터. 굳이 그 불안감을 더 키울 필요는 없다. 확실하게 말뚝을 박는 거다.

“응?”

그 순간 채유리가 손에 집고 있던 초콜릿을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초콜릿이 매트 위에 떨어졌다. 이강우가 그런 채유리의 낌새를 곁눈질로 살핀 후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래도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부모님에게 최소한 얼굴이라도 보여드리는 게 예의잖아?”

“어…….”

채유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기다리던 말이다. 이강우가 알아서 자신과 김수애 중에 자신을 확실하게 택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쨌거나 이런 채유리의 반응은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조신한 척 연기를 하는 건 본적이 있어도, 이렇게 당황해서 대답을 머뭇거리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강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설마 내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건가?’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되새김질해봤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될 만한 말이야?’

하지만 딱히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채유리랑 연인으로 지내면서, 채유리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은 게 더 잘못한 일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게…….”

“그러고 보니 부모님 성함도 모르네. 직업도 모르고.”

“그게…… 아빠는 폰 만드는 게 직업이야. 맞아, 폰 만드셔. 이거.”

채유리가 말과 함께 이강우가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폰?”

채유리의 아버지가 무슨 직업을 가진 이강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이상한 직업이 나왔다. 물론 특별한 게 아닐 수도 있다. 폰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강우는 대충 넘겼다.

“어, 폰 만드셔. 그리고 지금 한국에 안 계실 거야.”

“그래? 그럼 연락드리고, 약속 한번 잡아야겠네. 당분간 유적 사냥 없을 때 인사드려야지.”

채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초콜릿을 입에 넣은 다음 입을 꽉 다물었다. 말을 하기 싫은 모양. 이강우는 그런 채유리의 모습에 실소를 지었다.

‘뭔가 밝히지 못할 게 있는 모양인데…….’

아버지의 직업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이강우에게 소개해 주기가 부담스러운 걸까? 아니면 다른 가정사가 있는 걸까?

‘아무렴 어때. 내가 무슨 대단한 재벌 집안 아들내미도 아니고, 오히려 유리가 나한테 아깝지.’

하지만 이강우는 의미를 두지 않았다. 채유리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하지. 생각을 마친 이강우가 엑셀을 좀 더 깊게 밟았다.

이 순간 이강우는 정말 우스꽝스러운 고민을 했다.

‘그런데 유리 부모님 뵈러 가는 자리에 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겠지? 아닌가? 가지고 들어가야 하나?’

정말 시답잖은 고민이었다.

* * *

2015년의 아프리카는 국경에 상관없이 지옥이었다.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에는 수도 없이 많은 모래시계문이 등장했지만, 그것을 처리할 역량을 가진 국가는 없었다.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혼란이 시작됐고, 정부가 그 혼란에 뒤섞이면서 제 기능을 못 하는 순간 혼란은 광기를 머금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위한다는 명분을 삼아 강대국들이 강력한 군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과거 세계대전 당시 강대국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듯이.

공짜는 없었다. 아프리카에 들어온 군대와 그 국가는 대가를 받아갔다. 아프리카에 잠든 무수히 많은 자원을 빼앗아갔다.

몇몇 이들이 그들을 규탄했지만, 규탄의 목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혼란의 땅이었고, 강대국의 약탈을 비난하는 작은 목소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몬스터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 묻혔다.

위스프는 그렇게 묻힌 부조리함의 희생양들을 거름 삼아 탄생했다.

당연히 위스프의 존재 의의는 부조리한 작금의 시대를 올바르게 고치고, 부조리함에 무릎 꿇은 이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아프리카만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아프리카와 비슷한 부조리함을 경험하는 국가들은 세계 곳곳에 넘쳐났다. 어느 순간 위스프는 부조리함에 대항하는 전 세계적 단체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위스프에 소속된 이들은 단순한 명분과 이익을 넘어,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다.

“타깃은 이강우. 잡을 수 있나?”

“잡겠습니다.”

“지원은 없다. 홀로 가서, 홀로 돌아오거나 홀로 죽는다.”

“상관없습니다.”

위스프는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는 정의다. 세상이 그들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건, 그 세상이 부조리함을 자행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위스프에 있고, 정의를 위해선 목숨 정도는 마땅히 바칠 수 있다.

이것이 위스프의 조직원들이 품고 있는 숭고한 이상이었다.

그게 위스프가 전 세계의 강대국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를 수 있는 저력이었다.

“제가 꼭 해내겠습니다.”

위스프,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테러 집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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